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봉 목사 2020-05-31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영적 리더십을 ‘하나님의 의제(God’s agenda)를 향해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속에 포함된 5가지 요소를 기술한다. 나는 헨리 블랙가비 목사가 그것을 잘 기술했다고 생각하고, 그 요소들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영적 지도자의 임무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비전의 올바른 이해와 영적 리더십과의 연관성이 더 뚜렷해진다. 첫째. 영적 지도자의 임무는 사람들을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영적 리더십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의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므로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의제(agenda), 즉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리더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어떻게 그곳에 이르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만약 리더가 그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참된 리더가 아닐뿐더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방황할 것이다(잠 29:18). 그래서 영적 리더십과 비전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나는 과거에 대학생 사역에 대하여 관심 있던 한 전도사에게 “당신은 하나님께서 지금 캠퍼스에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보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대학생 사역을 위한 리더로 부르신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렇다 할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의제를 보고 자신이 먼저 그것을 향해 달려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그리로 인도하기 위해 영적인 방법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만약 영적 리더가 자신의 지위, 무력, 세속적인 수단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다(렘 5:31). 반면에 참된 영적 리더인 바울은 간사한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이 먼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살전 2:3-6). 이처럼 영적 리더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옳은 방법은 하워드 가드너가 잘 말한 것처럼 설득과 본보기이다. 영적 리더의 임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의 의제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리더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에 순종했으면 리더는 자기 임무를 다한 것이다. 반면 영적 리더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의제로 인도하는 데 실패했다면, 그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리더십은 결과로 측정된다. 그래서 영적 리더십을 공부하다 보면, 참으로 겸손해지는 것을 느낀다. 둘째.영적 지도자들은 성령님께 의존한다. 궁극적으로 사람들 속에 영적 변화를 가져다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므로 영적 리더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께서 영적 리더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보이시면, 영적 리더는 자신이 먼저 그 일에 온 삶으로 동참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나누고 그들을 인도한다. 이때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비전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가감없이 나누고, 성령께서 그들 마음 속에 역사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하실 뿐 아니라 그 비전에 온 삶으로 동참하게 하시도록 오직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영적 리더는 사람들에게 그 비전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리더가 청중의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들이 결단하도록 영향을 끼친다. 어떤 리더들은 자신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면서 성도들에게 자신이 받은 감동대로 해야 한다고 강요하기도 한다. 또 어떤 영적 리더들은 자기가 세운 목표에 사람들이 헌금으로 동참하게끔 온갖 감언이설과 다양한 예를 가지고 그들의 감정에 호소한다. 이것은 모두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다.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 하나님이 없는 수단과 방법들은 전부 타락한 것들이다. 그래서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그의 책 『영적 리더십』에서, 리더가 설득하려고 하는 비전은 하나님께서부터 나온 비전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비전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리더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나눌 때 성령께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 눈을 열어 그것을 보게 하시고 그것에 동참하도록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영적 리더들은 자신이 인도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이 인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도록 그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은 결국 영적 리더의 몫이다.

정용구 선교사 2020-04-25

한국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아 선교지로 가게 되면 한국의 주소지는 대개 부모의 주소지나 친형제자매의 주소지로 옮겨진다. 그래서 간혹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오면 여러 편지들이 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사용할 휴대폰을 개통하게 된다.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기에 선불폰 요금제를 주로 사용한다. 이 요금제는 인터넷 데이터 제공은 어느 정도 되지만 통화료가 비싸다. 그리고 공항에서 짐을 찾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4인 가족일 경우 여행가방의 부피와 짐들이 많아서, 최종 목적지까지 가려면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동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절차를 거쳐 예약을 해 놓은 안식관이나 부모 거주지 혹은 친인척의 집에 도착하게 된다. 이것이 코로나19 이전의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 흐름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이 입국 흐름이 바뀌었다. 먼저는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자가격리 앱을 설치해서 인증을 받고 일일 자가진단을 제출한다. 특별검역신고서와 건강상태 질문서 작성 후 코로나19 유증상이면 선별진료소에서 검사를 받는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영종도 임시 격리 시설에서 최대 24시간까지 대기해야 한다. 코로나19 증상이 없는 경우에도 지난 4월 1일부터는 해외입국자의 자가격리 의무화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게 됐다. 해외 입국자 전용버스나 KTX를 타고 정해진 자가 격리소나 주거지로 이동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선교사들에게 어려움이 생긴다. 그 이유는 갈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선교사 안식관들이 정부가 요구하는 자가격리 시스템에 맞게 운영되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간혹 있더라도 식사나 생활 편의를 지원하는 시스템이 빈약하다. 부모나 친지를 찾더라도 선교사가 혼자 방을 쓰면서 자가격리를 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더군다나 해외에서 밀려오는 입국자를 위한 시설이 부족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서 지역 관공서에서 추가 확보를 위해 노력을 하지만 전화 문의를 해도 그 수요를 따라 잡기에는 한계가 많아 보인다. 최근 해외에서 코로나19 확진자의 증가로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되는 선교사들이 발생한다. 이를 위한 자가격리 시설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이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선교사 파송 단체 실무자들로부터 많이 듣게 됐다. 교회가 운영하는 수양관?훈련센터, 선교센터, 개인 숙박 시설을 운영하는 이들을 통해 어려운 형편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한 자가격리 시설로 활용해 주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정부의 자가격리 시설 기준에 대한 인준과 보건당국의 방역이 잘 공조가 되고, 지역 주민들의 이해와 협조가 되도록 지역 관공서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시설들이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해외 한인교회 성도들과 일반 해외 입국자, 특히 해외 유학생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인 협력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이 아닌 모두가 우리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실질적이고, 분명한 해결 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해외에서 수고하는 우리 재외동포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아름다운 손길이 코로나 19의 위기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이효상 원장 2020-04-17

