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목사2018-12-13

최근에 1997년에 있었던 IMF 상황을 영화화한 <국가 부도의 날>을 관람했다. 영화는1997년도의 실상을 아주 담담하게 담았다.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위정자들의 무능력과 소신민들의 절망과 그리고 그 틈에서 부를 축적하는 이들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 국가 부도의 사태를 맞았지만 여전히 부를 축적하는 인간 군상들은 여전했다. 오직 국가만 믿고 따라갔던 순진한 백성들만 피해를 당했다. 영화의 백미는 국가의 속임수에 절대 속지 않는다는 이들의 몸부림이었다. 아무도 믿지 말고 오직 네 자신만 믿으라는 한 중소기업 사장은 외침과 한번 당하지 두 번 다시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 시대를 참으로 씁쓸하게 만들었다. 영화의 엔딩은 위기는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서 상황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의심하고 의심하라는 것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살아나는 길은 깨어서 의심하는 것이라는 말은 더더욱 슬프게 다가왔다. 신뢰할 수 없는 공동체는 어쩌면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1997년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영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 시대의 만연된 비정규직의 모습은 바로 IMF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IMF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오직 개인의 풍요와 만족만을 위해 사는 파편화된 개체만 존재하게 됐다. 서로를 의심하는 사회는 야만의 사회다. 거기에는 정글의 법칙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는 오래 가지 못한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잘못에 대해 권면도 못하는 사회가 돼 버렸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자기가 속한 진영에서 서로를 향해 저주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실제적 야만이다. 그러다보니 분노가 조절되지 않는 현상들은 자주 목격한다. 그나마 법에라도 정의를 기대했는데 이제 그 법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이렇게 되면 법보다 주먹이 빠르다는 무법의 세상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렇게 한 번 삐뚤어진 사회는 음주 운전자가 모는 차와 같다. 어디로 갈지 누구를 해할지 아무도 모른다. 참으로 끔찍한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가 너무나 소중하다. 교회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듣고 배우는 곳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성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명령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교회는 세상이 가야 하는 곳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교회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려주는 근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길을 잃어버리면 세상은 점점 더 험악한 사회로 바뀌게 된다. 가슴 아프지만 부조리한 사회는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선지자적 현실주의자로 기꺼이 이 세상의 부조리를 외쳐야 한다. 그리고 절망적 낙관주의자로 현실을 살아야 한다. 지금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땅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장소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이다. 교회는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가르쳐야 한다. 교회가 바로 세워지는 일에 모두가 한 마음이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와 직분자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풍성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지식적인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교회는 거짓 교회다. 그러한 교회는 개혁시키든지 떠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위해 사는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했다. 우리 시대는 더욱더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있게 묵상하고 알아야 할 시기다.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우리는 사회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다. 이 사회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다. 슬픈 사회를 회복시키는 일은 교회가 회개하고 깨어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 소망이 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그러기에 교회가 욕먹고 있지만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고 세우는 이유다.

김성윤 교수2018-12-10

외로운 고령자가 늘어나고 있다. 2017년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령자는 전체 인구의 13.8%나 된다. 2017년을 기준으로 65세 이상노인 1명을 생산 가능인구 5.3명이 부양하고 있다. 이 같은 노인 인구 가구는 2045년이 되면 47.7%로 늘어 날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7년 현재도 고령인구 비율은 전남이 21.5%로 가장 높고, 세종은 9.2%로 가장 낮다고 하나 이마저 높은 편이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정부가 펼치는 정책이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이기 때문에 미래의 재앙이 아니라 현재의 재앙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들 고령세대는 대부분 고립돼 있어 노년이 외롭다. 영국은 외로움을 질병으로 분류하고 그 대책을 우리보다 한발 앞서 마련하고 있다. 2018년 1월부터 세계 최초로 ‘외로움 담당’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 부처를 신설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담당 부서인 복지부는 고작 한다는 정책이 ‘응급안전 알림서비스’, ‘노인돌봄서비스’ 정도에 만족하고 있다. 이런 정책이 과연 사회적으로 고립된 노인들을 끌어낼 수 있는 정책인지 담당부처 공무원에게 묻고 싶다. 이제 우리나라도 소득 3만 불에 맞는 선진국에 상응하는 노인 정책이 필요하다. 노인이 겪는 외로움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국가적 문제이다. 따라서 그에 걸 맞는 맞춤형 외로움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또 영국 같은 나라는 ‘자살 예방 담당’ 장관 자리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부처들은 전국 지자체 95%가 자살 방지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의무화했다. 외로운 노인이 언제든 전화를 걸어 무료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핫라인 전화까지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인구 10명 중 3명이 70세 이상 초 고령노인이다. 그 만큼 노인문제도 심각하다. 이를 극복 하고자 ‘움직일 수 없음’(immobility) 과의 전쟁 중이라고 한다. 그에 관한 정책이 병원에 드러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 줄이기 정책이다. 이런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고령자를 늘려야한다. 왜냐하면 75세 이상 노인들의 절반이 신체 기능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육성해야 될 정책이 재활 로봇과 각종 동작 지원에 관한 산업정책이다. 초 고령사회 일수록 노인 옆에서 돌봐줄 가족이 줄어든다. 부양할 사람도 점차 없어진다.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마저 구하기 힘들어진다. 이를 극복하려면 첨단산업을 육성해야한다. 운동 장애를 도울 재활 로봇을 개발해 이에 의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노인이 혼자 일 때 말동무를 해주는 채팅로봇도 개발해야한다. 사람보다는 못할지 몰라도 말하는 로봇과의 벗 삼아 외로움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인생 말년을 로봇과 함께하는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이런 사회를 준비하는 것도 우리의 책임이요, 의무로 받아 들여야 되는 시대로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11월 3일자를 보면 ‘어르신 5명중 1명, 오늘도 하루 종일 혼자였다’는 보도는 이 같은 사회도래의 서막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대책이 전무하다. 그 단적인 예가 여의도 연구원이 빅 데이터 전문 업체와 함께 2017년 5월 17일부터 2018년 9월 18일까지 문대통령의 공식 연설문 267건과 공식 브리핑1186건 등 1,453건을 전수 조사해본 결과 ‘우리’, ‘국민’, ‘정부’란 관용적 표현을 제외하면 ‘북한’이 1,453건으로 1위였고, 3위가 1,290건으로 ‘경제’였다. 사회문제와 관련해서는 아이가 215건으로 267위였다. 심지어 적폐청산이나 국정 농단도 87건이나 됐다. 그만큼 정책 순위에서 노인 문제는 멀어져있다. 누구 한사람 이 문제를 심각하게 정책문제화 하는 의원도 없다. 이와 관련해 영국을 보면 우리나라와 얼마나 다른지 금방알 수 있다. 메이 총리는 10월 15일 정부의 ‘외로움 대응 전략’을 통해서 영국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점인 세인스베리에 2018년 10월부터 전국 20개 매장 내 카페에 ‘대화 탁자(Talking Tables)’를 마련하도록 했다. 누구든 외로움을 느낀 사람이 앉으면 또 다른 사람이 다가가 서로 대화가 가능하도록 했다. 서로 초면인 사람끼리도 자연스럽게 대화하도록 유도하는 아이디어다. 영국은 이와 함께 세계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국민들의 외로움을 해소하는 종합 대책까지 발표했다. 메이 총리는 “외로움은 우리 시대 건강의 커다란 적”이라며 적극 대응을 천명했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선거 때가 되면 어르신 공경을 입에 달고 산다. 그리고 당선만 되면 건망증 환자처럼 관심이 없다. 그런 가운데 그나마 관심을 가지는 곳이 있다면 종교단체이다. 따라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을 할 수 없다면 수많은 종교단체에 행정적 재정적인 지원을 통해 외로움을 극복할 자치센터를 우선 만들 것을 제안해 본다.

