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연희 기자2017-02-16

배우 명세빈이 15일 방송된 tvN <택시>에 출연해, 자신의 신앙과 아픈 과거를 담담하게 털어놔 화제다. 명세빈은 모태신앙이며 대표적인 기독연예인으로 유명하다. 어머니를 따라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가게 됐고, 기도원도 열심히 다닐 만큼 신앙의 열정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세빈은 이날 발송에서 과거 짧았던 결혼 생활과 이혼을 언급하며, 신앙으로 아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명세빈은 2007년 12살 연상의 변호사 강모 씨와 결혼했으나 5개월 만에 이혼했다. 그는 열애설이 난 후 신속히 진행된 결혼에 대해 "당시 얼마 되지 않아 열애설이 났다. 부인할 수도 없고 친한 기자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인정해야 한다고 하더라"며 "인정하니까 바로 결혼설이 났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때는 내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했다“며 ”어렸고, 또 직업이 많이 닫히게 되는데 그게 나에게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혼을 결심하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혼자서 외로운 게 낫단 생각이 들었다. 혼자니까 외로울 수 있는데 누구랑 같이 있는데 외로운 것은 힘들더라. 내가 생각했던 결혼의 모습과 다른 것 같았다”면서 "신앙이 아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전했다. 현재 아픔을 딛고 KBS 드라마 <다시, 첫사랑>에 출연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는또 다른 방송에등장해 성경공부와 기도가 자신을 더욱 단단히 세워 준 것 같다는 깊은 신앙적 고백을 전하기도 했다.

김준수 기자2017-02-03

매서운 한파에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겨울은 소외된 이웃들에게 유독 춥고 위험하기만 하다. 이런 가운데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 22년 동안 한결같이 점심을 대접한 한 교회의 섬김이 알려져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22년째 매일 100명 넘는 어르신들에게 점심 대접 동부순복음교회 이장균 목사는 몸이 불편한 어르신과 노숙인을 위해 22년째 따뜻한 점심 한 끼를 대접하고 있다. 보통 100명에서 120명의 어르신이 사랑의집을 찾고 있다. 사랑의집이 위치한 당고개역 주변은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1960년대 후반,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 무허가촌이 강제철거 되면서 떠밀리듯 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생계를 위해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도 많다. 사랑의집은 소외된 이웃들의 허기진 배고픔을 책임질 뿐 아니라 지역의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잘 나가는 사업가로 돈 걱정 없이 지내왔던 이 목사는 늦은 나이에 목회를 시작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 불교군종 사병 1호 출신인 그는 사업 실패 후에 해인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가족과 뿔뿔이 흩어지고 집 없이 밥 한끼를 걱정했던 혹독한 연단의 과정은 사랑의집 사역을 멈추지 못하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 한 달에 700만 원 정도의 경비가 필요하지만, 쉽게 감당한 날은 거의 없었다. 정기적인 후원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불안한 마음이 들 때면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마음을 다잡곤 했다. 어떤 때는 중국에서 일하는 아들의 월급으로 사역을 이어나간 적도 있었다. 아들에게 30만 원을 용돈을 주고 나머지는 사랑의집 식비로 모두 사용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다 보니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생면부지의 사람이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들을 통해 운영비를 채워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허락하셨던 것처럼 때마다 채워주시는 은혜 덕분에 이 사역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이 목사는 고백한다. "지금까지 예산을 세우거나 제 계획대로 사랑의집을 운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럴만한 형편도 되지 않았고요. 매번 느끼고 있지만 이 사역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저는 얼굴마담인 셈이죠. 내가 무엇을 할까라는 생각보다 하나님이 내게 시키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늘 고민합니다." 자신은 그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갈 뿐이라고 고백하는 이 목사의 기도제목은 단 하나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날까지 사랑의집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주변에서 언제까지 이 사역을 할 거냐고 물어볼 때가 많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하나님께서 어르신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만둘 수밖에 없죠. 하지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저희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부르셨을 때 애쓰고 고생했다는 위로를 듣고 싶습니다."

김준수 기자2017-02-22

시냇물흐르는교회 정종찬 목사는 편안한 도시생활을 뒤로하고 포천의 한 시골마을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20년이 넘도록 마을 어르신들의 손발이 돼주고 있는 그는 이제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일꾼이자 최고의 '인기남'이다. '기다림이 답'이라는 정 목사의 목회 이야기를 소개한다. "열심히 사는 모습에 주민들 마음 열어" 시냇물흐르는교회 정종찬 목사는 신대원 졸업을 앞둔 1995년 12월, 목회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계류 2리를 찾았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이었지만,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요청에 부임하게 됐다. 자신의 목회철학을 '기다림'으로 표현한 정 목사는 첫 목회지였던 이 곳에서 21년을 보냈다. "기다리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 같아요.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느꼈는데, 제가 먼저 움직여서 뭔가 하려고 하면 다 막히더라고요. 그저 욕심 부리지 않고, 묵묵히 섬기다 보니 하나님이 때에 맞춰 베풀어 주셨어요. 그럴 때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어요." 지금은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정 목사가 처음부터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던 주민들은 젊은 전도사가 교회에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자 돌을 던지는 등 시비를 거는 일도 다반사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을까. 단칸방에서 시작한 교회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장년 성도 5명의 헌금으로 가까스로 교회를 유지하기 바빴다. 정 목사는 "어머니도 모시고 아이들도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교회 사례비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후원을 요청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결국 정 목사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생수 배달, 고물장수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풍족하지 못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려고 했던 것이 전화위복이 됐다. 젊은 사람이 부모님을 모시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에 동네 주민들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 목사는 특별히 무언가를 잘하려고 했다기보다 그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주민들도 좋게 보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시간이 약인 것 같아요. 처음에 가지고 있던 교회나 목사에 대해 안 좋게 생각했던 것도 달라지게 된 거죠. 어느 날은 마을 이장님이 약주 한 잔 하시면서 '제가 목사님께 졌습니다'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작년에는 교회도 다니지 않는 어르신에게 아들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 받기도 했다. 불교 집안의 결혼식에 목사가 주례를 해서 하객들도 많이 의아해 했다고. "신랑 쪽 아버님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분에게 맡기고 싶다면서 저를 지목하셨던 거였어요. 그저 감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죠. 지금 있는 교회를 지을 때도 교회에 나오지 않는 어르신들이나 부녀회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시냇물흐르는교회 모습.ⓒ데일리굿뉴스 마을의 든든한 일꾼…재정관리도 맡겨 정 목사는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든든한 일꾼으로 통한다. 어르신들은 마을 재정 관리도 맡기고, 회의도 주관하게 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의 집안일을 챙기고 병원에 모시고 가기도 한다. 요새는 마을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정 목사를 찾는 이들이 많다. 읍내에 모임이 생기면 으레 교회 차량이 주민들의 발이 된다. 항상 간단한 다과나 음료가 구비돼있는 교회 식당은 어르신이 즐겨 찾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처음에 회의 참석할 때는 젊은 사람이 나선다고 생각하실 까봐 그냥 듣기만 했어요. 그렇게 7년을 지나고 나니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어봐 주시더라고요. 작은 일들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인정해주신 것 같아요." 시냇물흐르는교회는 창립된 지 29년이 되던 2015년이 돼서야 노회로부터 자립교회로 인정받았다.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장로를 세우고 꿈에 그리던 당회도 조직했다. 정 목사는 앞으로도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면서 교회가 지역공동체와 공존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제 능력 이상으로 저를 사용해주셨다는 거에요. 어르신들의 손과 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요. 지금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게 기도제목이에요."

