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욱 이학박사 2019-10-18

태초에 있었던 일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반경 100억 광년이나 되는 이 대우주를 창조하셨다. 1광년은 약 10조 Km 거리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1,000억 조 Km나 되는 반지름을 가진 큰 세계이다. 이 큰 공간 속에 크고 작은 별들을 또 천 억 조 개나 만들어 배치해 놓으셨다. 이 천체들 가운데 태양계를 구성하는 별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놓으신 보데의 법칙과 케플러 법칙에 따라 제각기 자기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에 따라 운행하고 있다. 보데는 태양과 행성 사이의 거리에 일정한 규칙이 있음을 발견했다. n번째 행성의 평균거리는 0.4+0.3× 2의 n승에 해당한다는 것이 보데의 법칙이다. 이 때 거리 단위를 1 AU(=1억 4,960만 km)로 나타낸다. 케플러는 그의 스승인 티코 브라헤가 남긴 자료를 통해 규칙을 발견했다. 행성의 궤도가 타원 궤도이고,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같으며,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 케플러의 법칙이다. 여기서 우리가 믿는 것은 규칙성이 창조주의 설계의 결과라는 것이다.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만드신 그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감당하면서 천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태양계는 또 직경 10만 광년인 은하계의 중심을 중심으로 초속 240㎞ 속도로 2억년에 1회전하는 회전운동을 하고 있다. 이 은하계는 또 우주의 가운데를 어느 방향을 향해 대장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 어마어마하게 큰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다. 크신 하나님을 우리는 가끔 우리의 조그마한 감정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나 신경 쓰시게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신앙이란 이름으로 말씀을 필요 적절하게 인용해 가면서 말이다. 우리가 늘 염두에 둘 것은 하나님께선 창조만 하고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창조 이후 오늘도 친히 보존하시며 감찰,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란 말을 곧잘 사용한다. 과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언어, 행동은 어떠해 야 할까 생각해 본다. 대우주의 창조주시요, 인생의 창조주이시며 우리 삶의 주인이시기에 오늘도 친히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계산 안 될 그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은 이 모든 만물을 천 조 분의 1m나 작은 것들의 조합으로 아주 정교하게 세밀하게 창조하신 분이시다. 세밀하셔서 우리의 은밀한 것(롬 2:16)까지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다 계산 될 그 날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일이다. 로마서 2장을 묵상하면서 필자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늘 흥분을 가라앉히고 힘든 도전들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겸손한 마음이 더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타인의 흠보다 자신의 흠이 자신에겐 더 무거운 것이란 각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양성자 중성자 전자들 사이의 ‘전자기력과 핵력, 만유인력 등의 역학 관계’로 서로 붙들고 있도록 하셨다. 혹 서로 어떤 일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해도 만물이 서로 붙들고 있도록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효상 원장 2019-10-16

사람은 솔직한 글과 말, 마음을 열고 진정성을 갖고 하는 말과 살아있는 글을 대하면 굳게 닫아 놓은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솔직함을 너그러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밖으로 마음껏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면서 마음에도 없는 입술의 언어로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 낸다. 이것을 예의바르다고 착각한다. 솔직한 말이 어떤 땐 자신의 생각이나 비위에 맞지 않기에 버릇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벽을 넘어야 성도들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다. 교회공동체가 각자가 가진 비밀이나 부끄러운 일들을 가슴 속 깊이 묻어두기만 한다면 건강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없다. 성도들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도록 해야 하는 것은 모든 일을 사랑의 눈으로 살펴 볼 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힘없고, 불쌍하고, 보잘 것 없고, 작고,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 남에게 버림받은 것들을 사랑할 줄 알게 해야 한다. 더욱이 그들의 아픔을 사랑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이다. 세상에는 진정 아름다운 것도 많지만, 겉으로만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많다. 겉으로는 남 보기에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한 번쯤은 따져 보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와 반대로 겉은 볼품없어도 속은 아름답고 쓸모 있는 것도 많으니 그 또한 살려보도록 할 일이다. 20여 년간 매주 칼럼을 쓰다 보니 간혹 이런 분들이 있다. 그냥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면 될 것이지 굳이 썩고 병든 것까지 들추고 파헤쳐 보여서 무얼 배우겠느냐고.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찍,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찾아내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썩은 원인을 여러 면에서 찾아보게 하고 그 원인에 따라 스스로 치료하면서 바르게 살아가려는능력을 가진 곳이 ‘교회’요, ‘개혁주의신앙’이 아닐까.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만들고 이단 사이비는 ‘교주’를 만들지만, 교황도 교주도 아닌 개혁교회는 건강한 ‘목회자’를 세운다. 그런 가운데 목회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바르게 세워 가면 쓰임 받게 된다. 이렇게 자라고 커야 제대로 사람 구실과 직분자로 사명 감당할 수 있다. 솔직한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는 꾀나 요령이나 거짓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바보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땀 흘리며 일 할 줄 알고, 어려움을 이겨 낼 줄 알며, 옳지 못한 일에 대해서 강하게 대항할 줄 알고, 그릇된 일은 비판해 올바른 길을 찾을 줄도 안다. 또한 보는 눈이 넓고, 생각이 깊고, 앞서 가서 멀리 내다볼 줄도 안다. 꾀나 요령으로, 거짓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눈앞의 이익에만 어두워 자기 밥그릇 지키기 위해 아웅다웅 다투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남의 괴로움 따위는 모르거나 알아도 모르는 척 한다. 사실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척 하지만 정말 어렵게 더불어 살아야 할 일에는 발뺌한다. 한국교회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이나 인생은 매일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 같다. 그래서 끝까지 가본 사람만 이 시작을 알 수 있다. 듣는 이들이나 글을 읽는 사람 중에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큰 위로가 될 것이고, 그와 같은 처지에 있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처지를 잘 이해하게 돼 결국 모두 한마음, 한 뜻, 한 방향이 될 수있을 것이다. 시사성 있는 주제를 다루는 논객이 생각할 것은 시대정신과 역사, 그리고 사람 등 일 것이다. 이런 깊이와 넓이, 그리고 안목을 가지고 슬기로운 신앙생활과 나라사랑, 사명감당의 말과 글로 사회와 소통하며 마음껏 풀어 놓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신동식 목사 2019-10-14