조건회2018-12-05

<애무, 만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라는 책을 쓴 일본의 야마구치 하지메. 그는 책에서 “인간에게 사랑이 담긴 접촉의 손길은 건강한 생존과 관계를 위해 본능적으로 필요하며, 몸을 통해 마음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기 힘든 것은 만지고 만져지고 싶은 그 근본적이 욕구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을 번역한 김정운 교수의 말에 의하면 노부부가 살다가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면 할아버지는 보통 6개월 이내 따라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더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할머니는 손자를 안아주기도 하고 집안일도 하면서 스킨십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할아버지가 6개월 이상 오래 살면 그 이유를 우스갯소리로 “다른 할머니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진정 모든 인간은 스킨십을 필요로 합니다.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일상생활에서 가족끼리 손을 잡는다거나 자주 껴안는 것만으로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감각건강법’을 적극 활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모님의 어깨를 주물러준다든가 피곤해진 가정의 주부들의 허리를 주물러주는 것은 몸을 녹일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녹여줍니다. 결국 스킨십은 상대방에게 ‘나는 사랑을 받고 있다’라는 자존감 속에 긍정적인 사고가 형성하게 하면서, 어려서부터 이웃에 대한 이해심을 갖게 해 사랑 받은 만큼 다시 베풀게 되는 사회적 인간으로 자라도록 하게 합니다. 반대로 부족한 신체접촉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의 뇌가 상당히 손상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실제로 2차 대전으로 고아가 많이 생긴 이탈리아에서는 복지시설에서 키운 어린 아이들의 사망률이 높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복지시설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거의 죽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아이들을 돌본 한 여인이 죽은 자신의 아이 대신 끊임없이 아이들을 안아주고 만져줬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는데 있어서 우유나 영양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 담긴 스킨십이라는 겁니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람은 돈과 명예 때문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속으론 격려와 사랑에 대한 욕구가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퇴근 때 안아주고, 힘들어 할 때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만날 때마다 악수하는 등 피부가 부딪칠 때, 스킨십을 할 때 기적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문화의 영향 때문인지 터치를 잘 하려들지 않습니다. 부부사이에서조차 그건 어색하고 쑥스러워 합니다. 또 맞벌이 가정의 증가로 인해 요즘 아이들은 ‘접촉 결핍증’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사랑의 스킨십이 필요한 겁니다. 부부간에도 다양한 껴안기와 발마사지 등의 신체 접촉 실험을 한 결과, 두뇌에 큰 변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즐거움을 감지하는 뇌 부분이 활성화돼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스트레스 호르몬 ‘코티졸’의 수치가 떨어졌습니다. 특히 중년 여성의 경우 포옹을 하면 심장 혈압이 떨어져 심장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첨단문명의 시대인 하이테크 시대에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욱 더 하이터치가 필요합니다.