4·15총선이 끝났다. 코로나19사태로 어려운 선거전임에도 불구하고 유종의 미를 거둔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낙선한 후보자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아울러 당선자는 낙선자를 ‘위로’하고 낙선자는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찌 보면 당선자나 낙선자나 똑같이 지역발전과 경제회생, 국민의 안전한 삶의 질 보장으로 행복하고 잘 사는 지역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같았으니, 당선자는 먼저 손 내밀어 여러 갈래로 나뉜 민심을 하나로 만들 책임을 가지고 선거로 분열됐던 민심을 하나로 묶는 작업을 바란다. 갈등과 반목은 실질적으로 지역 사회발전에 장애가 되고 정치에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정체성을 지키고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원이다. 민생현장에서 눈물을 닦아온 그 실력으로 약속의 4년을 지역주민에게 희망을 꿈꾸게 하는 역할을 기대한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조화시켜 소통과 화합의 장을 만들어가는 역할자로서, 민생의 안정화를 위해 지역이기주의 갈등과 양극화를 극복하는 지도력을 발휘했으면 한다. 지역사회에는 수많은 과제들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한 표 한 표를 모아 준 지역주민들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유권자와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는 의정활동을 통해 국가와 지역발전을 위해 견제와 균형, 비판과 타협의 정치를 실천함으로 칭찬 듣는 일꾼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오래도록 정도를 걷는 큰 정치인, 좋은 정치인으로 성장해 가기를 기대한다. 정치인은 많으나 좋은 정치인은 얼마 안 된다. 이는 역사가 평가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결코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없다. 사람에 대한 애정은 열심히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정책으로부터 나온다. 이번 선거는 역대 어느 선거보다 공약과 정책 논의가 실종된 깜깜이 선거였다. 건전한 정책·공약 경쟁도 사라졌다. 각 정당의 정책들은 하나같이 기존 정책을 재탕, 삼탕한 수준이었다. 공약 및 정책을 급히 만들거나 과거 사례를 그대로 반복했다. 말로야 뭔들 못할까. 지역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확한 재원 마련 근거도 없는 공약 남발은 참 실망스런 일이었다. 당선자는 선거 때 내세운 공약과 낙선한 후보의 공약도 차별화하고 지역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 검토해 실천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요청한다. 정치는 결코 높은 곳에 있지 않다. 정치는 가장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숙고를 하는 것은 정치의 시작이자 발로이며 이는 대의정치의 기본이다. 그런 비전과 정책 능력도 없고 의정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상갓집 같은 데만 돌아다니거나 지역 행사에만 얼굴을 비추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착각하는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 새로운 정치를 주문한다. 국민들의 혀를 차게 하는 각종 엉터리 정책에 지역 의원들이 거수기로 전락하고 행동대장이나 하는 정치로부터 벗어나야 국회가 산다. 우리 손으로 뽑은 정치인이 몸싸움을 하는 모습을 언론을 통해 볼 때, ‘정치불신’은 계속된다. 진영싸움에 능하거나 중앙당 지시에 따라 거수기나 돌격대 역할로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이번 총선은 나라와 국민 위해 헌신하는 인물 선택보다 거대 양당 대결의 장이었다. 이성과 합리, 실용의 완충지대가 실종됐다. 정치는 협상과 타협의 중도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앞으로 현실은 거대양당의 구심력에 의해 끌려들어가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발생할 것 같다. 사안별로 옳고 그름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우리 편은 무조건 옳고, 저쪽 편은 무조건 나쁘다는 진영논리에 함몰될 수도 있다. 제3정당이 거의 소수인 상태에서 거대양당이 대선을 겨냥해 정국 주도권 다툼을 벌일 경우 대화와 타협보다는 대결이 난무하는 동물국회가 재현될 수 있다. 국민 눈에 진흙탕의 개싸움으로 보이는 짓 좀 하지 말고, 앞으로 4년간 상생할 줄 아는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정도를 걸어갔으면 한다. 혹시나 현실정치에 휘둘려 국민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가능하면 중도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면 싶다. 그래야 국회가 상대를 인정하고 타협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정치가 그나마 살아날 수 있다. 경제위기 극복에 초당적으로 협력하고, 이념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의원이 많아졌으면 한다. 무엇보다 작년 정부 적자 사상 최악을 기록하는 눈사태가 시작됐다. 여기에 코로나사태로 인한 국가적 난제가 수두룩하다. '일단 쓰고 보자'에 쌓여 가는 나랏빚!, 미래를 보고 있는가. 눈덩이 국가부채를 보고도 돈 풀기 경쟁할 때인가. 재난지원금, 후폭풍 대책은 있나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동네 골목식당이 어렵다고 한다. 청년은 실업자 신세다. 당선의 기쁨에 안주하기에는 지역 경제가 너무 엉망상태까지 와 있다. 즉 모든 열과 성을 다해서 지역 경제를 살리는 일에 총 매진해도 부족하다. 경제가 너무 힘들 때, 경제를 살리는 그런 정치리더십을 발휘 했으면 좋겠다. 비례의원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총선에서 비례대표 투표는 최대 난제였다. 군소정당의 국회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마저 거대 양당의 횡포로 훼손됐고, 비례만 노리는 군소 비례전용정당의 난립으로 정책이나 정체성, ‘가치’등을 따져가며 투표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대정신의 변화를 읽지 못한 올드보이들의 경로당 같은 정당은 자연히 도태됐으며 기독자유통일당의 선전이 돋보였다. ‘비례’라는 이름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의원들도 대거 탄생했다. ‘비례’라는 본래 취지대로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제도개선이 절실하다. 선거가 끝났으니 최대한 빨리 경기규칙은 명료하고, 셈법은 간단하며, 적용은 꼼수의 여지없는, 제도개혁과 국회개혁을 촉구한다. “국회의원이 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선거기간 내내 다짐하고 호소했던 그 마음을 그 자세 그대로 지니고 실천하면 얼마나 좋을까. 유권자와 소통한 것을 항상 가슴 깊이 되새기며 공약 이행사항을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는 말없이 자신의 일을 하는 선량한 국민들의 눈물과 한숨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배려에서부터 시작된다. 초심을 늘 지켜 주길 바래보면서 금배지 달았다고 괜히 목에 힘주지 말고, 낮은 자세로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대정부, 대사회적으로 ‘갑’이 되어 당당히 할 말을 다 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지역민들에게는 항상 ‘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누구보다 잘한다’는 권력의 오만함이 아니라 ‘누가 해도 나보다 잘 할 것’이라는 일꾼의 겸손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복지에서 소외된 사각지대가 없는 나라를 만들면 좋겠다. 아이들이나, 노인분들, NGO와 다문화나 새터민, 그런 이들에게까지 손길이 닿는 생활정치를 펼쳐지기를 소망한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정치를 위해 여야를 떠나 국민과 소통하고 시대와 민심의 흐름을 읽으며, 지역과 나라를 걱정하고 위기극복을 위해 헌신하는 의원!, 물론 꿈같은 이야기이겠지만 그렇게 국민에게 사랑받는 21대 국회가 됐으면 한다. 유권자는 당선자를 알고 있다. ?국민은 현명하다. 그래서 항시 지켜보고 있다.