예능프로그램가운데<나는자연인이다>가있습니다. 도시를떠나서산속으로들어가서사는사람들의이야기입니다. 벌써368회(2019년 10월2 일기준)가진행되었습니다. 참으로많은사람들이자연의생활을하고있다는것에놀라지않을수없습니다. 그런데이들의내면의모습을보면자연이정말좋아서들어간분들은그리많은것같지않습니다. 저마다의많은사연이자신을산속으로몰아놓은것입니다. 그리고홀로고독한생활을즐기는것입니다. 도시를떠난다는것은큰용기가필요합니다. 그것은자신이주는안락함을포기하는것이기때문입니다. 잠시휴가차산으로가는것이아니라남은삶을살려고들어가는것은간단한문제가아닙니다. 도시로대변되는모든관계를단절하여야하기때문입니다. 그리고혼자모든것을짊어지고살아가야합니다. 그러니누구도선뜻감행할수있는문제가아닙니다. 그런데이러한모습이교회사가운데도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하나님의은혜를받은이들이더욱더거룩하고경건한삶을살고자도시를떠났습니다. 그리고기도와말씀에정진하였습니다. 그것이바로수도원입니다. 교회사가운데나타난수도원은광야와사막그리고깊은산과높은바위위에있었습니다. 그래서도시로부터철저하게단절하였습니다. 이렇게도시와단절하여서자신만의삶을해결하려고하였던이들을수도사라고부릅니다. 한때는이들의모습이흠모의대상이었습니다. 그가운데프란시스코나베네딕트그리고왈도파와같은청빈을강조하면서경건에힘쓰는수도원들이존귀한존재로여김을받았습니다. 그러나인간의부패성은자연으로간다고해결되는것이아닙니다. 성령이아니고서는인간의부패성을해결할수없습니다. 결국수도원의타락은가시화되었고그곳에흘러나온추악하고쓰레기같은이야기들은더많은충격을가져왔습니다. 결국인간은도시에있으나산속에있으나같은존재였습니다. 삶의문제를해결하려고들어갔던산에서도리어죄만지은것입니다. 종교개혁자루터의삶에서볼수있듯이수도원이사람을변화시키지못하였습니다. 자연으로가는것이하나님의뜻이아닙니다. 도시를떠난다고해결된다면더이상교회는도시에있어서는안됩니다. 그러면교회도절과같이산에지어지고, 목사들은증려들과같이출가하여해탈을위하여힘쓰면됩니다. 그러면성도들은출가한목사들을희생염소삼아서자신들의죄를뒤집어씌우면됩니다. 그러나성경은우리에게이러한삶을말씀하지않습니다. 예수님은그리스도인들이있어야할곳이어디인지분명하게말씀하셨습니다. 바로세상입니다. [요17:18] 세상에서데려가심이아니라세상에보내심이바로예수님의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세상을떠나는것은성경의뜻이아닙니다. 수도원을만들고그곳에사는것이예수님의생각이아닙니다. 그러므로선지자들은세상을갔습니다. 구약의선지자들이예루살렘한복판에서말씀을선포했습니다. 세례요한이광야에서나와서도시로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산에서내려오사도시로들어갔습니다. 변화산의초막셋이예수님의뜻이아니라산아래서귀신들려고통받고있는이들을구하시는것이예수님의생각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세상이힘들다고산으로도피하지않았습니다. 오히려산에서살다가세상으로들어갔습니다. 세상으로들어가는것은편하게사는길이아닙니다. 오히려불편하게되는길입니다. 그러나세상에살면서세상에하나님나라를세우는것이선지자들의사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선지자들은세상에서도피하여홀로자신의고독을씹으며유유자적하며살수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만인제사장이며동시에선지자의사명을받은사람들입니다. 현실은어렵고힘듭니다. 수많은위험들이도사리고있습니다. 이러한세상에서교회를세우고하나님나라를건설하는것이신자의사명입니다. 선지자적현실주의는현실도피주의가아닙니다. 현실에살면서성령의도우심으로자발적불편을감당하는사람입니다. 그러므로지금내가발을딛고있는이땅에서성령의역사를나타내야합니다. 선지자의사명을감당하는것이영생을선물로받은신자의즐거움입니다.

정재영 교수 2019-10-13

다시증가한자살률 통계청이최근발표한‘2018년사망원인통계’에따르면지난해자살사망자가1만3,670명으로2017년보다9.7%(1207명) 증가했고, 인구10만명당자살자수도26.6명으로전년(2017년24.3명) 대비9.5% 증가한것으로드러났다. 연령대로보면, 80세이상을제외한전연령에서증가했는데특히10대(22.1%), 40대(13.1%), 30대(12.2%)로비교적젊은나이에서크게늘었다. 10~30대에서사망원인은자살이1위였고, 40~50대에서도암에이어자살이2위를기록했다. 특히10~30대자살비중은압도적이었다. 10대자살률은35.7%로2위보다2배이상높다. 20대사망률은절반에육박하는47.2%가자살이었고, 30대도39.4%로매우높다. 연간자살사망자가1,3670명이라는것은매일37.5명이자살로사망한다는뜻이다. 약38분마다1명이자살로목숨을잃는다는뜻이다. 자살기도자는자살사망자보다10~20배많다는점을감안하면거의2~3분마다한명꼴로자살을기도한다는의미다. 우리나라가‘자살공화국’이라는말이과장된표현이아닌것이다. 이러한결과로우리나라는다시OECD 자살률1위에올랐다. 최근10년이상자살률1위를유지하다가작년에우리나라보다자살률이높은리투아니아가OECD에가입하면서2위로내려왔으나이번에자살률이증가하면서다시자살률1위를차지하게된것이다. 이런자살률증가의원인을정부에서는‘베르테르효과’ 때문으로추정하고있다. 베르테르효과란괴테의'젊은베르테르의슬픔'이크게인기를끌면서유럽의젊은이들사이에베르테르를따라행동한사람들이많았고, 심지어베르테르를모방한자살시도까지늘면서생긴말이다. 곧유명인또는평소존경하거나선망하던인물이자살할경우, 그인물과자신을동일시해서자살을시도하는현상으로, '모방자살', '자살전염'이라고도한다. 복지부는지난해에언론을통해보도된유명인자살사건이다수있어베르테르효과가영향이있었을것으로추정했다. 베르테르효과보다중요한것 베르테르효과는자살유형에서다소흔하게나타나는현상으로많은나라에서발견되고있다. 이에언론에서자살사건에대해서보도할때자살상황을자세하게묘사하지않도록권고하고있고특히자살방법에대해서는언급하지않도록‘자살보도지침’에정해져있기도하다. 언론의역할이매우중요하기는하지만자살의원인중큰비중을차지하는것이베르테르효과라면자살예방을한다는것은쉽지않은일이다. 유명인들을대상으로따로자살을하지않도록예방교육을하기도어렵고자살위험이있는유명인들을별도로관찰할수도없는노릇이다. 물론일반인들이유명인들을따라모방자살하지않도록예방교육을할수는있겠으나이것이자살예방의근본대책이될수는없는것이다. 보다중요한것은자살의근본원인을파악하는것이다. 아무리자살이전염된다고하더라도전혀자살의징후가없고자살할이유가없는사람이유명인을따라무심코자살하는일은드물기때문이다. 이러한점에서더욱중요한것은자살을예방할수있는사회환경을조성하는것이다. 자살의원인으로주로경제적인어려움이꼽히고있으나이것이모든사람들에게똑같이자살의요인으로작용하는것은아니다. 외국의사례에서도경제위기상황에서사람들이더협력해서위기를극복하기위해노력하는경우가있고이런경우에는자살위험을높이지않는것으로보고되기도했다. 복잡한현대사회에서경제위기나가정의위기를초래하는원인자체를막을수는없으나사회적위기상황에도사회구성원들이고립이나단절되지않고서로의지하고도울수있는공동체환경을만드는것이무엇보다중요하다. 우리나라는이러한공동체적환경이라는측면에서매우취약하다. 출세와성공지향이라는우리사회의강력한문화· 정서적경향은학생들을교육이라는미명아래입시경쟁으로내몰아, 수능시험날이되면수험생이목숨을끊었다는보도가끊이지않고있다. 또한가족의안정을위해성공과출세의압력에시달리는40대남성들은우리사회에서가장높은자살률을기록하고있다. 이와같이가족마저도성공을위해수단이되는도구적가족주의경향아래서는노인들은전혀효율성이없으므로가족과사회의짐으로여겨질뿐이다. 이결과로2000년대로들어선이후노인자살자증가율이전체자살자증가율의대여섯배에달할정도로가파르게상승하고있다. 스스로목숨을끊지않더라도돌보는사람이없어혼자살다가외로이죽음에이르게되는‘고독사’도최근들어급증하고있다. 이러한상황은우리사회의삶의질이어느수준인지여실히보여주고있다. 보건복지부에따르면지난해1,232명이고독사로숨을거둔것으로나타났다. ‘무연고사망자’는2011년693명에서2012년741명, 2013년922명, 2014년1008명, 2015년1245명으로늘었다. 2011부터2015년사이77.8퍼센트나증가한것이다. 이러한상황은우리사회의공동체로서의기능이대단히취약하다는것을보여주고있다. OECD의사회분야통계에서중요한통계로공표하는지표중의하나가사회지출이다. 이지표들이나쁠수록병과실직, 노환등으로힘들고어려운일을겪을때국가나사회의도움보다는개인이더많이스스로의힘으로해결해야한다는뜻이다. 언론보도에따르면, 한국은사회지출부문에서대부분OECD의꼴찌나최하위를기록했다. 그리고자신이어려움에처했을때도움을요청할수있는친구가있는가를묻는공동체지표에서우리나라는OECD 가입국가중에최하위를기록했다. 이러한내용역시우리사회가더이상공동체라고말할수없는지경에이르렀음을보여주고있다. 자살을예방하는공동체환경 이번사망원인통계발표후에전남고창군은이지역의자살률이전라북도내에서가장낮은것으로집계됐다고발표했다. 고창군의지난해자살률은15.3명으로전라북도에서가장낮았고전국평균보다도훨씬낮았다. 특히전년(2017년기준) 대비15.7명이나줄었는데, 이것은지역전체의생명존중분위기확산과군민행복도시, 촘촘한사회안전망구축이주효했다고자체평가했다. 여기에단순한‘자살을예방합시다’라는말보다는고위험자를직접대면하며위로·격려하는프로그램을대폭확대한것도도움이됐다고설명했다. 이러한사례에서보듯이공동체환경은자살을예방하는효과가크다. 도움이절실할때도움을받을수있고극도의절망감에빠졌을때위로를받을수있는사람이자살을기도할가능성은현격하게줄어들기때문이다. 따라서무한경쟁속에주위를돌아볼여유도없이살아가고있는삶의방식을바꾸고나보다어려운상황에처해있는사람들을배려하고더불어함께살아가는사회분위기를만드는것이무엇보다중요하다. 교회는사회에서성공하고최고가되라고가르치기보다힘들고어려운여건에서도하나님의영광을위하여산다는것이어떤것인지를가르쳐야한다. 뿐만아니라나보다더어려운이웃을도울수있고약한사람을배려할수있도록가르쳐야한다. 그리고교회의소모임들과위원회활동들을통해서지역사회에있는취약계층에관심을갖고구체적인지원책을마련할필요가있다. 하나님의형상을따라지음받은귀한생명을쉽게포기하지않도록한국교회가힘을모을때이다.