정재영2018-12-03

최근 한국 교계에서 ‘가나안 성도’가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개신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제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으며 이것이 한국 교회에 큰 도전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나안 성도들의 신앙의식과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필자가 맡고 있는 <21세기교회연구소>와 <한국교회탐구센터>가 공동으로 가나안 성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가나안 현상의 가속화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회를 떠난 기간이 평균 7.7년이었다. 5년 전 조사에서 평균 9.3년이 나온 것에 비해 2년 가까지 줄어들었고, 절반이 넘는 51.4%가 5년 이내에 떠난 것으로 최근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조사에서 가나안성도들의 신앙 연수는 평균 27.8년이었고, 교회를 떠나기 전 신앙 연수는 평균 20.1년이었다. 두 결과를 함께 생각해 보면, 최근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고, 이들 중 다수가 교회를 떠나기 전에 신앙생활을 20년 이상 오래 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신앙단계를 4단계로 나누어 자신의 신앙단계를 응답하게 하였는데 과반수가 1단계로 기독교 입문층에 해당하였다. 이번 조사에서 53.2%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것을 보면, 이들이 기초 신앙은 확립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가나안성도가 된 이후에 신앙상태는 차이가 없다는 응답이 다수였고, 3분의 1 가량이 약화되었다고 답한 것을 보면, 교회를 떠나기 전에 대체로 1~2단계의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를 떠난 기간에 대해서는 3-4단계에서도 5년 이내라는 비율이 높게 나와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과 신앙단계가 높은 사람들이 비교적 최근에 교회를 떠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앙단계가 3단계인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기간이 평균 5.67로 가장 짧은 것으로 보아 최근에는 비교적 신앙이 정립된 교인들이 가나안성도가 되고 있는 추세를 알 수 있다. 이렇게 구원의 확신이 있고 신앙단계가 높은 교인들이 최근에 가나안성도가 되고 있다는 사실과 <한목협> 조사 결과에서 23.0%가 가나안성도로 파악된 것은 이른바 ‘가나안 현상’(탈교회 현상)이 개신교인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계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가나안성도들의 신앙생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31.2%가 ‘꼭 교회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라는 교회 출석 욕구 부재를 나타냈으며 그 절반 수준인 18.8%가 ‘개인적 이유’를, 13.9%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이라고 응답하였다. 5년 전 조사 결과와 비교해 보면, ‘목회자에 대한 불만’(24.3%), ‘교인들에 대한 불만’(19.1%)이 많이 줄었다. 그리고 5년 전 조사에서는 ‘교회 출석 욕구 부재’ 항목이 없었지만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30.3%였던 것에 비하면 틀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최근에 가나안 성도가 늘어나는 이유는 기존 교회의 문제에 대한 불만보다는 개인주의적인 신앙 성향이 강해졌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나안성도들은 교회를 떠난 후에 대부분 신앙 모임을 갖고 있지 않고 예배를 드린 경험도 많지 않았으며, 특히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향후 예배에 참석할 의향은, 일반 교회 예배와 혼자 드리는 예배가 50%를 넘는 가장 높은 의향율을 보이고 있으며 가정예배는 40.6%로 조사되었다. 그 밖의 매체를 이용한 예배 의향은 20%대로 낮게 나와 전통적인 예배 형태가 아니라면 아예 혼자 드리는 예배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교회에 다시 나가고 싶다’는 의견은 5년보다 10%p 가량 줄었고, 이 중에 ‘가능한 대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의견 역시 10%p 이상 적게 나와서 교회 출석 의지가 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여건이 되도록 한국 교회의 갱신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것이 단시일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가정에서 혼자 또는 가족과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울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 밖에서도 가나안 성도들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단체나 사역자가 많아져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가나안성도들의 개인주의 신앙 성향은 다른 항목에서도 나타나는데, 교회를 이탈하기 전 출석하던 교회에 대한 인식 중에 신앙다양성 불인정(66.9%), 전통에 얽매인 교회 분위기(62.1%) 등‘신앙의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전체적으로 가장 강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싶다는 의견은 90%로 나왔으나 교회에 출석하고 싶다는 의견은 55%로 나와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과 교회 출석하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나안성도들의 3분의 2 이상이 신앙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고 교회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근거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구원의 확신 여부나 신앙의 단계에 따라서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가나안성도들이 대체로 신앙을 교회와 별개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나안성도를 품을 수 있는 교회는? 가나안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기존의 신앙생활이나 목회 방식이 이들의 신앙적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개신교인인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가 이에 대해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가나안성도들은 신앙의 다양성을 중시하며 강요하는 신앙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데 이들의 신앙 문제와 고민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신자를 전도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초급 단계의 교육과 양육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기초 신앙이 정립된 후에 신앙이 더 깊어지고 확장될 수 있도록 돕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넘어 보다 실제적인 차원의 신앙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신앙이 성숙될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나 교회에 다니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바른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를 포함하여 또는 이와 다르게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스스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보다 폭넓은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먼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존재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들이 전통적인 신앙관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단정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이들이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지만, 이것이 강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나안성도들은 강요하는 신앙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배타적인 태도를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정해진 정답철을 제시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전통적인 교리나 가르침에 따르기보다 자기 스스로의 생각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이번 조사에서 교회와 신앙에 대한 항목들 중에‘교회 안에서도 신앙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에 대한 동의율이 가장 높게 나온 것도 이러한 경향이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교회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신앙이 성숙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기존 교회의 문제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교회라는 틀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이것은 한국교회에 더 큰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기존 교회의 목회자나 성도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개선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교회라는 제도 자체를 거부한다면 사실상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개교회의 도덕적인 성찰뿐만 아니라 교회 제도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에서는 4차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가 아니라 개인 맞춤형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획일적인 신앙관을 추구한다면 다양해진 신앙의 필요를 채워줄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공동체라고 표현되는 교회의 본질 성격과도 맞지 않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다양한 생각을 가진 개인들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서로 간에 소통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이정기 목사2018-11-27

서양에서는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에게 진주를 주는 풍습이 있다. 이때의 진주를 ‘Frozen Tears(얼어붙은 눈물)’라고 부른다. 아마도 딸이 시집살이하다가 속상해할 때 조개가 살 속에 모래알이 박힌 고통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잘 참고 견뎌내라는 뜻일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삶에도 이런저런 모래알이 들어올 때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시련이라고 부른다. 시련이 찾아올 때 지금 값진 진주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라. 내가 당하는 시련이 크면 클수록 ‘내가 품고 있는 진주가 큰가보구나’ 라고 생각하라. 오늘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내일 아름다운 진주가 되게 할 것이다. 눈물 골짜기란 눈물을 흘리며 가는 눈물의 장소를 의미한다. 옛날에는 집에 있는 방 말고 밖에 있는 방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다방과 복덕방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지금은 다 없어졌다. 다방이 카페로 바뀌었고, 복덕방이 부동산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어느날 방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노래방, 찜질방, pc방, 소주방, 빨래방, 게임방, 놀이방, 비디오방....,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더니, 캡슐방, 안마방, 게임방, 머리방, 제비방, 아빠방, 유리방, 쇼방, 남성방, 여성 휴게방, 수면방,..... 그리고 입에 담기도 싫은 방까지 무슨 방들이 그렇게 많은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중국에도 이런 방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색적인 방 하나가 있다. <눈물의 방>이다. 눈물의 방에 들어가면 고춧가루, 통마늘, 양파가 준비되어 있어,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저절로 눈물이 나온다고 한다. 또한 울다가 집어던질 수 있는 유리잔, 인형등도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울고 싶은 사람이 많은 곳은 중국만이 아닐 것이다. 인생은 울면서 태어나고, 울 일이 많은 삶을 살아간다. 성경을 보면 장자 권을 소홀히 여긴 에서가 야곱에게 축복권을 빼앗기고 방성대곡하며 울었다. 한나가 브닌나 때문에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했다. 히스기야가 죽을 것이라는 선고를 받고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다. 인생에는 원치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때로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고, 절망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건앞에서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은 다시 일어서기 힘들어 진다. 도전하여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는 사람은 더 강해진다. 더 성숙해 진다. 더 좋아진다. 눈물 골짜기에서 많은 샘물이 솟아날 것이다. 이른비가 샘물을 가득 채울 것이다. 힘을 얻고 더 얻어 시온에 올라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시편 84:6-7절에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물 골짜기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어떻게 통과 할 수 있을까? 주께 힘을 얻어야 한다 시편 84:5절에 “주께 힘을 얻고 ~~” 주께 힘을 얻어야 한다.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고백했다.<시18:1> 주께 힘을 얻어야 눈물의 골짜기를 성공적으로 통과할 수 있다. 링 위에서 싸우는 복싱 선수에겐 두 가지의 넘어짐이 있다. 다운(down) 과 녹아웃(Knockout) 케이오(KO)가 있다. 다운은 순간적인 넘어짐이기에 벌점은 있어도 게임 운영에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녹아웃이 되어버리면 게임은 완전히 끝나 버린다. 믿는 사람들도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질 때가 있다. 그러나 결코 녹아웃 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붙들어주시기 때문이다. 시편 37:24절에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주님의 손은 창조의 손이다. 주님의 손은 치료의 손이다. 주님의 손은 축복의 손이다. 주님의 손은 능력의 손이다. 그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면 힘을 얻게 된다. 주께 힘을 얻으면 눈물 골짜기를 넉넉히 통과 할 수 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야 한다 시편 84:5절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시편 84편을 흔히 순례자의 시편이라고 부른다. 절기를 맞아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순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쓴 시이다. 순례자는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순례의 길은 물 없는 광야도 지나고 골짜기도 지난다. 먹을 나무 열매도, 마실 물도 없는 메마른 골짜기를 며칠씩 지나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런 골짜기를 '에메크 바카' 즉 ‘눈물의 골짜기’라고 불렀다. 그런데 순례자들이 이런 골짜기에서 주저 앉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마음속에 시온의 대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시온으로 가는 대로가 열려 있었다. 시온을 향한 꿈이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위축되거나 좁아지지 않았다. 눈물의 골짜기도 시온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그러므로 눈물의 골짜기도 마음에 시온의 대로만 있으면 넉넉히 통과 할 수 있다. 기도해야 한다 시편 84:8절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으로 바꾸어 주신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중에 부르짖는 기도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출2:23> 그리고 모세를 통해 구원하셨다. 히스기야왕이 사형선고를 받고 눈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들으셨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시며 15년을 더 살게 하셨다. 한나가 통곡하며 기도하자 하나님이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어느 누구나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환경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일어설 수 있다. 주께 힘을 얻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러면 눈물 골짜기가 변하여 많은 샘이있는 축복의 골짜기가 될 것이다. 이른비의 복이 샘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김민정2018-11-21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리더십 교체가 잇따라 화제다. 소망교회와 거룩한빛광성교회는 민주적인 절차로 후임을 확정했고, 지구촌교회는 담임목사가 선교를 위해 아프리카로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도 담임목회자의 퇴임 소식을 알렸다. 이재철 목사는 18일 고별설교를 마친 후 경남 거창으로 낙향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나(이재철)를 철저하게 버리라”고 거듭 강조했다. ‘적당히’가 아니라 ‘철저하게’ 버리라 했다. 그래야 자신의 떠남이 완결될 수 있다면서. 이들의 선택이 주목 받는 이유를 새삼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한쪽에선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하는 한 장로교회가 세습으로 떠들썩한 이 시점에, 이들의 용단은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성경 말씀이 있다. 당연한데 지키기가 쉽지 않다. 다름 아닌 교회가 그 증거다. 그래서 씁쓸하다. 하지만 희망을 본다. 누군가는 ‘내 것’이라며 당연하게 누리는 기득권을, 홀연히 내려놓고 물러서는 이들이 있어서. 누군가는 ‘움켜쥐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믿는 것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떠나가는 이들이 있어서. 양화진에서 20여 년 간 살아온 이재철 목사가 경남 거창으로 내려간 건 어떤 연고가 있어서가 아니다. 후임목회자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게 첫 번째 이유고, 땅값이 싸다는 게 또 다른 이유란다. 돈을 모으지 않는 부부의 형편을 고려해 평당 10만 원인 땅을 찾다 거창에 정착하기로 했다고. 물론 이 목사는 은퇴 예우금도 일체 받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 사는 8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겠단 뜻을 밝혔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명예로운 퇴장은 ‘내려놓음’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이들의 내려놓음이 한국교회를 넘어 이 사회를 선하게 물들이는 생수의 강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영훈 목사2018-11-19