이정기 목사 2020-06-03

밤에는 아침을 기다리고 겨울에는 봄을 기다린다. 하루 하루가 기다림의 연속이다.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전화오기를 기다리고,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외출한 자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요즘은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종식되기만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신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고, 병 낫기를 기다리고, 문제해결을 기다리고, 믿음의 성숙을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림은 영적인 문제이다. 사단이 기다리지 못하게 방해한다. 서두르게 한다. 모든 것에는 다 하나님의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때가 있고, 잉태할 때가 있으면 출산할 때가 있고,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기도했으면 응답 받을 때가 있고, 하나님의 징계가 있으면 회복하실 때도 있다. 모든 것은 다 기다림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잘 못한다. 구약에 하박국도 성질이 급한 선지자였다. 하박국 1장을 보면 ‘어찌하여, 어찌하여’하면서 하나님께 호소한다. 호소하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기다리라고 하신다. 성경에 축복받은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기다림의 시간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려 약속의 아들을 얻었다. 요셉은 13년을 기다려 꿈을 이루었다. 모세는 80년을 기다려 쓰임받았다. 노아는 120년 기다려 구원받았다. 기다렸더니 응답해 주셨다. 시편 40편은 다윗의 시이다. 다윗이 2절에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라는 표현을 한다. 그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표현이다. 기가 막힐 웅덩이란 말은‘끔찍한 웅덩이, 소름끼치는 웅덩이’라는 의미이고, 수렁이라는 말은‘늪지대, 진창’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웅덩이와 수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어느날 다윗이 사울왕을 모시는데 갑자기 왕이 자기를 향해 창을 던진다. 또 사랑하던 아들 압살놈이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려고 달려든다. 우리도 때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힘들어 한 경험이 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다윗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었다. 소망이 있었기에 기다린 것이다. 믿음이 있었기에 기다린 것이다.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것은 아주 어린시절이었다. 다윗은 힘든 상황에서도 기름부음 받은 것을 잊지 않았다.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 기다리고 기다렸다.<시40:1> 아브라함은 10년을 기다리다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기다리면 이삭을 낳고, 기다리지 못하면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부르짖으며 기다리고 기다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기다렸더니 건져 주셨다. 기다렸더니 반석위에 세워 주셨다. 기다렸더니 입에 찬송이 있게 하셨다. 기다렸더니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 기다렸더니 축복하신 것이다. <시40:2-3> 기다림은 깨어지고 부서지는 시간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진흙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빚어 멋진 작품을 만드신다. 진흙은 빚어지는 과정속에 깨어지고 부서지는 고통을 경험한다.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 영광의 날이 오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깨트리실 때, 녹로에 올려놓고 돌리실 때, 뜨거운 가마에 넣으실 때 하나님과 싸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절대 순종해야 한다. 기다림은 믿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믿음은 흔들린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초조해 지고, 조바심이 생기고,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꼭 사단의 속삭임이 있다. 그러므로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한다. 부정을 말하지 말고 긍정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신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크고 크시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때가 되면 이루신다.’ 기다림의 끝에는 축복의 열매가 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주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기다렸더니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셨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렸던 다니엘을 사자굴이라는 웅덩이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렸던 한나를 슬픔의 수렁에서 건져주셨다. 아들 사무엘을 낳게 하셨다. 기다림의 끝에는 축복의 열매가 있다.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우리가 할일은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한다. 응답이 더딜찌라도 기다려야 한다. 어둠이 지나가면 새벽이 온다. 다윗처럼 기도하고 다윗처럼 기다려서, 건져주시고, 세워주시고, 찬송하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삶에도 가득하게 하자.

이정기 목사 2020-06-03

밤에는 아침을 기다리고 겨울에는 봄을 기다린다. 하루 하루가 기다림의 연속이다.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전화오기를 기다리고,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외출한 자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요즘은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종식되기만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신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고, 병 낫기를 기다리고, 문제해결을 기다리고, 믿음의 성숙을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림은 영적인 문제이다. 사단이 기다리지 못하게 방해한다. 서두르게 한다. 모든 것에는 다 하나님의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때가 있고, 잉태할 때가 있으면 출산할 때가 있고,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기도했으면 응답 받을 때가 있고, 하나님의 징계가 있으면 회복하실 때도 있다. 모든 것은 다 기다림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잘 못한다. 구약에 하박국도 성질이 급한 선지자였다. 하박국 1장을 보면 ‘어찌하여, 어찌하여’하면서 하나님께 호소한다. 호소하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기다리라고 하신다. 성경에 축복받은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기다림의 시간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려 약속의 아들을 얻었다. 요셉은 13년을 기다려 꿈을 이루었다. 모세는 80년을 기다려 쓰임받았다. 노아는 120년 기다려 구원받았다. 기다렸더니 응답해 주셨다. 시편 40편은 다윗의 시이다. 다윗이 2절에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라는 표현을 한다. 그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표현이다. 기가 막힐 웅덩이란 말은‘끔찍한 웅덩이, 소름끼치는 웅덩이’라는 의미이고, 수렁이라는 말은‘늪지대, 진창’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웅덩이와 수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어느날 다윗이 사울왕을 모시는데 갑자기 왕이 자기를 향해 창을 던진다. 또 사랑하던 아들 압살놈이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려고 달려든다. 우리도 때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힘들어 한 경험이 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다윗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었다. 소망이 있었기에 기다린 것이다. 믿음이 있었기에 기다린 것이다.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것은 아주 어린시절이었다. 다윗은 힘든 상황에서도 기름부음 받은 것을 잊지 않았다.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 기다리고 기다렸다.<시40:1> 아브라함은 10년을 기다리다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기다리면 이삭을 낳고, 기다리지 못하면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부르짖으며 기다리고 기다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기다렸더니 건져 주셨다. 기다렸더니 반석위에 세워 주셨다. 기다렸더니 입에 찬송이 있게 하셨다. 기다렸더니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 기다렸더니 축복하신 것이다. <시40:2-3> 기다림은 깨어지고 부서지는 시간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진흙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빚어 멋진 작품을 만드신다. 진흙은 빚어지는 과정속에 깨어지고 부서지는 고통을 경험한다.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 영광의 날이 오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깨트리실 때, 녹로에 올려놓고 돌리실 때, 뜨거운 가마에 넣으실 때 하나님과 싸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절대 순종해야 한다. 기다림은 믿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믿음은 흔들린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초조해 지고, 조바심이 생기고,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꼭 사단의 속삭임이 있다. 그러므로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한다. 부정을 말하지 말고 긍정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신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크고 크시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때가 되면 이루신다.’ 기다림의 끝에는 축복의 열매가 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주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기다렸더니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셨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렸던 다니엘을 사자굴이라는 웅덩이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렸던 한나를 슬픔의 수렁에서 건져주셨다. 아들 사무엘을 낳게 하셨다. 기다림의 끝에는 축복의 열매가 있다.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우리가 할일은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한다. 응답이 더딜찌라도 기다려야 한다. 어둠이 지나가면 새벽이 온다. 다윗처럼 기도하고 다윗처럼 기다려서, 건져주시고, 세워주시고, 찬송하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삶에도 가득하게 하자.

