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교수 기자2017-01-06

인구센서스 결과 작년 말에 인구주택총조사 일명 인구센서스 종교부문 결과가 발표되었다. 개신교 인구는 지난 1995년 19.4%, 2005년 18.2%, 2015년 19.7%로 2005년에 감소한 이후 다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율은 큰 변화가 없었으나 10년 전에 비해 120만 명 가량 늘어난 수치이다. 가톨릭 인구는 1995년 6.6%, 2005년 10.8%, 2015년 7.9%로 소폭 감소했고, 불교 인구는 지난 1995년 23.2%에서 2005년 22.8%, 2015년 15.5%로 계속 감소 추세이며 최근 300만 명 정도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개신교 인구가 960만 명으로 불교를 앞질러 최대종교로 등극했다는 점이다. 개신교 인구가 1백만 명 이상이나 증가했고, 국내 최대 종교로 올라섰다는 조사 결과는 일견 반가운 일이나 매우 의아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주요 교단 통계에서 교인 수는 최근 지속적인 감소세로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인 수가 줄었는데도 개신교 인구가 늘었다면 이것은 결국 ‘탈교인’ 곧 가나안 성도가 늘었다는 얘기가 된다. 가나안 성도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지만 스스로 개신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문조사에서도 개신교인으로 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나안 성도 비율은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개신교 인구가 늘었기 때문에 가나안 성도의 수도 어느 정도 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요인은 자연 증가분이다. 10년 전에 비해 전체 한국 인구가 270만 명 정도 증가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개신교 인구에도 자연 증가분이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 18.2%의 비율은 그대로 유지했다면, 50만 명 정도 증가하게 된다. 반갑지 않은 다른 요인은 이단의 증가이다. 인구센서스는 기본적으로 자기 확인 방식으로 조사되기 때문에 이단교도라도 스스로 개신교인이라고 답하면 개신교로 집계된다. 따라서 신천지 등 일부 이단의 성장이 개신교인 증가의 일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다가 조사 방법의 변화가 통계 결과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곧 기존 인구센서스의 전수 조사 방식과 1,000만 명 표본 조사 방식의 차이가 미친 영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00만 명은 표본 조사로는 매우 큰 수이기 때문에 조사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온라인 중심의 샘플조사 방식이 가가호호 방문하는 면접조사 방식과는 다른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의 방문 면접조사에서는 대표 응답자가 주로 중년 주부였던 데 반해, 이번 온라인 조사에서는 대표 응답자가 청년이나 고학력 남성 중심으로 바뀜으로써 다른 경향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자체 통계에서는 증가세로 나타난 가톨릭 신자의 소폭 감소와 불교 신자의 대폭 감소는 결국 조사 방식의 변화가 종교 인구 변동의 경향을 바꿔 놓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종교의 의미 이번 조사에서 나타난 한 가지 특징은 이러한 종교 간의 인구 변동과 함께 무종교인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인구센서스에서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국내 인구 비율은 전체의 56.1%로, 종교가 있다고 답한 비율(43.9%)보다 10%포인트 이상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종교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을 추월한 것은 통계청이 종교 유무를 조사하기 시작한 1985년 이후 최초다. 작년 종교 없는 인구는 2005년 2182만 6000명에서 지난해 2749만 9000명으로 9%포인트 급증했다. 나이별로는 20대가 64.9%로 가장 높았고, 이어 10대(62%), 30대(61.6%), 40대(56.8%) 순이었다. 종교 인구 감소 폭은 40대(13.3%p), 20대(12.8%p), 10대(12.5%p)에서 상대적으로 컸다. 이렇게 무종교인의 수가 늘어난 것 역시 조사 방법이 미친 영향이 크다. 인구센서스에는 단순히 기존 종교 단체의 가입 여부로 종교인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 단체에 가입하지 않고서도 다양하게 종교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거나 점을 보거나 무속적인 종교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종교성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기성 종교에 가입한 사람들이 줄었고, 그 중에도 가나안 성도나 냉담자와 같은 비활동 신자가 늘고 있다는 것은 기성 종교가 현대인들에게 적절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20대에서 무종교인이 가장 많다는 것은 취업이 어렵고 삶의 여건이 팍팍한 이들에게 종교가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이다. 따라서 기성 종교들은 현대인들의 삶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종교들은 모두 지나치게 현세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무릇 종교는 현실 너머의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며 종교인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야 하지만, 우리 사회의 종교들은 한결같이 현실에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도구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는 사람들의 의식이나 태도 또는 행위의 측면에서 주요 변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대표종교로서의 역할 정부의 통계조사에서 개신교가 대표 종교로 나온 것은 기뻐할 일이나 단순히 교인 수에 따라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할을 다하고 있느냐 라는 측면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전래 초기 한국 교회는 비록 그 수가 적고 교인 수도 적었지만, 남녀차별과 신분 차별을 철폐하며 사회를 앞서나가면서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스러운 종교의 영역마저도 세속 가치에 매몰되어 교회에 대한 평가를 양과 수의 측면에서만 하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이다. 사회신뢰도 조사를 포함하여 많은 개신교 관련 조사에서 개신교가 공신력을 잃고 있다는 결과가 나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원인은 개신교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개신교인들의 신앙과 삶이 일치되지 못하고 있으며 조직으로서의 한국 교회도 사회에서 기대하는 올바른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공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책임 있는 역할을 감당하기보다는 교세 확장과 교회 건물 건축, 교권 유지 등 세상과는 벽을 쌓고 자기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래 초기 한국 개신교는 사회 부조리를 혁파하고 새로운 가치 질서를 제시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했지만, 오늘날의 개신교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 공공의 선이나 선한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이제 개신교가 우리 사회에서 대표 종교가 된 만큼,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 대한 올바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현대와 같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자신이 속한 종교 공동체의 우월함을 일방으로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선택한 종교가 가르치는 바대로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의 지도자들은 각 교회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이 개신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체성은 다른 종교인들을 배격하는 정체성이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있는 종교와 종교 신념을 서로 존중하면서 우리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정체성이어야 할 것이다. 개신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교회생활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에도 충실할 때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는 위대한 종교로서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대표 종교로서의 공신력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송기훈 사무국장 기자2016-12-29

