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라 기자2018-11-18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1980년 암울한 시대에 좌절하고 고뇌하던 수많은 청춘을 위로한 노래 '청춘'의 가사 일부다. 40여 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었지만, 2018년의 청춘은 여전히 '청춘'을 노래한다. 그렇다면 청춘의 아픔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초상'일까? <위클리굿뉴스>는 창간 1주년을 맞아 주변의 크리스천 청년들이 처한 실제적인 고민을 요청해, 청년 멘토들과 함께 이에 대해 짚어보고 해답을 모색하는 특집 기획을 연재한다. 이번호에서는 청년사역과 목회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를 만났다. Q. 힘들게 직장에 들어왔는데, 일에 치여 말씀과 기도생활이 어려울 때가 많다. 직장을 다니며 멀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민이다. 송태근 목사(이하 송): 말씀과 기도는 중요하고 거룩하게 생각하면서, 일상의 일(work)은 거룩함을 방해하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중세 이원론적 발상에서 기인한 생각이다. 중세는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했다. 그래서 성직자와 세속인을 구별했고, 교회와 일상을 구별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구별을 없앴다. 칼빈은 일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성직'이라는 말을 없앴다. 일에 치여 사는 것도 우리는 '성직'을 감당하는 것으로 믿어야 한다. 바울도 주께 하듯 감당하라고 권면하고 있다(골 3:23). 이런 생각을 갖는다면 말씀과 기도생활이 어렵다는 것 자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대신 그 외의 시간에는 말씀과 기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래 그림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던 빈센트 반 고흐의 <신발>이다. 고흐는 자신의 작품 중 이 그림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상의 일에 최선을 다한 후 낡은 신발을 보며 삶에 대해 위로를 얻었기 때문이다. 즉 내게 맡겨 주신 일을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일'임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빈센트 반 고흐 <신발> ⓒ위클리굿뉴스 Q.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지만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 친구들이 모두 결혼해 조급한 생각마저 든다. 배우자 기도를 할 때, 어떤 부분에 우선순위를 둬야 할까? 송: 결혼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선택의 근거를 성경에 두고,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코 조급해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조급한 마음으로 아무나 만나서 결혼하는 것은 불행을 재촉하는 길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결혼은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자녀를 양육하는 생물학적 결합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듯 좋은 조건이 결합해서 더 좋은 환경을 만들려는 경제적 결합이 돼서도 안 된다. 경제적 결합을 추구해서 결혼했는데 파산하면 다음은 이혼밖에 없다. 결혼은 가치관이 합해지는 과정이다. 나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또 질병과 갈등이 있더라도 함께 극복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은 렘브란트의 <선술집의 방탕아>이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 방탕한 생활을 할 때를 묘사한 그림이다. 흥미로운 것은 방탕한 남자의 얼굴에 렘브란트 자신의 얼굴을, 음탕한 여인의 얼굴에 자신의 아내 사스키아의 얼굴을 넣었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렘브란트의 신앙고백과 같은 그림이다. 렘브란트는 그림으로 일약 유명한 화가가 됐고, 그 '조건'을 토대로 상류층 여인을 아내로 얻었다. 그러나 신앙적인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이 방탕한 아들의 행동과 다르지 않음을 이렇게 그린 것이다. 지금도 '믿음의 배우자'를 외치고 있지만, 속마음은 돈 많고, 외모가 좋고, 조건이 훌륭한 사람들을 우선순위로 삼고 있지 않은가? 바른 우선순위를 통해 배우자를 결정하시기를 소망한다. ▲렘브란트 <선술집의 방탕아> ⓒ위클리굿뉴스 Q. 요즘 교회엔 성비로 놓고 보면 형제보다 유독 자매가 많다. 그래서 일부 자매는 비기독교인과 결혼을 해야 할 것 같다. 크리스천을 만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상황이 고민이다. 송: 우선순위를 갖고 결혼하기를 권한다. 결혼해서 자칫 삶이 불행해지거나 오히려 신앙을 떠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결혼을 전제로 누구를 만나야 할지를 '선택'으로 생각하지 말고, 결혼 자체도 하나의 '선택'으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결혼은 가정을 이루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인생을 가정에 희생해야 하는 시작이다. 신앙을 희생하면서 해야 하는 결혼은 의미가 없다. 두 작품 가운데 어떤 그림이 훌륭해 보이는가? 둘 다 도메니코 페티라는 화가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이다. 