정용구 선교사 2019-10-09

선교학을 공부하는 첫 시간에 교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다. 아주 오래전에 1년 365일을 오직 복음 전파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0년의 사역을 마친 후 ‘하루 정도’는 안전한 곳에 배를 띄우고, 그곳에서 휴식을 통해 서로 위로하는 시간을 갖자고 의견을 모았다. 첫 모임이 너무 은혜가 되기에 ‘매년’ 이런 모임을 가지자고 결의했다. 5년 뒤에는 매년 모이는 모임이 너무 좋고 아쉬우니 ‘일주일’을 모이고, 이 시간에 복음을 전하는 세미나를 개최하자고 결정했다. 그렇게 5년 정도를 하고 나니 매년 일주일의 복음을 전하는 세미나와 세미나에 쓰일 식사 준비 등 기타 준비를위한 ‘일부의 사람’을 따로 세우자는 결정을 내렸다. 5년이 지나서는 매년 모임을 준비하던 이들이 너무 많은 인력을 위한 준비를 해야 되니 ‘100% 복음을 전하던 예산의 일부’를 조정해서 이 모임을 위한 관리·준비에 사용하자고 다시 결정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서는 장소 준비에 어려움이 있는 만큼 아예 ‘큰 배’를 구입하고, 이 배의 상시 운영에 따른 ‘관리비와 운영비’를 책정하자고 결정했다. 모임은 갈수록 세련되면서, 노하우도 쌓였다. 모임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적이고, 안정된 예산 배정과 전문 인력들이 투입되면서 이전보다 더욱 체계를 갖췄다. 그런데 이렇게 수십 년이 지나고 많은 사람들이 바뀌면서 뭔지 모를 ‘공허한 마음’이 생겨났다. 왜 그런가를 다시 분석해 본 결과 자신들의 정체성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인력과 시간, 재정’을 다 사용하던 것이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가장 중요한 자신들의 이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당시 교수님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각색된 것이었다. 하지만 ‘선교와 교회, 교회와 선교’를 생각할 때 교수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 도전과 원칙으로 와 닿았다. 매년 10월이 되면 많은 교회들이 정책당회를 하게 된다. 선교사로서 마음이 졸여지는 순간이다. 어려운 한국교회의 여러 복합적 상황으로 인해 사업을 줄이거나, 긴축재정을 바탕으로 예산을 책정하는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교’만 우선순위를 배려해 예산을 줄이지 말고 확대해 달라는 요구는 무리수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다. 반면 여러 선교사들의 어려움을 알기에 더욱 마음을 졸이게 된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행적에서 여러 중요한 회의들을 보게 된다. 그 회의의 주요 주제가 ‘교회가 어떻게 선교를 해야 하는가?’에 맞춰 진행된 것임을 발견한다. 선교사의 입장에서 각 교회가 정책당회를 준비하는 시점에서 먼저 생각했으면 하는 점은 풍성한 선교후원과 지원은 아닐지라도,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 한국교회가 어떻게 선교를 계획하고 돌파구를 만들 것인지를 구상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선교현장의 여러 어려움들을 파악하고, 교회가 어떻게 선교에 참여할지를 교회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정책당회 시간이 됐으면 한다. 또한 성도들이 이를 위해 기도하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선교사나 선교전문가들을 초청한 세미나를 열어 어려운 시기에 선교적 교회로서 효율적인 선교사역 감당해 나갈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기반으로 개 교회의 형편에 맞게 선교전략을 마련하고, 추진 계획들을 세웠으면 한다. 비록 선교를 위한 방대하거나 화려한 계획이 아니더라도 한국교회가 어려운 현장에서 귀한 사역을 감당하는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한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머리를 맞대 기도하며 좋은 아이디어와 선교 사업들이 계획되기를 기대한다.

