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목사2017-09-26

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깨어있는 지식인이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에게서 꽃 망울이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반 성도였던 에라스무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무지와 부패와 탐욕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1509년 『우신예찬』이라는 책을 써서 당시의 교회와 사제들의 무지를 비판하였습니다. 이러한 에라스무스는 이미 1505년에 헬라어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존의 헬라어 성경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1516년에 헬라어와 라틴어와 함께 출판하였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죽기 한해 전인 1535년까지 계속하여 성경을 개정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성경번역은 영국의 윌리엄 틴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틴데일은 위클리리프의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롤라드파에 영향을 받아서 당시 로마 카톨릭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습니다. 옥스퍼드에서 공부를 마쳤던 틴데일은 그러다가 1516년에 캠브리지에 갑니다. 그리고 성경번역에 대한 강한 도전을 받습니다. 이렇게 캠브리지에서 에라스무스에게 도전을 받은 틴데일은 라틴어에서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던 위클리프의 방법이 아니라 직접 헬라어에서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틴데일 성경입니다. 그리고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더욱 힘을 얻어서 1526년에 영어 성경을 번역합니다. 그리고 구약을 번역하는 가운데 1535년에 네덜란드에서 잡혀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사실 위클리프와 에라스무스는 종교 개혁 전야의 뜨거운 존재들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성경이 일반 성도들의 손에 오게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 출판으로 인하여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1522년, 1534년]. 성경이 사람들의 손에 들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틴데일은 자신이 성경을 번역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서를 번역하게 된 동기는 매우 단순하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할 정도이다. 어두운 곳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넘어져 다칠까 봐 빛을 비추어 달라고 당연히 요청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 넘어짐이 영원한 심판을 초래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이 이토록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갖는 것에 시기심을 품는 사람은 얼마나 사악한가?” 성경을 알지 못하면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가장 무지한 일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제들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어지자 성도들이 각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자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교회에서 너무나 많이 실행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식인층에서 시작하여 일반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다시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롤라드 파 성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읽고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것을 멈추라고 교회에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몰살당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각성은 교회를 깨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두운 새벽을 깨울 한 사람을 준비합니다. 바로 독일의 수사 마틴 루터입니다. 1517년 마틴 루터의 반박문은 그 동안 각개 전투로 진행되었던 개혁의 물결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오게 됩니다. 이렇듯 종교개혁의 전야에는 이렇게 전운이 돌고 있었습니다. 위클리프, 후스, 롤라드파, 에라스무스, 틴데일 그리고 무수히 함께 하였던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두운 새벽을 살면서 동트는 그 시간을 위하여 인내하거나 생명을 내 놓았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개혁은 성경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이 사람을 깨우고 교회를 새롭게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통하여 성령이 역사합니다. 성경은 목사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신학자들의 놀이터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더구나 자국어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말로 주어진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중세 사제들과 같은 권위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모국어로 성경이 번역된 것은 교회를 위한 선물입니다. 성경은 읽고 듣기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있어도 읽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성도는 우매한 성도가 될 것이고, 교회는 타락하여 갈 것입니다. 교회 개혁은 성경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볼 수 있고, 해석할 수 있으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성경이 모국어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주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은 목사와 신학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온 성도에게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개혁은 말씀으로 깨어있는 성도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한 사람이 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방인성 목사2017-09-26

북한이 지난 9월 3일 6차 핵실험과 9월 15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번 미사일은 고도 약 770여㎞, 비행거리 약 3700여㎞로 미국령 괌을 통과하는 거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괌 주둔 미군의 방공 요격 망을 무력화 시켰다는 분석이 있다. 미국은 큰 상처를 입었고 한국은 양쪽에 끼어 힘들어 하고 있다. 북한은 안보리 제재로 경제적 압박을 받으면서도 축제 분위기다. 한국갤럽이 북한 6차 핵실험의 한반도 평화 위협 정도를 물은 결과 '76%가 위협적'이고 '20%는 위협적이지 않고 4%는 의견을 유보'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이 실제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해 물은 결과 '37%가 가능성 있다'고 답했고 '58%는 별로 가능성이 없고, 6%는 의견을 유보'했다. 여론조사는 핵이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는 어렵다는 오랜 분단과 국제정세를 통해 직감하고 있는 것 같다. 평화만큼 우리에게 절실하고 필요한 것은 없기에 누구나 원한다. 그러나 참 평화에 이르는 길은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본 훼퍼는 '안전하게 난 평화의 길은 없다'라며 험난하고 긴장이 있음을 말했다. 평화는 정치적 협상, 경제 지원, 문화 교류는 물론 종교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한반도 상황에서 휴전 상태 즉 전쟁억제만으로 평화가 유지 된다고 볼 수 없다. 이념대립과 사회 갖가지 갈등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분단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 한반도의 반 평화 세력은 폭력으로 위협하고 분단을 고착시켜 권력유지에 몰두하는 양쪽의 세력이다. 그러나 양비론으로 양쪽 다 비난만 하기에는 72년 분단의 세월이 너무 길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핵이 존재하는 불행한 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서로 극단으로 치닫는 어리석은 싸움으로 판단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으르렁 거리며 자존심을 건드리는 무분별한 말과 행동은 서로에게 재앙을 불러 올 수도 있다. 현실을 겸허히 직시하고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길로 가기 위해 조건 없는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대화의 길이 평화에 이르는 첫 발걸음이다. 미국에도 북과 대화 하도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 우리도 북과 조건 없는 대화를 하겠다는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나는 대화를 통한 평화의 힘이 남북을 하나로, 더 나아가 비핵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핵보다 무서운 것은 증오와 불신이다. 그러나 핵보다 강한 것은 평화의 힘이다. 이런 긴박함 속에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800만 달러의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결단과 통일부의 발표에 박수를 보낸다. 러시아를 방문한 문대통령은 나진-핫산 공단 건설을 남과 북, 러시아가 협력하기로 합의 했다는 것도 평화로 가는 길이며 꽉 막힌 경제를 여는 것이다. 이렇게 다각도로 평화를 이루는 길을 찾아야 남과 북이 대화하면서 함께 번영의 길로 갈 수 있다.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는 활발한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하고 각종 문화, 체육 교류를 위해 힘써야 한다. 정치권에만 맡기면 권력을 위해 서로의 체제만 고집하게 된다. 이제 양쪽 체제는 대안을 찾아야 하는 요구를 받고 있다. 핵으로 벼랑 끝 전술을 펴는 북은 체제보장도 시급하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 교류 없이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반증하고 있다. 남쪽도 신 자유경제체제의 폐단으로 심각한 양극화와 청년실업의 병을 앓고 있다. 더욱이 미국과 중국의 양대 강국의 패권을 위한 싸움에 휘둘리지 말고 제 3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지난 9년간 꽉 막힌 남북 관계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북의 방문과 지원을 통한 나의 경험은 무한한 잠재력이 남과 북에 있다는 것이다. 남과 북이 서로의 장점을 합쳐 새로운 경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평화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을 마련 할 수도 있다. 물론 70년이 넘는 분단을 뛰어 넘어 새로운 길로 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가능하고 해야만 하는 것은 이대로는 공멸만이 있기 때문이다. 틱낫한은 "폭력은 두려움과 절망, 외로움의 표현이다." "화가 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해야 한다."고 그의 저서 <평화는 어떻게 시작되는가>에서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로마의 힘과 부의 평화가 거짓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그의 삶이 참 평화임을 보여주셨다. 원수사랑은 우리의 현실을 초월하는 용기와 상상력이 필요하다. 핵 위기로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북한과 미국의 줄다리기의 위기는 곧 협상으로 갈 수도 있다. 평화의 길은 어딘가에는 반드시 열려있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2017)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오테레사 선교사2017-09-21