여주봉 목사 2020-05-31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영적 리더십을 ‘하나님의 의제(God’s agenda)를 향해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속에 포함된 5가지 요소를 기술한다. 나는 헨리 블랙가비 목사가 그것을 잘 기술했다고 생각하고, 그 요소들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영적 지도자의 임무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비전의 올바른 이해와 영적 리더십과의 연관성이 더 뚜렷해진다. 첫째. 영적 지도자의 임무는 사람들을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영적 리더십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의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므로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의제(agenda), 즉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리더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어떻게 그곳에 이르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만약 리더가 그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참된 리더가 아닐뿐더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방황할 것이다(잠 29:18). 그래서 영적 리더십과 비전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나는 과거에 대학생 사역에 대하여 관심 있던 한 전도사에게 “당신은 하나님께서 지금 캠퍼스에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보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대학생 사역을 위한 리더로 부르신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렇다 할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의제를 보고 자신이 먼저 그것을 향해 달려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그리로 인도하기 위해 영적인 방법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만약 영적 리더가 자신의 지위, 무력, 세속적인 수단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다(렘 5:31). 반면에 참된 영적 리더인 바울은 간사한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이 먼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살전 2:3-6). 이처럼 영적 리더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옳은 방법은 하워드 가드너가 잘 말한 것처럼 설득과 본보기이다. 영적 리더의 임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의 의제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리더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에 순종했으면 리더는 자기 임무를 다한 것이다. 반면 영적 리더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의제로 인도하는 데 실패했다면, 그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리더십은 결과로 측정된다. 그래서 영적 리더십을 공부하다 보면, 참으로 겸손해지는 것을 느낀다. 둘째.영적 지도자들은 성령님께 의존한다. 궁극적으로 사람들 속에 영적 변화를 가져다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므로 영적 리더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께서 영적 리더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보이시면, 영적 리더는 자신이 먼저 그 일에 온 삶으로 동참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나누고 그들을 인도한다. 이때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비전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가감없이 나누고, 성령께서 그들 마음 속에 역사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하실 뿐 아니라 그 비전에 온 삶으로 동참하게 하시도록 오직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영적 리더는 사람들에게 그 비전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리더가 청중의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들이 결단하도록 영향을 끼친다. 어떤 리더들은 자신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면서 성도들에게 자신이 받은 감동대로 해야 한다고 강요하기도 한다. 또 어떤 영적 리더들은 자기가 세운 목표에 사람들이 헌금으로 동참하게끔 온갖 감언이설과 다양한 예를 가지고 그들의 감정에 호소한다. 이것은 모두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다.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 하나님이 없는 수단과 방법들은 전부 타락한 것들이다. 그래서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그의 책 『영적 리더십』에서, 리더가 설득하려고 하는 비전은 하나님께서부터 나온 비전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비전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리더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나눌 때 성령께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 눈을 열어 그것을 보게 하시고 그것에 동참하도록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영적 리더들은 자신이 인도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이 인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도록 그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은 결국 영적 리더의 몫이다.

이효상 원장 2020-05-24

한 남자가 자살을 결심하고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라고 삶의 이유를 묻자 이를 위해 철학자 윌 듀런트는 이 문제를 당대 지성 인들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여겼다.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당대 지성인 100인에게 편지를 썼고 거기서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지성인’은 문인, 성직자, 철학자, 사상가, 대학교수 등 공적 담론을 이끌어 나가는 이들이 다. 사회학자 칼 만하임은 이런 지성인을 가리켜 사회의 ‘파수꾼’이라 불렀다. 자발적이었건, 강요됐건 일제 강점기말 식민지 조선에서는 지식인만 넘쳐날 뿐 지성인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시국도 있었다. 그것은 다만 그때만이 아니다. 과거 혼란한 6·25전란과 민주화시절 대중들은 지식인들을 사회의 길잡이로 삼아서 한 시기를 헤쳐 나가기도 했다. 1970년 이후 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지며 한국사회는 지성인의 현실 참여의 비중이 커졌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지성인의 사회 참여가 감당해 온 역할과 비중은 오히려 작아지고 희미해졌다. 어쩌면 지성인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정도인지도 모른다. 공적영역에서 무책임하며 도덕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이들을 향해 엄중히 비판하고 올바른 대안과 길을 제시하는 선지자적 지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치열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지성적 담론이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췄다는 점이다. 지성인에 속하는 이들이 정치적 입장에 서서 지향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향한 비난과 협박만으로 그 담론을 대체하고 있다. 오늘날 지성인이 아무리 객관성과 보편성을 주장해도, 그 발언은 간단히 어느 한 ‘편’의 것으로 매도당하고 만다. 지성인들의 숙명이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책임윤리와 신념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며 참여할 수도 있다. 지성인의 덕목은 이성적이고 도덕적 균형 감각을 갖춘 독립된 파수꾼 역할에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지성계는 도덕적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양극화된 정치문화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라는 갈등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강단 지성인들이 이제는 SNS와 유튜브 채널에서 활약하며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규정하고 심판하는 검사의 역할까지 하려한다. 내 편이면 옳은 선이고, 반대편은 그른 악으로 규정하는 식이다. 언제부터인가 ‘지성인’이라는 말을 듣기 힘들어졌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실제로 지성인이나 논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혹독한 여론과 언론 앞에 고뇌하고 침묵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는 시류에 영합하는 정치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오늘날 행동하는 지성인 중에 ‘어용’이 많다. 지성인이 침묵하거나 어용 지식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지성의 무덤이요, 지식인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자나 권력기관에 영합하며 자리를 보장받고 줏대 없이 줄서기 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어용’이라 부른다. 물론 아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인’이 아닌 ‘지성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더러 남아 있긴 한 것인가. 가령, 스스로 지성인이라 일컫는 성직자가 자리를 탐하거나 이권에 개입하고 비즈니스맨으로 전락한다면, 선지자적 지성을 포기하고 이런 지식인들이 어떤 편에 서는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하늘의 소리를 듣고 시대정신을 가리키는 선지자와 예언자적 메시지는 누가 할 것인가. 광야의 들소리처럼, 세례요한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혹독한 비난 가운데서도 작은 신음소리라도 내는 그런 지성으로 인해 역사는 치유되고 발전한다. 지성인들은 다음 세대에 평가될 것이다. 다음세대는 현 한국사회와 지성인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이영훈 위임목사 2020-05-17

