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기 목사2018-10-17

어느 시골에 사생아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의 아버지가 누구일까 하며 수군거렸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없었다. 그 소년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사생아라고 할까봐 숨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어깨를 잡으며 ‘넌 누구의 아들이지?’ 하는 소리가 있었다. 목사님의 소리였다. 처음 부임하신 목사님의 질문이기에 이제는 꼼짝없이 탄로 나게 되었구나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 그렇지, 하나님 아들이지, 하나님 아버지 많이 닮았네’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 말에 소년은 변화되었고, 그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 테네시 주에서 주지사를 두 번이나 했고, 사회와 교회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벤 후퍼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인생이 바뀌었다. 필자도 목회 초기에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사람의 소리를 듣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다. 저녁에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끙끙거리기도 했다. 이불 뒤집어 쓰고 펑펑 울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의 소리보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 때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 염려하지마.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지키신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 진다. 억울한 마음도 사라진다. 확신이 생긴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는 사람의 음성을 듣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음성이 성령님의 음성보다 더 크게 들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그럴 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바로 사단이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절대로 죽으시면 안된다고 만류한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말씀하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베드로의 인간적인 말 배후에 사단이 역사하고 있음을 아신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해 밭을 팔았다. 그런데 막상 그 돈을 교회에 헌금하려고 하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돈을 얼마 감추고 그것이 전부라고 거짓말 한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을 속인 죄로 죽는다. 그런데 왜 이들 부부가 하나님을 속이게 되었는가? 사단이 그들 마음속에 가득하여 거짓말 하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음성과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해야 한다. 사단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부정적인 말을 심는다. ‘이제는 어렵다. 이제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끝났다. 포기해라.’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두려워 말아라. 놀라지 말아라. 절대 포기하지 말아라.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버리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사탄의 말을 들으면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처한 환경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어느새 우리 안에는 평강이 임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물질주의, 쾌락주의, 이기주의를 그대로 반영한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우리의 귀를 막는다. 심지어는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렇게까지 예수 믿을 거 없어, 나도 당신처럼 뜨거울 때가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더라고. 유난 떨지 말고 대충 믿어.’ 세상 사람들이 그런 말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고,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부활과 최후승리를 모르고, 영생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심판을 믿고, 천국과 영생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 ‘대충 예수 믿어라, 사람들 눈치보며 믿으라.’는 말씀이 어디 있는가? 오히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나를 쫓으라.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라. 죽도록 충성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기를 힘써라.”말씀하셨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 때문에 붙잡혀 공회 앞에 서게 된다. 당시 공회는 로마 통치하에서 입법권과 사법권을 가지고 있던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며 말한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들의 위협은 단순히 겁을 주는 수준의 위협이 아니었다. 베드로와 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바로 이 공회에서 심판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졌으며, 총독 빌라도도 공회원들의 선동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던 것이다. 그런 공회의 위협이었다. 공회의 회원들 71명이 앉아서 아주 무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생명까지도 빼앗길 수 있었다. 그런데 공회원들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대답했는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대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다. 그 담대함과 용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왜 죄를 짓는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유혹할 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찌 죄를 지으리이까” 하고 뿌리쳤다. 이 뿌리칠 수 있었던 용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 승리를 선포하며 나아갈 수 있었던 용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소를 향해 갈 때의 일이다. 이 재판은 생사를 가늠하는 무서운 재판이라 루터의 친구들이 간곡하게 만류했다. 그 때 루터는 말했다. "재판정 기왓장만큼이나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재판정에 서리라." 그리고 재판정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이렇게 기도한다. “Oh, God. Here I stand.” 유명한 말이다. "오, 하나님! 나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위협하는 무리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들을 좋게 하려고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정만 있으면 충분한 사람들이다. 세상이 몰라주고, 사람이 몰라줘도, 주님만 아시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제부터 정말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겠다. 사람의 말 듣고 넘어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듣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주님의 뜻 이 땅에 이루며 살아야겠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야겠다.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기쁨 되어 살기로 결단해 본다.

여주봉 목사2018-10-14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유업을 회복시키기 원하신다고 확신한다. 그 유업이 교회 가운데 회복되려면 무엇보다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한다.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진다는 말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삶과(고전 1:30), 예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는 삶이 포함된다고 나는 확신한다(고전 2:2). 사실 2천년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마다 그 예비 단계에서 이 두 가지가 회복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부흥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십자가 복음의 토대 위에 주어지게 되어 있는, 이사야 하반부에 약속된 신약의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유업 중 하나이다. 역사를 보면, 성경대로 된 것을 알 수 있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쓴 『부흥』을 보면 이 점을 잘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부흥이 올 때 그것이 준비되는 예비 단계가 있는데, 그 예비 단계에서 중추적인 진리들, 그 중에서도 특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가 항상 재발견된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가 재발견된다는 말은 우리가 지난 몇 달 동안 살펴본 것처럼 그 참된 의미가 재발견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의 책을 몇 군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언제나 부흥 이전의 예비적인 조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준비 단계는 어김없이 이 장엄하고 영광스럽고 중추적인 진리들을 재발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부흥』, 51쪽). “프로테스탄트 부흥이 임한 것은 마틴 루터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장엄한 진리를 문득 깨달은 그 후의 일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서 그 진리를 따라 감으로써 성령을 물붓듯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한 것입니다. 누구나 다 분명히 18세기에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8세기의 교회가 죽어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부흥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휘트필드와 웨슬리와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요한 웨슬 리가 알더스게이트 스트리트에서 그 마음이 성령으로 ‘이상하게 뜨거워진’ 것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3개월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1738년 5월 24일 알더스게이트 스트리트에서 그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1738년 3월에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눈이 떠졌습니다. 런던과 옥스퍼드 사이를 오가며 피터 빌로우와 웨슬리 사이의 대화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대한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 진리를 포착하게 된 후에야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그를 사용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여러분이 웨일즈로 시선을 돌리면 똑같은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당시 거기에는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하나인 다니엘 로울랜드(Daniel Rowland)가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진리를 알고 인식하고 나서 몇 개월 동안은 아직 그 진리의 능력을 느끼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찬예식에 참여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여 그를 충만케 했고 그로부터 웨일즈 내에서 18세기의 위대한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부흥』, 51-52쪽) 부흥의 예비 단계에서 재발견되어지는 핵심적인 내용 중 또 다른 하나는 당연히 고린도전서 2:2이다. 예수님(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는 것은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하다. 다시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뛰어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그러나 우리가 주님,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임재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것, 그것이 참된 기독교입니다. 부흥시에 언제나 하나님께 사용되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추구했습니다.”(『부흥』, 119쪽) 그는 또 말한다. “부흥에 이르는 불가피하고 부단한 예비적인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갈구하는 생생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며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일어서서 당신의 원수들을 훼파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불타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부흥의 필연적인 예비 단계였습니다.”(『부흥』, 122쪽)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교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질 때,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이 임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유업이 주어졌다. 하나님은 지금 한국교회 가운데서 그 일을 이루기 원하신다. 모든 교회가 그렇게 세워져서, 모든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부흥이 임했으면 좋겠다.

