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원 대표2017-03-22

대한민국 사상 첫 탄핵당한 대통령 박근혜가 21일 피의자로 검찰 포토라인에 섰다. 그녀를 지지하든 안 하든 많은 국민들이 일손을 멈춘 채 그녀의 입을 주목했다. 변호사나 대변인의 입이 아닌 그녀가 직접 국민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단 두 마디, 그것도 어정쩡한 자세로 별 무게 감이 느껴지지 않은 말을 하고는 검찰 청사로 들어가 버렸다. "박 전 대통령님, 아직도 이 자리에 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자들의 질문 공세는 경호원들의 철통 경호에 이내 가로막혔다. 이 장면을 생방송으로 보며 든 생각. '저렇게 불성실한 자세로 그 동안 국민들을 대해 왔겠구나.' 박 전 대통령은 지인 최순실을 통해 조언을 구한 것뿐이라고 별 것 아니게 생각하며 억울해할지 모르지만, 많은 국민들은 그것이 바로 비선실세를 국정 중심에 끌어들여 국정을 농단하고 헌법을 유린한 거라며 들고 일어났다. 헌법재판소는 그런 국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국민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박근혜와 최순실은 아마 임기가 다 가도록 국정을 마음껏 주물렀을 거고, 그만큼 대한민국은 회복 불능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탄핵과 검찰 조사라는 초유의 사태 못지않은 엄청난 일이 지금 한반도의 하늘, 바다,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3월 1일 시작돼 4월 말까지 계속되는 한미연합군사훈련 2017 키리졸브·독수리훈련. 여기엔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 대북 선제타격의 핵심전력이라는 F-35B, 초음속 전략폭격기 B-1B랜서, 장거리 전략폭격기 B-52를 비롯해 스텔스 전투기, 상륙선거함, 30여 만 명의 한미연합군이 참여한다. 1976년부터 거의 매년 봄마다 열리고 있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최대, 최고의 연합군사훈련으로 평가 받는다. 봄이면 꽃구경에 설레기보다는 전쟁 위기를 염려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 국민의 연례행사가 돼버렸다. 강제적인 병역 제도(징병제)는 어떤가. 현재 우리처럼 징병제 국가는 아시아에서는 라오스 몽골 베트남 등 19개국, 유럽에서는 그리스 스위스 벨라루스 등 9개국, 아메리카에서는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 9개국, 아프리카에서는 기니 모잠비크 차드 등 22개국이다. 반면 징병제를 폐지한 나라는 아세아·오세아니아에서는 네팔 미얀마 일본 등 29개국, 유럽은 네덜란드 리투아니아 헝가리 등 31개국, 아메리카는 미국 온두라스 칠레 등 22개국, 아프리카는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등 29개국이다. 징병제보다는 모병제 국가가 훨씬 많다. 러시아와 중국은 징병제와 모병제를 혼용하고 있고, 미국은 베트남전쟁 이후 모병제로 전환했다. 우리처럼 중국 본토와의 분단과 대결 상태에 있는 대만은 2017년 모병제 실시에 들어갔다. 독일도 2011년 징병제를 폐지했다. 전세계적으로 분단국가는 얼마나 될까. 외세와 이념으로 인한 동족간 전쟁으로 분단된 남-북한을 비롯해 이념으로 분단된 중국과 대만(중화민국), 언어 민족 종교 등의 갈등으로 분단된 키프로스-터키, 언어와 종교적 갈등으로 분단된 인도와 파키스탄, 종교와 인종 갈등으로 2011년 공식 분단된 수단과 남수단 정도다. 봄이면 꽃보다 전쟁을 더 생각해야 하는 현실, 교복을 벗고 연애를 할 때쯤이면 으레 군대에 가야 한다는 생각, 내 아버지 때부터 이 땅은 분단돼 왔으니까 내 자녀 때도 분단은 당연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분단은 내 자식에 자식 때까지 언제고 계속될 것이다. 군대가 주는 유익보다 그것이 주는 이별, 죽음, 수동성, 비생산성에 젊음을 뺏기고 말 것이고, 전쟁연습에 빼앗긴 봄은 결국 전쟁으로 불사름을 당하고 말 것이다. 지긋지긋한 분단에 가만히 있는다면 말이다.