원고를 부탁 받고 스스로에게 평화와 통일에 관해서 몇 마디나 말을 할 수 있으며, 몇 글자나 쓸 수 있을지 질문을 해보았다. 평화나 통일에 대한 사전지식도 부족할 뿐 아니라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노력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말과 글은 쓸 수 있지만, 그것이 정말 말이 되고 글이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평화와 통일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과 글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하고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 될 때도 있다. 이전에 출석하는 교회에서 청년회 회원들이 판문점 내의 통일촌에 있는 한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우리의 봉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통일에 대해서 기도하고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하기에 앞서서 우리의 생각 속에는 전쟁, 이념, 세대 간 차이 등 수많은 명제들이 뒤엉켜서 하나의 거대한 철책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장막들을 거두고 나니 남는 것은 너와 나의 만남이었다. 분단의 현실은 나와 너였던 관계들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자매형제의 만남, 벗들의 속삭임, 사랑하는 그 모든 행위들, 자연스럽고 자유한 그 모든 것들이 단절되어 버렸다. 그러한 단절을 회복하는 흐름들을 우리 속한 자리에서, 그리고 전쟁의 슬픈 역사 속에서, 나아가 통일의 미래를 세우는 현장 속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들을 모았다. 그것은 다시 너와 내가 만나는 것이요, 막힌 길이 뚫리는 것이며, 개성공단뿐 아니라 남북-북남의 노동자들이 먹고 살만한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수백만의 촛불이 한 자리에 모인 이유는 모두 너와 내가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탄핵정국을 맞은 대통령과 그의 사람들은 함께 만나자고 불러낸 자리에서도 대화하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억나지 않는다” “모른다”는 그 말들은 너와 나의 만남을 단절하는 철책선과 다를 바 없으며, 사람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내뱉는 절단된 말과 글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기억하며,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만남이 단절된 것을 기억하며 그것들을 회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말과 글이 삶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통일을 기억하며 알아야겠다. 말과 글이 내 삶과 분단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위의 칼럼은 '평화와통일을위한연대'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 것입니다)

여주봉 목사 기자2017-01-17

우리는 지난번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의 열매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구할 때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우리 가운데 회복된다.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우리에게 보이신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길을 보이신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의 한 부분은 하나님의 길을 알아 그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알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에 머물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모세의 예에서 우리는 이 점을 잘 볼 수 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길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중과 길 그리고 목적과 의도를 알리신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시 103:7).이 구절에서 “행위”는 “길”을 의미한다. 나의 경우에도 내가 하나님을 집중적으로 찾으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길을 나에게 보여 가기 시작하셨다.그 경험이 나에게는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았다.예를 들어,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그분의 성품과 길과 의중과 목적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다.그러면 나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살펴보면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았는지 살펴보았다.그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았다.그런데 내가 그렇게 성경 전체를 다 살펴보기도 전에 또 다른 하나님의 길을 보여졌다.그리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새롭게 보여진 하나님의 길을 다 확인하기도 전에 또 다른 하나님의 길이 보여졌다. 하나님을 찾는 자의 삶 속에 하나님의 주도권이 회복된다 오늘날 성도들의 삶의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로이드 존스 목사가 약 60년 전의 영국 교회를 두고 한 말이 마치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두고 한 말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거리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통제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그를 위해서 일하고 있어요.’ 그런 다음에 우리는 그를 떠나 버리고 계속 우리 자신의 작은 일들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부흥』, 119쪽)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주도권이 회복된다. 로이드 존스 목사도 성도들이 하나님 자신을,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위의 말을 했다.“우리는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푯대를 향하여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뛰어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것은 무서운(terrible) 일입니다.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거리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데는 어떠합니까!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임재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것, 그것이 참된 기독교입니다.부흥시에 언제나 하나님께 사용되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구할 때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이 우리의 삶 속에 회복된다.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다루심이 우리 삶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하시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에 우리를 동참시키기 위해 우리를 빚어 가신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다루셔도 우리가 그것을 전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설령 본다 할지라도 자기의 유익에 따라서 선별적으로 적당히 취할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전혀 빚어지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의 삶을 주도하시며 우리를 인도해 가기 시작한다. 나의 경우에도, 하나님 그분 자신을 집중적으로 찾으니까 나에게 회복된 하나님의 은혜 중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가 나의 삶 속에 회복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인도하시기 시작하시는 것이었다. 그 후로 내가 한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나를 인도하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뿐이었다.그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주님을 따라 왔더니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민규 교수 기자2017-01-03