허성욱 이학박사 2019-10-07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 최근 어떤 분의 출사(出仕)와 관련해 나라 전체가 떠들썩한지 달포가 지났다. 그 여파는 언제까지 계속될지 가히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필자는 그 분야에 식견이나 경험이 없어 뭐라고 견해를 말할 형편은 아니다. 그런데 TV를 시청하지 않아도, 신문을 읽지 않아도 그 이야기는 저절로 귀에 들려온다. 또한 이런저런 견해도 어느 새 ‘책이나 읽고 본연의 일에 마음을 쏟고 있는 내 공간’에 비 집고 들어온다. 그러면 이런 소리는 어떻게 전달될까? 소리를 내는 발음체가 진동하면 주위의 공기가 압축과 팽창을 되풀이하면서 발음체의 진동과 똑같은 진동을 하게 된다. 이처럼 공기의 일부에 주기적인 변위가 일어나면 공기의 밀도가 변한다. 이 공기 밀도의 변화가 공기 내에 복원력을 생성하고 이것이 또 공기를 진동시킨다. 이 진동이 우리의 귀에 도달하면서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발생하는 소리마다 다 우리 귀에 들린다면 도저히 시끄러워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귀에 들릴 수 있는 소리의 진동수 범위를 16~2만 헤르츠로 한정해 주셨다. 이를 우리는 ‘가청진동수’라고 부른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우리 귀에 들리는 이 범위의 소리를 ‘음파’라고 한다. 보통 우리가 듣는 소리의 진동수는 5,000헤르츠 정도이다. 더 높은 진동수로 갈수록 불쾌감이 더해진다. 이 소리의 속도는 공기 중에서 섭씨온도 0℃일 때 331.5m/s이고, 1℃올라감에 따라 0.6m/s씩 빨라진다. 온도가 높을수록 소리의 속도가 빨라진다. 그렇다면 우리 사람들의 마음이 들뜰수록 사람들이 내는 소리도 빨리 전파된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말하기를 더디 하려면 마음이 들뜨지 않아야 될 것이다. 어떤 일이나 사람과 사물에 관한 것을 말할 때는 차분하게, 그리고 과연 말할 필요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고 소리를 발하는 것이 옳겠다. 내가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천지간에 대격변이 일어나고 나는 그 책임을 혼자 짊어져야만 될 것 같으면 또 몰라도 말이다. 대개 화젯거리는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중요성과 주관적 견해가 여러모로 다를 수 있고,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정의를 내세우면서도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 돼 간다. 성경 속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에 따라 말씀의 적용이 굴절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파면의 각 성분이 다른 속도로 진행할 때 음파는 그 진행방향이 휘게 된다. 이것을 ‘소리의 굴절’이라고 한다. 낮에는 지표면이 따뜻하므로 지표면 쪽이 빨라지고 그 음파의 위쪽 면은 느려지므로 음파는 상공 쪽으로 굴절한다. 그래서 소리는 멀리까지 전달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밤에는 지면 쪽이 주위보다 차가워져 소리는 지면 쪽으로 굴절한다. 그러므로 밤에는 소리가 멀리까지 잘 들린다. 인생의 밝고 좋은 소리는 멀리가지 못하고, 온갖 어두운 소리들은 천리를 그것도 광속으로 전파될 수 있다. 정의도, 신앙도 굴절이 일어나는 것이 세상이다. 우리의 기준은 오직성경 말씀이어야 한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이영훈 위임목사 2019-10-06

지난 7월에 엑시트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가스 테러로 인해 사람들이 도시를 탈출하는 내용이다. 영화에서 가스 테러가 처음 발생했을 때 지상에는 이미 독가스가 퍼져 사람들이 옥상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옥상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헬리콥터의 구조를 받기 위해 자신들을 알리려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헬리콥터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SOS 신호 박자에 맞춰 깜빡이는 스마트폰 불빛과 옥상에 설치돼있던 전광판 불빛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도 보이지 않는 테러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북한은 작년 9월에 9·19 평양 공동선언에 합의했지만, 여전히 남한을 비난하며 미사일로 도발을 일삼고 있다. 일본은 화이트리스트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해 우리나라의 기업과 경제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국내 경제 상황도 여전히 어렵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9년 8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작년 8월보다 취업자 수가 45만 2,000명 증가했다. 하지만 그중 86.5%인 39만 1,000명이 60세 이상의 노인 일자리이고, 77.7%인 35만 1,000명이 주 17시간 이하의 초단기 일자리거나 일시휴직 상태였다. 오히려 30·40대 취업자는 각각 9,000명, 12만 7,000명이 감소했다. 30·40대 취업자 동반 감소는 23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국민의 의견이 양극단에서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보수와 진보가 이처럼 극명하게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내고 있었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혼란한 시대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엑시트 영화에서 구조를 바라는 사람들이 스마트폰 불빛을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들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기도의 촛불을 높이 들어야 한다. 출애굽기 17장에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 장면이 나온다.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합쳐 싸워야 할 상황에서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께 손을 들어 기도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모세의 손이 올라가 있을 때는 이스라엘이 이기더니 손이 내려올수록 아말렉이 이겼다. 그래서 모세는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해가 지도록 팔을 내리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특권은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시고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신다. 모든 교파를 초월하여 함께 나라를 위해 기도의 촛불을 높이 들자. 정치, 안보,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내어드리자. 일천만 그리스도인들이 한마음으로 기도의 촛불을 밝힌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갈등과 분열과 미움과 분노와 거짓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이 땅에 가득 넘쳐나게 될 것이다. 무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이제 제법 선선한 가을바람이 분다. 계절이 바뀌듯이 우리 사회에도 답답한 문제들이 지나가고 새로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길 간절히 기도한다. 믿는 자 모두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임하여 가정마다 평안함이 다가오고 교회마다 부흥이 다가와 사회가 안정되고 예수님으로 하나 되어 통일 시대를 열어가기를 소망한다.