왼편은 1610년에 그림 '걸작'이고, 오른편은 1605년에 그린 '습작'이다. 즉 왼편을 완성하기 위해 오른편 그림을 연습 삼아 그렸던 것이다.왼편의 걸작은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돼있다. 그러나 워낙 우피치 미술관에는 르네상스 걸작품들이 많아서 도메니코 페티의 그림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반면 오른편 습작은 독일 뒤셀도르프로 팔려나가서 현재는 독일 뷔르츠부르크 궁전의 복도에 걸린 초라한 그림이다. 그러던 19세기에 독일로 유학을 온 영국 여성 프란시스 하버갈은 이 그림 앞에 선 순간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경험을 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이 물음 앞에 인생이 무너지고 회심을 한다. 그리고 바로 영국으로 귀국해서 일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많은 찬송가를 남긴다.성찬식 때마다 부르는 '내 너를 위하여'라는 찬송가는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찬송가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시를 썼던 하버갈 여사를 기억해도 좋을 것이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신앙을 희생하면서 해야 하는 결혼은 의미가 없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신중하게 결정하시기 바란다. ▲도메니코 페티 <이 사람을 보라> ⓒ위클리굿뉴스 Q. 결혼 후 위기가 닥쳤고, 배우자를 용서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송: 아래 그림은 '인상주의'를 열었던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의 작품이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 카미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왼편 그림은 아내와 자녀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평온해 보인다. 반대로 오른편 그림은 1879년에 그 아내가 임종하던 순간에 그녀를 그리고 있다. 사랑하던 아내의 임종을 지켜보며 그림을 그린 모네의 마음은 어떨까? 그리고 남겨진 아이는 어떻게 될까? 모네는 지독히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런 어려움을 이기며 화가의 명성을 쌓던 중 찾아온 아내의 죽음은 모네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몇 마디 글을 써서 '용서해라' 혹은 '이혼해라'라고 말하는 건 너무 가볍고 무책임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렇다. 처음 배우자를 만났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가? 그리고 지금은 어떤 마음인가? 처음 교제를 했을 때는 배우자를 하나의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부부가 불화를 겪는 이유는 결혼 전에는 서로가 '존재'로서 가치를 지녔지만, 결혼 후에는 가정을 영위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내가 배우자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배우자가 가정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겉돌지는 않는지, 경제적인 '도구'가 되지는 않았는지, 부부가 함께 점검해야 하는 부분이다. 혹 자녀가 있다면 반드시 자녀들이 상처받지 않는 기준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 ⓒ위클리굿뉴스 (위클리굿뉴스 11월 11일, 47호 기사)

차진환 기자2020-04-17

최근 전남 광주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이단 신천지로 인해 15가정이 집단 이혼소송에 휘말렸다. 이들 가운데 10가정은 이혼소송 중이며 몇몇은 결혼 생활을 끝냈다. 이러한 가정 파탄은 신천지 내에서 빈번했지만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른 것뿐이다. 심지어 배후에 신천지의 지시가 있었다는 탈퇴자들의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신천지에 빠진 배우자때문에 가정불화는 물론 이혼 위기까지 겪었던 피해자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경우의 수 따져 상황별 매뉴얼·지침 지시 배우자 험담으로 가족 내 신뢰 무너뜨려 신천지 탈퇴자들이 이단사역에 힘 보태야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 둘, 단란한 가정을 꾸려갔던 박찬주(가명) 씨는 7년 전 처제로부터 아내가 신천지에 다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정통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박 씨는 아내와의 대화에서 다시는 신천지에 가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하지만 6개월 뒤 교회 목사님을 통해 아내가 여전히 신천지 생활을 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됐다. 박 씨는 “두 번째로 발각된 이후, 분노가 치밀었고, 아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몸싸움도 일어났다”며 “그 때 신천지 측에서 경찰에 신고를 했고 아내를 데려갔다”고 회상했다. 보름 뒤 그녀는 “신천지 활동을 간섭하면 이혼하겠다”, “이를 어길 시 이혼하고 양육·재산권을 가져가겠다”는 등 7~8가지 항목의 각서를 박 씨에게 건넸다. 각서를 써야만 집에 들어오겠다는 아내를 두고 박 씨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들 부부의 자녀는 1살과 3살로 엄마의 손길이 한창 필요한 때였다. 