김민정 기자2017-02-22

지난해 여름 리우올림픽에서 대한민국 국민에게 뜨거운 감동을 안겨줬던 양궁 국가대표 장혜진 선수.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했던 그의 신앙이 알려지며 더욱 주목을 받기도 했다.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할 뻔했던 절박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만난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그는 매일마다 믿음의 활시위를 당긴다고 고백한다. 장혜진 선수의 특별한 신앙고백을 <신앙계> 3월호 커버스토리에서 만났다. "혹독한 훈련에도 하나님의 뜻 기대하게 돼" 대한민국 국가대표 여자 양궁팀 주장이었던 그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하 리우올림픽)에 임하는 어깨가 무거웠다. 국민들의 커다란 기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사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여자선수 대부분은 자신들이 단체전 금메달을 놓치는 최초의 팀이 될까봐 엄청난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마음을 비우고 집중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모두들 한마음이 되어 8연패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할머니 때부터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했고, 작은아버지가 목사였지만 오랫동안 장 선수는 하나님을 깊게 경험하지 못한 채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합숙과 훈련 때문에 교회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다시 만난 건, 리우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리우올림픽 선발전을 앞두고 모든 선수들의 경쟁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그는 다행히 어렵지 않게 8명에 뽑혀 최종 평가전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1차 선발전이 끝났을 때 그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6위라는 성적을 받아든 순간, 도저히 국가대표로 선발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차 평가전에 기적이 일어나야만 하고, 이마저도 경우의 수를 따져봐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던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이렇게 힘들고 더 안 될 수 있느냐고, 그런 하나님이면 안 믿을 거라고 울며 하소연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단호했다. “너는 아직 믿음의 분량이 그것밖에 안 되니? 믿음으로 간구하고 회개기도를 하거라.” 숙소에 혼자 남은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100% 신뢰하지 못하고 제 자신의 실력을 과신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하나님 지금은 제가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부족하고 어리석은 저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세요.” 그 순간,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방언기도가 터져 나온 것이다. 장 선수는 "놀라기도 했지만 감격스러웠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2차 평가전에서 그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당당히 1등을 차지해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리우올림픽에서는 2관왕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리우올림픽은 지나가고, 혹독한 훈련과 연습만이 남았지만 이전과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어요.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길로 인도하시고 사용하실지 기대하게 돼요. 매일 믿음의 활시위를 당기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저의 소망이 됐어요." 장혜진 선수의 신앙 간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지 제휴 <신앙계> 3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연희 기자2017-02-23

독도 영유권 및 소녀상 설치 등의 문제로 한일 관계 경색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일 양국의 여신학자들이 동북아 평화를 모색하는 자리를 가졌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가 주최한 '한국 일본 여성신학 포럼'이 그것. 여신협의 이난희 공동대표를 따로 만나 이번 포럼의 의미와 논의들에 대해 들어봤다. 제주도에서 한일 여신학자 만남 한국과 일본의 여성신학자들의 만남은 1988년 시작됐다. 한일여성신학 포럼 1차 대회가 한국에서 처음 열린 후 20회 이상 한국과 일본에서 포럼을 열어 만남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지난 몇 년간 모임이 중단되는 아픔을 겪다 최근 아베 정권의 우경화, 군사화에 대응할 한일여성간의 연대에 대한 필요성을 양측이 느끼면서 이번 포럼을 기점으로 다시 만남을 재개했다. 21일 본지 기자와 만난 이난희 공동대표는 “여신협은 2년 전부터 한일여성신학포럼의 재개를 위한 연구반을 운영했다. 이어 2015년 일본 여성 신학자들과 함께 포럼 준비모임을 갖는 데까지 진행됐다”면서 “그 결실로 2017년 2월 제주도 강정 평화마을에서 포럼을 개최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포럼에 참여한 40여 명의 여신학자들은 이 자리에서 일본 아베 정권의 우경화, 군사화에 대한 여성연대의 필요성을 재차 확인했다. 이 공동대표는 “양측이 대화의 벽을 차단한 채 자기 주장만 펼치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평화를 위한 대화를 지속해야만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며 “이웃은 친구라는 점을 인식하고 어떻게 평화를 이뤄나갈지 진지하게 모색해 보자는 취지로 이번 포럼을 개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과 일본, 여성신학자들은 '이데올로기는 대립과 적대시를 가져오지만 교회는 죽어도 이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면서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허무신 분이며,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입장에서 이웃과의 대화는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포럼에서 이 공동대표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군사협력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 여성들이 그리스도인과 여성이란 공통분모 안에서 동북아의 평화와 정의를 찾는 여정을 지속해 나가야 함을 역설했다.