신동식 목사2018-10-11

어느시인은‘가을에는기도하게하소서’라고노래하였습니다. 기도하기에참좋은계절임을흔연중알게됩니다. 푸른하늘과시원한바람은우리의마음이하나님을향하기에부족함이없습니다. 어느작사가는‘기도할수있는데왜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왜염려하십니까?’라고노랫말을적었습니다. 기도하기에좋은계절에기도하지못한다면그것은가장큰손실을보는것입니다. 우리몸에는제철음식이좋다는말을많이합니다. 기도에는제철이있는것은아니지만가을은그어느계절보다도기도하기에좋은계절입니다. 기도할수있는좋은환경을주시는하나님께감사하며깊은동행이있다면그처럼행복하고즐거운일은아마없을것입니다. 우리모두가을에는기도하는기쁨을누리기를바랍니다. 그러나가을은기도하기에좋은계절뿐아니라독서하기에더더욱좋습니다. 천고마비의계절이라부르는이시기에좋은책한권이라도읽는기쁨을누렸으면합니다. 특별히종교개혁기념주일을맞이하면서‘종교개혁과여성’ 과‘불확실의시대오직을말하다’를추천하였습니다. 둘다읽기에부담이없는부피입니다. 그러나그내용은매우풍성합니다. 가을의절정이자종교개혁501주년을다시금묵상하는행복한시간을가졌으면합니다. 책은우리의영혼을꿈틀거리게해줍니다. 그래서책을읽는시간은그무엇과도바꿀수없는즐거움이있습니다. 책을읽을수있는것은우리의믿음을더욱성숙하게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은교회오는것으로만만족해서는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날마다숨쉬는순간마다하나님의은혜를기억하고그를아는지식에서자라가야합니다. 하나님을아는지식은말씀을읽는것과영적으로좋은책을읽을때주어집니다. 신앙의성숙은스스로다가오지않습니다. 우리가찾고두드릴때주어집니다. 동시에가을은우리의눈을호강시켜줍니다. 자연의아름다운변신은우리의마음을흥분시킵니다. 울긋불긋변하는나무에서도시간의변화도보지만아름다운삶의모습이어떠해야하는지도볼수있습니다. 모진추위와비바람을견디고가장아름다운모습을보여주는가을은자신이있는자리에서최선을다하는자의아름다움이무엇인지를잘보여주고있습니다. 이러한변화의아름다움을보여주는가을이우리에게선물로주어졌습니다. 이선물을가치있게사용할수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은우리의영혼에최선의시간들을주셨습니다. 우리의영혼이복되기를기뻐하시기때문입니다. 이가을에우리의기도가더욱풍성해져야합니다. 하나님을아는지식이더욱깊어져야합니다. 그리고그사랑이널리퍼져야합니다. 그것이가을을가장만끽하는것입니다. 가을을우리에게주신하나님의은혜에보답하는것입니다. 가을이우리앞에있습니다. 가을은우리의감성을들뜨게할것입니다. 그리고우리의영혼을고양시킵니다. 그래서가을을주신하나님께감사하는것입니다. 가을은우리의삶을더욱성숙하게하는데더할나위없는기회입니다. 이좋은시간을낭비하는것은가장불쌍한사람입니다. 아무리좋은보화를주어도알아보지못한다면쓰레기에불과합니다. 그러나그것을알아보는자에게는최상의선물입니다. 가을은하나님이우리에게주신또하나의보물입니다. 이보물을가장멋지게사용할수있어야합니다. 보물을보물되게사용할때그보물은나에게최고의보물이됩니다. 가을에기도하고그를아는지식에서자라감으로행복을만끽합시다.

이효상 원장2018-10-09

1446년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글자임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암클’, ‘아랫글’이라 불리며 무시당한 훈민정음은 갑오개혁 때 비로소 공식적인 나라 글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천대받고 있을 때, 기독교는 한글만으로 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 왔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한글'이 전파되며, '한글'이 전파되는 곳에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인과관계를 가져왔다. '기독교'는 ‘한글’이라는 통로를 통해 민족에게 전파되었다. 한말, 더군다나 구식교육 즉 한문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에 있던 서민대중이 새로운 진리인 기독교의 성경을 접하므로 심령의 구원을 얻는 기쁨과 더불어, 한글을 깨치어 처음으로 글눈을 뜨고서 지식과 개화의 거듭난 기쁨을 동시에 체험하니 이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의 뜻이 실현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복음전파는 한글로 소통하며 개막되었다. 1880년대 만주에서 시작된 존 로스의 ‘예수성교전서’나 일본에서 씌여진 이수정의 현토 신약성경이 다 한글을 사용하며 시작 되었으니 한국 기독교의 첫 사업인 성경보급이 근본부터 한글운동의 시대를 열게 된 셈이다. 그 뒤에 한자를 섞어 쓴 이른바 국한문 성경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이는 일부 한자 지식인의 요구를 수용한 것 일뿐 전체적인 흐름은 아니었다. 이렇게 한글은 성경과 찬송가뿐만 아니라, 쪽복음과 전도지 등에도 기독교의 복음전파에 필수적인 수단이 되었고 1895년 기산 김준근의 삽화와 함께 출판된 소설 ‘천로역정’등 기독교문학의 번역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 ‘예수교회보’ 등 신문과 ‘신학월보’, ‘신생’ 등 잡지를 내며 빠르게 대중속으로 파고들며 확장되었다. 최초의 장로교공의회는 모든 문서를 한글로 작성하였다. 한글만으로도 넉넉히 모든 진리를 적어내며, 한글만으로도 아무런 불편 없이 소통이 되며 오히려 편리하다는 생각이 선교사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성도들과 대중에게까지 자리잡게 되었다. 기독교의 모든 인쇄물도 대부분 한글만으로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한국기독교는 한글의 보급을 위해 말본, 사전 등의 연구와 출판에 더 주력하였다. 그런 사례로 볼 것 같으면 1874년 프랑스 선교사 달레 선교사의 ‘조선교회사’와 파리 외방선교회가 출판한 1880년 '한불자전‘ 그리고 1877년 존 로스의 ‘조선어 첫걸음’은 한글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한글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높이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이런 노력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1880년 언더우드의 ’한영문법’과 1890년 ’한어자전‘은 한글 체계화의 기초가 되었고 이어 1893년 게일선교사의 ’한영자전‘ 등은 한글 전파의 일익을 감당하였다. 그 당시 교회는 한글로 된 성경과 교과서 등 여러 한글책자의 출판을 통하여 민족을 계몽하고 근대화에 기여하고 있었다. 이런 한글운동으로 문맹을 퇴치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사나 전도자들과 성도들은 신앙과 표현의 말씀을 배우며, 글을 읽고 쓰는 방법까지 깨우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말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산간벽촌의 기독교인들은 그 마을의 유식자로 말과 글의 지도자가 되어 갔다. 선교 초기 언더우드와 게일선교사를 비롯하여 여러 선교사들은 한글의 과학적인 면과 우수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외에 알리려 노력하였다. 그들의 연구는 한글의 가치를 널리 세계에 번역 소개할 것만이 아니라 완고한 한학자들에게도 이를 긍정하게 만들었고, 일반 대중에게 이 글의 효용성과 편리성을 깨우치게 하였다. 이렇게 한글이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자리하게 되자 한글에 대한 존중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고 한글을 지키려는 마음을 길러주었다. 한글을 통해 복음을 접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한 심리라 할 것이다. 한글운동의 선구자로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 친구이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주시경 장로의 경우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를 접하고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게 발탁되어 서재필ㆍ윤치호 등과 ‘독립신문’의 제작하였고, 상동교회에서 ‘조선어강습원’을 열어 한글을 보급했다. 또 한글이 15세기에 만들어 진 글자이기 때문에 19세기 근대에 사용하기에는 잘 맞지 않았던 것을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주시경 선생의 펴낸 ‘국어문법(國語文法)'이나 ‘말의 소리’는 국어 문장의 성분을 알기 쉽게 제시하기 위해 최초로 구문도해(構文圖解)의 방법을 활용하였으며, 특히 근대 언어학의 용어를 순 우리말로 고안하여 이를 체계화해 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한글보급에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38년 이전까지는 ‘조선어’를 필수로 ‘일본어’를 병용토록 하였으나 그 이후 총독부가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도록 강요하고 우리 국어를 '조선어'라고 명명하며 일본어만 상용토록 하였다. 일제강점말기에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말살하려는 악랄한 수단에 못이겨 학교에서 한글이 사라지고 심지어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갖는 창씨개명까지 강압하여 거리와 집안세서도 우리말, 우리글이 사용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오직 기독교 교회에서만 성경이 한글로 적히고, 목사의 설교가 우리말로 선포되고, 찬송가의 가락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파되었으니 3.1운동과 더불어, 우리말, 우리글 수호의 공으로 ‘기독교가 민족의 종교’라는 말을 듣기에 부끄럽지 아니하였다. 사실 학교에서도 우리의 말글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교사나 학생이 주일날 예배당에서 예배전 한글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고, 또한 예배에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찬송가를 힘차게 부름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영혼의 해방과 민족혼의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기독교의 한글운동은 또 다른 애국운동이었다. 이런 한글사랑과 연구를 통한 진흥, 출판은 민족정신을 지키고 독립의지를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글운동의 선구자였던 주시경 선생만이 아니라 그 밖에도 오산학교 한뫼 이윤재, 정동교회 김윤경, 새문안교회 최현배, 정태진, 정인승, 장지영 같은 한글 학자 등은 다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하였거나 기독교 학교에 봉직하며 이를 연구하였고, 이를 사랑하고 이를 지키고 선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이윤재는 교회의 장로로서 한글보급 운동에 최대의 열정을 기울였기에 “한글장로”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장로교 강병주 목사는 항상 한글운동을 전도와 함께 하였기에 “한글목사”라 불리기도 하였다. 기독교는 한글운동의 중심이었다. 이런 한국 기독교의 한글운동의 학문적 열정과 관심은 '조선어학회'의 기초가 되었고, 일제의 한글말살 정책에 반대해 1921년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하기 위한 ‘조선어 학회’를 태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조선어학회’는 장지영, 최현배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으며, 잡지 ‘한글’을 만들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며 한글 수호의 길을 걷게 된다. 일제강점기말,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대해 온 사회가 수용하려 할 적에도 기독교의 성경의 맞춤법은 한글 운동자들의 수차례 건의와 교회의 결의가 있음에도 이를 쉬이 고치지 아니하고 6.25 동란까지 낡은 맞춤법 성경을 고수한 것은 한글을 지극히 존중하는 민족적 자존심을 마지막까지 지키려는 심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한국 기독교는 한글 덕택으로 복음 진리를 알게 되었고, 이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또 다시 한글날을 맞으며 외래어의 홍수 속에서 그래도 한글을 사랑하고 이를 진흥시키는 일이 대한민국 기독교인으로 조국에 대한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또 기쁨이 되었으면 한다. 한글창제 572돌을 맞으며 민족 얼과 혼이 담긴 글과 말을 지키려 옥고를 치룬 주시경,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 한글운동을 이끌었던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게 된다.