또 다른 피해자 정필호·김아정(가명) 부부는 아내 김 씨가 신천지에 5년 간 몸을 담으면서 갈등했다. 김 씨는 처음에는 교회에 나간다고만 했다. 신앙이 없던 정 씨는 육아에 집중하기 위해 하던 일까지 그만둔 아내가 교회에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힘을 내길 바랐다. 정 씨는 교회에 간 아내를 데리러 갔다가 흰색 상의와 검은 바지를 입은 신천지 무리에서 나오는 아내를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사이비나 이단이라고 하면 사람을 감금하거나 인성의 문제가 생기는 집단이란 부정적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신천지에서 빼오기 위해 처가 식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오히려 추궁을 들었다. 정 씨는 “신천지는 남편이 아내가 신천지란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상황들을 수 없이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대응을 준비해 뒀다”며 “남편에 대한 험담으로 신뢰를 무너뜨려 친정 식구들과 남편의 사이를 벌려놔야 한다는 것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아내 김 씨는 이미 신천지로부터 지속적인 정신교육을 받은 상태였다. 가족이 알게 되면 신변보호요청서를 다시 작성하게 해 추후 다툼이 생길 경우 신천지 섭외부에 연락하도록 했다. 그러면 섭외부에서 경찰에 신고해 신도들의 신변을 확보하겠단 의도로 풀이된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한 매뉴얼과 상황에 맞는 신천지 지도부의 지시가 존재한다고 피해자들은 입을 모았다. 김 씨는 “절대 따라가지 않는다. 무조건 크게 소리 지른다. 도망간다. 신천지 측 전화번호를 2개 이상 외운다 등 언제든지 이단상담에 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되는 신도들은 계속 정신교육을 시켜 놓는다”고 강조했다. 신천지의 교리상 “내 생각은 사탄이 주는 생각이다. 내 생각이 가장 비진리다”는 식으로 신천지 교육생 시절부터 가르친다는 것이다. 가족과 세상은 신도들의 적이며 특히 이단 상담소는 가장 큰 대적자라고 해서 상담조차 받지 못하도록 한다. 심지어 힘들어 하는 가족의 모습을 거짓이라 종용하며 신천지 매뉴얼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김 씨는 “신천지는 지시를 받아 따르는 체계다 보니, 가족과의 갈등은 위로 보고하게 돼있다”며 “남편이 너무 힘들어하고 건강이 너무 안 좋아졌다고 보고했더니 신천지에서는 ‘다 연기다. 그런 부분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피드백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에 정 씨는 “아내를 두고 신천지와 싸우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내는 자기의 의사가 없었고 자아도 없는 듯 했다”며 “분노도 느꼈지만 아내를 빼내오기 위해서 감정보단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신천지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이들 부부 모두 이단상담소의 도움으로 가정을 회복했다.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신천지에 빠져 있는 가족의 상태를 점검하고 이후 전략을 세웠기에 가능했다. 비슷한 과정을 겪은 경험자들과의 만남도 도움이 됐다. 박 씨는 “이단상담소에 데려갈까 봐 차에 타는 것도 거부하는 아내를 안심시키는 과정이 중요했다”며 “상담소 소장과 상담사를 통해 아내가 신천지에서 탈퇴할 수 있었다”고 조언했다. 광주이단상담소 임웅기 소장은 “본인들이 해결하다가 문제가 심각해져서 전문가의 손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며 “전문가의 도움을 먼저 요청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진환 기자2020-02-27

영광, 전쟁 전중후 좌우 이념 대립 극심 전쟁 2달內 전교인 생매장·수장당해 순교자들의 피…지역 복음화로 꽃피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민족상잔의 비극 속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건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전쟁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신앙을 키워온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에 소재한 야월교회는 한국전쟁이 있던 해 전교인 순교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게 된다. 세계 어느 곳을 찾아봐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전교인이 희생당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 죽음 앞 순교자의 믿음은 소금처럼 반짝였다 7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반짝이는 염전이 펼쳐진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은 ‘소금밭 천지’라고 불린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70년 전한국전쟁 당시 염산면 지역 교인들의 피가 뿌려진 곳이다. 야월교회는 1908년 4월 유진벨 선교사와 염산면 야월리 지역 교인들로 인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갖은 핍박 속에서도 성도들은 신앙을 잘 지켜나갔다.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전쟁의 피바람이 영광을 덮쳤다. 북한 공산군의 일개 부대가후방 교란작전을 펼쳤고남로당 김삼룡의 부대는 지역 주민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영광군 지역은 이념 갈등이 가장 치열한 곳이었다. 