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목사2019-02-21

국사학자 이만열 교수는 역사의식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역사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식만 있고 인식이 없다면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 인식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른 역사인식'입니다. 역사인식이 바르지 않으면 역사를 가지고 사리사욕을 탐하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나라마다 바른 역사를 세우려고 온 힘을 다 쓰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독일입니다. 독일은 히틀러에 의해 학살을 당했던 나라임을 참회했습니다. 그리고 악랄한 일을 행한 사람들을 끝까지 징벌했습니다. 그러기에 건강한 나라로 인정받고 새로운 시대에 리더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일본입니다. 국권을 침탈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징용하고 죽였으면서도 반성이 없습니다. 더구나 위안부에 대한 처리를 정치적 타협으로만 끝내려고 하는 아주 못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아픔을 달래 줄 수 있는 것이 바른 역사인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친일의 역사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의 역사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의 자유가 저절로 온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의 피가 흘려졌기 때문입니다.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나라는 독립운동의 역사도 바르게 세우지 못합니다. 역사가 왜곡되면 다음 세대는 불행한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역사는 공의를 드러내야 하는데 역사가 왜곡되면 정의를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건강한 나라로 세워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최근 5.18민주화 운동에 대한 일부 정치인들의 일탈적 모습을 보면서 역사인식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군부 독재정권의 희생물이 되었던 많은 이들의 아픔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정치적 권력만을 탐하려고 하는 것은 건강한 나라를 세우는 일에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교회의 조직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곳은 교회와 교회가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일관된 자세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해방공간에도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장로였습니다. 여운영은 평양신학교 출신 전도사였습니다. 김구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 땅에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 공화국을 세우는 일에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그들의 순교적 신앙이 오늘의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나라에 대한 인식은 현대의 공간에서도 그 힘을 발휘합니다. 이것은 국가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는 자세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국가 제도를 허락하셨습니다. 교회를 유지하고 질서를 바로 잡아서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 국가를 허락하셨습니다. 국가는 항상 이 지점에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의식의 자리에서 역사인식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역사를 알아가는 일에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를 부끄럽지 않게 사는 작은 발걸음입니다.

정재영 교수2019-02-20

한국의 사교육 열풍 요즘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다. 역대 케이블방송 시청률 최고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한국 학부모들의 교육열 특히 사교육 열풍을 소재로 삼았다. 우리 사회에서 자녀 교육은 가장 뜨겁고 앞으로도 쉽게 꺼지지 않을 관심 주제이다. 이 자녀 교육의 핵심은 사교육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됐다. 사교육 시장 규모는 연간 5조원을 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사교육 부담을 줄이려는 교육제도의 변화를 무색케 하며 그 규모는 더욱 커지고 있다. 1명당 사교육비 6,427만원을 써야 겨우 ‘보통사람’ 수준 될 수 있다는 뉴스도 있고, 아이를 낳아서 독립할 때까지 드는 비용이 3억 원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이 정도이니 자녀는 행복이 아니라 짐처럼 여겨지고 있고, 이러한 부담을 감수하느니 아이 낳기를 포기하는 사람도 늘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세계 최고 수준인 저출산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 사회에서 출산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양육비에 대한 부담이다. 그 양육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자녀 교육비인데, 그중에서 공교육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교육비이다. 전에 필자가 자녀교육을 주제로 연구했을 때 학부모 20여명을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강남의 유명 주상복합아파트에서 사는 사람과 지방 중소도시에 사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자녀교육을 위해 가장 신경 쓰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결같이 ‘인성교육’이라고 답했지만, 구체적으로 자녀의 바른 인성을 위해서 뭘 하느냐는 질문에 딱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인성교육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답했지만 실제로 인성 교육을 하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사교육에 대해 질문하니까 30분을 쉼 없이 이야기했다. 실제로 관심을 두고 신경을 쓰는 건 사교육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하나 같이 덧붙인 말은 “도대체 누가 이놈의 사교육을 좀 없애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남들 뒤처지지 않게 하려니 사교육을 하기는 하는데 너무 힘이 부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사교육을 포기하지는 못하겠고 다 같이 하지 않도록 해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과외 폐지를 했던 때가 차라리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 세계적이라고 알려진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사실은 공부하는 당사자 학생들의 학구열이 아니라 공부를 시키는 학부모의 열정이라는 사실부터 우리의 자녀 교육이 왜곡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에 공부를 한다. 흔히 주변에서 보듯이 공부 잘해서 꿈을 이루고 싶다는 이야기보다는 공부 잘해서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이야기가 훨씬 많이 들린다. 아이들은 부모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존재인 것이다. 심지어 성적에 실망해서 자살을 기도하는 아이들조차 “부모님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었는데…”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들은 모두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 공부 잘 하면 너 좋지, 나 좋니?”라고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부모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드라마에 나오듯 그토록 의대에 가기를 희망하는 것이 좋은 의대에 들어가서 돈 없어서 치료 못 받는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치라는 뜻이 아니라 ‘네 덕 좀 보고 살자’는 강한 의지가 숨어 있다. 병원에 가서 고생 좀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집안에 의사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우리는 “공부해서 남을 주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지 남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별로 없다. 드라마를 보면서 너무 심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실 자신들도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라도 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자신의 형편에 지나칠 정도로 사교육을 시키고 있고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버거운 노력을 하고 있다. 자녀교육에 대해 연구했을 때 학부모들에게 촌지에 대해 질문하니까 절대로 선생님께 촌지는 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선물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무슨 선물을 드리는가에 대한 질문에 상품권을 드린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마 최소한의 양심은 지킨다는 자기 위안을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촌지는 자기 아이를 잘 봐달라는 뜻으로 주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경쟁상대로 보고 그 아이들보다 우리 아이가 잘 돼야 한다는 이기적인 욕망이 내포된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자녀 교육이 정말 자녀들을 위한 것인지, 또한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한 것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녀 교육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를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교과서처럼 말하고 있지만, 정말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자녀 교육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공부 잘해서 일류 대학 들어가고 대기업에 들어가는 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일류 대학에 못 들어가고 대기업에 못 들어가는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를 짓는 것일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에 정확하게 답을 해야만 한다. 교회 소그룹에 대하여 연구했을 때 한 소그룹 참여자는 동서지간에도 나누지 않는 고급 사교육 정보를 소그룹 안에서는 알려준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는데, 드라마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과연 이것을 소그룹의 장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떤 이는 교회 소그룹을 ‘평등의 소그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소그룹 안에서 ‘아파트 평수와 아이들 학교 등수‘만 이야기하는 것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자칫 신앙 모임조차도 욕망의 분출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병원이나 법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정해진 절차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교인 중에 아는 의사나 법조인을 찾아서 특별한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성경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회심을 하는 것은 일차로 한 개인의 인성 안에서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 삶의 태도에 영향을 미침으로 인해 종국에는 사회의 변화를 지향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회심의 결과는 자녀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가정교육의 방법, 자본의 축적과 기업 활동에 기여하는 경제적 행동과 판단,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방법에 변화를 미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에게 세상에서 최고가 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 되는 것도 훌륭한 일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자녀 교육은 성공의 사다리에 먼저 오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문화 산물에 대한 통찰력을 배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직업에 대한 관심과 소명의식을 키움으로써 세상에서도 성직자와 같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다. 우리들의 자녀 교육에 대해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여주봉 목사2019-02-18