정재영 교수2018-10-07

인구절벽 시대 미국의 경제 예측 전문가 해리 덴트는 2014년에 펴낸 <인구 절벽>에서 미국의 평균 가구에서 돈을 가장 많이 쓰는 시기는 가구주의 나이인 45~49세의 인구가 줄어드는 시기에 들어서면 소비가 급속히 하강한다는 뜻에서 인구 절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곧 인구 절벽이란 생산 가능인구(15-64세)의 비율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현상을 가리킨다.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해리 덴트는 한국의 소비지출은 2010~2018년에 정점을 찍고, 소비가 가장 왕성한 이 연령대가 줄어드는 2018년부터 한국 경제에 인구 절벽이 올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러한 인구 절벽 현상은 인구 구성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우리 사회는 작년에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14%가 넘는 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프랑스가 고령화 사회 진입 이후 초고령 사회(전체 인구의 20%가 고령인구인 사회)로 들어가기까지 155년이 걸린 반면 우리나라는 단 26년 만에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러한 고령화 추세에다가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드는 출산율 저하가 인구 절벽을 가속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10년 이상 초저출산 국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은 지금도 계속 하락하고 있어서 올해 2분기 기준으로 합계출산율은 0.97명이다. 합계출산율은 가임여성 1명당 평균 출생아 수를 말하는데, 합계출산율이 0.97명이란 말은 가임여성 1명이 아이를 평생 한 명도 채 낳지 않았다는 얘기다. 매년 태어나는 신생아 수 역시 정부 전망보다 더 급격하게 감소해서 2020년이면 '한 해 신생아 30만 명 선'이 무너지고 2026년에는 '20만 명 선'도 깨질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우리나라 신생아 수는 1971년 102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88올림픽까지도 63만 명을 유지했다. 그 뒤 점점 가파르게 떨어지기 시작해 2002년에 50만 명 선, 작년에 40만 명 선이 깨졌다. 정부와 학계가 지난 20년간 '신생아 30만 명'을 심리적 저지선으로 놓고, 관련 정책을 고민해왔는데 40만 명 선이 깨진 지 3년 만에 그게 붕괴할 거란 예측이 나온 것이다. 이는 그동안 통계청이 내놓은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보다 14년이나 앞당겨진 수치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한해 출생하는 신생아 수는 전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급감하고 있는 추세다. 이와 같은 출산율 하락이 지속될 경우 2021년부터 인구가 줄 것이라던 정부의 당초 예상보다 인구감소가 훨씬 앞당겨지게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현 추세대로라면 2012년 6월에 5천만 명을 돌파한 현재 인구가 2045년부터는 적정 인구를 밑돌아 인구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2050년에는 4400만 명 수준까지 줄어들 것으로 예측됐다. 그리고 2100년에는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고 2300년 경에는 한반도에 인간이 사라지는 인구 소멸 상태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에 따라 옥스퍼드대 데이빗 콜먼 교수는 한국이 인구소멸 국가 1호가 될 것이라고 하여 인구 절벽이 현실이 되었다. 저출산의 원인 결국 고령화되는 인구에 비해 신생아 출산이 현저하게 줄어들기 때문에 인구절벽이 오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저출산의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다. 저출산이 비록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나 경제 수준이 높은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한 국가 안에서도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대개 출산율은 하락하는 특징을 보인다. 선진국에서는 개발도상국과 달리, 자녀수 자체가 경제력도 아닐뿐더러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로 아이에게 얽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득 수준이 증가할수록 자녀를 적게 갖고 자녀에 대한 질적 투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고소득층의 경우 오히려 출산율이 감소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결혼연령이 상승하는 만혼 경향을 들 수 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직업이 장기간의 교육을 요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첨단 과학기술과 전문화된 직종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필요로 하는 교육 기간이 더욱 늘어나게 되는데, 교육을 받는 동안에는 경제력이 약하기 때문에 결혼 연령이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초혼 연령은 남성과 여성 모두 30세를 넘었고, 이에 따라 첫 아기 출산 시기도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늦은 나이에 출산을 하게 되면 아기를 많이 낳기는 어렵게 된다. 게다가 많은 학자들은 우리 사회가 저출산 사회로 급격히 전환된 데에는 경제 요인과 성불평등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났다고 진단한다. 한국 여성들의 성불평등에 대한 인식 수준과 사회 전반의 고학력 여성들에 대한 기대 수준과의 불일치와 경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여성들의 취업에 대한 견해가 남성과 여성 모두 크게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병행하기 어려운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 경제 활동에 참여할 때 가사일이나 자녀 양육과 관련된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지만 가족 내 가사 책임은 여성에게 전담되어 있는 실정이다. 여성 혼자서 육아를 책임진다고 해서 요즘에는 '독박 육아'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상황에다가 직접적으로는 자녀 양육에 드는 막대한 비용이 결혼과 출산을 미루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녀를 낳아서 독립할 때까지 드는 비용이 3억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도 있듯이 경제적인 여건이 마련되지 않으면 자녀를 낳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국토연구원이 행정안전부의 ‘2017년 전국 3497개 읍·면·동의 연령별 인구자료’를 가지고, 영·유아의 인구가 많은 곳과 영·유아의 비율이 높은 지역 13곳을 분석한 결과 이 지역들이 괜찮은 일자리가 많고, 주택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주거환경이 좋은 곳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기적인 출산지원금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안정된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구절벽을 극복하려면 이러한 상황에 대해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출산율 저하로 기독교 인구가 줄게 되면 선교 역량이 감소하기 때문에 출산율을 높여서 기독교 인구의 자연 증가율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저출산을 단순히 교회 성장이나 선교 역량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얼마 전에 한 정당이 '출산주도성장'을 외쳤다가 출산을 경제성장의 도구로 삼았다는 강한 사회적 비난을 받았듯이 출산을 도구화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출산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며, 기독교 가정에서 아이를 출산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자동으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출산의 문제는 노동력 확보라든가 국가 경쟁력 제고라는 경제적인 잣대로 평가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은 중요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구성원의 재생산은 사회를 유지하고 존속하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의무이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장의 눈앞에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유로 출산을 기피한다면, 앞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 사회는 존속 자체가 어렵게 될 것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출산은 창조의 섭리를 경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공동체의 신앙과 도덕적 가치를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하는 신성한 책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세속의 가치에 매몰되지 말고, 성경의 원리에 따라 기독교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육아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꿔야 한다. 출산 후 집에 머물게 되는 여성에게 가사를 포함하여 출산에 따르는 모든 책임이 전가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가사노동을 생산 활동이 아니라 소비 활동으로 여기고 과소평가해왔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가족구성원을 재생산하고 가계를 계승함으로써 사회 자체를 유지, 존속시키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출산과 육아 및 가사는 사회구성원 개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공동체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 공동 육아에 관심이 높아진 이유이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기 어렵기 때문에 뜻을 같이 하는 부모들이 힘을 모아 협동의 방식으로 육아를 하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도록 육아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자녀 양육에 대하여 교회 전체가 공동의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는 젊은 부부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육아를 부모의 책임으로만 여기지 않고 신앙공동체 모두에게 주어진 신성한 책임으로 여긴다면, 저출산 현상을 줄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출산을 의미 있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지나치게 경제주의식으로 사물을 바라보았던 태도를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지나치게 남성 중심으로 살아온 삶의 태도도 바꾸게 해야 한다. 곧 은연중에 교회 안에 퍼져 있는 경제주의식 사고와 여성을 차별하는 제도, 그리고 출산과 양육을 사소하게 여기는 남성중심의 삶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가 바뀌어 갈 때 점진적으로 우리 사회의 구조도 바뀌어 갈 것이고, 그럴 때에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영훈 목사2018-10-04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함께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잘 사는 나라’이다. 이사야 11장 6절에서 8절에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라고 말씀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 충만한 공동체로서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줬다(행 2:44-45). 필자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사랑의 공동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라고 본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내놓는 걸 강요당하지 않았다(행 5:4). 단지 은혜 받은 것에 감사해 그들의 소유를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과 나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도 구제와 나눔에 힘썼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본받아 매년 교회 전체 예산 약 1,200억 원 중에 3분의 1인 400억 원 가량을 섬김, 사회구제, 선교 사업에 사용한다. 우리는 공존(共存), 공영(共榮)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진 자들부터 과감하게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대부호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은 올해에 3조 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다. 지난 7월 17일 미국 매체 CNN머니와 CNBC 등에서 워렌 버핏의 올해 자선단체 기부액이 34억 달러(한화 약 3조 8,300억 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CNBC는 이로써 지금까지 워렌 버핏의 기부 누적 총액이 현재 시장가치로 약 467억 달러(52조 원)라고 전했다. 이렇게 많은 돈을 기부하는 이유에 대해서 워렌 버핏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2006년에 기부를 시작할 때 버핏은 세계 2위의 갑부였으나 12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 3위에 자리해 있다. 하지만 재산은 오히려 늘었다. 당시 워렌 버핏은 374억 달러(약 42조 2,000억 원)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포브스에 따르면 2018년 3월 기준 840억 달러(약 94조 7,000억 원)을 보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그가 기부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100조원이 넘는 재산을 보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환한 미소가 있다. 과거에는 못 먹어서 배고픈 세상이었지만, 요즘은 살이 쪄서 고민인 세상이다. 모든 돈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돌보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성경에서 ‘주는 자가 복이 있다’(행 20:35)고 말하듯이 우리나라가 지금까지는 돈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돈을 바람직하게 잘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복지사각지대에서 고통 가운데 살다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있다. 필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위임목사로서 매달 극빈자 가정을 심방하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교회로서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를 상실한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도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을 바꿔 돈을 나눠줄 때가 됐다. 무조건 전 재산을 팔아 나누라는 것이 아니다. 강제로 돈을 빼앗아 나누겠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가진 자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소유한 부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나누자는 것이다. 우리의 남은 부를 소외된 자들과 함께 나눌 때 우리는 돈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며, 우리의 나눔을 통해 ‘함께 잘 사는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낮아짐, 나눔, 섬김에 앞장서게 될 때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지게 되고, 다 같이 잘 사는 행복한 통일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박혜정2018-09-27

