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 관장2017-05-19

분단 이후 보수세력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상식적인 국가’라는 인식이었다. 그로 인해 대북정책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거나 북한의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압박 및 고립시키는 전략으로 대변되었다. 북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된 세력이 남북대화를 반대하는 논리는 북한은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 즉 비상식적인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진실일까? 맞지만 틀린 이야기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대화가 없는 상대는 비상식적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잠재적 적국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그래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내가 원하는 것을 알림으로 오해와 오판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는 외교의 상대를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나 지난 9년 동안 우리는 땅을 접하고 있는 상대국가와 극단적인 단절을 경험했다. 9년 내내 외쳐왔던 '전략적 인내', '원칙 있는 남북관계'는 결국 남북관계에 있어서 치명적인 오해와 오판을 불러일으켰다.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포격사건, 3차 핵실험, 미사일 발사실험 등 탈냉전 이후 가장 많은 군사적 도발이 일어났고 2010년 5.24조치 이후 지금까지 남북관계는 얼음장 같은 경색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소위 제3기민주정부를 맞이하였다. 앞선 제1기민주정부와 제2기민주정부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통해 전환기적 남북관계를 실현시켰다. 이는 지난 세월 반복되었던 남북관계에 대한 정치적 수사가 아닌, 실현가능한 것부터 실천하여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자는 실천적 통일방안으로써 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고립과 봉쇄, 압박과 제재는 상식적인 상대를 비상식적 상대로 바꿔버린다. 따라서 대화와 교류, 협력은 상호 간의 오해와 오판을 줄이고 비상식적인 상대를 상식적으로 만들 수 있다. 노무현 정부 5년의 기간 동안 단 한차례도 '대남군사도발'이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북미 간의 갈등에 의한 북한의 도발은 미국의 대북제제에 의한 것으로서 남북갈등에 의한 대남도발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북미 간 갈등의 상황에서 남한이 중재자로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지 일주일이 지났다. 제3기민주정부를 자청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요청한다. 김대중 정부로부터 이어져 온 '6.15공동선언'의 정신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 간의 화해와 협력은 통일의 당사자가 나누는 '대화와 협력'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만일 남북 간 공개적인 소통이 불편하다고 판단된다면 비공개 대화 창구를 복구하여 서로의 입장을 오판하지 않도록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지난 9년의 시간동안 이어져 왔던 남북관계의 갈등을 관리하고 이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2017년은 우리 국민들에게 특별한 해가 아닐 수 없다.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 적폐세력의 민낯을 드러내고 부패한 권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부패한 권력과 손을 잡았던 적폐세력은 한반도의 냉전체제에서 기득권을 유지해 왔기에 선거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재인 정부를 향해 빨갱이, 종북 세력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정부 1기와 2기에서 확인했듯이 경제적 협력과 문화적 공감의 확대는 남북 간의 정치적 오판을 줄이고 남남갈등을 줄여나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나는 올해가 가기 전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별개로 북한과의 대화를 열어가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남북 간의 신뢰가 회복되는 시점에 이르러 개성공단의 공장이 다시 가동되고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어 더 많은 국민들이 북한을 방문하게 되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화가 없는 상대는 비상식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는 남북대화의 채널을 총동원하여 보다 많은 대화와 협력을 이뤄냄으로써 제1기 민주정부부터 추구했던 ‘사실상의 통일’을 실현시켜 내기를 희망한다. *본 칼럼은 평통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통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김명전 대표이사2017-05-18

청년 수난시대다. 네 명 중 1명이 실업자다. 3월말 기준 체감실업률이 24.0%다. 통계청이 공개한 청년(15-29세)고용지표를 보면 지난 3월 공식적인 청년 실업률은 11.3%였다. 이 숫자로 보면 청년실업 문제가 그리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통계에는 취업준비생(취준생), 공무원시험준비생(공시생), 시간제 취업가능자인 아르바이트생(알바생) 등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포함한 실질실업률을 체감청년실업률이라 부른다. 공식실업률과 비교해 두 배 넘게 높은 이유는 실업률 산정방식이 달라서다. 공식적 실업률을 산정할 때 실업자 수를 취업자와 구직활동 중인 실업자(경제활동인구)의 합계로 나눠 계산하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정부가 모처럼 체감실업률을 공개한 것은 공식실업률로는 근본적인 실업해결책을 세울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업의 심각성도 체감할 수가 없다. 경제활동인구를 집계하는 기준만 해도 상식과는 다르다. 취업 준비 활동을 하고 있거나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규직을 목표로 취업활동을 하는 청년, 더 나은 일자리를 기다리면서 구직에 나서지 않는 경우 등 모두 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된다. 비전문가들은 이해할 수 없다. 사실상 실업자인 이들이 공식실업률에는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피부로 느끼는 실질적 체감청년실업률로 추정하는 청년 실업자는 120만을 훌쩍 넘는다. 약 450만의 청년 중에서 1/4이 실업자인 셈이다. 공식실업률에 따른 청년 실업자 50만, 알바생 8만, 공시생과 취준생 등 잠재경제활동인구 64만 4천명을 합하면 122만 4천명에 달한다. 숫자도 숫자지만 실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더 심각하다. 취업자의 경우도 질적인 면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대부분 단기계약직이나 비정규직이다. 정부가 지난해 추진한 ‘청년고용절벽해소 종합대책’으로 취업한 청년도 42.4%가 비정규직이다. 임금수준도 40.1%가 150만 원 미만이다. 대졸 고학력자는 취업절벽이다. 전체 실업자 중에서도 대졸이상 고학력이 사상 처음으로 50만을 돌파했다. 지난해부터 고졸 실업자 수를 능가하고 있다. 이 같은 추세는 심화되고 있다. 대졸이상 비경제활동인구는 352만 8000명이다. 지난 1분기 취업 의사는 있지만 포기한 채 구직활동을 아예 하지 않고 있는 숫자다. 이처럼 고학력 실업자와 청년실업자가 증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자리의 질이다. 한마디로 안정적인 양질의 일자리가 드물어 구직을 포기한 결과다. 총체적 실업난이 가져오는 병폐는 빈부의 양극화다. 빈부의 양극화는 경제의 동력을 멈추게 하는 치명적 질병이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구조적이다. 노동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로 나뉘어 빈부의 간극을 좁힐 수 없게 벌려놓았다. 기업은 재벌과 중소기업의 간극이 극과 극으로 멀다. 시민사회도 다를 바 없다. 역동성을 잃었다. 많이 가진 계층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소비하지 않는다.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은 소비할 여력이 없어 멈춰 선 채 좌절하고 있다. 다듬고, 고치고, 해체해야 할 구조적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국가공동체의 비전은 문제의 정확한 진단에서 나온다. 처방은 비전을 만들어 낼 설계도다. 5월, 새로 출범하는 정부와 대통령의 첫 번째 숙제는 일자리를 위한 구조개혁이다. 일자리를 만들어 소득을 창출하고 소비를 일으켜 성장 동력을 일으키는 것이다. 노동 없는 미래는 없다.

