이정기 목사 2019-06-23

세상은 어디를 가나 온통 갈등과 분쟁으로 가득 차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지구촌 곳곳에서 분쟁의 소식이 들리고, 세계가 긴장 가운데 대립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보아도 여전히 남북의 긴장 관계는 계속되고 있다. 완전한 비핵화의 길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념의 대립으로 갈등의 골이 깊다. 가정들은 어떤가? 이혼율,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 교회들은 어떤가? 갈등과 분쟁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분쟁의 원인이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모두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교만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이다. 모든 죄의 출발점이 교만이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의 실패는 교만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사탄은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교만을 조장하여, 스스로 높아지게 하려고 힘쓴다.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 갈등이 일어났는가? 틀림없이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낮추고 내가 낮아지면 신기하게도 내 안의 갈등이 사라진다. 얼마나 낮아져야 하는가?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처럼 낮아지면 된다. 빌2:8-11절을 보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셨더니 죽기까지 복종하셨더니 하나님께서 높이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높이신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이셨다는 것이다. 얼마나 지극히 높이셨는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다.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앞에 꿇게 하셨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여기에 신앙의 위대한 역설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저마다 높아지려는 출세 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높아지려고 한다.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래서 분열과 다툼과 미움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달라야 한다. 어디를 가나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그러면 그곳에 언제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초대 한국교회는 지금보다 교회도 작았고 교인수도 적었다. 그렇지만 초대 한국교회는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있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웃을 끌어안고 열심히 섬겼다. 그 섬김의 현장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들의 거룩한 섬김이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교회는 많이 커졌다. 교인들의 숫자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힘을 잃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섬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서로가 높아지기 위해서 아웅거리며 싸우고 있고, 편한 자리, 존귀한 자리,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가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는가? 좋지 못한 교회의 모습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상은 더 이상 교회와 교인들에게서 감동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웃들에게 감동을 주기위해 특권을 포기해 본적 있는가? 자신을 위한 씀씀이를 줄이고 나눔을 실천해 본적 있는가?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 본적 있는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믿음의 공동체는 절대로 아름답게 세워질 수 없다. 특권을 누리기에 급급한 사람들을 통해 믿음의 공동체는 절대로 건강하게 세워질 수 없다. 희생하지 않고,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 내 삶을 보고, 이웃들이 절대로 감동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낮아지면 내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낮아지면 사람들이 나를 더 무시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아니다. 마음 놓고 낮아지라. 하나님께서 낮추신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다. 높이고 낮추시는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우리가 낮아지는 순간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아름답게 세워질 것이다. 유명한 에딘버러 대학의 제임스 심프슨은 마취제를 발명해서 온 인류와 의학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분이다. 이 분에게 한 제자가 질문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심프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라네" 이 겸손이 심프슨을 위대하게 했다. '나는 잘났다. 나는 잘 한다. 나는 능력 있다. 나는 의롭다' 여기에서 다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 '나는 죄인이다'라고 생각하고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육체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는 어떻게 했는가?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것들을 주를 위해서 배설물처럼 여겼다. 주를 위해서 기꺼이 낮아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노예가 되었다. 그런 그를 주께서 높여주셨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삼아주셨다. 하늘 나라의 대사로 삼아주셨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교만하면 스트레스도 열 배나 더 받는다고 한다. 교만하면 병도 더 많이 생긴다고 한다. 배운 척하고, 잘난 척하고, 있는 척하고, 아는 척하면, 이 세상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모든 인간은 교만이라는 병에 걸려 있다. 예외가 없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낮아져야 한다. 목사도 낮아져야 하고, 성도도 낮아져야 하고, 젊었을때도 낮아져야 하고, 나이들어서도 낮아져야 한다. 낮아지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낮아지면 하나님이 높여주신다. 낮아짐이 축복이다. 낮아짐을 실천함으로 삶에 모든 갈등과 다툼이 사라지고, 높여주시는 축복 누리며 살자.

정용구 선교사 2019-06-20

6월이 되면 7,8월 여름방학을 통해 단기선교를 나가려는 팀들의 본격적인 준비가 되는 시기이다. 한국에서 선교단체와 교회 사역자로서 팀원과 인솔자로 단기선교를 갔던 적도 있었고, 단기선교에 대한 훈련 책자를 발행하여, 전국으로 '단기선교 세미나'를 개최한 적도 있었고, 선교사가 되어서 말로만 듣던 단기선교팀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다보니 이제 조금 단기선교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많은 텔레비전의 프로그램들 가운데 '여행' 프로그램들이 아주 깊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말은 시청자들이 여행에 대한 욕구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핸드폰에도 여행에 대한 앱도 상당히 많고, SNS 상에서도 쉽게 여행 정보나, 자료들을 얻을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러다보니 이미 해외여행을 다녀 온 사람도 너무 많고, 영어를 비롯한 현지어를 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이것이 어려우면 핸드폰을 통한 번역기 서비스나, 여행자들이 남긴 현장 정보를 쉽게 얻고, 항공권과 숙박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터넷이나 해외여행 정보가 빈약한 당시에는 해외를 나가려면 '선교사'가 아주 좋은 안내자였다. 선교지에서 어렵게 살아남은 특별한 경험도 배울 수 있고, 현지어를 구사하면서 삶을 통해 경험된 생생한 선교사의 삶은 식상한 여행정보와 비교할 수 없는 고급 정보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선교지에 대한 너무나 많은 정보들을 쉽게 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선교사보다 현장 정보를 더 많이 공부해서 오는 단기선교팀도 만나게 된다. 더불어 선교사들도 선교현장의 비자제한으로 장기적 거주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심한 지역은 선교사의 사역 패러다임을 단기현장 방문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많고, 미국 선교사역의 경우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러한 변화가 감지되어 진행되어 왔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들이 단기선교팀과 현장 선교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까?"를 잘 생각해야 한다. 기존에 하던대로 하는 단기선교를 좀 내려놓고, 좀 더 많은 생각과 사역 정책과 전략을 연구하여, 이벤트성 단기선교사역이 아닌, 의미가 있고, 현장에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되고, 이를 통해 참가자들이 계속적으로 선교현장과의 접촉점으로 이어지는 선교동원을 위한 중요한 사역으로서 단기선교로 제대로 가야 한다. 제대로 가려면, 제대로 훈련해야 하고, 현장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들도 제대로 훈련을 받고, 준비하고, 팀을 받아야 한다. 단순방문과 현장경험과 일회성 사역으로 둘러보기식 사역은 선교현장에서 어렵게 사역기반을 구축한 선교사를 선교현지에 쉽게 노출 시키고, 막대한 재정 지출의 반복으로 귀한 선교적 자산과 동력을 동시에 잃게 된다. 특히 짧은 기간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사회적 기반이 잡히지 않은 선교지에서 무리한 이동과 사역으로 여러 위험을 자초하기도 하고, 기독교 선교에 적개심을 가진 세력들에게 공격목표로 인식이 되어 테러 및 납치의 원인을 제공하게 될 수도 있다. 쉽게 갈 수 있는 해외여행의 분위기에 단기선교도 쉽게 준비하고 가게 되면, 너무나 아까운 선교동력도 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선교사에게도 큰 힘을 주고, 참가자들에게도 분명한 선교사역에 도전을 하고, 짧지만 분명한 주님의 선교적 부르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귀중한 단기선교사역이 이번 여름에 진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다. 많은 수를 차지했던 청년들이 줄어들었다. 아니 이제 청년들이 단기선교팀을 통해서 해외를 나가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알아서 나가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단체의 통제를 받고,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는 자유 가운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대적 흐름을 선호한다. 또 좀 나이가 들은 그룹들이 단기선교를 찾는다. 아무래도 인터넷으로 혼자 이것저것 알아보기 보다는 그래도 선교사에게 한꺼번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룹들은 아직도 선교사를 많이 찾는다. 그럼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보고 쉽다. 단기선교에서 선교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들은 단기선교를 왜 가는 것일가?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을 하지 않고 이번 여름 단기선교를 준비한다면, 막대한 예산과 수고로 진행되는 단기선교가 자칫하면 일반인들이 가는 여행과 다를바 없는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선교사는 현장 정보를 알려주는 안내자로만 그쳐진다면, 본질에서 많이 떠난 단기선교가 될 것이다. 단기선교 팀 교육을 통해 만족도가 높은 팀 일수록 선교현장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현지인들과의 다양한 접촉, 현지에서 만난 선교사를 통해 경험된 '선교사로서의 삶'에 대한 도전을 많이 이야기 했다. 반면 선교현장에도 겪었지만 여러 가지 사회적 기반이 약한 선교현지에서 단체를 인솔하고, 이를 위한 숙식과 사역을 계획하여, 이동하면서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사람이 움직이는 일이라 항상 변수가 많다. 그러다보니 사고도 많이 일어난다. 특히 짧은 기간 무리하게 일정을 잡거나, 요청을 받아서, 이를 소화하려다가 사고가 나거나 선교사가 탈진을 하거나, 더 큰 어려움을 당한 경우도 적지 않게 보게 되었다. 지금 선교현장에서 장기거주를 위한 비자 받기가 쉽지 않고, 이로인해 추방 및 비자거부 선교사가 많이 늘어나는 시점에서 단기선교는 자칫 선교사를 현장에 노출 시키는 위험한 사역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어려움을 당한 선교사와 선교지를 돕는 아주 중요한 사역의 도고로 쓰일 수 있는 중요한 시점에 처해 있다. 그러기에 기본에 충실한 가운데건강한 사역 계획을 세우고, 잘 훈련해 전략적으로 사역을 해야만 하는 중요한 시기에 놓여있다. 단기선교를 위해 집중 훈련이 시작되는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점검하고, 훈련하고 준비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허성욱 이학박사·밝은빛명광교회 교육목사 2019-06-19