정용구 선교사 2019-10-03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일 년의 절반을 지내왔기에 지난 상반기 동안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자기점검과, 다음 해를 대비한 중요한 결단과 준비를 위한 차원에서 책을 읽거나 연구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선교사와 책’은 보기에 너무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책인 성경을 들고 가서 복음을 전하고, 글이나 교육이 열악한 선교지에서 글을 가르쳐 주고 책을 읽도록 돕는 모습에서 항상 책과 가까이 지내는 선교사의 모습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된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경험했던 지난 시간, 책에 대해서는 남다른 경험이 있었다. 2년 만에 처음으로 비자갱신을 위해 선교지에서 한국으로 나왔을 때, 마음 같아서는 읽고 싶거나 사역에 필요한 책들을 선교지로 가지고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제한된 항공기의 수하물 무게로 인해 다른 생필품에 우선순위를 두고 짐을 채워 넣어야 했던 기억이 있다. 자녀들이 먹을 한국 음식 재료와 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책을 빼고 짐을 쌌던 게 기억난다. 그 이후에도 간혹 한국을 방문하면 귀한 책들을 선물로 받았지만 제대로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아쉬운 것은 최근 도서 트렌드나 흐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즘 같이 기술이 발달해 여러 전자책이나 관련 앱이 나와도, 왠지 손에 침을 묻혀 종이 소리를 들으며 책을 넘기는 기분이 좋다. 필요한 부분에 밑줄을 치고 읽으면서 메모하며 되새기는 맛을 느끼는걸 선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는 선교지로 책을 많이 가져가지는 않지만, 간혹 선교지를 방문해 책을 선물해 주는 이들이 너무 고마웠다. 심지어는 물품을 싸가지고 온 한국 신문도 그리워서 버리지 않고 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선교지에서 책과 관련된 큰 사건은 비자거부로 인해 선교지를 떠나게 됐을 때 일어났다. 책 욕심이 많았었는지 한국에서 가져갔던 책, 이렇게 저렇게 모은 책, 주위의 선교사들이 건네준 책이 5,000권 정도였는데 아쉽게도 대부분의 책들을 가져오지 못하고 보관할 곳이 없어서 파기 처분했던 적이 있다. 1,000권 정도를 주변 선교사들에게 주고, 한글학교 등에 기증을 했어도 많은 책을 버려야 했었다. 그 가운데에는 선교지에서 기록한 중요한 문서나 자료들도 적지 않았다. 최근 1900년대 초기에 한국에 와서 선교사역을 했던 선교사들의 글을 읽고 있다. 선교지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재미있기도 하지만, 귀중한 자료들을 통해 그 당시 선교사들이 얼마나 어렵게 일을 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선교사와 책’이라는 주제의 글을 쓰다 보니 두 가지 바람이 떠오른다. 첫째는 선교지를 방문할 때 선교사에게 책을 좀 선물해 줬으면 하는 것이다. 한국음식도 좋지만 책을 통해서 참 많은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둘째는 선교사를 통해 기록되는 기도편지나 선교사역에 대한 정보나 글들을 잘 쓰도록 문서 지원팀들이 각 후원교회나 후원자들을 통해 만들어지고, 좀 더 체계적이고 전문화 된 선교사를 돕는지원팀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이라는 것이 참 쓰기가 어려운 만큼 누군가가 이를 돕고, 책으로 만들어 자료화한다면 선교의 역사를 알리는 매우 중요한 사역이라는 생각이 된다. 선교사들도 이 일을 중요하게 여겨 자신을 통해 이뤄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잘 기록하고 남겨서 그 글과 책을 통해 지금보다 더 많은 선교의 동역자들이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김성윤 교수 2019-09-28

선택이 어려운 경우는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많은 경우이다. 오늘날은 SNS(사회 관계망)통해 많은 사람과 대화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화할 친구가 지척인데 진실한 대화를 나눌 친구는 없다. 이 친구 저 친구와 짧은 대화만 주고 받다보니 평소에도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바스 카스트의 책 ‘선택의 조건’은 선택의 폭이 넓을수록 행복해지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 사례 중의 하나로 어떤 사내가 아주 작은 외딴 섬에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섬에는 여자라곤 딱 한 명밖에 없다. 이 경우 그 남자는 어떻게 하면 저 여자와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인가만 생각하게 된다. 만약 섬에 여자가 열 명쯤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중 한 명과 잘된다 해도 또 다른 여자를 아홉 번이나 사귈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열려있게 된다. 우리나라의 전근대 사회에서는 동네에 사는 처녀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선택의 폭이 좁았기 때문이다. 그 결혼도 부모님의 의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통신수단을 비롯한 교통의 발달로 이성간의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만날 수 있는 수단도 다양해졌다. 더욱이 결혼 자체를 없던 일로 돌리는 일도 가능해졌다. 그러다보니 결혼을 안 하고 미루거나 아예 독신으로 사는 젊은 층이 많아졌다. 실로 선택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인 대니얼 길버트는 이런 현상에 대해 사람들이 선택한 일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경우 바로 돌아서서 다른 선택지를 찾는다고 했다. 예를 들면 맘에 안 드는 상품을 구매했다면 바로 반송처리 한다든가, 레스토랑에를 갔는데 서비스나 환경을 비롯한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앉지도 안고 바로 나가 버린다. 만약 레스토랑이 주위에 하나밖에 없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과 관점을 바꾸고 이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 갈라설 수 없어 그 배우자와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 배우자의 좋은 점과 고마운 점만을 찾으면서 잘 살아간다. 요즈음 우리나라에 황혼 이혼이 늘어나는 현상도 사회변화에서 오는 진통중 하나이다. 나이 들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지금 살고 있는 상대보다 더 나은 상대를 찾을 수 있는 선택 폭이 넓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세태의 문제도 아니요, 법적 문제도 아닌 선택의 문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불편해도 집을 수리하고 아끼며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교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선택의 폭이 제한돼 현실을 벗어나거나 피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관점을 바꾸고 그 현실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일방 통행선위에서 차가 밀린다면 불편을 감수하고 기다린다. 그래도 후회가 안 되는 이유는 선택의 폭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관점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체념한 상태에서 참고 기다리므로 불만요소도 적어진다. 그러나 왕복 복수 차선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유독 내 차선만 막힌다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도 불만이 적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동네에 교회가 하나 밖에 없다면 그 교회를 행복한 마음으로 다닌다. 하지만 비슷비슷한 교회가 동네 가까이 여럿 있다면 아예 교회를 가지도 안거나 이 불평 저 불평을 하면서 교회를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선택 가능성이 넓어진다는 것이 꼭 행복이나 만족의 길로 가는 것만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인간은 ‘내가 다른 걸 선택했더라면 더 행복하거나 만족했을 것’이란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이래서 다양한 선택이 가능할수록 만족하고 행복할 것 같지만 역설적이게도 만족도는 낮아진다. 이게 선택의 역설이다.