이민규 교수2017-05-17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폐막식, 전 세계에 실황이 중계되는 상황에서 너무나 창피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기자가 발언하고자 손을 들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기자가 질문하는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긴 침묵 속에 오바마 대통령은 “통역을 써도 좋으니 질문하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민망한 상황이 돼버린 것이지요. 결국, 발언권은 중국 기자에게 돌아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떨까요? “믿어라, 믿어라, 믿어라” 하는 말에 너무 익숙해서 그런지, 질문하는 것을 신앙이 없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튀지 마라”, “침묵이 금이다”라는 속담을 철석같이 믿어서 그런지, 질문하면 오히려 무안을 당하기 일쑤지요. 물론 성경을 대하는 태도에서 '의심'과 '의문'은 구분해야 합니다. 필자가 말하는 의심이란 무조건 부정하려는 태도이고, 의문은 더 자세히 더 정확하게 알려고 던지는 질문입니다. 정말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혹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알아보려는 간절한 자세입니다. 의문은 성경적 자세입니다. 사도바울이 베뢰아에 갔을 때,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했습니다(사도행전 17장 11절). 의문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습니다. 의문이 강하면 날카로운 질문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원래 명마는 야생마가 길들어져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야생성이 없이는 깊이 있는 사유가 나올 수 없습니다. 또한, 혼자서만 성경을 읽고 건설적인 토론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성경 읽기는 주관성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토론은 사도바울이 추구한, 성경에서 말하는 교육방식입니다. “바울은 늘 하던 대로 유다인들의 모임에 가서 세 주간에 걸쳐 안식일마다 성서를 놓고 토론하였다”(사도행전 17장 2절). 여기서 '토론하였다'는 헬라어로 디아렉타이, 즉 토론하다 혹은 사유하다의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기 위해 질문하고 토론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하고 있을 뿐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아는 것'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을 구별하는 능력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합니다. 질문과 토론은 메타인지를 키웁니다. 제대로 알게 하고 확실하게 알게 합니다. 성경에서도 '영생'을 위해서는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내용도 제대로 모르고 앵무새처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이해한 상태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기노스코진)이니이다"(요한복음 17장 3절). 신앙인들이 성경을 잘 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읽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요. 하지만 실제 이유는 성경이 “재미가 없어서”라고들 합니다. 저는 신앙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질문을 많이 던지고 토론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하고 토론하면 생각하는 즐거움이 나타나고 성경 곳곳에서 확인하거나 해법을 찾으려는 습관이 들고, 자기 생각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더욱 깊은 이해를 얻게 됩니다.

문형욱 대표2017-05-17

많은 청년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청년들은 사랑은 설레는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설레임, 정말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단어입니다. 사랑은 설레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레임의 사랑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약 6개월 이상 데이트를 하게 되면 대부분의 커플들은 설레임보다는 따뜻함을 느끼길 바랄 것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랑이 있을까요? 사람들은 완전한 사랑을 꿈꿉니다. 한 번 사랑하면 영원히 변치 않고 항상 설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우리를 늘 설레게만은 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사랑은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 말고는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사랑이 아닌 온전한 사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따뜻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온전히 표현하는 사랑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상대방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방이 나와 다를 때 우리는 답답하고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온전한 노력입니다. 이렇게 온전한 노력을 할 때 우리는 더욱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거절할 권리를 주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거절할 수 있고 상대방도 나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거절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는 우리를 따뜻한 마음을 느끼도록 할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사랑은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해서 더 좋은 것을 가지려 하고 자랑하기 위해 세상의 스펙을 쌓아야 하며 그 스펙을 쌓기 위해 상대방을 공격하고 다그치고 조종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완벽한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완벽한 사랑이 과연 존재할까? 완벽하지 않다 해서 사랑을 못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은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죄성으로 완벽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완벽한 사랑을 추구하다 보면 상대방의 허물이 먼저 보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온전하게 상대방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에 최선을 다하면 상대방의 아름다운 장점이 더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전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해야할 사랑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온전한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완벽한 사랑을 꿈꾸고 있지는 않습니까?

김은호 목사2017-05-11

영이 아닌 몸의 부활 “안식 후 첫 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장 19절 말씀입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제자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모인 곳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곳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날 밤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내 손과 발을 보고 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그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눅 24:42-43). 그러면 왜 예수님은 못자국과 창자국이 있는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만져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을까요? 영은 만질 수 없고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그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영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이 아닌 그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몸도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신앙고백을 할 때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라고 고백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식 후 첫날 저녁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너희들은 나를 버리고 떠난 배신자야”라며 꾸중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빈 무덤까지도 보고서 당신의 부활을 의심하며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을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며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또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의 최고의 관심이 평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최고의 관심은 평강입니다. 샬롬입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관심이 있는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평강이고 또 다시 강조하신 말씀이 평강인 것을 보면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최고의 관심이 바로 평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최고의 관심은 돈이 아닙니다. 성공도 아닙니다. 건강도 아닙니다. 명예도 아닙니다.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평강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왜 평강이 주님의 관심인가? 첫째로, 현실적으로 지금 평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 저녁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습니다. 이 모임의 장소는 자주 모임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마가의 다락방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굉장히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습니다. 왜 모여 있는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찾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제자들은 모인 곳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두려움 가운데 숨어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샬롬, 평강이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껴 문을 꼭꼭 걸어 잠근채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집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안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업에 성공을 했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내 자녀가 아무리 명문대학을 나오고 아이비 리그를 다닌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성공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 가운데 살아도 평안이 없다면 축복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지금 내 마음에 평안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평안이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 평강이 부활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4:2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안입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는 평안입니다. 환란과 역경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인생의 풍랑 가운데서도 눌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인간관계의 갈등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왜냐하면 이 평안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평안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평안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은 부활의 열매입니다. 셋째, 평강을 가진 자만이 평안의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보냄을 받은 자는 반드시 평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평안을 가진 자만이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을 가진 자만이 가서 평안의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문제와 상황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 이 복음을 전한다면 누가 내가 전하는 이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앞에 겁을 내는데 누가 내가 전하는 이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 안에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최고의 관심은 샬롬, 평강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찾아오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관심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최고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건강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최대관심은 평강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문제 앞에서, 죽음 앞에서, 실패 앞에서, 인생의 파도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주봉 목사2017-05-10

우리는 지난 번에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고 살펴봤다. 1.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이신다. 3.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그 일에 동참한다. 4.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성취하신다. 5.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계획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도록 그것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이제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계획해서 우리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역을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신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역을 감당한 것을 보라. 그들의 사역은 그들이 소위 하나님을 위해서 계획을 세워서 그들의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출애굽 사건과 사울(바울)을 구원한 아니니아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오늘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신 것도 정확하게 같은 이해를 담고 있다. 성경적인 사역은 아무것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 자기 중심적인 사역 말고,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도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셨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심지어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교회 안에 우리 스스로 하는 일들이 매우 많다. 그러나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만 일어난다. 그 일들은 절대로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들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예산이나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큰 교회가 수십억 원의 예산을 들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위해 어떤 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할지라도, 만약 그 일이 하나님이 주도하신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일에 임하셔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들은 그 프로젝트를 통해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프로젝트에 대해서 기독교 미디어들은 크게 보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상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건 교회적으로건 외부적인 규모를 키우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성공하기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는 삶과 교회가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부적인 규모와 상관없이 일하신다. 성경이 말하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를 들어 교회의 크기와 상관없이 일하신다. 우리는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를 가지고 미디언 군대 전체를 무찔렀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오늘날 적지 않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말씀, 말씀’을 외치면서도 그 사건을 그저 성경에 나오는 하나의 이야기에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실제 삶에서는 전혀 그런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않은 체 온갖 인본주의적인 방법에만 매달린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하는 삶>의 저자인 헨리 블랙가비 목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카나다의 새스커툰에 있는 훼이스침례교회에 목사로 부임했을 때 청장년 성도가 20명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서스캐처원 주에 있는 주요 도시마다 지교회를 세우도록 그들을 인도하셨다. 첫 번째 지교회가 세워질 당시의 일이 그 책 92쪽에 나온다. 잭 코너 목사가 지교회 담임자로 미국에서 초빙됐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가 섬기고 있던 훼이스침례교회는 그에게 사례비나 이사 비용을 드릴 돈이 전혀 없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세상에 도대체 하나님께서 무슨 수로 이 필요를 채워주신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처지를 알고 계시며, 그분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그것들을 채우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코너 목사가 이민국의 허가를 받고 믿음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어느 날 전혀 알지 못하던, 미국의 아칸소 주에 있는 파얏트빌제일침례교회에서 서스캐처원 선교에 써달라며 1,100불짜리 수표가 도착했다. 그리고 하루는 한 성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 성도는 매월 코너 목사의 생활비인 850불을 1년 동안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 전화를 끊자마자 코너 목사가 미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승용차로 도착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나가서 그 가족을 맞이하면서 오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었느냐고 물었다. 코너 목사는 자세히 계산해봐야 알겠지만 대략 1100불쯤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정확한 하나님의 역사인가. 하나님은 그 이후로 그 교회를 통해서 여러 다른 도시에 지교회들을 그렇게 세워가셨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의 외부적인 규모와 상관없이 성취된다.