돌이켜보면 이 칼럼을 쓸 때마다 한반도의 정세는 늘 좋지 않다. 기분 좋은 내용으로 칼럼을 쓰고 싶건만 해마다 허락되지 않는다. 분단국가에서 너무 지나친 기대를 하는 걸까. 혹자는 햇볕정책의 결과가 북한의 핵무기 발전에 기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9년간의 압박정치가 이루어낸 결과는 어떠한가? 북한이 핵무기개발을 한지가 언제부터이며 그리고 지금까지 북한이 해오는 행태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국제관계와 한국의 정치를 보면 너무나 명확하지 않은가? 왜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모를까?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것인가? 북한의 정치적 생리현상이요 생존전략임은 나온 답 아니던가. 필자가 북한에서 가장 왕성한 10대 시절을 보냈던 80년대부터 90년 초까지 자주 들은 말이 있다. 북한 군사력에 투자하는 돈의 1%만 풀어도 북한주민들 모두가 쌀밥에 고기를 먹고 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졌다. "미국 놈들이랑 한번은 붙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 한번 붙어서 끝장을 볼 때까지 좀 어렵더라도 허리띠를 조이고 살아야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다가 탈북하기 이전 20대 초반의 90년 중반 이후는 좀 다른 뉘앙스의 수군거림들을 들었었다. "아이고! 죽든지 살든지 그냥 한번 확 붙어버리지. 이렇게 굶어 죽으나 전쟁이 나서 죽으나 매 한가지지. 언제까지 이렇게 참고 기다리라는 거냐?" 이 아우성의 본질을 아시겠는가? 이미 북한주민들도 북한군사력에 투자하는 돈의 액수를 가늠은 하지 못해도 어마어마한 재정이 투자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전쟁을 해서 결판을 보든지 아니면 그 돈을 좀 풀던지 하라는 것이다. 늘 필자는 사회문제를 바라보고 평가할 때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보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해왔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선'이고 비 그리스도인은 '악'라는 관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세계관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논점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부족해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분 기독교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태반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완전히 세속주의 관점에 꽉 잡혀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보다도 더 비상식적인 행동과 언어를 쏟아내는 것을 볼 때가 많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 세상에 속한 이들이 노리는 술수는 뻔하다. 분단고착화로 인해 이득을 얻는 이들이 있는 한 북한과의 문제, 한반도 통일과 국제정세에 대한 문제는 철저히 '영적인 문제'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 최순실 사건의 뿌리가 드러났다고 쾌재를 부릴 때가 아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수많은 악의 잔재들이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려고 발악하고 있다. 그래서 남북정권과 주변 국가들의 정권을 위해 목숨 걸고 기도하는 것이 절실하다. 하나님께 '전쟁 나지 않게 해주세요. 평화를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최선일까? 아니다. 이런 기도는 신을 믿지 않는 이들도 할 수 있다. 심지어 저런 기도를 하는 이들의 다수는 자신과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기도할 뿐이다. 적어도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안다면 분단국가에 사는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간주하고 애통함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 교회를 이루는 기독교인들이 '참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되어 언행일치의 삶을 살 때 교회가 교회다워진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나라는 자연스럽게 살아나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한반도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기 때문이며 회개를 까먹은 화인 맞은 양심, 애통함을 잃어버린 무딘 심장과 영혼 없는 신앙놀이 때문임을 통절히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은 정신 차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3)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2017)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김성윤 교수2017-09-19

제4차 산업혁명은 지능정보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제3차 산업혁명 시대가 IT를 접목한 공장 자동화에 의한 지식정보사회였다면, 제4차 산업혁명은 IT 기술의 고도화로 인공(AI) 지능정보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사회가 제4차 산업혁명으로 전환한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설렘을 주고 있는 것은, 향후 15년 이내에 기존 직업의 60%가 사라지고, 10년 후의 직업은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데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의 진행은 신에 의하여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예측과 추론의 사고 영역까지 로봇과 인공지능 기술이 대체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진행된 사회 변화는 인간에 의해 주도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 또한 인간에 의한 물질세계에 대한 도전이자 기회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인공지능에 의한 로봇사회에서 경쟁력을 가지게 될 계층은 소수가 될 것이란 점이다. 코딩교육에 의한 로봇을 이용할 수 있는 소수에 의한 부의 축적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화될 것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하나의 결론은 제4차 산업혁명이 진행돼도, 기존의 1, 2, 3차 산업혁명 때처럼 누구에게도 어느 나라에게도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과 전략적으로 선택한 나라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국가 차원의 대응 전략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하며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체제 혁신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제4차 혁명시대는 이것저것 조금씩 잘하는 제너럴리스트가 아니라 자기가 잘하는 한 가지 전문분야에 충분한 소양을 갖추고 다양한 지식을 두루 겸비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과거는 지식이나 기술의 소유 유무로 인재 여부를 판단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창조적 사고력을 중시한 멀티 플레이어를 인재로 여기고 있다. 제4차 산업중심의 미래사회에는 많은 분야를 섭렵한 통섭형 사고력을 가진 인재를 중요시할 것이다. 다보스포럼보고서에서 제시된 제4차 산업혁명과 교육개혁은 크게 3분야로 압축할 수 있다. 그 중 첫째는 교육체계의 혁신을 들 수 있다. 20세기 교육제도의 유산인 문과-이과 분리교육을 중단해야 한다. 요컨대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융합 교육이 제도화돼야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논한 바 있듯이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비빔밥형 인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평생교육의 장려로 바꾸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새로운 기술을 지속해서 습득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지식의 반감기가 너무나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기업간 협조체제 구축이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복잡한 환경에서 기업은 경쟁보다 공생하는 전략이 생존에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제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파괴적 혁신(Disruption)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클라우드 슈밥은 <제4차 산업혁명>이란 저서에서 우리 정신과 마음, 영혼을 함께 모아 지혜를 발휘해야만 우리에게 닥칠 문제들을 의미 있게 다룰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 효과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맥락 관련 지능(Contextual Intelligence),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 영감관련지능(Inspired Intelligence), 물리적 지능(Physical Intelligence)이란 네 가지 지능을 키우고 적용하여, 파괴적 혁신이 가진 잠재성을 잘 파악하고 끌어내 활용해야 한다. 실제로 세계경제포럼에서 제시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사물인터넷(IoT)과 로봇 그리고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의 기술이다. 이들 기술이 나노기술(NT)과 바이오기술(BT) 그리고 정보기술(IT과 인지과학(CS)의 융합 기술로 발전하고 있다. 이들 기술의 종합으로 지능형 사이버 물리 시스템(Cyber Physical System)이 생산을 주도하는 인더스트리 4.0으로 생산 공장이 진화했다. 이러한 진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형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교육과정엔 모든 해법이 있다. 다만 어떤 교육으로 진화하는 사회현실에 적응하느냐만 문제가 될 뿐이다.

