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 2019-08-15

광복 74주년 맞으면서 지난 역사를 뒤돌아보고 우리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감사하고, 그리고 오늘의 우리나라를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시편 126편 1절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꿈꾸는 것 같았다.”라고 말한 후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행하셨다 하였도다.”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도 그러했다. 우선 해방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하게 된 것은 저들의 군사력도, 외교적 결실도 아니었듯이 우리의 해방도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정치력이나 외교적 노력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했기에 함석헌은 “해방이 도덕같이 왔다”고 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세상의 되어가는 일들을 보면 사람이 역사를 움직이고 지도자가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지만, 인간이 아무리 거부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역사가 일어난다. 신생 제국인 페르시아가 유대민족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은 고레스 왕의 결단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조서를 내렸던”(스 1:1)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도자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다. 그러했기에 시편기자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다. My times are in thy hand”(시31:15)고 고백한 것이다. 대동아전쟁 말기 패색이 짙어지자 조선 총독 아베는 한국인 민족지도자를 포함한 기독교 지도자 5만 명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다. 비밀지령 ‘조선 총독부 보호관찰령 제3호’인데, 학살 예정일이 1945년 8월 18일이었다. 그런데 8월 15일 해방이 왔고, 학살 대상자였던 이들이 처형당하기 전날 밤인 8월 17일 밤 12시 경에 옥문이 열리고 출옥했다. 해방이 하루만 늦었더라도 이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이점은 재야사학자 문정창과 선교사 마펫의 기록에 나타나 있다. 또 한 가지. 광복은 단순히 정치적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주어진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유를 누린 것은 단순히 정치적 자유만이 아니었다. 바벨론의 종교가 아닌 저들의 종교, 저들의 신앙을 마음껏 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 시편 126편 4~6절이 바로 이런 의미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광복은 정치적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였다. 일제는 교회를 탄압했고 설교를 감시하고 예배를 감독하고 집회시간을 통제했다. 찬송도 제한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혹은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하니’ 등은 금지곡이었다. 교회도 강제로 통폐합되기도 했다. 1942년 당시 부산경남지방 교회가 325개 교회였는데, 108개 교회를 통폐합해 217개 교회로 축소됐으니 3분의 1이나 되는 교회가 사라졌다. 신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탄압을 받았다. 신사참배 반대로 2천명 투옥되고 35명이 순교하고 해방 후 마지막 26명이 출옥했다. 광복은 정치적 독립만이 아니라 신교의 자유였다.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신 것은 또 한 가지 목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과 우상 숭배로 멸망했으나 70년 후 ‘시온의 포로를 돌리신 것은’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기 위함이었다. 해방은 은혜로 주어졌으나 그 해방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바르게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에서도 8·15 광복을 주신 것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게 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재건하고 쇄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다. 우리가 이 책임을 다했는가에 대해서는 반성해야 할 것이다. 광복 74주년을 맞는 오늘의 현실은 희망적이지 못하다. 중국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일본으로부터 채이고 북한으로부터 조롱당하고 있다. 한미동맹이 와해되고 있고,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돼 가고 있다. 경제적 추락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복합적인 위기에 둘러싸여 부상구가 보이지 않는다. 교회마저 혼란에 빠져 있다.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을 수출심사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 눈치 보며 숨죽이고 받지 않겠다는 쌀까지 주겠다며 추파를 던지지만 북한 김정은은 노골적으로 우리를 깔아뭉개며 위협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74년 이전의 속박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교회가 현실을 직시하고 각성하고 기도하는 길만이 남아 있다.

이영훈 위임목사 2019-08-06

“일본은 오늘 정오를 기해 미국에 항복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토(1901-1989)가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지만,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주일 만에 무조건적 항복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갑작스럽게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광복이 갑자기 이뤄졌다고 해서 그 과정까지 갑자기 이뤄진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강제병합’된 이후부터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1940년 9월부터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해 더욱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1943년 11월에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문서화 됐다.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절한 청원 덕분이었다. 이 조항이 광복되기 한 달 전 1945년 7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까지 이어져 일본이 패망한 이후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는 법적인 토대가 됐다(제8항). 이 밖에도 김구,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귀한 희생을 치러가며 독립을 준비했다. 믿는 자들의 구원도 믿을 때 즉시 받게 되지만, 이 구원이 이뤄지고 우리에게 전달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수고와 노력이 있었다. 먼저 생명의 내어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희생이 있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한 이후 사도를 포함한 120명의 제자들이 초대교회를 세우고 순교의 피를 흘려가며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파했다. 시간이 흘러 선교사들의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을 통해 복음의 불모지인 대한민국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전해졌다. “만일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조선에 바치겠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 원하노라.” 이와 같은 양화진 묘비에 적힌 글을 읽노라면 그분들의 수고와 희생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현재 우리는 다른 이들이 수고로 이룬 광복과 구원을 받아 누리고 있다. 불은 연료가 있어야 계속 빛을 발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이 자신을 태워 만든 빛을 누리는 데에 머문다면 그 불은 금방 꺼지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연료가 된다면 구원의 불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확산될 것이다. 광복은 ‘빛 광’(光), ‘회복할 복’(復)이다. 광복된 지 74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광복(光復)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지만 아직도 빛이 없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이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또한 돈, 음란, 게임, 도박, 마약 등에 중독돼 스스로 삶을 파괴하고 있다. 자유가 없는 발전은 인테리어가 잘된 감옥에 사는 것과 같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참된 자유와 만족과 기쁨은 빛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믿는 자들은 빛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과정이라는 희생과 노력 없이는 빛을 낼 수 없다. 우리에게 빛을 전해주기 위해 수고했던 믿음의 선진들처럼 이제 우리도 주변 사람들과 다음 세대에 빛을 비춰주기 위해 수고의 노력을 시작하자. 당장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자. 하루하루의 과정이 쌓이다 보면 우리도 어느새 환하게 빛나는 불이 돼 세상을 환하게 비취게 될 것이다.

