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만 기자2018-11-15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개혁주의자들의 구호다. 이 말은 교회가 특별하게 '개혁된' 때가 있었음을 전제한다. 종교개혁 기념일은 교회가 말씀과 믿음으로 '개혁된' 때를 기억하는 날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 지 1년이 지났다. 한국교회는 새로운 개혁, 자기 깨어짐의 변혁이 진행되고 있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이에 본지는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과제로 1)세습, 2)혐오와 배제, 3)신학교육의 위기 등을 총 세 차례에 걸쳐 기획 연재한다.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 주제 '신학교육의 위기'를 다룬다. 기로에 선 한국교회 신학교육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지난해와 올해까지 많은 교단 신학교들이 크고 작은 학내 분규와 교단과의 갈등으로 문제를 겪고 있다. 또한, 신입생 수급 어려움과 이로 인한 재정난, 무인가 신학교의 난립으로 인해 한국교회 신학교육이 위기를 맞고 있다. 예장합동 총신대학교는 김영우 총장과 재단이사들의 전횡으로 학사마비 사태를 겪었다. 총신대뿐만 아니라 침신대와 한신대도 일부 재단이사들의 학교 사유화 시도와 총장선출 문제로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되고 학사운영이 마비되는 등 진통을 겪었다. 이런 문제들 속에 각 교단 산하 신학대학원의 신입생 수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총신 신대원의 경우 2018년도 입시에서 293명 모집에 475명이 지원해 1.62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장신대 신대원은 2018년 2.14대 1, 합신과 백석 신대원은 각각 1.5대 1과 1.18대 1에 머물렀다. "장신대 박상진 교수는 "외부적 요인 외에도 내부적으로 신학교육과 목회 현장과 분리, 신학 내 학문 간 분리, 교육목적과 과정의 분리, 이론과 실천의 분리, 소통의 부재 등 요인도 신대원 진학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신학교를 향한 관심이 줄어들고 한국교회의 교세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각 교단 신학교들은 8~90년대 교회 부흥기에 맞춰 설정된 입학정원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개신교는 신자 수 967만 명(2015 인구주택총조사)에 목사 수는 대략 6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반면 철저하게 성직자 수급관리를 하고 있는 천주교의 경우 신자 574만 명에 신부는 4,998명 (2017년 천주교 자체통계)이다. 교세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개신교 목사의 수가 천주교 신부에 비해 대략 7.5배나 많다. 이는 정통교단 신학교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부흥기 때 우후죽순 생겨난 무인가 신학교에서 ‘목회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무인가 신학교에서는 제대로 된 신학 커리큘럼 없이 속성으로 1년에서 빠르면 1주일 만에 신학교졸업장을 딸 수 있다. 국내 주요 신학대학원은 각 교단 수세 교인이면서 학사학위를 소지하고 목사후보생으로 추천을 받아야 응시자격이 주어진다. 시험 과정도 성경과 영어, 철학 등 철저한 필답고사와 면접고사를 치르는 게 보통이다. 총신 신대원의 경우 합숙면접을 통해 성격장애, 범죄경력 등을 철저하게 평가한다. 하지만 이들 무인가 신학교의 문제는 어떠한 검증 절차도 없이 '누구나', '쉽게' 목사가 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유독 한국교회에서 목회자의 자질이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미국 ATS처럼 초교파적인 신학교육 인증기관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총신대학교 총장 대행을 지낸 김길성 교수는 "무인가 신학교 문제는 종교의 자유 영역이기 때문에 국가조차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학함의 과정을 '의사 수련'에 비유했다. "의과대학이 예과 본과를 두는 것처럼 목회자들도 학부 4년 과정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신학대학원 3년 과정에서 목회자가 되기 위한 교단신학을 철저히 훈련하고 목회 현장에서 강도사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쉽게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세상은 계속해서 자기 혁신 중이지만 한국교회와 신학교들은 해묵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신학생들은 학내분규 속에 온전히 공부하지 못하고, 졸업하고 나서도 갈 곳이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신학교는 신입생 수급 차질로 존폐위기다. 오랜 시간 당면한 신학교육의 위기 앞에 무책임하게 대응했던 신학교와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현 상황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뼈를 깎는 자기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위클리굿뉴스 11월 11일, 47호 기사)

김신규 기자2018-11-18