기자는 최근 기독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C작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섭외 요청 과정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C작가는 기자에게 "데일리굿뉴스가 이단이 아닌지"를 먼저 물었다.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이단들이 저희 만화를 가지고 장난을 쳐서요"라며 "초면에 죄송하지만, 섭외나 작품 관련 문의 연락을 받으면 꼭 이단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로 작가들과 합의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를 직접 만난 자리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C작가는 몇 년 전, 성인만화가에서 기독만화가로 전향하면서 G사이트에 기독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고료는 따로 받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는 지인으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의 작품이 이단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화내용도 이단의 교리 내용으로 바뀌어 인터넷에 게시돼 있다는 이야기였다. C작가는 그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분해서 손이 떨린다고 했다. 당시 그는 작품을 올린 사이트에 연락했지만, "변호사를 직접 고용해 법적 소송 절차를 밟는 것이 대응책"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고 한다.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해 봤지만, 그 때 당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삼류작가가 도와달라고 외치는 목소리에 누구 하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작가는 회상했다. 이와 관련 본지는 C작가의 기독만화가 여전히 이단관련 사이트에서 활용되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작품이 이단으로부터 도용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약 6, 7년 전 일이기도 했고, 당시 C작가가 이단에 도용됐다는 증거자료를 따로 보관해 놓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가 말 한 해당사이트는 현재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작가들의 상황은 어떤지 궁금했다. 2007년 즈음 기독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K작가 역시 온라인사이트에 만화를 연재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작품이 신천지에 무단 도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2013년에 제보를 통해 알게 됐다고 한다. K작가의 작품이 신천지만화로 바뀌어 업로드 된 사이트는 현재 해당 게시물을 삭제한 상태다. 이에 본지는 K작가가 이단사이트에서 캡쳐한 도용된 만화 이미지를 원작 만화와 비교해 봤다. 확인 결과, 2007년도에 그가 연재한 원작만화의 그림체와 이단만화로 쓰이고 있다는 제보 속 그림체가 완벽히 일치했다. 원작만화 속 말풍선에는 K작가가 쓴 기독교적 고백 이야기가 실려 있었지만, 도용된 만화에서는 이단 정체성과 교리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2011~2012년 사이 왕성하게 활동을 했던 H작가의 작품도 여전히 신천지관련 사이트에서 쉽게 검색되고 있다. 원작을 그대로 게시하고, 제목만 달리 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은, 이단에 대한 두려움과 물질적·시간적으로 어려운 환경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K작가는 "기독만화가들은 작품활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그런 우리가 법적인 절차에 따라 시간과 경비를 들여 대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라고 호소했다. H작가는 "이단에 대한 워낙 흉흉한 소문이 많기에 무서워서 항의 전화도 못했다"며 "개인이 어느 이단집단을 대상으로 잘못된 것을 지적하기에는 겁이 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독만화가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의논하고 대처하기 위한 자체모임을 갖고 있다. 작가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을 지키는 노력이 최선이라고 여기며 개선책을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는 몇 년 전에 발생한 일이다. 최근에도 이런 일들이 지속 되는지는 아직 확인 되지 않았지만, 기독교만화 콘텐츠가 이단에 무방비로 노출된 현실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기독교만화 콘텐츠 도용문제는 저작권 문제와도 직결되는 만큼 구체적인 대안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김성윤 교수2018-09-27

종교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위한 종교가 되지는 않았는지 우리 모두는 되돌아보아야 한다. 종교가 인간을 위해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불랙홀처럼 인간을 삼키고 있다. 옳고 바른 것들이 깨어지고 부서지는 세상에 사람들이 불교나 기독교 또는 이슬람교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그 속에 담겨있는 ‘지혜’ 때문일 것이다. 그 지혜를 통해 인간 세계의 깨어지고 부서진 진리를 바로 세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진실마저도 로봇에 의지하지는 않을지 두렵다.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혼도 로봇이 빌어 주고 있다. “관자재보살행심반야바라밀다시(觀自在菩薩行深般若波羅密多時)~”라고 고인의 명복을 로봇이 빌어주는 사회에서 인간은 어떤 일을 해야 될까? 로봇이 불경을 외고 노래를 부르며 고개를 끄덕인다. 분향소 앞에서 반야심경을 외우며 고인의 극락왕생을 빌어 준다. 페퍼란 인공 로봇이 사찰의 장례식에 2017년부터 등장해 점차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페퍼 로봇은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2015년 개발한 휴머노이드(humanoid) 즉 인간형 로봇이다. 키는 121cm 로 인간보다 아주 적고 몸무게는 29kg 으로 큰 인형 같아 보인다. 이 로봇에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을 탑재해 인간처럼 부끄러움도 타고 수줍어하기도 한다. 기분이 좋으면 흐뭇해하는 표정과 함께 웃기도 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센서와 학습능력까지 장착했다. 2017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장례박람회 ‘ENDEX 2017’에 등장해 큰 인기를 끌었던 ‘로봇 스님’이야기다. 일본에서는 장례식 때 스님이 독경을 외우며 장례 의식을 집전하는 관습이 널리 일반화돼 있다. 로봇이 아닌 스님에게 장례를 맡기는데 드는 평균 비용은약 24만 엔으로 우리 돈으로는 240만 원 정도 된다고 한다. 살아생전에도 쓸 돈이 모자란 사람들이 죽어서까지 이 비용은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비용이 저렴하게 든 로봇을 개발했다. 실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이다. 장례 로봇은 유골함을 제단에 올리고 불경을 외우는 등 기본적인 장례 진행이 가능하다.일본에서는 이 로봇이 실용화 돼단돈 5만 엔 우리 돈으로 약 50만 원에 대여를 하고 있다. 로봇 스님을 만든 ‘닛세이에코’는 개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인과 아무 인연도 없는 스님이 읽어주는 불경이 과연 죽은 이의 영혼에 가 닿을까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로봇 스님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혼자 살던 생활보호대상자 노인이 사망하면 복지 기관에서 장례를 치러주게 되는데, 그럴 때도 로봇 스님이 그들의 마지막을 배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혹(迷惑)을 끊고 지혜를 얻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반야(般若)’이다. ‘바라밀(波羅蜜)’은 수행이라는 뜻의 고대 버마어이다. 죽음은 한 생명이 또 다른 지혜를 찾아서 떠나는 수행의 과정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가 퇴색된 채 그 현상의 오고감을 인간이 만든 로봇이 한다. 돈과 재물에 의지하는 우리 인간은 이제 마지막도 돈으로 계산해 더 저렴한 방법을 찾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탐욕의 종말을 보여 주는 걸까? 앞의 사례처럼 로봇보다도 더 어리석음이 인간에 의해 사회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지금 시급하고 필요한 것은 성당이나 절을 더 많이 짓고 로봇을 시켜 염불을 외우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삐뚤어진 마음을 올바로 세우는 일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 극락가라는 로봇의 기계적인 염불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바로 잡아 주는 일이다. 우리가 일상으로 하는 기도는 절대 중얼거림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입놀림에 지나지 않는다. 로봇의 염불소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도록 우리 모두의 역량과 힘을 모아 어두운 곳, 잘못되고 있는 곳을 바로 잡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의 사명이 아닐까?