신동식 목사2017-09-15

종교개혁은 역사의 판도를 바꾼 사건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흘러왔던 역사에서 생각하게 하는 역사로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또 한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종교개혁 즉 교회 개혁은 단지 교회의 탐욕과 성직자의 타락과 무지로만 넘길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존재합니다. 바로 깨어나는 성도들의 자성입니다. 중세 천 년이라는 기간 동안 성도들은 순진한 양처럼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교회의 성경 독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와 사제들의 가르침에 맹목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게 하였습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주체적이고 신앙고백적인 믿음이 아니라 예속적인 신앙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신앙은 성경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사도들을 성경을 가르쳤고, 회람하였으며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였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교부들의 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405년 히에로니무스(제롬)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에서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이 라틴어 불가타역입니다. 이 성경은 서방교회의 표준 성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라틴어로 반역된 이후에 더 이상 성경은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라틴어를 알아야만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라틴어는 교육 받은 이들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틴어를 안다고 해서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사제들만이 읽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물론 사제 가운데 라틴어를 모르면 성경을 읽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을 읽지 못하니 사제의 말이 곧 성경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사제가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전하면 문제가 크게 줄어들겠지만 사제가 무지하거나 타락하면 성도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의 부패와 함께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예비합니다. 그는 성경은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옥스퍼드의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입니다. 위클리프는 1378년 교황제의 대 분열이 일어난 것을 보고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서>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의 권위가 최상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많은 권위들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았고, 모든 권위들보다도 가장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어거스틴의 증거도, 제롬도, 그 어느 성인들보다도 성경에 의존하지 않고는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처럼 영국 사람들도 라틴어를 읽을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위클리프는 모든 사람들이 영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 교회의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영어 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때가 1382년입니다. 결국 위클리프는 이 일로 인하여 죽은 지 21년 후인 1415년 콘스탄츠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1428년에는 부관참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뼈는 스위프트 강에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각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롤라드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중언부언하는 자들”이라는 네델란드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이들은 영어로 된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의 영향은 스코틀랜드에 영향을 미쳤고 그 가운데 존 낙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으로 건너가 보헤미안 사람들 즉 체코의 얀 후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위클리프의 책을 읽었던 후스는 이단자로 사형 당하였던 위클리프를 “복음적 박사”라고 언급했다는 의미로 기소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관행대로 설교문은 라틴어로 썼지만 설교는 체코어로 전파했습니다. 이는 바로 위클리프의 영향이었습니다. 결국 얀 후스는 이러한 개혁운동으로 말미암아 1415년 콘스탄츠 회의에서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의 전야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운동이 있었으며 그 근저에는 성경번역과 함께 깨어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다음편에 계속]

이영훈 목사2017-09-10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이 오래 전부터 자신이 가진 것을 무기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차별해 온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오늘날 법적으로는 민주화가 뿌리 내리고 법 앞에서의 평등이 실현되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도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는 알게 모르게 사람 간의 차별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생각하기보다는 권력, 재력, 지식, 출신 배경 등으로 신분을 나눠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고 남을 차별하는 경향이 인간과 사회의 뿌리깊은 속성으로 남아있다. 한 가지 우려되는 일은 이러한 일들이 세상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 강자가 약자를 비인격적으로 대우해 문제가 된 사건이 보도됐는데, 그 사건의 가해자가 기독교인으로 밝혀져 교회 전체가 세상의 공격을 받는 안타까운 일들도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 다른 사람과 차별을 두고 만족을 얻으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까지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속해있을 때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더 이상 세상의 헛된 만족을 좇으며 살 필요가 없게 된다. 또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깨달을 때 주변의 이웃들을 동등한 형제자매로 인식하게 되고 차별 없이 하나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앞장서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 위에 오셨다. 그리고 부유하고 권력 있는 가문이 아니라 내세울 것 없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유대 지도자들의 멸시와 천대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멸시와 천대에 굴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셨다. 이 사랑은 초대교회에 전해져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합을 이끌어내었고, 기독교의 핵심 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또한 초대교회가 사랑으로 하나 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 모든 사람과 차별 없이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인이 먼저 겸손하게 섬김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차별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는 일은 누구에게나 불쾌한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직접 낮은 자리에서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겸손하게 섬기기 시작하면 섬김을 받은 사람은 똑같이 다른 누군가를 섬기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섬김의 물결이 우리 사회 전반으로 펴져나가면 누가 어느 곳에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차별 없이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차별 없이 하나 되어 주님을 예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차별하는 모습이 있었다면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교회가 먼저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며 하나 됨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복음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파하여 온 세상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역사가 속히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정기 목사2017-09-08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 한 공원에 앉아 있었다. 공원 관리인은 그가 노숙자인줄 알고 '당신 누구요?'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때 쇼펜하우어가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제발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좋겠소.'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시각장애인이 등불을 들고 밤길을 걸어가다가 어떤 사람과 쾅 하고 부딪힌다. 시각장애인이 화를 내며 말한다. '당신은 이 등불이 보이지도 않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그러자 길 가던 자가 말한다. '나는 바로 그 질문에 답을 찾고 있는 사람이오' 모든 철학과 모든 종교의 출발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인생의 목적을 알 수 있다. 목적을 알아야 고난도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공부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이 생기면 공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공부하기 싫은 마음도 물리치고, 놀고 싶은 유혹도 이길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목적이 생겼기 때문이다. 목적을 다른 말로 하면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가수, 유명한 배우가 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최고 인기의 자리에 오르는 연예인들이 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자살로 인생을 끝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 뭐가 아쉬워서 자살하느냐고 말한다. 세상의 목적은 다 그렇다. 그 목적을 향해 달려갈 때는 힘든 줄도 모른다. 옆도 보지 않고 뒤도 보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가서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 기쁨과 감격이 오래 가지 않는다. 허무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을 얻으려고 내 인생을 다 바쳤단 말인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삶의 목표와 방향이 분명할 수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면 죽음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답을 하지 못한다. '나' 라는 것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 박사라도, 생물학 박사라도,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한 사람이라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답이 없다. 그런데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게 내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내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사후에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최고의 존재이다. 마태복음 5장 13~14절을 보면 나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요한복음 15장 15절을 보면 나는 그리스도의 친구이다. 로마서 6장 22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 로마서 8장 14절과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은 나의 영적 아버지이다. 로마서 8장 17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 받을 자이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면 나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면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고린도후서 5장 20절을 보면 나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을 보면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5절을 보면 나는 빛의 아들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면 나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낫 놓고 기역을 모르고, 지게 놓고 A를 모르는 할머니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온 우주 만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을 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로마서 11장 36절은 이렇게 선포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유대인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가 요한에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눅3:15) 그래서 세례 요한이 정말 그리스도인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요한이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먼저 내가 어떤 존재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엘리야냐 선지자냐 하고 묻자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라고 말한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에게도 분명히 말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세례 요한은 자기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았다.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마11:11) '네가 누구냐?' 이 질문에 세례 요한이 확실하게 대답한 것처럼 우리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김유준 목사2017-09-07