물은 어디서나 있을 수 있다. 공중에 떠 있기도 하고, 지면을 덮고 있기도 하다. 아니면 지하에 묻혀 있기도 한다. 모양도 액체 상태이거나, 고체 상태는 물론 기체 상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한 곳에 멈춰 있을 줄도 알고 흘러내릴 줄도 아는가하면 하늘로 올라갈 줄도 안다. 공중에서는 수증기로 구름으로 공기의 흐름을 따라 자유자재로 하늘을 누빈다. 지하에서도 갑갑해 하지도 않고 조급해 하지도 않는다. 조용히 스며들기도 하고 용솟음치기도 한다. 지면에서는 실개천이 되기도 하고, 큰 강이 되기도 하고, 넓은 바다를 이루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빙산의 모양으로 떠다니기도 하고 햇빛을 받아들여 수생식물이 물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허용한다. 물은 1기압, 0℃에서 응고를 시작해 얼음이 되는데, 물이 얼면 그 부피가 늘어난다. 그것은 얼음 결정 속에서 물 분자가 수소결합에 의해 인규석형(鱗硅石型) 구조를 띄면서 물 분자 사이에 상당한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음은 물보다 가볍고, 물 위에 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의 특별한 섭리요, 은혜이다. 만일 얼음이 물보다 무겁다면 얼음이 어는 그 순간 물 아래로 가라앉아 추운 지방의 모든 물은 다 얼어 붙어버려 수생생물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얼음 아래의 물은 얼지 않아 수생생물을 보호할 수 있다. 또 물은 여러 가지 물질을 잘 녹여 포용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현상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살아가는 기본질서를 제공해준다. 또 바닷물에는 소금과 같은 여러 가지 고체성분이 포함돼 있으므로 태양에너지에 의한 물의 증발이 심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바다가 순수한 물로 되어 있고, 물이 소금과 같은 물질을 잘 녹이지 않는다면 물은 매우 격렬하게 증발돼 지구는 이미 사막이 돼 버린 지 오랠 것이다. 또한 물은 100˚C에서 끓어 수증기가 된다. 보통 물질의 끓는점은 분자량이 커지면 증가한다. 그런데 물은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화합물보다 끓는점이 높다. 만약 물이 분자량이 비슷한 다른 화합물과 거의 비슷한 끓는점을 가진다면, 물은 상온에서 기화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구상의 모든 물은 다 증발돼 버릴 것이다. 여름에 물 한 잔을 마시면서 우리는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하고는 “어! 물맛 좋다”라고 말한다. 이런 물맛은 물속에 녹아 있는 광물의 성분에 따라 결정된다. 칼슘·칼륨·규산 등이 들어 있으면 물맛이 좋고, 마그네슘·황산·이온·염소 등이 녹아 있으면 물맛이 나쁘다. 물의 어는 점, 끓는 점, 용해능력, 물 맛 등의 특성에서 우리는 물이 스스로 자연적인 방법으로 존재하게 됐다고 볼 수는 없게 된다. 물이 누군가의 설계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이것이 물리학적 결론인 동시에 창세기 1장 1절의 선언이다. 우리는 70년 평생에 약 60톤의 물을 마시고 약 40톤을 배설하고 12톤의 땀을 흘리며, 그 나머지는 다른 방법으로 배출한다. 물이 우리에게 이렇게 소중한 것이기에 노아 당시 하나님께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것 같다(‘백과사전’과 박택규의 ‘생명의 신비’).