김성윤 교수2018-09-17

올해는 정전협정이 체결 된지 65년이 되는 해이다. 65년의 세월동안 한 해에 남북 정상회담을 3번이나 개최하게 되는 것도 처음인데다 합의 사항도 매우 파격적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문재인 대통령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바 있다. 이 같은 국민적 지지를 문대통령은 보답하는 의미에서라도 남북정상회담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와야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9월13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남북 정상회담 원로자문단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북·미간의 비핵화 대화가 교착된 상황에 대해 “충분히 접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바 있다. “북한은 미래 핵을 폐기하고 현재 핵까지 폐기하겠다는 것이다. 미국도 북·미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체제를 보장하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중재자로서 양측의 접점을 찾아 제시하고 대화를 다시 촉진해 나간다면 비핵화가 보다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무엇보다도 북한의 현재의 핵을 폐기하는데 일보 전진이 있어야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현재의 핵을 인정한다면 북한은 핵보유국이 될 것이고 동북아의 안보 환경은 격랑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방문은 남북한 관계발전을 위한 변곡점이 될 뿐만 아니라 동북아 평화정착에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정상회담의 사명이요 국민들의 희망이자 바람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대북제재의 완화나 폐기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비핵화에 대한 신고, 검증, 폐기에 관한 예측가능하고 가시적인 조치에 대한 담보를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으로는 더 이상 국민들의 호응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미 판문점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시각이 많아지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의 비핵화가 답보상태에 있는데다가 한국과 북한이 유엔에 공동 제출한 판문점선언 영문본과 국내 발표문의 차이가 미국의 소리(VOA)에 의해서 보도됐기 때문이다. 영문 본에는 “남북이 올해 종전을 선언하는데 합의했다”고 명시돼 있음을 미국의 소리가 9월 11일(현지 시각) 보도한 바 있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난 4월에 최초로 공개한 한글 원본과는 다른 내용이다. 9월 11일(현지 시각) VOA방송에 따르면 유엔이 공개한 판문점선언 영문본의 3조 3항에는 “남북이 정전협정 65주년이 되는 올해 종전선언을 하기로 합의했다”로 나와 있으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한국과 북한, 미국이 관여하는 3자 혹은 중국을 포함한 4자 회담개최를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이 전하는 내용을 좀 더 요약해 보면 유엔에 제출한 영문 문구에는 “올해 종전선언을 하기로 했다”와 “3자 혹은 4자 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는 2개의 합의가 나온다. 그러나 청와대의 공식 영문 본에는 “65주년이 되는 올해에 남과 북은 3자 혹은 4자 회담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고 돼 있다. 즉 청와대 발표대로면 합의는 ‘회담을 적극 추진한다’는 것 1개가 전부라는 것이다. 이래서 ‘진실이 과연 어떤 것이냐?’로 국론분열이 가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평양에서의 제3차 정상회담에서는 양측의 합의가 분명하고 명백해야 되겠다는 것이다. 합의할 수 있는 것만 합의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과거 방식대로 합의 할 수 없는 것을 합의하거나 애매모호한 단어로 합의한 후 서로 간에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게 한다면 이는 역사의 단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총론 합의뿐만 아니라 각론까지 이견 없는 합의를 하고 돌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여주봉 목사2018-09-12

나는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신약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유업에 대해서 몇 달 전부터 살펴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유업을 지금 한국교회에 제시(offer)하고 계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유업은 십자가의 복음에 주어진 유업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질 때, 그 유업들이 그 교회 가운데 차고 넘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신약의 교회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즉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고전 3:11). 나는 신약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삶 뿐 아니라(고전 1:30), 예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는 삶이 포함되어 있다고 확신한다(고전 2:2). 나는 지난 달부터 예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는 삶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고린도전서 1:30과 2:2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간다. 즉,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삶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는 삶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빌립보서 3장에서도 그 점을 잘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신앙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이라고 말하고 난 뒤 이렇게 말한다.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7-12). 우리가 전에 살펴본 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는 삶을 살려면 성령님의 조명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계시”(조명)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 그 때 성령의 조명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이루신 승리를 선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위에 믿음으로 섬으로써 그 승리를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의였다. (그것이 정확하게 성경이 말하는 바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하면서, 소위 개혁주의 신앙을 말하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소홀히 한다. 그 결과, 그들의 삶 속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교리와 이론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능력은 거의 소멸된 상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정확하게 로이드 존스 목사가 그의 책 말한 『부흥』(생명의 말씀사)에서 죽은 정통주의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항목에 들어 있는 제일 되고 가장 우선적인 문제거리는 인격 자신과 옳은 관계를 맺으려 하기보다는 그 인격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정통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지적하는 잘못은 교리, 참된 교리, 인격에 관한 참된 교리를 인격이 서야할 자리에 세우는 무서운 위험입니다. 그것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사람들, 정통적인 사람들이 흔히 걸려 넘어지는 매우 흔한 함정입니다. 정통적이면서도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교리에서만 머물고, 어떤 정의를 하는 데서만 머물고, 교리의 목적은 그 교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다만 그 인격을 알게 하고 이해하게 하고 그 인격과 교제하게 우리를 인도해 주는 구실을 합니다.”(『부흥』, 80쪽). 그러면서 그는 그 죽은 정통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실질상 죽은 정통은 이단만큼 나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죽은 정통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같은 책, 81쪽). 그는 그 책 다른 곳에서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을 컵에 그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온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우유에 비유했는데, 죽은 정통주의는 마치 목이 마르고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금으로 된 아름다운 컵, 그러나 비어 있는 컵을 갖다 주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복음의 능력은 교리, 그것이 아무리 옳은 교리라 할지라도, 교리 자체에 있지 않다.