김주련 기자2017-02-21

크리스천 문구브랜드 굿뉴스드로잉(goodnews drawing)은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성경말씀에 디자인의 옷을 입힌 참신한 아이디어로 젊은층에게 인기가 높다. 감각적인 디자인과 실용성은 비신자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멀쩡히 잘 다니던 건설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삶에 뛰어들기까지, 녹록치 않은 시간들을 겪어야 했다는 송소영 대표. "하나님을 만난 후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됐다"는 그는 자신의 삶이 같은 세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그림으로 전하자." 설교 노트와 핸드폰 케이스, 메모장 등 아기자기한 문구들이 눈에 띈다. 언뜻 보면 일반 제품과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성경말씀이 담겨 있다. 굿뉴스드로잉의 제품은 파스텔 톤의 색을 사용한 것과 다양한 사물을 '캐릭터화' 시킨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따뜻한 색감과 사물들이 가진 표정들은 한 구절의 말씀을 한 컷의 그림으로 알기 쉽게 표현해준다. 송소영 대표는 말씀을 바탕으로 한 여러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굿뉴스드로잉을 창업했다. 굿뉴스드로잉의 제품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즐겨 찾는다. '그림이 예쁘고, 메시지가 따뜻하다', '처음 본 말씀인데 마음에 울림이 있다' 등의 긍정적 평을 얻고 있다. 송 대표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말씀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사실 송 대표는 건설회사를 다니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후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20대 중반에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목적'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막연하게 '그림 그리며 사는 삶'이 너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 기도제목을 붙잡고 6년간 기도 했어요." 송 대표는 당시 확실한 기도응답을 받았지만 나이와, 환경, 창업의 두려움으로 수 차례 결단이 무너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송 대표는 발목이 부러져 3개월 간 회사를 휴직하게 된다. "문득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 시간을 허락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그때 받은 말씀이 이사야서 41장 10절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너의 오른손을 붙들고 내가 너를 도우리라'라는 말씀이에요. 내가 나이가 많고,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내 오른손을 잡아주신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그래서 8년간 다녔던 회사를 하루 아침에 그만 뒀죠." ▲굿뉴스드로잉의 제품들 ⓒ데일리굿뉴스 "현실과 환경 초월한 하나님 바라보길"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창업을 결심했지만 부족한 경영 지식을 비롯한 재정 문제,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고민 때문에 어려움도 많았다. 주변 지인들의 후원으로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 제품 판매처도 늘릴 수 있었다. 송 대표는 어려운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세상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완벽한 방법으로 어려운 순간을 이끌어 주셨다고 고백했다. "그때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 노력해요. 이제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도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주실지 기대하고 있어요." 송 대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창업한 브랜드인 만큼, 성경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굿뉴스드로잉을 운영하고 있다. "'이것이 내 것이고, 내가 만든 것이고, 내가 더 잘해야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브랜드의 주인이시고 나는 선한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에 임하고 있어요." 굿뉴스드로잉의 모든 소비자들이 상품을 통해 잠깐이라도 말씀을 묵상하길 바란다는 송소영 대표는 해외시장 진출도 꿈꾸고있다. 통해 세계 곳곳에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고 싶다는 것이 그의 비전이다. 마지막으로 송 대표는 창업을 고민하는 청년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일을 주셨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죠. 하지만 '창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주변의 반대, 환경적 어려움은 당연히 있을 수 있어요. 이런 어려움들을 내가 하지 못하는 이유로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 현실과 환경을 초월한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귀 기울여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박은정 기자2017-02-17

여성들의 생활필수품 생리대. 특히 면생리대는 건강과 환경에 도움이 된다는 강점을 내세워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30대 중반의 CEO인 장영민 대표는 순면 생리대를 직접 제작 판매하는 '한나패드'를 창업했다. 남자가 생리대 사업을 한다며 '변태'란 오해도 받았지만, 좋은 제품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신념으로 노력한 결과 면생리대 대표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틈틈이 국내 저소득층과 해외선교사들을 돕고 있는 장 대표는 세계선교 후원의 비전을 품고 있는 다부진 열정의 청년이었다. 순면 100%…'면생리대 대표 기업'으로 자리매김 장영민 대표가 '생리대'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대학생 시절, 지인이 생리통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부터였다. 안타까운 마음에 인터넷에서 '생리통'과 '생리대' 용어를 검색해본장 대표는 여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일회용 생리대가 자궁경부암을 유발하고 생리통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주위 사람들에게 면 생리대 사용을 권유해 봤는데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장 대표는 여성들의 평생 필수품인 생리대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초기 자본금 400만 원을 갖고직접 동대문 종합시장에서 원단을 고르고 방산시장에서 공업용 미싱도 구입했다. 브랜드 이름을 뭘로 할까 고민하던장 대표는 성경에 나오는'한나'란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나는 오랫동안 불임으로 고통 받은 인물이에요.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한 끝에아들 사무엘을 낳게 됐죠.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받치겠다고 고백하는데요. 저도 한나의 결심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얻게 되는 수익을 하나님께 받치겠단 다짐으로 '한나패드'라고 이름을지었어요." 한나패드는 면생리대 1위 기업이라 불릴 만큼 여성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일회용 생리대를 착용했을 때 발생하는가려움과 각종 피부질환, 냄새 등의 문제를 해소해 준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또한 면 생리대 하나면 기본 2년 정도 사용할 수 있어 경제적이기도 하다. "여성분들이 초창기에는 일회용 생리대처럼 냄새나고 더럽다,세탁과 휴대가 불편하다는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저희는 예전 어머니들이순면으로 된 천을 사용했던 것처럼 순면 100%로 만들어여성들에게 건강에 좋은 생리대로 자리매김 하고 있어요. 면 생리대를 사용한 고객분들은 다시는 일회용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사업을 시작하면서 "남자가 생리대 사업을 한다"고 주변에서오해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장 대표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품 개발에 더 집중했다.그 결과 한나패드는현재 호주와 미국, 캐나다, 일본 등 해외 여러 국가에 수출되고 있다. 사회공헌 활동도 활발…세계선교 후원 '꿈' 한나패드는 사회공헌에도 앞장서고 있다. 장 대표는 사업초기부터 국내외 저소득층 여성들에게 꾸준히 생리대를 지원해주고 있으며, 네팔과 필리핀 등 해외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도 선교지에 생리대를 제공하고 있다. "사실 아프리카나 동남아 일부 국가에서는천 조각을 생리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여성 생리대에 대해 열악한 상황입니다. 특히 선교나 봉사단체가 남성중심적인 사고로 접근되다 보니 이런 점들이 눈에 안 띄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아요. 앞으로는 국내뿐 아니라 개발도상국가에 위생용품을후원해 나갈 예정입니다." 이와 함께 장영민 대표는 세계선교후원센터를 세우는 비전을 갖고 있다. 제3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조금이나마도움이 되고 싶어서다. "한나패드 사업을 시작하면서 세계 선교사들을 위해 돕고 싶다는 기도를 계속해 왔어요.그래서 나중에는 세계선교후원센터를 세워 하나님의 자녀를 양성하고 크리스천 인재들이 세계에 퍼져 나가 일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한내패드 면생리대 패키지 구성품. 한나패드는 면생리대와 함께 여성청결제,천연 세탁세제 등을 함께 판매하고 있다.ⓒ데일리굿뉴스

