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교수 2020-09-25

복지국가들의 과보호로 세상 살 의욕을 잃은 식물인간을 '폼프리포사라'고 부른다. 폼프리포사 현상은 1985년 전후에 노르웨이를 비롯한 스웨덴 등지의 복지국가에서 번졌던 사회 현상이다. 이 폼프리포사란 말의 어원은 스웨덴의 여류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랜(1907-2002)이 스웨덴 정부의 높은 세율을 풍자하는 동화인 '폼프리포사 인 모니스마니엔'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이 동화가 그 당시 유럽에서 베스트셀러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가 그토록 닮아가고 싶어 했던 북유럽의 스웨덴에서는 오히려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개혁논의에 불씨를 지폈다. 소설 속 폼프리포사는 원래 동화를 쓰는 작가였다. 하지만 국가가 베푸는 복지 서비스의 보호아래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살아간다. 그런데 복지혜택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문제는 넓어져가는 만큼 자신의 수입에 대한 세금도 무거워져 가면서 그에 비례해 수입이 줄게 됐다. 여기에 누진세까지 부과돼 세금이 더욱 늘어났다. 그러자 더 이상 동화쓰기를 포기하고 국가의 보호대상자가 되고 만다. 아무리 복지국가라 해도 세금을 많이 부과하면 일할 의욕을 잃게 된다. 일하기보다 파산으로 생활 보호를 받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업가는 기업운영을 포기하게 되고 학자는 학문 연구를 접게 된다. 예술가는 예술 활동을 포기 하게 되고 종교지도자는 선교를 포기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같이 세금 때문에 살 수가 없다는 말을 한다. 복지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면 그 만큼 소비의 여력이 줄어든다. 소비가 둔화되면 그 첫 번째 피해자는 서민이다.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많은 나라에서 재원 조달을 위하여 증세를 추진한다. 여기서부터 빈곤의 악순환의 고리가 생긴다. 가난한 대중을 위한 세금이 부과되면 될수록 경제는 활력이 떨어진다. 활력이 떨어지면 떨어진 만큼 부양해야 될 국민의 수가 늘어난다. 그 국민의 복지수요를 위해 온갖 항목의 세원을 발굴한다. 더 많은 세원이 발굴되면 될수록 경제가 활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빈곤의 악순환 고리다. 지금 우리나라는 폼프리포사라로 대변되는 빈곤의 악순환 늪으로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의 과보호정책으로 개인이 세상 살 의욕을 잃고 무기력 하게 살아가는 식물인간을 일러 폼프리포사라고 한다면 우리나라도 그런 사회현상의 늪으로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심히 걱정스럽다. ? 아무리 복지혜택이 자신에게 돌아온다 해도 수입의 3분의 1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면 일할 의욕이 감퇴하기 시작하고, 절반의 한계를 넘어서면 그 일에서 손을 떼게 된다는 것이 복지 심리학의 상식이요, 정설이다. 연일 우리나라도 기업의 사업장이 수백 군데나 문을 닫고 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기업을 운영하면서 무거운 세금을 무느니 오히려 파산해서 생활 보호를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종교지도자는 종교에 헌신해야 한다. 기업가는 기업 운영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학자는 학문연구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예술가는 예술 창작에 푹 빠질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의욕을 잃고 자신들이 하던 일을 버리게 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 ? 트랜스젠더가 생겨나고 동성연애가 합법화되고 동물적 쾌락만 추구하다 보면 성풍기(性風紀)가 문란해진다. 자녀 대신에 애완동물과 같이 살겠다는 생각에 가족해체까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세금을 많이 거둬 많이 쓰는 비싼 정부(expensive government)의 과보호 (포퓰리즘)에서 일어난 병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는 과보호로 비싼 대가를 치르는 정부를 지양(止揚)하고 근로 의욕을 돋아 주는 저렴한 정부(cheap government)를 지향(指向)해야 할 것이다.