군인뿐만 아니라 주민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심했다. 야월교회 성도들은 1950년 9월 말부터 11월초까지 약 두 달 동안 교인 모두가 순교하게 된다. 5명은 목에 돌을 멘 채로 수장을 당하고 나머지 60명은 생매장당했다. 1km 정도 떨어진 ‘큰북재’란 곳으로 끌려가 자신이 묻히게 될 땅을 파야만 했다. 끌려간 가족들은 굴비 엮듯이 엮여 생매장을 당했다. 살아 나오려는 사람들은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당시 9살 어린아이던 최종한 장로(80)는 끔찍했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최 장로는 “그때 우리 가정이 예수를 믿지 않고 유교 사상이 투철했기 때문에 우리 아버님이 인민군에 끌려가 인민재판 후 죽지 않고 살았다”며 “6.25 전쟁을 생각만 하면 아직도 끔직하다”고 회상했다. 예수 믿어 망한 동네…다시 신앙의 꽃 피우다 순교 이후 야월도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한명도 남지 않게 된다. 전 교인이 목숨을 잃게 되자 마을에는 ‘예수를 믿고 망한 동네’란 인식이퍼졌다. 교회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도 뚝 끊겼다. 살아남은 교인도 없었기 때문에 순교 당시의 흔적을 더듬어 가기도 어려웠다. 담당 교역자가 부재중인 가운데 인근 염산교회 청년들이 건너와 아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쉽지 않았다. 예수 믿다가 온 가족을 다죽일 셈이냐는 어른들의 구박에 아이들은 교회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1988년 배길양 목사가 부임하고 나서야 38년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쫓게 됐다.배 목사는 순교자들의 명단을 확정하기 위해 면사무소를 찾아갔다가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된다. 순교자들이 40년이 다 돼가도 사망신고가 되지 않은 채 서류상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교회가 전소되고 일가족이 몰살당하다 보니까 누구 한 사람 사망신고를 해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야월교회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현재 야월도에는 280여 세대가 있는데 그 중 100여 세대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약 35%의 지역 복음화가 이뤄졌다. 순교한 야월교회 모든 성도들은 염산의 명물 소금처럼 이 지역에 녹아 들어 복음의 터를 닦았다.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독교인순교기념관에는 ‘맞잡은 손’이란 조형물이 있다. 순교의 아픈 상처를 담은 손과 하나님의 손이 만나 용서와 화해로 나아간단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야월교회 심재태 담임목사는 “순교자들이 보여줬던 순교신앙을 되새겨야 할 때”라며 “그때 당시순교자들의 신앙을 돌아봄으로써 우리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신규 기자2020-02-26

한국전쟁 발발 ‘70년’ 한반도 평화통일 희년돼야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지 5년,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의 적막함을 찢는 포성을 시작으로 38선 이북의 북한군이 남으로 내려왔다.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그어진 군사분계선 38선으로 인해 반도의 허리는 잘렸고 이데올로기의 논쟁으로 남한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개전 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당했고, 한 달여 만에 낙동강 남서부 일부지역을 제외한 남한 지역의 90% 이상, 인구로는 92%가 북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러나 유엔연합군의 참전으로 시행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1950. 9. 15)의 성공으로 국토 회복과 통일을 눈앞에서 보는 듯 했다. 하지만 11월 25일과 26일에 중공군의 막대한 병력을 동반한 인해전술로 후퇴해 휴전선 인근에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뤄지기까지 동족상잔은 계속됐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피난민과 이산가족을 양산시켰다. 한국교회의 피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장로교의 경우 파괴된 교회당만도 467개, 완전 소실된 교회당도 152개나 됐다. 또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 등의 지도자들이 납치됐다. 수많은 성도들도 공산군의 총칼에 순교 당했다. 대표적으로 전남 영광군의 염산교회에서는 77명의 성도들이 희생됐다. 구약 레위기 25장 8~10절에서 하나님은 ‘희년’을 언급하셨다. 애굽에서의 해방을 기념해 7년마다 시행되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 50년째 되는 날에 모든 자들에게 빚을 탕감하고 노예를 해방시켰다. 한복협 명예회장인 김명혁 목사는 “한국전쟁이 우리 민족의 가슴 픈 역사이지만 한국교회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사건이었다”면서 “피난처 부산에서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이제 한국교회는 전쟁이 재발되지 않도록 민족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이 이뤄지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인 올해를 ‘남북평화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로 마음을 모아야 할 때다.