여주봉 목사 2019-09-25

나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부터 이사야 하반부에서 신약의 교회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유업에 대해서 나누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느 때보다 그 유업들을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시기를 열망하고 계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유업들은 철저하게 십자가 복음의 유업들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즉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질 때, 그 유업들이 그곳에 주어질 것이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부의 회복에 대해서 나누려고 한다.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신약의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유업들 중 하나는 부의 유업이다. 이 지면을 통해서 내가 전에 나눈 것처럼, 부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기복신앙은 거짓 신앙체계이다. 반면에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설 때, 하나님께서 신약의 교회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유업 중 하나는 부의 회복이다. 우리는 이사야 60장에서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다.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사 60:1-5). 우선 이 구절은 가장 먼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가 회복될 것을 말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사야 60장이 보다 근본적으로 신약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구절은 신약의 교회에 부의 유업이 주어질 것을 말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페트라 주석이 이 부분을 잘 정리하고 있다. "여기 '바다의 부'는 '하몬 얌'인데, ‘하몬’은 ‘군중’(13:4; 단 10:6), '많은 군대'(삿 4:7; 단 11:11-13), '많은 물'(렘 10:13; 51:16), '큰 재'(시 37:16; 전 5:9) 등을 뜻하며 '얌'은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을 뜻하는데 바로 이어지는 구절 '열방의 재물'이 본문의 동의적 병행구임을 고려할 때 '하몬 얌'은 '이방인들의 재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포로 귀환 시 이방의 재물이 지원될 것을 시사함과 동시에(스 1:6) 메시야의 통치가 시작되면 이방인의 소유물들이 시온, 곧 교회에게 바쳐짐을 예언한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땅의 재물이 기록한 용도에 사용되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이어지는 구절들이 이 점을 더 잘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읽을 때는 그 당시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6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7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사 60:6-7). 특히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사 60:17). 이 구절에 대해서 다시 페트라 주석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이사야가 비유로 들고 있는 물질적 풍요는 솔로몬 시대의 그것을 연상시킨다(왕상 10:21-27). 본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다음 두 가지가 무난하겠다. (1) 새로이 회복될 시온의 영적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물질적 번영과 아름다움에 비유한 것이다. (2) 다가올 메시야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더 나은 것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교회 역사를 살펴볼 때 구원의 복음이 들어간 지역은 대체로 정치, 경제, 문화, 그 외 모든 분야에 있어서 발전하고 복된 곳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 때 모두 다 부자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의 삶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 가지는 오직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신약의 교회 위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유업 중 하나는 부의 유업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난 2천년의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이 얼마나 사실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서 꽃을 피운 나라마다 부의 유업이 주어졌다. 오늘날도 모든 기독교인의 2/3 정도가 중산층 이상이라고 한다. 그 말은 부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의 유업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도 약간 나누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가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세계의 최빈국 중 하나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나라에 주신 하나님의 유업이었다고 믿는다. 1955년 우리나라의 GNP(1인당 국민소득)는 60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1963년까지도 우리나라의 GNP는 불과 104달러였다. 1인당 일 년 동안 번 돈이 겨우 10만원 남짓이었다니 한 번 생각해 보라. 그런 나라가 오늘날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침체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이킬 때,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하나님의 부흥과 열방의 유업이 다시 주어질 뿐 아니라, 부의 유업도 우리나라에 더욱 놀랍게 주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영훈 위임목사 2019-09-24

세찬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듯이 한국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 8월 2일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했다. 그동안 일본 기업과 협력해 제품을 생산하던 한국 기업들은 현 상황을 초조하게 지켜보며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은 하루가 멀다 하고 미사일을 쏘며 한국을 조롱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다. 미국도 자국의 이익에 따라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해 우리나라는 미국에 작년보다 8.2% 인상한 1조 389억 원을 지불해야 한다. 최근 중국과 러시아도 군용기로 한국 방공식별구역(KADIZ)을 침범해놓고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사회가 양극단으로 나눠져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권은 당의 이념에 따라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시류에 휩쓸려 국민들도 제각각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렇게 어두운 밤을 지날 때 한국교회가 깨어 일어나 한국을 새롭게 해야 한다. 6·25전쟁 이후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약했던 당시에도 한국교회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며 절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외쳤다. 이러한 희망의 물결이 새마을 운동으로까지 이어져 한강의 기적을 이뤄 현재의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로움 때문에 그때 그 시절의 순수하고 뜨거운 간절함이 사라져 버렸다.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 시절, 통성으로 기도할 때 강단에서 기도를 마치려고 종을 아무리 쳐도 기도가 그치지 않곤 했다. 돌아보면 비록 가난했지만 성령충만의 기쁨이 넘쳤던 그 시절이 그립다. 이제 교회는 물질의 풍요로움에 안주하려는 겉옷을 벗어버리고 일어나 세상에 희망을 외쳐야 한다. 시대가 아무리 어둡고 혼란스러워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미래와 희망이기 때문이다(렘 29:11).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이 이뤄진다는 절대 긍정의 생각을 품고 모두 함께 일어나자.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희망의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모든 개 교회와 교단들이 하나로 예수님과 함께 절대 희망의 행진을 할 때 모든 어려움이 안개와 같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휴전선이라는 남북분단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복음 통일을 이뤄지는 소망,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 임한 오순절 성령의 충만이 한라에서 백두까지 임해 우리가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 거룩한 민족이 되는 희망을 꿈꾸자. 아무리 강대국들이 우리에게 고함을 치고 협박을 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나라를 무너뜨릴 수 없다. 북한이 아무리 미사일을 쏘아대도 자신의 약함을 드러낼 뿐이다. 일본이 아무리 경제적인 압박을 가해도 우리나라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골리앗과 같은 강대국들이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싼다 해도, 결국 하나님과 함께 등장하는 다윗과 같은 믿음의 백성들이 승리하게 된다. 한 번도 흔들려보지 않은 나무가 있겠는가. 흔들려봐야 중심이 무엇인지 오롯이 드러난다. 흔들릴수록 강한 바람 앞에서 중심을 잡는 법을 배운다. 흔들림을 통해 한국교회가 깨어 일어나게 되길 바란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첫사랑이 회복되고 믿음의 뿌리가 견고해져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의 때를 맞이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정재영 교수 2019-09-22