가을은 땀을 흘리며 수고한 농부들이 무르익은 곡식을 기쁨으로 거두는 계절이다.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떠한 열매를 거두기를 기대하고 계실까? 우리는 모두 죄 가운데 살며 고통 받다가 죄 가운데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던 절망적인 존재였다. 농사에 비유한다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에서 물을 많이 사용해야 하는 벼농사를 지어야하는 것과 같은 절대 절망의 상황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받은 뒤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일까? 나는 그 열매가 감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모든 어려움에서 지켜주시고 부족함에도 인내해주시고 선한 길로 이끌어주셨다. 하나님 아버지께 마음 깊이 감사하며 살아가는 신앙은 은혜를 깨달은 성도로서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뒤돌아볼 때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온 날들이 많다. 사실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감사하지 못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 구약을 읽다보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따르면 될 텐데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광야에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었다. 그러던 중 케냐 나이로비에서 북쪽으로 800km 떨어져 있는 투르카나의 나페이카르 중·고등학교 기공식에 참석했을 때 낮 기온이 50℃까지 올라가는 찌는 듯한 더위와 가시덤불이 뒹굴고 독사와 전갈이 다니는 척박한 땅을 경험해보고서야 이스라엘 백성이 왜 광야에서 원망하고 불평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한다. ‘범사(凡事)’ 라는 단어는 NIV 성경에서 ‘in all circumstances’라고 번역돼 있듯이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하라는 뜻이다. 이론적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삶의 현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에 직면하면 감사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의 때에라도 감사해야 한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이야말로 성숙한 신앙이다. 성경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고난이 없다는 말은 없다. 꿈의 사람 요셉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게 될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꿈으로 인해 많은 시련을 겪었다.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형들에게 버림을 받아 구덩이에 빠지고, 노예로 팔리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원망하지 않고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를 높여주셨다. 사람은 그 당시만을 보지만 하나님은 전체를 보신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신 예수님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뤄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앞으로도 감사하지 못할 일들이 다가올 수 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감사로 나아가는 신앙이야 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케 할 것이다. 이러한 ‘절대 감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린다. 또한 우리의 작은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더 큰 감사할 일들을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내주실 것이다. 이번 가을에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절대 감사’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자.