김주련 기자2017-02-14

필리핀에서 사역 중인 이병호 선교사의 딸 하민이(10)는 범혈구감소증이라는 희귀병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규칙적으로 수혈을 받지 않으면 계단 조차 제힘으로 오를 수 없다. 지난해엔 안구 출혈로 한쪽 시력도 잃었다. 최근 병세가 악화돼 골수 이식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안타까움울 주고 있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골수기증자를 찾았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는 막막한 상황이다. "하민이를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고 싶다"고 고백하는 이 선교사를 직접 만났다. 안구 출혈로 한 쪽 시력 잃어 올해로 10살이 된 하민이. 하민이는 여느 또래와 다를 것 없이 언니와 뛰어 놀고, 함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수혈에 의존하지 않으면 걷고 뛰는 것도 혼자 할 수 없다. 하민이가 싸우고 있는 범혈구감소증은 지혈작용을 하는 혈소판이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져 몸 안의 핏줄이 터지고, 멍이나 작은 반점들이 생긴다. 팔과 다리를 비롯해 심할 경우 머리의 핏줄이 터져 뇌출혈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민이는 지난해 10월, 눈동자 정 중앙에 있는 핏줄이 출혈을 일으켜 현재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이병호 선교사(Global Partners 선교회)와 가족들은 2013년 중간보고를 하기 위해 한국에 들렀다가 하민이의 병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하민이의 상태가 좋아지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안구 출혈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 "어느 날 하민이가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급히 한국으로 들어가려고 공항에 갔는데 아이 상태가 심각하다며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을 거절 당했어요. 한국에 와서 검사를 해보니 '하민이가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라고 하더라고요." 지난 2010년부터 아내와 네 딸과 함께 필리핀 사마르 섬에서 와라이와라이 종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한 이병호 선교사. 필리핀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곳은 열악한 환경은 물론 총기사고도 빈번히 일어나는 지역으로, 외국인 선교사는 이 선교사 한 명뿐이다. "병원에서는 골수이식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골수 기증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죠. 한국에서 골수를 기증하겠다고 신청한 32만 명 중에 한 명이 가능성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 분이 기증을 거절하셨어요. 미국과 일본 1천만 명 중에는 맞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다 며칠 전 기적적으로 대만에서 기증자를 찾았습니다." ▲이병호ㆍ최형진 선교사와 가족들은 하민이의 치료를 위해 잠시 선교지를 떠나 한국에서 지내고 있다.ⓒ데일리굿뉴스 "치료비와 거주지 등 어려움 있지만 하나님 의지할 것" 해외에서 골수 기증자를 찾았지만, 골수이식 이후에도 하민이의 몸이 잘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의학이 발달해 골수를 기증하는 사람은 간단한 채혈만으로 골수를 채취할 수 있지만, 골수 기증을 받는 환자는 다량의 항암제를 투여해서 환자의 골수를 제거하고, 기증자의 골수를 이식하게 된다. 이식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더라도 골수 생착과정에서 숙주반응이나 다른 장기로의 감염이 일어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도 다수 발생하기 때문이다. "골수이식 성공률은 보통 90%가 넘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식 후 완치율은 30%에 불과하더라고요." 골수이식은 과정뿐 아니라 비용도 만만치 않다. 환자는 기증자의 건강검진과 입원비용, 골수운반비용인 약 2천 5백만 원을 지불해야 하고, 이식수술 이후에도 입원비와 치료비 등 수천만 원을 감당해야 한다. 하민이의 치료를 위해 급히 한국으로 온 이 선교사와 가족들은 지낼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수술 후에 하민이는 백혈구가 아예 없는 상태기 때문에 무균실과 같은 환경을 만들어서 1~2년 동안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장기간으로 지낼 곳이 현재는 없는 상태에요. 지금 지내는 선교관은 아는 장로님의 후원으로 마련된 곳인데, 이 곳도 올해 5월까지만 지낼 수 있어요." 이 선교사는 숱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부름 받은 자는 부르신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며 선교지 사역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병호 선교사는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 하민이의 치료와 회복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기적 가운데 걸어왔다고 생각해요. 의술이 아닌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어요. 거주지와 치료비도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채워지길 소망해요." 마지막으로 이 선교사는 골수 기증자와 필리핀 교회를 위한 기도도 잊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대만의 기증자에게 감사 드려요. 골수 기증 이후에도 건강하길 바라고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면 더욱 좋겠어요. 또 필리핀에 태풍으로 피해 입은 8개 교회가 있는데, 제가 한국에 나와 있어서 그 교회들을 돌보지 못하고 있어요. 그 교회들이 믿음 가운데 뿌리내리길 기도합니다." (후원계좌 : KEB하나은행 990-090819-582 GP 이병호, 최형진))

