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기 목사 2019-12-01

한국 교회가 큰 위기를 맞았다. 총체적인 위기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더욱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 존재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이런 얘기를 듣는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그러나 초대교회에도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과 불평이 있었다. 초대교회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 돌아가도 별 수 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와 완벽한 사람은 없다. 믿을 것은 말씀밖에 없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오직 성경!’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많은 책들가운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두말할 것 없이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겔3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끌고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신다. 전혀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였다. 그런 뼈들을 향해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을 대언하자 뼈들이 연결되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를 향해 대언했더니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가 된다. 전혀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씀으로 회복시킬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한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요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요1:14절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다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에 엄청난 능력이 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 지고 눈이 뜨였다.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딤후3:16-17) 말씀이 능력이다. 말씀이 축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나라는 부강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는 부흥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일터는 창대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가정은 번성하게 된다. 느헤미야 8장에는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벌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운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 부흥은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이었다.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한다. 백성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6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여 모이는 곳에 임한다.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난 오순절 사건도, 고넬료의 가정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도, 미스바에서 일어난 승리의 역사도 모두 사모하여 모일 때 일어났다. 어느 때든지 축복과 부흥의 원리는 동일하다. 축복과 부흥 전에는 항상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이 있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고, 말씀이 더 듣고 싶고,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임하게 되는 전조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젓을 사모함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벧전2:2) 에스라가 백성들 앞에서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 일어섰다는 것은 말씀을 경외하는 모습이고,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순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말씀의 권위를 높이는 만큼 은혜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말씀이 귀하게 느껴지고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들리면 역사는 일어나게 될 것이다.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고, 믿음의 역사가 있어서 소문난 교회였다. 모든 믿는자에게 본이 되는 교회였다. 그 비결은 말씀받는 태도가 좋았기 때문이다. 살전2:13절에 “~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에, 그 말씀이 믿는자들속에서 역사한 것이다. 에스라가 읽어준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고, 크게 기뻐하고, 말씀에 순종한다. 칠월에는 초막절을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초막절을 지킨다. 이방인과의 잡혼을 금한다. 안식일 날 해서는 안될 일들을 금한다. 안식년을 똑바로 지킨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단한다.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이었다. 우리 신앙생활에 변화가 없는 이유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많고, 성도는 많은데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사는 한 사람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 한 사람이 가정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성공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가장 큰 축복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 순종만큼 복된 길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 축복하시고, 순종하는 만큼 사용하신다. 참된 부흥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말씀으로 시작된 부흥은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한다. 신앙생활의 내용이 달라진다. 신앙의 수준이 달라진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부흥이 필요하다. 말씀이 깨달아져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크게 기뻐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요새 지식 정보 산업이 뜨고 있다. 인터넷을 보면 엄청나고 방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 원하는 지식 대부분 다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지식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시키는 능력은 말씀안에 있다. 말씀 안에 사는 길이 있고, 말씀 안에 회복의 길이 있다. 말씀따라 살면 신기하게 문제도 풀리고, 말씀따라 살면 신기하게 인간관계도 풀리게 된다. 이제 작은 일을 해도 하나님 말씀보다 앞서지 말자. 작은 사업을 해도 말씀 중심적으로 운영하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마4:4> 말씀없이 잘사는 길은 없다. 말씀없이 성공도 없고, 말씀없이 성숙도 없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으로 나타난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으로 회개하고, 크게 기뻐하고, 순종하여 삶의 현장에서 말씀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부흥 많이 체험하며 사시기 바란다.