신동식 목사2018-11-11

2018년 10월14일은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강서구의 한 PC방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입니다. 한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 뒤에 불행한 한 젊은이의 우발적 폭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아주 끔직한 일이었습니다.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2017년 발생한 강력범죄 28,927가운데 가운데 우발적 범행 동기가 9,374건으로 전체 범행의 32.4%를 차지하였습니다. 이것은 2016년도에 비하여 약 1.5%정도 증가한 수치입니다. 특별히 우발적 살인 사건은 905건 가운데 357건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하루에 하나씩 우발적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하루에 한 명씩 우발적인 분노와 충동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그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슬픈 현실이 계속하여 증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점점 부강한 나라로 발돋움한다는 우리 시대에 이렇게 끔직한 이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순간적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분노조절 장애는 오랜 잠복기 후에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지 개인의 일탈로 보면 안 되고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공동체의 문제라는 책임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경쟁에서 떨어진 자들에 대하여 무시하는 태도가 강합니다. 패배자에 대한 비하와 조롱의 모습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유치원시절부터 배워 옵니다. 학교에서부터 그러한 취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반복 당합니다. 또한 사회에서 패배자로 냉대 받습니다. 이렇게 가슴 깊이 패배자라는 의식이 잠복되어 있다가 자신보다 못한 이들의 무시 앞에서 폭발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패배자의식의 변화가 없이는 이러한 불행은 반복될 것입니다. 특별히 갑질 문화는 잠재적 살인을 가져옵니다. 자신이 받은 무시를 자신의 또 다른 을에게 배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끔직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만 그 문제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가정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우리 사회는 점점 위기 가정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가정에서의 건강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기가정 뿐만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가정의 문제도 만연합니다. 가정에서 기초적인 인간관계, 인격적인 사회관계를 배우지 못한 채 사회에 나온 이들의 일탈은 매우 심각합니다. 종종 부자들의 폭력적 일탈을 자주 봅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기초적으로 가정에서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훈련만 받았기에 사람의 역할에 있어서 어린 아이와 같은 수준인 것입니다. 이들 역시 사람을 죽이지 않았지만 실제적으로는 잠재적 살인을 할 수 있는 야만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인권을 강조하는 인권 사회입니다. 그런데 인권 사회에서 매우 빈약한 부분이 바로 공동체 의식입니다. 개인의 존중이 중요하지만 공동체가 빈약해지면 개인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의식을 상실한 것은 우리 시대의 실책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기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에 있어서는 불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는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신뢰 회복은 지역사회에서 피난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피할 곳이 있다는 것은 작은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역할 가운데 하나는 교회는 은사공동체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학력과 권력과 물질적 성공이라는 승자들의 모임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 역시 패배자를 양산하는 곳이 된다면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의 형상임을 인식하고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합니다.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이 사람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사는 것이 판단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교회는 패배자 의식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기다리고 인내하고 사랑하는 곳이 될 때 세상의 피난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지역에 위치하면서 위기 가정을 돌보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특별히 국가기관과 함께 동역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당장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위기 가정을 돌아보는 것은 교회를 위한 일이 됩니다. 더구나 위기 가정의 아이들이 사회와 어른에 대한 분노를 가지지 않도록 돕는 일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점점 해체를 넘어서 세속화로 급속하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속화 시대는 배려보다는 투쟁이 앞섭니다. 성경이 말하는 도덕적인 기준보다는 개인의 생각이 더욱 중요해 질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성경의 가치를 더욱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망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발적 폭력 사회의 애통함을 풀어 줄 수 있는 곳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되도록 우리가 힘써 싸워야 합니다. 그 길은 지난한 여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가야 할 곳입니다. 피난처를 찾을 때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박혜정2018-11-07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영적으로 방황하고 넘어지는 내 자신을 들여다 보게 돼 눈물이 멈추지 않아요." , "신앙 때문에 박해 받으면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한 바울의 믿음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던 관객들의 소감이다. 현재 상영중인 영화 <바울>은 이 시대 크리스천들에게 '믿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바울이 처형 당하기 직전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신앙 고백하는 장면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바울이 기독교 박해자였던 때 핍박했던 스데반과 기독인들,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에 입성한바울을 환영하며 맞이하는 장면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회복과 안식의 시작이라는 감동을 선사한다. 영화 <바울>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담대한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한 그의 노년기를 조명하고 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30년(서기 67년), 기독교 박해가 극심했던 시기다. 로마제국의 황제 '네로'는 자신의 광기로 벌어진 대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교인들을 짐승들의 먹이로 삼거나 불태우는 등 핍박을 가한다. 이 가운데 초대 교인들은 두려움과 공포감에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현실의 어려움 앞에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등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내적으로 흔들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이들의 영적 지도자 바울은 네로의 명령으로 감옥에 갇히고 사형만을 기다리고 있다. 바울의 동역자이자 의사 누가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교인들의 믿음을 격려 해 줄 수 있는 이가 바울이라 믿고 찾아간다. 영화는 바울의 일생과 신앙적 조언을 사도행전으로 기록하며 신앙적으로 성숙해 가는 '누가'를 관심있게 조명한다. 한편, 로마에서 은신처를 마련하고 신앙공동체를 이끄는 브리스길라·아굴라 부부, 기독교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희생한 초대 교인들의 삶까지 다양한 신앙인들의 모습을 다룬다. 바울은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쓴 채 로마제국의 폭력을 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오히려 사랑으로 맞서라고 조언한다. ▲전국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 <바울> 영화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 선포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열정을 감동적으로 녹여낸다. 예를 들어, 바울은 자신의 참수형을 집행해야 하는 교도소장 모리셔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모리셔스는 바울의 제안을 따라, 딸의 병을 누가에게 맡긴다. 딸의 병이 낫자, 모리셔스는 바울에게 감사를 전하는데, 이에 바울은 "주님의 복음이 전해졌기 바란다"고 대답한다.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 로마 시민권을 가진 비기독교인이자 기독교 박해자였다. 그러나,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면서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되고, 초대교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성경 계시의 저자 40여 명 가운데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저자기도 하다. 성경 66권 중 최소 13권은 바울이 쓴 책이다. 그는 복음 전도를 위해 히브리식 이름 '사울'에서 로마식 이름 '바울'로 스스로 바꾸고, 이스라엘을 넘어 로마와 에베소, 고린도, 빌립보 등 세계를 다니며 전도여행을 했다. 오늘날의 터키, 그리스, 이탈리아 등 아시아와 유럽지역에 기독교 전파를 위해 헌신한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죽음을 이기는' 믿음과 사랑, 용서다. 아울러 '어떠한 현실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점에서 오늘날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개개인의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사도 바울처럼 영웅적인 죽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영역에서 복음으로 인해 감사하고 사랑하며, 용서를 실천하는 것이 이 시대 믿음의 여정을 걷는 크리스천들이 이어갈 순교정신 아닐까.