박은정 기자2017-02-10

요즘 대중음악에 서양악기들이 사용되면서 우리 전통음악인 국악을 들어보기란 쉽지 않다. 이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이런 가운데 기독교 음악의 '한국화'를 내세우며 찬양하는 목사가 있어 직접 만나봤다. 목회자 1호 인간문화재 서도소리 명창 '이문주 목사' "할렐루야 찬양하세 하나님 큰 사랑/할렐루야 찬양하세 얼씨구 좋다 상사디야~" 국내 목회자 최초로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이자 서도소리 명창인 이문주 목사가 전통 민요가락에 복음을 담아 작곡한 국악찬양 <할렐루야 상사디야>의 후렴구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흘러나오는 전축소리를 들으며 자라온 이 목사는 자연스럽게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만해도 황해도 평안남북도 소리인 '서도소리'인 줄 모르고 혼자 연습한 노래 실력으로, 1974년 KBS 전국국악경연대회에 출전해 장원을 수상하며 주변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국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던 이 목사에게 장원 수상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이 목사가 출연한 방송을 보고 1973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故 김정연 선생이 직접 제자로 삼아주겠다고 한 것이다. "김정연 선생님은 저에게 잊지 못할 인생의 스승님입니다. 저에게 숙식도 제공해주시면서 제자로 키워주시고, 저의 꿈을 위해 신학대학교 학비까지 지원해주셨어요." 이후 故 김정연 선생 문하에서 처음으로 국악을 배우며 2009년 황해도 무형문화제 제3호 서도선소리 산타령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이렇게 보면 이문주 목사의 꿈이 국악인이었던 것 같지만 ▲이문주 목사ⓒ데일리굿뉴스 이 목사는 사실 어릴 적부터 목회자의 꿈을 키워왔다. 8살 때 처음 교회에 나갔던 그는, 청년시절 기도원에서 기도를 하며 목회자의 사명을 받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듬해 신학대학교에 입학하며 1985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현재는 제7578부대 국군횃불교회 담임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하지만 목사가 무속적인 색체가 있는 국악을 한다는 주위의 비난으로 국악을 계속 이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10년 동안 국악을 접고야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학을 공부하며 기독교 음악의 뿌리인 히브리음악이 국악과 비슷하단 것을 깨닫게 됐다. "구약학 교수님께서 원래 기독교음악이 히브리음악에서 시작돼 국악하고 거의 흡사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후 국악은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이며, 무속인들이 악기와 음률을 가지고 자신들만의 음악을 만든 것이란 것을 알게 됐죠." 이 목사는 국악의 가치를 넘어 기독교 음악에 대해 고민을 하며 한국의 기독교 음악이 서양의 영향을 받게 된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됐다. 이를 계기로 이 목사는 '한국인은 한국음악으로 찬양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국악찬양을 만들게 됐다. "우리의 언어는 '국어'이고, 우리의 노래는 '국악'인데 찬양은 왜 서양식으로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죠. 국악은 한국인의 한과흥이 담겨 있는데, 이런 음악으로하나님을찬양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말이죠. 그래서 전통음악인 국악에 찬양을 접목해 '국악찬양'을 만들어요." 이 목사는 기존의 국악을 사용하며 국악찬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가사에 가락을 붙이며 곡을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성경산타령>, <할렐루야 상다디야> 등 50여 곡을 작사·작곡했다. "우리 것으로 찬양하자"…국악찬양가수협회 창립 이문주 목사는 사람들이 전통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전통음악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에는 국악찬양의 발전을 도모하고, 국악찬양 가수를 양성하기 위해 '국악찬양가수협회'를 창립했다. 국악찬양가수협회는 전국 곳곳의 교회와 교계행사 등에 참석하며 국악찬양과 성경무용, 사물놀이 등 전통음악으로 하나님을 전하는 사역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국악찬양'이란 새로운 장르로 교계 내에서 반응도 뜨겁다. "처음에는 목사님들이 국악으로 찬양을 한다고 하니 깜짝 놀라셨죠. 그런데 기존 찬양보다 우리 입에 익숙한 국악으로 찬양을 하니 모두 긍정적으로 봐주셨어요.국악찬양집회에 갈 때면 목사님과 장로님 할 것 없이 모든 성도들이 강대상 앞에 나와 가락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답니다.국악찬양집회를 열었던 한 교회는 저희 공연으로 국악찬양대를 만들기도 했어요." 끝으로 이문주 목사는 "국악찬양 가수를 양성하고 선교무용과 사물놀이 등 전통음악으로 하나님을 전하고 싶다"며 "향후 국악신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목회자 1호 인간문화재이자 서도소리 명창인 이문주 목사를 만나봤다.ⓒ데일리굿뉴스

김주련 기자2017-02-03

하루 한번 이상은 누구나 사용해야 하는 치약. 인체에 사용되기 때문에 안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지난해 유명 대기업이 만든 치약에서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 검출되면서 치약의 안전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성분 안전도 평가 기관인 미국 환경연구단체(EWG)로부터 국내 처음으로 인증을 받은 치약이 있다. 크리스천 소셜벤처 기업 '위드마이 치약'이 바로 그 주인공. '위드마이'의 민승기 대표를 직접 만나봤다. 국내 최초 EWG 인증 받은 천연치약 '나와 이웃, 환경과 모든 생명을 생각한다'는 모토를 가진 소셜벤처 기업 위드마이. 위드마이 민승기 대표는 누구나 날마다 사용하는 생필품을 통해 세상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비전을 갖고 위드마이를 창업했다. 위드마이 치약은 다수의 법률과 생명과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미국의 환경단체 EWG(Environmental Working Group)로부터 국내 최초로 인증을 받은 제품이다. 국제적으로는 다섯개 브랜드의 치약 만이 이곳의 인증을 받았다. "간단히 말하면 안 좋은 것은 다 뺐다고 말할 수 있어요. 10無 치약이라고도 말하는데요. 파라벤과 사카린, 트리클로산, 동물성원료 등 10가지가 없어요. 유해한 성분이 없는 천연유래성분으로 임산부와 어린아이들은 물론, 남녀노소가 모두 사용할 수 있어요." 그 중에서도 민 대표는 시중의 거의 모든 치약에 들어가는 '합성계면활성제'를 사용하지 않았다. "양치질을 한 뒤 입이 떫은 이유는 치약 속 합성계면활성제가 혀를 30분간 마비시키기 때문이에요. 합성계면활성제는 구강궤양과 알러지 등을 유발하고, 침을 마르게해 잇몸병과 구강병을 유발하죠. 위드마이 치약엔 이 성분이 없어요. 저희 치약에서 거품이 덜 나는 이유기도 하죠." 위드마이 치약은 구매자들 사이에서 '개념 있는 치약'으로도 평이 자자하다. 유해 성분을 없앤 치약뿐 아니라 제품의 이익을 사회에 공헌하는 사회적 기업이기 때문. 위드마이는 소비자가 치약을 한 개 구매할 때마다 동일한 제품을 국내외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들에게 기부한다. 국내에서는 선덕원과 아르크 장애인문화복지재단, 해외에서는 필리핀 쓰레기 마을인 파타야스의 어린이들에게 전달됐다. "최근에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부'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치약을 기부하는 것도 좋지만 수익을 통해 장학금 또는 교육기관 설립을 위해 노력 중이에요." ▲천연유래성분으로 만들어진 위드마이 치약 ⓒ데일리굿뉴스 치과의사란 선망의 직업 뒤로하고 창업의 길로 사실 민 대표는 위드마이를 창업하기 전까지 치과의사의 삶을 살았다. 그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보건학을 공부하고 뉴욕대학교 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치과의사로 활동했다.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내려놓고 창업이란 어려운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치과의사'가 제 꿈은 아니었어요.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말레이시아 선교를 자주 갔었는데, 땅이 없어 물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 때 마을 촌장님이 '아버지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치과의사'라고 대답했더니 꼭 다시 한번 방문해달라며 부탁하셨던 기억이나요. 그때 치과의사란 직업이 봉사하기에 정말 좋은 도구라는 생각에 이 직업을 선택하게 됐죠." '기부'와 '봉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정작 치과의사로서의 삶을 살며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오히려 치과의사로 살았던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 였다. 민 대표는 진정한 봉사를 실천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가장 잘 알고 있는 '치과' 분야에서 아이템을 선정한 것이 바로 치약이었다. 디자인과 유통, 판매 마케팅 등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경쟁이 치열한 치약 브랜드를 창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끊임 없는 기도와 연단을 통해 브랜드 창업을 준비한 민승기 대표. 민 대표의 고민은 그의 브랜드 슬로건 안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와 이웃, 환경과 모든 생명을 생각한다'는 슬로건은 사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원하셨던 바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그렇지 않죠. 또 '이웃'을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인데, 그 계명을 사업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위드마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다는 것'은 내 안에 임재하신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더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에요. 사실 이것은 복음에서 유래한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해요." 민 대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데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는 말씀처럼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생필품을 통해 나눔이 삶과 별개가 아닌 우리의 일부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위드마이에 담아냈다. 제품 수익을 기부하기도 하지만 발달장애인 소셜벤처 기업 '동구밭'과 '핸인핸' 등 사회적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보이지 않는 나눔을 실천하기도 한다. "구매는 곧 한 표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이 브랜드가 지향하는 바, 브랜드의 철학, 브랜드가 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꼭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현명하고 개념 있는 소비로 나눔을 실천하는 데 뜻을 같이하길 바랍니다."