한국교회는 1년에 두 번 감사절을 지킨다. 7월의 맥추감사절과 11월 추수감사절이다. 7월의 맥추감사절은 1년 중 상반기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는 차원에서, 11월 추수감사절은 1년을 마감하는 시점에 다시 한 번 자신의 한해를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추수감사절은 성경에는 없는 절기다. 성탄절이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추수감사절이 유래된 미국을 비롯해 독일과 영국 등 유럽과 우리나라 등에서 추수감사절은 세계의 명절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매년 11월 셋째주일로 정착돼 지키고 있다. 이는 종교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이 오늘날 미 대륙에 도착해 지키기 시작한 날을 따르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 도입 역사를 살펴보면 1904년 9월 13일 서울 구리개 제중원에서 회집된 제4회 회의에서 서경조 장로가 “우리나라 교회가 이전에 비해 왕성한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이므로 감사일을 정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열락하며 감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연설한 내용이 나온다.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 기록 자료에는 “무어 목사는 금년(1904년)부터 바로 시행하자고 했으나, 헌트 목사가 5인 위원회로 1년간 다른 선교회와 의논한 후 동일한 날로 정하자고 건의하여 이를 채택했다. 5인 위원은 헌트, 언더우드, 방기창, 심취명, 양전백이 선임되었고, 이들은 의논한 후 위원장 헌트 목사가 보고했다. 일단 ‘금년 감사일은 양력 11월 11일로 정하였다 하니 정익노 장로가 동의하여 채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돼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미국에서 지키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다 첫 선교사 알렌 의사 내한 정착 기념일(10월 26일)을 절충해 1914년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수용했으나 일방적으로 따라간 것도 아니다. 한국개신교 시작과 부흥을 기념한 측면이 강했다. 초기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를 기념하고 교회가 흥왕함에 따라 감사의 마음으로 그 날을 제안한 서경조 장로나, 선교사에 대해 깐깐한 태도를 지녔던 한석진 목사도 11월 추수감사절을 반대하지 않았다. 한편 추수감사절을 우리나라의 추석 절기에 맞춰 지내자는 의견도 있다. 기독교단체 샬롬나비(상임대표 김영한 교수)는 “추수감사절을 추석의 시기에 지키는 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인 추석이라는 절기를 통해 불신자 전도를 가능하게 한다”면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시도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친숙한 문화로 이해돼, 전도활동에 있어서도 더욱 효과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교회가 해마다 지켜온 추수감사절에는 단순히 한 해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것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부흥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기념의 의미에서 시작됐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차진환 기자2020-02-27

영광, 전쟁 전중후 좌우 이념 대립 극심 전쟁 2달內 전교인 생매장·수장당해 순교자들의 피…지역 복음화로 꽃피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민족상잔의 비극 속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건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전쟁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신앙을 키워온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에 소재한 야월교회는 한국전쟁이 있던 해 전교인 순교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게 된다. 세계 어느 곳을 찾아봐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전교인이 희생당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 죽음 앞 순교자의 믿음은 소금처럼 반짝였다 7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반짝이는 염전이 펼쳐진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은 ‘소금밭 천지’라고 불린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70년 전한국전쟁 당시 염산면 지역 교인들의 피가 뿌려진 곳이다. 야월교회는 1908년 4월 유진벨 선교사와 염산면 야월리 지역 교인들로 인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갖은 핍박 속에서도 성도들은 신앙을 잘 지켜나갔다.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전쟁의 피바람이 영광을 덮쳤다. 북한 공산군의 일개 부대가후방 교란작전을 펼쳤고남로당 김삼룡의 부대는 지역 주민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영광군 지역은 이념 갈등이 가장 치열한 곳이었다. 군인뿐만 아니라 주민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심했다. 야월교회 성도들은 1950년 9월 말부터 11월초까지 약 두 달 동안 교인 모두가 순교하게 된다. 5명은 목에 돌을 멘 채로 수장을 당하고 나머지 60명은 생매장당했다. 1km 정도 떨어진 ‘큰북재’란 곳으로 끌려가 자신이 묻히게 될 땅을 파야만 했다. 끌려간 가족들은 굴비 엮듯이 엮여 생매장을 당했다. 살아 나오려는 사람들은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당시 9살 어린아이던 최종한 장로(80)는 끔찍했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최 장로는 “그때 우리 가정이 예수를 믿지 않고 유교 사상이 투철했기 때문에 우리 아버님이 인민군에 끌려가 인민재판 후 죽지 않고 살았다”며 “6.25 전쟁을 생각만 하면 아직도 끔직하다”고 회상했다. 예수 믿어 망한 동네…다시 신앙의 꽃 피우다 순교 이후 야월도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한명도 남지 않게 된다. 전 교인이 목숨을 잃게 되자 마을에는 ‘예수를 믿고 망한 동네’란 인식이퍼졌다. 교회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도 뚝 끊겼다. 살아남은 교인도 없었기 때문에 순교 당시의 흔적을 더듬어 가기도 어려웠다. 