정용구 선교사 2020-09-23

유명 가수들이 자신들을 전혀 모르는 외국의 거리에 가서 오직 노래만으로 관객들을 만나는 <비긴 어게인(Begin Again)>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도 코로나19로 해외로 가지 못하고, 이번 시즌은 한국에서 진행했다. 9명의 유명 가수가 코로나로 지친 국민들을 위해 거리 공연을 펼쳤다. 그런데 총 10회였던 이번 프로그램의 후반부로 갈수록 공연 가수들이 우는 장면이 점점 많아졌다. 공인이자 유명가수들인 만큼 방송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방송 후 인터뷰에서 그들은 “음악을 사랑해서 늘 관객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공연이 취소되고, 모이지 못하게 되니 우리들의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현실에 마음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긴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과 불투명한 미래 전망 때문에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을지가 걱정됐던 것이다. 그들이 가장 많이 울었던 곡은 ‘길’이라는 노래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중략)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라는 가사였다. 이 곡을 듣자니 코로나 시대에 갑작스럽게 사역지에서 철수하거나, 선교지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선교사들이 떠올랐다. 선교사 버전으로 다시 이 곡을 고쳐봤다. “코로나로 선교의 길이 막혀 갑작스러운 철수와 한국생활, 선교지에 있지만 기약 없이 아무 일도 못하는 생활, 하지만 오늘도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그 길을 걷는다. 선교가 분명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길이라고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코로나 시대의 선교사의 삶에는 자신이 없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이 길을 제대로 걸어가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설 수 있을까?” 비긴 어게인에서 우는 가수를 위해 동료 가수들이 노래로 위로해 주었다. ‘촛불하나’라는 곡이다. “지치고 힘들 땐 내게 기대. 언제나 네 곁에 서 있을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내가 너의 손 잡아줄게”라는 가사다. 이 가사도 그 자체로 ‘하나님이 코로나 시대의 선교사들을 위로해 주는 노래’ 같았다. 지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후원교회와 성도들이 이렇게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면 얼마나 힘이 될까. 실제로 CCM 사역자들과 함께 지치고 힘든 선교사들을 위한 위로의 온라인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외로운 선교지에서 코로나19의 위기 속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불확실한 미래로 자신이 가고 있는 선교의 길이 흔들릴 때, 우리가 위로의 노래로 힘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랜선 콘서트를 기획한 것이다. 이번 코로나 기간에 많은 음악가들이 지치고 힘든 이웃들을 위해 공연으로 힘을 주는 사례들을접했다. 특히 교회에 가서 마음껏 찬양을 부르고 싶은 갈급함을 채우기 위한 CCM 사역자들의 온라인 찬양은 너무 큰 힘이 된다. 그 수고가 지쳐 있는 선교사들에게 전해진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힘이 될 것 같다.

이정기 목사 2020-09-27

한국 교회가 사회로 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한국 교회가 비난을 받는 것은 너무 기독교적이어서가 아니다. 너무 종교적이어서가 아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않고, 기독교가 기독교답지 않아서 비난을 받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가 받고 있는 비난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하는 비난인지, 그리고 무엇을 겨냥한 비난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비난을 받는 것인가? 아니다. 그 분의 인격을 표방하면서 전혀 그리스도의 인격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 비난을 받는 것인가? 아니다. 사랑을 외면한 종교인들의 위선과 교만과 형식주의가 비난을 받는 것이다. 만고의 진리인 성경의 내용이 비난을 받는 것인가? 아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교회의 잘못된 전통, 제도 및 교권이 비난을 받는 것이다. 현재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기독교가 비난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첫재. 진실성 결여 때문이다. 일부 확진 판정을 받은 목사와 신도들이 도주하거나 거짓말을 했다. 동선을 숨겼다가 집단 감염 사태들이 벌어졌다. 동선을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했다면 추가적인 감염을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 하는 것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다. 우리는 사소한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정부가 더 이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조치를 취하여, 국민 모두가 경제적인 피해를 무릎쓰고 참여했다. 그런데 일부 교회가 대면 예배를 강행하는 모습들을 보며 교회가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근본 정신이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 정신을 교회가 거스르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비난하는 것이다. 물론 정부의 조치가 맘에 들지 않는다. 방역에 힘써 달라고 협조를 당부해야 하는데 방역을 위한다는 이유로 비대면 예배를 교회들에게 강제하고 있다. 대통령은 일부 교회 문제를 두고 '방역조치를 방해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과격한 표현을 하고, 국무총리는 '구상권을 행사한다.'고 하고, 법무부 장관은 '법이 허용하는 모든 수단을 통해 엄정하게 조치한다.'고 하고, 여당 대표는 '방역을 회피하면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며, 마치 한국교회를 범죄 집단처럼 취급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강력히 대처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교회는 적극 참여해야 한다. 예수님은 마5:13,14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밖의 소금이 아니다. 세상 밖의 빛이 아니다. 빛과 소금이 필요한 곳은 바로 세상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무대이다. 세상과 떨어져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생각할 수 없다. 마5: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세상속에 살면서 빛을 비추어야 한다. 착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22:39절에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 눅10장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다.