임광빈 목사2017-03-15

지난 13일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은 최근 북한의 정치 상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킨타나의 주장은 '김정남의 살해에 국가적 행위자의 개입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공개적인 장소인 국제공항에서 국가적 행위자의 살해 행위는 그 사회의 폭력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고모부 장성택의 처형과 이복형제의 공개적 살해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국제사회가 북한의 최고 권력자 김정은의 폭력성에 당혹감을 갖게 했다. 이런 폭력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폭력 행위는 결코 북한사회를 향한 대내적 행위만은 아닐 것이다. 최고 권력자 가족의 생명까지 희생시킬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전략적으로 북한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국제사회에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단호함은 적대세력과 국제사회에 긴장감을 줄 수밖에 없다. 북한은 처형과 살해만이 아니라 반복되는 핵실험과 미국 본토를 향한 미사일 발사 실험으로 미국에 맞서고 있다. 수백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발사 실험은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한은 수십만이 동원되는 키리졸브 훈련에 맞서서 6차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추측이 무성하다. 키리졸브 훈련은 미국 군사력의 자랑거리인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출동하고 군사대국 중국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또 주일 미 해병대에 배치된 F-35B 스텔스 전투기와 괌 기지의 전략폭격기도 동원될 예정이다.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 동아시아를 군사적으로 충분히 압박할 수 있는 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과 김정은의 속내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동아시아의 현실은 중국이 강대국화 되어가는 상황에서 한 축으로는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이 진행 중이다. 사드 배치 등을 통해 중국을 무력으로 견제하는 미국의 재균형 전략이 진행 중이다.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 패권주의에 맞설 수밖에 없고 중국과 북한이 미국의 영향력을 함께 견제해야 하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상황에서 김정은은 자신의 공격성과 저돌적 폭력성을 분명히 보임으로써 중국을 자신들의 동반자적 관계로 확실히 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박 속에서도 북한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실험이 반복되는 이유가 있다. 중국에게 동북아 신 냉전의 길목에서 미국에 대해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전략적 동반자가 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국제사회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까? 한반도 평화의 실현은 남북의 정치, 군사적 갈등의 극복과 동북아 군사적 긴장과 갈등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가능하다. 현실은 암울하지만 새 정부 출범을 기대하며 새로운 정부와 함께 남북의 화해와 협력, 동북아 상생을 위한 평화의 담론을 다시 회복시켜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문형욱 대표2017-03-15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의 시간부터 다르게 창조하셨다. 참 많이 다른 남자와 여자!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름이 때로는 우리에게 갈등을 불러일으켜 서로의 사랑에 대한 회의까지 느낄 때가 많이 있다. 누구나가 한 번쯤은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답답하고 짜증 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갈등은 우리의 삶에 없길 바라는 기도도 하지만, 우리는 갈등을 마주할 때가 너무나 많다. 다른 여러 관계에서의 갈등관계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성교제 또는 결혼에서의 갈등관계는 삶의 질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하다. 우리는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때로는 자기 자신을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학대하고, 때로는 막강한 권력과 힘으로 상대방을 조정한다. 그래서 한 쪽으로 치우친 교제를 하려고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발생해 관계가 깨어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우리가 갈등을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갈등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갈등이 생기면 우리의 관계에서 위기가 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위기의 의미는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위험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갈등이 생기면 위험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을 하거나 힘으로 재압하려고 한다. 하지만 위에 설명한 것처럼 갈등은 위험하지만 기회가 될 수 있다. 두 사람이 더욱 갈등을 통해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내면의 깊은 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갈등을 통해 더욱 사랑하며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갈등은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에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해야 하며, 우리 자신 또한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갈등을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갈등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한다. 또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화하는 방법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갈등이 발생할 시에는 감정이 앞서 있고 흥분된 상태일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이러한 분노의 감정은 줄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 대화 방법에는 나-전달법, 비폭력 대화법 등을 사용해 보면 좋을 것이다. 나 전달법은 대화의 주된 책임이 상대방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감정과 사실을 구별하며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비폭력 대화법은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때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표현하는 대화법이다. 이러한 대화법을 공부하며 평소에 훈련을 통해 몸에 익히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브레인 스토밍을 통해서 자신과 상대방의 생각을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해보고 이후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여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토론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계에서는 자신이나 상대방이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바꾸고 변화시키길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것으로 인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더욱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자신들이 갈등을 해결해 보도록 노력하지만 잘 안될 경우에는 두 사람이 평소에 멘토로 여기는 분들에게 찾아가 우리의 갈등을 함께 기도하며 고민하고 조언을 구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두 사람을 잘 알고 이해해 주는 멘토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갈등 해결을 돕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갈등은 분명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지체들이기에 지혜롭게 갈등을 이겨냄으로써 관계가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김은호 목사2017-03-13

너무나 다른 두 사람 모세와 아론은 형제입니다. 아론이 형이고 모세가 동생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는 일에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지도자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의 현장에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지극히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으로 고백했지만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였을 때 "여호와의 명예와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그 뜻을 돌이키사 이 백성들에게 화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중보하며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큰 죄를 짓게 만들었고 백성들로 하여금 방자하게 행하여 원수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끝까지 죄에 대해 분노하며 그 죄를 척결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아론은 끝까지 백성들의 악함과 요구 때문이라며 자신의 죄를 백성들에게 전가시키며 끝까지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한 형제요 함께한 지도자였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모세와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아론을 멸하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아론을 살려 주셨습니다(신명기 9장 20절). 하지만 아론은 후에 나답과 아비후 두 자녀를 잃어야만 했습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왜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습니까? 여호와께서 명령하지 아니한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다가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두 사람을 삼키므로 죽었습니다(레위기 10장 1-2절). 그러면 왜 아론의 두 아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드렸을까요?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인 아론은 우상숭배의 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 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며 공포를 했습니다. 그리고 금송아지 앞에서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혼합주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그런데 아론의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종교혼합주의를 배웠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도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다가 불에 타 죽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 두 아들의 비참한 죽음은 아버지 아론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이렇게 자식들은 부모를 배우고 자라게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자녀들 앞에서 욕설, 불평, 불만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부모는 자녀들 앞에서 극단적인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부모는 가난해도 정직하게 진실되게 사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역할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사람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 분노했던 모세는 이튿날 다시 여호와께서 임재해 계시는 시내산에 올랐습니다(출애굽기 32장 30절). 왜 모세는 이튿날 다시 시내산에 올라갔습니까? 다시 중보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보면 모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여쭙고 묻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던 것처럼 모세 역시 하나님께 여쭙고 물었습니다. 모세가 또 다시 산에 올라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역시 기도의 무릎을 꿇는 사람이 다시 무릎을 꿇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또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 슬프도소이다 그러면 다시 시내산에 올라 기도의 무릎을 꿇은 모세는 가장 먼저 무슨 기도를 드렸습니까? 모세는 가장 먼저 슬픔에 빠져 있는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쏟아 놓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출애굽기 32장 31절). 모세는 자신의 슬픈 감정을 하나님께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슬픔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할 때 자신의 감정을 과도하게 억제하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역시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신의 슬픔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드러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부르심의 소명을 받았을 때 “내가 슬프도소이다”(예레미야 1장 6절)라고 표현했고 여호수아 역시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자신의 마음이 슬프다고 표현했습니다(여호수아 7장 7절). 한나 역시 자신의 마음이 괴로움을 때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며 자신의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슬픔을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다윗 역시 우리에게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시편 62편 8절)고 권면했습니다. 왜 모세는 슬퍼했는가? 그러면 모세는 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슬프다고 말했습니까?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해 금신을 만들어 큰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32장 31절). 모세가 왜 슬퍼했습니까? 자신의 수고와 희생을 백성들이 알아주지 못해서입니까? 자신이 드린 중보기도를 백성들이 알아주지 못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이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금신을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므로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 백성이 지은 큰 죄로 인해 슬퍼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게도 이런 죄로 인한 슬픔이 있습니까? 이 민족이 지은 죄로 인한 슬픔이 있습니까? 내 자녀가 지은 죄로 인한 슬픔이 있습니까? 우리는 내가 지은 죄로 인해서는 애통해 하면서도 내 자녀의 죄로 인해서는 별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취직이 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아 속상해 하고 슬퍼하는 부모는 많아도, 내 자녀가 지은 그 죄로 인해 슬퍼하는 부모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분노, 죄인에 대한 슬픈 감정이 있어야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누가복음 23장 28절)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내 자신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가는 내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 울어야 합니다. 점점 세상 속으로 빠져만 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한 슬픔이 있는 자만이 중보의 자리로 나아가 기도의 무릎을 꿇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명전 대표이사2017-03-10