담당 교역자가 부재중인 가운데 인근 염산교회 청년들이 건너와 아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쉽지 않았다. 예수 믿다가 온 가족을 다죽일 셈이냐는 어른들의 구박에 아이들은 교회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1988년 배길양 목사가 부임하고 나서야 38년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쫓게 됐다.배 목사는 순교자들의 명단을 확정하기 위해 면사무소를 찾아갔다가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된다. 순교자들이 40년이 다 돼가도 사망신고가 되지 않은 채 서류상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교회가 전소되고 일가족이 몰살당하다 보니까 누구 한 사람 사망신고를 해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야월교회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현재 야월도에는 280여 세대가 있는데 그 중 100여 세대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약 35%의 지역 복음화가 이뤄졌다. 순교한 야월교회 모든 성도들은 염산의 명물 소금처럼 이 지역에 녹아 들어 복음의 터를 닦았다.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독교인순교기념관에는 ‘맞잡은 손’이란 조형물이 있다. 순교의 아픈 상처를 담은 손과 하나님의 손이 만나 용서와 화해로 나아간단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야월교회 심재태 담임목사는 “순교자들이 보여줬던 순교신앙을 되새겨야 할 때”라며 “그때 당시순교자들의 신앙을 돌아봄으로써 우리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준만 기자2019-01-27

본지는 우리 주변의 선한 이웃과 가슴 따뜻한 삶의 현장을 소개하는 <굿-뉴스>를 연재한다.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선한 행적을 통해 아름다운 사회가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박경진 장로(꽃재교회)는 한쪽 눈을 감은 채 태어났다. 외눈박이, 애꾸,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놈"이란 놀림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컸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나무를 팔아 생계를 꾸려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 소리에 이끌려 신앙을 갖게 됐다.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는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배운 감사와 사랑, 어린 시절의 가난은 그가 어려운 이웃을 이해하고 섬기게 된 배경이 됐다. 힘든 시절을 딛고 진흥문화를 설립해 업계 1위의 캘린더 기업으로 성장시킨 박 장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공'을 사회에 나누고자 했다. 그러던 중 해외입양인들의 사연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박 장로는 해외 입양인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1996년 첫 행사를 시작으로 해마다 '해외입양인초청모국방문' 행사를 열었다. 행사를 통해 해외 입양인들은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과 5000년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면서 건강한 자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열등감과 정체성 혼란으로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던 이들은 '나는 한국인'이라는 건강한 자부심을 얻고 돌아간다고 한다. 지난해까지 23년째 행사를 이어오고 있는 박 장로는 "해외입양인들이 이중문화의 갈등 속에서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고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알리는 민간 외교사절의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박 장로는 지난 2010년 '진흥장학회'를 설립해 재능과 열정을 갖췄지만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학생을 선발해 돕고 있다. 지난해까지 4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진흥장학회의 시작은 박 장로가 회갑 축하연 대신 그 비용을 사원 자녀들을 위한 학자금으로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아내인 한춘자 권사의 칠순 때 개인 소유의 빌딩과 임대 수입금, 자서전의 판매 수익금을 출연해 장학기금을 조성했다. 장학회 설립에 대해 그는 "지난날 성장 과정에서 체험한 뼈저린 가난을 기억하고, 기독교의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다음 세대를 위해 쓰겠다는 '평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하게됐다"며 "앞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장학회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차진환 기자2020-03-08