윤영훈 소장2017-05-08

가족은 영화와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코드이다. 굳이 가족이 중심 서사가 아니라도 영화 속에 가족은 늘 이야기의 중심이다. 액션영화(용의자)에서도, 재난영화(판도라)에서도, 코미디(아빠는 딸)에서도, 심지어 좀비영화(부산행) 속에서도 말이다. 진한 가족애를 다룬 영화는 이전부터 지금까지 흥행 영화들의 키워드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한국 영화는 이상한 가족의 풍경을 그린 영화들이 많이 개봉했다. 연애와 결혼이 분리된 새로운 풍속도를 그린 <결혼은 미친 짓이다>, 중산층 가족 관계의 붕괴를 드러낸 <바람난 가족>, 일부일처 제도의 파격적 해체를 상상한 <아내가 결혼했다>, 사회적 붕괴로 온 가족이 할머니에게 붙어사는 <고령화가족> 등이 그 예다. 이런 영화들이 그려낸 가족은 분명 근대화 이후 표준화된 소위 ‘핵가족’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심장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다. 가족은 역사 속에 늘 진화해온 것이었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의 제목이 말해 주듯 인류는 역사 속에 늘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탄생’시켜 왔다. 흔히 ‘가족 같은 공동체’란 말을 하곤 한다. 가족은 모든 공동체의 가장 이상적 모습을 반영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가족은 공동체의 이상적 모습으로 비유된다. 서로가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호칭은 그 대표적 일례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그 가족은 상당부분 붕괴되었다. 그러니 가족 같은 공동체가 가당키나 하겠나? 오히려 가족 구성원끼리도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을 것을 강요받는 지경이니 말이다. 각자도생 개인주의 속에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의 성과로 인정받는다. 이는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믿음의 가족은 근대가족 붕괴의 시대 속에 어떻게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어가야 할까? 새로운 가족 개념을 보여주는 한 영화를 소개하겠다. 작년에 개봉해 조용하게 화제가 된 영화 <캡틴 판타스틱>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여섯 자녀들에게 세상의 교육제도와 가치를 부정하고 자연 속에 산다. 여기에서 칼 한 자루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능력과 체력을 키우고,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독서와 (당혹스럽게도 세세한) 토론을 통해 또래보다 월등한 지식과 가치관을 심어준다. 이런 가족이 과연 현실 속에 가능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이 가족이 현실과 사회 속의 충돌과 갈등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은 이 아버지를 아동학대로 몰아가고, 이로 인해 끈끈했던 가족관계가 분열되는 위기도 겪는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 가족 구성원들이 지혜로운 고집과 타협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공동체 같은 가족’이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늘의 가족은 시대 풍조를 쫒으며 붕괴되고 있다. 자본은 사랑이나 가족의 개념마저 불손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을 드러낸다. 친구가 연인보다 더 나은 점은 무엇일까? 친구는 오래될수록 삶의 서사가 풍성해지고 관계가 더 깊어지지만, 연애는 시간이 지나며 권태에 빠지곤 한다. 친구관계가 갖는 위대한 힘은 같이 놀고, 같이 일하고,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삶의 서사를 공유하는 것에 있다. 새로운 가족은 공통된 가치와 삶의 서사를 나누는 우정과 동지의식을 통한 공동체 모델에서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캡틴 판타스틱>은 바로 그런 공동체적 가족의 모델의 영감을 선물한 인상 깊은 영화다. 김정운 교수는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 한다>에서 자신이 아내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한 비결이 바로 가족 ‘리츄얼’(Ritual)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리츄얼, 즉 종교적 의식은 단순히 전통적인 가족예배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김정운 교수에게 그것은 커피와 함께 듣는 베토벤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리츄얼을 구별한다. 그는 말한다. 그것이 가족을 지키는 힘이었다고. 오늘날 가족의 붕괴를 말하기 시작한 그 때에 우리네 가족은 바쁜 일상을 핑계로 리츄얼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비싼 선물과 회식이나 이벤트가 아니라, 같이 나눌 수 있는 공통의 삶의 서사와 구별된 가족 리츄얼 말이다.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 하니 한 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고마와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5월이 되면 많은 교회가 이 찬송을 부른다. 믿음의 가족은 그저 같은 종교를 가진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눌 믿음의 서사와 리츄얼이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가족의 달’이라고들 하는 5월에 의무감에 치르는 이벤트가 아니라 가족 ‘리츄얼’을 함께 만들어보면 어떨까?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같은 취미를 공유한 친구들과 같이 수다 떨며 그 일을 같이 행할 때였던 것 같다. 가족 간에도 이런 공통 관심과 취미가 있어야 한다. 같은 책을, 같은 영화를, 같은 음악을 나누고, 함께 봉사도 하고, 음식을 먹고, 더 나아가 그것에 대해 솔직하게 토론(?)하는 활동에서 우리 가족은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 내가 꿈꾸는 가족은 바로 그런 ‘공동체’다.

안용준 목사2017-05-08

루터의 종교개혁을 향한 진리의 횃불 1513년 이후 루터의 비텐베르크대학 신학부에서 행한 시편과 로마서의 강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을 뿐 아니라, 문화 예술에 관한 ‘성경적 비전’을 열어주었다. 이와 관련 루터의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의 판매는 성상숭배에 관한 이미지의 문 제와 시기적으로 중첩돼 혼란한 사회의 자화상을 연출하면서 보다 확대됐다. 급기야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Ⅱ, 1503~13)는 일을 내고야 만다. 로마에서 성 베드로 성당을 새로 짓는 데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완전 면죄부’를 공고했던 것이다. 그의 후계자인 교황 레오 10세는 이 일을 확대 계승했다. 이탈리아 메디치(Medici)가 출신인 레오 10세는 자신의 가문에서 익힌 상업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의 위세는 독일의 막데부르크(Magdeburg)와 마인츠(Mainz)에서도 이어졌다. 1515년 3월 31일 그는 지역의 대주교인 알브레히트에게 마인츠, 막데브르크, 란덴브르크에서 성 베드로 성당 신축을 위한 ‘완전 면죄부’를 8년간 판매할 수 있다고 허가했다. 실제로 ‘완전 면죄부’는 교황이 직접 제시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죄에 관계했다. 이 면죄부를 판매할 동안에는 다른 모든 면죄부는 폐지됐다. 이 면죄부에 대한 설교 때문에 다른 모든 설교는 중단되어야 했다. 이 면죄부에 대한 방해는 법으로 금지됐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 또 있었다. 도미니크 소속의 수도사, 테젤(Johann Tetzel, 대략 1465-1519)이다. 그는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교황의 면죄부를 선전하고 다니고 있는 터였다. 그의 설교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은 연보궤 앞으로 나아가 헌금을 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이때 받은 면죄부는 천국으로 가는 통행증이 되는 거다.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에 이러한 의식을 매우 고상하고 의미 있게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해갔다. 드디어 1517년 4월 테첼은 삭소니 선제국(Elektorat Saxony) 경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수많은 비텐베르크 시민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그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 일은 루터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즉시 여러 주교들에게 이 일을 중지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면죄부를 향한 태도를 95개 조항으로 조목조목 정리했다. 원래 이 논제는 세상에 공포하려는 의도나 계획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먼저 지역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하려고 했다. 그래서 정리한 글을 브란덴부르그의 주교 제롬과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발송했다. 이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 교회(Schloβkirche)의 정문에 격문을 붙이게 되었다. 한 젊은 수도사의 진리를 향한 열정은 한층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행동의 결과에 놀란 이는 다름 아닌 루터 자신이었다. 이에 대한 반응이 의외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보름 만에 온 독일로 신속히 펴졌으며, 6주 후에는 온 유럽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면죄부의 부당성에 대하여 온 세상이 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루터의 외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됐다.