한국경제학회의 올해 첫 세미나 주제다. 위기에 ‘절대’라는 강도 높은 수식을 더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 한국경제 절대위기의 핵심 키워드는 성장절벽이다. 성장절벽은 경기 순환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구조적 요인에 따른 침체라는 것이다. 한국경제가 잠재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저성장 국면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2010년부터다. 지난해는 2%대로 떨어졌다. 곧 1%대 추락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경제학회의 진단이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다시 3% 이상의 성장궤도 진입이 어렵다는 것이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환경적 요인으로는 세계경제가 동시에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근본적인 내부의 구조적 요인은 따로 있다. 재벌 중심의 성장전략이다. 선단식 기업생태계가 수명을 다했음에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일자리의 90% 이상이 중소•중견기업에서 나오고 있지만 대부분 중소기업이 재벌 대기업의 하청기업으로 연명하는 구조다. 대기업이 흔들리면 그에 기대 온 중소기업도 줄줄이 도산하는 운명이다. 중소•중견 기업이 독자적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때문이다. 재벌과 대기업 중심의 기업생태계로는 강소기업을 키워낼 수 없다. 조선업이 몰락하면서 조선업으로 성시를 이루었던 도시 전체가 실업 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기업이 도산하면 첫 번째 희생양은 노동자다. 곧바로 실업자로 전락한다. 실업은 소득의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기업의 재투자 없이는 고용도 성장도 없다. 저성장은 소비감소로 이어진다. 인구절벽에 고령화까지 겹쳐 왔다. 퍼펙트스톰이다. 경제정책이 성장에만 매몰돼 등한시 해 빚어진 왜곡된 경제구조의 실상이다. 경제선진국 진입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던 성장의 절정기 15년을 분석했다. 1990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경제의 국내총생산(GDP) 누적성장률은 249%다. 1인당 국내총소득(GNI)은 197.4%다. 같은 기간 가계평균소득은 90.5%, 일자리는 43.5% 느는 데 그쳤다. 그 결과는 1990년 10조 원 규모에 불과했던 기업의 순저축이 2015년에는 108조 원으로 11배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에 가계의 순저축은 29조 8000억 원에서 74조 6000억 원으로 15년 동안 겨우 2.5배 늘었다. 가계가 소비의 중심에 서고 기업은 저축에 열중한 셈이다. 경제성장의 과실 대부분이 기업에 돌아갔지만 기업은 투자에 인색해 일자리를 늘리지 않았다. 소득과 분배가 잘못된 우리 경제의 실상이자 절대위기의 실체다. 한국경제학회가 ‘절대위기’라는 진단을 내놓았지만 당장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처방은 없다. 왜곡된 경제를 바로잡을 수 있는 몇 번의 기회를 놓쳤다. 가장 큰 실책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다. 기업의 구조를 개혁할 기회로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선진국 진입 국면의 산업구조는 제조업, 특히 중후장대형 제조업 중심의 구조로는 성장과 고용창출이 불가능하다. 산업구조의 고도화가 필수다. 지금도 정상 궤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절대위기’의 진원지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중심이 되는 4차 산업혁명을 놓치면 안 된다. AI 고부가가치의 서비스 산업분야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절대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새로운 산업혁명의 패러다임에 맞추는 혁신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신동식 목사2017-03-09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신을 차리면 극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지금 필요한 상황입니다. 대통령 탄핵 문제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광장과 광화문 광장이 충돌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곧 나올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이러한 대치 상황에 불을 붙일 것입니다.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수용 여부에 따라서 혼란은 한동안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정신줄을 놓치면 큰 상처를 앉게 됩니다. 지금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경계선에는 경찰의 차벽 밖에는 없습니다. 대화와 소통이 없습니다. 오직 대결과 투쟁만 있을 뿐입니다. 서로를 향하여 저주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형제를 향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불에 던진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형국은 모두가 끔찍한 현상 가운데 있습니다. 분열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십니다. 분열은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화목과 화평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지 반복과 질시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전하지 않는 것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다양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근거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무너지면 성공해도 지는 것입니다. 세운 탑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혼란의 시기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진리의 편에 서서 바른 분별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온갖 정보가 밀물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거짓과 진실이 섞여서 우리 눈앞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공공방송도 서로가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짜 뉴스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에 부화뇌동하는 형국입니다. 분별력이 없으면 거짓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무엇이든 거짓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각종 확인이 되지 않는 정보들이 넘쳐나서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이지를 분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에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짓도 자주 들으면 진짜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정신줄을 놓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을 갖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반드시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아무 관계가 없어집니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하는 것이 혼란의 시기에 정신줄을 지키는 일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로마서 12:2) 말씀합니다. 이 세대의 흐름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정직하게 듣고 간직해야 합니다. 성경으로 정직하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분별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휩쓸리고 맙니다. 정신 줄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냉철하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바르게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배워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공의와 평화를 가슴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날 더욱더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으면 어떠한 불의한 세력도 나라를 혼란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땅과 교회를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주봉 목사2017-03-07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의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일에 온 삶으로 동참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안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그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의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다. 한국교회가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교회의 사역이 성경적인 방법의 올바른 사역으로 바뀌어야 한다. 오늘날 그 이해가 매우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우리의 사역이다. 오늘날 우리의 사역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즉 자기중심적인 이해와 행태가 매우 가득하다. 성경에 의하면 자기중심적인 삶은 타락의 본질이다. 자기중심적인 사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자기중심적인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다. 자기중심적인 사역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뒷받침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사역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 중 하나는 요한복음 5:17, 19-20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사역을 감당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신 구절이다. 성경의 단편적인 한 구절에다 성경 전체를 엮는 것은 올바른 성경 해석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 사역에 관한 단편적인 한 구절이 아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보면, 이 구절이 요한복음 전체가 말하는 예수님의 사역의 방법을 한 마디로 잘 요약하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경전체를 보면 이것이 신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역을 감당했던 방법이었던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1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19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요 5:17, 19-20) 이 구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아버지가 오늘까지 일하신다. 2. 나도 일한다. 3.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4. 나는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행한다. 5.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셔서 아들에게 아버지의 행하시는 것을 보이신다. 따라서 나는 성경적인 사역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참고로 헨리 블랙가비 목사가 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요단출판사)도 정확하게 같은 관점에서 이 부분을 잘 다루고 있다. 1.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이신다. 3.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그 일에 동참한다. 4.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성취하신다. 5.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한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사역의 방법을 배워서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는 삶을 살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제 앞으로 지금 요약한 성경적인 사역 방법을 하나하나 살펴볼 것이다. 부디 당신과 당신 교회의 삶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살아계신 역사가 넘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영훈 목사2017-03-07