이사야 하반부에 신약의 교회를 위해 약속된 하나님의 유업 중 하나는 회복의 유업이다. 개인과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질 때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나타난다. 우리는 그 부분을 지난번에 살펴보았다. 동시에 신약의 교회를 위해 약속된 회복은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는 유업이다.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질 때, 그 유업도 회복될 것이다. 우리는 이사야 하반부의 몇 구절을 보아도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사 54:3).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 58:11-12). “3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사 61:3-4). 이 구절들은 가장 먼저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것에 관한 예언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 구절들은 신약의 교회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매우 침체된 상황 가운데 있지만, 당신과 당신의 교회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질 때, 먼저 당신의 교회가 회복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 나라의 모든 교회와 열방의 모든 교회가 회복되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신약의 교회에 주신 유업이다. 당연히 거기에는 불신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회복시키는 일이 포함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교회가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일하고 계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경우에도 개인적으로 이 주제를 정리하면서 나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더 뚜렷해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시대에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가 더 선명해졌다. 조지 바나는 그의 책 『The Power of Vision』에서 각자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역을 위한 비전은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선택한 종들에게 주어진, 선호되는 미래에 대한 선명한 정신적인 이미지이고,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과 환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26-27쪽). 하나님께서 그 동안 여러 통로와 경로를 통해 나와 내가 섬기는 포도나무교회와 새물결선교회에 보여주신, 우리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한 마디로 “회복과 부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정확하게 이사야 하반부에 약속된 신약의 교회에 주신 유업들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보여졌다. 그러면서 나는 왜 하나님께서 그 동안 나에게 교회의 기초인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더 알게 하시고, 교회를 오직 그 토대 위에 세우도록 인도해 오셨는지도 더욱 분명하게 이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현재 포도나무교회와 새물결선교회와 안에 그리고 포도나무교회와 새물결선교회를 통해 이 나라와 열방 가운데서 참으로 귀한 일을 하고 계신다. 나는 이것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교회에 이사야 하반부에 약속된 유업들을 강력하게 제시(offer)하고 계시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징표라고 믿는다. 당신과 당신의 교회가 심각하게 침체되어 있는가? 당신은 한국교회를 볼 때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낙심하지 말라.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기를 추구하고, 섬기는 교회가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지도록 힘쓰라.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유업이 당신의 삶과 당신의 교회의 삶 속에 주어질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하반부를 시작하면서 하신 말씀을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해서 하고 계시다고 믿는다. “1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 40:1-2).

이기창 장로2019-02-17

지금 한국교회는 침체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매년 수백 개씩의 교회가 파산해 경매 되던지 문을 닫는다는 소식도 들린다. 생활수준이 높아져 삶의 절박함이 없어지고 절대자에 대한 사모함이나 간절함도 사라지고 개인주의와 연락을 추구하는 세태에다가, 극심한 저출산과 고령화 그리고 세속문화의 창궐이 원인일 것이다. 초대형 집회가 수시로 열리고 교회가 쑥쑥 자라나며 신앙의 열정이 들끓던 1970~1980년대 한국교회 부흥의 절정기가 너무나 그리워진다. 설상가상으로 한국교계의 분열과 일탈, 이단사설의 증대 및 교회승계 문제로 인해 교회의 위상이 추락해, 성스러워야 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까지 받으니 그야말로 한국교회는 위기에 서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어느 대표기관이나 교단, 언론, 신학계에서도 걱정만 했지 쇄신과 개혁에 대한 뚜렷한 처방과 대책이 없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현안인 교회 승계문제에 대해 평신도의 입장에서 감히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로 ‘세습’이라고 공격을 받고 있는 친족에의 승계문제에 조차도 정당하냐 부당하냐의 깊고 명확한 판단 없이 교단이나 신학대학, 개교회 모두 묵묵부답이다. 일부 교단에서는 친족승계를 금지하도록 교단헌법을 개정했지만 개교회에 대한 통제력이 약한 개신교의 속성과 허술한 행정으로 혼란은 증폭되고 있다. 과연 교회의 친족승계는 옳은가, 그른가?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고 섬기는 일을 위해 특별히 레위지파를 정하셨고 그 족속의 아들들이 대대로 제사장직을 수행했다(출 27:21, 29:9, 대상 24:1~31). 즉 구약시대에는 소위 ‘세습’이 성경적이었으며, 제사장직분을 공평하게 제비뽑아 정하기도 했다(대상 24:5, 31).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약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고, 새 것은 새 부대에 담는다 하셨으며, 사도승계도 그렇지 않았으므로 부활, 승천 후 새롭게 탄생한 교회에 이 친족계승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반드시 친족이 배제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으며, 친족승계가 지속적 교회성장에 꼭 필요한 교회도 있을 수 있으며 그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강남의 H교회는 아들이 승계해 교회가 이전보다 더 은혜롭고 새롭게 성장했으며, 인천의 S교회는 거의 전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아들의 승계를 원해 교회문화나 전통을 유지하면서 발전하고 있다. 또 누구도 원치 않는 부모가 개척한 열악한 농어촌교회를 사명으로 물려받아 목회를 하는 훌륭한 분들이 많고, 인품과 신앙과 능력이 뛰어난 사명자가 대를 이은 가문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을 볼 때 ‘친족승계’를 무조건 금지하는 게 꼭 정의는 아니며, 유능한 친족 후계자의 기회를 빼앗는 역차별의 소지도 있어서 불합리한 논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교회승계의 방법은 무엇인가? 첫 예루살렘의 첫 교회에서 초대교회의 지도자인 사도직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살한 가룟유다를 승계할 사도 한 명을 보충할 때에, 먼저 분명한 자격요건을 정했다. 두 번째는 합당한 자로서 바사바와 맛디아를 복수로 추천 했으며, 세 번째 하나님께서 택해 주시기를 기도한 다음, 네 번째로 제비뽑아 맛디아를 선출했음(행 1:21~26)을 볼 수 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인도하시는 주된 방법인 ‘성령’의 충만함을 사도들이 아직 받기 전이었으므로 구약시대처럼 ‘제비뽑기’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현시대에 제비 뽑는 방식은 무작위 다수군중에게 대등, 공평한 기회 제공을 위한 단순선택 시에만 사용하고, 능력과 자질을 위주로 한 질적 선택을 하는 경우는 공정한 경쟁을 하는 선거가 보편화된 방식이다. 특히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기회균등, 공정경쟁, 민주적 선택, 투명-합리적 절차 등이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이에 하자가 있을 경우 사회적 갈등과 저항이 발생한다. 최근 M교회 사태가 큰 물의를 일으켜 신학대 학생의 파업, 직무정지 소송, 등으로 세상이 거세게 비판하는 것도 이러한 정당성이 결여된 때문이다. 따라서 ‘친족승계’는 사실상 옳고 그름의 문제나, 논란의 대상이 아니며, 그 금지가 선이 아니 듯 그 허용도 악이 아니다. 고로 한국교회는 친족승계의 적부논란을 종료하고, 공정한 승계를 위한 ‘룰’을 논의해야만 한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절차와 방법’을 정해서 자유롭고 투명하게 내·외부 복수 후보자가 경쟁을 한다면 ‘친족승계’도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외부 지원자를 배제 또는 제한하는 친족승계, 공동체와의 교감 없는 일방적 지명, 경쟁 없이 단독후보로 가부표결을 하는 방식, 전임자가 막후에서 부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은 불공정한 죄악이다. 친족승계가 필요하다면 떳떳이 공개모집을 통해 경쟁해 검증 및 투명한 비밀투표로 선택함을 받도록 하고, 만일 경쟁력이 없는 친족이라면 승계를 포기하는 것이 정의이다.(계속)