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리고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한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다.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한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는다. 율법 교사가 대답한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때 예수님께서'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강도 만난자의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셋째.교회의 세속화 때문이다. 거룩은 교회의 본질이다. 주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롬12:1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교회의 매력은 거룩이다. 세상과 달라야 한다. 구별되는 것이 영향력이다.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그때부터 교회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세속화이다. 세속화란 세상과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추구하는 것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가치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교회는 말씀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거룩한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 세속적인 것들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속에 바른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신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순결인 것처럼, 교회의 생명은 거룩이다. 기독교는 행함의 종교이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야고보 사도는 강조했다.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면서 강조한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였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익도 없고, 구원도 없다.<약2:14>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2:17> 갈6: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다. '내가 선한 것을 생각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고, 선한 것을 지지하므로 나는 선한 사람이다.'그렇지 않다. 그 정도로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바리새인들도 선한 것을 생각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고, 선한 것을 지지했다. 그런데 주님께 책망만 들었다. 행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선을 이루기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다. 선을 행하되 포기하지 말자.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심는것도 내가 하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지만, 거두게 하시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선을 행하면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의 신뢰, 잃어버린 교회의 신뢰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권득칠 총장 2020-09-16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볼 때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와 신학이 각 시대마다 지녔던 사조나 사상으로부터 어려운 도전을 받아 왔다는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에는 오늘날대로 교회와 신학이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특히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달로 인해 도래된 오늘날의 ‘과학기술시대’는 우리 인간의 삶의 조건과 형태를 급속도로 변화시켜가고 있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은 절정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과학기술의 진보가 초래한 결과는 어떤가? 오늘날 인류가 처해있는 현실은 바로 과학기술의 바탕 위에 세워진 현대문명의 자체붕괴를 가져올 만한 대재난이 예상되기조차 하는 절박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지난 9월 1일 천주교 프란체스코 교황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을 서둘러야한다고 촉구했다. 교황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메시지를 통해 기후 변화가 가져온 위기를 교정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 능력이 닿는 한 모든 것을 할 것을 호소했다. 최근 생태계와 환경 파괴에 관한 전문가들의 경고는 걱정을 넘어 가히 공포로 다가온다. 그야말로 ‘단 하나 뿐인 지구가 얼마나 버틸까’하는 종말론적 상상력까지 자극하는 그러한 공포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성장’이라는 사회 경제적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줄곧 자연을 파괴하는데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최근에는 유전공학분야의 기술개발로 인해 생명체 안에 있는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함은 물론 심지어는 인간의 기술로 단백질 합성을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생명형성과정에 있어서 인위적인 간섭을 가능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피조물인 인간 스스로 어지럽히고 있는 실정에까지 이르렀다. 더욱이 핵물리학 분야의 기술개발은 곧바로 무기제조기술로 이어졌다. 원자탄, 수소폭탄, 중성자탄 등 순식간에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생명체를 몰살시킬 수 있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갖는 대량 살상용 무기를 등장시켰다. 이와 같은 엄청난 생태학적 재난이 예고되는 오늘날의 현실 상황은 지난날의 과학기술에 대한 소박한 낙관적 시각이나 맹신적 시각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함께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 수정을 요청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한계와 책임’의 문제가 지구적 차원의 문제로서 윤리적 관점에서 신학과 과학을 비롯한 광범위한 제 학문 영역들로 하여금 학문 간의 대화를 불러내고 있다. 