합동,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1호 지정 단일교회 최다 순교자…대부분 수장당해 천국소망으로 원수를 용서하는 모습 보여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의 설도항, 잔잔하게 물결치는 서해안에 맞닿은 곳. 부두에는 한적한 배 몇 척이 놓여 있고 그곳을 바라보는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다. 70년 전 한국전쟁당시 전남 영광군에서는 194명의 기독교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북한군을 비롯한 공산 세력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기념탑 뒷길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낮은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가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1호로 지정한 염산교회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당시 이 길을 따라 설도항 앞바다에서 수장당했다. 단일 교회로서는 가장 많은 인원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기독교 最多 순교자 발생 교회 전남 영광 염산면은 남로당 김삼룡의 주 활동 무대였고 전쟁 전부터 그를 추종하던 세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공산당의 유격대가 들어와 후방 교란작전을 펼치면서 염산면 내 이념 갈등은 극에 달했다. 한국전쟁 당시 염산교회는 77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전교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숫자다. 10월 3일부터 이듬해 1월 6일까지 약 3개월의 시간을 거쳐 순교했다. 피난 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성도들은 교회를 지켰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새끼줄로 엮은 돌을 매단 채 교회 앞 바닷가로 끌려가 수장 당했다. 돌이나 몽둥이질에 목숨을 잃었고 죽창에 찔려 생매장을 당하면서도 가해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염산교회 순교의 현장은 잔혹했지만 성도들은 돌아갈 천국을 가슴에 품고 담대히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한국전쟁 당시 염산군에 주둔한 공산군과 추종 세력에 의해 77명의 성도가 순교했다. 대다수의 성도는 무거운 돌을 목에 매단 채 수장당했다.ⓒ데일리굿뉴스 목 베여 순교당한 어린 자매들 당시 담임이던 김방호 목사를 비롯해 염산교회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부임 후 석달 만에 전쟁을 맞닥뜨린 김 목사는 미군 스파이로 몰리며 지역 공산 세력에게 끌려갔다. 8명의 식구와 함께 몽둥이질을 당하며 순교했다. 공산당 세력에게 교회와 집을 빼앗기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교회와 성도를 지키겠단 일념 하나로 순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일반 성도와 28명의 어린 주일학교 학생들의 순교도 이어졌다. 노병재 집사와 그의 3형제 가족 22명은하루아침에 수장당했다. 노 집사는 바다에 빠져서도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찬양하며생을 마쳤다. 故 박귀덕 권사의 네 딸은 예수 믿는 집의 자식이란이유로 모두 수장 당했다. 첫째 옥자(15)는 막내 미자(3)를 업고 나머지 동생들에게 “울지 마라, 우리는 지금 천국 가고 있단다. 천국 가니까 울지 마라”며 위로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에 약이 오른 좌익 세력의 한 남자가 옥자와 미자의 목을 베어 바다로 던졌다는 것이 당시 목격자의 증언이다. 김조남(11) 어린이는 집에 들이닥친 공산당 무리에게‘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어디 있냐’며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김 군은 “나는 어디 계신지 몰라요. 그리고 나는 예수 믿으니까 천국 갈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산당은 김 군의 입을 찢어 죽였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한 천국소망 과반의 성도가 목숨을 잃고 예배당이 전소되자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신앙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여전히 살아 이어지고 있었다.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인 김익 전도사는 가족이 순교할 당시 처가에 있다가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다. 김전도사는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은 아픔에도 1951년 4월 염산교회에 4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당시 목격자에 따르면 김 전도사는 첫 예배에서 ‘온가족이 죽임을 당한 곳이기에 생각하기도 싫지만 나는 이곳에 내 부모 형제들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가해자 들을 예수 믿게 해서 천국 가게 하는 것. 참된 원수 갚는 일이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2년 동안 순교자들과 공산 세력을 추종했던 주민들의 화합을 위해 헌신했다. 김 전도사는 결국 시력을 잃었고 여러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민들과 성도들은 그를 일컬어 ‘사랑의 사도’라고 불렀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좌우 이념의 갈등과 예수를 믿는단 이유 하나로 죽어야 했다. 김 전도사는‘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소 실천해가며 복음을 염산 지역에 심었다. 염산교회 임준석 담임목사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반복되면 안 된다”며 “우리가 순교자들이 가졌던 순교자의 천국 신앙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보라 기자2019-12-22