목회자의 경제 현실 한국 교회는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고 있다. 복음을 한반도 곳곳에 전하고, 민족 복음화를 위해 헌신할 일꾼 양성을 위해 전국에 신학교를 세우던 시대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목회자가 차고 넘쳐서 사역지를 찾지 못하고 쉬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 목회를 포기하고 생업을 위해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의 삶은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웬만한 도시 근로자의 삶보다도 못한 사례비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며 자녀들에게 충분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형편에 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리기사를 하는 목회자들도 한 둘이 아니다. 전에는 성도들의 눈을 피해 심야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이제는 이런 일 저런 일 가릴 처지가 아니라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2017년에 실시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목회자의 월 소득은 평균 176만원으로 나타났다. 이는 연봉기준으로 대기업 정규직의 소득 평균인 6521만원의 32.4%, 중소기업 정규직 3493만원의 60.5% 수준으로 조사됐다. 국내 전체 임금 근로자 45.2%가 월 급여 200만원 미만인 것과 비교하면 목회자의 소득은 전체 임금 근로자 수준만도 못한 것이다. 이 조사에서는 가족으로부터 받는 소득을 포함한 기타 소득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기타 소득은 월 평균 108만원으로 월 소득과 합하면 284만원으로 나타났다. 기타소득은 5년 전 조사에 비해 61만원 늘어난 수치이고 월 소득은 37만원 줄어들어 목회자의 소득이 5년 전에 비해 커다란 변화가 없으며 물가 인상분을 고려하면 거의 정체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월 소득은 줄어든 데 반해 기타 소득이 늘었다는 것은 적은 사례비를 충당하기 위해 다른 소득원을 찾았다는 뜻으로 한국교회의 불안정한 재정 상태와 함께 더 어려워진 목회자의 경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조사 결과다. 그나마 중소 도시에 있는 교회들과 교회 규모가 작은 경우 평균 소득이 더 적게 나타나 많은 목회자들이 실제로는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임을 보여준다. 지역으로는 인천/경기 지역의 목회자들의 월 소득이 평균 135만원으로 평균을 훨씬 밑돌았으며 중소도시 목회자들 역시 157만원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적었다. 실제로 필자가 직접 입수한 한 주요 교단의 지방 대도시에 속한 한 지방회 28개 교회들의 담임 목회자의 월 소득은 사례비를 받지 못하는 교회 4개를 포함해서 평균 155만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같은 시의 다른 지방회는 사례비를 받지 못하는 교회 3개를 포함해서 평균 130만원이 채 안 됐다. 소형 교회의 경우 더욱 열악하다. ‘한목협’ 조사에서 교인 수 50~100명 미만 교회 목회자의 월 소득은 185만원, 그리고 50명 미만인 초소형 교회의 경우에는 124만원으로 300명 이상 교회의 목회자 월 소득 315만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극빈층 수준에 해당했다. 올해 4인 가구 기준으로 기초 생활 보장 수급비를 받는 월 소득이 138.4만원인 것을 보면, 실제로 상당수의 소형 교회 목회자들이 수급 대상자 수준인 극빈층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책임을 맡고 있는 <21세기교회연구소>와 <한국교회탐구센터>가 공동으로 소형교회 목회자들을 조사했다. 결과를 보면 전체 응답자의 21.4%가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있으며 8.3%는 부정기적으로 받고 있고 70.4%만이 정기적으로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벼랑으로 내몰리는 목회자들 이러한 조사 결과로 볼 때, 연봉이 1억 원이 넘는 고액의 사례비를 받는 목회자들은 최소한 교인 수 2천 명이 넘는 (초)대형교회들에 국한된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소형 교회의 목회자들은 일반 임금 근로자 수준 이하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전체 한국 교회의 교인 수 규모별 비율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교계에서는 교인 수가 1천 명이 넘는 대형 교회를 전체 7만 여개의 한국 교회 중 5% 미만으로 보고 있다. 100명 미만의 소형 교회가 70% 정도를 차지할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대략 5만 개에 이르는 소형 교회 목회자들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어 사실상 빈곤층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목회자 다섯 명 중 세 명(60.5%)은 현재의 사례비가 가족을 부양하는 데 부족하다고 응답했다. 이것은 5년 전의 48.0%보다 12.5%p 늘어난 수치이며 충분하다는 응답은 5.7%에 불과해 5년 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6.4%p 감소했다. 교회 사례비가 부족하다는 응답은 연령이 젊을수록 높고 도시가 아닌 읍·면 지역에서 더 높았다. 또한 개척목사에게서 더 높고 교회 규모가 작을수록 높게 나타나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있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척박한 경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목회에 몰두하다가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많고 과로사나 돌연사로 목숨을 잃는 목회자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한 달 전에는 인천의 한 개척교회 4년차인 목회자가 스트레스성 뇌출혈로 돌연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평소에 질병을 앓았던 것이 아니라 목회 중에 받은 스트레스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분명한 상황이어서 어린 자녀를 둔 사모는 물론이고 함께 목회하던 동료 목회자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사역에 헌신하다가 사망에 이르러도 제대로 된 보상이나 유족들을 도와줄 수 있는 체계적인 방법이 없다. 교단들의 은급 제도도 부실하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소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4대 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계에서는 목회자들의 경제적 형편을 개선하는 일에 손을 놓고 있다. 교회마다 교인 수가 줄고 있고 헌금도 줄어드는 상황에서 교회도 교단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어떤 이는 지금은 신학교 지원자도 줄고 있고 앞으로 목회자 배출이 줄어들게 될 것이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한 통계에서는 여전히 교회 수 증가보다 목회자 수 증가가 앞서고 있어서 최소한 한 세대 정도는 이러한 상황에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목회자들에게 영성이 중요한 덕목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스스로 가족을 부양하기가 어렵거나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목회자가 자신의 경제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매우 적절치 않게 여겨지는 현실이다. 그러나 목회자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경제적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 이것은 소수의 목회자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한국 교회 안에 절반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다수의 목회자가 처한 현실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개인의 능력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이므로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협력해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개교회가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전체 한국 교회가 하나의 공교회로서 공동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한국 교회는 목회자의 경제적 형편에 대해서 시급한 과제로 여기고 이의 해결을 위해서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빈곤 문제를 위해 노력하듯이 한국 교회의 양극화와 목회자 빈곤 문제를 위해서도 모든 교회가 협력해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김성윤 교수 2019-09-15

“우리는 4개의 인간의 기본적 자유위에 세워진 세계를 갈망한다. 첫째는 세계 도처에서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이다. 둘째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신을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이다. 셋째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넷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이다.” 미국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의 이 말은 인류의 사회 정치적 이상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집약한 명언이다. 인간이라면 피부색을 떠나 마땅히 세계 도처에서 이 네 가지 기본적인 자유를 모두가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생각과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북쪽에서는 이 자유가 최악의 상태로 제약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이 자유가 실종 상태다. 모든 사람이 가난이나 질병, 기아와 궁핍에서 해방돼야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이마저 북한에서는 세계 최악의 수준이다. 인간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압제·폭력·공포에서 해방돼야 한다. 그런데 연일 이 같은 압제와 폭력의 공포에서 북한 주민들이 시달린다는 소식뿐이다. 전자가 정치 사회적 자유라면 후자는 경제적 자유의 보장을 의미한다. 루스벨트가 말했던 4대 기본 자유의 전반은 인간의 형이상학적 정신적 자유를 강조했으며, 후반은 형이하학적인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지구촌 도처에서 이 4대 자유가 실현되려면 전도요원한 일이 되고 있다. 어쩌면 이 4대 기본적 자유가 한반도 북쪽에서만이라도 보장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오랜 시간동안 투쟁과 노력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 만큼 인류의 이상은 저 멀리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상을 향해서 꾸준히 쉬지 않고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4대 자유는 인류의 정치 사회적 이상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집약한 명언이다. 우리는 이 같은 자유를 구현하기 위해 투쟁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한다. 왜냐하면 이상의 실현은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이상의 구현을 위해서 모두가 합심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처음부터 호랑이를 그리려는 사람은 호랑이를 그리다 보면 고양이라도 그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고양이나 그리려는 사람은 나중에는 쥐를 그리게 된다. 그래서 높은 이상을 가지라는 것이다. 눈앞의 현실에 급급하다보면 먼 미래를 볼 수가 없다. 현대를 백세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미래를 보지 못하고 오늘에 초점을 맞춰 삶을 영위하는 것은 하루살이 벌레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간은 미래가 있고 드림을 가질 때 행복해진다. 우리의 삶은 단거리가 아니다. 백세를 산다는 것은 대략 3만 6,525일이나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살이 벌레처럼 살아서야 되겠는가? 꿈과 이상과 신앙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방향을 잃고 만다. 따라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고 그 청사진을 현실로 구현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면 다 같이 누리고 함께 소유해야 할 일이 언론자유의 구현, 신앙자유의 보장이다. 나아가 빈부격차 없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이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 기본적인 자유를 지구촌 곳곳에 구현할 수 있도록 성직자가 앞장서고 기독교인들이 뒤를 받쳐줘야 할 것이다.