더욱이 과학기술의 진보가 수반하는 생명 파괴적 또는 반생명적 현실은,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생명의 거대한 연관성’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청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전환할 것과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의 모습 자체를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우리 기독교 신앙은 과학기술의 힘과 책임에 대하여 진지하게 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신앙현실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책임성은 물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책임성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 차원에서 진지하게 다뤄질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적 생태적 위기상황은 기독교인 모두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물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더 이상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묻는 물음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향해 바로 지금, ‘우리 인간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 물음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정용구 선교사 2020-09-15

최근 한국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선교사들이 여러 가지 상황과 어려움으로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 특히 지난 2월부터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더 많은 선교사 가정들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지난 5월 KWMA(한국세계선교협의회)의 설문에 의하면 20% 정도의 선교사가 귀국을 했고, 8월에는 30%정도에 이른다는 회원단체의 보고가 있었다. KWMA 2019년 선교사 자녀 통계는 1만8,545명이다. 특히 선교사들은 5~6년차에 1년씩 안식년을 가지고 있다. 보통 선교단체의 5% 정도에 해당하는 선교사들이 안식년을 한국이나 제3의 국가에서 보내게 된다. 더불어 KWMA 2019년 선교사 통계에 의하면 60세 이상의 선교사가 전체 선교사의 16%다. 매년 820명 정도의 선교사가 은퇴해 한국에 머무르게 된다. 또한 비자거부 및 선교 관련 업무와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과 후원 및 개인의 일들로 인해서 한국에 머무르는 선교사들이 적지 않다. 코로나19로 인해 선교지 복귀가 불확실하게 돼 한국에 머무르는 기간이 늘어나면서 선교사들조차도 한국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 많다. 필자도 선교지에서의 비자거부로 갑작스럽게 한국에 와서 1년 정도는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사람들과의 접촉 간에 약간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제가 외국에서 와서 그런데요,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시겠어요?”라고 해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안내를 해 주는 경험을 많이 했다. 최근 KWMA에서는 이런 부분을 돕기 위해 ‘선교사의 슬기로운 고국생활’을 제작하고 있는데, 참고한 자료 중에 정부관련 복지 자료만 해도 300페이지 분량이 될 만큼 방대했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을 위해서는 ‘한국생활 길잡이’와 같은 정착 지원 프로그램들이 체계적으로 잘 운영되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특별히 한국 경험이 적은 선교사 자녀들에게는 좀 더 많은 한국 정보가 필요한데, 아쉽게도 선교사 부모들도 그 정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선임 선교사가 초기 정착을 위해 알려 준 현지 생활을 위한 정보는 별 것아닌 것 같았지만, 너무나 귀중했다. 필자 또한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쌓여진 정보를 새롭게 오 신 분들에게 안내하고, 유익을 주는 것은 매우 보람됐다. 물론 내가 가진 정보를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은 거래를 하면서 나 자신은 손님 대접을 제대로 못 받은 적도 있었다.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이 선교지가 아닌 고국임에도 때로는 선교지보다 더 현장 정보가 없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정보를 아는 사람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 찾아보면 다 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시점에서는 적절한 정보를 찾기가 어렵다. 인터넷에도 다양한 관점과 의견 차이가 있어 정확한 정보가 무엇인지 혼동되는 어려움이 있다. 3년 전 선교지에서 비자거부를 당해 한국에 왔을 때 누군가가 ‘슬기로운 고국생활, 선교사 편’을 만들었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한국에 귀국한 선교사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고자 고국 생활 정보들을 구하고 있다. 거창하기보다 사소한 정보들, 살면서 유익했던 경험들을 같이 공유한다면 ‘선교사들에게 좀 더 슬기로운 고국생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영훈 위임목사 2020-09-11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비대면 사회로 전환된 지도 벌써 7개월이 넘어갔다.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의 삶에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을 느낀 사람들도 있었지만 세상은 지금까지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물론 여전히 보완돼야 할 문제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인류가 그동안 쌓아온 과학 기술과 정치, 경제 체제는 비대면 사회를 잘 지탱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가 유지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사람들은 자신이 사람들에게서 단절됐다고 느끼고 불안해한다. 그래서 최근 부쩍 ‘연결’이라는 단어가 주목받고 있다. 생각해 보면 코로나19 이전에도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 연결에 대한 욕구가 큰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러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기존에 있는 많은 연결의 수단들이 제한을 받게 되자 연결에 대한 욕구와 관심이 커지고, 애써 외면하고 억누르던 단절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의 고통이 표층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기를 바라고, 연결돼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온라인 기술이 우리를 연결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온라인은 사람들이 지리·언어·문화적 장벽을 넘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하지만 온라인 기술은 그저 관계의 장을 만들어 줄 뿐 실제로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유지하게 만드는 힘이 없다. 온라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관계를 맺으려는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단절과 고립의 상태에 빠지고 있다. 관계는 결국 마음의 문제이다. 