최근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인해 남북관계는 물론 북일, 북미 관계에 전운이 감도는 심각한 상황이다. 미국은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 당장이라도 북한을 초토화시킬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오고 있기에 동북아의 모든 국가들은 초긴장상태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계속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고, 이로 인해 동북아의 핵 확산방지를 위한 정책적 기조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핵우산 정책에 대한 전면 수정까지 요구되고 있다. 지난 10년간 금강산과 개성공단 사업을 중단하며 대북 강경정책을 펼쳤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동북아의 긴장과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으로 전쟁의 위협만 강화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는 무엇보다도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면서도 중국과 러시아와의 유연성 있는 외교력으로 대북 정책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에 정부는 동족상잔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며 어떻게든 전쟁은 재발되지 말아야 하기에, 대화로 그 해결점을 찾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여당은 북미에 특사를 동시에 파견해 대화채널을 마련하며 끊어진 남북 대화의 채널을 가동시키기 위한 전 방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했다. 역사적 위기에 대한 적극적 응전은 오히려 남북한의 새로운 역사를 여는 기회가 될 수 있기에, 동북아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외교의 틀을 마련하며 주도적으로 협상을 이끌어가야 한다. 이와 더불어 동북아의 이해 당사국과 무관하게 중립적인 제3국의 중재를 통한 평화의 길도 열어두어 다각적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렘32:2), 유다의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모든 백성에게 자유를 선포했다(렘34:8). 안식년의 부채탕감과 노예해방을 실천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지배층은 그들을 다시 노예로 삼았다(렘34:10~11). 적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는 노예를 해방하여 군사력을 증대했지만, 포위한 군대가 떠나가자 결국 그들을 다시 노예로 삼은 것이다. 토지권리 회복이 없으면 결국엔 다시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1866년 미국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를 해방시켜 주었지만 그들이 경작할 땅이 없었기에 결국에는 다시 노예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쟁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노예해방이라는 정치적 신분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지만, 토지에 대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음으로 실질적 경제적 자유는 획득하지 못하여 오히려 노예보다 더 비참한 삶으로 전락하고만 것이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토지가 없으면 자유도 없다고 했다. 최근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가계부채와 개인채무 문제, 치솟는 전월세 가격으로 인한 세입자들의 고통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 아예 그들을 자살로 내모는 시한폭탄처럼 위협하고 있다. 최근 여당에서 지대개혁을 통한 양극화 해소와 불평등 사회 개혁을 제시했는데, 부패척결을 위한 첩경이다. 이를 위해 다주택 소유자에 대한 보유세를 비롯하여 대기업과 소수 특권층의 막대한 토지불로소득에 대한 조세를 강화하여 이를 국가 재정으로 확보하여, 토지배당금과 같은 기본소득을 전 국민에게 지급함으로 누구나 최저생계를 보장해주는 분배정의가 병행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 즉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는 엄청난 토지불로소득에 대한 분배정의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양극화 해소와 불평등 사회를 바로 잡는 정책은 공약(空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위기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탄식과 절규에 귀를 기울이며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공의 실천은 희년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얽매인 모든 억압과 결박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빚에 허덕이며 약탈적 금융제도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부채탕감의 복음이 성취되도록 개혁하는 것이다. 특히 사회 양극화의 주범인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와 같은 토지불로소득에 대한 환원을 제도화하며, 토지투기를 통한 불로소득의 살인적 죄악을 더 이상 범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개혁이 개인적 차원만이 아닌 사회 구조와 제도적 차원까지 실천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물론 동북아의 새로운 평화질서를 구축하게 될 것이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사32:17)이기 때문이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2017)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김은호 목사2017-09-06