현재 우리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립과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주된 원인은 결국 서로가 자기 주장만 하고, 나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데 있다. 갈등은 인류 사회가 시작할 때부터 존재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해 죽였고,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형을 속이고 분노한 형을 피해 14년간 타지를 떠돌아야 했다. 지금까지 인류는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법을 제정하고, 정치를 발전시키는 등의 노력을 해왔지만 이를 완전하게 해소하지 못했다. 이 같은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은 낮아짐,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데 있다. 즉,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낮아져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고 가진 것을 내어놓는 섬김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섬김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세 분야에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섬김과 나눔은 정치 분야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국가의 최고 리더십의 섬김과 나눔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너무나 많은 권력을 갖고 있다. 대통령이 자신이 가진 권위를 주장하기보다 낮은 곳에서 섬김으로 국민에게 다가가고, 가진 것을 내려놓는 희생을 보여준다면 우리 사회에 섬김과 나눔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더불어 보수와 진보, 두 진영의 정치 지도자들 역시 자기 진영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이기적인 모습을 버리고, 나라와 국민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주장을 기꺼이 굽힐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하다. 둘째, 경제 분야에서도 섬김과 나눔은 이뤄져야 한다. 최근 젊은 세대 중 다수가 ‘금수저와 흙수저’,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즐겨 쓸 정도로 상대적 박탈감을 많이 느끼고 있다. 또한 청년의 일자리 창출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벌 개혁이 필요하다. 이번 탄핵정국은 부(富)가 편중된 재벌과 정치권이 결탁해 편법적으로 기금을 모으면서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일자리 창출과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기 위해 재벌들이 과감하게 자신의 가진 것을 내놓고 투자해야 한다. 또한 협력 업체를 소위 갑과 을의 지배적인 계약 관계가 아니라 상생하는 파트너로서 인지하고 배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 섬김과 나눔은 종교 분야, 다시 말해 교회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본래 초대교회는 섬김과 나눔으로 온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교회였다. 교회와 교회가 서로의 어려운 사정을 도왔으며, 교회 안에서 성도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내놓음으로써 가난한 사람을 섬겨 구제했다. 그리고 132년 전부터 시작된 한국선교는 선교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섬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이와 같은 섬김과 나눔의 기독교적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데 있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교회가 철저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우리 사회의 낮은 곳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의 문제는 우리가 낮아져 각자의 자리에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인류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약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섬기시고, 죽기까지 희생하셨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인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아 섬김과 나눔으로 우리 사회가 화해하고 하나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정재영 교수2017-03-06