강진구 교수2018-09-10

영화 <신과 함께:인과 연>이 전작 <신과 함께:죄와 벌>에 이어서 천만을 훌쩍 뛰어 넘는 관객을 모아 여름극장가를 주도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내세관에다 기발한 상상력을 컴퓨터그래픽을 통해서 구현시켰고 코미디와 액션이라는 대중적 장르를 결합시킨 것은 이 영화가 흥행의 기본 골격을 갖췄음을 의미하는 일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효와 용서’라는 윤리적 덕목까지도 내재돼 있어서 재미와 감동 그리고 교훈까지 주는 포장이 잘된 종합선물세트의 모양새를 이뤘다. 무신론이 주도하는 현대사회에서 이 영화의 뜻 깊은 가치는 ‘심판과 지옥’이라는 죽음 이후의 내세관을 제시한 일이었다. 전통적 내세관이 다분히 들어간 영화의 흥행돌풍은 한국인들이 종교적 가치관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해서 종교인들에게는 희망적인 징조로 읽혀질 수도 있다. 문제는 영화의 내세관이 기독교세계관 관점에 비춰볼 때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다. 원한을 맺고 죽은 망자가 원귀(寃鬼)가 돼 저승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설정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성경에 언급된 귀신은 희랍어 다이몬(daimon)을 번역한 말로 인격적으로 묘사(마8:31-33)돼 그렇지 악한 영을 부르는 통칭으로 한국 전통문화 속에서 뜻하는 죽은 자의 영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신과 함께>를 끌어가는 결정적인 내세관인 윤회사상이야 말로 영화의 개연성을 높이는 일인 동시에 기독교세계관의 입장에서는 매우 우려하는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윤회사상은 자연을 모방한 순환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윤리적 가치관이 들어가면서 현세의 삶을 과거 전생의 삶의 결과로 해석하는 바람에 운명론적이며 수동적인 삶에 머무르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시간관은 직선적이다. 활을 떠난 화살이 결코 돌아오지 않듯이 한 번의 죽음과 심판(히9:27) 그리고 부활과 영생(요11:25)의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환생을 믿는 기독교인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국 갤럽이 2014년에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실태와 의식조사>를 보면 ‘사람이 죽으면 어떤 형태로든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라는 환생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기독교인 가운데 34%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불교인도 38% 밖에 믿지 않은 환생을 기독교인의 3분의 1이 믿고 있다. 이것은 <신과 함께>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세계관 교육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신동식 목사2018-09-07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성경의 눈으로 볼 때에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많은 곳에서 충돌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 동성애, 예멘 난민, 양심적 병역거부, 최저임금 인상 등 참으로 많은 일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기에 여전히 진행중인 현실인 남북의 모습은 자연스러운 대화를 포기하게 합니다. 그래서 혼자 떠드는 일에 자연스러운 시대입니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성경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한국 교회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런데 곳곳에서 한국교회의 타락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토가 점점 거세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고, 세워진 교회를 지키는 일도 힘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부 대형교회는 연일 많은 수의 사람들이 등록한다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 꽃다운 길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큰 교회를 지탱하여준 작은 교회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샛강이 죽으면 큰 강도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이렇게 말라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돈이 어디서 왔는지 그 근원을 잘 살피는 것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세 가지 입장에서 근원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한국 교회의 도덕과 공정성의 타락이 한국 교회의 혼돈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를 향하여 질타하는데 앞장 선 손봉호교수는 교회의 큰 위기를 무속화된 신앙, 번영신학, 비윤리적인 교회 성장, 그리고 차세 중심의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도덕적 타락이 오늘날 교회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신학의 혼돈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일단의 그룹은 한국교회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고 강변합니다. 그 가운데 한국 교회가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해 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이신칭의는 종교개혁의 정신이며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 교리가 실상은 한국교회를 위기로 내몰았다고 말합니다. 이신칭의를 잘못 알아서 한번 믿으면 구원에 이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인 구원파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이러한 잘못된 교리를 가짐으로 교회를 허물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 한 편에서는 교회가 전통적 신앙고백을 잃어 버렸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이 전한 바른 교리를 버림으로 교회가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참된 이해가 무너졌고 신비주의 신앙과 기복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혼돈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세 번째로 보편적 기준의 해체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는 20세기 시작하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제 자연스럽게 교회와 사회 속에 녹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과 생각하는 것의 괴리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낙태, 동성애, 그리고 페미니즘, 성 정체성에 관한 부분들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예민한 부분들이지만 교회 안에서조차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결혼, 임신, 육아의 문제까지 전통적 가치를 흔들고 있습니다. 결혼을 꼭 해야만 하느냐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탈혼(脫婚)을 선언하는 세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탈혼은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페미니즘 세대들의 저항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기준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시대는 기준에 대한 싸움이 절정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참으로 많은 변화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그 동안 기준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모두 해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편적 기준을 지키고자 하는 세력과 보편적 기준을 해체하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자는 세력들이 엄청 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삶의 큰 변혁을 가져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세 파도 앞에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쉽게 말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절대적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혼란의 시대에 더욱더 성경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선명하게 보여 줄 것입니다. 도덕과 공정성의 타락, 신학의 왜곡, 보편적 기준의 해체의 시대에 교회를 지키고 우리가 사는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살리는 조국을 살리는 옛 길입니다.

정재영 교수2018-08-31