정탐꾼들의 보고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에 앞서 12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어 그 땅을 정탐하도록 하였습니다.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들은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앞에서 보고를 하기 시작합니다. 정탐꾼들은 가장 먼저 그 땅이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자신들이 가나안 땅에서 가지고 온 과일을 보여 주었습니다.(민수기 13장 27절)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28절) 그 땅은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정탐꾼들의 평가와 반응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인 갈렙은 웅성거리는 백성들을 조용하게 한 다음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30절)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와 함께 올라갔던 10명의 정탐꾼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31절) 라고 말했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은 40일 동안 똑같은 사람을 보고 똑같은 지역을 정탐하고 돌아왔는데 그 평가와 반응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이기리라”고 말하는데 열 사람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14:9)고 하는데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31절)고 말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민수기 14장 9절)고 말하는데 열 명의 정탐꾼들은 “우리는 그들 보기에 메뚜기와 같다”(33절)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정탐꾼들의 평가와 반응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정탐꾼들의 보고와 반응이 주는 교훈 첫째, 실패가 당연하다는 패배의식을 버리라 여호수아와 갈렙 두 정탐꾼이 백성들 앞에서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하자 그와 함께 올라갔던 다른 10명의 정탐꾼들은 “우리는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31절)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10명의 정탐꾼들은 이미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도전도 해 보지 않고, 한 번도 싸워보지도 않고 우리는 약하고 저들은 강하기 때문에 패배할 것이라고 미리 단정하였습니다.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열 명의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의 실패를 자신의 약함을 자신의 아픔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운명론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훗날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다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는 당연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렇지 않는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실패와 가난과 약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내일을 향하여 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형편과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패배의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연하다는 패배의식을 버려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하다는 패배의식을 버려야 당신의 인생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둘째, 메뚜기와 같다는 열등감을 버리라 10명의 정탐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신장이 너무 장대한 자들이기에 그들 보기에 “우리는 메뚜기와 같을 것이다.”(33절) 라고 말하였습니다. 실제로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아낙 자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나안의 왕들과 그 백성들이 도리어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수2:11,5:1)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자신들 스스로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메뚜기와 같다는 말은 메뚜기처럼 작고 연약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시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지독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면 당신은 메뚜기가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보배롭고 존귀한 자입니다. 당신은 강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과 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크게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문제는 커 보이고 나는 작아 보이는 메뚜기 자화상을 버리십시오. 왜냐하면 메뚜기 자화상을 가진 사람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실보다 관점이 더 중요하다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고한 내용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보고한 그대로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고 그 땅의 거주민들은 크고 강한 자들이었고 그 성읍은 견고하였습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았습니다. 현실의 눈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눈, 현실의 눈으로 바라보니 그들이 너무 커 보였고 그 성읍이 너무 견고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민13:31)고 “우리는 그들 보기에 메뚜기와 같다”(민13:33)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눈, 믿음의 눈으로 그 땅과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13:30)고 외쳤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민14:9)고 외쳤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사실을 사실대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원치 않는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실패할 수도 있고, 시험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 불의의 질병과 사고로 장애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시험에 넘어졌습니까? 엄연한 사실입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셨습니까? 배신을 당하셨습니까? 사실입니다.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을 왜곡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실 그 자체보다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아니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중요합니다. 나의 실패를 나의 장애를 나의 아픔과 상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정재영 교수2017-09-01

청년들의 종교 의식 작년 말에 발표된 인구센서스 종교 부문에서 무종교인의 인구가 크게 늘어났는데, 종교 없는 인구는 특히 20대에서 64.9%로 가장 높았다. 그리고 10대(62%)와 30대(61.6%) 등 젊은 층 모두에서 평균(56.1%)을 웃돌았다. 20대에서 무종교인이 가장 많다는 것은 취업이 어렵고 삶의 여건이 팍팍한 이들에게 종교가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들의 종교나 교회에 대한 의식을 파악할 수 있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에서 조사한 “청년의 교회/종교에 대한 의식 조사”는 기존에 청년들의 종교 의식 조사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좋은 자료가 된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는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아 종교개혁 정신이 다양한 영역에서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취지로 조사했다고 한다. 다만 표집에서는 유의 표본 추출 방법을 써서 객관성 면에서 문제가 있어 보이나 이것은 현실적인 한계이므로 논외로 하고 이 자료에 나타난 결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종교를 선택한 이유로 54.5%가 구원을 위해서라고 응답한 것은 종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20대의 응답에서 “부모님의 강요”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온 것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다. 필자가 연구한 가나안 성도 곧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나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의 강요 때문에 신앙생활을 힘들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종교에 대해서 “개신교”라는 응답은 개신교인 비율과 거의 비슷하나 가톨릭(15.3%)과 불교(13.8%)라는 응답은 천주교인이나 불교인 비율보다 훨씬 높게 나와서 비교가 된다. 개신교 외의 응답자들은 개신교보다는 상대적으로 가톨릭이나 불교를 선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선호하는 이유로는 “말씀(성경, 불경 등)이 좋아서”(30.5%)와 “교리에 동의하므로”(24.9%)가 많이 나온 것은 일반의 예상과 달리 젊은이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개 젊은이들이 감성적인 것을 중시하고 분위기에 좌우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성적인 부분을 중시한다는 경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현재 교회 출석 여부에 대해서 전체의 12.0%가 “기독교인이지만 출석하지 않는다.”고 응답하였는데 이것은 기독교인 중에 17.8%에 해당하므로 매우 높은 비율이고 최근의 다른 조사 결과와도 부합하는 결과이다. 현재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유로는 “얽매이기 싫어서”(29.9%)가 가장 많이 나와서 교회에서의 속박이나 억압적인 분위기에 대한 반감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시간이 없어서”(27.4%)가 비슷한 비율로 나온 것은 전체 연령에 대해서 조사한 필자의 기존 연구와는 다른 것인데 필자의 조사에서 “시간이 없어서”라는 응답은 6.8%에 불과하였다. 이번 조사에서 “시간이 없어서”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온 것은 청년들이 취업 준비나 사회 초년생으로서 시간에 쫓기는 상황임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학생들 중에서 “시간이 없어서”라는 응답이 많이 나왔다. 한편, 연령이 높은 층에서 “목회자에 대한 불신”이나 “얽매이기 싫어서”가 높게 나온 것은 나이가 들수록 신앙 외적인 요인보다 신앙 요인으로 인해 교회에 출석하지 않게 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이 다시 교회를 다닌다면 역시 “작지만 건강한 교회”(43.0%)에 나가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다른 응답들을 압도하였다. 이것은 청년들이 한국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청년들은 많은 대형교회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느끼고 대형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인격적으로 대해지지 않고 하나의 부속품처럼 여겨지는 현실에 대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실제로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큰 차이는 아니지만 “교회 성장주의(교회의 대형화)”(16.3%)를 가장 높게 꼽았다. 청년들은 ‘교회 일꾼’일 뿐인가? 현재 교회에서 하고 있는 활동은 주일 예배만 참석하는 16.8%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청년들이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활동, 찬양팀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청년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교회들마다 청년들이 많은 봉사 활동으로 지쳐가고 힘들어한다는 점에서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기독교 전문 리서치 기관인 바나 그룹의 대표로 미국의 청년들이 왜 교회를 떠나고 있는지에 대해 조사 연구한 데이비드 키네먼이 기성세대가 이제는 대량생산 하듯이 청년 신앙인들을 양산하려고 하기를 그만 두고, 이들에 대해 일대일의 관계를 갖고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키네먼은 십대에 교회에 간 미국 젊은이들의 60 퍼센트 가까이가 고등학교 졸업 후에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신앙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 교회에서 무시당하고 예술이나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기독교인들의 소명이 될 수 없다며 사기를 꺾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젊은이들은 자신의 부모나 다른 나이 든 어른들로부터 고립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기독 청년들은 교회가 자신들의 관심과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고 실제적인 지침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키네먼은 교회를 떠난 많은 미국 청년들이 여전히 신앙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젊은이들이 스스로 질문하고 자신의 생각과 의심까지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기성세대가 이제는 대량생산 하듯이 청년 신앙인들을 양산하려고 하기를 그만 두고, 이들에 대해 일대일의 관계를 갖고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기성세대가 이들의 멘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나안 성도에 대해 연구한 필자도 똑같이 하고 싶은 말이다. 청년들을 ‘교회 일꾼’이라고 말하며 부속품처럼 가져다 쓰기 이전에 이들의 현실 문제에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며 대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청년들과 통하려면 한 가지 유의할 것은 기성세대가 마치 모든 답을 알고 있는 듯이 청년들에게 지시를 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현실 문제가 언뜻 기성세대가 젊은 시절은 겪은 것과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치 않다. 또한 오늘 젊은이들의 정서나 처지는 20, 30년 전의 그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으로 윽박지르려고 하기보다 이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일 것이다. 흔히 요즘 세대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흥미 위주의 사고방식에 진지함을 결여하고 있다고 이야기된다. 이것은 일면 타당하기도 하나 한편으로 이들의 세계를 제대로 읽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이기도 하다. 요즘 세대는 영상을 통해 세상과 교신하며 온라인을 타고 들며 즉각적 감흥과 교류하면서 자아를 형성해온 세대이다.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386 컴퓨터와 같이 실생활에서도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기성세대와 달리 이들은 실생활에서도 멀티태스킹을 자유자재로 하는 세대이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풍자 패러디 작품을 만들면서 정치인들을 꼬집기도 하고 현실을 비판하기도 한다. 도서관 앞에 붙은 대자보를 읽으면서 의사소통하던 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룩할 뿐 감동을 주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는 이들에게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흔히 말하듯 기성세대는 거시 담론과 종교 앞에서 경건해지지만, 젊은 세대에게 감동 없는 경건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요즘 세대에게 종교적 영성이 부족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기성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 진리를 찾아 순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젊은 세대가 필요로 하는 것과 그것의 적절한 매개 방식을 찾아서 의사소통하며 그들을 도울 방법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안용준 목사2017-08-30