허성욱 이학박사·밝은빛명광교회 교육목사 2019-07-24

만일 빛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밝은 낮에 보는 세상도 아름답지만 밤에 보는 세상은 더 아름답다. 하늘의 별빛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거리의 불빛들은 실로 우리를 경탄케 한다. 부산의 상징물의 하나인 광안대교가 보여주는 아름다움도 빛의 조화이다. 모든 물상들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빛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빛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우선 생명체들의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빛이 있기에 세상이 있다고 말해도 크게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생물의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영양분의 공급이다. 식물의 엽록체는 빛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바꿔 유기물로 저장한다. 이것을 ‘광합성’이라고 한다. 식물은 이 광합성을 통해 자라고 그 식물을 동물들이 먹고 살아간다. 그 식물과 동물은 사람에게 친구가 되기도 하고 먹이가 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인류는 빛을 이용해서 물질 내부를 들여다보고 그 안의 상황을 파악한 후에 온갖 모양으로 다듬어, 인류에게 필요한 각종 제품을 만들어 활용한다. 모두들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도 빛을 활용한 것 중의 하나이다. 안부를 전하기도 하고 중요한 정보를 주고받기도 한다. 가끔 범죄와 관련된 수사를 할 때 휴대폰을 압수하는 것도 그 주고받은 정보가 거기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집 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면 라디오, 텔레비전 등과 같이 빛을 이용한 기기를 활용하면 된다. 천지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에너지이다. 당연히 빛도 에너지이다. 언젠가 어느 글에서 에너지 보존법칙을 염두에 두고 “에너지는 영원히 보존되기 때문에 우주 에너지는 피조물일 수 없다”는 주장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런 생각은 ‘피조물과 창조주를 혼동’(칼빈)한 것이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다시 확인하여 둔다. 빛도 에너지이다. 창세기 1장 3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고 말씀하셨다. 에너지의 하나인 그 빛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말씀이다. 초월적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절대적 권능이 포함돼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은 물질과 에너지는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천지가 창조되고 혼돈하고 공허한 땅을 둘러싸고 있는 깊은 수면 위의 흑암을 보시며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말씀하시니 그대로 행해졌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방편이 말씀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물들이 실재하기 위한 모든 조건들을 포함한다. 자연현상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그대로 순종했다. 우리는 이 창세기 1장 3절의 빛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정확한 빛의 물리적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의 태양처럼 어느 한 방향에서 지구를 향해 비춰짐으로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빛과 모든 생명의 근원’이 ‘태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태양 창조 이전의 빛이 존재하도록 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이정기 목사 2019-07-28

어느 날, 몇몇 상처 입은 독수리들이 모였다. 그 모임에 왕따 당한 독수리, 배신 당한 독수리, 시험에 떨어진 독수리, 사업에 실패한 독수리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모두 자기가 제일 불행한 독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죽자!'라고 의견 일치를 보았다. 모두 죽음의 언덕 밑으로 떨어지려고 할 때, 저 멀리서 영웅 독수리가 날아왔다. 그리고 '너희들 지금 뭐해?'라고 소리쳤다. 상처 입은 독수리들이 말했다. '너무 살기 힘들어서 우리는 죽기로 결정했어요.' 그때 영웅 독수리가 큰 날개를 펴서 몸 곳곳에 있는 상처들을 보여 주며 말했다. '내 몸의 상처들을 봐라! 이것은 솔가지에 찢겨 생긴 상처고, 이것은 다른 독수리에게 할퀸 상처고, 이것은 사냥꾼의 화살에 맞은 상처고, 그리고 마음의 상처는 훨씬 더 많아! 세상에 상처가 없는 새가 어디 있겠느냐? 자, 일어나 크게 날아보자!'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나무에는 나이테가 있듯이 사람은 살아온 만큼의 아픔과 상처들이 있다. 우리가 볼 때 행복해 보이고, 아주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대동소이하다. 그 사람들에게도 지우개가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을 것이다. 옛말에 '너희 상처를 하늘의 별로 만들어라'라는 말이 있다. 상처(Scar)와 별(Star)은 철자 하나 차이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진주는 조개에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와 씨름하는 과정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상처 없이 영롱한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진주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상처는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도 한다. 북한에 2년 6개월 9일 동안 억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캐나다 토론토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님을 작년 10월말에 캄보디아 현지목회자와 선교사 세미나에 강사로 참여했다가 만났다. 3박 4일동안 함께 지냈다. 고난이 축복이었다고 간증했다. 18년간 북한을 150번 방문하면서 후원자들과 함께 북한 고아 1만여명을 먹이고 입혔고, 양로원 8개를 건축해 노인을 돌보았고, 수백만 달러 배를 구입해 수산물을 잡을 수 있게 도왔고, 2,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목욕탕도 지어주었고, 돈으로 환산하면 약 5,000만 달러(580억 원)가 넘었다고 한다. 구호사역이 알려지면서 무비자 혜택을 받았고 북한의 207개 군을 모두 돌아볼 수 있었는데 결과는 종신형이었다. 북한의 최고 존엄을 모독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종신노역형을 선고받고 하루 8시간 중노동을 하면서 두달만에 23kg가 빠졌고, 겨울에는 발가락이 다 동상이 걸려서 힘들었다고 했다. 죄수는 자기 한명이었고, 지키는 사람은 50명이었고, 24시간 감시를 받으며 두려움과 싸워야 했고, 3개월동안 계속 설사하기도 했고, 1달동안 배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었고, 1달동안 석탄 가스로 죽을 뻔 했다고 했다. 나중에 성경책이 도착하여 잠자는 시간 빼고 성경을 읽었고, 수천개의 성경구절을 암송했고, 사역안을 정리해서 700개의 강의안을 다 외울 수 있었다고 했다. 성경을 보니 요셉, 예레미야, 이사야, 다니엘, 베드로, 바울, 요한, 유명한 사람들은 다 감옥출신이어서 위로받았다고 했다. 모순된 재판이었지만 예수님만큼 모순된 재판을 받은 분이 없어서 예수님을 생각하며 위로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했다. 지금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역하고 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이해한 사람이 있다. 모세였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서 보았고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실제로 보았다. 신명기 32장 11-12절에서 우리를 독수리같이 훈련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보금자리를 어지럽히고 떨어뜨린 것은 어미 독수리의 사랑이었다. 새 중의 새로 만들기 위한 훈련이었다. 창공을 나는 새로 만들기 위한 훈련이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떨어뜨리신다. 한두 번이 아니고 반복해서 떨어뜨리신다. 그 때 마다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실패와 좌절을 느낀다. 그러나 그 떨어지는 아픔을 통해 창공을 나는 독수리가 되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이다.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원치 않는 어려움이 닥치고, 평안하던 직장에 갑자기 소용돌이가 치고, 가정의 문제가 그치지 않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도 응답이 없고, 열심히 믿으려고 할수록 문제가 풀리기보다 더 어려워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떨어뜨리고 계신 것이다. 반복해서 떨어뜨리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완전히 떨어져 재기 불능 상태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크신 날개로 받아주시고 업어 주신다. 훈련이 끝나면 날지 못하는 독수리가 아니라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큰 믿음의 독수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먹구름이 잔뜩 끼어도 그 먹구름 너머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다.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찬란한 새벽은 오게 되어 있다. 보금자리가 어지럽혀 지고, 사정없이 떨어지고 있는가? 죽을 힘을 다해 날개짖 해야 한다. 마침내 훈련의 과정이 끝나면 저 높은 곳을 비상하며, 환경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는 승리자로 살게 된다. 고통을 이기면 독수리가 된다.