사회를 선도했던 교회 한국에서 선교 초기에는, 개종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공부하며 설교를 들었던 동네 가옥의 사랑방이 교회의 역할을 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가 다락방에서 시작되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교회당 건물이 생기기 전에는 여자 선교사들은 안방에서, 남자 선교사는 사랑방에 들러 각각의 공간에서 대화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후에 ㄱ자 형태의 교회당 건물이 세워지면서 안방이라는 사사로운 공간에 갇혀 공공의 자리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여성들도 교회의 공공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비록 남성과 여성이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지만, 남녀 차별이 심했던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또한 교회에서는 당시의 신분 질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백정촌에 살던 한 백정이 병이 나자 어의(왕의 주치의) 신분이었던 에비슨 선교사가 치료해준 것을 계기로 이 백정의 아들이 제중원이라는 근대 의료기관에서 교육을 받아 한국 최초의 양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백정은 개신교에 귀의하여 후에 교회 장로가 되었고 양반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ㄱ자 교회당을 지었던 한 교회에서는 장로를 선출하는데 주인과 그의 종인 마부가 함께 후보로 나와 마부가 장로로 선출되는 일도 일어났다. 그는 후에 신학교에 가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의 주인이었던 이도 나중에 장로가 되어 자신의 마부였던 이를 담임 목사로 청빙하여 함께 사역을 하였다.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토론회가 활성화되었으며 자발 결사체로서의 교회가 전국 곳곳에 세워지면서 공공의 공간으로서 수평의 의사소통을 수행하는 시민들의 공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에 속한 교인은 공공의 공간에 참여하는 자를 뜻하였고, 초월의 가치에 잇대어 기존하는 관행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새로운 삶에 헌신하겠다며 공중 앞에서 선서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의 기독교인이었다. 3·1 운동 당시에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은 신앙심에 기초한 애국심의 발로이기도 하거니와 이와 같이 다수의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전국적인 조직이 바로 교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당시 신생종교로서 교인 수가 적었고 교회 수도 많지 않았지만 사회를 선도하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였다. 사회 자원이 풍부한 교회 그러면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한가? 작년 인구센서스에서 제1종교로 등극하였지만,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사회적인 물의를 빚은 사람들이 교회 장로를 비롯한 기독교 신자인 경우가 이어지면서 과연 한국의 기독교가 종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에 발표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사회신뢰도 조사에서도 교회의 신뢰도는 지난 2013과 비교했을 때 0.8% 상승한 20.2%에 불과했다. 숫자상으로는 제1의 종교가 되었을지언정, 그 역할에서는 제1의 종교다운 위상과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많은 역할을 감당할 만한 풍부한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교회는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윤리를 가지고 있다. 개인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바탕으로 타인에 대한 헌신이나 돌봄 등의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 안에 본래부터 존재해온 것들이다. 곧 사회에 대한 공적인 책임이라는 과제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교리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윤리를 바탕으로 교회는 시민 조직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공공 활동에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연결망을 발전시키기에 매우 적합한 장이다. 현대 사회에서 파편화되고 단절된 사람들이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할 때, 교회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신뢰를 발전시킴으로써 공동체주의 운동을 활성화시킬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회는 많은 인적, 물적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작년에 발표된 인구센서스 결과 한국 개신교는 1천만 명에 가까운 신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운영 자금이나 재정 면에서도 막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한국 교회 성인들의 월평균 헌금액은 2005년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조사 결과 125,600원으로 나타나 1년 헌금액은 150만 원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조사 결과에 따라 한국 교회의 1년 헌금액을 추산하면, 한국의 개신교인 중 성인을 400만 명으로만 잡아도 6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10년 전 통계이니 지금은 더 늘어났을 수도 있다. 또한 교회마다 크고 작은 공간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회의나 교육 장소로 활용할 수 있다. 셋째로, 교회는 다른 종교 단체나 사회 시설들을 압도할 정도의 개체수를 가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교회는 6만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사찰보다 3배 가량, 성당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이다. 또한 전국 동·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가 4,000여 개이고 공공 행정, 국방 및 사회 보장 행정 기관을 모두 합한 행정 기관 수가 1만 2,000여 개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많은 수치인지 알 수 있다. 전국에 있는 사회 복지 시설도 2만여 개 정도이다. 물론 이것은 교회가 너무 많다는 뜻도 되지만, 이렇게 많은 교회가 협력해서 활동한다면, 전국의 지역 사회를 모두 엮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는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지 못하는 전국적인 민간 차원의 사회안전망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지역교회의 연대 문제는 이렇게 풍부한 자원을 어떻게 엮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대로 한국 교회는 지나친 개교회주의로 인해 교회들 사이에 협력과 연대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같은 지역에 새로운 교회가 이전하거나 개척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며, 다른 교회를 잠재적인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을 정도이다. 어느 지역에 새로 개척한 교회 목사가 주변 교회를 찾아가 인사하며 협력을 요청했는데 ‘각자 잘합시다!’라는 냉소적인 반응만 보였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농촌 지역의 한 작은 교회에서는 스스로 성경학교를 열 만한 여력이 없어서 지역의 큰 교회에 연합 성경학교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고도 한다. 이제는 개교회의 양적 성장보다는 전체 한국교회의 부흥을 생각해야 한다. 비록 숫적으로는 증가했다고 하나 한국교회가 국민들로부터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면 위대한 종교로서 인정받을 수 없으며 또한 그에 걸맞은 역할을 감당하기도 어렵다. 각 교단별로 구성되어 있는 노회나 지방회 같은 지방조직을 활용하여 그 지역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사역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방조직도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단을 초월하여 뜻을 같이 하는 지역의 교회들이 협력할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전체주의가 지배를 했지만, 시민 혁명과 함께 개인의 권리가 중시되었고 이것은 누구에게도 침해받을 수 없는 신성한 권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지나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주의로 흘러 많은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의 산물인 개교회주의는 어떠한 중앙집권식의 통제를 인정하지 않고 개교회의 자주권과 자율을 인정하는 의미 있는 신조였지만, 오늘날에는 개교회의 이익에만 골몰하여 전체 교회의 공동체성을 해치는 부작용이 심각한 상황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공교회성을 회복하여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거듭나야 할 때이다.

이광우 목사2017-03-02

2006년 3월 29일은, 남측의 대북지원 물품이 파주에서 개성으로 뱃길이 아닌 뭍길로 최초로 전달된 아주 역사적인 날이다. 남측 민간단체와 교회가 북한에 못자리용 비닐 3천만 평을 대형 트럭에 직접 싣고 개성으로 가서 비닐을 직접 전달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남측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개성에 가서 개성 봉평역에서 온종일 비닐 하역작업을 지켜보았다. 북녘 땅 초봄의 바람은 무척 차가웠으나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향한 꿈이 있어서 내 마음은 참으로 따뜻했다. 하역 후 잠시 둘러본 개성시내, 명색이 북한의 3대 도시로 일컬어지는 도시 한 복판에 커다란 목각 바퀴를 끼운 소달구지가 마구 돌아다니던 낙후된 풍경이 아직 생생하다. 금강산 관광길이 열려 있었고 개성공단이 비교적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남북간 접점이 하나 둘씩 늘어나면 언젠가는 우리 민족이 평화적으로 다시 하나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벅찬 기대가 있었다. 그 동안 나는 전주열린문교회 교우들과 함께 대북지원사업에 힘을 쓰는 한편, 금강산 관광길 뿐만 아니라 묘향산 관광길도 열리고, 제2, 제3의 개성공단이 북녘 땅에 계속 세워질 수 있기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새벽마다 내내 기도해왔다. 우리 기업들이 바다 건너 중국까지 건너가서 물건을 만들어 들여오는 수고를 하기보다는, 북녘으로 들어가 제품을 만들면 가격 경쟁력도 훨씬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고, 남측의 기술과 북측의 인력이 결합하면 평화통일의 디딤돌도 훨씬 자연스럽게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군 주둔지였던 개성을 북측에서 군을 철수시키면서까지 공단부지로 선뜻 내어놓은 이유는, 거기서 생산된 제품을 소비할 수 있는 도시 서울을 머릿속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개성공단은, 수많은 공단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꿈과 노력의 위대한 상징이며 역사적 이정표다. <개성공단 사람들>의 공동저자 김진향 교수는 "서울 시민들이 입고 있는 옷의 60~70%가 개성공단 제품"이라는 말을 한 적 있다. 박근혜 정권이 대북제재 차원에서 느닷없이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시켜 마침내 공단이 폐쇄되고 말았는데, 박 정권의 이 조치는 엄밀히 말해서 대북제재가 아니라 대남제재의 한심한 자충수였다는 말이다. 개성공단은 임기 5년의 일개 정권이 함부로 닫아버릴 수 없는 민족사적인 가치를 엄청나게 많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 동안 베이징에서, 평양에서, 평안도에서, 황해도에서, 블라디보스톡에서 북한 동포들을 많이 만났다. 서로 갈라선지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남과 북 사이에는 통역이 필요 없이 서로 속내를 말할 수 있는 엄연한 한 민족이다. 북한 동포와 함께 북녘 땅을 거닐 때, 잠시 감시의 눈이 소홀해지면, 살아온 날들, 소소한 자식들 이야기로 얼마든지 서로 살갑게 다가설 수 있는 형제 자매들임을 거듭 확인했다. 잠시 만났다 헤어질 때마다, "통일 되면 꼭 다시 만나자. 통일 되면 평양에서, 전주에서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뜨거운 포옹으로 주고 받았다. 지난 10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통일을 향한 우리 민족사의 이 귀한 발걸음을 한없이 후퇴시키고, 한반도를 또다시 싸늘한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박근혜 탄핵 정국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요즘, 친박 세력들은 어김없이 해묵은 "종북-좌빨" 프레임을 동원하면서 낡은 군복을 입고 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내두르고 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지구촌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가 이 분단의 장벽을 속히 평화적으로 허물지 못하는 한, 남쪽이든 북쪽이든 우리 민족이 정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은 아예 없다는 뚜렷한 증거다. 이 분단의 벽을 허물지 않는 한, 끝없는 '분열 프레임'으로 사리사욕만을 챙기려는 정치꾼들의 악행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없다. 민족의 밝은 내일을 위해 개성공단은 속히 다시 열려야 한다. 금강산 관광길도 다시 열려야 한다. 이산가족들이 자유롭게 서로 만나야 한다. 제2, 제3, 제4의 개성공단이 더 세워져야 하고, 바다 건너 외국으로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북녘으로 앞다투어 들어가는 의미 있는 흐름이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게, 남북의 찢어진 살이 조금씩 조금씩 한 살이 되어야 한다. 평화통일은 그렇게 꾸준히 준비되고 시작되어야 한다. 부디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이 대업이 이루어져,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평화의 나라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정말 자랑스런 조상이 되고 싶다.