종교개혁 당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시각예술 분야에서 놀랄만한 변화를 초래했다. 즉 성경의 계시에 대한 균형 있는 예술적 시각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의 한계를 엄청날 정도 로 늘려 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인 루터는 성경의 계시에 적합한 예술의 주제들에 관하여 논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종교개혁 예술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실로 예술이 성경의 계시 안에 포함된 다양한 주제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사람의 마음속에 환기시키고 기억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여겼던 것이다. 교육을 ‘인간적인 책임’(Die menschliche Verantwortung)으로 정의한 루터는 타당한 교육원리란 꾸준한 반복에 의해서 수행된다고 보았는데, 그는 시각예술이 성경의 메시지를 쌓아가는 사람의 기억력을 높여주는 훌륭한 수단으로 여겼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로지 언어로 되어 있는데 시각적 형식으로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이해를 도울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겠으나, 당시 종교 예술의 주제에 대해 말할 때 작품 가운데 헌사(獻詞)를 넣어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켰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종교개혁 당시 예술 작품 중 어떤 것은 성경의 말씀이나 이와 관련된 문구를, 극단적인 경우, 그림의 1/6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 있게 넣었다고 한다. 어떤 경우 그림과 글로 쓰인 말씀은 보충적이며 양자를 강화하는 쪽으로 전개되었으며, 이 두 가지를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좀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트 회화는 복음전파와 기억의 도모를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에 시각으로 감지되는 글, 혹은 그림으로 그려진 설교로 불려 지기도 했다. 그리고 루터의 교육에 있어서, 그가 큰 관심을 가지는 명제는 '인간이 속할 올바른 곳에 인간을 속하게 하는 일'이다. 그는 교육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나아가서는 인간의 심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미지를 느끼고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을 '자연적 인간심리의 과정'으로 간주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래서 교육을 ‘인간적인 책임'으로 정의한 루터는 종교개혁자로 만이 아니라, 교육사상가요 예술의 개혁가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결과가 거의 종교적인 분야에 나타났다고는 할지라도, 이후에는 정치적, 사회적 생활에도 나타났으며, 예술의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지역적으로 널리 영향을 주었으며 그리고 심오한 것이었다. 특별히 비텐베르크 시의 궁정화가인 크라나흐(Lucas Cranach)에게는 『루터성경』의 복음적 이미지 창안과 보급에 주력하도록 동기를 제공하였다. 루터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던 그는 당시의 미적 방법론을 넘어 16세기 교회의 도덕적 부패와 영적 타락에 대한 경고와 성경적 삶의 패러다임을 전 유럽에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문형욱 대표2017-08-28