예전에 어떤 이가 방송에 나와 무슨 책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그를 오래 전부터 알던 이들은 그가 이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들 한다. 그의 주장은 그저 주관적인 평가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잘 안 변한다. 물론 젊었을 때는 환경과 교육을 통해 급작스럽게 혹은 서서히 변화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40이 넘은 이가 자신의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눈에 띄게 바꾼 것을 살면서 드물게 보긴 했다. 드물다는 말은 변한 이도 당연히 존재한다는 뜻임을 밝힌다. 그 나이면 성격뿐만 아니라 인격도 거의 형성된 단계이기에 변하기란 매우 힘든 것은 사실이다. 신앙인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예전에 조폭 두목 조양은 씨와 대도 조세형 씨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크게 체험하고 변화되어 전세계 방방곳곳 한인 교회마다 간증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타깝게도 언론을 통해 나중에 들리는 소식은 둘 다 변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기간 꾸준한 자기성찰적인 신앙생활을 했을 때이다. 혹은 인생의 큰 충격이나 거의 죽음의 경지까지 내몰렸다가 하나님을 만난 경우에는 순간의 변화를 체험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세월이 지나면 그 인격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을 믿고 삶이 달라졌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간증은 사실 매우 주관적이다. 사람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갑자기 변한 이들은 사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 쉽다. 특별하거나 강하게 뜨거운 체험에 빠지면 잠시 달라지긴 한다. 그러나 미치지 않고서야 뜨거운 감정을 끝까지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고 감정이 식으면 사람은 원래의 인격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다. 물론 경험 이전과 이후가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아마 그가 성숙해질 수 있는 과제를 만난 것이라고 할까? 이 과제를 잘 푼 사람이 성숙해 지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성숙해지는 과정에는 많은 고통이 따르고 성숙함에 도달하는 속도도 매우 느리다. 일부 목회자들이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는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서 그런 것이지,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서 그들의 인격이 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대체로 안 변한다. 신앙체험으로 변했다는 이들의 주장은 마치 사랑에 빠진 청춘 남녀와 유사하다. 사랑이란 경험과 감정은 분명히 열애의 기간 남녀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감정이 식으면 남녀 모두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늘 사랑의 뜨거운 감정을 느끼며 살 수는 없기에 뜨거운 체험을 근거로 한 변화란 사실 비현실적이다. 감정 중심의 성령 체험도 뜨거운 감정이 식으니 대부분 원래 인격으로 돌아가는 것을 부지기수로 보았다. 그런 이유로 난 뜨거운 성령 체험을 하면 변한다고 강조하고 다니는 이들에게 일정 부분 회의적이다. 물론 그러한 체험이 고통을 벗어나게 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절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40-50대 이상 나이 드신 분들의 정치적 성향뿐만 아니라 종교적 성향도 이미 굳어져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사실 대체로 안 변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을 설득하고 변화시키려 하는 것은 몹시 피곤한 일이다. 우리 사회의 변화는 기성세대와 생각이 많이 다른 젊은 층들이 나이가 들면서 발생하리라 본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대하는 법을 배워야지 사람을 바꾸려 들지도, 혹은 그가 변하리라는 기대도 하지 마라. 싸움만 일어나고 서로 상처만 입힌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도 사실 40 이후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냥 수용하는 것이 지혜로울 수 있다. 성인이 되면 사람은 대체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만큼 삶의 고통만 더할 뿐이다. 물론 모든 이가 변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아직 인격이 형성되지 않거나 유연한 어린아이의 경우는 사실 변화가 빠르다. 그래서 어릴 적에 살아온 환경과 끊임없는 교육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그리고 한국교회를 개혁하려면 주일학교와 중ㆍ고등부에 온 힘 다해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 그러면 30-40년 후에 심은 대로 열매를 볼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도 꾸준히 노력하면 변화는 가능하다. 다만 느릴 뿐이니 더딘 변화를 조급해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나이 들어 자기 성향이나 인격이 5% 정도만 변화돼도 그것은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다는 증거고 대단한 기적을 이룬 것이 틀림없다.

김명전 기자2017-01-18

“실업과 빈부격차”,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화두다. 세계경제포럼(WEP•다보스포럼)이 세계의 기업인을 대상으로 앞으로 10년 간 경영환경을 위협하는 위험요소를 조사했다. 첫째가 실업(失業)이다. 동시에 세계를 위협할 공통적인 과제로는 빈부격차를 꼽았다. 실업과 빈부격차는 국수주의적 포퓰리즘 바람을 거세게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미국 대선의 트럼프 당선 돌풍이 대표적이다. 다보스포럼에서 클라우스 슈바프 WEP 회장은 포퓰리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서 “시장경제는 승자와 패자를 만들지만 그 승자와 패자 사이에 일체감이 있어야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세계적 트렌드의 경계 밖에 있는가? 이미 실업과 빈부격차가 한계상황에 봉착했다. 그 반동은 SNS를 타고 순식간에 집단행동과 다양한 결사체로 구조화되어 드러난다. 광화문의 촛불시위도 빈부격차와 실업, 불평등이 가져온 상실과 박탈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요즘 청소년들의 인터넷 유행어로 ‘이생망’이 널리 쓰인다고 한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줄임말이다. 삶을 놓아버린 절망 상태, 자포자기(自暴自棄)의 다른 말이다. 청년실업자가 100만 명을 넘어서고 실질체감실업률이 20%에 이르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5명중에 한 명이 안정된 직업이 없다는 뜻이다. 일자리가 있다 해도 신통치 않다. 지난해 늘어난 일자리 29만 9천 개 중에서 22만 3천 개가 60대 이상에 돌아갔다. 청년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질이 낮은 일자리가 대부분인 탓이다. 퇴직 세대가 일자리를 채우는 모양새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이 주축이 되는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 되면 일자리는 더 줄어들게 된다. 글로벌회계컨설팅 법인 EY한영이 새해 경제를 전망했다. 이 자리에서 이헌재 前경제부총리는 재출발(Restart)의 대전환으로 우리경제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경제가 “소수 대기업에 과도하게 의존해온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삼성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1/5를 차지한다. 삼성의 협력업체 까지를 포함한다면 그 영향력은 경제의 절반을 차지한다. 만약 대기업이 곤경에 처하면 정부의 공백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개발경제시대의 선단식 산업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협력업체에 의존한 대기업의 글로벌경쟁력은 한계에 달했다. “조선, 해운 등 중후장대 산업이 붕괴되고 협력업체가 줄도산하면 이는 노동시장의 붕괴로 이어진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는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다. 산업 시스템자체가 위기다.” 실제 조선업이 무너지면서 거제 등 조선업 중심도시는 실업사태에 빠졌다. 대전환의 시대다. 트렌드를 놓치면 안 된다. 사회의 무게 중심을 청년에 두자. 30-40대가 미래를 주도하도록 기회의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80% 이상 대학교육을 받았고, 인터넷과 도시화 사회에서 성장했다. 디지털 세대다. 4차 산업혁명의 주도세력이 돼야 한다. 리바운드(패자부활)를 보장하는 것이 기성세대의 몫이다. 재원조달은 투명한 조세로 가능하다. 기득권층의 조세부담을 높이고 기업의 준조세를 없애면 된다. 정부행정의 중심도 바뀌어야 한다. 민간이 기획하고 정부가 뒷받침하는 식이다. 민관합동정부에 의한 협치가 돌파구다. 새로운 발상과 창조적 혁신이 없이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빈부격차와 만성적 실업을 극복할 수 없다. 'Restart'다. 클라우스 슈바프 WEP 회장의 말에 공감한다. “빈부격차와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포용적 자본주의뿐이며 포괄적인 협동과 헌신이 관건이다.”