윤영훈 소장2017-02-28

미국 팝 문화에서 한 해를 결산하는 시점은 그래미와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2월이다. 시상식의 중요한 의미는 단지 누가 상을 받았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최근의 문화 동향을 결산하고, 한 때의 유행에 흘러 지나갈 수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역사적 기록으로 전수해주기 때문이다. 이 두 시상식이 없다면 수많은 좋은 노래나 영화들이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의 중요한 시점마다 중요한 상징과 풍습과 일자를 지정하며 후대에 하나님의 역사를 망각하지 않도록 기념했다. 이를 통해 지금의 사건은 역사가 되어 시간을 초월한 현재진행형의 유산이 된다. 이번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직접적인 수상소감에선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구성과 사회자의 진행, 그리고 수상내역에 있어 반(反)트럼프 정서를 강렬하게 보여줬다. 20명의 남녀 주-조연상 후보에 역대 최다인 7명의 유색인종 후보자가 포함됐고, 그 중 3명이 수상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정책으로 인해 입국이 좌절된 시리아 촬영감독과, 시상식 불참 선언을 한 이란 감독의 작품들에 오스카를 안겨줬다. 이보다 더 정치적일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인 '작품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감독, 연기, 배경 모두에서 철저하게 흑인적이었던 <문라이트>에 돌아갔다. 생방송 중 결과가 뒤집힌 희대의 해프닝처럼, <라라랜드>는 6개 부문을 수상하며 최다 수상작이 됐지만 정작 작품상을 빼앗기며 찜찜함을 느꼈을 것이다. 30대 초반의 천재 감독 데미언 채즐의 연출은 분명 압권이다. 화려한 색체와 음악 속에 녹아있는 좌절된 청춘의 정서를 담아낸 <라라랜드>의 성과는 작품상을 받았어도 모두가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 작품은 감독의 전작 <위플레쉬>처럼 ‘흑인 없는 재즈 영화’라는 아이러니와 한계가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상을 수상한 <문라이트>는 기존의 흑인 영화와는 달리 흑백의 갈등이나 인권적 차원이 아니라, 마이애미의 흑인과 쿠바 이민자 게토 지역에서 성장하며, 처절하게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흑인의 인생 성장 드라마라는 면에서 예술적 차별화를 시도한 수작이다. (이런 주제는 주로 백인들이 선호하는 장르다) 수려하고 처연한 조명 속에 “달빛 아래에서 모든 사람은 블루다”라고 말하는 영화 속 대사처럼, 이 영화는 직접적인 인종 문제에 대한 언급 없이도 인권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 반면 지난 2월 12일 열렸던 59회 그래미상은 아카데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전년도 최고의 작품으로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았던 비욘세의 앨범이 아니라 아델의 <25>가 ‘올해의 앨범’을 수상했다. “인생은 내게 레몬(시련)을 줬지만, 나는 레몬에이드를 만들어냈어." 이 노랫말처럼 비욘세는 개인적 이야기를 흑인 여성 전체의 서사로 확장해 냈다. 거의 모든 현대 팝의 장르를 절묘하게 절충해낸 예술적 성과도 놀랍다. 하지만 그래미는 상업적 성과는 뛰어났지만 전작 <21>의 답습에 그친 (오히려 전작에 비해 훨씬 못미친) 아델에게 본상 3개 부문을 수여했다. 그래미는 전년에도 당해 최고의 앨범이라 평가받던 흑인 래퍼, 캔드릭 라마의를 외면하고, 컨트리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올해의 앨범’을 안겨줬다. 지난 몇 년간 보수적인 그래미상 선정위원들은 옛 음악을 멋지게 재해석하는 기특한(?) 젊은 백인 아티스트들(테일러 스위프트, 샘 스미스, 아델 등)을 선호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어떻게 무엇을 더 해야 그래미는 유색인종 아티스트에게 최고의 상을 안겨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문화계의 흐름을 바라보며 기독교인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지난 수십 년간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트럼프가 강조하는 반이민자, 반동성애, 반유색인종의 정서를 암묵적으로 동조해 왔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바로 전통적인 윤리관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를 염려한다. 가족을 보호하고 부양하는 성실한 아버지, 가족을 돌보며 기도하는 현모양처 어머니, 그리고 부모를 존경하는 경건한 자녀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이민자의 유입으로 종교다원주의 사회가 되고, 동성애자들로 인해 전통적 가족제도는 붕괴됐으며, 패미니즘의 영향으로 어머니들이 가정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미국 백인 부모들은 자식들이 대학에 가고 성인이 되어, 결혼 상대자로 다른 인종이나 동성 애인을 데려올지 모른다는 염려에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보수적인 정치인에 표를 던지고, 이것이 성경적이라 믿는다. (정치인들이 이런 복음주의 유권자의 심정을 이용한 측면도 많다.) 나는 이런 복음주의 기독교의 사회문화관과 가족주의을 비판하고 싶지 않다. 나 역시 이에 대해 많은 문제의식과 시대적 염려를 느낀다. 하지만 성서는 이 문제와 함께 또 다른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세속적 물질주의에 저항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책임이다. 또한 죄인에 대한 배제와 추방을 넘어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시는 은총과 평화 속에 공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사회와 문화는 분명 우리에게 많은 가치혼란을 불러온다. 이 시점에 그리스도인은 그래미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아카데미의 길을 갈 것인가? 우리는 그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정기 목사2017-02-28