김명전 GOODTV·데일리굿뉴스 대표이사 2019-06-18

미·중 무역전쟁 파장이 전세계로 확산하고 있다. 크리스튼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IMF블로그에 쓴 글이다. "미·중 양국이 예고한 관세보복이 진행될 경우 내년 전 세계국가들의 국내총생산(GDP)이 4500억 달러(약530조원) 감소할 수 있다." 이 규모는 "세계 GDP를 0.5% 포인트 끌어 내릴 것이다." 미·중 전쟁은 무역을 넘어 선지 오래다. 첨단기술, 금융, 국방 등 전 산업과 해양을 포함한 영토 패권경쟁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특징은 총칼로 겨루는 전쟁이 아니다. 경제력 등 국가의 총체적 역량을 동원해 소프트파워를 도구로 펼치는 '뉴워(New War)'다. 그래서 전쟁의 진행과 결말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능하고 현실성 있는 최선의 대응책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미·중의 과거에서 미래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세계무대에 등장한 배경과 G2 부상을 복기해 보자. 중국은 1978년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개혁을 표방하며 세계시장에 개방의 신호를 보냈다. 다음 해 1979년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중국식사회주의 시장경제 채택을 위한 탐색의 시작이다. 미국은 국교 정상화 이후 대중국 무역에서 최혜국대우를 부여했다. 미국의 계산은 공산주의 보루를 해체함으로써 체제경쟁의 마감이다. 더불어 경쟁력 있는 과학기술과 자본으로 거대한 중국시장으로부터 경제적 실익도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1982년 중국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옵서버자격을 얻었다. 5년 여 기간의 실험적 적응기를 거쳐 1986년에는 IMF에 가입하고 세계무역기구(WTO)문을 두드렸다. 동시에 국제기준에 맞추어 시장 지향적인 개혁정책도 추진했다. 1990년대, 관세장벽을 완화하고 외국자본의 직접투자도 과감하게 허용했다. 그리고 2001년, WTO가입 신청 15년 만에 143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세계경제질서 편입이다. 중국경제와 세계경제질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대사건이다. 이때 중국의 GDP는 세계 6위다. 당시, 국제사회의 이목은 중국에 집중되었다. 세계무역질서의 순응자(price taker)로 안착할지, 아니면 불안정을 일으키는 이단아(spoiler)가 될지 염려 때문이다. WTO가입 초기는 순응자의 위치를 지키는 모습이었다. 그런 가운데 경제력이 빠른 속도로 커졌다. G4(미국,EU,일본, 중국)를 거쳐 G3(미국, EU, 중국)로 진입했다. 이때까지 대외전략은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2010년,중국이단일국가로서 일본을 추월하고 GDP 세계2위로 부상했다. WTO가입 10년 만이다. 세계 시장을 무대로 매년 평균 10%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우려했던 대로 G2중국은 자본주의 시장질서에 반하는 행보를 서슴 치 않았다. 국영기업의 폐쇄적 경영, 위안화 평가절하에 의한 수출주도정책, 초저가 가격경쟁, 정치적 목적의 희토류 수출규제 등 반시장적 정책 행보를 보였다. 경제규모에 걸 맞는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눈총을 받게 되었다. 2012년 시진핑 주석의 시대를 맞았다. 국가비전으로 중국몽(中國夢)의 실현을 내걸었다. 대외정책은 분발유위(奮發有爲)를 표명했다. 드러내지 않으며 힘을 키우던 도광양회에서, 힘을 드러내며 도약하는 대전환이다. 시진핑의 중국몽은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해 21세기를 선도하는 강국의 꿈을 목표로 한다. 중화민족주의가 바탕이다. 그 대표적인 정책이 ‘중국 제조2025’와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다. 전자는 중국이 첨단 과학기술 등 제조분야에서 2025년 까지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 하겠다는 계획이다. 후자는 중국 내륙과 해상, 그리고 주변국을 연결하는 신 실크로드를 건설이다. 경제협력과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영토를 만드는 것이다. 현재 100여 국가와 국제기구가 참여하고 있다. G2를 넘어 G1을 향한 대장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CNBC방송 인터뷰에서 중국제조2025에 대해 "중국이2025년 까지 훨씬 더 강해지고 지배적이 된다는 의미"라며 "나(미국)에게는 너무 모욕적이고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이 전쟁의 배경이자 실체다. 트럼프 대통령만의 생각일까? 아니다. 중국이 세계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 이미 예견된 전쟁이다. 오래된 미래나 다름없다. 오히려 전쟁 시작이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수습에 리더십이 집중되면서 많이 늦어졌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 와중에 한국의 피해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이제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우리의 대응과 선택만 남았다. 답은 명료하다. 위기상황에 대한 국민적 공감형성이 시급하다. 더불어 정치, 경제, 노동 등 각계의 지도자들이 위기 극복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할 때다. 내부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 채 미·중 전쟁의 파고를 넘을 수 없다.

신동식 목사 2019-06-16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들었던 이름은 이후 모든 신앙인들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살겠다는 고백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서 늘 반복되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로 돌아선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전에 추구하였던 삶의 목적에서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선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돌아섬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돌아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의 가치입니다. 돌아섬은 중생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중생은 새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새 생명의 특징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선 사람을 의미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이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새로운 생명을 가진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이렇게 새 생명을 가진 자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선 사람을 의미합니다. 돌아섬은 회심과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심은 일생에 한번 밖에 오지 않습니다. 오직 한 번의 회심이 있습니다. 이 회심으로 새 생명을 가진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회심한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저항합니다. 죄를 미워합니다. 죄와 싸웁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자신의 영적인 성숙을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죄를 죽이는 일과 영적인 성숙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회심하였다는 열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로 돌아섰기에 다시금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를 작정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죄에 대한 회개를 감당합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죄에 대하여 날마다 기도합니다. 회개는 회심한 그리스도인의 열매입니다. 회개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회심한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관계없이 늘 기도하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죄 용서를 받았으니 더 이상 죄에 대하여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에서 짖는 죄에 대하여 말마다 회개 할 것을 말씀합니다. 사실 회개는 죄 용서를 받는 것뿐만 아니라 회개한 자에 대하여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일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로 돌아섰다면 이제는 예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뒤에 있는 일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러나 돌아서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여전히 세상에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세상의 가치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예수 믿음이 오직 개인적인 부와 평안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죄에 대한 논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동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열심히 빈약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를 죽이는 일보다 개인적으로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짜증을 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자 하는 열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활을 간섭 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불만족적합니다. 돌아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안에서 주어지는 평안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를 세우는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합니다. 항상 자신의 시간이 되는 한계 내에서만 봉사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열심히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이 필요만 채우면 됩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돌아섬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자리에 서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광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돌아섬 없는 종교인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정재영 기자2019-06-11