김은호 목사 기자2017-01-16

2017년은 역사적으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사람 앞에 (coram hominibus) 잘 보이고 세상 앞에(coram mundo) 명예롭고 잘 살기보다, 힘들고 어려워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선한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았습니다. 코람데오는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coram은 “앞에서”라는 뜻이고, Deo는 하나님(God)을 의미합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았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 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 16장 8절).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살았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는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의식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 앞에 계신 그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었음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질문을 던지고 그 분 앞에서 엎드려 기도하고 그 분 앞에서 찬양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윗은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며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내 앞에 계신 하나님으로, 더 나아가 내 우편에 계신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앞에 계신 하나님은 자상하고 친밀한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오른 쪽에 계신 하나님은 연약한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구원하여 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았다고 말합니다. 베들레헴에서 목동으로 양떼를 칠 때에도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지명수배자가 되어 쫓기는 삶을 살 때에도 언제나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를 때에도 항상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주님을 내 앞에 모시고 그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항상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며 살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며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진 사람만이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할 수 있는 자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권자로 고백할 수 있는 자가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내 앞에 모시고 사는 자가 누리는 축복은? 첫째, 흔들리지 않는 삶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 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이 언제 이 시를 썼습니까? 시편 16장 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에 의해 쫓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소년 시절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 때 다른 형들은 다 초대를 받았지만 다윗은 그 자리에 초대 받지도 못했습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사울 왕에 의해 쫓기는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왕이 되고 난 다음에도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며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어야만 했습니다. 한 때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해 살인죄와 간음죄를 짓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그 죄로 인해 밧세바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병들어 죽어야만 했습니다. 아들 압살롬에 의해 배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다윗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울면서 예루살렘을 떠날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이렇게 많은 배신과 저주를 당하였지만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내 앞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3장 6절). 다윗은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보지 않고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마음이 기쁘고 영도 즐거워합니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시편 16장 9절). 왜 하나님을 내 인생의 목전에 모시고 살면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할까요?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내 앞에 모시고 그 주님과 교제하면 주의 앞에 있는 충만한 기쁨과 주의 오른 쪽에 있는 영원한 즐거움이 내게 흘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땅을 떠나시기 전 “내 기쁨을 충만히 가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주님 안에 있는 그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육체가 안전하게 살게 됩니다. 나의 육체가 안전하게 살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피난처가 되심을 가장 많이 경험한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피난처로 삼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이제 죽었다,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되는 순간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피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라는 말을 무려 19번이나 했습니다. 2017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이 즐거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내 인생의 피난처가 되시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윗처럼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며 사십시오.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의식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 앞에 모시고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십시오.