차진환 기자2020-04-17

최근 전남 광주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이단 신천지로 인해 15가정이 집단 이혼소송에 휘말렸다. 이들 가운데 10가정은 이혼소송 중이며 몇몇은 결혼 생활을 끝냈다. 이러한 가정 파탄은 신천지 내에서 빈번했지만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른 것뿐이다. 심지어 배후에 신천지의 지시가 있었다는 탈퇴자들의 증언도 잇따르고 있다. 신천지에 빠진 배우자때문에 가정불화는 물론 이혼 위기까지 겪었던 피해자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경우의 수 따져 상황별 매뉴얼·지침 지시 배우자 험담으로 가족 내 신뢰 무너뜨려 신천지 탈퇴자들이 이단사역에 힘 보태야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 둘, 단란한 가정을 꾸려갔던 박찬주(가명) 씨는 7년 전 처제로부터 아내가 신천지에 다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정통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박 씨는 아내와의 대화에서 다시는 신천지에 가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하지만 6개월 뒤 교회 목사님을 통해 아내가 여전히 신천지 생활을 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됐다. 박 씨는 “두 번째로 발각된 이후, 분노가 치밀었고, 아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몸싸움도 일어났다”며 “그 때 신천지 측에서 경찰에 신고를 했고 아내를 데려갔다”고 회상했다. 보름 뒤 그녀는 “신천지 활동을 간섭하면 이혼하겠다”, “이를 어길 시 이혼하고 양육·재산권을 가져가겠다”는 등 7~8가지 항목의 각서를 박 씨에게 건넸다. 각서를 써야만 집에 들어오겠다는 아내를 두고 박 씨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들 부부의 자녀는 1살과 3살로 엄마의 손길이 한창 필요한 때였다. 또 다른 피해자 정필호·김아정(가명) 부부는 아내 김 씨가 신천지에 5년 간 몸을 담으면서 갈등했다. 김 씨는 처음에는 교회에 나간다고만 했다. 신앙이 없던 정 씨는 육아에 집중하기 위해 하던 일까지 그만둔 아내가 교회에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힘을 내길 바랐다. 정 씨는 교회에 간 아내를 데리러 갔다가 흰색 상의와 검은 바지를 입은 신천지 무리에서 나오는 아내를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사이비나 이단이라고 하면 사람을 감금하거나 인성의 문제가 생기는 집단이란 부정적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신천지에서 빼오기 위해 처가 식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오히려 추궁을 들었다. 정 씨는 “신천지는 남편이 아내가 신천지란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상황들을 수 없이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대응을 준비해 뒀다”며 “남편에 대한 험담으로 신뢰를 무너뜨려 친정 식구들과 남편의 사이를 벌려놔야 한다는 것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아내 김 씨는 이미 신천지로부터 지속적인 정신교육을 받은 상태였다. 가족이 알게 되면 신변보호요청서를 다시 작성하게 해 추후 다툼이 생길 경우 신천지 섭외부에 연락하도록 했다. 그러면 섭외부에서 경찰에 신고해 신도들의 신변을 확보하겠단 의도로 풀이된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한 매뉴얼과 상황에 맞는 신천지 지도부의 지시가 존재한다고 피해자들은 입을 모았다. 김 씨는 “절대 따라가지 않는다. 무조건 크게 소리 지른다. 도망간다. 신천지 측 전화번호를 2개 이상 외운다 등 언제든지 이단상담에 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되는 신도들은 계속 정신교육을 시켜 놓는다”고 강조했다. 신천지의 교리상 “내 생각은 사탄이 주는 생각이다. 내 생각이 가장 비진리다”는 식으로 신천지 교육생 시절부터 가르친다는 것이다. 가족과 세상은 신도들의 적이며 특히 이단 상담소는 가장 큰 대적자라고 해서 상담조차 받지 못하도록 한다. 심지어 힘들어 하는 가족의 모습을 거짓이라 종용하며 신천지 매뉴얼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김 씨는 “신천지는 지시를 받아 따르는 체계다 보니, 가족과의 갈등은 위로 보고하게 돼있다”며 “남편이 너무 힘들어하고 건강이 너무 안 좋아졌다고 보고했더니 신천지에서는 ‘다 연기다. 그런 부분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피드백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에 정 씨는 “아내를 두고 신천지와 싸우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내는 자기의 의사가 없었고 자아도 없는 듯 했다”며 “분노도 느꼈지만 아내를 빼내오기 위해서 감정보단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신천지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이들 부부 모두 이단상담소의 도움으로 가정을 회복했다.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신천지에 빠져 있는 가족의 상태를 점검하고 이후 전략을 세웠기에 가능했다. 비슷한 과정을 겪은 경험자들과의 만남도 도움이 됐다. 박 씨는 “이단상담소에 데려갈까 봐 차에 타는 것도 거부하는 아내를 안심시키는 과정이 중요했다”며 “상담소 소장과 상담사를 통해 아내가 신천지에서 탈퇴할 수 있었다”고 조언했다. 광주이단상담소 임웅기 소장은 “본인들이 해결하다가 문제가 심각해져서 전문가의 손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며 “전문가의 도움을 먼저 요청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진환 기자2020-03-08