잘못된 마음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 잘못된 관계, 건강하지 않은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면 그 관계는 금방 깨어지거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관계가 된다. 잘못된 마음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욕심이다. 욕심으로 연결된 관계에선 절대로 만족을 누릴 수 없다. 모든 사람의 욕심은 같을 수 없고, 서로의 욕심이 틀어지는 순간 연결이 깨어진다. 고린도전서 5장 3절을 보면 바울이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있어서 그들의 문제를 판단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갈등을 겪었다. 만약 바울이 관계를 욕심으로 맺으려고 했다면 고린도교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의 잘못을 꾸짖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칭찬하고 인정해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지지를 구하는 대신 성령의 뜻을 그들에게 전했다. 고린도교회가 바울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아도 끝까지 그들에게 나아가 주님의 마음을 전달했다. 바울이 성령으로 그들과 관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의 감정과 이익에 따라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끝까지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길 힘쓰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는 일에 힘을 쓴다. 비대면 시대, 단절의 시대라지만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면 상황의 한계를 넘어 견고하게 연결될 수 있다. 성령은 시공간 그리고 개인의 욕심을 뛰어넘어 모든 그리스도인을 하나 되게 만든다. 바이러스로 인해 물리적 단절된 공간에도, 깨어진 관계로 인한 감정적으로 단절된 마음에도 성령은 교회를 연결해 하나 되게 하신다. 교계 일부에서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된 상황으로 인해 신앙이 약해지고, 교회가 흔들리게 되진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를 붙들고 계신다. 인간의 연약한 마음으로 교회의 문제와 연약함을 바라보지 말고, 크신 성령의 시선으로 하나 돼 굳게 세워진 교회를 바라봐야 한다. 이 땅의 교회가 먼저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연결되고, 불안과 염려 가운데 지쳐있는 사람들을 참 편안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연결하는 진실한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김명전 GOODTV·데일리굿뉴스 대표이사 2020-09-10

세계가 재난으로 신음하고 있다. 코로나19를 시작으로 홍수, 태풍, 화재 등 복합재난이 줄을 잇고 있다. 민생경제와 삶의 터전이 초토화되고 있다. 이 재앙과도 같은 재난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인류사회학자 레비 스트로스(Levi Straus) 교수는 “재앙의 근원은 문명이란 이름으로 누려온 삶의 편리와 물질적 풍요의 대가”로 진단했다.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인간이 누린 편익에 대한 비용인 셈이다. 지구촌은 대혼돈의 위기상황이다. 출구는 없을까? 민생경제가 파탄지경이다. 우리도 피해갈 수 없다. 통계가 말해준다. 올 2분기 국민총소득(GNI)이 –2.2%로 12년 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이다. GNI는 국민이 국내와 해외에서 벌어들인 임금, 이자, 배당 등 총소득을 말한다. 중요한 경제지표다. 실업자로도 확인된다. 지난 7월 기준 실업자 수는 113만 8,000명이다. 1998년 국가부도 상황을 능가한다. IMF체제 이후 21년 만에 최고다. 세계 경제도 마찬가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IMF자료(7월)를 인용해 보도했다. 선진국 평균부채 비율이 128.2%로 높아졌다. IMF의 조사 대상 국가는 한국을 포함해 미국, 독일 등 39개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비용 조달로 재정을 풀었던 1946년 128.2%를 넘었다. 64년 만의 기록이다. 신흥국도 같다. 세계 GDP 대비 부채 비율이 62.8% 역대 최고다. 최악에 빠진세계 경제의 실상이다. 문제는 재난의 끝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21세기형 재난은 일회성이 아닌 일상화다. 순식간에 국가의 생산역량을 추락시킨다. 경제 생산요소인 자본과 노동의 총량을 잠식한다. 자연재해는 공동체의 기반시설인 도로, 철도, 항만, 댐 등 사회간접자본을 파괴한다. 공장, 농지, 가옥 등 민생 기반도 초토화한다. 경제의 동력인 1인당 평균 자본량을 약화시킨다. 다음으로 감염병 재난은 사람에게 집중된다. 사람을 공격함으로써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생산성이 추락하면 경기는 활력을 잃고 침체로 빠진다. 자본과 노동을 약화시키는 복합재난의 실체다. 한국의 현실이다. 시급한 것은 경제의 자본력과 생산성을 복원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수단은 국가재정뿐이다. 정부의 한국형 뉴딜정책과 펀드 조성도 그 일환이다. 뉴딜정책 집행의 핵심은 자본의 효율적인 배분에 두어야 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멀리 보고 일상화된 위기대응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소모적인 돈뿌리기 보다 생산성과 자본량을 키워야 한다. 다가올 재난은 과거와 다르다. 과거 기준의 사회간접자본은 무력화되었다. 새로운 기준의 건설과 안전기준에 맞춘 재정투입이 필요하다. 감염병 재난도 마찬가지다. 신종 바이러스의 일상화다. 의약산업, 기초과학, 소재와 장비, 환경, 벤처분야에서 유효 수요 창출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민간의 자본참여도 중요하다. 유동성 관리를 넘어 자본력을 총동원하는 차원이다. 재정투입을 과도한 부채 증가로 비난할 수 없다. 재난이 세상을 움직이는 패러다임까지 바꾸고 있다. 사람의 이동은 줄고 물자만 오가는 시대로 간다. 비즈니스도, 교육도, 관광도 비대면 방식이다. 이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국가의 운명이 갈린다. 도약이냐 침몰이냐. 기업과 정부, 종교계 등 각계각층이 힘과 지혜를 모아야한다. 복합재난의 위험이 지구촌을 덮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가 무너지는 경제를 빚으로 버티고 있다. 각자 살길을 찾아 골몰하지만 버겁다. 어느 때보다 국제협력이 절실지만 글로벌 리더십이 없다. 분열과 고립화다. 미국이 자국우선주의(America first) 전략으로 돌아섰다. 중국과 패권경쟁에 집중하면서 국제 정세가 불안정하다. 국제사회의 구심점이 없다. 글로벌 경제성장도 더이상 유효수요를 일으킬 시장이 없다. 한계상황, 임계점에 가깝다. 파괴를 통해 시장을 창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세계 도처에 위기로 체제를 지탱하는 ‘쇼크 독트린’의 유령이 떠돈다. 근본적 위기는 경제에서 정치로 옮겨지고 있다. 그 수단이 전쟁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이 위기로부터 탈출할 가장 바람직한 출구는 있다. 국제사회가 손잡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평화와 공존의 새 질서를 만드는 길뿐이다.

정재영 교수 2020-09-05