이정기 목사 2019-09-08

하나님은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노하실 일만 골라해도 참고 참으신다. 정말로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무작정 참으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참으시면서 경고하신다. 때로는 사람을 통해서, 때로는 설교를 통해서, 때로는 내면의 소리로 경고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를 계속 무시하면 결국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매를 드신다. 징계하신다. 잠3:12절에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말씀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라'는 말이 있다. 자식을 사랑하면 무조건 "오냐, 오냐"만 하면 안 된다. 물론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식을 바라봐야 하지만 잘못된 것은 고쳐주어야 한다. 계속 잘못된 길로 가면 매를 때려서라도 고쳐야 한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셨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나라에 평화가 임했다. 그러나 솔로몬이 이방의 여인들을 아내로 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여인들의 꾀임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했다. 이방의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결국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나라가 둘로 쪼개졌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찢으신 것이다. 그래서 르호보암을 중심으로 남 유다,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북 이스라엘로 나누어지게 된다. 솔로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북 이스라엘의 왕들은 좋은 왕들이 하나도 없다. 모두 여로보암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이 잘못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절기를 파기했다. 제사장을 아무나 세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죄는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단과 벧엘에 두고, 백성들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섬기게 했다. 결국 우상 숭배 때문에 하나님은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다. 무너뜨리셨다. 남 유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하스, 므낫세, 아몬 등의 왕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바알을 위한 신당을 만들었다.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다.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다. 결국 우상 숭배 때문에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처럼 바벨론을 들어서 남방 유다를 치셨다. 뽑으시고, 파괴하시고, 파멸하시고, 넘어뜨리셨다. 그러나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남 유다를 완전히 멸하지는 않으셨다. 70년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고생하게 하신 뒤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셨다. 다시 무너진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게 하셨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한 때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려질 만큼 경건한 도성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많았던 도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공산정권이 장악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민족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이다. 1938년 9월 9일, 평양에서 장로교 총회가 열렸다. 그때 무엇을 가결했는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의 죄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애국적인 국가의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솔선수범해서 신사에 참배하자!' 물론 그때 우리가 잘 아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그 자리에 없으셨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시다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1년뒤 주기철 목사님이 소속되어 있는 평양노회에서 주기철 목사님을 제명처리 한다. 그 이유는 '주기철은 자기 혼자 천당에 가려고 교회와 양떼를 버리고 감옥에 가서 공짜 밥을 먹고 있으니 그는 삯군 목사요, 직무를 유기한 자이므로 제명한다.' 였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되었다. 해방 직후에 평북노회가 열렸다. 그때 어느 노회원이 손을 들고 정식으로 발의했다. '우리가 일정시대에는 일제의 압박에 굴복해서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하면서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합시다.' 그러자 다른 노회원이 그 의견을 묵살시켜 버렸다. '왜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입니까? 총회에서 분명히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애국적인 국가의식이라고 가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회개하자는 의견을 묵살시켰다.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1949년 의산노회에서는 이런 결정을 내렸다. '총회의 결의을 무시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갔다온 출옥 성직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이므로 강단에 세우지 말도록 한다.' 그러니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어찌 면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무너뜨리신다. 1950년에 6.25가 발생한다. 다 파괴되고 무너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건설하셨다. 다시 심으셨다. 한국 교회와 국가가 놀라운 부흥을 이루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는 이유는 다시 새롭게 세우시려는 것이었다. 호세아 6: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렇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다. 여호와께 돌아오면 반드시 회복시켜 주신다.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어 주신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무너뜨림에 있지 않고 새롭게 세우는데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무너뜨리고 세우라는 사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만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셨다. 빛이 무엇인가? 어두움을 없애고 밝게 하는 것이다. 어두운 세계를 무너뜨리고, 밝은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악을 무너뜨리고 선을 세워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타파해야 하는 구습이 많다. 가진 자들의 횡포, 타락해가는 세속 문화, 권위주의, 퀴어축제, 잘못된 성평등 조례, 사회 곳곳에 잔재하고 있는 잘못된 행태들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것은 무너뜨려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잘못된 것을 파괴하는 사람이다. 무너뜨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파괴적인 것으로 끝나면 안된다. 언제나 건설적이어야 한다. 부정과 부패와 불의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다시 세워야 한다.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억눌리지 않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작은 수고와 봉사들이 비록 무시당할 때도 있겠지만, 이로 말미암아 부정적인 것들이 뿌리 뽑혀지고, 긍정적인 것들이 아름답게 세워진다면 이 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기전에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속에 있는 죄, 교만, 불신앙, 부정적인 생각, 게으름, 탐욕, 이기심, 다 뽑아내고 무너뜨리고 파괴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새로운 삶을 세워 나가야 한다. 그리고 탐욕으로 가득한, 불신앙으로 가득한, 미움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들어가 탐욕을 뽑아내고, 미움을 뽑아내고, 불신앙을 뽑아내고, 갈등과 대립을 뽑아내고, 절망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을 뽑아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세상, 사랑이 가득한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

허성욱 이학박사 2019-09-0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창 1:4~5상). 빛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인정하신 것을 두고 일부에서는 “어두움은 죽음과 상통하고 빛은 생명과 상통하기 때문이며 또한 어두움은 무질서와, 빛은 질서와 연결되기 때문”이라거나 “빛의 창조가 어두움이 그 본질인 혼돈 즉 카오스(Chaos)에 대한 반동적 사역임을 표현”이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빛은 혼돈을 질서에로 수습하는 하나님의 상징이고, 어두움은 질서를 혼돈으로 되돌리려는 하나님의 적대자”로 보기도 한다. 또 “주야의 교체와 시간의 배분에서 우주는 빛과 어두움의 2대 세력의 싸움터”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생각은 빛과 어두움에 대한 영적인 의미와 물리적 현상을 혼돈하거나, 이방 신화의 영향이 성경에 끼쳐 있을 것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이 말씀은 단지 아직 광명들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식물들도 만드시기 전에 모든 생명의 존재조건인 최초의 빛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은 선하고 완전하신 자신의 뜻에 합당한 빛을 보시고 만족해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빛의 창조를 두고 어두움은 무질서이고 빛은 질서이며, 어두움은 악이고 빛은 선이며 어두움은 실존적 절망상황이며 빛은 희망과 밝은 미래라는 주장도 있다. 만약 그 주장이 옳다면 빛이 창조되면서 어두움은 멸절되고, 이 세상의 모든 어두운 것이 밝은 빛의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빛이 창조된 후에도 여전히 무질서, 어두움, 악, 절망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빛은 물리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물리학적 견해에서 보면 어두움은 빛과 같은 실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두움이란 단지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빛의 창조가 어두움의 멸절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두움이 나뉘게 됐을 뿐이다. 그래서 빛과 어두움은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다. 우주에 관한 학설의 하나인 진동우주설은 팽창하고 있는 우주는 언젠가는 다시 수축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이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이 ‘우주의 알’에서 생겨나서 다시 ‘우주의 알’로 되돌아가는, 말하자면 팽창과 수축을 거듭 반복하고 있는 것이 된다. 어떤 과학자는 ‘팽창-수축’을 반복하는 우주와 창세기 1장 4절을 연결해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눈 것은 우주를 팽창의 시기와 수축의 시기의 구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지나친 해석이다. 창조된 빛이 비취자 둥근 지구의 빛이 비취는 쪽 반구(半球)는 광명한 세상으로, 반대쪽 반구(半球)는 어두운 세상으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지구표면에 빛과 어두움, 밤과 낮이 동시에 나타났다. 오늘에 와서는 이 단순한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지만 모세 시대의 과학으로는 빛과 어두움, 밤과 낮이 동시에 지구표면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땅이 둥글다는 획기적인 생각을 하고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한 사건이 언제 일인가를 생각하면 창세기1장 4절은 놀라운 과학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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