정용구 선교사 없음2019-08-18

인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크리켓(Cricket)이라는 경기를 즐겨한다. 이러한 와중에 인도에 거주하는 외국인으로서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축구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음을 발견하고 축구 한일전이 시작된 적이 있었다. 영상 50℃에 육박하는 더위에 제대로 된 구장도 없는 곳이지만, 축구에 대한 열의로 각 팀에 30명 정도의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모여서 더위로 인한 체력안배를 위해 선수를 교체하면서 매주 6개월 정도 경기를 한 적이 있었다. 몹시 격렬한 경기였지만 인도에 사는 같은 외국인이라는 마음으로 한국인과 일본인 구별 없이 소통도 잘하고, 특별한 추억을 쌓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과 일본의 관계 속 많은 소통의 문제들은 심각한 수준을 넘어 하루가 다르게 급격하게 골이 깊어지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또 일본의 과거 역사적 행위들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일본에 대해 마음이 닫히고 싫어지는 것은 한국인이라면 예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이기 이전에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기에 한국인이 가지는 일본에 대한 기본적인 감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가져야 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랑해야 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성경을 통해서나 신앙선조들의 삶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일본에도 적지 않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파송돼 사역하고 있다. 한일 간의 복잡한 감정을 넘어서서 물가도 비싸고, 복음화 비율도 상당히 낮아서 선교의 열매가 정말 맺히기 어려운 선교지 임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껄끄러운(?) 일본을 택해 사역하는 귀한 선교사들이 있다. 그런데 최근 사태로 말미암아 반일 감정이 확대돼 ‘일본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까지 여파가 이어지지 않을까?’를 걱정하게 된다.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를 치닫는 요즘 오랫동안 한일 관계를 연구한 전문가이며 그리스도인이었던 지인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일본이 저렇게 한일관계를 악화시킬 때에는 저들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신호라고 생각하십시오”라고 권고했다. 오랫동안 한일관계를 연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깊은 통찰력 속에서 얻은 귀중한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골이 깊게 파인 한일관계의 긴장감 가운데 포항에서는 ‘헤세드 아시아 포 재팬(Hesed Asia for Japan)’이라는 특별한 행사가 광복절 주간인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포항 기쁨의교회에서 개최됐다. 이 기간 동안 한국과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일본 선교를 위한 모든영적 인프라를 최대한 동원했다. 네트워크화와 함께 영적소통으로 일본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의미 있는 행사들이 치러졌다. 지금의 한일 관계 속에서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한국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될 일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위기의 시기를 이겨나갈 최고의 해법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한일 관계의 문제를 자신에게로 가져오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악화된 한일관계의 뉴스만을 들을 것이 아니라, 일본과 일본선교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도해야 될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허성욱 이학박사·밝은빛명광교회 교육목사 없음2019-08-16

빛의 기원에 대해 초기 태양이 형성될 때의 핵융합 반응에서 나오는 에너지이거나 대폭발 당시의 초기 우주의 에너지에서 찾으려는 관점(아시모프와 비슷한 관점)에서 창세기 1장 3절의 빛을 태양 자체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해와 달과 별이 1절에서 이미 형성됐는데, 당시 지구 대기권의 상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3절에서 빛이 나타나 낮과 밤이 구분되고, 마침내 창조 제4일에 완전하게 보이게 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완성된 광명이 창조되기까지 ‘해’는 어두운 천체로 존재한 것이 되므로, 창세기 1장 16절 말씀을 무용하게 하고 만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빛을 영적인 것으로 해석해,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나오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영적인 무지 상태의 영혼을 감싸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의 기운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이 영혼을 비추기 시작하는 단계라면서 이 빛을 신적인 ‘진리’로 파악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게 된다면 이런 생각은 4절의 빛과 어두움, 5절의 낮과 밤의 구분이라는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피조물과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2절의 ‘흑암의 깊음’을 ‘블랙홀’로 생각하고 블랙홀에서 우주의 기원을 찾으려 했던 과학자가 있다. 그는 “만일 블랙홀에서 무엇인가가 나온다면, 맨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가장 빠르게 날아가는 빛”이라고 하면서 빛이 최초에 창조됐다는 관점에서 창세기나 과학이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블랙홀에 대한 이해를 소홀히 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블랙홀이란 별의 일생에 있어 마지막 단계이다. 블랙홀은 별이 스스로의 무게 때문에 검은 구멍으로 수축된, ‘별이 죽어 남긴 중력의 수렁’이다. 창조를 말하면서 별의 종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는 없다. 블랙홀 안으로 들어올 수는 있으나 어떤 정보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빛을 포함한 어떤 입자나 파동도 블랙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블랙홀이다. 어떤 정보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면 탈출속도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지구를 벗어나려면 중력을 이겨야 한다. 중력을 이기려면 초속 약 11.2km의 속도가 필요하다. 이것을 ‘탈출속도’라고 한다. 이 탈출속도가 엄청나게 커서 빛마저도 빠져나올 수 없는 천체가 블랙홀이다. 블랙홀에서는 빛 자체도 빠져 나올 수 없는데 여기서 우주가 시작했다고 볼 수 없으며, 흑암은 창조 당시의 지구의 한 특징으로,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시기 전의 어두움일 뿐이다. 창세기 1장 2절의 흑암을 블랙홀로 보는 것은 진화론적 해석이다. 창세기 1장 3절에서 언급하는 빛은 현존하는 태양의 빛도 아니고, 영적인 빛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빛은 태양이 없는 상태에서의 빛이면서도 물리적인 빛인 특수한 빛이라야 한다. 이 빛은 태양이 창조되기 전에 창조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11절)의 존재 조건이다. 빛은 모든 생명의 존재 조건이므로 태양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이 존재하게 하신 것이다. 빛은 피조물이다.