정용구 선교사2019-02-10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명기 10:19) 선교사에게 ‘나그네’라는 말은 익숙하다. 그래서 음식, 문화, 사람, 생활이 다른 곳이지만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이를 위해 많은 훈련을 받고 선교지를 가게 된다. 그런데 최근 중국, 인도 등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를 배척하는 현지 정부의 압박으로 ‘비자발적 강제출국’을 당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어렵게 결단하고 간 선교지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씩 이루었던 귀한 사역과 사람들, 살림살이 모두를 두고 선교지를 떠나는 충격은 외상과 비교를 한다면, ‘큰 트럭이 부딪친 엄청난 충격과 같다’라는 전문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선교지에서 살림살이를 가져 올 경제적 형편도 안 되고, 가져 온다고 해도 거처가 없는 한국에 둘 곳도 없다. 그러다보니 말 그대로 ‘임시’라는 단어가 익숙해지는 삶을 살고 있고, 한국임에도 예상치 못한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직접 체감하게 된다. 선교사 자녀들의 경우에는 어렵게 적응한 선교지 학교와 친구를 갑자기 떠나야 하고, 한국학교를 진학 하려고 해도, 임시 안식관에 거주하기에 안정된 주소지 불분명으로 전학도 쉽지 않다. 특히 대학입시를 앞둔 선교사 자녀들은 안정된 입시 준비를 뒤로하고, 부모님이 다시 가려고 하는 어딘지 모르는 제3의 선교지를 숨죽이고 지켜보아야 한다. 부인선교사의 경우는 작고, 보잘 것 없어도 네 살림살이가 있어야 하는데, 어디에도 네 것이 없다. 남이 쓰던 안식관의 침대와 식기들을 써야 하고, 한 달에서 두 달 밖에 사용하기 힘든 안식관이 대부분이어서 오랜만에 한국에서 사고 싶은 것이 있어도 옮길 때마다 짐이 될까봐 사지도 못한다. 특히 가장 힘든 것은 선교지에서 어렵게 교회를 세우고, 교우들과 모든 열정과 힘을 다해서 지켜 온 교회와 사역을 떠난 아픔도 큰데, 그것을 달래기도 전에 한국이라는 곳에서 예배만 드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생각지 못한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선교지와 비교하면, 한국은 좋은 교회와 목회자, 성도가 많다. 하지만 ‘비자발적 강제 출국 선교사 가정’이 한 주가 아니라, 이주,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을 기약 없이 한국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고 선교지에서 그렇게 강조를 했는데, 한국에 와서 정작 자신이 다닐 교회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은 너무나 깊다. 그래서 선교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새신자처럼 몰래 예배를 드리러 갔다가 이단으로 오해 받은 선교사들도 있고, 방문한 교회에 부담이 될 것 같아 성도와 교제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며 공허감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로 인해 주일날 악수 한 번 못 하고 쓸쓸히 돌아오는 선교사들의 이야기, 후배 교역자들에게 진짜 새신자 취급을 받은 선교사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심지어는 추방 및 비자거부 선교사이기에 현지에서 무슨 죄를 짓고 온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분들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선교사들의 마음을 담아 ‘비자발적 강제출국 선교사’라는 말보다 다른 이름을 지어 보았다. 그것이 바로 “한국에 있는 한국인 나그네”이다. 한국에 있지만, 언젠가 다시 선교사로 가려고 준비를 하기에, 한국이 정착지는 아니며, 한국인이지만 한국 문화에 섞이지 못하는, 가장 기본적인 예배 조차 드리기 어려운 이 특별한 현실에 선교사들은 이방인과 같은 ‘나그네’ 취급을 받는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 시간에도 숨을 죽이면서 이처럼 ‘한국에 사는 한국인 나그네’로 예배를 드리는 ‘비자발적 강제출국 선교사’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들을 다 품고, 위로하고, 격려할 수는 없다. 설령 한국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필요한 무엇을 준다고 해도,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못해서 곧 선교지로 다시 돌아가실 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1%의 여력만이라도 어려움을 당한 “비자발적 강제 출국 선교사 - 한국에 있는 한국인 나그네”가 되신 선교사들을 위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으로, 아주 작은 힘이라도 위로와 격려를 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후배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요즘 선교사가 되면 후원도 중단되고, 현지에서 열심히 하려고 해도 추방당하고, 비자가 거부 되고, 몸도 아프고, 자녀들도 제대로 공부 못하고, 한국에 오면 갈 데도 없어서 그 비참함을 보니 선교사 하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습니다.” 라는 솔직한 고백을 들었다. 하지만 현장을 경험한 선교사로서 선교지에서 실제로 후배들의 이야기처럼 되기는 했지만, 선교지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로 인해 그 어려움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그 어려움을 당해도 다시 선교지로 향하고, 다시 일어서는 동료 선교사들을 보면 자랑스럽다. 그러한 선교사들이 지금 ‘추방 및 비자거부’라는 어려움을 당해 ‘잠시’ 지내는 한국에서, 쓸쓸함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깊은 사랑을 받고, 빨리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선교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힘으로 분명히 혼자서도 회복 될 수 있지만, 누군가 곁에서 힘을 주고 위로하는 이들이 있다면, 좀 더 빨리 회복이 될 것이다. 혹시 우리 주변에 이런 선교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한국교회의 현장에도 이러한 선교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가 ‘잠시’ 깊은 좌절로 힘을 잃고, 어려움을 겪는 이 “한국에 있는 한국인 나그네”를 작은 힘이라도 보태서 위로해 주기를 기대한다.