신동식 목사2017-05-04

정치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인류 역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동양철학자 공자와 맹자에서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이르기까지 정치에 대한 수많은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정치가 우리의 삶과 밀접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류의 지성인들이 남겨 놓은 정치에 대한 견해는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요? 피조 세계에서는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정치에 대한 다양한 생각이 생겨나게 된 원인은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했습니다. 이것을 위임통치라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정치는 시작됐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치입니다. 그래서 정치를 잘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성취해 가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모든 영역에서 정치를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치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타락이라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원리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뤄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은 창조 세계를 무질서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더욱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에 정치는 더욱 힘을 발휘하게 됐습니다. 창조에 주어진 정치의 목적에는 변함이 없지만 타락한 후에 더더욱 정치가 중요하고 힘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에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어서 그의 나라를 회복해 나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정치에서 떠날 수 가 없습니다. 셋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항상 함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변에는 항상 가난하고 힘든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성도의 자세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더욱 적극적으로 참된 경건이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삼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 것이 바로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바로 여기에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있습니다. 정치는 이웃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 철학적으로 공공선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공공선은 바로 이웃사랑이 가져온 열매입니다. 정치는 이렇게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치를 혐오하는 것은 이웃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또 정치는 안하지만 가정과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발상도 사실은 합당하지 않은 자세입니다. 정치적 행동이 없이 우리의 가정과 이웃을 돌보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는 구분해야겠지만 정치 그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합니다. 넷째는 국가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정부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사 가운데 어떤 이들은 국가의 존재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국가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왕직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모델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현대 국가의 모습을 통해 발전되었습니다. 국가의 존재는 우리가 정치적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정치에 대한 균형과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인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인을 분별하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무질서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성취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 정치적 행동에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정치에 대한 혐오나 자포자기나 냉소적 자세가 아니라 정치를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야 합니다. 무질서한 사회에 성경의 가치가 잘 드러나도록 감당하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를 뽑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임권을 바르게 사용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바른 정치인에 대한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선택해야 합니다. 다행히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을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독재 국가도 아닌 민주 공화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우리가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른 지도자가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은 무엇입니까? 많은 내용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정치적 소명이 분명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권력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의지가 있어야 정치를 감당할 수 있지만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소명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이것을 천명이라고 말합니다. 바른 지도자의 자세에는 이러한 정치적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단지 권력의지를 통하여 명예와 부를 축적하고, 정적을 죽이는 일을 위하여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바른 지도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하여 현실 정치인으로 살게 하였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그의 재능과 관계없이 자격이 없습니다. 둘째는 정직한 정치인이 되어야 합니다. 정직은 매우 평범하지만 가장 소중한 가치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정직한 지도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목마름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한 모습을 가진 정치인이 지도자가 될 때 그 민족이 소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불의하고, 비도덕적인 정치인이 지도자가 된다면 그 민족은 소망이 없습니다. 사기, 폭행, 음주운전 등과 같은 전력이 반복된 사람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정직한 지도자를 볼 수 없는 민족은 참으로 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직한 정치인을 뽑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셋째는 탐욕과 싸우려고 애쓰는 정치인이 필요합니다. 정치인은 탐욕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더구나 대통령은 그 정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범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이 힘들 수 있지만 이러한 악과 싸우려고 분투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의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탐욕을 제어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갈 것인지를 유심히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탐욕과의 싸움에서 이긴 지도자는 역사가 기억합니다. 넷째는 국민을 존중히 여기는 지도자입니다. 권력의 정점에 오르면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지배자의 권위를 행세하려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이러한 정치인은 시정잡배와 같은 사람입니다. 소명은 없고 오직 권력의지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권력을 잡으면 온갖 추태를 남발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을 자신의 종 부리듯 대합니다. 이러한 지도자는 더 이상 권력의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국민을 존중히 여기는 지도자를 바르게 분별하고 뽑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섯째는 실천 가능한 공약과 일관성 있는 정책을 제시하는 정치인을 뽑아야 합니다. 당선되기 위하여 포퓰리즘을 남발하는 정치인은 가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정말 국민을 사랑하고 국가를 고민하는 정책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책은 곧 삶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잘 살피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섯째는 샬롬을 실천할 의지가 있는 정치인을 지도자로 뽑아야 합니다. 샬롬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더더욱 이러한 샬롬이 필요합니다. 남북이 대치되고 국론이 분열된 이러한 상황 가운데 샬롬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효성 있는 정책을 가진 지도자가 뽑힐 때 나라는 평안하고 국민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정치적 지도자를 잘 선별하여 투표해야 합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정치적 위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온 책무를 바르게 선용해야 합니다.