박은정 기자2017-01-26

"깊은 밤 지나서 아침이 오면 어둠은 사라져. 어둠에 가려진 아름다운 세상 곧 보게 될 거야. 새 아침의 나라 봄이 오듯이 펼쳐질 거야. 가슴 속 흐르던 눈물 봄눈 녹듯이 사라질 거야." 찬양사역자 김명식 씨가 2016년의 마지막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가 열리는 31일을 하루 앞두고 <새 아침이 올 꺼야>란 제목의 싱글 앨범을 발매했다. 앨범 표지엔 '천만 촛불에 헌정하며'라는 글귀만 쓰여있다. 김명식 씨는 곡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를만나 곡의 의미를 직접 들어봤다. <새 아침이 올 꺼야>…촛불집회에서 영감 받아 제작 이번에 발매된 <새 아침이 올 꺼야>는 전국을 뒤 덮은 촛불집회 현장에 나온 시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만들어졌다. "나라가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며 광화문으로 나갔습니다. 막상 광화문에 가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 살기에도 고단해 보이는 아저씨들과 유모차에 어린 아이를 태우고 나온 부부..바쁜 생활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촛불을 든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해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 결과물이 이번 신곡이 된 거죠." 김명식 씨는 곡 작업을 위해 두 달 정도 기도로 준비하는 가운데 어느 날 밤, '새 아침이 올 꺼야'란 문구가 떠올랐다. 김 씨는 그날 밤부터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며 맘 속에 있던 응어리를 곡으로 풀어냈다. 이번 곡의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기독교 색체가 담겨있지 않다. 음원 등록도 CCM이 아닌 발라드로 돼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때로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때 기독교적인 표현이 소통을 가로 막을 때가 있어요. <새 아침이 올 꺼야>란 곡이 그런 것 같아요. 교회만을 향한 곡이 아니라 온 국민들을 위해 만든 곡이기에 잠시 기독교적인 색체를 제했죠." "맘 속 깊은 곳에서 맴도는 메시지, 곡으로 담아냈죠" 사실 김명식 씨는 CCM 아티스트로서 많은 찬양을 작업하고 불렀지만, 어느 새부터 사회를 품는 곡을 만들고 있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자식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해 만든 <남겨진 아빠의 기도>란 곡이 대표적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 아침부터 뉴스를 보는 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의 모습이 우리에게 큰 상처가 됐어요. 정말 한 달 정도는 슬픔과 분도 등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려 아무것도 못했죠. 그러다 어느 순간 유가족들을 위한 마음이 맘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 곡으로 쏟아져 나왔어요." 김명식 씨가 한국사회의 외로움과 슬픔을 위한 곡을 쓰는 이유일까. 김 씨는 자신이 이러한 곡을 쓴 것이 가장 정직하게 시대에 반응하는 표현이라 생각한다고 전한다. ▲찬양사역자 김명식ⓒ데일리굿뉴스 "'아! 이런 곡을 써야겠다' 해서 쓴 곡은 없어요. 시대에 반응하는 국민 한 사람으로 서 살아가다 보니 곡을 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 이후 어떤 사람은 기부를 하고, 어떤 사람은 팽목항에 직접 가는 모습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곡을 만들게 됐죠." 결국 김 씨가 곡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새 아침이 올 꺼야> 노래 중 '깊은 밤 지나서 아침이 오면 어둠은 사라져'란 가사처럼, 현실 앞의 절망을 넘어서면 미래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단 소망이었다. 지난 2015년 10월 1일은 김명식 씨의 솔로 앨범이 나온 지 20년이 되던 해다. 20년넘게 숨 가쁘게달려왔던 그에게 노래란 어떤 의미일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찬양을 부르고 뜨거운 박수갈채도 받아 봤지만, 무엇보다 제일 감사했을 때는 팬 분들에게 '당신의 노래가 나를 살게 했어요. 너무 힘들었는데 노래 가사를 묵상하며 견딜 수 있었어요'란 말을 들었을 때 인 것 같아요. 노래란 참 매력적이에요. 저는 노래 한 곡을 만들어 대중에게 흘려 보내는 데, 돌아올 때는 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인생이 함께 돌아오잖아요. 이럴 때 저의 노래가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는 게 참감사하죠." 나아가 김 씨는 앞으로 '순회음악 전도사'가 되고 싶단 바람을 전했다. 교회가 부탁해서 찾아가는 사역자가 아닌, 하나님처럼 낮은 곳에 찾아가찬양으로 사람들을섬기는 자가 되고자 한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순종하며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저의 찬양으로 한 영혼이라도 살리고 싶습니다. 또한 영혼을 살리는 곡을 만들며 다음세대를 양성하는 스승이 되는 것도 저의 꿈입니다." ▲<새 아침이 올 꺼야> 앨범 표지ⓒ데일리굿뉴스