우리 사회에서 혐오 표현이 난무하고 있다. 2010년 이후 일베 등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 촉발된 혐오 논란이 최근 들어서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급속하게 번져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심각한 혐오 표현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에 여성 혐오가 크게 이슈가 된 이후에 혐오 표현은 양성 문제만 아니라 성 소수자에 대해서 매우 노골적이고도 인격모독적인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장애인과 국내 거주 외국인 등의 사회적 소수자 뿐 아니라 자신의 정치 신념이나 사회 이념과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혐오 표현은 거의 모든 사회 부류의 사람들에게 번져서 사용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개신교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성애자와 같은 성 소수자에 대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기대어 혐오 표현을 하는가 하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최근에는 특히 이슬람교에 대해서 반성경적이라고 비난하며 혐오 표현을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과 다른 정치 신념이나 사회 이념을 가진 사람에게도 성경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서 반성경적이라는 덫을 씌우기도 한다. 신앙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굳건한 신념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교계에서 사용되는 혐오 표현은 자신의 신념에 대한 정당화 기제로 작동하며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조차도 약해서 더욱 문제가 된다. 여기서 혐오 표현은, '어떤 개인·집단에 대하여 그들이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들을 차별·혐오하거나 차별·적의·폭력을 선동하는 표현' 이라고 정의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혐오 표현은 사회적 소수자에게 해당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여성 혐오 표현은 존재하지만 남성 혐오 표현은 조재하지 않는다. 남성은 사회적 소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개독교'는 혐오 표현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는 소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혐오 표현은 ‘영혼의 살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주는 일임에 틀림없지만 이것을 법으로 규제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으로 갈린다. 자칫 표현의 자유라고 하는 시민 사회의 주요 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무하는 혐오 표현을 방치하게 되면 사회 갈등은 더욱 부추기게 되고 그 피해자도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게 될 것이므로 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시민 의식을 높임으로써 혐오 표현을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개신교인의 혐오 표현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최근에 실시한 혐오 표현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은 상당히 널리 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응답자의 69.4%가 혐오 표현 접촉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개신교인은 비개신교인보다 ‘온라인/모바일 뉴스와 댓글’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서 혐오 표현을 접촉한 경험이 더 많았다. 또한 전체 응답자 중에서 ‘종교기관/모임’에서 혐오 표현을 접촉한 경험이 23.2%로 낮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60대는 종교기관/모임에서의 접촉 경험이 모든 연령대 중에 가장 높게 나와서 노년층의 종교 모임에서 혐오 표현이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혐오 표현의 대상자는 ‘정치적 반대자’, ‘여성’, ‘성 소수자’ 순으로 높았다. 개신교인들의 경우, 전체적으로는 비개신교인들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신앙적 요인이 작용하는 성 소수자, 이슬람교인에 대해서는 혐오 표현 접촉 경험도 많았다. 이것이 혐오 표현이 아니라는 응답도 더 많아서 이들에 대한 비난이 정당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중직자나 신앙단계별로 4단계인 그리스도 중심층으로 갈수록 혐오 표현이 아니라고 응답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났다. 그리스도 친밀층(3단계)과 중심층(4단계)에서 ‘성 소수자’와 ‘이슬람교인’에 대한 혐오 표현을 한 경험도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긍정적인 결과는 개신교인은 비개신교인보다 타인에 대해 혐오 표현을 한 경험이 약간 적었고, 특히 그리스도 중심층에서는 기독교 입문층의 절반 수준으로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이 혐오 표현을 한 이유에 대해서 비개신교인들에 비해 합리적이거나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응답이 적고 그냥 싫은 느낌이 들어서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성소수자, 장애인, 저소득층, 노인에 대한 응답에서 보면 사례 수가 적기는 하지만 개신교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기보다 개인적인 차원과 효율성의 측면으로 바라보는 경향을 드러내서 사회 문제를 이해하는 태도가 교정돼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혐오 표현은 출석 교회와 교계에서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일반 사회 영역에 비해 다소 낮기는 하지만, 48.4%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리스도 친밀층’에서는 60% 넘게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계에서의 혐오 표현에 대해 기독교 입문층과 그리스도 인지층에서는 사회에서 보다 더 많이 한다는 응답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 교회 문화에 익숙하지 않거나 깊게 편입되지 않은 부류에서는 교계에서 혐오 표현하는 것으로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출석 교회에서의 혐오 표현은 ‘목사/전도사’(66.9%)와 ‘중직자’(55.1%)로부터 경험했다는 응답이 상당한 비율로 나타났다. 교인 구성에서 목사/전도사의 비율이 매우 적고, 중직자도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두 부류가 그 만큼 영향이 크고 혐오 표현을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교회에서는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혐오 표현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한 교계에서의 성찰이 요구된다. 서로 배려하는 사회 혐오 표현은 하는 사람은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더라도 그 말을 듣는 대상자에게는 크나큰 상처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혐오 표현이지 혐오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고 스스로 통제하기 어렵지만 그것을 말이나 행위로 표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감정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이지만 표현은 사회적 행위이고 사회 문제가 된다. 이러한 혐오 표현이 교계에서도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고, 심지어 목회자나 교회 중직자로부터 많이 경험한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혐오 표현에 매우 무감각하고 이를 소홀히 여기고 있음을 알려준다. 흔히 혐오나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특정한 사회적 ‘표준’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멸시와 배제의 대상이 된다. <혐오 사회>의 저자인 카롤린 엠케는 이러한 ‘표준’이라는 믿음 자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에 대한 맹신이자 폭력적인 편견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다양한 사례를 바탕으로 편견이 개개인의 다양성을 지우고, 집단적 편견을 덧씌워 혐오하거나 증오해 마땅한 존재로 만들며 편견에 근거한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행위를 벌인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혐오해 마땅한 이유 같은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의 딜레마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절대적인 ‘표준’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특히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성 소수자나 이슬람교에 대해 더욱 그러하다. 특정 행위가 죄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것이 죄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특정인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함부로 말할 권리는 없을 것이다. 특히 대상자가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매우 무례하고 폭력적인 행위이다. 성경을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과 그것을 혐오스럽게 표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가르침 운운하면서 무례를 범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 자주 벌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다종교 사회이고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다원화된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가 믿는 종교만이 유일하고 우월한 종교라고 일방적으로 외치는 것은 크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우리의 삶의 모습과 행위로 기독교가 얼마나 위대한 종교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설령 혐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폭력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스스로 절제하며 상대방을 배려하고 대화와 설득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갈등을 극복하고 우리 사회가 보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는 데 기독교인들이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신동식 목사 2019-06-10

“새벽예배는 비인권적입니다. 시정하기 바랍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린 결정이다. 한 신학대학 학생이 ‘새벽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기숙사에서 퇴실해야 한다’는 조건이 부당하다며 인권위에 신고한 것에 대한 인권위의 답변이 ‘비인권적’이라는 결론이다. 학교의 독특성과 한국교회의 소중한 유산인 새벽예배를 인권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점점 증가 추세다. 이번에 부모의 훈육에 대한 민법 개정안 역시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물론 디테일한 면에서 보완한다지만 그 기준은 고무줄일 수밖에 없다. 이제 낙태법, 동성혼 등 점점 교회와 충돌하는 지점이 많아지면 국가는 법으로 규정할 것이다. 인권이라는 휴머니티는 소중한 가치다. 하지만 가치가 점점 권력을 가지면 하나님과 싸우게 된다. 바로 그러한 지점을 미리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한기총의 적극적인 정치개입이다. 매우 위험한 발상이지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이들을 부추기고 있음을 본다. 성경의 가치가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교회 참여’와 ‘교회의 정치 참여’는 심각한 분쟁을 일으킨다. 국가가 신의 자리에 서서는 안 된다. 국가는 관리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질서가 무너지지 않도록 각 단체의 특성에 맞도록 관리하는 게 국가의 역할이다. 그런데 국가가 자치 영역에 침투해 고유의 가치를 ‘법’이라는 무기로 관리하면 반드시 저항이 생긴다. 지금은 진보적인 생각이 강해 인권이라는 힘이 대단한 영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인권은 하나님이 아니다. 인권은 가치가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하면 안 된다. 그것은 우상숭배가 된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곳에 다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우리 시대는 바울이 말하는 말세의 고통 하는 시대의 첫 번째 특징 잘 보여준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딤후3:2). 사랑의 대상이 자신이고 돈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 사랑이다. 자기가 우선이다. 각종 대중매체는 ‘혼밥족’에 대해 연일 보도한다. 나 혼자 사는 것이 강세를 보인다. ‘비혼’도 늘고 있다. 여기에 ‘결혼’과 ‘가장’이라는 제도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의 열매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우상숭배다. 참된 인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에 대한 자각과 감사다. 하나님의 부여하신 소명과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인권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시대는 사람이 곧 하나님이 된다.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는 자신을 신이라며 자신을 섬길 것을 주장했다. 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이처럼 인권이 신의 위치에서 인권을 경배하지 않으면 사회 공동체에서 손해를 보게 하고 경제적 활동에 제약과,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고, 조롱을 한다면 도미티안과 다를 것이 없다. 인권이 중요하지만 언제나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정말로 지혜와 순결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정치 권력화 되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교회는 정치집단이 아니다. 국가의 불의에 대해 저항할 수 있지만 국가 자체의 부정이나, 국가의 정치에 교회가 관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더구나 강단이 정치 선동의 장이 되는 것은 결코 안 된다. 강단은 오직 복음이 증거 되는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국가의 교회 참여, 교회의 정치 참여라는 대치가 형성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빛과소금교회, 기윤실 정직윤리운동본부장