정용구 선교사 2019-12-06

겨울이 다가오면서 한국에서는 김치를 대량으로 만드는 ‘김장’이라는 특별한 풍경들을 접하게 된다. 한국에서의 김장은 오랫동안 먹을 김치를 맛있게 만드는데 목표를 두지만, 선교지에서의 김장은 ‘김치’ 그 자체를 만드는 것에 목표일 때가 많다. 왜냐하면 선교지에서 제대로 된 김치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다. 외국에서 이러한 재료를 구해서 한국의 김치 맛을 완벽하게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김치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있다. 필자가 사역했던 지역에서는 배추를 구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배추를 절이기 위한 굵은 소금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한국에서 가져 오는 것도 무게가 많이 나가 다른 것을 두고 소금을 가져오기가 쉽지 않다. 결국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가는 소금을 구해 물에 녹여 그 물로 배추를 절인다. 또 하나 넘어야 되는 산이 있다. 배추를 씻어야 하는데 석회가 많이 포함된 선교현지의 물은 수질오염 때문에 결국 마지막 해금(헹굼) 과정에는 정수기의 물을 사용하거나, 구입한 물로 해금을 한다. 특별히 더운 날씨에는 김치를 보관하기 어려워 한국에서 컨테이너로 김치 냉장고를 받거나, 한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서 냉장고를 보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렵게 김장을 해서 김치냉장고에 저장해 놔도,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정전이 되는 바람에 더운 날씨에 모든 김치가 썩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해외에도 많은 물자공급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해외에 있는 한인들에게 김치는 귀중한 음식이다. 그래서 한인들이나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조달된 재료로 현지식으로 김장을 하고, 많지 않은 양이지만 한인들끼리 김치를 나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어떤 선물보다도 큰 선물이 바로 김치다. 이것도 배추가 있거나 식재료가 있는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국식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김치에 대해서 생각조차 못하는 지역이 더 많다. 그런 지역은 말이 김치이지, 한국에서의 김치와는 모양과 맛이 아주 다르다. 한국에서는 흔하게 먹던 김치로 김치찌개, 김치전, 김치만두 등 많은 김치요리들을 접한다. 따라서 김치가 귀중하다는 것을 제대로 몰랐지만, 선교지를 경험하고 오니 그 귀중함을 알게 됐다. 또 음식을 귀하게 여기고 더욱 감사함으로 음식을 대하고 있다. 선교사는 현지에 가면 현지 음식만 먹고, 현지인처럼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선교사도 김치가 그리울 때가 있다. 거기에다 오랫동안 먹었던 음식에 대한 체질이 있어서 잘 먹어야 건강하게 선교를 잘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점점 김장을 하지 않고 구입해서 먹는 가정이 늘고 있다. 많은 먹거리들로 인해 김치는 외면을 받을지 모르지만, 아직 해외에서는 한인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한국의 대표적인 먹거리의 하나다. 혹시 해외선교 현지에서 선교사들의 가정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적은 양이라도 김치 선물을 한 번 준비해서 드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선교지를 방문해 주신 어머님과 장모님이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정성껏 김치를 담아서 선교지에 가져 오신 김치가 오랫동안 큰 위로가 된 경험 때문이다. 젓갈의 향내와 국산 고춧가루의 선명한 색깔, 그리고 적절하게 절여지고 익혀진 배추, 무엇보다도 선교지에서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는 자녀를 위해 노년의 나이에 그 힘든 김장을 홀로 하셨을 모습이 그려지니 그냥 김치와는 분명히 달랐다. 김장철마다 흔하게 담그고 먹는 김치이지만 그 김치도 지구의 다른 곳에서는 다르게 만들고, 다르게 먹는다. 한국과 다른 선교지에서 특별하게 김치를 접하는 선교사들을 함께 응원하기를 기대한다.