한낮에는 가만히 있어도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이 벌써 여름이 시작된 것 같다. 올해는 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불청객은 우리에게서 생명이 피어나는 생기를 감상할 수 있는 봄을 빼앗아갔다. 학생들에게서는 설레는 새 학기를, 많은 직장인들에게서는 일터를 빼앗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소중한 가족과 친구를,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빼앗아갔다. 코로나19는 그렇게 우리에게 희망찬 봄을 빼앗아가고 그 빈자리에 절망과 슬픔을 두고 갔다. 이제 우리는 길었던 겨울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무너진 삶의 자리를 다시 세우고 일상을 회복하며 내일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런데 절망의 깊은 잠에 빠져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슬픔과 절망에 빠져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직장을 잃어버리는 절망 등은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다. 고통을 그냥 잊어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아프고 힘들어도 이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절망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수록 상처는 아물지 않고 더욱 벌어지게 된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보다 더 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꿈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꿈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절망을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허황된 미래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 막연히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낙관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인생의 고난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생각만 하고, 꿈만 꾸는 사람의 삶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과거의 꿈에 갇혀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의 성공과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의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더욱 효율적인 새로운 방법이 나오고, 과거의 오류들이 바로 잡히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방법을 고수하고, 잘못된 가치에 연연한다. 영광의 과거가 미래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꿈을 꿀 때가 아니라, 꿈에서 깨어날 때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는 많은 것이 바뀔 것이고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면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보다 더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변화된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구체적인 목적과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요셉을 꿈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맞다. 그는 꿈의 사람이다. 17세 때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받은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면서 그 꿈을 이뤘다. 그러나 그는 꿈의 사람이지, 꿈에 갇혀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요셉이 막연히 꿈이 이뤄질 것만을 기대하며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다면 그는 애굽의 노예로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삶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그 꿈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뤄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인내하고, 준비하고 실력을 쌓았다. 그랬기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었다. 꿈의 성취는 꿈만 꾸는 사람이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 행동하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자. 꿈에서 깨어난 자만이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 절망의 자리에서, 과거에서, 허황된 기대에서 깨어나 미래를 준비하자. 경직된 예배와 잘못된 물량주의, 개 교회 간의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거의 영광에 기대지 말고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세대의 부흥을 이루어가자.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꿈을 성취한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꿈을 성취하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정재영 교수 2020-05-10

코로나 이후의 사회 지난 4개월간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피해를 주었던 코로나19 사태가 조금씩 진정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바이러스 확산세가 뚜렷하게 줄어들었고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도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그동안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직장을 잃는 사람들이 늘면서 가정 경제와 국가 산업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사무실 근무가 제한되고 외출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되면서 일상이 멈춘 듯한 상황이 예상보다 오래 지속됐다. 외국과 같이 극단적인 봉쇄 조치가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가족 모임도 피하게 됐으며 장례식조차도 조문객 없이 치르는 등 우리 삶의 모습에서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는 많이 잠잠해졌고 지난 5월 6일부터는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바이러스에 대한 대응 체제도 다소 완화됐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전에 다른 전염병과 같이 치료제나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라도 다시 유행할 우려가 크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는 변형이 매우 심해서 지금 단계에서 치료제나 백신을 개발한다고 해도 변종 바이러스가 계속 나타나게 되면 다른 유형의 바이러스에는 전혀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완전한 종식은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은 바이러스 종식이 아니라 바이러스와 함께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코로나 이후에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 일상을 회복하겠지만, 코로나 이전의 모습과는 분명한 차이를 가질 것이다. 가능하면 대규모 모임을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접촉을 피할 수 있는 ‘언택트’ 방식의 삶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 자체를 꺼리게 되면서 사회적 관계 자체가 약화될 우려가 크다. 무조건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던 생각도 바뀌어서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고, 위생이 열악한 근무 환경은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경기가 장기적으로 침체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일자리 부족과 저성장 시대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안전을 위해 다양한 사회적 재난이나 위험에 대해서 상시적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재난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계층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코로나와 교회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보건상의 문제로 예배당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면서 많은 교회들이 온라인 예배나 가정 예배로 대체했다. 이 와중에 현장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이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됐는데, 급기야 몇 개 교회에서는 많은 확진자가 발생해 큰 물의를 일으켰다.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늘 드리던 예배를 계속 드렸을 뿐인데 이것이 사회 문제로 비화됐으며, 교회가 매우 이기적인 집단인 것처럼 여겨지게 됐다. 심지어 이단들과 다른 게 없다는 식으로 비치게 돼 하루아침에 교회가 전염병의 온상인 것처럼 취급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현장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들은 그런 교회들대로 대부분이 온라인 예배를 드릴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또 다른 어려움을 겪었다. 급하게 온라인 예배를 드릴 장비를 갖추거나 기술을 익히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이것이 마땅치 않거나 굳이 화상으로 예배 실황을 ‘시청’하기보다 가족끼리 대면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교회들은 가정예배로 대체하기도 했다.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면서 헌금도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일부에서는 현장 예배를 포기 못하는 이유가 헌금이 줄어들 염려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그것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헌금을 드리고자 하는 성도들이 어떤 방식으로 헌금을 드릴 것이냐가 실제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다. 그 조사 결과에서 61.1%의 교회가 주일 예배를 온라인예배로 대체했고, 현장예배를 그대로 유지한 교회는 8.6%, 현장예배와 온라인예배를 동시에 드린 경우는 15.6%로 나타났다. 그리고 응답자 본인은 절반 정도(52.2%)가 출석교회의 온라인예배를 드린 것으로 나타났으며, 출석교회에 직접 가서 예배드린 경우 13.6%,현장예배를 드리는 교회에 가서 예배드린 경우 0.7%로 현장예배 비율이 14.3%로 나타났다. 한편 가정예배를 드린 경우는 13.2%, 방송예배를 드린 경우는 4.0%로 나타났으며, 아예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경우는 13.0%로 코로나 여파로 인해 주일 예배가 다양한 형태로 드려지게 됐다. 본인이 드렸던 온라인·방송·가정예배와 현장예배를 비교해서 ‘현장예배보다 만족하지 못했음’ 53.7%, ‘현장예배와 비슷’ 37.0%, ‘현장예배보다 오히려 더 좋았다’ 9.3%로, 절반 이상이 현장예배가 더 낫다는 평가를 했다. 이 가운데 46.3%의 응답자는 그들이 드린 온라인·방송·가정예배가 현장예배에 못지않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일 헌금에 대해서는 3명 중 1명가량(33.6%)이 ‘계좌이체하여 헌금했다’고 응답했으며, 35.7%는 ‘별도로 모아놓고 있다가 나중에 교회 갈 때 한꺼번에 낼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28%는 아무 계획 없이 교회가면 헌금하겠다는 의견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라인 예배가 기존 예배와 병행될 가능성이 보이며 헌금은 다소 줄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앞으로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 교회 재정도 매우 어려워질 우려가 크다. 코로나 사태가 던지는 신앙의 의미 이러한 경험은 코로나 사태가 안정화된 이후에도 신앙생활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을 의미한다. 바이러스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면역력이 약한 질환자나 노약자는 예배당 예배를 부담스러워하게 돼 예배 참석자가 줄어들 수 있다. 그리고 주일 성수는 교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만 인정된다는 고정 관념이 바뀌어서 보다 다양한 형태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헌금도 온라인이나 신용카드 결제 방식으로 간편하게 하는 비율이 늘어날 것이고 그와 함께 헌금을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만 아니라 다른 교회나 단체에 하게 되는 경우도 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온라인이나 방송으로 자기 교회 예배가 아니라 다른 교회 예배 실황을 드린 사람들도 많을 것이기 때문에 모교회에 대한 인식이나 충성도도 크게 변할 것이다. 결국 전통적인 예배나 헌금 그리고 교회 생활에 대한 인식은 큰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존의 관행이나 고정 관념을 고수하기보다 예배와 헌금의 참 뜻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강조하기보다 공동체 예배와 개인의 삶으로서의 예배 사이의 균형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신앙의 실천이 강조돼야 한다. 최근 영미권에서는 ‘churchianity’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사전에 없는 말이지만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리키는 ‘christianity’와 달리 교회당 중심의 형식적인 신앙을 가리키는 말이다. 코로나 사태는 제도와 형식에 매몰돼 신앙의 참뜻을 잃어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기존의 습관적인 신앙생활이나 형식화된 양태로는 참된 신앙생활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점차 지지를 받고 있으며 대전환을 향한 임계점을 앞당기고 있다. 이제 새로운 신앙과 새로운 일상을 준비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큰 피해를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모멘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의미 있는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삶의 모습 속에 관행으로 주장돼 온 잘못된 부분들을 과감하게 바꾸고 나와 이웃 그리고 특별히 소외 받는 사람들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정기 목사 2020-04-30