바이러스의 재확산과 교회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가 재확산되면서 많은 국민들이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바이러스의 급속한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 서울과 수도권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3단계에 준하는 2.5단계로 강화하면서 다시 일상이 멈추는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전까지 비교적 방역이 잘 이뤄지고 바이러스도 통제 가능한 수준에서 관리되고 있었으나 최근 급속하게 재확산이 일어나면서 지금 시기를 놓치면 의료 시스템이 붕괴될 수도 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이다. 고위험 시설로 분류된 곳은 영업 행위도 제한되고 일부 기업들은 다시 재택근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경제 상황도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 여기에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교회발 코로나 확진자가 다수 발생하면서 여러 지자체에서 교회의 비대면 예배를 권고하면서 주일 예배조차 예배당에서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교회에서 예배당 예배를 고수하면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실제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교회에서 확진자가 다수 발생해 교회에 대한 사회로부터의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이에 대한 교계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가 하면, 또 다른 편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생명과도 같은 일이라며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많이 이야기되듯이 우리 교회 역사에서 예배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일제 시대에도 그렇고 한국전쟁 시에도 그러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예배당 예배가 중단되는 상황을 맞게 되자 많은 교회들이 엄청난 위협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일부 교회에서는 이 예배를 목숨과도 같이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표현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이러한 신앙이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지켜온 뿌리이고 큰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신앙은 자신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앙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염병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우리까리 예배를 잘 드리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다가 확진자가 발생하고 주변 사람에게 감염을 시키면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방역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교회가 반대로 이웃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고 이웃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 형국이 됐다. 이번 광화문 집회를 주도한 교회 주변에서는 교회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커서 주변 상인들이 교회를 상대로 피해보상을 위한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다. 신앙의 공공성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신앙의 공적인 차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공적인 영역에서 표출돼야 한다. 지금은 교회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여전히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우리 사회에 대한 막중한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도 공적인 기준에 의해 점검할 필요가 있다. 전염병이 창궐한 상황에서 예배당 예배를 고수하는 것은 신앙고백의 한 표현일 수 있지만 그것이 비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기준만 아니라 공공의 차원에서 신앙생활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공익적 차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번 바이러스의 재확산은 주지하듯이 8월 15일 광화문 집회가 큰 요인이 됐다. ‘극우’로 표현되는 일부 기독교 신자들이 대거 집회에 참여했고 이것이 바이러스 재확산의 도화선이 됐다. 우리나라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 있다. 우익이나 좌익, 때로는 극우나 극좌의 입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어떤 일에든지 책임이 따른다. 모든 국민이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자신의 일상을 포기할 정도로 애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방역의 기본이 되는 마스크도 제대로 쓰지 않고 함께 숙식을 했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고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검사를 거부하거나 집회 참가를 숨기는 등 방역을 방해하고 있는데 주최측 누구도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역시 공공성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떠한 정치적 표현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 공공의 관점에서 유익한가를 점검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익이나 좌익이나 스스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그러한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공공성은 헤게모니와 당파성 너머에 있다. 공공성은 자기 이해 자체를 성찰적으로 대상화하고, 궁극적으로 자기 이해를 넘어서는 시야를 획득하지 못하면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공공성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것은 공공성이 무엇인지 몰라서라기보다는 모든 인간 행위자들 스스로가 예외 없이 강력한 이해관계의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넘어서 보다 넓은 차원에서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공공성을 위한 공론의 장 신앙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유럽의 시민사회는 살롱이나 커피숍 등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토론을 통해서 발전해 왔다. 우리 사회에서도 시민사회의 다양한 주체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고 공론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교계에는 이러한 공론의 장이 부재하다. 초기 한국 기독교는 교회 안에서 활발한 토론과 회의를 주도하면서 ‘토론 공화국’의 면모를 보여 왔지만 지금의 한국 교회는 그저 믿기만을 강조할 뿐 깊이 ‘상고’하고 토론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개신교회는 개교회주의 전통을 따른다지만 각 교회의 의사결정은 토론을 통해서 이뤄지기 보다는 교회 지도자인 목회자나 중직자들에 의해서 이뤄진다. 