미혼 청년들의 기도제목 중 '직업문제'와 '결혼 문제'는 기도 제목에 꼭 포함되는 기도 제목인 것 같습니다. 짝이 없어 힘들어 하는 청년들은 좋은 짝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여 짝을 찾고 싶은 기도제목을, 교제하고 있는 커플들은 아름다운 관계속에서 데이트를 잘 하고 서로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교제를 할 수 있는 기도제목을, 결혼을 약속하여 준비하는 커플은 세상적인 결혼 준비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혼준비를 할 수 있도록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짝이 없는 분들의 눈물의 기도는 늘 마음이 아픕니다. 청년들의 기도제목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별 호감이 없고 내가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은 저에게 호감을 표시하네요. 제가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요?”라는 기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한 번쯤은 이런 고민을 해보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럼에도 청년들이 이러한 질문을 할 때에는 당황스럽습니다. 당황스러운 이유는 간혹 청년들 중에는 질문을 하고 빨리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고 싶어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단답형으로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대답을 원하니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까?제가 다시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만약 청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그 청년의 대답은 순간 이랬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야죠...” 그리고 잠시 청년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경우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이분법적 생각보다는 상대방에게 호감 가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 분과 내가 어떤 관계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지도 마시구요. 그렇다고 포기해야 하는 것에서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도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내가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 스스로 온전하게 노력을 해보고 상대방에게 거절할 권리를 주며 상대방에게 나의 마음을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거절할 권리를 주지 않고 무조건 “나를 봐야 한다” “나와 사귀어야 한다” 라는 식의 표현은 상대방도 마음이 아프고 나 자신 또한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나에게 호감을 표해주시는 분에게는 더욱 많은 마음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존중해주고 그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표해주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족한 나를 인정해주는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분이 나에게 어떠한 마음으로 호감을 표하는지를 깊게 생각하고 그 분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내가 상대방을 정말 따뜻한 마음으로 보는 데도 이성적 호감이 가지 않을 경우에는 아름다운 거절을 잘 해야 합니다. 거절을 할 시에는 분명하고 명확하게, 하지만 따뜻한 말투와 상대방을 배려하는 상황에서 해야 합니다.하지만 청년들은 이러한 거절을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서 회피하거나 그냥 선택을 해서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절당함에 대한 걱정을 하다보면 아름다운 만남을 갖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거절할 권리를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그러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의 균형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 오히려 상대방을 강요하고 지시하고 조종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려 보시면 어떨까요? 우리는 믿음의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임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이성교제에서는 상대방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성교제를 해야 함을 잊지 않으시길 간곡히 기도합니다.

신동식 목사2017-08-27

종교개혁은 어느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개혁의 때가 이르렀기에 생긴 것입니다. 종교개혁 전야의 모습들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탐욕과 사제들의 타락이 분명 그 몫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래의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도 칼빈도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세 로마 교회는 개혁자들의 요구를 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회복하자는 소리에 권력과 핍박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결국 로마 교회는 이들을 이단자로 내쳐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참된 교회를 세우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참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일에 가장 반대한 이들은 로마 교회 사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재산을 빼앗기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득권이 중요하였지 참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제들의 태도였습니다. 사제들의 관심에는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이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갈급함도 적었고,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무지하였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사제에 대한 소명은 관심이 없고 현세적 삶에 대한 탐심과 쾌락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중세 교회의 처절한 타락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제들의 무지는 교회가 개혁되어야하는 당위성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종교개혁 후(1551년)에 시작된 후퍼 감독의 조사 보고서를 보면 사제들의 무지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글로스터 교구에 있는 331명 성직자를 조사한 후퍼의 보고에 의하면 169명은 10계명을 암송하지 못하고, 9명은 그것들의 순서도 몰랐고 33명은 그것들이 성경의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또 10명은 신조들을 암송하지 못하고, 216명은 그 신조들에 대한 성경의 참고구절들을 몰랐으며, 10명은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못하고, 39명은 주기도문이 성경의 어디에 있는지 몰랐고, 34명은 그 저자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 성도들에게 점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대 놓고 말하기를 “사람들은 ‘무지한 교사들이 가르치는 잡종적 언어’보다 성경적 언어를 배우는데 시간을 투자해야만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전야의 현실이었습니다. 사제들을 향하여 무지한 교사, 잡종적 언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이것은 후퍼의 보고서에 근거한다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제들의 영적인 권위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말씀은 사라지고 오직 무지한 말들만 교회 안에 난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밖은 달랐습니다.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인문주의 사상이 번져갔으며,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점점 사제들의 무지를 알아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배경에는 말씀에 떠난 교회와 사제들의 행위에 대하여 성도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와 교황과 사제들이 한 일들이 성경의 가르침과 무관한 것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교회를 회복하는 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중세 로마 교회는 참된 교회로의 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회개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탄압만 있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불복하는 이들에 대한 탄압은 참으로 매서웠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회개의 길에서 점점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개혁의 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무지한 사제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 전야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분명한 도전을 줍니다. 개혁은 전조 증상이 긴 시간 주어진 후에 나타납니다. 교회와 목사가 말씀의 자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 수 록 개혁은 점점 가까이 옵니다. 성경이 우리의 신앙의 유일한 기준이 되지 못하면 온갖 잡설들이 난무하고 마침내 교회는 부패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 가운데 여전히 반지성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신앙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따라 신앙합니다.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지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뜻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바로 성경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목사로 부르신 것입니다. 목사의 소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고 목사가 있는 것은 바로 말씀을 바르게 해명하여 전하는 일입니다. 이 일이 목사의 소명입니다. 목사의 소명이 교회를 크게 짓고, 성도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사의 소명이 아닙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무엇보다도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고 전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교회 직분자들 역시 동일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함께 묵상하여 함께 나누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목사의 무지는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지 못하게 합니다.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구분하는 것은 목사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거짓된 교회를 구분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공부하는 자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의 부패를 눈 앞에 보게 될 것입니다. 무지한 교회는 무지한 목사에 의하여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끝까지 공부하는 목사는 지혜롭고 분별력있는 신자를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목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목사는 교회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귀찮아한다면 소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전야의 모습은 16세기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현장에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목사들의 무지, 지도자들의 무지는 부끄러운 교회를 만들 것이고 마침내 교회개혁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들과 지도자들이 열심을 위하여 교회는 기도하고 도와야 합니다. 특별히 책을 읽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 성경을 이해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여야 합니다. 목사의 우선순위를 만들어 주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교회는 목사가 무지에 빠지지 않도록 신경 쓰고 기도하고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회복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이때에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더욱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다시 살리는 길입니다.