우리는 모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다.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이다.<렘29:11> 성경에는 위대한 승리의 기록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승리는 갈멜산에서의 승리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합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기였다. 이유는 아합왕이 결혼을 잘못함으로 시작되었다. 아합왕은 시돈의 왕이였던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한다. 아합왕은 아내에게 충동되어 바알 숭배자가 된다.<왕상21:25-26>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의 단을 쌓고 바알을 숭배하며 아세라 목상을 만든다. 그래서 어떤 왕보다도 하나님 여호와의 진노를 산다. 바알 숭배자들은 바알을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믿었다. 자연 만물을 다스리시고 비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바알을 숭배하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되었다. 삼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으니 그 참상이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그 원인을 아합왕과 이세벨을 비롯한 바알 숭배자들은 엘리야가 바알을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합이 엘리야를 보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말한다.<왕상18:17> 아합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엘리야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때 엘리야가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쫓은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가 괴롭게 한 것이다.’라고 지적한다.<왕상18:18> 그러면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의 결투를 신청한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멜산에 모이게 한다. 엘리야는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분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 하나님만 섬기게 하려고 했다. 드디어 갈멜산에서 850대 1의 싸움이 벌어진다. 850명이 자기들의 신들을 부르며 기도했으나 끝까지 반응이 없었다. 죽은 신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엘리야가 기도한다.‘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과 도랑의 물까지 다 태운다. 그 모습을 보고 모든 백성들이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고백한다. 우상 선지자들을 모두 잡아 기손 시내로 끌고가 다 죽인다. 갈멜산의 대결은 이렇게 엘리야의 멋진 승리로 끝난다. 엘리야는 승리한 후 감격에 도취되어 있지 않았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기다리며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 기도한다. 왕상18:1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한다.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하나님은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다. 엘리야는 약속 붙들고 기도한다. 비를 기대하며 기도한다. 엘리야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큰 비의 소리를 듣는다.<왕상18:41>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해 확신하는 것이다.<히11:1> 엘리야의 확신은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보게 한다. 들리지 않지만 듣게 한다. 만져지지 않지만 확신하게 한다. 큰 비의 소리를 들은 엘리야는 땅에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한다. 기도하다가 사환에게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고 한다. 사환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그것을 일곱번 반복한다. 일곱 번째 사환이 보고하기를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손 만한 작은 구름은 곧 비가 온다는 하나님의 싸인(Sign)이었다. 희망의 구름이었다. 하나님의 축복과 기적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 산을 옮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보리떡 다섯 개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았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적다고, 능력이 적다고 낙심하지 말자.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고, 안 되는 것에서 되는 것을 보고,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보자.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지 말고,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기뻐하자. 언제나 밝은 면을 보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바라보자. 손만한 작은 구름을 보고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비에 막히지 않도록 산에서 빨리 내려가라고 한다.<왕상18:44> 엘리야는 손만한 구름을 보며 환경을 준비한다. 축복받을 그릇을 준비한다. 조금 후에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이며 캄캄해 지더니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자 마차를 타고 가는 아합왕보다 앞서 달려간다.<왕상18:46> 빗속을 달리는 엘리야의 이 장엄한 퍼레이드는 한폭의 위대한 웅변이었다.‘이스라엘 백성들아 보라! 비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 분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그 분만이 우리의 사랑이시다. 그 분은 하늘을 닫을 수도 있고, 하늘을 여실 수도 있다.’ 빗속을 달리는 엘리야의 두뺨에는 빗물과 함께 감격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가? 엘리야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불가능이 가능이 되고, 절망이 희망이 된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시다. 엘리야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큰 비의 소리를 듣자. 손만한 작은 구름 속에서 희망을 보자. 희망의 구름을 보며 받을 축복 준비하자. 응답의 큰비를 체험하고, 응답의 빗속을, 축복의 빗속을 힘차게 달리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하며 살자.