정용구 선교사 없음2019-08-13

올 여름휴가철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사실 휴가는 선교사들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각 교단과 선교단체에도 선교사 안식년 규정과 쉼에 대한 원칙들이 있다. 그렇다면 선교사는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선교사들은 휴가 때 고국을 방문해 친지나 후원자들을 만나는 일을 계획하고 오랜만에 고국의 음식과 문화를 즐기면서 잠깐이라도 충전을 받고 가게 된다. 그런데 고국을 방문하면 아쉽게도 국내의 성도들이 선교사를 만나서 선교지의 이야기를 들을 상황이 조성되는 게 쉽지 않다. 오랜만에 온 선교사는 오지 산간 선교지에서 겪은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귀한 일을 나누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의 일상과 많은 관련이 없는 선교지와 선교사의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없다. 특히 선교사와 선교사역의 소중함은 알지만, 선교지의 어려움을 듣게 되면 괜히 선교후원을 해야 될 것 같은 부담도 작용한다. 많은 단기선교팀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선교지 정보가 흔치 않았기에 선교사에게 궁금한 내용들을 질문을 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손쉽게 선교현장의 정보를 알게 되니 굳이 선교사에게 묻지 않는다. 그리고 짧은 시간 동안 선교사와 친밀감을 만들기도 어렵고, 단기선교 사역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야 되는 현실로 인해 선교사의 삶에 대해서 깊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예전만큼 깊지 않다. 그러다보니 선교사가 선뜻 쉽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곳이 많지 않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선교사들을 ‘국제학 교수’라고 생각하고, 근사한 식당과 카페로 선교사 부부를 초청해서 3-4시간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많은 선교사들과 각본이나 사전에 주제를 정하지 않아도 이 시간에는 선교사의 사역, 가정, 자녀문제, 진로문제 등 수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많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큰 위로와 쉼을 얻는다고 고백했다. 선교현장에서도 지칠 때마다 이웃에 있는 선교사 부부와 같이 부부동반으로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때로는 밤늦은 시간까지 대화가 이어지면서 서로의 사역과 가정의 문제를 위로하는 시간이 되면서 ‘쉼’을 얻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됐다. 필자가 비자거부와 추방의 위기를 겪을 때 선교지를 방문한 단기선교팀이 있었다. 이 팀의 사역과 준비가 여러 면에서 큰 위로와 힘이 됐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그들의 진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선교사님 어떻게 지내세요?”, “더운데 여기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선교사님은 선교지에 왜 오셨어요”, “선교사님은 언제 제일 힘드세요?” 등으로 짧은 단기선교팀의 시간이지만, 같이 지내는 동안 진심으로 선교사에게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질문하는 어린 학생 참가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고마웠다. ‘후원이 중단되고, 몸이 아프고, 사역을 철수해야 하는 위기와 한 교회와 가정의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내면에 약함을 드러내기 싫었고, 선교사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지내던 선교사에게 ‘선교사님 어떻게 지내세요?’ 라는 이 작은 한마디가 선교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쉼이 되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진지하게 선교사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어쩌면 그 어떤 위로와 쉼보다 중요하다. 상대방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다. 혹시 주변에 계신 선교사들이 계신다면 짧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해 보면 좋지 않을까? “선교사님 어떻게 지내세요?”