김성윤 교수2019-02-08

마태복음 5장 13절을 보면 “너희는 땅의 소금이로되 만일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리요? 그 뒤에는 그것이 아무 쓸모없으므로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밑에 밟힐 뿐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소금은 짠 맛으로 음식의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것이고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다. ‘be the salt of the earth’는 땅의 소금도 되고 세상의 소금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절대로 썩지 않고 부패하지 않은 물건을 몇 가지 만들었다. 예를 들면 소금도 있고, 금도 있으며 다이아몬드도 있다. 젊을 때 그렇게도 아름다운 미인도 썩으면 고약한 악취가 난다. 향기로운 꽃도 시들고 썩으면 고약한 냄새가 난다. 단단하고 견고하기 그지없었던 무쇠도 썩으면 녹이 슬고 조각조각 부서진다. 이 세상에 부패처럼 추한 것은 없다. 썩은 것처럼 보기 흉한 것도 없다. 부패한 음식, 부패한 고기, 부패한 생선, 부패한 송장, 부패한 정치, 부패한 대학, 부패한 종교, 부패한 군인, 부패한 노조, 부패한 국민, 부패한 나라 등 이 모두는 추하고 더럽고 악하다. 그 중에서도 세상이 부패되면 어둡고 질서가 문란하고 혼란스럽다. 소금은 썩지 않기 때문에 방부제 역할을 한다. 부패를 방지해 준다. 소금 스스로가 썩지 않기 때문에 남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것이 소금정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동경한다. 그런 사회에 대해 우리는 소금사회라고 하며 빛의 사회라고 부른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땅의 소금이 되라고 했다. 왜냐하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하신 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값어치 있고 보람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을 기꺼이 하고 싶어 한다. 고생도 감수하고 희생도 치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중 <죽음의 집의 기록>이란 책이 있다. 그 책의 핵심은 그가 20대에 사상문제로 투옥돼 옥고를 겪던 4년간의 고통스러운 생활상을 기록한 것이다. 그 내용 중 죄수들에게 가장 혹독한 고문은 물통 두 개를 놓고 이쪽 물을 저쪽으로 저쪽 물을 이쪽으로 계속 옮기게 하는 일이었다. 또 다른 일은 절구에 모래를 가득 넣고 하루 종일 찧는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이 쉬운 일이 왜 그토록 힘든 일이었을까? 그 일은 무미건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미건조한 일을 계속 시키면 죄수들은 그 일을 하다가 자살하거나 미쳐버렸다고 한다. 인간은 무의미한 일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누구나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금과 빛의 사명은 가장 복되고 아름답고 보람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겉이 화려하고 풍요로운 세상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다. 공공기관 채용비리, 뇌물수수, 블랙리스트,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민간인 사찰, 근친 살해, 각종 뇌물 등의 부패 추문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부패한 냄새가 진동하고 악취가 코를 찌른다. 세상이 부패하고 썩어서 절망적인 현장이 여기저기서 목격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사회에 빛이 되고 소금이 돼야 한다.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잘하면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역할을 잘 못하면 우리도 같이 썩어 문드러질 수밖에 없다. 권력이 부패하고 사회가 부정으로 가득차면 우리 모두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하면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막을 수 있다. 음식의 부패를 막으려면 음식 속에서 소금이 녹아야 하듯이 우리의 바른 생각과 올바른 의식이 사회 속에 녹아 스며들어야 세상의 부패를 막을 수 있다. 오늘날 인류사회에 가장 시급하게 필요로 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인간 소금이요, 민족의 소금이다. 그렇다면 인간 소금이란 어떤 소금인가? 부끄러움을 알고 염치를 알고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다. 성실하고 양심이 바르며 책임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더 밝아지고 더 빨리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2019-01-27

대책없는 한국교회 ‘한국교회, 대책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한국교회는 진정 100년이 멀다면 향후 50년, 10년의 청사진을 가지고 전략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를 실천할 인재가 있기는 한 것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단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지속 가능한가? 한국교회는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과 레퍼토리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전략적 이어야 한다. 교회가 더 이상 머뭇머뭇하기엔 시간이 없다. 한국교회 싱크탱크가 필요한 이유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2018년 한국의 종교 현황’을 지난 해 연말 발표했는데 발간 자료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문체부는 2015년 통계청 기준 내국인의 종교 인구가 43.9%(2,155만3,674명)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중 개신교가 374개 단체 967만5,761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는 불교가 482개 단체 761만9,332명, 천주교가 1개 단체 389만311명으로 뒤를 이었다. 자치단체별로는 경기도와 서울시가 단연 종교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서울시, 인천시, 광주시, 대전시, 세종시, 경기도, 강원도, 충남, 전북, 전남에서 개신교 인구가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불교는 부산시와 대구시, 울산시, 충북, 경북, 경남에서 가장 많았고, 천주교는 인천시에서만 2위에 올랐을 뿐 모두 3위권에 머물렀다. 통계가 말해주는 제 종교의 약화 1985년부터 한국의 종교 인구는 꾸준히 증가해왔으나 2015년에 이르러 다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1,720만명에서 1995년 2,259만명, 2005년 2,497만명으로 증가해왔으나 2015년에는 2,155만명으로 줄었다. 종교별로 살펴보면 개신교는 1985년 648만명, 1995년 876만명, 2005년 861만명, 2015년 967만명으로 한 때의 출렁임도 있었지만 다시 반등하여 꾸준히 증가세로 돌아선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1985년 805만명, 1995년 1,032만명, 2005년 1,072만명에서 2015년 761만명으로 크게 감소했고, 천주교도 1985년 186만명, 1995년 295만명, 2005년 514만명에서 2015년 389만명으로 떨어졌다. 이래서인지 각 종단마다 비상이 걸린 것 같다. 어찌보면 한국사회는 오랜 시간 종교 간의 평화적 공존을 유지해 왔으며, 격한 이념적 갈등 속에서도 종교의 자유를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법체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국가인권위가 미션스쿨의 신앙교육을 공격해온 종자연에 용역을 맡기고 지원하면서 종교간의 갈등을 유발시키고 기독교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종교편향의 행보를 해왔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개신교의 역할 가능성 이미 개신교는 국민들 가운데 19.73%를 점유했고, 종교인구 내에서는 44.8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불교(15.53%/35.35%)와 천주교(7.93%/18.05%)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종교 규모 1위를 차지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견인하는 ‘주류종교’라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만큼 국민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기울였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문체부의 발표에서 정작 문제는 종교인구 전체가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40~50대 중장년층에 비해, 어린 나이로 갈수록 점차 종교인구가 감소가 심각하다는 점이다. 개신교에서 가장 많은 수치를 기록한 ‘40~44세’ 구간 인구가 82만7,744명(불교 59만5,004명, 천주교 30만6,325)인데 반해, ‘5~9세’ 구간은 51만1,294명(불교15만7,285명, 천주교14만4,180명)에 불과했다. 이는 저출산 사회문제와 결부되어 있기도 하지만 갈수록 위기에 처하고 있는 다음세대의 감소에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며 이 현실은 앞으로도 언제든 반토막 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고령화를 대비하는 한국교회되어야 교회가 고령화로 가고 있다.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과 전략은 이제 필수가 아니라 전쟁과도 같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포기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영아부가 없는 교회가 78.5%,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가 40%를 넘고, 그나마 있는 교회들도 겨우 유지하거나 몇 교회들이 모여 연합 교회학교를 운영해야만 할 정도로 인원이 줄어든 상태. 이런 교회학교를 위한 다음세대 사역은 도전적이고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여야 할 것 같다. 다시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자. 10년 아니 100년을 바라보면서. 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정용구 선교사2019-01-21