신동식 목사 기자2017-01-12

소망이 없는 삶은 참으로 서글픕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인생만큼 안타까운 것은 없습니다. 가야 할 길을 알고 가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빠른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바르게 가지 않는 시간은 사실상 무가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망이 분명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시간을 행복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종종 세상을 한탄하고 욕을 해대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은 자신을 학대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탓하고 실의에 빠집니다. 급기야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종교를 가진 적이 없던 사람도 절망의 순간이라 느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주위의 환경을 원망합니다. 그러다가 때때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소망이 없는 열매들입니다. 사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속이 터지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이 땅이 소망이 있을까라는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대통령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냐는 자조 섞인 말도 합니다. 그러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이것도 나라냐고 속상해 합니다. 여기에는 조국의 큰 슬픔인 세월호 사건이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월호는 국가가 무엇이고,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터진 최순실을 비롯한 비선 실세들의 국정 농단은 역사를 다시 보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거짓을 남발하는 정치인과 위정자들을 보면서 이런 사람들에게 나라를 맡겼다는 자책감이 밀려왔습니다.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긴 격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암울한 현실의 근저에는 해결하지 못한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친일의 역사도 해결하지 못한 사이에 6.25 전쟁이라는 분단의 쓰라린 역사를 만들어 내었고,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 이 땅은 서로를 비방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분단의 현실은 군사 정권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독재가 잔인한 것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온갖 방법으로 탄압하는 것입니다. 사찰과 협박과 불랙리스트를 통해 잔인하게 사람을 통제합니다. 그것도 듣지 않으면 의문의 죽음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독재는 참으로 사악한 일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독재는 백성들에게 달콤한 사탕을 주기 때문에 추종자가 항상 있습니다. 마치 연예인 팬들처럼 팬덤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독재를 미화시키고 현혹하게 만듭니다. 대표적으로 북한의 세습 통치를 보시기 바랍니다. 왕정 국가도 아닌데 몰상식하게 세습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반대파들은 가차 없이 숙청합니다. 이것은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무너질 것입니다. 불의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의한 모습은 독재자의 모습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패한 인간의 전형적인 자세입니다. 그 보편적 모습이 바로 갑질 사회입니다. 경제적 갑질은 정치적 독재의 변형입니다. 자신의 돈을 가지고 약자를 무참히 짓밟습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아픔에 대하여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벌어서 내가 쓰는데 무슨 잘못이 있냐고 말합니다. 가진 것으로 핍박하고, 배운 것으로 농락합니다. 크든 작든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대접을 받고자 합니다. 그래서 서로 경쟁하여 높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쩌면 촛불은 이러한 사회를 향한 양심의 투쟁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이런 현실 가운데 존재합니다. 교회가 중요한 것은 절망 가운데 피어있는 소망의 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참된 위로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네 집이 구원 얻음을 알려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숨 쉬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죽어가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교회를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생명이 잉태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아이가 태어나는 날은 가장 거룩하고 복됩니다. 교회가 바로 그러한 곳입니다. 거룩한 생명이 시작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희망입니다. 교회의 존재는 아직도 소망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가 소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거룩함이 사라지고 세속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말씀은 있는데 거룩한 삶이 없습니다. 멋진 교회당은 있는데 거룩한 교회가 없습니다. 점점 교회가 힘을 잃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세속주의와 싸우고 있는 그루터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빛을 걷어내고 소망의 빛을 비추고, 철저하게 죄를 죽이는 데 목숨을 걸고 있는 남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하여 그의 나라를 확장하셨습니다. 작은 자들을 통하여 큰일을 하셨습니다. 변방에서 중심을 깨웠습니다. 언약의 백성인 남은 자들에게 그 일을 맡기셨습니다. 교회는 소망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세상을 향하여 참된 소망이 여기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정직의 아이콘이 되어야 하고, 평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하고, 자발적 불편을 통하여 이웃을 섬기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죄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않으면서 복음의 폭풍을 일으켜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고백하였던 것처럼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참된 위로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려야 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교회를 세움으로 시작합니다. 세상이 힘들수록 교회가 비빌 언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파수꾼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지금 살려 달라는 아우성은 거룩한 교회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다시 일어나 거룩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 우리가 줄 선물이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이영훈 목사 기자2017-01-09

2016년 12월 통계청은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집계’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중 놀랍고 감사한 것은 개신교가 한국교회 선교역사 130년 만에 국내 1대 종교가 됐다는 사실이다. 지금과 같이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국내 1대 종교라는 타이틀에 한국교회가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연합이라는 과제를 비롯해 이단과 동성애 등 수많은 문제들에 직면해있다. 당면한 과제들을 속히 해결하고 더욱 부흥 발전하기 위해,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참된 교회로서 늘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 한국교회가 배우고 따라야 할 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 초대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교회였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의 주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살아서 내 뜻대로 무엇인가 하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사람의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는 성령님이셨고, 초대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은 성령님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라는 말씀처럼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을 때,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처럼 교회가 참된 교회의 모습을 갖추려면 성령의 공동체가 돼야 하고, 교회의 일꾼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성령에 사로잡힌 성령의 사람이 돼야 한다. 둘째, 초대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였다.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늘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교회를 움직이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에 임하게 하는 통로다. 야고보 사도가 헤롯 왕에 의해 순교하고 베드로마저 감옥에 갇혔을 때, 온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라는 말씀처럼 온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감옥에서 풀려나게 하시고 그를 교회의 품에 돌려보내주셨다. 특별히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또는 큰 문제와 어려움을 당할 때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 금식하며 기도했다(행 13:2-3). 금식하며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이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며, 교회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자세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은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써 준비된 사람, 준비된 교회에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신다. 셋째, 초대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선교이며, 교회의 사명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완수하는 것이다(마 28:18-20).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라는 말씀처럼 초대교회는 열두 사도를 비롯해 바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모든 역량을 선교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선교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확장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도록 하는 사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의 문제에 얽매여 선교에 소홀해지면 안 된다. 선교는 교회와 성도의 삶의 최우선 순위가 돼야 하며, 교회는 선교할 때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참된 교회의 모습을 잃고, 여러 가지 문제들에 의해 신음하는 교회에게 초대교회는 올바른 길잡이가 되어준다. 초대교회는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였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께 기도하며, 성령님께 받은 권능으로 선교하는 교회였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았기에 교회에 닥친 문제들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고, 놀라운 부흥을 이뤄낼 수 있었다. 2017년 새해를 맞이하여 한국교회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참된 교회로 세워져서, 국내 1대 종교 그 이상의 부흥을 일으키고 대한민국의 회복을 위해 앞장서게 되기를 소망한다.