정재영 교수 없음2019-08-11

약화되는 한국인의 종교성 이번에 한국종합사회조사(KGSS, 2003-2018) 결과가 발표되었다. 한국종합사회조사는 미국의 시카고대학교 NORC(NORC at the University of Chicago)에서 1972년 최초로 창안되어 지난 45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미국의 종합사회조사(General Social Survey, GSS)의 한국판 조사이다. 이러한 한국종합사회조사는 한국의 대표적 사회과학 학술자료로,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1,031명에 대하여 대면면접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요즘에는 조사의 편의를 위해 패널들을 통한 조사를 실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조사는 미리 구성된 패널이 아니라 전국 단위의 새로운 표본을 추출하여 면접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국적인 여론이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매우 가치 있는 조사이다. 이 조사에서는 2003년 이후에 1,600개가 넘는 문항들을 통해 국민들의 의식과 생활 실태를 파악하고 있다. 이 중에 종교에 대한 질문이 많지 않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조사 결과를 통해 한국인의 종교성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올해 조사 내용은 주로 종교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종교 비율이 개신교가 19.7%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불교 18.9%, 천주교 12.2% 순이었다. 개신교 비율은 지난 2015년 인구센서스 결과와 같았고, 불교와 천주교는 인구센서스보다 약간 높게 나왔다. 인구센서스에서는 조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개신교가 신자 수가 가장 많은 1위 종교로 나타났는데, 이번 조사에서도 개신교 신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종교 인구가 51.6%로 인구센서스보다 약간 높게 나왔지만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종교가 없다고 응답하였다. 전세계적으로 종교인구가 80%가 넘는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 종교 인구는 매우 적은 편이다. 종교집회 참석 빈도는 “일주일에 여러 번 참석한다”는 응답이 6.9%로 2003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낮게 나왔고, “일주일에 한번”(14.2%)을 포함해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이 21.1%로 이 역시 조사 이래 가장 낮은 수치이다. 전체적으로 한국 종교인들의 집회 참석 빈도가 점점 줄고 있다는 조사 결과이다. 종교별로 통계가 나오지 않아서 그 차이를 알 수는 없지만,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2017년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들은 다른 종교에 비해 1주일간 종교 집회에 가장 많이(73.7%) 참석했으나 5년 전에 비해 참석률은 오히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종교가 있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가장 많은 36.7%가 “종교 가르침이나 교리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응답하여 “신이나 영혼, 귀신의 존재를 믿는 것”(15.0%), “종교에서 강조하는 교리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13.4%), 그리고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10.9%)보다 종교적 실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한 지식이나 믿음 또는 종교 행사 참석보다도 믿는 바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심에 대해서는 10.1%만 강하다고 응답하였고, 25.0%는 별로 강하지 않다고 응답하여 대체로 낮게 평가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종교의 가르침이 상충되는 일이 발생할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겠다”는 응답이 25.6%였고,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응답이 16.4%로 훨씬 적게 나왔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종교를 중요하게 고려하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8.1%와 “중요하다” 12.5%를 합하여 20.6%만 중요하다고 응답하였고, 중요하지 않다는 응답이 54.2%로 과반을 차지했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종교에 자신의 삶을 복속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중심에 놓고 필요에 따라 종교를 활용하고자 하는 의식이 큰 것으로 해석된다. 실용적인 종교성 이번 조사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평소에 얼마나 종교적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질문들을 추가하였는데, 먼저 “죽은 사람들의 영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에 대해서는 15.3%만 그렇다고 응답하였고, 절반이 넘는 56.5%는 그렇지 않다고 응답하여 혼령의 영향에 대해서는 별로 믿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요가나 식이요법에 종교적인 요소가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13.3%만이 그렇다고 응답하였고, 56.6%는 그렇지 않다고 응답하여 이러한 활동이 종교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덕을 쌓으면 자손들이 복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그렇다“ 19.2%를 합하여 절반이 넘는 52.2%가 그렇다고 답하였고, 위급하거나 중대한 상황에서 기도를 해본 경험에 대해서도 52.3%가 그렇다고 응답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적인 심성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고, 2016년 조사에서 유교를 믿는다는 응답이 49.6%로 거의 절반에 육박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유교식 신앙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할 정도이다. 그리고 이번 조사에서 장례예식은 유교방식이라는 응답이 21.7%로 불교 방식이라는 응답과 함께 가장 많이 나왔다. 그러나 유교의 전통을 따르는 제사와 같은 조상 숭배 의식이 후손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인 것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유교가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에서는 영향을 미치지만 조상신에 대한 믿음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요가를 인도 종교의 영향으로 본다든지 식이요법을 특정 종교의 가르침이나 종교적 수행으로 보는 시각도 별로 없어서 이것을 단순히 건강을 위한 행위나 노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인 선행을 하고 덕을 쌓으면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 아님에도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과반수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인 근거와 상관없이 덕을 쌓는 것은 좋은 일이고 이것이 후손들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하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위급하거나 중대한 상황에서 기도해본 경험이 과반수에 이른다는 것도 응답자의 절반 정도가 비종교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이 29.3%인 것을 생각하면 한번이라도 기도를 한 사람은 70%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성찰이 필요한 종교인 이러한 조사 결과를 통해서 볼 때, 현대 한국인들에게 종교적 심성이나 종교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사회가 발달하고 점차 다원화되면서 종교에 대한 관심이나 집중도가 감소하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럼에도 자손이 복을 받는 것에는 여전히 관심이 있고 위급하거나 중대한 일이 있을 때 기도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종교를 개입시킨다는 의미로 종교를 수단시하는 성향으로 이해된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의 종교에 대해서 현세주의적 종교성이라든지 도구적 종교성이라는 표현이 있어왔는데 이것이 보다 더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요소나 종교의 가르침을 그 자체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곧 자기 자신을 절대화 하는 태도인데 그만큼 스스로 점검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하고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겸손의 태도이다. 이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이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성공이나 목적 달성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수단시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신앙 태도를 점검하고 돌이켜볼 때이다.

김명전 GOODTV·데일리굿뉴스 대표이사 없음2019-07-26

안녕하십니까. 일본 참의원선거도 끝났습니다. 총리의 새로운 출발과 함께 양국의 발전을 위하여 몇 가지 제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총리께서 주도하고 있는 반도체 소재의 한국 수출규제 조치가 양국 경제의 호혜협력(互惠協力)체제를 뿌리 채 흔들고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세 번째로 큰 교역국입니다. 한국은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과의 교역에서 한 번도 흑자를 본 일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전체 무역적자 규모가 지난해 말 기준 6,046억 달러(708조 원)로 추정됩니다. 2010년은 한 해 동안 최고 361억 2,000만 달러의 적자를 보기도 했습니다. 현재도 매년 200억 달러 이상 적자입니다. 한국의 최대 무역적자국이 일본입니다. 그래서 한국민은 일본에 돈 벌게 해주고 뺨 맞은 심정입니다. 지구상에 이런 경우는 없을 겁니다. 국제 거래질서나 상도의(商道義)에도 어긋납니다. 때문에 미국이 무역에서 큰 적자를 보는 중국을 공격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물론 한국이 소재 부품산업 육성 등에 나태한 책임도 큽니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국제사회의 불문율을 너무 믿었습니다. 이번 기습으로 경제 분야에까지 국제사회의 신뢰 기반을 무너뜨리는 위기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일본에 대한 부정적 평판이 국제사회에 확산될 것입니다. 한국 경제만 타격을 입고 끝나지 않습니다. 일본경제에 미치는 파장도 막대할 것 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이웃국가로서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입니다. 일본은 한국에 역사적으로 많은 사변을 일으켰습니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일본 트라우마가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한국전쟁과 복구과정에서 최대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일본 경제기획청의 1953년 경제백서기록입니다. 일본이 “한국전쟁 3년간 ‘조선특수’에서 벌어들인 돈은 15억 3,000만 달러” 입니다. 당시 일본은 대외 무역에서 3년간 11억 6,000만 달러 적자였습니다. 한국의 수요를 기반으로 일거에 흑자로 바뀌었습니다. 한국이 곤궁함을 해결해 준 셈입니다. 이후, 일본은 1970년대 한국 경제발전기간에 연평균 15% 대의 성장을 누렸습니다. 세계 2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도 일본의 기술력에 힘입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점을 인정합니다. 한·일간에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이웃국가로서 경제만은 성장의 과실을 함께 누려온 것입니다.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는 한·일 간에 새로운 미래를 가름할 분수령이 분명합니다. 한·일을 넘어 아시아에 새로운 역학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對 중국정책에 큰 허점이 됩니다. 지금 중국은 미국의 견제 정책으로 경제발전 노선을 재조정하는 단계입니다. 일본의 한국 경제제재가 중국 경제의 숨통을 열어주는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중국은 아주 빠른 속도로 G2를 넘어 G1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반도체 등 제4차 산업 분야에서 세계 최강을 목표로 뛰고 있습니다. 중국의 잠재 역량은 국토와 인구 등 총체적인 국가자원 면에서 한·일을 능가합니다.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일본의 對중국 관계에서 완충국의 입장입니다. 수출규제가 계속되면 미국과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한국의 지위가 흔들리고 약화됩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완충장치 없이 중국과 직접 힘겨루기를 하여야 합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이며 소탐대실(小貪大失)입니다. 미국의 對중국 전략에서도 가장 강력한 린치핀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동맹국으로서 함께 가야합니다. 적대시 정책은 답이 아닙니다. 물론 아베 총리와 일본 국민의 한국에 대한 정서적인 불편함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반복되는 갈등에 피로감이 깊을 것입니다. “신뢰할 수 없다”는 총리의 발언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면 이해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은 아시아에서 찾아보기 드문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그만큼 국가권력의 행사가 제한적입니다. 외교는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정치를 넘어 민간 경제영역까지 정쟁에 동원하는 것은 금도를 넘었습니다. 세계의 주요 언론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자유무역체제는 각 국이 경쟁력 있는 분야에 집중하고 협력하는 국제 분업구조입니다. 글로벌 가치사슬이자 산업생태계입니다. 국제 경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세계를 경제전쟁의 광풍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한 도발이라는 것을 인식했으면 합니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신뢰도와 경제적 영향력도 도전 받게 됩니다. 한국은 미리 대비하지 못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사즉생의 각오로 소재 부품 등 독자적 수급체제를 구축할 것입니다. 반일감정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적으로 살지 않을 거라면 이쯤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 큰 리더십을 보이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국민들도 화답할 겁니다. 두 나라의 정상이 앙금을 털고 손을 맞잡는 장면을 보고 싶습니다.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해섭니다.