2019년이 시작됐다. 새해를 맞이하는 많은 이들에게 1월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결단하거나 다짐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선교사에게 1월은 어떤 시간일까? 간혹 선교특강에서 회중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다. “선교사들에게 제일 무서운 달(月)은 언제일까요?” 생각에 잠긴 회중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다. “10월이요” 그 이유를 묻자 ‘교회 정책 당회가 있는 달로 선교사의 후원 계속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떤 이는 “12월”이라고 했다. ‘선교후원금이 12월로 끝나고 더 이상 오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선교사로서의 삶을 겪어보니 10월이 되면 교회들이 정책당회에서 계속 선교후원을 할지 마음이 조려지게 되고, 12월이 되면 ‘내년에도 계속 선교후원을 이어줄까?’라는 염려도 생긴다. ‘성탄과 새해에 후원자들에게 하는 간단한 인사라도 혹시나 부담이 될지, 괜히 잘못 인사를 해서 마음이 틀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서두에 제기한 질문에 대해 선교지를 겪어본 자로서 대답한다면 ‘1월이 제일 힘들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개 교회나 성도들이 12월까지는 작정한 선교후원금을 잘 보낸다. 하지만 아쉽게도 경제적 어려움이나 여러 사정이 생기면 1월부터 중단을 하게 된다. 정기적으로 선교후원금을 입금하던 성도와 교회들로부터 소식이 끊어지고, 성탄인사나 새해 인사를 해도 답이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안부를 물어도 침묵이 지속된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면 사정이 어려워져서 더 이상 선교후원을 하기 어렵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선교후원’이 중단되면 아쉽게도 ‘관계’도 같이 중단된다. 선교사의 마음은 기도라도 계속 이어가고 싶지만, 선교후원을 하다가 중단하면, 마음이 힘들어지는지, ‘관계’까지도 같이 멈춰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아픔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1월에 많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교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뤄 가시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적인 염려와 계산으로 밤잠을 못 이루며 걱정을 하지만 거기에서는 답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선교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할 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선교후원을 채워가고 계시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을 알기에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후원이 중단되고, 추방을 당하고, 비자가 거부되고, 병에 걸리고, 가족들과 자녀들이 어려움을 겪어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 선교지로 향한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선교지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1월이 선교사들에게 무서운 달(月)이 되기도 하지만, 귀한 결단으로 새롭게 선교후원을 시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으로 인해 용기를 내 그 땅을 지키려는 우리 선교사들에게 가장 힘이 되는 1월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선교사들이 수고하는 현장에 선교후원자로, 기도후원자로 함께 동참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간이다. 나에게 주어진 1월을 나만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달(月)이 아니라,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수고하는 선교사들을 위한 작은 사랑의 실천을 결단해 용기를 주고, 힘을 주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신동식 목사2019-01-13

기도에 대한 정의는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도에 대한 종교 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선한 것들을 간구하거나 혹은 이미 얻은 것에 대해 감사하기 위한 신앙적인 마음의 겸손한 요청이며 그리고 열정적인 표명이다” 불링거에 의하여 기도는 하나님께 어떤 것을 간구하는 것이고 또한 감사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없이는 기도는 불가능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기록된 멋진 기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나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신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고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신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기도합니다.[삼상 2;1-10]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확인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마16:16] 예수님은 이 고백을 들은 후에 비로소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할 수 없으면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삼위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할 때 우리의 기도는 살아있고 뜨겁고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그러한 기도는 믿음의 여정을 갈 때 가장 강력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을 걸어갈 때 동무 한 사람만 있어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어찌 무서울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항상 기도하되 낙망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서 실망하지 말고, 당장 응답이 없다고 지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가 이르면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구한 것은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매일 매일 교제하자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누구보다도 기뻐하십니다. 교제는 하나님에게는 기쁨이고 우리에게는 영광과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일상의 삶이 되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우선순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일상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바라볼 수 있고, 이웃의 짐을 서로 짊어 질 수 있고 나의 영혼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으며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혼돈된 세상에서 영혼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따라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의 통로인 말씀과 기도가 있습니다. 시대를 분별하여야 하는 이 때 더욱더 기도와 말씀묵상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정기 목사2019-01-10