여주봉 목사2018-11-06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십자가 복음의 유업 중 하나는 회복의 유업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사야 62장에서 잘 볼 수 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1-5). 이 구절은 가장 먼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절은 신약의 교회를 향한 약속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이 구절을 신약의 교회에 주신 약속으로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신약의 교회에 의도하신 삶은 그들이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되는 삶이다. 그들이 다시는 “버림 받은 자” 혹은 “홤무지”라고 불리지 않고, 새 이름, 즉 “헵시바”와 “쁄라”라 불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되는 삶이다. 그래서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보게 되는 삶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신약의 교회에 주신 유업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혹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 있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는가? “수치와 가난, 압제로 대변되는 삶의 상황”, “버림받은 자”라 “황무지”라 불리는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는가?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에서 떠나면, 항상 교회는 침체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아무리 종교적인 의식이 많아도 그들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난 것을 두고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즉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 떠나면 그들의 행동과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은 항상 같이 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다시 말해서 교회의 기초인 십자가의 복음에서 떠나면, 교회는 침체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는 다양할 수 있다. 다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중 주된 일부이다. 1.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다. 2. 영적 분별력이 어두워진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진다. 3.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사라진다. 4. 하나님의 뜻과 의중이 보여지지 않는다. 5.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다. 6. 하나님의 유업이 이뤄지지 않는다. 7.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의 저하가 일어난다. 교회가 교회의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올바로 세워지면 전반적인 회복이 일어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로 우리에게로 돌아오신다. 성경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우리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호 6:1, 3). 다시 말해서, 교회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십자가의 복음 위에 올바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 신앙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1) 하나님을 아는 것.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2.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 1) 전적인 순종. 2) 온전한 신뢰.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 ⓒ데일리굿뉴스 우리 신앙은 당연히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위에 토대한 삶, 즉 말씀에 의한 삶이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입으로는 “말씀, 말씀”을 외치면서, 우리의 신앙, 예배, 사역 등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깊이 고민하면서 성경을 찾는 경우가 매우 적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말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 토대 위에서 우리의 신앙과 복음은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 오직 성령에 의한 삶을 사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를 보면 이 부분을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크게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다섯 가지 기치를 내걸었는데, 그것이 정확하게 내가 그림으로 표현한 내용과 일치한다. 모든 성도는 이 삶을 배우고 살아야 한다. 단 한 가지 종교개혁자들이 내건 기치에는 오직 성령이 빠졌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성령이 없이 가능한 것이 단 한 가지가 없다. 심지어 성경도 성령의 조명이 함께 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문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문자는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도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성서학자였던 F. F. 부르스 박사도 “그리스도의 부활과 기독교인의 부활 사이의 현재 시간은 성령의 시대이다.”라고 말했다(New Century Bible Commentary, 고후 1:22 주석).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돌아오시면 우리 가운데 전반적인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위에 언급한 하나님의 심판의 열매들이 전체적으로 걷히고, 그 전반적인 부분에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일어나는 회복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정재영 교수2018-11-06

목회 이중직의 현실적 필요 최근 한국 교계에서 목회자 이중직이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가운데 얼마 전에 있었던 각 교단 총회에서 다시 이중직이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보수 교단들은 여전히 이중직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으나 생계형 이중직에 대해서는 조건부로 예외로 정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교회 현실을 고려할 때 목회 이중직은 점차 불가피한 사실로 다가오고 있다. 신학교 졸업생 수와 은퇴하는 목회자 수, 선교사로 나가는 수, 그리고 전체 교회 수 등을 종합해보면 매년 수백 명의 목회자가 과잉 공급되고 있고, 최근 10년 사이에 수천 명에 이르는 목회자가 임지를 찾지 못한 채 무임 목사가 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목회자 수급 불균형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문제가 되어왔다. 1년 동안 설립되는 교회는 많아야 2,000~3,000개 정도이지만, 매년 그 두 배 이상의 목회자가 배출되고 있으니 사역할 교회가 부족한 것이다. 그나마 매년 수천 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고 교회를 개척해서 5년 이상 유지되고 있는 경우는 3%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역지를 찾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그리고 지방 신학교나 군소 신학교를 나온 목회자들은 더더욱 임지를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다보니 목회자들도 청년 실업자들처럼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고 심지어는 학력 부풀리기로 물의를 빚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목회자 과잉 배출은 과도한 교회 개척으로 이어져 개교회들 사이에 또는 목회자들 사이에 지나친 경쟁의식을 유발시키고 교회의 권위와 신뢰성을 상실시켜 결국 기독교 선교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많은 개척교회들이 신도시로 몰려 신도시마다 교회가 난립하게 되고, 원하지 않더라도 서로 경쟁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대부분 영세하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해 교회 건물이나 예배처소가 부동산에 매물로 줄줄이 나와 기독교 전체의 신뢰가 저하되는 등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있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목회를 전통적인 관점에서 ‘교회 안에서의’ 활동으로만 한정하기가 어렵게 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인정해온 기관 목회나 전문직에 한정된 이중직을 넘어서 다양한 형태의 이중직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는 규모가 큰 교회 목회자나 박사 학위를 가진 목회자가 신학교 강의를 하면서 두 개 이상의 수입원을 갖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이중직을 금했다면, 현재의 상황은 생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불가피하게 이중직을 하면서 죄책감을 갖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법으로는 금지하는 교단조차도 이중직을 하는 목회자들에 대하여 징계나 처벌을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선교적 이중직의 활성화 이제는 이중직에 대해서 좀 더 유연한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며, 목회자의 품위를 손상하지 않고 목회의 의미를 왜곡시키지 않으면서도 수용할 수 있는 다양한 목회 영역의 개발이 오히려 현실적인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목회의 범위를 교회 밖의 다양한 일이나 활동으로 넓힐 필요가 있다. 기존의 관점에서는 목회 활동이라고 보기 어려운 영역에 대해서도 자비량 목회의 일부로 이해하거나 그 영역 자체를 선교 영역이라고 이해한다면 훨씬 폭넓은 일에 대해서 목회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목회 이중직을 유형별로 분류해보면 생계형 이중직, 자비량형 이중직, 선교형 이중직으로 나뉠 수 있다. 생계형 이중직은 오로지 생계 수단으로 이중직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단지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부모 봉양이나 자녀 교육을 위해 이중직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다음으로 자비량형 이중직은 목회를 하는 데에서 사례비를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직업 활동을 통해 사례비를 충당하는 경우이다. 자비량 선교를 하듯이 목회도 자비량으로 하는 것이다. 생계형 이중직과 자비량형 이중직은 외형상 큰 차이가 없으나 이중직의 동기와 의도에서 차이가 있다. 생계형 이중직은 본래 자비량 목회를 할 의도는 없었으나 교회 형편상 일정 수준의 사례비를 받지 못해 타의로 이중직을 하는 경우이고, 자비량 이중직은 본래부터 성도들의 헌금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중직을 하는 경우이다. 마지막으로 선교형 이중직은 자비량 목회와 일정 부분 중첩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이중직 자체를 선교 활동으로 이해하고 직업 활동을 통해 선교를 이뤄가는 경우이다. 자비량 이중직이 목회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중직을 하는데 비해 선교형 이중직은 직업 활동 자체가 넓은 의미의 목회라고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존의 기관 사역이나 특수 목회를 하는 경우도 포함될 수 있다. 최근에는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의 관점에서 선교형 이중직을 의미 있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여기서 특히 선교형 이중직의 하나로 마을공동체 운동 참여형 이중직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최근 마을공동체 운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데, 이것은 산업화의 진전으로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전통적인 공동체가 붕괴된 후, ‘경쟁과 배제’로 표현되는 개인주의 사고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려와 포섭’을 중시하는 공동체 운동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마을공동체 운동을 교회와 관련하여 의미를 갖는 이유는 교회 역시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기업, 주민 등과 더불어 지역 사회의 주요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교회만큼 지역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조직들도 없다. 최근에는 각 지자체에서 마을공동체와 관련된 활동들이 늘고 있기 때문에 마을활동가로 지역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보다 넓은 목회의 지평을 향해 교회는 언제나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땅에 기독교가 전해져온 이후 끊임없이 교회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고, 우리 사회는 그런 교회에 주목해 왔다. 그러나 사회는 언제나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간다. 교회는 이렇게 변해가는 사회와 사회구성원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도 똑같은 사회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전통은 사회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해석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이 변화하는 사회에서도 변함없이 기독교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고 시대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신학적인 고찰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목회자 상에 대해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사회는 보다 복잡하게 변하고 있고 더 이상 목회자의 역할을 교회 안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공동체 자본주의와 대안 경제 운동에 목회자가 참여한다면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서울을 비롯한 여러 자치단체장들이 이 부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고 행정 차원에서 많은 지원이 이뤄지고 있으나 행정의 지원 이전에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인식 변화와 공감대 형성을 통한 역량 강화이다. 주민들이 실제로 그러한 일에 참여하거나 감당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행정 차원에서 위에서부터(top down) 전개되면 본래의 취지가 왜곡되기 쉽다. 따라서 이런 일에 목회자와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며 중심을 잡아줄 수 있다면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와 위기를 극복하고 지역사회를 공동체화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목회의 지평도 더욱 의미 있게 넓어질 것이다.