이만열 교수2017-05-04

선거 때만 되면 ‘대북 퍼주기’ 거짓 선전은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이번 대선 때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는 대선후보 토론에서 두 차례나 걸고 넘어졌고, 새누리당의 조원진 후보도 극우 보수답게 이 문제로 악을 썼다. 아무리 북한이 없으면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보수라고 하지만, 선거 때만 되면 과장된 선동을 통해 민심을 고혹하는 것은 대선 후보로 나온 정치인이 할 짓거리는 아니다. ‘대북 퍼주기’의 골자는 과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에 현금 등을 퍼주었기 때문에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지금의 북핵 위기를 조성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북한의 김정일은 남한으로부터 받은 돈을 비축하여 핵무기를 개발했고, 2006년 10월 9일에 제 1차 핵실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북 퍼주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수정권(이명박ㆍ박근혜) 때에 네 번이나 핵실험을 하여 핵을 고도화 경량화 일상화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들은 첫 핵실험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비용에는 별로 문제를 삼지 않으려는 자세다. 때문에 북한이 핵 무기를 개발하게 된 것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 퍼주기를 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인지 그 여부를 따져 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 정확한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이 선동이 그럴 듯하게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김영삼 정부로부터 박근혜 정부 때까지 북한과의 거래비용이 얼마나 들었는가를 살펴보자. 2017년 통일부에서 발표한 ‘각 정부 별 대북 송금 및 현물 제공 내역’은 다음과 같다. 구 분 정부차원 민간차원 총계 현금 현물 현금 현물 김영삼 정부 - 26,172 93,619 2,236 122,027 김대중 정부 - 52,476 170,455 24,134 247,065 노무현 정부 40 171,621 220,898 43,073 435,632 이명박 정부 - 16,864 167,942 12,839 197,645 박근혜 정부 - 5,985 25,494 2,248 33,727 (단위: 만 달러) 이 표에 의하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 북한에 들어간 금액은 현금과 현물을 합쳐 682,697만 달러이고, 이명박ㆍ박근혜 정부 때에는 231,372만 달러다. 김?노 정부에 비해 이?박 정부의 지원액은 거의 5배가 넘는 것 같지만,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 이후 민간지원이 중단되었고 ‘개성공단 폐쇄’로 대북지원이 중지된 것을 감안하면 큰 차이라고 할 수 없다. 유의해 볼 것은 이 통계가 정부와 민간의 것, 또 현금과 현물이 합쳐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대 정권에서 정부가 직접 현금을 지불한 것은 노무현 정부 때의 40만 달러 밖에 없다. 그것도 이산가족 화상 상봉을 위해 그 센터를 건립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위의 통계에서 보았듯이 정부와 민간의 현금 및 현물 지원 중 정부의 현금 지원은 40만 달러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홍 후보는 4월 23일 토론에서 "DJ·노무현 정부 시절에 70억 달러를 북한에 돈을 줬기 때문에 그 돈이 핵이 돼서 돌아온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홍준표 후보가 4월 19일 토론 때에 노무현 정부에서 현금과 현물 합쳐서 도합 44억 달러 정도가 넘어갔다고 지적한 것은 틀린 것 같지는 않지만, 현금 70억 달러를 북한에 주었다는 발언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 동안 보수우익들이 'DJ 노무현 정권이 북한에 퍼주기 한 것이 핵이 되어 돌아왔다고 주장한 것은, 홍 후보에게서 보이는 바와 같은, 이런 잘못된 팩트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현금 지불과 관련,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금강산ㆍ개성 관광, 교역ㆍ위탁ㆍ가공, 개성공단 등으로 이는 정부가 전달한 것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일종의 '거래'였다.” 거래는 서로간의 소통과 이익을 전제로 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개성공단을 조성할 때 민간 차원에서 임금 및 통신비 등의 명목으로 4,131만 달러가 전달된 적이 있지만, “조업이 한창이던 이명박 정부 때는 이 금액이 2억 7,629억 달러로 늘어났다.” 선동가들이 김대중 노무현 때에 민간 차원에서 대북 거래액을 대북 퍼주기에 넣어서 계산했다면, 이는 전혀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최근 SBS 뉴스의 박세용 기자가 발표한 기사에 주목한다. 박 기자는 최근 (2017.04.25)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그는 2010년 10월 5일자 KBS와 조선일보 및 2013년 1월 7일자 서울신문에 보도되었으며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이 발표”한 <역대정권 대북 송금액>(자료: 통일부)을 소개했다. 그 통계는 노무현 정부 때의 '대북 송금액'보다 이명박 정부 때의 '대북 송금액'이 많았다고 적었다. 박 기자는 그 당시(2010, 2013)에는 그런 “데이터가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하면서, “이건 앞서 말씀 드린 현물과 현금의 총액이 아니라, 현금 즉 '대북 송금액'을 말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박 기자가 <2010년, 2013년 데이터로 제작된 그래프>에 제시한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역대 정권에서 북한을 지원한 것은 김영삼 정부 4조원(36억 달러), 김대중 정부 1조 5,500억 원(13억 4,500만 달러), 노무현 정부 1조 6,200억 원(14억 1,000만 달러) 그리고 이명박 정부 1조 9,200억 원(16억 8천 달라)이다. 그런데 그 뒤 2017년 자료에는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의 경우를 들어 2010년 자료와 2017년 자료에 나타난 송금액을 비교하여 이렇게 명시했다. * 2010년 통일부 자료 13억 4,500만 달러 [세부 항목: 금강산 관광 대금 4억 2천만 + 교역 대금 4억7,600만 + 현대의 사업 대가 4억 5천만 = 13억 4,500만 달러] * 2017년 통일부 자료 17억 달러 [세부 항목: 관광 4억 2천만 + 교역, 위탁가공 등 8억 3천만 + 기타(사업권, 이용료 등) 4억 5천만 = 17억 달러] 위의 자료는 2017년 집계가 2010년 때보다 4억 달라가 늘어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박 기자는 “작년까지만 해도 ‘이명박 정부의 대북 송금액이 김대중 정부 때보다 많았다’는 주장이 사실인 줄 알았는데, 올해는 갑자기 거짓이 되어 버린 겁니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통일부로부터는 그 액수가 왜 달라졌는가를 명확하게 설명 받지 못했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 때만 4억 달러가 늘어난 것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송금액도 2017년 통계는 2010년 통계보다 6억 달러 정도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명박 정부의 대북 송금액이 노무현 정부 때보다 많았다’고 주장하는 게 사실”이었고 그래서 후보 토론에서도 문재인 후보가 그런 점을 지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실과 다른 발언”을 한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뀌어진 것을 두고 박 기자는 “7년 만에 사실과 거짓이 바뀌었습니다”고 폭로했다. 2010년 통계에는 김영삼 정부 때 36억 달라가 지원되었다고 했는데 2017년도 자료에 9,300만 달러로 집계되었다는 것도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당시 제네바 협약에 의하여 함경남도 신포에 건설하던 경수로발전소 비용을 부담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통계에서 그걸 삭감하는 것은 속임수로 보인다. 정부의 통계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이 바뀌어지고 들축날축해지면 국가의 공신력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우리 정부는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김영삼 정부 때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대북 송금과 지원을 통일부 자료를 중심으로 살폈다. 이를 통해 보수우익들이 주장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 ‘대북 퍼주기’가 [현금으로] 70억 달러에 달했다”는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꼭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 정부와 민간이 합하여 현금과 현물 68억 2,698만 달러를 북으로 보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김영삼 이명박 정부 때도 그 못지 않게 대북지원을 했다는 것을 밝혀야 할 것이다. 보수우익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그렇게 들어간 현금과 현물은 남북관계를 안정시켰고 평화통일의 가능성도 확인시켜 주었다. 북한에 들어간 만큼 우리도 이득을 보았다. 개성 공단을 통해 남북이 윈윈하는 시범을 보여주었고, 우리 중소기업에 큰 혜택을 주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정리하는 데에 동의한다면, 보수우익들이 주장하는 ’대북 퍼주기‘라는 말 자체가 허구이며, 나아가 그 지원이 핵 개발자금으로 전용되었다는 주장 또한 증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의문이 남는다. 그러면 북한은 무슨 돈으로 핵을 개발했을까. 필자는 최근에 북한이 무기수출을 통해 매년 10억 달러씩 벌어 쓰고 있다는 ‘2005년도 미국 의회조사국의 보고서’를 소개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글을 본 적이 있다. 2006년, 7월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10월에 핵실험을 한 북한을 상대로 미국은 북미간에 핵실험 중지 협상을 벌였다. 그 때 미사일을 쏘지 말라는 미국을 향해 북한은 “그걸로 장사한다”고 하면서 미사일 발사는 “미사일을 팔기 위한 일종의 ‘판촉활동’이라는 식으로” 설명했단다. 그 협상을 통해 미국은 미사일 발사 유예를 조건으로 3년간 10억 달러의 식량지원을 하겠다면서 2007년의 ‘2.13합의’를 끌어냈다. 이 때 미국은 북한의 군수공업위원회가 매년 10억 달러씩 벌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 비용과 관련, 정 전 장관은 북한의 군수공업위원회가 벌어들이는 바로 이런 돈에 주목했던 것이다. *본 칼럼은 평통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통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조종건 사무총장2017-05-02