'갈등'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다. 특히 올해는 내부에서 곪던 갈등이 한꺼번에 터지며 증폭됐다. 서울 도심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 각종 집회로 몸살을 앓았고,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좌우로 나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2013년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사회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연간 최대 246조 원. 6년이 지난 지금, 사회갈등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손해는 짐작조차 어렵다.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등의 골을 짚어봤다. '갈등', 한국사회 둘로 갈라지다 "올해는 이념 갈등이 유독 피부로 와 닿던 한해였습니다.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좌, 우 양극단으로 나눠 공격하고 분열하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_직장인 김 모 씨(남, 50) 지난 9월 서울 도심이 태극기와 촛불로 갈라졌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두고 반대자들과 지지자들 간 맞불집회가 열린 것. '광화문 태극기집회'와 '서초동 촛불집회'로 불리며 광장의 정치로 양분된 두 집회는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을 고조시키며 3개월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다. 한국사회의 갈등은 특히 올해 격해지는 양상을 띠었다. 갈등에서 촉발된 대규모 집회와 행진으로 전국 도심 곳곳이 몸살을 앓았고, '모 아니면 도'라는 이분법적 잣대가 한국사회 내 팽배해졌다. 갈등 요소도 과거 남북이나 지역 갈등에서 지금은 이념, 빈부, 세대, 성별 등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9일 발표한 '2019년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는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사회 주요 집단별 갈등 중 ‘진보와 보수’를 꼽은 응답자는 91.8%로 2016년 조사보다 14.5%p 상승했다. 이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85.3% △대기업과 중소기업 81.1% △부유층과 서민층 78.9% △기업가와 근로자 77.7% 등의 순으로, 모두 70%를 넘겼다. 최근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하면서 다시금 논란이 불거졌던 '남성과 여성' 간 갈등은 3년 전 조사 때보다 11.8%p 상승한 54.9%로 집계됐다. 올해 처음 조사한 한국인과 외국인 간 갈등도 49.7%로 집계됐다. 특히 경제적 양극화에 대해서는 '심각하다'는 응답이 90.6%에 달해, 국민이 느끼는 갈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방증했다. '불공정·불평등'이 낳은 병폐 "이번 정부가 공정과 평등을 외쳤지만, 특히 조국 전 장관 문제나 최저시급 인상, 젠더 등 어떤 문제에 대한 조치에서 오히려 또 다른 불공정을 낳는 모습을 보았어요. 유독 불공정과 불평등을 체감하고 깊이 생각했던 올 한해였죠."_ 직장인 최 모 씨(여, 31) 전문가들은 갈등을 고조시킨 원인을 '공정'에서 찾았다.2016년 국정농단 사건으로 정권을 넘겨받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같은 문제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각종 의혹, 이른바 '조국 사태'가 불거진 것. 공수 교대에도 특권층의 비리와 불공정 논란은 되풀이됐고, 현 정부의 핵심 가치인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는 크게 훼손됐다.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은 분노했고 사회적 갈등은 커져만 갔다. 참지 못한 국민은 때로는 거리에서, 때로는 웹에서 울분을 터뜨렸다. '외상 후 울분 장애(PTED)라는 개념을 확립한 정신의학자 독일 샤리테대학 미하엘 린덴 교수는 "울분은 일상에서 겪은 부정적인 감정이 정의나 공정하지 못한 특정 사건을 계기로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2010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한국사회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출간 11개월 만에 100만 부를 넘기는 등 당시 기록적인 판매부수는 외신마저 주목할 정도였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책의 인기 요인과 관련해 "한국사회의 공정과 정의에 대한 욕구와 갈증"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사회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지 10년. 한국사회는 '상실의 시대'로 퇴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공정은 한국사회가 앓는 만성적인 고질병이라며 '중환자 상태'라고 진단했다. 신광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공정은 올해의 문제가 아닌 우리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며 "올해는 그동안 고착됐던 불공정 문제가 조국 교수 법무부 장관 임명 관련 등이 정치 쟁점화되면서 부각된 측면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법이나 제도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또 엄격한 집행 요구가 되는 시작단계부터 단추가 안 끼워지는데 제도만 바꾼다고 공정성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사회 구조적·제도적 측면과 연결돼 있어 오랜 기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준만 기자2019-01-27

본지는 우리 주변의 선한 이웃과 가슴 따뜻한 삶의 현장을 소개하는 <굿-뉴스>를 연재한다.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선한 행적을 통해 아름다운 사회가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박경진 장로(꽃재교회)는 한쪽 눈을 감은 채 태어났다. 외눈박이, 애꾸,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놈"이란 놀림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컸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나무를 팔아 생계를 꾸려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 소리에 이끌려 신앙을 갖게 됐다.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는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배운 감사와 사랑, 어린 시절의 가난은 그가 어려운 이웃을 이해하고 섬기게 된 배경이 됐다. 