한연희 기자2017-01-26

남들이 우러러보는 대학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가진 돈 전부를 노숙인 급식에 쏟아 부은 목사가 있다. 말끔했던 손과 외모가 거칠어지고 투박해졌다. 일주일 중 6일을 매번 시장을 보고 식재료를 다듬고 밥을 짓는 데 쏟는 탓이다.17년째 영등포 롯데백화점 앞에서 노숙인 저녁 무료급식사역을 진행하고 있는 밥사랑열린공동체박희돈 목사를 만나봤다. 영등포 롯데백화점 앞에서 무료급식 17년째 왜 영등포 백화점 앞일까. 노숙인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이고,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먹일 수 있는 광장이기 때문이다. 유리 방랑하는 노숙인들이 몰려 있으면 냄새나고 위협스럽다며 곧바로 민원이 제기되기 때문에 백화점 문이 닫히는 저녁 8시~8시 30분에 배식을 한다. 기자가 박 목사를 만난 날은 설 대목을 맞아 백화점이 연장영업을 하는 바람에 강추위 속에서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광장에 플라스틱 의자가 놓이고, 밥주걱 놀리는 손이 바빠진다. 목동의 한 교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나와 한 쪽에서는 찬양으로 마음을 녹이고 한쪽에서는 삼계탕으로 몸을 녹여 준다. 설 선물로 준비한 양말, 떡 꾸러미도 하나씩 배분된다. 박희돈 목사는 왼쪽 귀가 잘 안 들린다. 청각 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청각을 잃지 않으려고 스테로이드를 먹다보니 몸까지 영향을 미쳐 움직임이 둔하다. 그래도 광장 중앙에 서 있는 박 목사에게 끊임없이 누군가 찾아와 가까이 데고 인사를 건넨다. 모두 노숙자들이다.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꾀는 듯한 대화는 오랜 기간 쌓인 신뢰의 깊이를 가늠케 해준다. "이 사람들은 노숙자 중에서도 진짜 노숙자들이에요. 대포통장, 위장결혼 등의 덫에 걸려 아예 주민등록증이 말소되거나 행불자 신세인 사람들도 있어요. 진짜 낭떠러지에 있는 사람들이죠. 예수님이 공생애에 돌본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창녀의 손도 잡아주시지 않았습니까. 교회가 사명감을 갖고 대해야 합니다." 그의 인생에 이처럼 노숙인이 1순위로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뭘까. 가족까지도 등진 채 말이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사회복지학 교수, 원자력병원 원목실장, 어린이집 원장이 그가 잘나가던 때 갖고 있는 직함이었다. 수입도 대기업 임원 부럽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1년 지방 강의를 하고 새벽녘에 내린 영등포역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추위를 가릴 수 없을 만큼 얇은 옷을 입고 쓰레기통을 뒤져 다 식은 컵라면 국물을 찾아내 먹는 한 여성 노숙인을 본 것이다. "‘왜 이 시간에 이런 걸 먹느냐’고 물으니 ‘낮에 남자 노숙자들과 함께 구걸해서 먹으면 그 대가로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을 할 수도 있어서 이렇게 밤늦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때 깨달았죠. 목사이자 사회복지사인 내가 엉뚱한 데서 헤매고 있었던 거구나. 아마 하나님께서 이걸 알게 하려고 그 여성 노숙인을 만나게 해준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수 그만두고 밥퍼주는 사람으로 아내는 잘 나가던 그가 갑자기 노숙인들에게 모든 걸 쏟아 붓자, 남편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만 둘 수 없었고, 아내는 이혼장을 내밀었다. 아내와 자녀가 그렇게 곁을 떠났다. 그 충격으로 박 목사는 한쪽 귀, 한쪽 눈의 기능을 거의 잃었다. "다 그만두고 목사로 돌아와 노숙인 밥 주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친구들도 다 '미쳤다'고 했어요. 그래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주님의 뜻이란 생각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끌어 들인 것이죠. 이제는 사역을 이해해주는 여자를 만나 재혼했고, 아기도 입양해 키우고 있습니다. 토요일을 빼고 주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저녁밥을 직접 해서 나눠주고 있어요." 그는 "재정은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섬기고 있다"면서 "교회가 돈을 주면 그 돈에 맞게 음식을 직접 해서 준다. 오늘 섬기는 교회는 좀 넉넉하게 보내줘 삼계탕을 만들었다"고 활짝 웃었다. 백화점이 불을 꺼야 시작할 수 있는 일, 추운 겨울도 밖에서 먹여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는 노숙인들을 위한 실내 식당, 목욕실, 세탁실을 갖춘 시설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고 밝혔다. "추위에 떨지 않고 먹게 하고, ‘냄새 난다’는 면박을 받지 않게 하고 싶어요. 교회가 말로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칠게 아니라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 도움이 필요해요." 가족과 사회에 버림받고 절벽 같은 곳에서 몸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에게 베푸는 호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다시 버림받을까봐, 그리고 이용당할까봐 자꾸만 행패부리며 상대를 시험한다. 17년 세월을 변함없이 견뎌 주고 있는 박 목사에게 그들이 형님으로 불리는 이유다. 밥차에 붙어 있는 '당신을 사랑합니다(I LOVE YOU)'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얼굴 나오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이들이지만 방송국 카메라 빛을 뚫고 또다른 누군가 쭈뼛쭈뼛하며 박 목사에게 걸어가 인사한다. '사랑'은 결국 통하는 법이다. ▲이날은 제자교회에서 지원 및 봉사를 맡았다. ⓒ데일리굿뉴스