가나안 성도의 등장 한국 교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어떤 이는 십 수년 전부터 이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이십년 전에 신학교 다닐 때에도 이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기록에 의하면 1970년대에 함석헌 선생이 ?씨알?지에 의미는 다르지만 이러한 표현을 쓴 것으로 나타나 이미 40년 전부터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나안 성도’란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가지고 있지만 현재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찾아 다녔듯이 ‘새로운’ 교회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가나안’이라는 말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인 것과 같이 교회를 나가지 않는 또는 의도적으로 ‘기성’ 교회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필자는 이 현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종교사회학의 관점으로 이 현상을 분석하였고, 그 결과를 ?교회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 가나안 성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IVP, 2015)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가나안 성도의 실체를 확인하고 그 규모를 확인하였으며 이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이 없이 교회를 띄엄띄엄 다녔던 사람들이 아니라 10년 이상 교회를 다녔고, 중직자를 포함하여 직분자들이 있었으며 교회를 다닐 당시에 절반가량이 구원의 확신이 있었다고 응답했으며 90% 가량이 교회 활동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나타나 흔히 말하는 선데이 크리스천과 같은 ‘명목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옮긴 경험을 보면, 45.7%가 교회를 옮긴 경험이 없고, 여러 교회를 옮겨 다녔다는 응답은 6.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이들이 교회 쇼핑족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아래에서는 ‘한목협’으로 줄여 씀)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평균 2.7회 교회를 옮겼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오히려 교회 이동 경험이 적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 교회에서 오랫동안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으며 또한 현재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늘어나는 가나안 성도 문제는 가나안 성도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의 연구에서는 2014년에 <한목협>에서 조사한 결과에서 10.5%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것을 바탕으로 대략 100만 명에 가까운 가나안 성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에 대해서 다소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떠난 사람이 100만 명이라면 떠날 사람도 100만 명은 되는 것 같다는 반응도 있었다. 지금은 이러한 예상이 현실이 되었다. 지난 2017년 <한목협> 조사 결과에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 성도는 23.3%로 파악되었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중에 가장 높은 비율이다. 2015년 인구센서스에서 파악된 개신교 인구가 9,676천명에 대입하면 가나안 성도는 2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연령별, 계층별로 다를 것으로 추정되는데 특히 종교에 대한 만족도가 낮은 젊은 층에서 가나안 성도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책임을 맡고 있는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설 <21세기교회연구소>와 <한국교회탐구센터>가 공동으로 조사한 ‘평신도의 교회선택과 만족도’ 조사에서는 20대의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만족도가 전체 연령대에서 가장 낮았고 이에 따라 교회를 떠날 의향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서는 교회를 떠날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에게 교회를 떠난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보았는데, 절반을 겨우 넘긴 55.0%만이 계속 다니고 싶다고 응답하였고, 28.0%는 떠날 생각이 다소 있다고 응답하였으며 4.8%는 떠날 생각이 매우 많다고 응답하여 현재 교인들의 3분의 1이 교회를 떠날 의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특히 20대에서 계속 다닐 의향은 40.6%에 불과(떠날 의향은 42.1%)하였는데, <학원복음화협의회>에서 2017년에 조사한 ‘대학생 의식 조사’ 결과에서는 대학생 기독교인 중 28.3%가 가나안 성도로 파악되어 이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마찬가지로 블루칼라에서도 교회를 계속 다닐 의향은 40.2%에 불과하였고, 절반을 넘는 50.2%가 교회를 떠날 생각이 있다고 응답하였다. 경제수준하고도 상관관계가 있었는데, 상류층과 중간층에 해당하는 교인들은 60% 이상이 교회를 계속 다니고 싶다고 응답했으나 하류층에서는 44.4%만이 계속 다닐 의향이 있었고, 38.6%가 떠날 의향을 나타내었다. 이 역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사회적으로 높게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의 주류로 활동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주변부에 머물며 교회를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통계 결과이다. 교회를 떠난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는 61.3%만이 다른 교회에 나갈 것이라고 응답하였고, 22.1%는 개신교인으로 있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그리고 5.3%는 다른 종교로 갈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따라서 개교회 단위로 생각하면 각 교회는 33% 정도의 교인이 떠날 가능성이 있는데, 그 중의 61% 가량만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그 중의 22%(전체 교인의 6% 정도)는 비교인 일명 가나안 성도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가나안 성도의 수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임을 보여주는 통계 결과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나안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의 신앙생활이나 목회 방식이 이들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가나안 현상을 교훈 삼아야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가나안 성도들의 현재 상태는 교회를 떠난 지 평균 10년 가까이 되어가고, 그들 중에 상당수는 지금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 정체성이 뚜렷한 기독교인임에도 신앙 모임에는 대부분 참석하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중 3분의 2는 교회에 다시 나가고 싶은 의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교회는 세심한 전략을 세워야할 것이다. 이를 위해, 떠나는 이유에 따라서 가나안 성도들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뚜렷하게 기성 교회에 불만을 가지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다. 둘째는 특정 교회에 대한 불만보다는 교회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원해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다. 마지막 유형은 특별한 의식 없이 이사와 같은 환경의 변화나 개인적인 이유로 교회를 안 나가게 된 일종의 ‘귀차니스트’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유형들을 감안하여 대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잠정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방안은 이러하다. 마지막 유형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대안보다는 일반적인 전도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될 것이다. 두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이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이들이 당장 기존 교회로 돌아오지는 않더라도 이들 스스로 신앙 모임을 함으로써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몇 년 전에 한국을 방문한 필립 얀시는 가나안 성도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교회 문제 때문에 “그렇게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불에서 꺼낸 숯은 차가워지게 마련이다. 성숙한 기독교인이 교회 안에 계속 남아 개혁과 새 생명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오늘날 유럽교회가 그렇듯 텅 빈 유물로 전락할 것이다.”라고 경고한 바 있다. 따라서 이러한 유형의 가나안 성도들을 교회로 데려오기를 애쓰기보다 이들이 스스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들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도 있다. 기성 교회에서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첫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방안은 무엇보다도 기성 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불만이 이기적인 차원이나 개인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에 대한 진지한 문제 제기라면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결국 얀시가 경고한 바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가 유럽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고 생명력 있는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개혁 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특히 첫째 유형과 둘째 유형은 개념상으로는 분리되지만 현실에서는 서로 중첩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기성 교회에 대한 불만이 교회라는 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 교회에 대한 갱신 노력이 두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의 증가를 방지하거나 약화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 성도를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가나안 성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이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나안 성도들은 과거의 성도들과 달리 맹목적인 충성을 하지 않고 교회가 공동체라 하더라도 획일적인 전체주의가 아니라 협의와 조정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렇게 다양해지고 높아진 성도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스스로 공동체임을 표방하지만 그 공동체의 성격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 교회가 다양한 생각을 가진 개인들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서로 간에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성을 회복함으로써 탈현대 시대에도 종교적 의미를 담지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장헌일 원장2018-08-27