미모의 아가씨가 할머니와 함께 옷감을 사러 시장에 갔다. 아가씨가 옷감을 고르더니 '아저씨 이 옷감 한마에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주인 아저씨가 웃으면서 한 마 정도는 이쁜 아가씨가 키스 한번 해주면 그냥 드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어진 대화에서는아가씨:어머 정말이세요?아저씨: 그럼요. 정말입니다.아가씨: 그럼 다섯 마 주세요.아저씨: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여기 있습니다. 그럼 이제 키스 다섯 번 해주셔야죠? 그러자 아가씨가 이렇게 말했다. '계산은 할머니가 하실 거예요’…계산 잘해야 한다. 장사를 잘하려면 계산을 잘해야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계산 잘해야 한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이 소개된다.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기적 이야기이다. 빈들에서 일어난 기적이었다. 그런데 기적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다. 빌립이라는 제자였다. 예수님이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이렇게 말씀하심은 빌립을 시험하신 것이었다. 그때 빌립은'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말한다. 빌립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가? 그는 무리들만 보았다. 어려움만 보았다. 문제만 보았다. 인간적으로 계산만 했다. 빌립처럼 계산만하면 항상‘부족하다’는 타령만 하게 될 것이다. 그때 빌립은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주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죽은자를 살리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능히 이 무리들을 먹일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명하소서. 저희가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신 대답이었다. 우리는 계산 잘해야 한다. 교회안에 빌립같은 사람이 많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인 기적과 축복에는 기적을 낳은 중요한 요소들이 있었다. 아이의 헌신이 있었다. 예수님의 감사가 있었다. 나눔이 있었다. 순종이 있었다. 마태복음 7장 1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사람은 열매를 보면 알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말씀하시며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며 의를 자랑할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므로 우리는 계산 잘 하며 살아야 한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 그 인생은 끝장나는 것이다. 우리는 그날에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인정받고 칭찬받도록 계산 잘하며 살아야 한다. 누가복음 14장은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할 때 '먼저 앉아 비용을 계산하고 망대를 세워야지 그렇지 않으면 기초만 쌓아놓고 이루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보는 사람마다 다 비웃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망대를 세우고자 할 때 제일 먼저 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 예배당 건축도 마찬가지이다. 제일 중요한 것이 설계이다. 설계 사무소 소장님이 나에게 처음 질문한 것이 목회 철학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설계하는 사람이 목회 철학은 왜 묻는지 처음에는 이상했다. 내가 무식했던 것이다. 담임목사의 목회 철학을 알아야 어떤 모양의 예배당을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지가 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계속 꿈꾸어 왔던 예배당은 건축 비용 많이 들이지 않으면서도, 예배당을 보면 한 번 들어와 보고 싶은 그런 예배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나는교회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밝은 모습이길 원했다. 그리고 대출에 대한 계획도 세웠다. 그래서 계획하고 계산한대로 건축비 조금들여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나는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건축함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설계이다. 설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설계도 없이 인생의 집을 건축한다. 그냥 대충대충 남 흉내내면서 깊은 생각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면 절대로 결과가 아름다울 수 없다. 망대를 세우면서 계산 잘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하여 지기를 구하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망대의 설계도도 예수님이 주시고, 또 그걸 세울 능력도 주실 터인데 무엇 때문에 먼저 앉아 계산을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다 이루었다'하셨으니 그분의 배에 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실수를 많이 하는 원인은 바로 이 비용을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계획을 바로 세우면 성공도 그만큼 보장된다는 뜻이다. 계획은 목적 달성을 위해 중요한 과정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계획을 세워 준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해도 차분히 대처할 수 있다.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계산을 잘해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 계산을 잘해야 한다. 빼기를 잘 해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들 날마다 빼버려야 한다. 미련없이 빼버려야 한다.더하기도 잘해야 한다. 믿음, 지식, 절제, 인내, 형제우애,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용서를 더해야 한다.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해야 한다. 곱하기도 잘해야 한다. 기도와 열심과 감사를 곱해야 한다. 나누기도 잘해야 한다. 선과 악을 나누고, 구별된 삶, 인정받는 삶, 복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독자들이 빼기를 잘해 성결한 삶을 살고, 더하기를 잘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곱하기를 잘해 복을 받고, 나누기를 잘해 영생을 얻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멋진 망대를 세우기 바란다.

정재영 교수2019-01-06

일상생활의 의미 새해가 밝았다. 해가 바뀌었지만 우리의 삶은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시작한다. 우리의 삶은 일상의 반복이다. 이렇듯 일상생활은 언뜻 보면 매우 단조롭고 반복되는 삶이고 큰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가까이서 매일 접촉하는 것은 신비롭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다. “자기 고향에서 위인은 없다”는 속담처럼, 위대한 사람은 언제나 멀리 있어야 빛이 나고 아우라를 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생활은 너무나 친숙한 것이어서 그다지 신비로울 것도 없고 범상하고 진부해서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나 체계는 사실은 이러한 일상의 삶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상성은 개인의 생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소집단은 물론이고 거대한 조직, 나아가 국가에서도 일상적 업무 수행은 매일같이 되풀이된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환자들을 다루는 응급실의 모습은 대개의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한 상황으로 비치지만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료진들에게는 이것이 그들의 일상이다. 바로 그러한 일상이 개인과 사회를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바탕이 된다. 따라서 일상생활을 어떻게 영위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사회 전체의 모습이 달라질 수도 있다. 또한 일상생활은 인간이 사회적 실재를 형성하기 위해 어떻게 창조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사회학에서는 구조와 행위 사이의 관계를 일종의 딜레마로 본다. 사회의 실재를 이루는 데에서 구조라는 거시적 관점과 행위라는 미시적 관점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조는 개인들을 강제하기 때문에 구조를 강조하게 되면 개개의 인간은 구조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구조는 결국 개인들의 사회 행위들의 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들이 얼마나 이러한 행위들을 창조적으로 해나가느냐에 따라 거대한 구조를 돌파하고 변혁시킬 수도 있다. 지난 2016년 촛불 집회를 통해 이루어낸 우리 사회의 커다란 변화가 그 대표적인 보기가 될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우리들의 일상 그러나 이러한 일상이 이제까지는 학문의 영역에서조차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기존 학문들의 연구는 주로 거대한 사회구조와 사회변동, 사회 제도와 같은 거시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다보니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소홀히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최근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일상은 새로운 조명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사조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넓은 의미에서는 서구의 새로운 예술 양식뿐만 아니라 이런 양식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 일반 및 사회적 실천에서의 변모된 다양한 양상을 포괄하는 일종의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 또는 시대정신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한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것이 일상에 대한 관심과 이어지는 부분이다. 근대의 유물론과 실증과학이 종래의 주술이나 미신들을 몰아내는 바탕이 된 것처럼 근래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들은 모더니즘의 과학주의가 현실을 포착하는 데 결정적인 한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강조하는 일상생활은 서구의 지성들이 한 결 같이 식상해하고 있고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고 통감하고 있는 ‘합리성’과 ‘경계’를 뛰어넘는 무수한 실천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이 한창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이 반종교적이고 특히 반기독교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진리나 보편적인 원칙을 주장하기보다는 진리를 상대화시키고 권위를 해체시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일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기독교에 반드시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기존의 기독교 교리와 신앙 안에 내재되어 있던 제국주의적 특성이나 강자 중심의 논리가 해체되고 보다 다양한 관점이 수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창한 거대담론뿐만 아니라 다양한 삶의 주체들의 소소한 목소리에 주목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동안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무시되어 온 우리들의 일상이 주목을 받고 그 중요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할 무대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개인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은 막혀 있고, 시민들의 자유로운 활동도 제약되고 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끊임없이 변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가 의존하고 있는 도덕 질서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면서 이러한 상황은 일상생활 속에서 의미의 부재 현상을 낳고 있다고 설파하였다. 공동체로서의 규범이 살아 있고 이웃을 배려하던 생활세계는 사회의 체계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당하고 조정되고 있다. 개인들의 공간인 생활세계가 사회 체계에 의해 지배되어 일상의 원만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되고 이것이 시민들의 자유로운 활동 공간인 시민사회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위기는 일상의 정치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은 시민단체나 정당에 속하지 않고도 개인이 생활 속 작은 부분부터 바꿔나가는 게 생활 정치에 대한 참여가 필요한 시대이다. 최근에 벌어진 유치원과 어린이집 사태는 도덕 질서가 파괴됨으로써 우리의 일상을 깨뜨려버린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데에는 여러 가지 거시적 차원의 문제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잃어버린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 시대에는 우리들의 일상을 스스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소확행’(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 또는 그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식의 정치 참여가 필요하다. 이렇게 일상생활은 사회 각 분야의 실천 활동에서도 어김없이 고려되는 새로운 시각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현실화하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상생활은 더 이상 진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생활의 출발점이 된다.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데에서 세속에서의 삶을 단절하거나 사후에 들어가는 천국만 소망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바로 지금 여기’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하나님나라가 임할 곳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처럼 일상생활은 오늘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바탕이다. 새해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일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신앙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관심을 가져보길 소망한다.