탄핵 후 60일 이내에 대통령후보를 국민이 검증하고 투표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기간이 19대보다 훨씬 길었지만 대통령 탄핵 후 그 결과를 보니 검증이란 참으로 힘겨운 과제다. 지난 4월 21일까지 적발된 가짜뉴스가 18대 선거기간 전체의 3배를 넘어설 정도니 더욱 혼란스럽다. 후보들의 정책 검증도 쉽지 않지만 믿을만한 인물인지를 검증하기는 더욱 어렵다. 당선 가능한 후보냐, 공감하는 정책 투표냐를 놓고 유권자들은 저울질을 하고 있다. 짧은 선거기간에 유권자들이 자신의 정치신념을 반영하려면 각 후보의 핵심공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공성에서의 거짓말 퇴출, 세금정책 혁신, 국민중심 현장정치를 각 후보의 공약에서 확인하고 투표해야 한다. 공공성에서의 거짓말 퇴출 412쪽으로 된 박근혜를 위한 새누리당 정책공약집 <세상을 바꾸는 약속 책임 있는 변화>을 보면, 다음과 같은 공약들이 나온다. “우리 청소년 모두가 소중한 주인공입니다.” “꿈과 열정을 지닌 청년들이 마음껏 활약합니다.” “소상공인이 활짝 웃을 수 있도록 골목상권이 살아납니다.” “집주인도 세입자도 집 걱정, 대출상환 걱정 없는 세상이 옵니다.” “단 한 사람의 국민도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공정하고 엄격한 법 집행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고등학교 “2014년부터 매년 25%씩 확대하여 2017년에 전면 무상교육 실시.” 그러나 그녀는 이런 공약을 몇 퍼센트나 실천했을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거짓의 탈이다. 검찰과 법원의 판검사가 이권을 위해 양심을 파는 행위보다 더한 것은 거짓이다. 이권으로 인한 언론사의 무책임성보다 더 심한 것 역시 거짓이다. 법정에서조차 위증과 증거인멸죄로 1심에 접수된 사건이 2001년 836건에서 2010년 1,625건이다. 2003년 한국의 위증은 일본의 16배, 무고는 39배, 사기는 26배나 많다. 경찰서를 방문해 보라. 억울한 서민이 고발해도 사기 성립이 거의 불가능함을! 이런 상황이니 거짓말이 한국을 사기사회로 만든다. 최소한 특검이나 청문회와 같은 공공영역에서 거짓말이 불가능하도록 처벌을 강화할 수 있는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 세금정책 혁신 세금 종류는 20개가 넘는다. 국민은 피눈물 섞인 월급의 일부를 세금으로 낸다. 물건 구매의 10%를 세금으로 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다수 서민에 대한 차별과 노예의 삶 아닌가. 고속 열차를 만들어도 서민은 주요 고객일 수 없고, 지역상권 주변 도로를 세금으로 개선하거나 편도 1차선에서 2, 3, 4차선으로 확장해도 건물소유주나 토지소유자의 부를 더할 뿐이다. 정부는 재벌에게 연구개발비 명목으로 국민의 세금을 나누어 주고 재벌은 수백조 원이나 사내유보금으로 싸놓고 있는데도 중소기업, 지역상권, 재래시장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상위 10% 사람들이 부동산 84%를 가지고 있는 나라, 50% 이상의 국민은 한 평의 땅도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 아닌가. 다수 서민에게 값싼 중고교복과 체육복을 위한 교복은행의 필요성은 넘치건만 교복은행 임대료는 자원봉사자의 몫인 세상이 대한민국이다. 국민중심 현장정치 다수의 국민이 지옥의 삶을 살고 있다. 직장인 열 명 중 네 명의 월급이 200만 원이 채 안 되는데, 월세가 50만 원이라면 자녀 양육비, 재수생비용, 대학등록금, 의료비, 생활비에 노후 대비가 가능하겠는가. 2016년 월세로 사는 이들이 10명 중 6명 정도다. 또 자영업자들은 상가 임대료에 질식한다. 연 9% 이상 올릴 수 없는 것이 상가임대차보호법 아닌가. 그러나 1년 만에 임대료의 45%가 오른 상가도 있다. 2016년 5월 25%, 2017년 4월 20%나 올랐다. 상가임대차보호법 때문에 임대 3, 4년차에 임차인은 임대료 폭탄을 맞는다. 임대인과의 갈등은 6년차 임대 갱신 불가와 투자 시설비는 고사하고 원상 복구해야 하는 경제부담도 크다. 임차인은 갑인 임대인의 노예다. 임대료 연 9% 이상 인상분은 임대기간 후 임차인에게 반환되는 법이 있다면 이런 파렴치는 사라질 것이다. 또 유럽 대다수 국가들의 대학 등록금은 무료 또는 한국대학의 10% 이내 수준 아닌가. 주거, 의료, 교육은 국가의 몫이 되어야 국민중심 현장정치가 된다. 새로운 정치의 전환점에 서 있다. 공공 영역에서 거짓말 퇴출, 세금정책의 부조리, 주거와 의료와 교육에서 국민중심 현장정치는 대통령후보 선정 기준의 핵심 아닐까. 특검이나 청문회와 같은 공공 영역에서 거짓말이 불가능하도록 법을 강화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어쩌면 정치의 근간 아닐까. 세금정책을 혁신하고 의료, 교육뿐 아니라 주택 제도를 바꿀 후보를 찾을 때다. 지옥이라고 절규하는 국민의 현장으로 들어가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대통령은 누굴까. 푸른 5월에 이 세 가지 과제를 갖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과거의 적폐를 해결하고자 하는 역사의 통찰력을 가진 후보를 선별하는 작업은 유권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정재영 교수2017-05-02

대통령 선거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대통령 선거가 불과 1주일 정도 앞으로 다가왔다. 5차례에 걸친 TV 토론이 진행되면서 대선 후보들에 대한 지지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제 선거 일주일 전부터는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할 수 없기 때문에 남은 일주일 동안 지지도가 어떻게 변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지금의 지지도가 유지될 것인지, 유력 후보 외에 다른 후보가 극적인 지지도 상승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 또는 여론 조사 결과와는 아예 다른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지 여러 가지 기대와 예측이 나오고 있다. 한편, 이번 대통령 선거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나게 되면서 선거가 앞당겨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정당의 후보들이 높은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탄핵의 여파로 선거 운동 기간도 전에 없이 짧아졌기 때문에 후보들 입장에서는 단기간에 승부를 보아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번 대선 공약은 거대하고 거창한 내용보다는 실생활과 직결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전보다 네거티브 공방은 다소 줄어든 양상이지만, 여전히 후보들에 대한 도덕성 검증과 말 바꾸기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후보를 찍어야 할까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이번 대선 후보 중에는 개신교인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개신교인 후보를 찍을 것이냐 말 것이냐는 논쟁은 없는 상황이다. 한 후보가 연속해서 보수 개신교 단체와 인사들을 찾아 지지를 호소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한 조사에서는 기독교인 후보와 기독교적 공약을 내세운 후보 중에 누구를 찍을 것인가에 대해 63.3%가 굳이 기독교인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아도 된다고 응답했다.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보다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는 후보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기독교인이 더 많다는 것이다. 교회와 정치 우리 사회에서는 개국 초기부터 교회와 정치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켜왔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개신교 신자였고 제헌 국회는 목사의 기도로 개회되었을 정도로 자유당 정권 하에서 한국 개신교는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장로 대통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교회가 3·15 부정선거에도 관여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다가 4·19 혁명 이후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한국기독교연합회는 지지 성명을 발표하여 개신교계 내부에서조차 큰 갈등을 유발했다. 이때부터 보수 진영의 교회들은 엄격한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정권을 옹호하는 행보를 보였고, 진보 진영의 교회들은 사회참여와 정권 반대 운동을 하면서 대립 양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참여정권 이후에는 보수 진영의 기독교 인사들이 거리로까지 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한국 교계는 보수와 진보로 극명하게 나뉘어서 사안마다 일치된 견해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인 장로 대통령이 세 번 선출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찬반양론이 있기는 하지만 부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많은 교회들이 전폭적으로 장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 장로 대통령 모두 사회에서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개신교의 역량 부족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장로 대통령 후보가 나올 때마다 장로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고 강단에서 선포되기 일쑤였고,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을 의심받기도 했다. 장로 대통령이 나와야 기독교에 유리한 정책을 펼칠 것이고, 그래야 전도의 문도 크게 열릴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는 많은 교회 강단에서 특정 후보를 ‘종북좌파’라며 절대로 찍으면 안 된다고 ‘선포’했지만, 그 후보가 젊은 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업고 보궐 선거와 지방 선거에서 연이어 당선되어 반대 설교를 한 목회자들을 당황케 하기도 했다. 바람직한 정치 참여 최근 탄핵 정국에서는 광화문 집회와 태극기 집회로 나뉘어 한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서로 다른 집회에 참여하는 일도 경험하였다. 성경은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 매우 진보적으로 읽힐 수도 있고, 매우 보수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 진보와 보수가 모두 성경을 인용하지만, 서로 다른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선택하고 심지어 같은 본문이라도 입장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보다 진리에 가까이 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보수적인 가치와 진보적인 가치 중에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거나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진보든 보수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노력한다면 나름의 방식으로 보다 더 나은 사회를 이루어가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한 중요한 방법이 투표에 참여하여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후보를 지지하기보다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들, 그리고 강도 만난 사람에게 참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는 정책을 내놓은 후보가 누구인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책을 유권자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내놓은 것인지 아니면 실제 정치 신념에서 나온 것인지, 또 그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의지와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도 보아야 한다. 설문조사 결과와 같이, 단순히 기독교에 호의적인 후보가 아니라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는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거 때만 반짝 정치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대의 정치로 표현되는 오늘날의 제도 정치는 현실과 동떨어지고 정치 대리인에 의해서 시행되는 데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더 중요한 것은 선거 이후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라도 기대에 못 미치거나 부정한 일에 연루될 수 있기 때문에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삶의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는 생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사회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도록 기독교인들의 참여와 실천이 요구되고 있다.