이영훈 위임목사 2019-06-09

온 세상이 어지러운 요즘이다. 정치는 좌우로 분열되어 좁혀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 부딪치기라도 할 기세로 대치하고 있다.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경제도 암울하다. 국제기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내 대표적인 국책연구기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올해 경제 전망을 2.4%로 하향 조정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4월 고용 동향에 따르면 실업률이 4.4%로 2000년(4.5%)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실업자 수는 작년보다 8만 4천 명이 증가하여 총 124만 5천 명으로 집계됐다. 청년층(15∼29세) 실업률도 11.5%로 1년 전보다 0.8% 상승했다. 모두 2000년 이후 최고치다. 사회와 문화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뉴스, 신문 등을 통해 끔찍한 폭력, 살인, 자살, 마약, 성범죄 등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5천만 국민 중에 1천만 명이나 되는 기독교인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 각계각층에 그리스도인들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새 계명을 따라 예수님의 사랑을 삶으로 나타내면 이 사회는 점점 밝아질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삶으로 예수님을 나타내어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20세기 위대한 설교자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1981)는 초대교회 성도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 그 자체로 고대의 세상을 정복했다. 서로를 향한 사랑과 삶의 모범이 이방 세상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이것이 우리 시대에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사람들 사이에 증명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질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이유이며,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초대교회의 성도들같이 기도와 말씀에 힘쓰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삶으로 예수님의 진정한 용서와 사랑을 나타낼 때 비로소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는 손양원 목사에 대해 백범 김구(1876-1949)는 1949년 4월 17일 서울 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 목사다. 이 땅의 정치가들에게도 손양원 목사와 같은 아량과 포용성과 수완이 있다면 공산주의도 이길 수 있고, 남북통일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념의 차이로 서로 죽고 죽이는 그 시절에도 그리스도인을 통해 나타나는 예수님의 사랑은 연합의 진정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잠에서 깨어날 때다. 이제 우리가 일어나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한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과 열정을 회복하자. 초대교회 성도들과 손양원 목사님처럼 우리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꿈을 꾸자. 우리가 하나님을 뜨거운 마음으로 섬기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짧은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 서로를 향한 정죄와 비난, 원망과 불평은 충분하다. 모두 십자가 밑에 나아와 예수님의 참사랑을 깨닫고 성도마다 교회마다 서로 용서하고 하나 되자.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 예수님의 빛을 발할 때 대한민국에 진정한 변화가 다가오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만이 대한민국을 하나 되게 하고 남북통일의 문을 열 수 있다.

김성윤 교수 2019-06-02

토머스 앨바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년 2월 11일~1931년 10월 18일)은 미국의 발명가이자 사업가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남긴 사람으로 1,093개의 미국 특허가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고 전 세계적으로 등록된 특허 수만도 1,300여 개나 된다. 세계 각국의 교과서에 발명왕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도 에디슨이다. 그는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게 잘못 전달된 것이라고 한다. 에디슨은 이렇게 말했다. "전에 나는 신문 취재에서 기자에게 '1퍼센트의 영감이 없으면 99퍼센트의 노력은 소용이 없다'고 말한 거였소. 그런데 신문에는 1퍼센트의 영감에 대한 중요성이 아니라 99퍼센트의 노력에 중점을 두고, 나를 노력하는 사람으로 미화하여 진실을 잘못 전달한 것이오. 정말이지 못 말리는 착각이지요." 그렇게 오보가 나간 바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명언은 '노력이 영감보다 중요하다'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감이 없으면 노력을 한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에디슨의 자서전엔 나와 있다. 즉 “1%의 영감 없이는 99%나 되는 엄청난 노력을 해봐야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력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1% 영감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영감이란 천재성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려는 열정이나 도전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 그가 발명한 대표적인 제품은 발전기, 전기 펜, 연료전지, 축전지, 전화송화기, 축음기, 영사기 등 수없이 많다. 그 많은 발명품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인류의 발전과 생활편의 개선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가 이런 발명을 하기까지는 노트필기도 한몫을 하였다. 얼마 전까지 적자생존이란 교훈을 유행시켰다. 즉, 적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에디슨은 인류 생활을 변화시킨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가장 엄청난 양의 노트 필기를 했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노트 분량은 무려 500만 페이지를 넘는다고 한다. 노트 내용의 대부분은 에디슨과 그의 회사들이 남긴 자료들이다. 그만큼 에디슨은 땀을 많이 흘린 과학자요, 사업가이다. 영어로 땀은>이며 영감은으로 단어의 접두사를 빼면 만 공통으로 남는다. 그만큼 두 단어는 공통점과 연관성이 많다. 에디슨의 말이 우리의 뇌 속에 각인된 것처럼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은 땀의 결정체이다. 영감은 땀의 산물이지 저절로 떠오른 것이 아니다. 노력의 결정체이므로 나태 하에서 영감의 빛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천재는 땀의 산물이다. 언제나 일 하여라“ 이것이 에디슨의 생활 신조였다고 한다. 에디슨은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나의 인생철학은 일하는 것이다.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여 그것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응용하는 것이다. 이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그 이상의 봉사와 방법을 나는 모른다.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나는 9999번의 실험을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러자 친구는 실패를 1만 번째 되풀이할 셈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고, 다만 전구가 안 되는 이치를 발견했을 뿐이다." 인생에 있어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굳은 참을성을 벗으로 삼고, 경험을 현명한 조언자로 하며, 주의력을 형으로 삼고, 희망을 수호신으로 하라고 말하였는가 하면, 젊은이들에게 시계를 보지 말라는 계명도 남겼다. 퇴근 시간만 기다리면서 시계만 들여다보는 젊은이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은 먹고 마시고 노는 놀이터가 아니다. 땀을 흘리며 일하고 생산하는 창조의 일터다. 땀이 영감을 낳는다는 그의 말처럼 천재는 영감의 아들이다. 인간이 70이 되어 세월을 보내는 것이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두뇌가 왕성했던 청소년 시절에 흥미를 느껴야 할 무수한 사물에 대해 태만한 증거다. 현대를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인간의 나이 70이 되어서까지 세상을 피하여 고립된 삶을 자초한 사람은 아마 오래도록 즐겁게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에디슨은 ”나는 여태까지 조그만 우연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한 일이 없고, 나의 발명의 어느 것도 우연히 나온 것은 없다. 그것은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나는 발명을 계속할 돈을 손에 넣기 위해 언제나 발명하였다“는 유명한 명언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에디슨 하면 발명가요, 노력의 천재요. 영감을 현실로 구현하여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발명한 사람이 되었다. 언제쯤 우리 사회는 에디슨처럼 1%의 영감을 99% 노력으로 승화하고 발명하려는 분위기가 익어갈까?

정용구 선교사 2019-05-19

비자갱신이나 볼 일이 있어서 한국에 오면, 자연스럽게 성도들을 만나게 된다. 반가운 인사를 하는 분들이 많지만 그 인사 가운데에는 "언제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느냐?"라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한 번 더 마주치게 되면 "아직도 선교지로 안 갔냐?"고 묻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 그룹만은 우리가 다시 선교지에 안 가셨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신 분들이 계시다. 바로 '선교사들의 부모님'들이시다.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신앙심이 깊으신 분들 이신데도, 속마음은 자녀들과 손주들이 선교지로 돌아가서 고생하고 위험하게 지내는 것이 싫으신 것 같다. 선교사들이 선교지를 갈 때, 제일 마음에 걸리는 부분 중에 하나는, 고국에 남겨 두고 가는 부모님이다. 연로하고 힘을 잃는 부모님을 곁에서 돌보아야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인데,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부모님을 두고 떠날 때의 마음은 그럼에도 무겁다. 한국에서 교회 사역을 할 때 담당했던 교구에 아들과 딸 모두를 선교지에 보낸 부모님이 계셨다. 결혼 한 이들의 손녀들을 보고 싶어 하셨지만, 선교지에 있기에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남의 집 손주들이라도 보려고 5월 5일에 놀이동산을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부모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먹먹했던 기억이 있다. 간혹 한국 선교본부에서 사역을 하면, 선교사 부모님의 장례소식을 듣게 되는데, 중남미에 있는 선교사들의 경우는 너무 멀고, 비행기 경비가 많이 들어서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선교사들을 접하게 된다. 선교사들과 이야기 하는 가운데, '부모님이 잘 참고 계시다가, 선교사들이 잠시 한국에 오면 아프시거나, 장례가 많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자녀들이 오기까지 긴장하다가 '한국에 온 자녀들을 보면 갑자기 긴장이 풀어지면서 몸이 약화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아쉬운 것은 현재 '선교사와 자녀'를 위해서는 복지적 차원에서 할인도 해주고 배려를 하지만, '선교사 부모'에게는 '어떤 배려나 혜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어느 교단 선교부에서는 이 부분을 감안하여 정기적으로 '부모님의 생신'을 챙겨 드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팔자가 한국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교회 안에 계신 '선교사 부모님'들을 모두 초청해서 어버이날 같이 식사를 하고 한자리를 만들어 드린 일이 있었다. 선교사의 부모님의 경우 '사별'을 하여 홀로 되시거나, 자녀들 가운데 '부양할 자녀'가 한국에 없거나, 수술이나 질병으로 홀로 움직이려면 마음이 참 어렵다. "선교사 자녀들이 좀 곁에 있어 주면 좋겠는데, 구정이나 추석 명절에 같이 식사라도 하면 좋겠는데...."라는 마음이 크지만,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혼자 감수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좀 더 섬김의 영역을 확장해서 '선교사 부모님'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당신의 자녀들이 너무나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고, 어려움을 잘 견디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자녀와 그 부모가 되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한마디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약간의 섬김이 시작된다면, 선교현장을 지키는 우리 선교사들에게 너무나 큰 힘이 될 것 같다.