합동,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제1호 지정 단일교회 최다 순교자…대부분 수장당해 천국소망으로 원수를 용서하는 모습 보여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의 설도항, 잔잔하게 물결치는 서해안에 맞닿은 곳. 부두에는 한적한 배 몇 척이 놓여 있고 그곳을 바라보는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다. 70년 전 한국전쟁당시 전남 영광군에서는 194명의 기독교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북한군을 비롯한 공산 세력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기념탑 뒷길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낮은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가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1호로 지정한 염산교회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당시 이 길을 따라 설도항 앞바다에서 수장당했다. 단일 교회로서는 가장 많은 인원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기독교 最多 순교자 발생 교회 전남 영광 염산면은 남로당 김삼룡의 주 활동 무대였고 전쟁 전부터 그를 추종하던 세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공산당의 유격대가 들어와 후방 교란작전을 펼치면서 염산면 내 이념 갈등은 극에 달했다. 한국전쟁 당시 염산교회는 77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전교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숫자다. 10월 3일부터 이듬해 1월 6일까지 약 3개월의 시간을 거쳐 순교했다. 피난 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성도들은 교회를 지켰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새끼줄로 엮은 돌을 매단 채 교회 앞 바닷가로 끌려가 수장 당했다. 돌이나 몽둥이질에 목숨을 잃었고 죽창에 찔려 생매장을 당하면서도 가해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염산교회 순교의 현장은 잔혹했지만 성도들은 돌아갈 천국을 가슴에 품고 담대히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한국전쟁 당시 염산군에 주둔한 공산군과 추종 세력에 의해 77명의 성도가 순교했다. 대다수의 성도는 무거운 돌을 목에 매단 채 수장당했다.ⓒ데일리굿뉴스 목 베여 순교당한 어린 자매들 당시 담임이던 김방호 목사를 비롯해 염산교회 성도들은 죽음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부임 후 석달 만에 전쟁을 맞닥뜨린 김 목사는 미군 스파이로 몰리며 지역 공산 세력에게 끌려갔다. 8명의 식구와 함께 몽둥이질을 당하며 순교했다. 공산당 세력에게 교회와 집을 빼앗기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교회와 성도를 지키겠단 일념 하나로 순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일반 성도와 28명의 어린 주일학교 학생들의 순교도 이어졌다. 노병재 집사와 그의 3형제 가족 22명은하루아침에 수장당했다. 노 집사는 바다에 빠져서도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찬양하며생을 마쳤다. 故 박귀덕 권사의 네 딸은 예수 믿는 집의 자식이란이유로 모두 수장 당했다. 첫째 옥자(15)는 막내 미자(3)를 업고 나머지 동생들에게 “울지 마라, 우리는 지금 천국 가고 있단다. 천국 가니까 울지 마라”며 위로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에 약이 오른 좌익 세력의 한 남자가 옥자와 미자의 목을 베어 바다로 던졌다는 것이 당시 목격자의 증언이다. 김조남(11) 어린이는 집에 들이닥친 공산당 무리에게‘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어디 있냐’며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김 군은 “나는 어디 계신지 몰라요. 그리고 나는 예수 믿으니까 천국 갈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산당은 김 군의 입을 찢어 죽였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한 천국소망 과반의 성도가 목숨을 잃고 예배당이 전소되자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신앙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여전히 살아 이어지고 있었다.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인 김익 전도사는 가족이 순교할 당시 처가에 있다가 유일하게 목숨을 건졌다. 김전도사는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은 아픔에도 1951년 4월 염산교회에 4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당시 목격자에 따르면 김 전도사는 첫 예배에서 ‘온가족이 죽임을 당한 곳이기에 생각하기도 싫지만 나는 이곳에 내 부모 형제들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가해자 들을 예수 믿게 해서 천국 가게 하는 것. 참된 원수 갚는 일이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2년 동안 순교자들과 공산 세력을 추종했던 주민들의 화합을 위해 헌신했다. 김 전도사는 결국 시력을 잃었고 여러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민들과 성도들은 그를 일컬어 ‘사랑의 사도’라고 불렀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좌우 이념의 갈등과 예수를 믿는단 이유 하나로 죽어야 했다. 김 전도사는‘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소 실천해가며 복음을 염산 지역에 심었다. 염산교회 임준석 담임목사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반복되면 안 된다”며 “우리가 순교자들이 가졌던 순교자의 천국 신앙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보라 기자2019-12-22