3ㆍ1독립운동은 전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의지와 정신을 알리고, 상해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만약 3ㆍ1독립운동이 없었더라면, 2차 대전이 끝난 후 대한민국은 일본에 편입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기독교인은 한국 전체인구의 1%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3ㆍ1독립운동은 기독교 정신에 따라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기소된 기독교인이 25%, 전체 투옥된 사람의 40% 정도가 기독교인이었다.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었다. 3ㆍ1운동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다. 중국의 5ㆍ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화성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중에 가장 주목되는 사건은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화성은 어느 지역보다 강한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로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히 항쟁했다, 그때 3ㆍ1독립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에 아내와 함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의 탄압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그리고 1959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소외된 자들과 학생들을 위한 사회 봉사 활동에 헌신했다. 이후 1970년 4월 12일 소천하여 3ㆍ1운동의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4번 민족대표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아인슈타인은 한때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히틀러에 의해 독일이 변질되어 갈 무렵 독일 '고백교회' 지도자들의 기도와 신앙고백 그리고 그들의 외로운 항거를 지켜보던 그는 교회에 대한 평소의 선입견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다. 나는 교회를 사랑한다.' 이 아인슈타인의 고백이 지금은 굉장히 무겁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자정하려고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세상의 소망이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아원, 양로원, 모자원, 장애인 단체 등 복지 시설 중에 80% 이상이 기독교에서 운영되고 있다. "교회가 타락하였다. 무용지물이다"라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지만 아직도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 단체나 기관의 대부분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아니다. 그래도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교회의 주인이 목사인 줄 안다. 아니다. 교회의 머리요,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소망이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에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소망이다. 그리스도가 소망이기에 교회도 세상의 소망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보다 하나님께 소중한 것은 없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예수님이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핏값을 지불하고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니 주님이 교회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겠는가? 물론 교회에도 허물이 있고 많은 문제가 있다. 그래도 주님은 절대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요한계시록 1장 20절을 보면 주님이 오른손으로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신다고 했다.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말하고,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들, 목회자들을 말한다. 그러기에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다. 예수님의 최고의 관심사는 언제나 교회였다. 지금도 교회를 통해 일하고 계신다. 영혼을 구원하시고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신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조직이나 제도도 아니다.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한다. '불러낸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 교회이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부름 받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바로 교회이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2장 9-10절에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세상과 달라야 한다. 그런데 어떠한가? 세상과 별 차이가 없다. 거룩한 공동체라고 하면서도 거룩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논리대로 살아간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지체라고 하면서도 하나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주님의 영광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그래도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다.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교회는 세상이 덮어 둔 죄의 문제를 다루는 곳이다. 죄가 무엇인지,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확인시켜 주는 곳이다. 때로 말씀 듣다 보면 죄가 건드려지고,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냥 집에 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래도 교회는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죄의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를 깨닫지 못하면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지 사역도 해야 하고 각종 구제사역도 해야 하고, 인권, 환경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구원 얻을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이기에 세상의 소망이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거룩은 교회의 본질이다. 주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신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순결인 것처럼, 교회의 생명은 거룩이다. 말씀을 지킬 때 거룩할 수 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구별되는 것이 영향력이다. 교회의 매력은 거룩이다.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그때부터 교회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세속화이다. 세속화란 세상과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추구하는 것의 차이가 없어졌고, 가치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교회가 앞으로 계속 붙잡아야 하는 것은 말씀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거룩한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다. 세속적인 것들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 속에 바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기에 세상의 소망이다. 교회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선한 일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우리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이 모든 것이 선한 일이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을 섬겨야 한다. 그런데 세상이 우리의 섬김을 알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심지어는 오해하고 조롱하고 핍박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낙심하지 않는다. 억울해 하지 않는다. 하늘나라의 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섬김으로 세상의 소망인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해본다.