김신규2018-10-31

1517년 10월 31일은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날이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로마 성베드로대성당 신축자금 마련을 위해 일반 신자들로부터 죄를 사해준다는 ‘면죄부’를 파는 행위와 같이 교회의 잘못된 부조리와 죄악들에 대한 토론을 요청했던 루터의 당초 의도는 종교개혁의 큰 횃불로 불타올랐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거창하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작은 하나의 불씨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역사의 흐름을 바꿨을 정도로 위대했다. 그리고 500년이 흘렀다. 한국교회는 지난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행사는 행사로 그쳤을 뿐, 그 후 1년이 흐른 한국교회는 여전히 개혁의 대상으로 손색(?)이 없다. 지난해 종교개혁 500주년의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모 대형교회의 세습은 한국교회는 물론 비기독교인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정작 해당 교회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해당 교회와 관련해 드러나는 각종 추한 모습들을 부끄러워하기보다 교회를 흔들려는 ‘마귀’의 세력들에 의한 공격으로 치부했다. 자신들을 향해 자성을 촉구하는 쓴소리를 한 뜻있는 교계 인사들과 목회자들의 목소리는 물론 수많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을 ‘사탄의 종’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분명 의미가 남다르다. 그래서 그 참 의미를 되돌아보고 진리 사수를 위한 새로운 다짐과 새 출발의 계기로 삼아야 하지만,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에 외형적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일까? 다양한 행사와 퍼포먼스에만 치중해왔다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기념예배를 드리고 학술대회를 하는 등 종교개혁의 의미부여에 치중했지만, 정작 기념예배에서의 환상의 화음을 자랑하는 찬양과 회개의 부르짖음을 보여주는 울부짖는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듣기 싫어하는 ‘소음’이 된 것만 같다(사 1:11). 지난 2007년의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행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초의 좋은 목적과 취지는 하나의 ‘보여주기식’ 퍼포먼스로 막을 내렸을 뿐 이후 한국교회의 변화된 모습은 없었다. 지난 2014년 원로목회자들이 주축이 돼 보여줬던 ‘한국교회와 목회자 갱신을 위한 회초리기도대성회’는 한국교회 개혁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퍼포먼스의 결정판(?)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원로목회자들은 한국교회의 분열과 타락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회개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잘못된 현상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회초리를 들고 스스로 자신의 종아리를 쳤다. 그러나 기자의 눈에는 그저 하나의 ‘코미디’ 같았다. 한국교회를 깨치는 데 일조했다기보다 한국교회를 ‘희화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후에도 한국교회의 모습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고, 한국교회의 신뢰성은 지속적으로 땅에 떨어졌다. 진정한 각성과 회개가 없는 가운데 억지로(?)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몸부림을 보여주려는 퍼포먼스의 결과론인 것만 같아 씁쓸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거대한 퍼포먼스 이후 1년이 지났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한국교회가 완전히 망하는 것이 그나마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의 섭리는 무엇일까.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낮은 곳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음에도 묵묵히 복음사역을 감당하는,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의 남겨진 선지자들’과 같은 헌신자들 때문이 아닐까?