여주봉 목사 2019-07-21

나는 지난번에 이사야 하반부에 약속된 신약의 교회를 위한 유업 중 열방의 유업에 대해서 나누었다. 이사야 하반부에 약속된 모든 유업은 십자가의 복음에 주어진 유업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신약의 교회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즉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그 교회에 이 놀라운 열방의 유업이 주어질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세계 선교는 정체상태에 있다. 일부에서는 이미 줄어들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앞서 선교사의 고령화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이것은 선교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 전반에 대한 문제이다. 많은 교회가 교회와 성도들이 함께 늙어가고 있다. 반 이상의 교회에 주일학교가 없다. 청년부가 따로 없는 교회는 그보다 더 많다고 한다. 당연히 재정적으로도 한국교회는 전혀 이전과 같이 않다. 한국교회 전반적인 상황이 그렇다 보니 세계 선교에 있어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한국교회 전반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교회의 세계선교에 대해서 위기감을 느끼며 자조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다. 교회가 앞에서 나눈 것처럼 십자가의 복음 위에 철저히 세워질 때 다른 유업들과 함께 열방의 유업이 주어질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의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시다고 믿는다. 조그마한 한 예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하고 계신 일의 한 부분을 나누어 보겠다. 수년 전에 한 청년을 중앙아시아의 한 나라로 2년 단기선교사로 파송했다.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귀하게 세워져 가는 청년이었다. 그러한 청년이 가서 그 나라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을 도우며 섬겼더니 어른들이 하지 못하던 어린이 사역이 되어지고, 청년 사역이 되어졌다. 그것을 본 주변 선교사님들이 그 곳을 방문한 우리 교회 해외선교위원회원들에게 그런 젊은이들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우리는 주로 20대의 젊은이들을 1년씩 단기선교사로 파송하기 시작했다. 우선 2명을 한 조로 묶어서 파송했다. 파송할 때 우리의 목표는 그들을 통한 사역이 아니라, 그들의 양육이었다. 그들은 가서 무엇보다 먼저 그 나라 언어를 배웠다. 그리고 그날 배운 그대로 캠퍼스에서 젊은이들과 교제하며 기회 되는 대로 전도했다. 그들은 6개월만에 현지어로 간증하고 9개월만에 현지어로 설교했다. 그들은 현지인들을 섬기는 일에도 적극적이었고, 선교사님의 지도 아래 철저한 영성 훈련을 받았다. 같이 함께 지내다 보니 관계적인 면에서 ‘빡센’ 훈련이 되었고, 리더십 훈련도 자동적으로 되었다. 당연히 선교사님의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사역의 훈련이 되었고, 어린이 사역과 청년 사역에 교회 안에서 매우 활발해 졌다. 교회는 한 사람 당 매월 100만 정도를 지원했다. 그 정도면 그들이 그곳에서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생각하지 못했던 어린이 사역과 청년 사역이 일어나게 되자 그 선교사님이 그 사역을 지속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우리는 6개월 후 다시 두 명을 동일하게 그곳에 파송했고, 두 명이 1년 기간을 마치고 돌아올 때 다시 두 명을 파송함으로써 항상 그곳에 네 명이 남아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 우리가 2+2 프로젝트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 열매는 일부 나눈 것처럼 참 놀라왔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으로 무장된 그들이 그렇게 가서 섬기니까 참으로 귀한 일들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그들의 인생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맨 처음 갔던 4명 중에서는 3명이 장기선교사로 지원했다. 그러한 사실을 듣고, 이것이 한국교회 다음 세대의 선교 동원을 위해 매우 중요한 한 방법이 되겠다고 생각한 KWMA의 요청에 따라 나는 작년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있었던 세계선교대회에서 이것을 발표했다. 몇 년이 지나자 그 민족의 경우 99% 이상이 무슬림인 나라에서 청년부가 10명이 넘게 자라났고, 일부 청년들의 삶이 우리 단기선교팀원들과 교제하면서 놀랍게 변했다. 한 자매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 하는 자매였는데, 그 1년 기간을 통해 놀랍게 바뀌고 특히 리더십에서 자라났다. 전혀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1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서 그리고 캠퍼스에서 귀하게 섬기도 있다. 지금은 다음 세대 사역을 위해 사단법인 청년선교를 만들었다. 우리는 전국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귀한 자원자들을 모집하고, 그들을 훈련해서 열방으로 파송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고 후원하려고 한다. 지금 현재 두 나라에 젊은이들이 나가 있으며, 이번 9월에는 세 번째 나라로 파송을 시작한다. 우리의 목표는 세계 250 지역으로 매년 1000명의 젊은이들을 파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함께 할 지도선교사 250명을 찾고 있다. 이 일은 군 선교, 캠퍼스 선교, 직장 선교를 연결하는 다음 세대 큰 프로잭트의 일환이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좀 더 나누고, 다른 분야들도 나누겠다.