여주봉 목사2019-01-02

우리 신앙은 당연히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위에 토대한 삶, 즉 말씀에 의한 삶이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의 토대 위에서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 오직 성령에 의한 삶을 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은 그 삶을 통해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지난달에 그림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삶을 살 때 우리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 하반부가 말하는 신약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유업 중 하나이다. 먼저 우리가 십자가 복음의 삶을 살 때, 우리 자신과 교회의 삶 속에 전반적인 면에서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에 대해서는 과거에 살펴본 적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이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신분을 주셨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출 19:6 등). 하나님은 신약의 교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셨다(벧전 2:9). 그 외에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고, 교회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이 성전으로 삼으셨다. 이 하나하나의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으로 고귀한 지위와 놀라운 권세와 크신 은혜와 위대한 소명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신분의 저하가 일어난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신분을 박탈당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신분상으로 그들이 그 신분을 유지하고 있을지 몰라도, 그 신분이 의미하는 바가 그들의 삶 속에서 철저하게 걷힌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교리와 이론만 남아 있고, 그 삶의 실재는 그들의 삶에서 철저하게 걷힌다. 한 예로 예레미야 애가에서 그것을 잘 볼 수 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애 1:1). 이 구절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때의 이스라엘의 신분을 공주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방나라로 포로로 잡혀간 그 당시의 신분을 노예로 표현하고 있다. 얼마나 심각한 신분의 변화인가. 예레미야 애가 2:1도 마찬가지다.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구절도 하나님과 동행했던 때의 이스라엘의 신분을 “아름다움” “하늘”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땅”으로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다. 예레미야 애가 2:15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때의 이스라엘의 신분을 “온전한 영광”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고 표현하면서, 그것이 이제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의 경우에도 그들은 원래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였는데(말 2:7).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자(말 1:6), 그들의 신분은 “모든 백성들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말 2:9). 당신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상황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일부에서는 “하나님의 종,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인 목사를 “먹사”로, 하나님의 소중한 직분을 맡은 집사를 “잡사”로 조롱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혐오시설처럼 취급한다. 물론 그렇게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단 등 악의적인 세력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분이 저하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지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이 회복된다. 신분이 회복된다는 말은 새롭게 그 신분이 주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그 신분이 의미하는 바가 우리 삶 속에 실제적으로 회복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사야 62장을 다시 보라. 하나님은 그 당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버림받은 자” “황무지”라는 그들의 ‘이름’을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하나님의 손의 왕관” “헵시바” “쁄라”로 바꾸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결과로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서도 그 일을 하시기 원하신다고 믿는다. 이 얼마나 생각만 해도 감격적인 일인가.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리스도의 신부 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분은 참으로 고귀한 신분들이다. 그 하나하나의 신분이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크고 위대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놀라운 권세를 주셨고, 참으로 위대한 일로 우리를 부르셨다. 그런데 이 모든 신분들은 그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신분을 부여 받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알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단순히 우리가 그 사실들을 생각하면서 위로 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 모든 신분들은 그 신분이 의미하는 실제적인 삶과 권세와 능력과 은혜와 역사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이 회복된다는 말은 그 신분이 의미하는 모든 실제적인 역사가 우리 개인과 교회의 삶 속에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성윤 교수2018-12-30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그의 저서 ‘세계역사철학강의’에서 “이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그가 속한 시대정신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했다. 따라서 시대정신이란 ‘어떤 특정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거나 문화에 영향을 주는 지배적인 사상’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시장보다는 국가의 역할이 강조됐고, 턱없이 많은 국가의 혜택이 제시된 한 해였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은 돈쓰는 4가지 방식을 예로 들면서 큰 정부의 낭비를 지적했다. 한 마디로 내 돈을 나를 위해서 내게 쓰느냐? 남의 돈을 나를 위해서 쓰느냐? 내 돈을 남을 위해서 남에게 쓰느냐? 남의 돈을 남을 위해서 남에게 쓰느냐에 따라 돈의 효율과 생산성은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내 돈을 나를 위해서 쓴다면 가장 효율적이면서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다. 시장경제체제에서는 내 돈을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 미래에 더 많은 이익을 기대하기 때문에 소비라기보다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즉 한정된 비용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며 생산적일까에 대해 치밀하게 준비하며 사용한다. 집을 구입하려고 할 때를 예로 들면 집의 구조나 쓰임새를 살피는 것은 물론, ‘집에서 자녀가 다닐 학교는 인근에 있는가? 혹시 병이 났을 때 병원에는 쉽게 갈 수 있는가? 직장 출퇴근 대중교통의 접근은 용이한가? 주변에 공원은 있는가’ 등에서부터 ‘난방은 잘되고 있는가? 시공은 설계대로 제대로 했는가’ 등을 살피고 또 살핀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돈을 자신을 위해 가장 효율적이며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두 번째의 경우는 남의 돈을 나를 위해서 쓰는 경우이다. 이 경우 소비의 효율을 기대하기 보다는 최대만족에 초점이 맞춰진다. 회사비용으로 회식을 한다고 했을 때, 비용을 최대한 절약해 사용한 후 남는 돈을 회사에 반납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한도 범위 내에서 몽땅 사용한다. 남는 돈이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세 번째의 경우가 내 돈을 남을 위해서 쓰는 경우로 기부 행위나 선물을 주는 행위가 이에 해당된다. 소비의 만족도를 추구하기보다는 효율에 더 초점을 맞춘다. 자기 돈이기 때문에 가장 효율적으로 쓰이기를 바란다. 네 번째의 경우가 남의 돈을 남을 위해서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의 소비패턴은 효율을 기대하기 힘들다. 남의 돈이다 보니 열차 일반석을 이용할 사람이 특실을 선택한다. 자기 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스위트룸을 빌려서 잠을 자고 고급식당에서 밥을 먹게 된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내 돈이 아니고 국가 돈이다 보니 마구 쓴다.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공사를 가스관 묻는다고 한번 파고, 광케이블 묻는다고 또 파고, 수도관 묻는다고 또 파헤친다. 이뿐만 아니라 예산회계연도 독립의 원칙을 내세워 연말이 다가오면 공사와의 전쟁이 벌어진다. 자기 주머닛돈이 아니라 국민이 낸 세금이니 아까울리 없다. 그러다 보니 효율이 떨어지면서 정부가 비대해진다. 시장보다는 관치가 더 많아진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 주머닛돈이 아니라 국민이 낸 세금이니 아까울리 없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돈이 아니라고 세금으로 잔치를 하는 동안 나라의 재정은 날로 피폐해지고 있다. 그래서 나라 빚은 매년 늘어난다. 국민이 원한다는 명분을 등에 업고 국가의 재정을 왜곡시킨다. 그들이 위하는 국민 속에는 내가 들어있으며 내 돈으로 그들은 잔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보고 이의 잘못을 지적해야 나라가 제대로 굴러 갈 것이다.