이영훈 위임목사 2019-05-12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는 1934년부터 1961년까지 28년에 걸쳐 문명의 ‘발생 – 성장 – 쇠퇴 – 해체’ 과정을 면밀히 살펴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라는 책을 완성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장기 문명에서 하나의 도전은 그것을 훌륭하게 극복하는 응전에 의해 극복되며 그 응전이 또 다른 도전을 낳는데, 그 도전 또한 새로운 응전으로 극복된다. 이 성장 과정은 그 문명이 더는 대항할 수 없는 도전인 우리가 쇠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즉,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결과라는 말이다. 그는 이어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계속 응전하며 발전하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소수(creative minority)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창조적인 소수가 사회를 이끌면 그 문명은 성장하게 되지만, 그들이 지배적 소수로 전락하면 사회는 혼란에 빠져 결국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님도 역사를 주관하실 때 소수를 통해 일하신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군중 가운데 나타나시기 보단 소수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많은 사람 중에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사사 시대에도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사사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 이후로도 하나님은 왕들과 선지자들을 택하시어 기름을 부으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셨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많은 사람 중에 12명을 제자로 삼으셨다. 하나님과 함께 했던 소수들은 모두 성령 충만한 자들이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이 고난당하실 때 모두 도망가고 부인하고 두려워하며 떨었지만,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즉시 일어나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했다. 그들은 성령 충만을 오순절 날에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으로 여기지 않고 함께 모여 오로지 기도에 힘써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했다. 심지어 초대교회에 봉사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그들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단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세우고 더욱 기도에 힘써 성령 충만함으로 교회를 안정시켰다(행 6:7). 그들은 성령 충만과 함께 말씀전하는 일에도 힘썼다(행 6:4).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의 소수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 등이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록한 글들이 신약성경이 되었으니 그들이 얼마나 성령과 말씀에 하나 된 자들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룰 소수를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소수는 세상의 방법과 사람의 지혜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많은 문제의 도전에 직면한다. 이러한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도전에 우리가 어떻게 응전하며 극복해나가는가이다. 상황에 따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 안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늘 새로워져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갱신되고 발전해나가야 한다. 초대교회의 본을 받아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으로 전진하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여 더욱 성령의 충만을 받자. 하나님의 소수인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되고 이 시대는 어두움에서 광명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김성윤 교수 2019-05-10

논어 자로(子路)편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되 동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즉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소인은 동일성을 추구하되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즉 부화뇌동하고 친화하지 않는다(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고 나와 있다.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장에 가면 각기 다른 40여개의 악기 소리가 각기 다른 소리를 내나 이 악기 소리가 하나의 소리로 조화를 이루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리가 되는 이치와 같다. 즉 악기의 종류나 음계가 서로 다르더라도 지휘자의 지휘에 맞추어 하나의 아름다운 화음으로 어우러지는 심포니처럼 사람들의 생각도 다를 수 있으나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여 하나의 의견으로 수렴되는 것이 화이부동이다. 동(同)은 맹목적으로 부화하고 주견도 없이 남의 의견에 부화뇌동함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 주변에서는 부화뇌동하는 소인배를 자주 볼 수 있다.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하는가 하면 말과 행동도 다르다. 중용(中庸)에도 ‘화이불류(和而不流)란 말이 나온다. 이 말뜻은 화합하되 휩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대로 소인은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패거리를 지어 자기네의 이익을 둘러싼 쟁탈을 벌인다. 이 때문에 소인들은 한데 휩쓸리기만 할 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다. 생선이나 고기를 삶을 때, 조리사는 물을 맞추고 은근한 불로 열을 가한 후에 식초, 젓갈, 소금, 파, 등등의 양념을 고루 섞어 부족한 것이 있으면 더하고, 지나치면 줄여서 걸쭉한 육수를 만든다. 이는 화와 같은 이치이다. 반면에 지도자나 대표자가 옳다고 하면 자기도 옳다고 하고 지도자나 대표자가 그르다고 하면 자기도 그르다고 하는 것은 마치 물에 물을 보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건 물일뿐이다. 이는 음의 조화 없이 일률적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 공자가 말하는 군자는 이상적인 인간형이다. 이런 사람은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요, 세련된 신사이며 수양되고 내공이 쌓인 인간이다. 반면에 소인은 미숙하고 부족한 사람이다. 화(和)는 각자가 지닌 자기만의 특성을 다른 이와 하나로 융합하는 일이거나 남과 화목 하는 일이다. 동(同)은 갖고 있는 특성 그대로 표출하면서 다른 이와 같은 척 꾸미는 것을 말한다. 즉 부화뇌동이다. 공자에 의하면군자는 남과 조화를 이루며 화목하게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결코 남과 작당하여 부화뇌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인은 남과 작당하고 부화뇌동한다. 그런 사람은 조화를 이루고 화목 할 줄을 모른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개성이 있다. 그 개성을 각자가 잘 발휘하여 조화를 잘 이루는 사회를 다양성의 사회라고 한다. 문화가 발달하고 선진국 일수록 다양성이 인정되고 장려된다. 각자가 타고난 개성과 다양성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화요, 화목이다. 사회주의나 전체주의와는 달리 민주주의는 조화를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고 있다.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와 같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내되 조화를 이루면 화음이 되듯이 서로 다른 의견을 하나로 수렴하면 혁신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사회를 민주사회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똑 같이 행동하거나 말할 수가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 민주 사회이다. 저 마다 제 목소리를 내고 제목소리로 제 노래를 부르고 제 말을 하고 제 표현을 하면 된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 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사고방식이요, 공자가 말했던 화이부동의 세계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같은 옷을 입거나 같은 소리를 낸다면 그 사회는 동(同)의 사회이다. 이런 사회가 획일적인 사회요, 전체주의 세계이다. 그래서 화이부동의 사고방식과 생활철학을 배우자는 것이다. 그 생활 철학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같은 목적을 추구한다는 구동존이(求同存異)와 같은 말이다. 즉 조화를 추구하지만 모두가 한결같고 똑 같아 공멸하도록 요구하지 않는 것이 화이부동이라면 동이불화(同而不和)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과도 같다. 아마 요즘 들어 귀가 시리도록 듣는 말이 내로남불일 것이다. 화이부동과 동이불화는 한 사회나 한 나라 뿐만이 아니라 기업에도 확연히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화이부동은 혁신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회나 나라 또는 기업을 만든다. 하지만 동이불화는 대통령이나 여와 야당 대표 한 사람의 말이 진리가 되어 아무도 발전적인 의견을 내놓지 않는 분위기를 만든다. 이런 사회, 이런 나라 , 이런 정당, 이런 기업은 혁신의 가능성이 나오지 못하여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래서 우리는 화(和)와 동(同)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배척할 줄 알아야 좋은 사회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신동식 목사 2019-05-09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주일학교의 감소에서 그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합동 교단은 28.9%가 주일학교가 없다고 합니다. 참으로 참담한 현실이 다가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점점 가속화될 것입니다. 출산율의 저하가 가져오는 위기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적 콘텐츠의 발전과 경제적 양극화의 현상으로 말미암은 주일학교 보이콧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향후 교회의 노령화와 함께 교회의 위기를 가속화 시킬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교회의 영향력이 급속히 축소될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곳곳에서 신음 소리를 낼 것입니다. 이러다가 교회가 문을 닫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나올 것입니다. 그만큼 현실이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규모가 작아서 교육적 콘텐츠와 재정적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들은 더더욱 주일학교를 세우는 일에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의 양극화는 분명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서로 상생하지 않는다면 상당기간 힘든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정신을 차리고 미래를 잘 준비하지 않는다면 암울한 현실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작은 규모의 교회는 더욱 빨리 주일학교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편리주의로 무장된 현 세대들은 결코 불편한 교회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온갖 이유를 들어서 좀더 규모가 있고 교육체계가 잡혀있는 교회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샛강이 죽으면 큰 강이 죽듯이 큰 규모의 교회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로가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모든 교회가 함께 시작할 것이 무엇일까요? 재정과 콘테츠에 상관없이 주일학교를 살리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적어도 이 네 가지를 잘 준비한다면 그나마 소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결혼과 출산의 영광을 가져야 합니다.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름답다고 포장하는 시대의 속삭임에 저항해야 합니다. 결혼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자녀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을 누리는 것이 교회를 위한 거룩한 준비입니다. 둘째는 가정예배를 지키는 일입니다. 이것은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사 가운데 남겨준 아름다운 선물 가운데 너무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 거룩한 선물을 많이 상실하였습니다. 그러자 가정도 교회도 균열이 많이 생겼습니다. 가정예배는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것이고 우리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셋째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한 신학적 교육과 사랑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단지 재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르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통합예배를 드리고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사춘기 전까지 자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들이 교회로부터 사랑을 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고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이들을 볼 때 사랑한다, 잘한다고 칭찬하는 일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다고 하듯이 자연스럽게 재정적인 투자도 함께 가야합니다. 넷째 약속을 가지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교회의 미래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하는 일이 먹고 마시고 놀면서 사고를 칩니다. 그래서 예배나 교육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수님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자라납니다. 우리 교회가 할 일은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기다리는 일입니다. 이들이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이끌어갈 그 날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 사랑이 교회를 세우게 합니다.