김명전 기자2017-01-06

정유년(丁酉年) 새해를 맞았지만 기대감이 없다. 병신년의 먹구름이 아직 그대로다. 새해 같지 않다. 온통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 뿐이다. 정부의 올 경제정책의 방향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불끄기식 소방정책 일색이다. 경기부양의 숨통을 열었던 부동산에 발목 잡혔다. 가계 빚은 줄이지도 늘리지도 못할 처지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한계기업이 34%에 달하지만 구조조정을 놓치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새해 경제성장률 목표치는 2.6%다. 잠재성장률 (3.0%)에도 못 미친다. 리더십의 부재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리더십에 경세제민(經世濟民), 경제는 안중에 없다. 위기의 생산자로 전락했다. 걸림돌이다.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까? “대통령의 탄핵 상황에서도 국가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기하다” 탈북 외교관 태영호 공사의 말이 위로가 된다. 1인 독재권력의 국가체제에 길들여진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정상은 아니다. 시장경제와 민주체제가 버팀목이자 저력이다. 그 원천에는 민간의 역량이 있다. 민간에서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 한축인 기업과 기업인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시대적 인식이 부족하다. 기업의 투자의지는 실종상황으로 평가된다. 우리 기업들이 금융권에서 조달하는 자금은 분기별로 적게는 20조원, 많을 때는 30조원을 넘는다. 지난해 3분기는 5조 3천억원 뿐이다. 평소의 20% 수준이다. 반면 기업의 빚은 17조원 줄었다. 투자를 하지 않아 돈이 필요 없었다. 빚 갚는데 썼다는 의미다. 이 정도면 투자 포기다.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기업가 정신이 사라졌다. 기업이 깨어나야 한다. 전경련 허창수 회장이 신년사에서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다짐했다. 기업이 정치권력에 영합하거나 휘둘린 것에 대한 반성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경제현실이 반성에 머무를 여유가 없다. 기업들이 새 정부가 출범할 때 마다 권력 앞에 선물처럼 내놓는 게 있다. 투자와 고용계획이다. 전시용으로 끝났다. 권력과의 뒷거래로 해결했다. 주권자이자 경제주체인 시민을 외면해 왔다. 광화문의 촛불이 밝힌 메시지는 깨어있는 시민의식이다. 살아있는 주권자의 실체를 밝혀 주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국민이다. 기업이 정치권력에 굴종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나라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독재 권력의 앙시앙레짐이 남긴 유산, 정경유착을 끊자. 새해는 정치의 해다. 정치가 국정의 블랙홀이 되기 십상이다. 20년 전 IMF 국가부도 사태의 참혹한 기억을 떠 올린다. 국정농단의 주역들이 또 다시 권력유희로 나라를 파산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민간의 역량에 달렸다. 민생을 구제할 리더십은 오직 경제다. 기업이 과감한 투자로 경제의 동력을 만들고, 고용으로 소비를 일으키는 데 앞장설 때다. 독일의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가 2016년에 일어난 10대 좋은 뉴스 중 ‘한국의 평화적 촛불집회’를 꼽았다. 광화문 광장의 촛불이 세계를 밝혔다. 건강한 시민정신의 힘이다. 희망이다. 한국의 기업, 기업인이 경세제민의 시대정신을 발휘할 차례다. 부도덕한 정치권력과 결별하라. 그리고 위대한 촛불정신과 유착하라. 경민유착(經民癒着)이다. 그것만이 한국경제를 희망의 미래로 인도하는 길이다.

김명전 기자2016-12-23

박근혜 정부의 성과 평가에 눈을 돌려야 할 시점이다. 현 시점에서 자의든 타의든 내년에는 새로 뽑힌 대통령이 국정을 맡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다만 평가로만 끝내기에는 우리가 처한 경제 현실이 안팎으로 너무 어렵다. 더 나아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청년과 중산층이 위기에 빠졌다. 이 정부는 대선 공약으로 한국경제의 미래와 현재의 최대 현안인 청년실업해소와 중산층 70% 복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공약과는 달리 시작부터 경제정책의 운용기조를 잘못 잡았다. 경제정책의 방향이 눈앞의 성과에만 집착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다 놓쳤다. 성장은 역대 최저 2%대로 가라앉았다.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분배마저도 균형을 잃었고 고소득층에 집중됐다. 특히 정부가 역점을 두겠다고 공언했던 청년실업 해소는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났다. 현재 청년실업률은 체감실업률 20.1%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10월 말 현재 공식적인 청년실업자(15-29세)는 37만 1000(10.1%)명이다. 공식적인 실업률은 경제활동인구 중에 조사시점을 기준으로 '지난 4주 동안 적극적으로 직장을 구하려고 했지만 일자리를 잡지 못한 청년'만을 집계한 숫자다. 미취업 상태에 있지만 취업희망을 갖고 있거나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을 기다리는 청년들까지 포함한 체감실업자는 104만 4천명으로 21.1%에 달한다(10월 통계청). 소득이 낮고, 고용의 형태가 불안정한 실질적 실업상태를 체감실업률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실제로 현실을 반영한 청년실업 상황은 더 엄혹하다. 정부가 집계한 통계의 밖에 있는 실체적 체감실업률은 40%, 200만에 육박한다. 청년실업대란이다. 이 정부 출범 이후 청년체감실업률은 급증하는 추세다. 정부는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매년 2조원 이상을 투입했다. 소위 ‘청년 맞춤형 일자리대책’을 추진해 왔지만 이렇다 할 실적이 없다. 지난해 청년일자리 사업으로 펼친 프로젝트 중 고용장려금을 지원한 사업분야에 9만 명 정도의 일자리를 만드는 데 그쳤다. 목표의 60% 수준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시범적으로 도입했던 ‘세대간의 상생고용 지원사업’은 전시행정의 진수를 보여준다. 전체 취업인원이 고작 13명에 불과하다. 실적이라 하기도 민망하다. 당초 이 사업은 청년세대의 일자리를 퇴직 장년세대가 빼앗아간다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새로 도입했다. 취지는 그럴듯 했지만 현장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 결과다. 아무리 전시행정, 탁상행정이라 해도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이해할 방법이 없다. 2조 1113억 원이나 되는 예산만 낭비한 셈이다. 청년실업해소는 실패했다. 한국경제의 현재와 미래를 견실하게 뒷받침 할 큰 축, 청년이 무너지고 있다. 여기에 경제의 활력 기반인 중산층 70% 복원도 물거품이 됐다. 복원은커녕 중산층의 소득증가율이 4.27%에서 1.86%로 떨어지는 추락이다. 소득과 자산을 갖춘 실질 중산층은 20.4%에 불과하다. 이 엄중한 상황에 정치리더십 부재가 경제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한국경제가 대통령 스캔들과 ‘최순실 디스카운트(평가절하)’로 위기에 빠져 얼어붙고 있다는 외신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정치권은 경제사령탑만이라도 온전하게 가동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었으면 좋겠다. 정책의 핵심은 가계소득 증가에 모아져야 한다. 그 열쇠는 청년실업의 해소와 서민, 중산층 소득기반을 복원하는 데 달려 있다.