'갈등'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다. 특히 올해는 내부에서 곪던 갈등이 한꺼번에 터지며 증폭됐다. 서울 도심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 각종 집회로 몸살을 앓았고,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좌우로 나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2013년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사회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연간 최대 246조 원. 6년이 지난 지금, 사회갈등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손해는 짐작조차 어렵다.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등의 골을 짚어봤다. '갈등', 한국사회 둘로 갈라지다 "올해는 이념 갈등이 유독 피부로 와 닿던 한해였습니다.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좌, 우 양극단으로 나눠 공격하고 분열하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_직장인 김 모 씨(남, 50) 지난 9월 서울 도심이 태극기와 촛불로 갈라졌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두고 반대자들과 지지자들 간 맞불집회가 열린 것. '광화문 태극기집회'와 '서초동 촛불집회'로 불리며 광장의 정치로 양분된 두 집회는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을 고조시키며 3개월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다. 한국사회의 갈등은 특히 올해 격해지는 양상을 띠었다. 갈등에서 촉발된 대규모 집회와 행진으로 전국 도심 곳곳이 몸살을 앓았고, '모 아니면 도'라는 이분법적 잣대가 한국사회 내 팽배해졌다. 갈등 요소도 과거 남북이나 지역 갈등에서 지금은 이념, 빈부, 세대, 성별 등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9일 발표한 '2019년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는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사회 주요 집단별 갈등 중 ‘진보와 보수’를 꼽은 응답자는 91.8%로 2016년 조사보다 14.5%p 상승했다. 이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85.3% △대기업과 중소기업 81.1% △부유층과 서민층 78.9% △기업가와 근로자 77.7% 등의 순으로, 모두 70%를 넘겼다. 최근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하면서 다시금 논란이 불거졌던 '남성과 여성' 간 갈등은 3년 전 조사 때보다 11.8%p 상승한 54.9%로 집계됐다. 올해 처음 조사한 한국인과 외국인 간 갈등도 49.7%로 집계됐다. 특히 경제적 양극화에 대해서는 '심각하다'는 응답이 90.6%에 달해, 국민이 느끼는 갈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방증했다. '불공정·불평등'이 낳은 병폐 "이번 정부가 공정과 평등을 외쳤지만, 특히 조국 전 장관 문제나 최저시급 인상, 젠더 등 어떤 문제에 대한 조치에서 오히려 또 다른 불공정을 낳는 모습을 보았어요. 유독 불공정과 불평등을 체감하고 깊이 생각했던 올 한해였죠."_ 직장인 최 모 씨(여, 31) 전문가들은 갈등을 고조시킨 원인을 '공정'에서 찾았다.2016년 국정농단 사건으로 정권을 넘겨받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같은 문제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각종 의혹, 이른바 '조국 사태'가 불거진 것. 공수 교대에도 특권층의 비리와 불공정 논란은 되풀이됐고, 현 정부의 핵심 가치인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는 크게 훼손됐다.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은 분노했고 사회적 갈등은 커져만 갔다. 참지 못한 국민은 때로는 거리에서, 때로는 웹에서 울분을 터뜨렸다. '외상 후 울분 장애(PTED)라는 개념을 확립한 정신의학자 독일 샤리테대학 미하엘 린덴 교수는 "울분은 일상에서 겪은 부정적인 감정이 정의나 공정하지 못한 특정 사건을 계기로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2010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한국사회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출간 11개월 만에 100만 부를 넘기는 등 당시 기록적인 판매부수는 외신마저 주목할 정도였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책의 인기 요인과 관련해 "한국사회의 공정과 정의에 대한 욕구와 갈증"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사회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지 10년. 한국사회는 '상실의 시대'로 퇴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공정은 한국사회가 앓는 만성적인 고질병이라며 '중환자 상태'라고 진단했다. 신광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공정은 올해의 문제가 아닌 우리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며 "올해는 그동안 고착됐던 불공정 문제가 조국 교수 법무부 장관 임명 관련 등이 정치 쟁점화되면서 부각된 측면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법이나 제도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또 엄격한 집행 요구가 되는 시작단계부터 단추가 안 끼워지는데 제도만 바꾼다고 공정성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사회 구조적·제도적 측면과 연결돼 있어 오랜 기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준만 기자2019-01-27

본지는 우리 주변의 선한 이웃과 가슴 따뜻한 삶의 현장을 소개하는 <굿-뉴스>를 연재한다.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선한 행적을 통해 아름다운 사회가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박경진 장로(꽃재교회)는 한쪽 눈을 감은 채 태어났다. 외눈박이, 애꾸,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놈"이란 놀림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컸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나무를 팔아 생계를 꾸려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 소리에 이끌려 신앙을 갖게 됐다.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고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는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배운 감사와 사랑, 어린 시절의 가난은 그가 어려운 이웃을 이해하고 섬기게 된 배경이 됐다. 힘든 시절을 딛고 진흥문화를 설립해 업계 1위의 캘린더 기업으로 성장시킨 박 장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공'을 사회에 나누고자 했다. 