마찬가지로 교계를 대표하는 단체들이 난립해 서로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표출할 뿐 이들 사이에 협의와 토론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기독교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회에서는 자신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인정받는 사람이라도 교회 안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보다 교회의 권위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신앙 좋은 사람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 안에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권위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양한 신앙관을 가진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조차 소외돼 왔던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의견이 교회 활동에 반영돼야 한다. 그러나 공론의 장에서는 단순히 자기주장을 외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 하며 다른 사람들을 윽박지를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주장을 통해서 배우려는 자세로 토론에 임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어떤 것이 진정으로 한국 교회와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위한 것이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의 공공성 회복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신동식 목사 2020-09-02

코로나19로 인해 들려오는 소리 가운데 가장 슬픈 소식은 기업들이 주일에 교회 가는 성도들에게 압박을 준다는 이야기다. 자본주의의 가치는 돈이기 때문에 돈 버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무엇이든 다 내동댕이친다. 그러나 정말 무지한 것은 신앙이 기업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으며 돈을 벌게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직업적 소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자본주의의 핵심임을 알아야 한다. 소명 없는 직업처럼 더럽고 추한 것은 없다. 오직 돈벌레로 사는 것이면 인간 존중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직업 소명은 이러한 추함을 상쇄시켜준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이러한 가치를 가볍게 만들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모습이다. 기업은 직업적 소명을 가진 직원이 풍부할 때 건강함을 유지한다. 그래서 직원이 소명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움을 줘야 한다. 직원이 병이 든다면 기업도 곧 병이 든다. 주간 리포트 넘버즈 59호(http://www.mhdata.or.kr/2020년 8월14일, NO59)에 의하면 국민 절반(48%)이 ‘코로나 블루(코로나 우울감)’ 상태에 놓여있다고 한다. 2018년에 비하면 2.6배 증가한 상태다. 이로 인한 진료비가 증가는 13%다. 이 상태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코로나19의 위험과 함께 ‘코로나 블루’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직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이러한 ‘코로나 블루’ 상태가 지속적으로 늘어난다면 그 기업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다. 의사들은 ‘코로나 블루’의 위기를 말하면서 자연에서 운동할 것을 조언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쉬운 상황이 아닙니다. 코로나19 상태가 지속될수록 삶의 질은 더욱 떨어집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고통은 더욱 증가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건강을 유지합니다. 상담소가 증가한다는 것이 그것을 방증하는 또 하나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기업을 하는 분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만족하지 말고 문제를 넓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기업 운영에 있어서 자발적인 독려와 강제적인 압박은 그 후유증이 전혀 다르다. 기업은 지혜를 모아서 직원들에게 코로나 위기에 바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자발적 독려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권력으로 압박을 하면 당장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오히려 문제의 악화를 가져온다. 정부 역시 급한 불을 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차 주어질 상황을 좀 더 살피면서 세밀한 정책을 입안해야 한다. 기업도 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하려면, 눈앞의 이익을 위해 강제 수단이 아니라 기업의 소명 의식을 다져야 한다. 또한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배는 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업의 건강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코로나19’와 ‘코로나 블루’는 둘 다 기업에 악영향을 미친다. 코로나19는 마스크와 격리가 필요하겠지만 ‘코로나 블루’는 마스크와 격리로 해결되지 않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서로 인내하고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앙의 자리도 소중하게 여겨 줄 때 위기 후에 모두가 즐거움이 배가 된다. 이러한 시대에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제대로 점검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의 생활은 시험을 통해 확인받는다. 결과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인한 직장 및 인간관계에서 오는 시험은 쉽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무시와 조롱과 고난을 겸해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욕하는 것을 온몸으로 받을 것이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침 뱉음을 당하고 있다. 참으로 회개의 재를 뒤집어써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조심하고 점검을 잘해야 한다. 실족하게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한다. 실족하게 하는 자리에 최대한 서지 않아야 한다.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이 할 일은 낮아지는 일이다. 그동안 너무 높아졌는지 모른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는 낮아지는 자라고 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작은 자가 돼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일이다. 작은 자가 될 때 큰 자가 된다고 말씀한다. 