박은정 기자2017-01-25

만약 두 팔을 잃게 된다면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두 팔을 잃었지만 의수로 그림을 그리며 세계 최초로 '수묵 크로키'를 창시한 사람이 있다. 바로 석창우 화백이 그 주인공. 그는 두 팔을 잃고 삶이 뒤바뀌었다며, 하나님이 기적을 경험하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숱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2015년부터 지금까지 성경필사에 도전하고 있는 석 화백을 만나봤다. 석창우 화백 인생 바꾼 네 살배기 아들의 "그림 그려줘" 전기기사로 일하던 30대 젊은 가장 석창우 화백에게 1984년 10월 29일 2만 2900V의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로 인해 석 화백의 두 팔은 까맣게 타 들어가고 발가락 두 개는 절단됐다. 이후 석 화백의 두 어깨엔 플라스틱 의수가 끼워졌다. 석 화백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수술과 재활치료의 시간을 보내던 중 네 살배기 아들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말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버렸다.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림책을 펴 독수리와 참새 등 동물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랬더니 아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석 화백이 그린 그림은 주변을 놀라게 했다. 정작 두 팔이 있었을 때 몰랐던 재능을 두 팔을 잃고 나서 발견하게 된 것. 석 화백은 아내와 친척들이 그림을 배워보란 권유에 화실 이곳저곳을 찾아갔다.하지만 두 팔이 없어 물감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단 이유로 화실에서 거부 당했고, 먹물 하나만 있으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서예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됐다. "화실을 돌아다니며 다른 취미를 알아보란 말까지 들었었어요. 그러던 중 처제가 여태명 선생님을 소개해 줘 서예를 배우게 됐죠. 여태명 선생님도 처음에 찾아 뵀을 때 고개를 저으시더라고요. 그래도 선생님께 무작정 가르쳐달라고 매달리며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됐어요." 오기로 시작했지만 의수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의수의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돼 있어 붓을 잡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직접 붓에 구멍을 뚫고, 발로 먹을 갈며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올림픽 폐막식 퍼포먼스…"하나님과 동행했기에 가능했죠" 석창우 화백은 날을 새는 것은 물론 피땀을 흘려가며 서예에 몰두했다. 서예로 새롭게 시작된 그의 삶은 성공적이었다. 서예를 시작한 지 3년이 되던 1991년 전라북도 서예대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서예대전, 대한민국현대서예대전 등 곳곳에서 상을 휩쓸었다. 석 화백의 집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연히 김영자 교수의 누드 크로키 강의를들은 후 사람의 움직임을 짧은 시간 안에 표현하는 '크로키' 기법에 빠져들었다. 당시만 해도 연필로 크로키를 그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먹을 활용하는 사람은 없어, 석 화백은 동양의 먹과 서양의 크로키를 접목시킨 '수묵 크로키' 기법을 창시하게 됐다. ▲석창우 화백ⓒ데일리굿뉴스 특히 지난 2014년 3월, 소치 장애인겨울올림픽 폐막식에 올려진 석창우 화백의 퍼포먼스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두 팔이 아닌 의수로 짧은 시간 안에 올림픽 선수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단 2분 내외에 그리며 자신의 기량을 온 세계에 전했다. 사실 소치 장애인겨울올림픽 폐막식 퍼포먼스는 석 화백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폐막식 퍼포먼스 시간이 8분 정도로 계획됐다가 2분 40초로 갑자기 줄어든 것. "퍼포먼스를 준비하면서 '완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란 두려움이 너무 컸어요. 몇 차례 리허설을 해봤지만 2분 내외에 완성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올림픽 현장에 가기 전 예배를 드리는 데 '주와 동행하면 된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능치 못함이 없다'란 확신을 갖게 됐어요. 소치에 도착했을 때도 계속 '저와 동행해주세요'를 외치며 기도했죠. 그 결과 주어진 시간보다 3초 더 빨리 완성할 수 있었어요." "성경필사가 제 삶의 1순위 됐어요" 요즘 석창우 화백은 성경필사에 빠져있다. 2015년 61살이 되던 해부터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25m 두루마리 화선지에 성경필사를 하고 있다. 어느덧 시편을 넘어 잠언을 쓰고 있다. "손 있이 30년, 손 없이 30년을 살았는데 남은 삶을 뭐하며 살지 고민이 들었어요. 고민을 하다가 성경을 읽어본 적은 있지만 필사를 해본 적이 없단 생각에 성경필사를 시작하게 됐죠." 큰 그림만 그려왔던 석 화백에게 작은 글씨를 쓰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석 화백의 그림은 더 정교해졌고, 정교해진 그림처럼 그의 신앙도 더욱 커졌다. "성경을 읽으며 필사를 하니 마치 제가 성경 속 인물이 되는 것 같았어요.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은혜가 저에게 전달되는 것 같더라고요. 성경필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묵상하고 깨닫게 됐어요." 양 팔 없이 어느덧 30여 년을 살아온 석 화백은, 자신의 두 팔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기적을 엿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하루하루 살아가며 하나님의 기적을 몸소 경험하고 있어요. 슬픔과 두려움만 가득했던 저의 삶이 두 팔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더 멋지게변화됐죠." 석 화백은 앞으로 삶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성경필사에 도전할 계획이다. 완성된 성경필사는 전시 등을 통해 예술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싶은 바람을 갖고 있다. "가볍게 시작했던 성경필사가 이제는 저의 삶의 1순위가 됐어요. 그래서 완성된 성경필사는 한 곳에 모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저의 성경필사 작품을 보면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석창우 화백은 2015년부터 지금까지 성경필사를 하고 있다.ⓒ데일리굿뉴스

김준수 기자2017-01-22

전 세계 인구의 24%, 17억을 차지하고 있는 무슬림들. 어느새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웃'이 됐다. 인터서브 전 국제총재로 20년이 넘도록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해온 폴 벤더 사무엘 선교사는 한국교회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두려움'은 사단의 전략…'이슬람포비아' 극복 필요" 19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된 '러브 무슬림 컨퍼런스' 주강사로 참석한 폴 벤더 사무엘(Paul Bendor-Samuel) 선교사는 그 동안 닫혀있던 이슬람 세계에 복음의 문이 열리고 있다며 무슬림에 대한 전도를 막고 있는 '이슬람포비아' 극복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사무엘 선교사는 "교회를 향한 사단의 전략은 두려움으로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며 "20년간 무슬림을 만나오면서 느낀 점은 이슬람포비아는 복음과 반대된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낸다"고 말했다. 유럽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슬람의 성장'이 아닌 '세속주의'로 단언했다. 사무엘 선교사는 "유럽의 교회들이 텅 비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며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야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다. 신앙이 점점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주일에 영화관을 가거나 취미를 즐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마치 무슬림들이 온 유럽을 뒤덮을 거라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이슬람포비아를 확산시키는 잘못된 통계가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슬림의 출생률은 그들의 교육 수준이나 부의 수준에 따라 굉장히 다양하게 나타난다"며 "무슬림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출산율이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회, 무슬림에게 하나님의 사랑 전해야"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우려에 대해서도 지나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최근에 한국의 종교 중에서 기독교가 가장 큰 규모라는 통계가 발표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마주한 가장 큰 도전은 이슬람이 아니라 아무 신도 믿지 않는다고 대답한 사람들이 증가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역할은 "세속적이고 물질주의적인 환경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무슬림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사역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무엘 선교사는 "90%에 가까운 무슬림들이 기독교인과 친교를 나누고 있지 못하다는 충격적인 통계가 있다"며 "기독교인들은 우리에게 다가온 무슬림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환영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나눌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폴 벤더 사무엘 선교사는 인터서브 소속으로 1990년부터 2002년까지 튀니지에서 무슬림을 대상으로 의료선교 사역을 펼쳤다. 이후 2003년부터 12년 동안 인터서브 국제총재로 섬겼다. 현재는 옥스퍼드 선교연구센터(Oxford Centre for Mission Studies) 디렉터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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