정용구 선교사 2020-04-25

한국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아 선교지로 가게 되면 한국의 주소지는 대개 부모의 주소지나 친형제자매의 주소지로 옮겨진다. 그래서 간혹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오면 여러 편지들이 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사용할 휴대폰을 개통하게 된다.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기에 선불폰 요금제를 주로 사용한다. 이 요금제는 인터넷 데이터 제공은 어느 정도 되지만 통화료가 비싸다. 그리고 공항에서 짐을 찾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4인 가족일 경우 여행가방의 부피와 짐들이 많아서, 최종 목적지까지 가려면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동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절차를 거쳐 예약을 해 놓은 안식관이나 부모 거주지 혹은 친인척의 집에 도착하게 된다. 이것이 코로나19 이전의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 흐름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이 입국 흐름이 바뀌었다. 먼저는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자가격리 앱을 설치해서 인증을 받고 일일 자가진단을 제출한다. 특별검역신고서와 건강상태 질문서 작성 후 코로나19 유증상이면 선별진료소에서 검사를 받는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영종도 임시 격리 시설에서 최대 24시간까지 대기해야 한다. 코로나19 증상이 없는 경우에도 지난 4월 1일부터는 해외입국자의 자가격리 의무화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게 됐다. 해외 입국자 전용버스나 KTX를 타고 정해진 자가 격리소나 주거지로 이동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선교사들에게 어려움이 생긴다. 그 이유는 갈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선교사 안식관들이 정부가 요구하는 자가격리 시스템에 맞게 운영되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간혹 있더라도 식사나 생활 편의를 지원하는 시스템이 빈약하다. 부모나 친지를 찾더라도 선교사가 혼자 방을 쓰면서 자가격리를 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더군다나 해외에서 밀려오는 입국자를 위한 시설이 부족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서 지역 관공서에서 추가 확보를 위해 노력을 하지만 전화 문의를 해도 그 수요를 따라 잡기에는 한계가 많아 보인다. 최근 해외에서 코로나19 확진자의 증가로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되는 선교사들이 발생한다. 이를 위한 자가격리 시설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이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선교사 파송 단체 실무자들로부터 많이 듣게 됐다. 교회가 운영하는 수양관?훈련센터, 선교센터, 개인 숙박 시설을 운영하는 이들을 통해 어려운 형편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한 자가격리 시설로 활용해 주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정부의 자가격리 시설 기준에 대한 인준과 보건당국의 방역이 잘 공조가 되고, 지역 주민들의 이해와 협조가 되도록 지역 관공서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시설들이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해외 한인교회 성도들과 일반 해외 입국자, 특히 해외 유학생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인 협력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이 아닌 모두가 우리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실질적이고, 분명한 해결 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해외에서 수고하는 우리 재외동포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아름다운 손길이 코로나 19의 위기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여주봉 목사 2020-04-26

나는 이제까지 비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비전의 중요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영적 리더십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살펴보면, 비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더욱 뚜렷해진다. 리더십과 비전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비전은 리더가 가져야 할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영적 지도자는 교회의 지도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리더십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리더십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이 다 영적 리더가 될 수 있다. 리더십에 대한 이해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나는 풀러신학교의 교수였던 로버트 클린턴 박사가 영적 리더십을 잘 정의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리더십의 중심 임무는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오늘날 리더십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리더십이 곧 영향력이라는 이해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리더십은 타이틀이나 직분이나 직책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적 성격도 아니다.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아무리 높은 지위와 직책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참된 리더가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향해 영향을 미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클린턴 교수는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모든 성도들이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영적 리더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하면 참된 리더가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매우 좋은 예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경적인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성경적인 지식은 대체로 정통적이었다(마 23:2 참조).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한 빛이요, 맹인들을 인도하는 자라고 자부했다(롬 2:19-20 참조).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훌륭한 리더라고 자부했다. 그리고 그들은 리더의 직책과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전혀 알지 못했다(마 16:3).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맹인이라고 반복적으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마 23:16, 17, 19, 23, 26) 그들에 대해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참된 영적 리더들이 아니었다. 핸리 블랙가비 목사도 그의 책 <영적 리더십>에서 로버트 클린턴 교수의 정의와 이해를 같이 한다. 그러면서 그는 리더십은 결국 결과에 의해 측정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뿐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다음과 같이 영적 리더십을 정의한다. "영적 리더십은 하나님의 의제(God’s agenda)를 향해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정의가 성경이 말하는 영적 리더를 잘 정의하고 있으며, 성경의 이해와도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예수님 시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다시 말해서, 성경은 그 시대를 두고 영적 리더가 없는 시대라고 말한다. 이 말은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깨닫고, 자신들이 그 일에 앞장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리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뜻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소위 수많은 리더들이 있었지만, 바리새인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그리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정확하게 그 시대는 참된 영적 리더들이 없었다. 에스겔 시대도 그와 정확히 똑같은 상태였다. 에스겔 34장 8절에는, 그 당시 타락한 목자들이 하나님의 양을 먹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지 않았다는 의미다(렘 23:16-18, 21-22 참조). 그 결과 그 당시 나라가 망했다. 그런데 그와 동일한 일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영적 리더십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비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효상 원장 2020-04-17