힘든 시절을 딛고 진흥문화를 설립해 업계 1위의 캘린더 기업으로 성장시킨 박 장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공'을 사회에 나누고자 했다. 그러던 중 해외입양인들의 사연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박 장로는 해외 입양인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1996년 첫 행사를 시작으로 해마다 '해외입양인초청모국방문' 행사를 열었다. 행사를 통해 해외 입양인들은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과 5000년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면서 건강한 자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열등감과 정체성 혼란으로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던 이들은 '나는 한국인'이라는 건강한 자부심을 얻고 돌아간다고 한다. 지난해까지 23년째 행사를 이어오고 있는 박 장로는 "해외입양인들이 이중문화의 갈등 속에서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고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알리는 민간 외교사절의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박 장로는 지난 2010년 '진흥장학회'를 설립해 재능과 열정을 갖췄지만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학생을 선발해 돕고 있다. 지난해까지 4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진흥장학회의 시작은 박 장로가 회갑 축하연 대신 그 비용을 사원 자녀들을 위한 학자금으로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아내인 한춘자 권사의 칠순 때 개인 소유의 빌딩과 임대 수입금, 자서전의 판매 수익금을 출연해 장학기금을 조성했다. 장학회 설립에 대해 그는 "지난날 성장 과정에서 체험한 뼈저린 가난을 기억하고, 기독교의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다음 세대를 위해 쓰겠다는 '평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하게됐다"며 "앞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장학회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김신규 기자2018-11-18

한국교회는 1년에 두 번 감사절을 지킨다. 7월의 맥추감사절과 11월 추수감사절이다. 7월의 맥추감사절은 1년 중 상반기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는 차원에서, 11월 추수감사절은 1년을 마감하는 시점에 다시 한 번 자신의 한해를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추수감사절은 성경에는 없는 절기다. 성탄절이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추수감사절이 유래된 미국을 비롯해 독일과 영국 등 유럽과 우리나라 등에서 추수감사절은 세계의 명절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매년 11월 셋째주일로 정착돼 지키고 있다. 이는 종교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이 오늘날 미 대륙에 도착해 지키기 시작한 날을 따르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 도입 역사를 살펴보면 1904년 9월 13일 서울 구리개 제중원에서 회집된 제4회 회의에서 서경조 장로가 “우리나라 교회가 이전에 비해 왕성한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이므로 감사일을 정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열락하며 감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연설한 내용이 나온다.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 기록 자료에는 “무어 목사는 금년(1904년)부터 바로 시행하자고 했으나, 헌트 목사가 5인 위원회로 1년간 다른 선교회와 의논한 후 동일한 날로 정하자고 건의하여 이를 채택했다. 5인 위원은 헌트, 언더우드, 방기창, 심취명, 양전백이 선임되었고, 이들은 의논한 후 위원장 헌트 목사가 보고했다. 일단 ‘금년 감사일은 양력 11월 11일로 정하였다 하니 정익노 장로가 동의하여 채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돼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미국에서 지키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다 첫 선교사 알렌 의사 내한 정착 기념일(10월 26일)을 절충해 1914년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수용했으나 일방적으로 따라간 것도 아니다. 한국개신교 시작과 부흥을 기념한 측면이 강했다. 초기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를 기념하고 교회가 흥왕함에 따라 감사의 마음으로 그 날을 제안한 서경조 장로나, 선교사에 대해 깐깐한 태도를 지녔던 한석진 목사도 11월 추수감사절을 반대하지 않았다. 한편 추수감사절을 우리나라의 추석 절기에 맞춰 지내자는 의견도 있다. 기독교단체 샬롬나비(상임대표 김영한 교수)는 “추수감사절을 추석의 시기에 지키는 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인 추석이라는 절기를 통해 불신자 전도를 가능하게 한다”면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시도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친숙한 문화로 이해돼, 전도활동에 있어서도 더욱 효과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교회가 해마다 지켜온 추수감사절에는 단순히 한 해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것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부흥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기념의 의미에서 시작됐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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