신동식 목사 없음2019-07-14

한국 사람들이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체면입니다. 이것은 한국 사람을 아주 특별나게 만듭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체면은 예의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체면은 예의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의는 도적적인 측면이 강하게 부각됩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체면은 인격적인 관계보다는 외적인 모습을 더욱 중요하게 여깁니다. 도덕적인 내적인 모습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본질적으로는 외적인 모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면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납니다. 가장 확실한 모습은 거주 문화입니다. 한국에서 유독 강남이 아파트가 비싼 이유는 문화적인 효과도 있지만 체면이 가장 큰 역할을 합니다. 강남에 산다는 것만으로 자신들의 신분이 우월하게 여김을 받는 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빌라에 사는 사람들과 사귀지 않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파트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서 또래 집단을 만들고 편 가르기를 하는 모습에서서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체면문화의 감염된 사람들의 속 좁은 모습입니다. 이러한 체면은 교육의 분야에서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좋은 대학이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우월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죽도록 공부시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학벌의 카르텔은 기독교인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동시에 학력에 대한 동경심은 그 사람의 인격과 살아온 삶의 이력을 다 무시하게 만듭니다. 외적인 조건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모습을 종종 봅니다. 대단한 기상을 가지고 있어도 돈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봅니다. 그 가운데 대형교회에 대하여 비판하던 사람들도 자신들이 기부 받을 일이 생기면 비판하던 교회의 장점을 강조하고 기부할 수 없는 작은 교회를 우습게 여깁니다. 체면의식이 또 기승을 부리는 것이 바로 외모지상주의입니다. 속이야 어떻게 되든 외모만 빛나면 얻고자 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모는 무서운 무기가 틀림없습니다. 보함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은 모두 눈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강력한 무기가 안목의 정욕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것과 싸우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안목의 정욕에 강력한 친구가 바로 체면의식입니다. 이렇게 체면 의식은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가식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체면의식은 정직한 나눔과 고백을 하는 것에 큰 걸림돌이 됩니다.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나누지 못할 때 심각한 질병에 걸립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각종 정신적 질병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질병을 나누는 목록을 보면 각종 인격성 장애가 존재합니다. 우울증, 조현병, 경계성 인격장애등 많은 질병들이 존재합니다. 이것의 근원에는 자신의 문제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가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나눔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적당한 관계유지만을 가진 체 신앙 생활합니다. 이것은 신앙보다 체면의식이 앞서있기 때문입니다. 체면의식이라는 세계관은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아마 대표적인 것이 직분일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으면 당연히 직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받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체면의식입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교회들이 명예직을 만들어서 성도들을 달래는 것을 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타락이 싹튼 것입니다. 체면의식이 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곳이 바로 봉사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봉사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자발적 감사의 표현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시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에 대한 감사가 바로 봉사입니다. 그런데 감사가 아니라 체면의식으로 봉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타락을 부추기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어서 잘 속습니다. 정직한 고백과 자발적 감사가 없어도 봉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체면의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목표가 사라지면 그만 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험을 받으면 포기합니다. 자발적인 봉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체면의식은 상대방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항상 시험과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필요합니다. 감사는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이유 중 하나가 우리를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에 강력한 힘이 됩니다. 감사는 위기의 상황에서 더욱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삶을 결코 절망에 빠뜨리지 않습니다.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공급합니다. 왜냐하면 감사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동일한 장소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지만 범사에 감사함으로 사는 사람과 불만으로 사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맡기신다면 누구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입니다. 오늘도 나의 삶의 자리가 감사로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체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감사로 나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을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허성욱 이학박사·밝은빛명광교회 교육목사 없음2019-07-09

사람의 몸은 물이 1~2% 정도만 부족해도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 5% 정도가 부족하면 거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며, 12% 정도가 부족할 경우 생명을 잃게 된다. 사람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다 물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물은 우리들의 생명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태교, 1991).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동서양의 고대 신화와 철학은 물을 생명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고, 만물의 근원으로 말하기도 한다. 물의 속성 중 가장 기본이 사물을 깨끗하게 하는 작용이다. 그 세척력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속성은 ‘물’을 ‘생명 그 자체’로 보는 우리의 일반적·종교적 관점에 반영돼 있다. 고대 종교 의식에서 물이 사람을 정결케 하는 효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그 예 가운데 하나이다. 구약 성경에도 같은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물로 씻어 정결하게’(겔 16:4),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레 1:9,13),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 것, 그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레 6:27-28), ‘물로 몸을 씻을 것, 그의 옷을 빨고 물로 씻을 것,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 나무 그릇은 다 물로 씻을 것, 흐르는 물에 그의 몸을 씻을 것’(레 15:5-13), ‘전신을 물로 씻을 것, 모든 옷과 가죽은 물에 빨 것, 둘 다 물로 몸을 씻을 것’(레 15:16~18, 21, 22, 27), ‘해질 때에 목욕하고’(신 23:10-11), ‘물로 씻기고…’(출 29:4-9). 사물이 극도로 부정(不淨)하게 된 경우에는 ‘생수’(또는 흐르는 물)를 사용함으로써 정결하게 했다(레 11:32-36). ‘부정을 깨끗하게 하는 물’(민 19:9)은 부정하게 된 사람 또는 물건을 정결하게 했으며, ‘속죄의 물’(민8:7)은 레위인을 정결하게 하는데 사용됐다. 신약에서도 역시 물은 정결 의식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세례(마 3:11, 막 1:8, 행 1:5, 행 8:36-39)라는 의식으로 나타난다. 이 세례는 몸을 먼저 물로 씻는 것으로 정결을 상징하게 되는데 결국 이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물’을 ‘새로운 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아가페성경사전, 1992). 성경은 아예 3위 하나님을 물로 비유하기도 한다. 예레미야 2장 13절, 17장 13절은 하나님 자신을 ‘생수의 근원’으로, 이사야 44장 3-4절에서는 성령님을 물로 표현하고 있다. ‘생수의 근원’(요 7:38)이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요 4:10-15)에서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려 하셨고, 사마리아 여인은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오지도 않는 물’을 구했다. 그러므로 물은 생리적으로 ‘우리의 생명 그 자체’일뿐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우리의 ‘생명 그 자체’이다. 우리의 목자가 되신 주님은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계 7:17). 마지막 날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하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실 것이다(계 21:6). 생명 그 자체인 물을 창조하셔서 오늘도 우리들에게 영육간 의미심장한 음성을 들려주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드리며 살 일이다.