정재영 기자2019-05-03

하나님나라에대한이해 예수께서공생애를시작하시면서맨처음으로선포하신것은하나님나라였다. 예수님은하나님나라를위해보내심을받았으며, 마지막으로부탁하신사명도하나님나라의약속이었다. 따라서하나님나라는그리스도인의신앙생활에서가장중요할뿐만아니라목회에서도근간을이루어야할것이다. 그러나이렇게중요한하나님나라의의미는많은혼란을가져다주고있는것도사실이다. 많은기독교인들이하나님나라를죽은이후에가는지옥과반대되는개념으로이해를한다. 때로는하나님나라를상징적인의미나정치적인개념으로만이해하기도한다. 따라서바른신앙생활을하고바른목회를하기위해서는하나님나라를바로이해하는것이필수이다. 예수께서선포하신하나님나라는하나님의주권적이고왕권적인통치이며인류를구원하시기위한하나님의구원역사이다. 하나님나라는우리를향한하나님의계획속에서예수그리스도를통해서성취하시고기대하실역사적실재인것이다. 예수님은하나님나라가당신안에서사람들에게다가오는것을확신하면서하나님나라를선포하셨다. 그리고교회는이하나님나라의완성을위해서부름받은공동체이다. 따라서교회는하나님나라의구원의사명을감당하기위해서이땅에서하나님의통치와주권을회복하기위해노력해야한다. 진실한회개와복음의능력을통해서하나님께서창조하신모든세계와피조물들의회복을위해실천해야한다. 교회는단순히제도나조직, 건물이나외적성장과같은개교회중심의생각에서벗어나서하나님의나라와그의통치를의지해야한다. 개인의신앙뿐만아니라모든믿는이들의삶과지역사회를변화시키기위해세상에보냄받은공동체로서의소명을다하기위해노력해야한다. 하나님나라에대한목회자의식 이렇게중요한것이하나님나라이지만실제교회에서하나님나라라는단어조차도접하기는쉽지않다. 양육교재나설교에서도하나님나라가직접언급되는경우는많지않다. 또한하나님나라를말하더라도서로다른의미에서말하는경우가흔하다. 이러한상황에서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실시한하나님나라목회에대한인식조사는목회현장의현실을잘들여다볼수있도록도와준다. 주요조사결과를살펴보면, 한국교회목회자들은95.9%가스스로“하나님나라주제를목회전반에적용하고있다”고응답하였다. 거의모든목회자들이하나님나라목회를실천하고있다는결과이다. 영역별로설교, 성경공부, 제자양육, 지역섬김등모든영역에서하나님나라목회를적용하고있다는응답이90% 안팎으로매우높게나왔다. 그러나하나님나라확장의의미에대해서는목회자들의인식이서로달랐다. 그의미가‘이웃사랑’과‘영혼구원’이라는데에는85% 정도가동의했지만, ‘도덕적인삶’에대해서는71.4%, ‘소외받는이들이고통받는삶의조건개선’이라는응답에대해서는56.6%만동의하였다. 하나님나라의확장을복음전도의차원과다소추상적인이웃사랑이라는관점에서이해하고있고보다구체적인성도들의삶이나고통받는이웃들곧‘강도만난이웃’들의삶의조건개선이라는구체적이고구조적인접근에대해서는절반이조금넘는목회자들이동의한것이다. 하나님나라확장의의미를어떻게이해하느냐에따라서목회에서의강조점도달랐는데, 하나님나라의목회적용에서하나님나라확장의의미를‘삶의조건개선’까지생각하는목회자들은모든영역에서매우많이적용한다는응답이더많았고, 특히사회봉사/지역사회섬김에서매우많이적용한다는응답이2배가까이많이나왔다. 또한, 목회하면서교인들에게강조하는부분에대하여‘구원의확신’, ‘복음전파’, ‘모범된사회생활’ 등개인의영적이고도덕적인차원은70% 안팎의목회자가매우강조한다고응답하였으나, ‘소외된이웃섬김’, ‘사회의부조리변혁’은각각53.0%와33.8%로사회적관심과참여를강조하는비율은낮게나왔다. 그런데하나님나라확장의의미를‘삶의조건개선’까지생각하는목회자들은‘목음전파’는상대적으로덜강조하였고, 다른항목들은매우강조하는비율이더높았으며특히‘소외된이웃섬김’, ‘사회의부조리변혁’에대해서는매우강조한다는응답이더높게나와서하나님나라의확장을어떻게이해하느냐에따라서목회에서강조하는부분도차이가있는것으로나타났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나라확장의의미를‘삶의조건개선’까지생각하는목회자들은설교에서환경, 빈곤, 통일, 미래사회, 다문화등에대해서도자주다룬다는응답이더많이나와사회이슈에대해서도더많은관심을가지고있는것으로나타났다. 뿐만아니라이러한목회자들은다른목회자들에비해사회문제들이개인의노력에의해서해결될수있다는생각보다는사회구조의문제라고보는관점이더강하고, 기독교의교세나전도의관점보다보편적사랑과평화를강조하는입장이더많았다. 적절한교재개발과적용사례발굴이필요 이조사에서, 목회의여러영역에서하나님나라주제를적용하는데에서갖는어려움은‘알맞은교재가없다’는응답과‘하나님나라를어떻게실현할지구체적인적용사례를설명하기어렵다’는응답이가장많이나왔다. 하나님나라주제를적용하지않는가장큰이유역시알맞은교재가없다는응답이많이나와서하나님나라주제를목회에적용할필요성은느끼고있지만현실적인어려움이있음을드러냈다. 따라서막연하게하나님나라를강조하기보다는구체적으로활용할수있는적절한교재개발이시급한과제로밝혀졌다. 우리사회는전형적인다종교사회이다. 개신교가신자수가가장많은1위종교이기는하지만전체인구중에20%에미치지못하고불교와가톨릭을합해도50%에이르지못한다. 이러한상황에서지나친교회중심의신앙생활을하는것은자칫다른종교와의갈등을유발할수있을뿐만아니라성경의가르침과도어긋나는것이다. 단순히교세확장을위한신앙생활이나목회가아니라예수께서이땅에오셔서보여주셨던사역의모습들처럼삶의어려운문제들로고통당하는사회약자들과소외된이웃들을위로하고이들을도와하나님의형상을회복할수있게하는것이필요하다. 하나님나라의복음을통해서우리사회의모습이창조질서를회복해나갈수있기를소망한다.