김성윤 교수2017-08-23

인문학적 성찰과 창의적인 사고 제4차 산업혁명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창의적인 사고가 경쟁력의 원천이요, 생존의 무기가 된 시대에 사고하는 능력을 키우고 지켜야 앞서갈 수 있다. 똑같은 일의 반복이나 단순 작업은 이미 기계의 몫이 돼 버렸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생각을 보석처럼 연마하는 것이다. 생각을 보석처럼 연마한다는 의미는 세공실에서 원석을 갈아 아름다운 보석을 만들 듯이 창의적인 사고로 무장할 수 있도록 머리를 훈련하고 단련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석처럼 생각을 세공할 수 있을까? 우선 인문학적 지혜가 담긴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책을 통해 훌륭한 사상가나 선각자와의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이다.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분들의 생각을 읽고 공유하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고, 나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를 생각해본다. 독서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으로 전해지는 단편적인 정보들은 이미지다. 말 그대로 그 이미지는 눈으로만 보는 것이다. 보는 정보는 볼 때는 재미있고 흥미로울지 모르지만 휘발성이 굉장히 강해서 바로 증발해 버린다. 이미지를 보고 나면 머릿속에만 맴돌 뿐 창의적으로 되새김돼 체계적인 지식으로 남지가 않는다. 탁월함의 추구와 역사의식 세계적인 테너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는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었다. 그런데도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bye)란 명곡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이런 노래를 선물하기까지 그는 피나는 노력으로 생각을 보석처럼 연마했다. 앞을 못 보는 맹인인데도 많은 책을 읽고 소화해냈다. 보첼리의 독서는 보기가 아니라 읽기였고 연마였다. 왜냐하면 그는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점자책을 한 자 한 자 공들여 읽었다고 한다. 그렇게 익힌 법학으로 변호사가 됐고, 고전을 접하면서 갖게 된 풍부한 감성이 누구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성악가가 되게 했다고 술회했다. 맹인 보첼리가 마음의 눈으로 법과 소리를 읽었듯이 우리는 눈이 아니라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보석 같은 생각이 샘솟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해독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작가와 대화를 하고 그가 전달하고픈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다. 책 내용 이면에 숨어있는 맥락을 하나 둘 찾다 보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지식체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지식체계가 보이면 그 책은 나의 지식으로 재구성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비판적 사고와 바른 판단력을 기를 수 있다. 또한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보석 같은 생각이다. 여러 가지 책 중에서도 선조들의 삶이 녹아있는 사서를 읽는 것도 중요하다. 사서 속에는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책 속의 역사적 인물들의 삶은 문학적이면서 교훈이 되는 철학적 내용이 가미된 서사로 넘쳐난다. 더욱이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보면 그 당시를 지배하던 철학을 찾을 수 있다. 사전적 의미의 역사의식이란 어떤 사회의 현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악할 수 있는 종합적 사고력이라고 돼 있다.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하나하나 끊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전후좌우 앞뒤 맥락을 살펴서 단단한 논리를 구성해낼 수 있다. 인문학적 지혜와 4차 산업혁명 바른 역사관을 바탕으로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때 우리의 당면한 현실 문제들을 풀어내는 지혜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뉴스나 신문기사에서 5G나 4차 산업혁명 또는 코딩교육을 자주 보게 된다. 이런 생소한 말은 우리의 일상과는 무관한 이슈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이슈 속에는 인류가 가고자 하는 길이 내포돼 있다. 변화에 지혜롭게 동참할 힌트가 담겨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술 혁신을 통해 많은 일을 빨리 하고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 생활의 여유와 편리한 삶을 가능하게 했다. 문제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기들이 인간의 사고능력을 쇠퇴시킨다는 데 있다. 우리 사회에 합리적인 비판적 사고는 사라지고 개인과 개인 간에 헐뜯고 비난하고 욕설이 난무하고 있다. 집단과 집단 간의 편 가르기와 적대감이 넘쳐나고 있다. 왜냐하면 온갖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기들이 말초신경을 자극할 수 있는 수많은 파편적 정보를 정밀한 검증 없이 실시간으로 배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 같은 흐름이 바람직한 현상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한다. 그렇다고 현재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 자체를 비난하거나 시대를 과거로 돌리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도움을 주는 한 제4차 산업혁명의 혜택은 누려야 한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꼭 필요한 창의적인 사고의 능력을 키우려면 원석을 보석으로 연마하듯 사고의 근육부터 단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적인 지혜가 담긴 책을 많이 읽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그에 대한 글을 써서 주변사람들과 돌려 보며 토론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제 지성은 특권이 아니라 값있게 써야 빛을 발하는 시대가 됐다.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로운 눈, 인간을 향한 끝없는 사랑이 성경을 비롯한 고전 속에 있다. 그래서 제4차 산업혁명이 나아갈 방향과 문제점의 극복 방안을 인문학에서 찾아야 된다는 것이다.

나핵집 목사2017-08-22

필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 위원장으로서 위원 24명과 함께 지난 6월 26일부터 7월 8일까지 유럽 지역의 평화조약캠페인을 다녀왔다. 이번 유럽 지역 평화조약 캠페인은 작년에 있었던 미국 지역 평화조약 캠페인에 이은 두 번째 캠페인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제10차 총회(2013년)를 부산에서 개최했다. 총회는 중요한 성명서를 채택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선언’이었다. 이 성명서에서 세계교회는 미래로 가는 길- 권고안들을 내어 놓았다. 그 중에 하나가 1953년의 정전협정을 평화조약으로 바꾸어 전쟁상태를 종식시킬 폭넓은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내년에 아시아 지역에서 진행될 한반도 평화조약 캠페인은 세계교회와 함께 한반도에서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평화조약을 통해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번 유럽지역에서는 영국 감리교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독일의 개신교협의회(EKD)와 헤센나사우 주 교회와 함께 한반도 평화조약의 필요성을 알리고 깊은 논의를 했다. 세계개혁교회연맹(WCRC) 총회가 열렸던 독일의 라이프찌히에서는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 연맹과 함께 성찬식도 나누고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스위스 제네바의 WCC 본부에서는 관계자들과 함께 한반도 평화조약의 필요성을 전 세계교회에 알리는 일을 논의했고 함께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다.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에서는 수사들과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평화적인 영성을 어떻게 확산 시킬 것인지를 논의했다. 1953년 7월 27일, 3년을 끌어오던 한국전쟁은 정전협정을 맺음으로 전쟁상태를 쉬게 만들었다. 정전협정문 4조 60항에는 ‘한반도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정전협정 3개월 이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외국군 철수 문제 및 평화적인 해결을 협의하도록 건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전협정 이후에 정치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64년 이라는 긴 세월동안 서로의 약속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분단 정전체제는 더욱 심화되고 한반도는 긴장과 불안이 감돌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전문에 평화적인 통일의 사명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되어 있다. 헌법 66조 3항, 대통령 조항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다. 헌법 69조의 대통령 선서문에도 ‘헌법을 준수하고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복무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우리 헌법은 어디를 보아도 흡수통일이나 무력통일 나아가 정치적인 합의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 평화통일이 우리 헌법의 정신이다.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평화조약을 맺어야 한다. 평화조약은 평화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 길로 들어서는 관문에 해당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에서 ‘신 한반도 평화 비전’을 선포했다. 이 선언에서 종전과 함께 관련국이 참여하는 평화협정체결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평화협정은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2017)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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