홍성현 목사2017-04-30

서기 1949년 중국에서의 모택동의 공산주의 혁명 이후에도 기독교는 증국 안에서 계속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기 635년에 기독교의 한 종파였던 경교의 선교사 알로펜이 성경을 들고 중국 땅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하기 시작한 이후 거의 1300여 년을 지나가고 있을 때에,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앞세운 모택동에 의하여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로 바뀌었는데 그때 중국의 기독교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 혹시라도 중국의 기독교가 모택동의 공산주의를 만남에서 우리나라 북반도의 교회에서처럼 목사들과 성도들이 순교당하고 교회들이 거의 다 문을 닫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중국의 기독교는 공산주의 정권 아래에서 계속 살아남았다.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고, 매 주일 자기들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반도에서는 해방 직후에 평양에 입성한 공산주의 정권의 극심한 교회 핍박으로 인하여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남으로 피난하였다. 그때 북의 고향을 떠난 많은 실향민들이 속히 북의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교회당을 다시 회복하고 싶어서 날마다 기도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필자는 중국에서는 어떻게 교회가 살아남았는가를 알기 위하여 중국의 삼자교회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교회가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많은 목회자들이 양산되고, 많은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그들의 조국 중국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도 살아남아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중국 교회를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우리 북반도의 공산주의 정권과의 평화적인 만남의 길을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린 북에서 온 목회자들과 성도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지난날의 억울함을 뒤로하고, 미래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북의 공산주의자들을 만나야 하기에 중국교회 목사들과 성도들이 모택동의 공산주의자들을 만나서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5년에 외세에 의하여 38도 선이 한반도 한 가운데에 그어지고, 한반도가 반쪽으로 쪼개져서, 남 반도는 미국의 자본주의 정책을 받아드려서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기독교의 성장을 이룩하였지만, 북 반도는 사회주의 정권이 지배하면서 기존의 북의 교회들이 거의 박멸되었다. 북에서는 지금도 기독교가 자유롭게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북에 교회와 예배처가 몇 곳 있다고는 하지만, 지난날의 그 번창하던 평양이나 신의주의 교회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나 초라하기 그지없다. 속한 시일 안에 남북이 하나 되어 북에도 자유로운 복음 전파가 가능해져서 기독인들이 자유롭게 예배하고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날이 속히 오게 하기 위하여 중국 삼자애국교회의 역사를 꼭 배워야 한다. 북의 교회를 되살려내기 위해서 우선은 북의 사회주의 체제에 적응하여 살던 북의 교우들을 이해하고 감싸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반도의 통일을 위하여 사회주의에 오랫동안 물든 북의 동족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에 사는 동족들의 생각과 마음을 올바로 읽어내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오랫동안 사회주의 정권 안에서 살고 있는 북의 동포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모택동 정권을 받아드린 중국의 삼자교회 기독인들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모택동 사회주의 혁명 당시에 중국의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팅주교와 오요종 같은 목회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택동의 사회주의에 기초한 정책들을 환영하고 받아드렸다. 가난하고 멸시 받던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던 모택동의 사회 정책을 적극적으로 환영하였다. 과거 외국의 헌금이나 부자들의 재물에 의존하던 교회의 모습을 탈피하여 가난한 농민들을 우선시 하는 모택동 정권에 적극 협력함에서 중국의 삼자애국교회는 중국의 민중을 위한 교회로 거듭났던 것이다. 오요종 목사는 초월에 편향된 서구신학에서 기독교의 비극을 보고 “영혼의 구원”이라는 초월성에만 집착할 때 사회와 정치에서 초월되고 그리고 반동적 정치에 이용당한다고 설교했다. 교회가 사회와 정치에 참여할 때 기독교의 참 신앙이 구체적으로 민중의 삶과 연결되고 그때 예수의 십자가가 확실하게 사회 속에 재생되어진다고 오요종은 설교했다. 이제 우리 남한의 기독교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중국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배워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운동에 앞장 설 수 있기를 바란다. *본 칼럼은 평통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통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이영훈 목사2017-04-28

이번 5월 9일에 시행되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요 후보들의 공약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여러 공약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은 북한의 무력 위협에 대한 국가 안보 관련 공약과 청년 일자리 창출을 비롯한 경제 관련 공약이다. 국가 안보와 경제가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두 기둥과도 같은 것이기에 후보들의 공약이 두 가지 문제에 집중되어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안에만 시선이 몰려, 놓치고 있는 다른 중요한 사안들은 없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생명'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저출산, 낙태, 자살 문제에 대해 조사한 자료들은 우리나라가 이 같은 문제에 있어 위험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처한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교회가 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지 논의해 보고자 한다. 첫째, 결혼과 출산 문제를 살펴보자. 지난해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1.17명으로 7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며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한 올해 강원도에서는 초등학교 30여 곳에서 신입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각종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출산율 제고는 국가 존립에 있어서 너무나 중대한 일이며, 청년들이 이를 포기하지 않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방법은 국가에서 출산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신혼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자세로 적극적인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과거 산아제한 운동은 국가적으로 펼쳐져서 큰 효과를 얻은 반면, 현재 아이 낳기 캠페인은 과거와 같은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경우 출산장려금 제도를 만들어 지원하자 교회 내 출산율이 세 배로 늘어났는데, 이와 같은 현장의 소리에 맞는 대책을 국가 차원에서 내놓아야 할 것이다. 둘째, 낙태 문제를 살펴보자. 낙태는 생명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큰 문제이자 동시에 오늘날의 저출산 문제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40만 명의 아기가 태어났는데, 같은 기간에 낙태는 17만 건 이상이 행해졌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보다 2배 정도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축복받는 생명으로 태어나 건강하게 자라야 할 아이들이 태어나지 못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른다. 지난 10년간 낙태 문제만 잘 대처했어도 현재 우리나라의 출산 절벽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저출산 문제를 해결한 프랑스의 경우, 어떤 가정환경에서 아이가 태어나든지 그 아이에 대해 국가가 모든 삶의 대책을 세워주겠다는 출산 정책을 세워 현재 성공을 거두고 있다. 우리나라도 한부모 가정이나 고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대책을 수립해 더 이상 낙태로 아이들이 생명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셋째, 자살 문제를 살펴보자. OECD 국가 중에 대한민국의 자살률이 10년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015년 통계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하루 평균 37명이 자살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은 우선 자살한 사람과 그 가족에게 말할 수 없이 불행한 일이며, 동시에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주된 자살 원인은 우울증과 스트레스라고 한다. 이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는 치열한 생존경쟁과 상대적 박탈감 등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러한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건강한 공동체 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도 현대인의 정신적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사회 내의 극심한 경쟁을 완화시키고, 낙오되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 추진돼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생명의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에 발표된 각종 지표들은 이미 이 문제가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번 대선을 통해 보수와 진보, 어느 진영의 후보가 정권을 잡게 되든지 간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국가공동체의 생존이 달린 시급한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탁상공론만 펼쳐서는 안 된다. 교회 차원에서도 이를 외면하지 않고 도움을 주어서 민관이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 더 나아가 가정의 달을 맞이해 우리 사회가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문화가 형성되어,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건강한 대한민국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효상 원장2017-04-25