이영훈 목사2018-12-24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는 말이 있다. 비가 오고 난 뒤에 죽순(竹筍)이 여기저기서 자라나는 모습에서 유래된 사자성어다. 죽순은 하루에 60㎝까지도 자란다고 하니 자라는 게 눈에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난 죽순은 세 달 만에 그 길이가 16m에서 25m까지 자란다. 어떤 대나무는 40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이렇게 빨리 자라나는 대나무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땅속에서 5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대나무가 땅에서 나와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땅속에서 수분과 양분을 뿌리와 지하경(뿌리줄기 마디)에 끊임없이 보내 사방으로 뻗어 나갔기 때문이다. 땅속에 있는 5년은 비약적인 성장을 위해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귀중한 시간이다. 우리 인생도 드러나지 않는 땅속의 시간이 있다. 우리의 삶에 무언가 이뤄지지 않아서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가 성장하기 위한 가장 소중한 시간임을 기억하자.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온다. 인생의 겨울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다. 시편 126편 5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기록돼 있듯이 모든 성장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봄을 맞이하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실하게 준비하는 겨울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해 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게 아니다. 홍해를 건너자 믿음의 훈련 학교인 광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리더였던 모세는 이러한 광야 학교에 미리 입학해서 40년간 양 떼를 돌보며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힘을 모두 벗어버리고 겸손과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됐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수 있었다. 믿는 자들의 삶에도 이런 광야가 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훈련을 통과해야 그 뿌리가 튼튼해져서 어떤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착한 이후에도 광야를 기억하기 위해 초막절을 지켰다.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회고하며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초막에서 일주일 동안 자녀들과 함께 지내며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추억했을 것이다. 그들이 가나안에서 정착하고 살아갈 수 있는 건 광야에서 익힌 믿음 덕분이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긴 했지만 장대한 가나안 일곱 족속들이 이미 그 땅을 차지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었던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사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에게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그 시간을 다 허비해버렸다. 광야에서 믿음으로 준비가 되지 않으면 가나안에 들어간다 해도 살 수 없다. 대나무가 5년 동안 땅속 깊이 뿌리내려야 땅 위에 거친 비바람을 이겨낼 수 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때에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곳에서 믿음의 훈련을 해야 한다. 광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주신 소중한 시간이다. 이제 2018년도 다 마무리돼 가는 시점이다. 이 겨울을 2018년의 끝이 아닌 2019년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뤄 드리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말씀과 기도에 깊이 뿌리내리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쌓아가자. 우리에게도 반드시 봄이 온다.

신동식 목사2018-12-13

최근에 1997년에 있었던 IMF 상황을 영화화한 <국가 부도의 날>을 관람했다. 영화는1997년도의 실상을 아주 담담하게 담았다.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위정자들의 무능력과 소신민들의 절망과 그리고 그 틈에서 부를 축적하는 이들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 국가 부도의 사태를 맞았지만 여전히 부를 축적하는 인간 군상들은 여전했다. 오직 국가만 믿고 따라갔던 순진한 백성들만 피해를 당했다. 영화의 백미는 국가의 속임수에 절대 속지 않는다는 이들의 몸부림이었다. 아무도 믿지 말고 오직 네 자신만 믿으라는 한 중소기업 사장은 외침과 한번 당하지 두 번 다시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 시대를 참으로 씁쓸하게 만들었다. 영화의 엔딩은 위기는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서 상황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의심하고 의심하라는 것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살아나는 길은 깨어서 의심하는 것이라는 말은 더더욱 슬프게 다가왔다. 신뢰할 수 없는 공동체는 어쩌면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1997년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영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 시대의 만연된 비정규직의 모습은 바로 IMF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IMF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오직 개인의 풍요와 만족만을 위해 사는 파편화된 개체만 존재하게 됐다. 서로를 의심하는 사회는 야만의 사회다. 거기에는 정글의 법칙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는 오래 가지 못한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잘못에 대해 권면도 못하는 사회가 돼 버렸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자기가 속한 진영에서 서로를 향해 저주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실제적 야만이다. 그러다보니 분노가 조절되지 않는 현상들은 자주 목격한다. 그나마 법에라도 정의를 기대했는데 이제 그 법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이렇게 되면 법보다 주먹이 빠르다는 무법의 세상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렇게 한 번 삐뚤어진 사회는 음주 운전자가 모는 차와 같다. 어디로 갈지 누구를 해할지 아무도 모른다. 참으로 끔찍한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가 너무나 소중하다. 교회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듣고 배우는 곳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성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명령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교회는 세상이 가야 하는 곳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교회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려주는 근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길을 잃어버리면 세상은 점점 더 험악한 사회로 바뀌게 된다. 가슴 아프지만 부조리한 사회는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선지자적 현실주의자로 기꺼이 이 세상의 부조리를 외쳐야 한다. 그리고 절망적 낙관주의자로 현실을 살아야 한다. 지금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땅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장소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이다. 교회는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가르쳐야 한다. 교회가 바로 세워지는 일에 모두가 한 마음이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와 직분자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풍성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지식적인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교회는 거짓 교회다. 그러한 교회는 개혁시키든지 떠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위해 사는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했다. 우리 시대는 더욱더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있게 묵상하고 알아야 할 시기다.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우리는 사회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다. 이 사회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다. 슬픈 사회를 회복시키는 일은 교회가 회개하고 깨어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 소망이 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할 일이다. 그러기에 교회가 욕먹고 있지만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고 세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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