코로나19는 우리는 강제적으로 낮은 자로 만들고 있다. 낮아지는 것이 교회를 살리고 세우는 일이다. 교회가 낮아지면 교회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떠난다. 교회가 높아지면 온갖 세력들이 날 파리처럼 몰려든다. 이번 기회에 낮아지는 삶을 제대로 살아보는 것도 유익하다.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자고 말한다. 우리의 낮아짐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힘들고 지친 삶이 잠깐 지속하겠지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지 확인하는 좋은 시간이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 됨을 고백하는 시간으로 비상시기를 견디기 바란다. 그것이 혹 올지 모르는 긴 겨울을 이기는 원동력이다. 교회의 예배와 가정 예배를 더욱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최선을 다해 주어진 방법을 통해 말씀을 전해야 한다. 성도는 온 마음을 다해 가정 예배를 사수해야 한다. 그래야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 기쁨으로 만날 수 있다.

여주봉 목사 2020-08-29

하나님은 영적 랜드마크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보이시고 길을 지도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개인 뿐 아니라, 단체도 영적 랜드마크를 통해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단체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알리시기 위해 한사람에게, 특별히 그 단체의 리더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영적 랜드마크들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알리셨다. 물론 그것들은 아브라함 개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를 통해 세워질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 곧 이스라엘, 더 나아가 새 이스라엘인 신약의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다윗을 부르실 때도, 바울을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각 개인 뿐 아니라, 단체도 영적 랜드마크를 통해 인도해 가시기 때문에 각 사람은 자기가 속해 있는 단체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영적 랜드마크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단체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과 비전을 깨달아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가끔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무시하고, 소위 자기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만 찾고 추구하는 일부 성도들을 본다. 그것은 옳지 못한 자세다. 교회는 자기의 사역을 펼치기 위한 발판이 아니다. 각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그 몸의 지체로서 그 일에 온 삶으로 동참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이루신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비전에서 우리는 이 점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우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셨는데,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아브라함 아버지 데라를 통해 일하셨다(행 7:2-4, 창 15:7, 창 11:31-32 참조). 아울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것들을 그의 아들 이삭에게도 말씀하셨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시되 이삭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그 일을 하셨다는 의미다(창 26:24 참조).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해 오신 일들, 즉 영적 랜드마크들을 잘 이해하지 않고 이 한 구절만 가지고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시고 이삭의 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는 정도로만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이삭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해 오신 일들을 이삭을 통해서도 계속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동일한 약속을 야곱에게도 주셨다(창 35:10-12 참조).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야곱의 열두 자손을 통해서였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야곱의 새로운 이름인 이스라엘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동일한 약속을 그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시면서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일을 지금 이루려 하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신다(출 3:17, 창 15:16,18-21 비교 참조).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시려고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우르에서 하란까지의 일은 그의 아버지 데라를 통해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을 동일하게 이삭에게도 하셨고, 이어서 야곱에게도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그 약속들을 하나하나 성취해 가셨다.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으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모세를 통해 성취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여러 세대를 걸쳐서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기도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우신 어떤 조직에 새로 부임한 리더는 소위 자기 비전을 펼치기 위해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꾸지 말고, 먼저 그 조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적 랜드마크들을 잘 살펴봄으로써 그 조직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비전을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발전되고 성취될 것이다. 반면에 만약 새로 부임한 목회자가 그동안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인도해 오신 것을 모두 무시하고 자기의 새로운 비전을 펼쳐가려고 노력한다면, 그 교회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유업을 놓치게 되고,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새롭게 바꾸려고 노력하는 목회자의 배후에는 개인적인 야망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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