문화재청은 지난 20일 존 번연의 천로역정(합질) 게일 선교사 번역 초판본 2종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천로역정(天路歷程,ThePilgrim's Progress)>은 영국의 청교도 작가 존 번연(1628∼1688)의 소설로 1678년 초판이 나왔다. 꿈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를 풀어낸 책으로, ‘기독도’라는 남자가 ‘장차 멸망할 도시(장망성)’를 떠나 ‘천성’을 향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크리스천이 인생의 여정에서 욕망과 싸우며 사탄의 도전 앞에서 거룩함을 이뤄간다는 이야기로, 구원과 성화의 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 존 번연(John Bunyan) 저자 존 번연 (John Bunyan)은 1628년 11월 영국 베드포드의 엘스토에서 태어났다. 번연의 아버지는 떠돌이 땜장이로 가난하게 살았고 자식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시키지 못했다. 번연은 겨우 쓰고 읽는 정도를 배웠을 뿐이다. 그러나 독서를 좋아하여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책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특히 성경을 탐독하였고 존 폭스의 <순교자>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번연은 감수성이 강하고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1644년 번연이 16세일 때 6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7월에 동생 마거릿이 죽었다. 8월에는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데려왔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번연은 난폭하고 사나운 동네의 골목대장이 되었다. 1644년부터 1647년까지는 찰스1세 왕당군에 대항하는 크롬웰의 의회군에 징집되어 3년간의 군대생활을 하였다. 크롬웰의 철기병대는 전장에서나 막사에서나 고도로 엄격한 훈련을 받았으며 노름도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촌락에 접근해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군 생활에서 청교도 교리를 접할 수 있었고 크롬웰군이 가진 경건한 신앙생활에 큰 감명을 받았다. 제대 후 1649년 마리아라고 하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책 2권을 결혼선물로 가지고 왔다.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길>과 <경건의 훈련>이다. 이 책을 통해서 번연은 쉽고 친숙한 격언을 가지고서도 통렬한 표현을 할 수 있으며 대화체 형식의 글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리아는 거친 번연을 인내와 섬김으로 받들었고 약점을 공격하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충고해서 스스로 깨닫게 도왔다. 1650~55년까지는 번연의 신앙이 점진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번연의 일생에 중요한 영적 선생인 존 기포드 목사도 이때 알게 되었다. 1653년 번연은 성요한 교회의 정규회원이 되어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하였다. 그 해 아내인 마리아가 사망하였다. 1659년 번연은 둘째 아내로 엘리자벳을 맞이하였다. 기포드 목사가 죽은 후 번연은 설교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1660년 찰스2세의 왕정복고로 청교도 전성시대가 끝나고 성공회를 영국의 유일한 국교로 복귀시켰으며 비국교도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축출하였다. 번연은 비국교도로 성직을 받지 못하였으나 설교를 계속하였으므로 설교금지령을 위반하여 12년 (1660~72)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1672년 찰스2세가 비국교도들에 대한 종교관용을 선포하여 번연은 5월 석방되었다. 출감 즉시 번연은 베드포드의 비국교도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1675년 다시 박해가 시작되어 6개월간 투옥을 당했는데 이때 <천로역정> 제1부를 집필한 것으로 전해진다. 1678년 천로역정(제1부)이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 때문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어 제임스2세가 번연을 국교도로 모시기 위해 여러 가지 유혹을 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1684년 천로역정 제2부를 출간하여 천로역정을 완성하였다. 1688년 번연은 런던에서 비를 맞고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책 출간과 게일 선교사 천로역정 제1부는 1677년 12월 22일 인쇄가 끝나고 1678년 2월 18일 출판면허를 얻는다. 1677~78년 런던의 폴트리에 있는 피콕 서점의 사장 나타니엘 폰더에 의해 발행되었다. 초판에 이어 같은 해 재판이 간행되었고 생전 11판을 내는 동안 상당한 내용증보가 이루어졌다. 천로역정이 서양에서 최초로 번역된 것은 1682년, 네덜란드이다. 그 이후 1685년에는 프랑스, 1703년에는 독일에서 네덜란드판의 중역으로 간행되었다. 동양에서도 네덜란드판의 중역으로 간행되었다. 동양에서는 1853년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영국선교사 번스(W.C.Burns)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역본이 나왔고 이때 서명을 천로역정(天路歷程)으로 지었다. 이후 일본과 한국에서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내에는 1895년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과 부인 깁슨이 공동 번역해 소개했다. 당시 한글로 번역된 <텬로력뎡>은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가 읽고 감명을 받음으로써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 성결교의 이성봉 목사도 전국을 다니며 천로역정 부흥회를 개최할 정도로 이 책을 높게 평가했다. 이 목사는 ‘멸망의 도시’를 장차 망할 성이란 의미의 ‘장망성’으로 표현했다. 텬로력뎡은 개화기 번역문학의 효시로 국문학사적으로도 당시 한글보급과 한글문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자다. 최초로 번역된 텬로력뎡 초판본은 현대식 인쇄출판을 통해 초기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신앙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5년 초판에 이어 1910년에 나온 재판은 연활자로 인쇄되었는데 기일 목사 역 이창직 교열로 바뀌었으며 장로교서회가 발행했다. 3판은 한국종교서적소책자학회의 발행으로 1919년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었다. 재판과 3판의 삽화는 초판을 축소하여 동판으로 인쇄했으리라고 추정된다. 1920년에 나온 텬료력정 3판 끝에는 ‘본셔의 뎨이편 텬셩려행기가 츌판되었는데 그 내용은 긔독도의 쳐자가 그 남편을 따라 멸망의 셩에서 행한 것이라. 특별히 녀자와 아해의게 자미가 잇슬것이니 한번보시기를 바라옵’이라는 광고가 나와 있다. 텬료력졍 뎨이권은 ‘긔독도 부인 려행록’이라고 부제를 붙여서 1920년 8월 10일 신문관 인쇄 조선 야소교서회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언더우드부인이 번역한 이 책에는 제1부와 화풍이 다른 삽화 10장이 게재되어 있다. 게일과 언더우드 목사 부인의 번역본에 이어 1936년 조선기독교서회에서 오천영의 번역으로 제 1부가 번역되었다. 이 책에는 삽화 10장이 수록되어 있다. 해방 이후 1949년부터 조선기독교서회의 오천영 번역의 재판에 이어 많은 번역본이 현재까지 나오고 있다. <천로역정> 재조명 시급 게일 부부에 의해서 번역된 텬료력뎡 초판본은 한국 기독교 복음전파와 책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희귀본이며, 철저한 연구와 고증이 필요한 책이다. 기독교신앙이 한국에 상륙한 19세기 한국은 열강의 간섭에 국기가 흔들리고 부패와 혼란이 극도에 달하여 민중의 생활이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한 시대에 오늘의 고통과 유혹을 이겨내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 내세의 행복을 접하게 되는 천로역정의 이야기가 이 땅에 소개되었다. 천로역정이 소개되고 130여 년이 넘은 오늘 한국교회는 천성을 향해 건강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기복주의와 개인주의 신앙이 열병처럼 번지고 극심한 자본주의의 유혹 앞에 오염되고 있지는 않은지 묻게 된다. 세계문학사의 불후의 명작으로, 또한 한국기독교 신앙 초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존 번연의 사상과 천로역정에 대한 재조명 작업과 더불어 최초로 번역, 소개한 게일 선교사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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