윤인경2018-10-26

열여섯 살 전후의 젊은 나이를 의미하는 이팔청춘(二八靑春). '마음만은 이팔청춘'이라는 말처럼 혈기왕성한 젊음이 떠오르는 단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이팔청춘들, 청소년들은 아프다. 종일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아이들은 각종 스트레스와 불만을 잊어버리려 스마트폰에만 시선을 고정한다. 이에 청소년 사역자들의 고민도 깊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기독 청소년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 주일에 잠깐 중고등부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게 현장 사역자들의 목소리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가 기독교교육주간을 맞아 마련한 교육정책 팁세미나에서 만난 P 목사는 강연 내내 노트북으로 쉴 새 없이 타이핑하고 있었다. 세미나실을 가득 채운 주일학교 교사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전라북도 군산의 한 교회에서 사역하는 그는 이번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이른 새벽부터 올라왔다고 했다. 청소년에 대한 그의 절실한 고민은 무엇일까. P 목사는 학교 심방을 통해 발견한 아이들의 모습이 교회에서와는 너무나 달라 놀랐다고 털어놨다. 교회에서는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던 학생들이 또래들과 함께 어울리는 학교에서는 거침없이 욕을 하는 등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 주일학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그는, 청소년 사역이 교회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매일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울 용산구 충신교회의 중고등부 사역은 이러한 P 목사의 가려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준 듯 했다. 충신교회에서는 가정예배와 온가족기도회 등을 통해 믿음의 가정을 세우는 걸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청소년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강연을 맡은 우충만 목사는 초기 한국교회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인에게 어떠한 교회 직분을 부여하지도 않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918년 창간된 기독교 월간지 '성경잡지' 창간호에는 가정예배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하는 글이 무려 10여 쪽에 달했다. 해당 글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리는 집의 자녀는 완전한 교육을 받는 것이며,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작은 천국을 이루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1933년 창간된 감리회보 7월호에도 신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정예배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이 실렸다.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신앙의 선배들이 가정예배를 통해 기독교 문화의 대를 이어온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다. 갈수록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지난해에는 심지어 '저에겐 당신의 전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전도거부카드가 등장하기도 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아이들과 어린 학생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복음은 여전히 힘이 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녔기에 더 감동적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를 살리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문제의식은 수없이 제기돼왔다. 다양한 캠프와 수련회, 프로그램을 고안해보지만 그 어느 것도 뾰족한 수가 되지 못하는 가운데, 가정 안에서 부모가 신앙을 전수하는 가정예배가 바로 다음세대를 세우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김성윤 교수2018-10-26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시가 있다.독일의 마르틴 니묄러 목사(1892-1984)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여느 독재자들처럼 나치가 특정 집단을 하나씩 하나씩 지목해 차례로 제거하며 권력을 독점해갈 때, 저항하지 않고 침묵한 독일 지식인들에 대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시다.오늘날에도 상호의존과 연대를 강조하는 의미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북 관계 개선도 좋고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좋다. 하지만 필자는 지금 이 시점에서, 천안함 피격으로 죽어갔던 46명의 용사를 떠올리게 된다. 그 중에서도 서정우 하사가 너무도 생생하게 생각난다. 서정우 하사는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를 휴학하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2010년 11월 23일 휴가를 가기 위해 연평도 선착장에 있던 그는 북한이 연평도를 공격한 그 시각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리에 급히 부대로 돌아가다 북한군의 무차별 포격에 숨졌다. 연평도 포격 3년이 지난 2013년에 모교인 단국대는 서정우 하사의 이름을 딴 서정우 강의실을 사회과학관에 마련했다. 당시 단국대학교는 재학생과 그의 부모를 모시고 서정우 하사를 잊지 말자고 사회대 앞 잔디밭에 비석까지 세웠다. 그 기억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리고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미완의 사건으로 남아있다. 세계은행은 2018년 북한의 통치 구조를 ‘세계 최악’으로 지목했다. 세계은행이 최근 발표한 세계 통치 구조 지수 2018(World Governance Indicator 2018)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언론 자유는 전체 조사 대상 중 최하위였다. 북한의 ‘언론 자유와 책임성’ 지수는 마이너스 2.20으로, 지난해 마이너스 2.13 보다도 오히려 0,07이나 후퇴했다. 북한은 ‘규제의 질’ 항목에서도 마이너스 2.34점을 받아 최하위로 평가됐다. 이 항목은 각국 정부가 민간 부문 개발을 허용, 촉진하는 정책과 규정을 이행하는 능력을 평가한 항목으로 북한이 미개 상태임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깨어있는 대한민국 국민은 긴박하게 흘러가는 한반도 역사의 뒤편에 대한민국을 수호하다 사라진 인물들에게 감사하고 잊지 않기 위하여 바르게 대한민국이 영원하도록 지킬 의무가 있다. 어느 사회나 부와 빈곤 탐욕과 굶주림 빛과 그늘은 있기 마련이다. 이 같은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야 말로 대한민국을 위해 산화한 애국지사와 순국장병들을 잊지 않는 길이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란 시처럼 나와 관계없다고 침묵하다 당한 꼴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는 보다 정의롭고 솔직하고 당당해져야 된다는 것을 머릿속에 새기며 행동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될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윤리일 것이다.

이정기 목사2018-10-17

어느 시골에 사생아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의 아버지가 누구일까 하며 수군거렸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없었다. 그 소년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사생아라고 할까봐 숨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어깨를 잡으며 ‘넌 누구의 아들이지?’ 하는 소리가 있었다. 목사님의 소리였다. 처음 부임하신 목사님의 질문이기에 이제는 꼼짝없이 탄로 나게 되었구나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 그렇지, 하나님 아들이지, 하나님 아버지 많이 닮았네’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 말에 소년은 변화되었고, 그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 테네시 주에서 주지사를 두 번이나 했고, 사회와 교회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벤 후퍼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인생이 바뀌었다. 필자도 목회 초기에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사람의 소리를 듣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다. 저녁에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끙끙거리기도 했다. 이불 뒤집어 쓰고 펑펑 울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의 소리보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 때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 염려하지마.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지키신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 진다. 억울한 마음도 사라진다. 확신이 생긴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는 사람의 음성을 듣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음성이 성령님의 음성보다 더 크게 들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그럴 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바로 사단이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절대로 죽으시면 안된다고 만류한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말씀하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베드로의 인간적인 말 배후에 사단이 역사하고 있음을 아신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해 밭을 팔았다. 그런데 막상 그 돈을 교회에 헌금하려고 하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돈을 얼마 감추고 그것이 전부라고 거짓말 한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을 속인 죄로 죽는다. 그런데 왜 이들 부부가 하나님을 속이게 되었는가? 사단이 그들 마음속에 가득하여 거짓말 하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음성과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해야 한다. 사단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부정적인 말을 심는다. ‘이제는 어렵다. 이제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끝났다. 포기해라.’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두려워 말아라. 놀라지 말아라. 절대 포기하지 말아라.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버리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사탄의 말을 들으면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처한 환경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어느새 우리 안에는 평강이 임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물질주의, 쾌락주의, 이기주의를 그대로 반영한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우리의 귀를 막는다. 심지어는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렇게까지 예수 믿을 거 없어, 나도 당신처럼 뜨거울 때가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더라고. 유난 떨지 말고 대충 믿어.’ 세상 사람들이 그런 말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고,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부활과 최후승리를 모르고, 영생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심판을 믿고, 천국과 영생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 ‘대충 예수 믿어라, 사람들 눈치보며 믿으라.’는 말씀이 어디 있는가? 오히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나를 쫓으라.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라. 죽도록 충성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기를 힘써라.”말씀하셨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 때문에 붙잡혀 공회 앞에 서게 된다. 당시 공회는 로마 통치하에서 입법권과 사법권을 가지고 있던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며 말한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들의 위협은 단순히 겁을 주는 수준의 위협이 아니었다. 베드로와 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바로 이 공회에서 심판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졌으며, 총독 빌라도도 공회원들의 선동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던 것이다. 그런 공회의 위협이었다. 공회의 회원들 71명이 앉아서 아주 무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생명까지도 빼앗길 수 있었다. 그런데 공회원들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대답했는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대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다. 그 담대함과 용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왜 죄를 짓는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유혹할 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찌 죄를 지으리이까” 하고 뿌리쳤다. 이 뿌리칠 수 있었던 용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 승리를 선포하며 나아갈 수 있었던 용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소를 향해 갈 때의 일이다. 이 재판은 생사를 가늠하는 무서운 재판이라 루터의 친구들이 간곡하게 만류했다. 그 때 루터는 말했다. "재판정 기왓장만큼이나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재판정에 서리라." 그리고 재판정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이렇게 기도한다. “Oh, God. Here I stand.” 유명한 말이다. "오, 하나님! 나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위협하는 무리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들을 좋게 하려고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정만 있으면 충분한 사람들이다. 세상이 몰라주고, 사람이 몰라줘도, 주님만 아시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제부터 정말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겠다. 사람의 말 듣고 넘어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듣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주님의 뜻 이 땅에 이루며 살아야겠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야겠다.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기쁨 되어 살기로 결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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