한국교회언론회 기자2016-12-23

지난해 기관 통해 8천 143억 원 사용 2016년이 저물어 간다. 우리 사회와 정치는 대혼란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한국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최근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 인구가 10년 전에 비해 123만 명이 늘어났고, 종교 순위에서도 불교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전체 종교 인구는 대폭 줄고 있는데(10년 전에 비해 9%포인트가 낮아짐) 유독 기독교인만 늘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 인구가 늘어난 이유는 뭘까? 우연일까? 아니면 10년 전에 종교를 표시하지 않거나, 타종교로 갔던 사람이 다시 돌아온 탓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한국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서 구제와 구호활동을 꾸준히 열심히 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본다. 한국 기독교가 중심이 되거나 기독교 단체들이 지난 해(2016년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음) 활동한 것을 살펴보면, 8천 143억 원이 구제/구호 활동으로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장애인 단체인 밀알복지재단과 신망애복지재단의 결산을 보면, 2015년에 7억 3,700만 원을 사용한 것으로 집계된다. 그리고 평화와 남북을 위한 단체인, 등대복지회와 남북나눔이 결산한 것을 보면, 18억 5,700만 원을 집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봉사/복지 분야에서는 한국해비타트, 유니세프, 안구기증운동협회, 밥상공동체, 부스러기사랑나눔회, (재)사랑과행복나눔, (사)글로벌케어,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등이 사용한 금액이 1천 977억 3천999만 원에 달한다. 구호 분야의 경우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굿네이버스, 굿피플, 한민족복지재단, 월드비전, 한국컴패션, 구세군, 월드휴먼브리지, 유진벨재단 등이 활동한 금액은 6천 68억 5천 200만원에 이른다. 거기에다 기독시민운동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3억여 원을,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가 68억 9천 788만 원을 우리 사회를 위해서 사용한 것으로 집계됐다. 비슷한 단체들이 지난 2013년의 활동을 보도한 5천여 억 원보다 훨씬 늘어난 것이다. 물론 기독교가 주도하거나, 기독교 단체라고 해서 100% 기독교인만이 후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단체는 기독교의 정신인 사랑과 희생과 나눔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거기에다 각 교단과 연합 단체, 그리고 지역의 개 교회들이 각자 구호와 구제를 실행한 것을 감안하면, 한국교회는 연간 1조원 이상을 우리 사회를 위해 지원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기독교는 말로만이 아닌, 이웃 사랑을 분명하게 실천하고 있으며, 어려움과 고난 받는 자들의 이웃이 되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복음 전래 이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의 벗이 됐음이 분명하다. 또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견인차 역할을 해 온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기독교가 종교 인구 1위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앞으로도 국가와 민족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 기독교는 종교를 갖지 아니한 절반이 넘는 국민들에게도 사랑의 종교이며 실천을 앞세우는 기독교를 전파하기 때문에 그들도 사랑을 실천하는 동반자로 삼도록 해야 한다.

이정기 목사 기자2016-12-16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고, '역경'을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되고, '인연'을 거꾸로 읽으면 '연인'이 되고,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으면 '다들 힘내'가 된다. 사람이 살면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희망이 생긴다.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원래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는 시력이 나빠서 연주 때마다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악보를 외워버렸다. 오케스트라 특성상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다른 파트 악보까지 모조리 외웠다. 한번은 연주를 목전에 두었는데 지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부득이 대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지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의논 끝에 악보를 모조리 외우고 있는 토스카니니에게 지휘를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토스카니니는 어렵지 않게 모든 곡을 잘 소화하여 연주를 잘 마쳤다. 이것이 바로 토스카니니가 세계적인 지휘자로 발 돋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그는 말했다. "나의 나쁜 시력이 나를 명지휘자로 만들어 주었다." 언제나 그렇다. 하나님은 문을 닫으실 때에 다른 문을 여신다. 길이 막혔을 때에 다른 길을 여신다. 현 시국은 한마디로 앞이 캄캄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잃는 것도 있고, 얻는 것도 있다. 때로는 돈도 잃고, 건강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 그러나 잃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얻는 것도 많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고난을 통해 얻는 것도 있다고 고백한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잃고 얻는 이런 삶의 사이클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보다 진지하게 살게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잃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복을 생각하지 않고, 잃는 것만 안타까워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역설적이다. '높아지려면 낮아져라. 얻고자 하면 버려라. 살고자 하면 죽으라. 이기고자 하면 져주라.' 그런데 높아지려고만 한다. 얻으려고만 한다. 살려고만 한다. 이기려고만 한다. 그래서 인생이 힘든 것이다. 자세히 보면 행복은 선택에 달려 있다. 기업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어떤 사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기업의 운명이 달라진다. 부정적인 사람을 선택하면 기업이 병들게 된다. 그러나 긍정적인 사람을 선택하면 기업이 건강해진다. 마찬가지로 내 영혼의 기업에 '어떤 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영혼의 운명이 달라진다. 이 세상에는 불행한 순간만 산 사람도 없고, 행복한 순간만 산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행복한 순간과 불행한 순간이 공존한다. 그런데 어떤 분은 과거의 기억에서 항상 '불행한 나, 상처받은 나'를 선택한다. 반면에 어떤 분은 과거의 기억에서 항상 '행복한 나'를 선택한다. 어떤 사람이 행복하겠는가? 두 말할 것 없이 '행복한 나'를 선택하며 사는 사람이다. 야곱은 네 명의 아내가 있었다. 네 명의 아내를 통해 12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 중 가장 사랑하는 아내는 라헬이었다. 창세기 35장을 보면 라헬이 마지막 12번째 아들 베냐민을 낳으면서 죽는다. 라헬은 죽어가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 고통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일찍 죽는 사람이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 어린 자식을 두고 죽는 것이라고 한다. 죽어 가는 라헬의 입장에서는 베노니라는 말이 나올만하다. 얼마나 슬펐겠는가? 그러나 야곱은 그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바꿔 부른다. 베냐민이란 '기쁨의 아들,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소망과 위로의 이름이고 긍정적이며 희망찬 이름이다. 야곱은 누구보다도 이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인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열국의 어미인 사라로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축복하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이름도 얍복강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다. 이름을 바꿔주시면서,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네 후손 가운데서 여러 왕들이 나올 것이다.'(창35:9~11)라고 축복하셨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내의 죽음 앞에서 야곱의 슬픔은 엄청 컸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태어난 아이를 생각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다. 그래서 '베냐민'이라고 한 것이다. 베냐민을 얻음으로 '완성된 축복'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된다. 하나님은 그냥 가져가시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들은 결코 '베노니'가 아니고 '베냐민'이다. 하늘과 땅에서 하늘의 별같이 빛나고,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창대할 베냐민이다. 뒤집어 생각하자.