조용훈 교수2017-02-21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국가안보와 일자리를 강조하는 반이민 정책과 보호무역주의를 밀어붙이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강대국들은 '자국 우선주의'를 주창한다. 중국과 일본이 동시에 아시아의 맹주로 나서면서 한반도는 어느 때보다도 군사적 갈등과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남북이 통일되지 않고서는 우리의 경제도 안보도 확보하기 어려운 위기상황이 틀림없다. 시인 고은이 언젠가 문학 행사에 초청받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갔나보다. '리스본 이후'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 먼 낯선 곳에서조차 군사적 불안을 걱정해야만 하는 슬픈 분단국 국민의 운명을 한탄했다. "파두의 밤길이었습니다/ 돌아온 호텔 객실 TV/ CNN도 BBC도/ 온통 북한 핵문제였습니다/ 여기까지/ 여기 이베리아 반도까지/ 십년 뒤에도 물고 늘어질/ 나의 운명 한반도의 난제가 와 있습니다/ 끌끌 혀를 찬다고 될 노릇이 아니었습니다/ 아, 언제나 비정치적일 수 있을까/ 언제나 음식타령이나 하고 날씨타령이나 하고 축구타령이나 하고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의 통일은 평화로운 방법이어야 하며, 평화를 위한 통일이어야 한다. 평화 없는 통일이라면 비록 통일국가를 이루었더라도 다시 갈등과 분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통일은 평화로워야 하며, 통일을 통해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통일운동은 평화운동이어야 한다. 한국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다양한 통일기도회는 곧 평화기도회여야 한다. 우리사회는 지금 폭력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 구조적 폭력과 다양한 형태의 갑질을 경험하고 있다. 경쟁이 일상화되면서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고, 언어는 거칠고 행동은 파괴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주차시비나 아파트 층간 소음 갈등은 끔찍한 살인으로 비화되곤 한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화내는 것조차 살인이라 하셨고, 정당한 복수조차 포기하라고 요구하셨다. 분노는 내면의 평화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파괴한다. 예수님은 분노만 아니라 멸시와 경멸, 혐오의 언어도 비판하셨다. 괴뢰, 종북좌빨, 수구골통, 전부 다 경멸과 혐오의 언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가는 곳마다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셨다. 바울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만나든 그들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교회 뿐 아니라 가정과 일터,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면서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힘써야 한다. 평화운동은 일상생활에서 평화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노력이다.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작은 실천이고, 요란한 구호가 아니라 조용한 행동이다. 평화를 힘쓰는 사람은 우선 마음의 평정을 힘써야 한다.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은 공격행동으로 표출된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남한이 사드를 배치하려는 것도 다 내면의 불안 때문이다. 평화를 힘쓰는 사람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참 평화란 정의로움이 맺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불의에 기초한 평화는 강요된 질서, 곧 거짓평화다. 불의한 사회구조는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가져다 주고, 그 절망감은 평화를 해치는 분노와 폭력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통일을 기도하는 교회는 평화를 구하는 교회이며, 평화의 교회는 각 개인의 내면의 평화로움을 가져다 주며, 사회정의를 위해 분투하는 교회다.

이민규 교수2017-02-17

우리 신앙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내적 치유, 재정적 번영과 영적 권능을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혹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주님을 경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통해 잘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앞섰던 것은 아닐까요? 잘되고 싶은 것이야 인간의 당연한 욕구입니다. 그러나 늘 변하고 사라지는 변덕을 부리면서 행복을 보장할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들에 속는 것이 문제입니다. 돈, 권력, 사람들의 인정, 성공, 쾌락 등이 그런 것이지요. 이런 것들에 빠지면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주인 노릇을 하기에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을 공간이란 실제로 거의 사라진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그런 것에 빠진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섬긴다고 말은 하지요. 겉으로야 경건할지는 몰라도 그들의 삶은 위선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맘몬과 하나님은 함께 섬길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필자는 오늘날 기독교가 상업화되는 것을 자주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고백하는 많은 기독교인도 이해관계가 걸리면 마음 속의 숨은 동기를 드러냅니다. 본인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막상 돈과 명예와 권력이 그들의 주인이 됩니다. 목회자들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목회가 정치적이고 상업적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봅니다. 기독교 출판사도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는 책보다, 회사에 돈벌이가 될 책에 우선권을 두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선임을 강조하지만, 신앙과 성공을 모두 가지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봅니다.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복이 없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변하면 안 됩니다. 유대 신비주의자 헤쉘은 성경에 관해 “(고대)그리스인들은 이해하기 위해서 배웠고 (고대)히브리인들은 경외하기 위해 배웠으며 현대인은 사용하기 위해서 배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을 만한 복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영원불멸의 행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들만이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갈망하던 재정적인 복이나 세상의 성공이 사라져도 “괜찮아!”라고 고백할 수 있는 궁극적인 복입니다. 이런 신앙을 배우는 것은 기나긴 영적 순례의 여정이 요구됩니다. 부흥회 같은 곳에서 단번에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단숨에 배울 길이란 없습니다. 인생 문제, 신앙문제 한방에 될 수 있다는 약속은 모두 사기라고 보면 됩니다. 누구나 이 길을 가게 되면 말할 수 없이 고되고 수없이 방향을 잃고 넘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강퍅한 심령이 깎여 나가는 아픔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동행하며 손 잡아 주시고 성령님의 은혜가 부어지기에 누구라도 갈 수 있는 길이고 누구에게나 복된 길입니다. 사실, 쉬운 길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세상 길을 가면서 욕망을 따라 살다가 배반당하고 심히 고통 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길이 훨씬 쉽고 가벼운 길입니다. 배신도, 뒷탈도 없습니다. 오직 복된 길이니까요.

강성열 교수2017-02-15

작년 12월 9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이제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이 권력을 등에 업은 비선실세들의 국정 농단에 휘둘려 왔고, 그 결과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자행되어 왔음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하여 대한민국이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끊고서 정의롭고 건강한 국가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갈망하고 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이번 사태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우리나라가 분단 상황을 극복하고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로 바로 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되새겨보는 일은 자못 의미심장한 일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으며,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어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평한 사랑과 약자 보호의 정신을 핵심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 단적인 증거로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의 한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2을 낭독하시면서, 자신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고 세상에 오셨음을 분명하게 밝히셨다(눅 4:17-19). 그가 공생애 기간 동안 내내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가진 하나님 나라 복음이었다. 그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눅 7:22)이나,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마 25:40)은 그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어떠한 성격을 갖는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고 병든 자, 갇힌 자 등과 동일시하셨으며(마 25:31-46),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항상 세리들과 죄인들, 창기들, 차별당하는 여성들과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온갖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치료해주셨다. 참으로 그에게는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차별 또는 남녀 성별에 의한 차별, 장애의 유무에 따른 차별 등이 전혀 없었다. 그의 이러한 사랑과 정의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대속의 능력이면서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현장에서 죄악과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뜻하기도 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완성되었다. 그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구속 사역은 모든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소중한 것임을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통일한국의 미래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인간에게 있는 보편적인 소유욕을 포기하고서 자신이 가진 것을 많이 가지지 못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섬김의 정신을 실천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서로 돕고 의지하는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기심과 탐심을 물리치고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세계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과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앙적인 삶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정의로운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이처럼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질 때 비로소 온갖 갈등과 분열이 치유되고 한반도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가 되는 큰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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