여주봉 목사 2019-05-01

하나님의부흥은십자가복음의유업이다. 그것은교회역사만보아도뚜렷이알수있다. 우리는그것을얼마전에살펴보았다. 나는개인적으로그하나님의부흥이다가오고있다고믿는다. 우리가해야할일은무엇보다교회가십자가의복음위에세워지는것이다. 일부에서는오늘날한국교회의상황이전혀소망이없는상황이라고말한다. 그러나한편으로는그것이역설적으로그만큼부흥이가깝다는표시일수도있다. 하나님의부흥은항상영적으로극심하게침체된상황에서왔다. 하나님은하나님의백성들로인하여땅에떨어진하나님의이름의명예를회복시키시기위해서항상그렇게하셨다. 나는개인적으로18세기요한웨슬리나조지휫필드를통한부흥이오기전의영국상황을보면오늘날우리는아직늦지않았다는인식을가지고집중적으로교회가철저하게십자가의복음위에서기를추구할수있다고생각한다. 웨슬리듀엘의『세계를바꾼부흥의불길』은요한웨슬리시대하나님의부흥이오기전영국의상황을이렇게기록하고있다. 좀길지만같이읽어보자. 18세기는도덕적으로나영적으로암흑기였으며정치적으로도몹시소란했던시기였으며세계여러곳에서사회적인필요가많았던시기였다. 잉글랜드에서는자연신론의치명적인영향으로성경의권위마저흔들렸다. 영적인무관심과회의론이팽배해지고자유가방종으로치닫게되었다. 종교는그영성과능력을상실했으며기껏해야윤리정도로생각되었다. 수많은사람들이교회에의해변화를받지못했다. 경건하고신실한목회자들이있기는했지만많은성직자들이믿음으로말미암는구원의도리를가르치지않는실정이었다. 아니그들은오히려그도리를반대하는, 명목상의우두머리들에지나지않았다. 많은사람들이음주벽을가지고있었고그중에는부흥사들을대적하며폭동을일으키는사람들도있었다. 사회의높은계층에있는사람들은종교에대해언급하는것조차비웃었다. 대부분의유명한정치가들은불신자들이었으며그생활이부도덕하고음주벽이있으며사악한말투를사용하는것으로유명했다. 사람들은결혼을우습게여겼다. 체스터필드경이그아들에게쓴유명한편지를보면어떻게하면여자를유혹할수있는지그방법을가르치고있는내용이적혀있다. 정부로부터지원금을받던많은성직자들은그들이시무하는교회근처에는살지도않았다. 그들은국민이내는세금으로월급을받았지만그중에는자기교구민을전혀돌보지않는사람들도있었다. 한주교는자기교구민을오직한번보았을뿐이라고자랑하기까지했는데그의집은호숫가에있었다. 교회에서드리는예배가점점줄어들고교회건물은아주황폐해져갔으며사람들은예배를등한시했다. 하원의원중교회에출석하는사람은네다섯명에불과했다. 볼링부록경은성직자들의생활양식을보고그들을비난하며“기독교가당신들처럼엉터리그리스도인들의손에맡겨져있으면서도여전히생존해있다니그것이야말로이세상에서가장큰기적”이라고말했다. 부흥이일어나기전, 잉글랜드대부분의지역에살고있던소시민들은무지하고놀랄만큼잔인했다. 거기에는엘리트를양성하기위한학교만있었다. 경찰이라든가어떤공공세력이주둔하고있는마을이거의없었다. 그래서런던의버밍엄에서는폭도들이집을불사르고개방감옥을돌파하는등시민들을공포에떨게하면서약탈을일삼았다. 범법자들은점점대담하게서민들을위협했다. 런던에있는집들중세집건너한집은술집이었으며“일전만내고술을마시라. 이전만내면술을실컷마실수있으며술이깰때까지누워있을지푸라기까지마련되어있다” 며지나가는사람들을끌어들였다. 당시런던에서는무장을하고다른사람들과함께무리를지어다니는사람들외에는날이어두워진후밖에돌아다니는사람이없었다. 심지어가까운교외조차가지않았다. 해변가에있는지역에는밀수업자들이횡행했는데무장한무리들이그밀수입된상품을런던으로가져왔다. 당시에는스포츠마저잔인해서투계라든가투우, 곰놀리기(메어놓은곰에게개를덤비게하는경기), 포악한불독끼리싸움붙이기등이성행했다. 당시경찰력은별효과를발휘하지못했지만범법행위에대한재판만은상당한무자비한편이었다. “사형에처하되죽기전에성직자와짧은대화를나누는것도허락되지않는다”는언도를받은것이적어도160건이되었는데이것은즉각적인사형집행을의미했다. 1800년도까지는벚나무를베어넘어뜨린사람, 어떤사람의손에서무엇을낚아채어달아난사람, 어느집에서40실링내지그이상을훔친사람, 어느배에서5실링에해당하는물건을훔친사람등이모든사람들이다사형을언도받았다. 법정기록을보면한번에, 즉재판이열린한회기중에무려40명내지50명의사람이교수형에처해졌다는기록도있다. 감옥들마다죄수들이꽉꽉들어찼으며그안은몹시어둡고더러웠다. 게다가감방들을통해흐르는하수구로부터악취가스며나와냄새마저고약했다. 침대는물론없었고물도충분치못했으며죄수들에게제공되는식사마저한사람당하루2페니정도의빵이고작이었다. 많은죄수들이어둡고더러운감옥에서죽어갔다. 웨슬리와그일행은부흥이일던초창기에바로이런감옥들에서사역을시작했다 그러한상황이었기때문에, 하나님을모르는역사학자들저도웨슬리를통한각성운동이없었더라면영국에서도프랑스에서와같은유혈혁명이일어나서그나라가100년은후퇴했을텐데그러한영국을구한것이요한웨슬리라고말한다. 하나님의부흥이그시대영국을구했다. 당연히부흥은자동적으로오지않는다. 부흥은철저하게십자가의복음의유업이다. 그리고부흥이올때마다그예비단계에서십자가의복음의진수가회복되었다. 이제우리힘을내어교회를십자가의복음위에, 즉예수그리스도의터위에굳게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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