최근 8월 6일 종교법인이 운영하는 사회 복지시설에서 종교행위를 강제 할 수 없다는 법안이 김상희의원의 대표 발의로 11명의 의원(조정식,정춘숙,권미혁,유은혜,서삼석,이규희,소병훈,백혜련,최인호,진선미)들이 사회복지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법률 제35조의 3항에 사회복지시설을 설치·운영하는 자 및 사회복지시설의 장은 시설의 종사자, 거주자 및 이용자에게 종교행위를 강제할 수 없도록 신설하고 제55조를 개정하여 이를 위반한 경우 3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하였고 공포 후 3개월이 경과된 후 시행 된다고 부칙에 달고 있다. 그러나 국회입법예고 안건으로 8월 6일부터 예고 마감일 8월 17일 현재 타 법안 입법예고와는 이례적으로 반대의견이 2500건이 넘었다. 실제 우리나라 사회복지 시설은 대부분 종교단체에서 시작한 것이 많아 대다수가 종교형 사회복지법인으로 그 비중이 높으며(총507개 중 기독교 251개,불교 125개,천주교 105개 원불교 16개,기타 10개소, 보건복지부 통계) 이중 기독교 사회복지시설이 50%가 넘으며 법인복지시설이 아닌 소규모로 봉사를 하는 시설까지 따지면, 한국교회가 담당하는 복지영역은 80%가 훨씬 넘으며 주요 사업으로 노인,아동,여성,장애인,재소자,노숙인,한부모가족,다문화가족 등 전분야에 있어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을 보호하고 지원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형사회복지법인이 대다수임을 고려 할 때 대부분 종교형사회복지법인은 자유로운 종교활동과 포교 활동을 시설 운영 목적에 의해 운영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개정안대로 시행 된다면 종교분리원칙과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비판이 제기 될 것임에 틀림없다. 미국 사회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는“종교는 사회복지를 낳고 길러 준 어머니” 라고 사회복지에 있어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 한 바 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강조 하는 ‘사랑의 실천’이 더욱 강조되기 때문이다.특히 기독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함께 십자가로 대표 되는 자기 희생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 때문에 많은 자원봉사자가 참여하여 사랑과 나눔을 실천 하고 있다. 특히 사회복지실천에 따른 종교사회사업(religious social work)이란 용어가 사회복지학사전에도 “신앙을 갖는 사람에게는 종교인으로서 갖는 가치관이 행동의 동기가 되어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이웃에 대한 전인적 인간 존엄의 강렬함이 오랜 역사를 통해 펼쳐지고 있다”고 설명 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들은 국가가 감당하지 못하는 다양한 부분에서 사회적 기여와 봉사 섬김을 해 오고 있으며 종사자 들 역시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갖고 사랑과 헌신으로 사역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종교행위를 제한한다면 오히려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헌법 20조)에 위배된 범법적 행위를 야기 시키는 역차별을 갖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미국 연방법원에서도 2011년에 기독교 정신에 세워진 사회복지법인에서 기독교인만 채용하는 것이 합법이라는 판결이 나온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종사자 들은 자신의 종교와 신념에 맞는 일반복지시설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기에 이러한 역차별과 입법취지와는 맞지 않는 개정 법률안은 즉시 철회 되어야 한다. 이번 기회에 한국교회가 공공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여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공동체교회로서 종교형사회복지법인 운영에 있어서도 공공성과 투명성을 더욱 확보하여 각 종교시설의 종사자나 이용자 들이 그들의 헌신과 섬김 사랑의 실천 정신을 보고 종교사회복지법인을 더욱 더 신뢰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여주봉 목사2018-08-16

나는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신약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유업에 대해서 몇 달 전부터 살펴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유업을 지금 한국교회에 제시하고 계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 유업은 십자가의 복음에 주어진 유업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질 때, 그 유업들이 그 교회 가운데 차고 넘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신약의 교회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즉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고전 3:11). 나는 신약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 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삶 뿐 아니라(고전 1:30), 예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는 삶이 포함되어 있다고 확신한다(고전 2:2). 사실 고린도전서 1:30과 2:2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같이 간다. 그래서 지금까지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삶을 살펴보았고, 이번부터 예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는 삶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을 단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1서 1:3).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거에 살펴본 적이 있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신앙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예수님)을 알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기초이고, 그것이 교회의 기초이다.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3:11 속에 고린도전서 2:2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이나 진리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명백하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한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17절). 그는 이어서 그 복음을 십자가의 도라고 부르고(18절), 나중에는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사도 요한도 그가 전한 복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1서 1:1-2).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복음의 능력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듣고, 그것들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의 조명으로 만나게 되면, 그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복음이 인격체라는 사실은 고린도전서 2:2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부터 계속 그가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2:2에서 그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어야 옳다. 그래야 앞뒤가 물 흐르듯이 잘 연결된다. 그런데 그는 “전하지 아니하기로”라는 말 대신에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정말 핵심적인 말이다. 복음은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아는 만큼 그분을 전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먼저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기를 그토록 추구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만큼 우리 삶에서 그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님을 안다는 말의 의미는 전에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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