정용구 선교사 없음2019-07-07

선교사들끼리 모이면 “한국에서는 하루에 몇 가지의 일을 했었는데, 선교지에서는 하루에 하나만 해도 많이 하는 것”이라는 말들을 주고받는다. 한국에서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선교지에서 지내다 보니 이 말이 이해가 됐다. 선교지에서 2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에 철사를 자르는 연장을 잃어버렸다. 정착 초기에 꼭 필요한 연장이기에 이것을 하나 살려고 길을 나섰는데, 어디서 파는지를 몰라서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헤맸다. 현지어가 잘 안되고, 현지 교통시스템도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길에 지나는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서 가게를 찾았다. 해가 지기 전에 물건을 구입하고, 오토바이 릭샤를 타고, 헤매지 않고 집을 찾아 온 자신이 대견해서 감격했던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여러 가지 사역들을 계획을 세워서 빈틈없이 이일 저 일을 했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렇게 그 날은 정말 ‘하루 동안에 하나의 일’ 밖에 못했다. 인터넷을 설치하는 데에는 열흘이 걸렸다. 선배 선교사들이 자신은 한 달이 걸렸는데 요즘 세상 많이 좋아졌다고 위로를 건넸다. 가스통을 구입하려는데 6개월, 중고 자동차를 구입해서 등록을 하는데 8개월이 걸렸다. 물론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서 갈수록 일을 처리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이처럼 선교지에서는 쉽게 처리되는 일이 많지 않았고,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비자거부 및 추방 문제가 거론되는 지역의 선교사들은 비자 허락 받은 시간 동안만 선교지에 살게 된다. 그래서 늘 시한부 인생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비자 만료 기간이 오면 다시 한 번 마음을 졸이면서 서류를 준비하고 심사를 받는다. 늘 선교지의 시간들이 선교사의 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선교지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일들이 과중 된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부족한 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그러다보니 무리가 되고 과로가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돌아보면 선교지에서 땀을 흘려 사역하며, 시간을 보냈던 시간이 지금까지의 인생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알기에 많은 선교사들이 후원 중단과, 병에 걸리거나, 추방과 비자거부를 당해도 다시 선교지로 향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평생의 시간을 선교지에서 보내신 선교사들도 만나게 된다. 이제 2019년도 벌써 절반이 지났다. 지난 6개월 동안의 시간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을 했는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는지는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알 것이다. 한국은 선교지보다도 훨씬 좋은 환경이고, 세계 최고의 배달 시스템과 신선식품까지 배달되는 시대에 하루에 여러 가지의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항상 시간이 부족해서 늘 쫓기는 삶을 살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도 일은 하고는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간은 부자나 가난한 자, 아이나 어른, 배운 자나 못 배운 자에게 모두 공평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정말 부끄럽지 않게 잘 사용했는지, 의미 있게 잘 사용했는지를 1년의 절반이 지난 시점에서 되돌아보기를 기대한다. 선교지에서 인생의 가장 귀한 시간을 보내는 선교사들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부끄럽지 않게 사용하는 계기가 되는 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특히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시간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 인생의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될지를 진지하게 묻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문성모 목사 2019-07-03

구약의 3대 절기는 유월절(踰越節), 맥추절(麥湫節), 수장절(收藏節)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절기는 내용상으로 모두 감사절에 속한다. 유월절은 무교절(無酵節)과 초실절(初實節)로 연속된다. 즉 무교절이 끝나는 안식일 다음날(주일)이 초실절이다. 오늘날 유월절의 의미는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감사하는 절기로 지켜진다. 수장절은 초막절이라고도 하는데 가을 추수를 하며 지키는 절기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의미이다. 맥추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며 칠칠절(七七節), 오순절(五旬節)과 같은 이름으로도 불렸다. 맥추절은 초실절로부터 시작하여 50일째 되는 날에 보리를 추수하고 드리는 감사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신약시대에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기에 성령강림의 의미를 더 중시하였다. 따라서 맥추절은 성령강림절에 지켜야 마땅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절기란 문화에 속하므로 각 나라의 기독교가 가지는 문화적 특성에 따라 그 지키는 풍습과 시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즉 문화와 복음은 다른 것이다. 복음의 캐릭터는 유일성과 불변성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성경이 주장하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할 수 없고 변질된 것을 복음이라고 말해도 안 된다. 따라서 시대가 아무리 달라져도 복음은 유일하며 불변하다. 그러나 문화의 캐릭터는 복음과는 달리 다양성과 가변성을 특징으로 한다. 즉 문화는 하나의 정답만을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예배의식과 다른 의식의 예배를 드리고, 예수님이 불렀던 찬송과 다른 찬송을 부른다. 하지만 예배의식이나 찬송은 문화이기에 오늘날 우리의 것으로 바꾸었다고 문제될 것이 없다. 맥추절의 시기나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말하는 맥추절의 의미는 감사절이기에 우리의 교회문화대로 맥추감사절의 시기와 방법을 정하여 지키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추수감사절의 시기도 우리의 추석 명절에 맞출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맥추감사절을 단순히 헌금을 걷는 목적으로 지킨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예물이 없는 감사 절기는 성경에 없다. 오히려 예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예물드림은 은혜를 아는 자의 최고의 감사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한해의 상반기를 보내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예물을 드리는 한국의 맥추감사절의 풍습은 그대로가 한국화 된 우리의 아름다운 감사절의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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