김동환 목사 기자2016-12-09

수능이 끝나고 수능 성적표가 각 수험생들에게 전달됐습니다. 예년보다 많이 어려워진 수능시험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평소보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낙심하고 실망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너무 실망한 나머지 죽음까지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나름 열심히 준비했는데 평소보다 많이 어려워진 언어영역 시험 문제에 당황해, 나머지 과목들도 제대로 실력 발휘 못한 친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포기하거나 자신과 주변을 비난하고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해서도 안됩니다. 수능이라는 시험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시험을 생각만큼 잘 보지 못했다고 해서 나머지 인생을 포기하거나 무기력하게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필자는 그런 친구들에게 에디슨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줍니다. 힘들 때 자주 보는 글 중 하나입니다. 보고 있노라면 힘이 불끈불끈 난답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혹시 힘든 친구들이 있다면 한 번 이야기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914년 12월 9일 밤, 서부 오렌지 주에 있던 에디슨 기업체들은 화재 때문에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토머스 에디슨은 200만 달러를 잃었으며, 그의 일생을 두고 건설한 업적들이 화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요. 당시 화재에도 끄떡없다고 여겨졌던 콘크리트 건물만 믿고, 에디슨은 238,000달러짜리 보험에만 가입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아들 찰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의 나이 67세…….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으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애타하는 나를 보시던 아버지는 도리어 이렇게 말씀하셨죠. '찰스, 어머니 어디 계시니? 어머니를 모시고 오너라. 살면서 이런 일들을 언제 또 보겠니?'” 다음 날 아침, 에디슨은 자신의 꿈과 희망이 한낱 숯덩어리로 변해 버린 그 폐허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말했습니다. “이 재난 속에는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 있단다. 바로 우리의 실수들도 모두 함께 타버린 거지. 난 우리에게 또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단다.” 그 화재가 있은 지 3주일 뒤, 에디슨의 회사는 다시 첫 번째 축음기를 배달했습니다. 자, 이것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재앙과 역경을 극복해 내는 법을 알고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67년, 평생을 살면서 돈을 잃는다는 것은 그에게 그리 중요한 의미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그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살다 보면 나의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생활 속에 구축해두었던 모든 관계들이 흐트러지고, 성적은 곤두박질치고, 친구들도 떠나가 버리는 경우가 생기곤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을 새롭게 다시 추스를 수 있는 기회는 언제든지 옵니다. 용기를 냅시다! 오늘부터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시작하겠다고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하십시오. 뜻을 정하면 새로운 인생이 다시 시작됩니다. 에디슨의 역경을 생각하면 우리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역전하고 회복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의 말씀처럼,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을 걱정하는 것에 사용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시간에 다시 도전해보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민규 교수 기자2016-12-08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목사가 이런 말을 강대상에서 한다면 어떨까? 오늘날 교회는 미가 선지자의 외침(미 2:1)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평생 수많은 설교를 들었어도 이 본문으로 설교하는 분은 정말 보기 힘들었다. 왜 우리는 성경을 선별적으로만 가르치는 것일까? 기독교와 사회정의는 결코 구분되는 가치가 아니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교회는 정상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을 남용하는 정치인들에게 정치적 발언을 삼가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회악에 저항하라'고 질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전했던 미가 선지자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항의 대상에는 교회도 포함된다. 이제 기독교 안에서도 독재권력형 비리 목사들에 대한 촛불시위가 일어나고 청문회가 열렸으면 좋겠다. 성도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목회자들이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권력을 가졌다고 기득권 왕국을 만들고, 구약의 율법주의자들보다 더하게 복음을 가장한 위선과 율법주의로 사람들을 길들이는 체제를 만들고, 이를 옹호하는 교회지도자들에게 맹종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런 체제라면 저항하는 것이 맞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비리에 묵묵히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질타를 가했다. 물론 감정에 휩싸이거나 공정하지 못한 비판, 혹은 폭력적인 분노의 표출은 결코 안 된다. 온유하면서도 단호하게, 그리고 확신 있게 저항해야 한다. 세상이든 교회든, 진리로 불의에 저항해야 세상이 변한다. 그것이 동서의 역사가 보여준 진실이다. 오늘도 저항하기에 아름다운 하루다. 공의로운 저항 정신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저항)라 불리는 개신교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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