4·15총선이 끝났다. 코로나19사태로 어려운 선거전임에도 불구하고 유종의 미를 거둔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낙선한 후보자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아울러 당선자는 낙선자를 ‘위로’하고 낙선자는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찌 보면 당선자나 낙선자나 똑같이 지역발전과 경제회생, 국민의 안전한 삶의 질 보장으로 행복하고 잘 사는 지역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같았으니, 당선자는 먼저 손 내밀어 여러 갈래로 나뉜 민심을 하나로 만들 책임을 가지고 선거로 분열됐던 민심을 하나로 묶는 작업을 바란다. 갈등과 반목은 실질적으로 지역 사회발전에 장애가 되고 정치에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정체성을 지키고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원이다. 민생현장에서 눈물을 닦아온 그 실력으로 약속의 4년을 지역주민에게 희망을 꿈꾸게 하는 역할을 기대한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조화시켜 소통과 화합의 장을 만들어가는 역할자로서, 민생의 안정화를 위해 지역이기주의 갈등과 양극화를 극복하는 지도력을 발휘했으면 한다. 지역사회에는 수많은 과제들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한 표 한 표를 모아 준 지역주민들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유권자와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는 의정활동을 통해 국가와 지역발전을 위해 견제와 균형, 비판과 타협의 정치를 실천함으로 칭찬 듣는 일꾼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오래도록 정도를 걷는 큰 정치인, 좋은 정치인으로 성장해 가기를 기대한다. 정치인은 많으나 좋은 정치인은 얼마 안 된다. 이는 역사가 평가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결코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없다. 사람에 대한 애정은 열심히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정책으로부터 나온다. 이번 선거는 역대 어느 선거보다 공약과 정책 논의가 실종된 깜깜이 선거였다. 건전한 정책·공약 경쟁도 사라졌다. 각 정당의 정책들은 하나같이 기존 정책을 재탕, 삼탕한 수준이었다. 공약 및 정책을 급히 만들거나 과거 사례를 그대로 반복했다. 말로야 뭔들 못할까. 지역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확한 재원 마련 근거도 없는 공약 남발은 참 실망스런 일이었다. 당선자는 선거 때 내세운 공약과 낙선한 후보의 공약도 차별화하고 지역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 검토해 실천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요청한다. 정치는 결코 높은 곳에 있지 않다. 정치는 가장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숙고를 하는 것은 정치의 시작이자 발로이며 이는 대의정치의 기본이다. 그런 비전과 정책 능력도 없고 의정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상갓집 같은 데만 돌아다니거나 지역 행사에만 얼굴을 비추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착각하는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 새로운 정치를 주문한다. 국민들의 혀를 차게 하는 각종 엉터리 정책에 지역 의원들이 거수기로 전락하고 행동대장이나 하는 정치로부터 벗어나야 국회가 산다. 우리 손으로 뽑은 정치인이 몸싸움을 하는 모습을 언론을 통해 볼 때, ‘정치불신’은 계속된다. 진영싸움에 능하거나 중앙당 지시에 따라 거수기나 돌격대 역할로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이번 총선은 나라와 국민 위해 헌신하는 인물 선택보다 거대 양당 대결의 장이었다. 이성과 합리, 실용의 완충지대가 실종됐다. 정치는 협상과 타협의 중도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앞으로 현실은 거대양당의 구심력에 의해 끌려들어가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발생할 것 같다. 사안별로 옳고 그름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우리 편은 무조건 옳고, 저쪽 편은 무조건 나쁘다는 진영논리에 함몰될 수도 있다. 제3정당이 거의 소수인 상태에서 거대양당이 대선을 겨냥해 정국 주도권 다툼을 벌일 경우 대화와 타협보다는 대결이 난무하는 동물국회가 재현될 수 있다. 국민 눈에 진흙탕의 개싸움으로 보이는 짓 좀 하지 말고, 앞으로 4년간 상생할 줄 아는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정도를 걸어갔으면 한다. 혹시나 현실정치에 휘둘려 국민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가능하면 중도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면 싶다. 그래야 국회가 상대를 인정하고 타협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정치가 그나마 살아날 수 있다. 경제위기 극복에 초당적으로 협력하고, 이념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의원이 많아졌으면 한다. 무엇보다 작년 정부 적자 사상 최악을 기록하는 눈사태가 시작됐다. 여기에 코로나사태로 인한 국가적 난제가 수두룩하다. '일단 쓰고 보자'에 쌓여 가는 나랏빚!, 미래를 보고 있는가. 눈덩이 국가부채를 보고도 돈 풀기 경쟁할 때인가. 재난지원금, 후폭풍 대책은 있나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동네 골목식당이 어렵다고 한다. 청년은 실업자 신세다. 당선의 기쁨에 안주하기에는 지역 경제가 너무 엉망상태까지 와 있다. 즉 모든 열과 성을 다해서 지역 경제를 살리는 일에 총 매진해도 부족하다. 경제가 너무 힘들 때, 경제를 살리는 그런 정치리더십을 발휘 했으면 좋겠다. 비례의원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총선에서 비례대표 투표는 최대 난제였다. 군소정당의 국회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마저 거대 양당의 횡포로 훼손됐고, 비례만 노리는 군소 비례전용정당의 난립으로 정책이나 정체성, ‘가치’등을 따져가며 투표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대정신의 변화를 읽지 못한 올드보이들의 경로당 같은 정당은 자연히 도태됐으며 기독자유통일당의 선전이 돋보였다. ‘비례’라는 이름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의원들도 대거 탄생했다. ‘비례’라는 본래 취지대로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제도개선이 절실하다. 선거가 끝났으니 최대한 빨리 경기규칙은 명료하고, 셈법은 간단하며, 적용은 꼼수의 여지없는, 제도개혁과 국회개혁을 촉구한다. “국회의원이 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선거기간 내내 다짐하고 호소했던 그 마음을 그 자세 그대로 지니고 실천하면 얼마나 좋을까. 유권자와 소통한 것을 항상 가슴 깊이 되새기며 공약 이행사항을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치는 말없이 자신의 일을 하는 선량한 국민들의 눈물과 한숨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배려에서부터 시작된다. 초심을 늘 지켜 주길 바래보면서 금배지 달았다고 괜히 목에 힘주지 말고, 낮은 자세로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대정부, 대사회적으로 ‘갑’이 되어 당당히 할 말을 다 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지역민들에게는 항상 ‘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누구보다 잘한다’는 권력의 오만함이 아니라 ‘누가 해도 나보다 잘 할 것’이라는 일꾼의 겸손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복지에서 소외된 사각지대가 없는 나라를 만들면 좋겠다. 아이들이나, 노인분들, NGO와 다문화나 새터민, 그런 이들에게까지 손길이 닿는 생활정치를 펼쳐지기를 소망한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정치를 위해 여야를 떠나 국민과 소통하고 시대와 민심의 흐름을 읽으며, 지역과 나라를 걱정하고 위기극복을 위해 헌신하는 의원!, 물론 꿈같은 이야기이겠지만 그렇게 국민에게 사랑받는 21대 국회가 됐으면 한다. 유권자는 당선자를 알고 있다. ?국민은 현명하다. 그래서 항시 지켜보고 있다.

이영훈 위임목사 2020-04-12

코로나19로 인해 온 나라가 신음하고 있다. 초·중·고교의 개학이 한 달 넘게 연기되고, 나라 대부분의 산업과 시장이 마비됐다. 코로나19가 유럽과 미국으로까지 급속도로 퍼지면서, 이제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사람들은 ‘혹시 지금 지나가는 이 길이 터널이 아니라 한쪽이 막힌 막다른 길인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불안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의 길을 막다른 길로 만드시지 않으셨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망의 입구로 몰아넣으실 때도 있지만, 우리가 그 터널 가운데서 포기하고 주저앉지 않으면 언젠간 희망의 출구로 나오게 돼 있다. 이미 우리가 수많은 고난의 시기를 통과해왔다는 것을 기억하자. 문제는 지금 당장 눈앞의 고난이 너무 크고 무겁게 느껴지기에 그것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2000년 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난 가운데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한 가지 신념 때문에 300여 년 동안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그들도 피륙을 지닌 인간인데 왜 불안과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이 그 모든 슬픔·두려움·고통을 참고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 부활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처럼 그들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에 구차하게 그 고난을 피하지 않았다.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절망이 변해 희망이, 압제가 변해 자유, 불안과 염려가 변해 평안이, 종이 변해 아들이, 사망이 변해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활을 누리는 데에는 조건이 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다. 십자가가 두려워 피하는 자는 부활의 영광도 누릴 수가 없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려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는 사람에겐 놀라운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자. 이번 코로나19의 파장에서 교회들도 벗어날 수 없었다. 전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행정적인 요구에 의해 예배당의 문을 잠갔다. 지역 사회에서는 감염의 근원지라는 오명을 쓰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수많은 미자립 교회들의 존립 걱정, 신앙이 확고하지 않은 성도들은 오랜 시간 예배에서 멀어지면서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부활의 희망을 바라보고 있다. 미자립 교회들의 어려움을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나눠지고 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며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에 대한 사모함이 커지고 있다. 고난의 망치를 두들길수록 연약한 믿음이 점점 단단한 강철과 같은 믿음으로 거듭나고 있다. 올해 우리는 부활절을 맞아 부활의 영광이 아닌 부활을 준비하는 고난을 체감하고 있다. 함께 모여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도 드리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한국교회는 어느 때보다 예수님의 부활에 깊이 동참하고 있다. 십자가는 종착지가 아니다. 지금도 힘들어 하는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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