그러던 중 해외입양인들의 사연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박 장로는 해외 입양인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1996년 첫 행사를 시작으로 해마다 '해외입양인초청모국방문' 행사를 열었다. 행사를 통해 해외 입양인들은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과 5000년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면서 건강한 자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열등감과 정체성 혼란으로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던 이들은 '나는 한국인'이라는 건강한 자부심을 얻고 돌아간다고 한다. 지난해까지 23년째 행사를 이어오고 있는 박 장로는 "해외입양인들이 이중문화의 갈등 속에서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고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알리는 민간 외교사절의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박 장로는 지난 2010년 '진흥장학회'를 설립해 재능과 열정을 갖췄지만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학생을 선발해 돕고 있다. 지난해까지 4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진흥장학회의 시작은 박 장로가 회갑 축하연 대신 그 비용을 사원 자녀들을 위한 학자금으로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아내인 한춘자 권사의 칠순 때 개인 소유의 빌딩과 임대 수입금, 자서전의 판매 수익금을 출연해 장학기금을 조성했다. 장학회 설립에 대해 그는 "지난날 성장 과정에서 체험한 뼈저린 가난을 기억하고, 기독교의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다음 세대를 위해 쓰겠다는 '평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하게됐다"며 "앞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장학회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김신규 기자2018-11-18

한국교회는 1년에 두 번 감사절을 지킨다. 7월의 맥추감사절과 11월 추수감사절이다. 7월의 맥추감사절은 1년 중 상반기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는 차원에서, 11월 추수감사절은 1년을 마감하는 시점에 다시 한 번 자신의 한해를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추수감사절은 성경에는 없는 절기다. 성탄절이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추수감사절이 유래된 미국을 비롯해 독일과 영국 등 유럽과 우리나라 등에서 추수감사절은 세계의 명절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매년 11월 셋째주일로 정착돼 지키고 있다. 이는 종교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이 오늘날 미 대륙에 도착해 지키기 시작한 날을 따르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 도입 역사를 살펴보면 1904년 9월 13일 서울 구리개 제중원에서 회집된 제4회 회의에서 서경조 장로가 “우리나라 교회가 이전에 비해 왕성한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이므로 감사일을 정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열락하며 감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연설한 내용이 나온다.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 기록 자료에는 “무어 목사는 금년(1904년)부터 바로 시행하자고 했으나, 헌트 목사가 5인 위원회로 1년간 다른 선교회와 의논한 후 동일한 날로 정하자고 건의하여 이를 채택했다. 5인 위원은 헌트, 언더우드, 방기창, 심취명, 양전백이 선임되었고, 이들은 의논한 후 위원장 헌트 목사가 보고했다. 일단 ‘금년 감사일은 양력 11월 11일로 정하였다 하니 정익노 장로가 동의하여 채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돼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미국에서 지키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에다 첫 선교사 알렌 의사 내한 정착 기념일(10월 26일)을 절충해 1914년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정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수용했으나 일방적으로 따라간 것도 아니다. 한국개신교 시작과 부흥을 기념한 측면이 강했다. 초기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를 기념하고 교회가 흥왕함에 따라 감사의 마음으로 그 날을 제안한 서경조 장로나, 선교사에 대해 깐깐한 태도를 지녔던 한석진 목사도 11월 추수감사절을 반대하지 않았다. 한편 추수감사절을 우리나라의 추석 절기에 맞춰 지내자는 의견도 있다. 기독교단체 샬롬나비(상임대표 김영한 교수)는 “추수감사절을 추석의 시기에 지키는 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인 추석이라는 절기를 통해 불신자 전도를 가능하게 한다”면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시도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친숙한 문화로 이해돼, 전도활동에 있어서도 더욱 효과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교회가 해마다 지켜온 추수감사절에는 단순히 한 해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것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부흥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기념의 의미에서 시작됐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prev1 | 2 | 3 | 4 | 5 | 6 | 7 | 8
    goodtvICGICGCCMLOVE굿피플KCMUSA기독뉴스GoodPeople아멘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