서상근 목사 2019-11-17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샬롬’(shalom) 만큼이나 많이 쓰는 단어가 있다. ‘토다’(todah) 혹은‘토다 라바’(todah rava) 라는 말이다. 샬롬은 평안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토다는 한국어로 감사로 자주 번역된다. 그런데 토다가 의미론적으로 ‘감사’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명사 ‘토다’(todah)는 동사 ‘야다’(yadah)에서 파생된 단어다. ‘야다’는 기본적으로 살을 쏘거나 무언가를 던진다는 뜻이다. 창세기 29장 35절에서 처음 사용된 후 구약에서만 약 114회 사용된다. 모세오경에서 이 단어는 ‘찬송하다’, 죄를 ‘자복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다. 그러다가 왕국 시대 이후에 가면 ‘(하나님을 대상으로) 감사한다’는 의미가 두드러지게 된다. 이 단어는 광범위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라 볼 수 있다. 야다의 명사형인 토다 역시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성경에서는 감사 외에도 찬양, 찬송, 감사제물, 고백 등 다양한 의미로 번역된다. 이 의미들은 공통적으로 행위의 상대자인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 감사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눠질 수 있는데, 하나는 내게 행하신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내게 행하실 것을 소망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이 둘은 시간의 관점에서 과거에 나를 위해 역사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과, 앞으로 내게 역사하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브리어 ‘야다’(yadah)는 70역에서 헬라어 ‘엑소몰로게오’(exomologeo)로 번역된다. 이 단 어 역시 히브리어 ‘야다’와 마찬가지로 ‘감사하다’와 죄를 ‘자복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그 외에 신약 성경에서 ‘감사’의 의미로 사용되는 헬라어가 하나 더 있다.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라는 단어로 ‘좋은’(eu)과 ‘은혜’(charis)가 합성된 단어다. 은혜로 받은 것에 대해 기뻐한다는 의미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에 대해 기쁜 마음을 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들만 가지고 정리하자면, 감사는 내게 선을 베푸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기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이 용어는 초대교회에서 성찬식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됐다. 신약성경에서 보여주는 감사에 대한 대표적인 교훈으로 살전 5:16-18절을 들 수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3개의 문장은 동일한 구조를 가지는데,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류가 문두에 위치하고 현재명령형 술어가 뒤따르는 도치구문이다. 이 3가지 명령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의도가 전제되었다. 그러니 각각의 명령은 하나님을 전제한 명령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3가지 문장을 신약평행법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신자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뜻을 믿으며 기뻐하고, 그 일을 진행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일의 결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감사는 감사하는 자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대상이 무 엇을 해 주었기 때문에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자기가 무엇으로 감사하는지에만 초점 맞추면 감사의 온전한 의미를 놓칠 수 있다. 감사는 하나님이 신자에게 행하셨던 일, 혹은 앞으로 행하실 일을 기뻐하는 신자가 그 마음을 표현하는 신앙고백임을 기억하자. 감사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재영 교수 2019-11-05

비제도권 교회들의 등장 최근 한국에 새로운 유형의 교회가 등장하고 있다. 제도권 교회들의 성장 정체 속에서 건물, 성직자, 교단 등 기존의 교회 구성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 실험적인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기존 교회의 틀에서는 의미 있는 신앙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로,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가운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그리고 이러한 모양을 원하는 교인들의 욕구에 부응해 기존 교회의 모습에서 탈피한 신앙 공동체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들은 기존의 관점에서는 교회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고, 또한 기존 교회의 틀로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비제도권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종교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탈물질주의와 실존적 안정감의 증가를 들 수 있다. 종교에 대한 욕구가 번영신학에 의지한 축복형에서 의미형으로 변환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개인들이 점점 더 전통적 사회 기관들로부터 피로감을 느끼고 이탈해 개인화, 파편화 돼가는 포스트모더니즘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 교회들은 이렇게 개인 중심의 영성 추구, 형식적 종교의식 보다는 의미와 관계 중심의 신앙 표현,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증가에 대한 저항 등과 같은 새로운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비제도권 교회의 등장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사회가 지향하는 대형화와 규격화로 대표되는 사회 체계화가 종교계까지 퍼지면서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가 서구 문명의 제도권으로 흡수된 이후에, 그 지배 체제의 위치를 굳혔고, 기독교는 점차 제도화된 문화적 관습이 됐다. 그로 인해서 교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관료제와 같은 성격이 교회 안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도권 교회에서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는 실제적인 영성의 경험과 인격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새로운 탈 제도적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 세계권에 속하지는 않지만, 서구기독교의 경험을 따라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제도화의 딜레마 이러한 현상은 종교사회학에서 말하는 ‘제도화의 딜레마’와 관련된다. 제도화의 딜레마란, 교회는 공동체를 추구하지만 그 형태는 사회조직의 특성을 나타내는 데서 오는 문제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교회구성원인 신자들 사이에 일치와 연합, 결속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조직으로서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그러짐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1차집단과 2차집단의 특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제도화는 교회가 존재를 지속하며 여러 가지 활동을 하기 위한 필수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조직은 처음에는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운동체 성격으로 시작하지만, 효율성을 높이고 목적에 보다 빨리 도달하기 위해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된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처음에는 창시자의 카리스마 있는 능력에 의해 시작된 후에는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제도화되는 경향이 있다. 종교의 제도화는 특정종교가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면서 역사를 따라 지속하는가, 아니면 창시자의 카리스마적 종교운동으로 끝나고 마는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여기서 1세대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권위의 제도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면 조직은 와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도화 자체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먼저 조직의 규모가 커질 때 필연으로 나타나는 귀속감 저하 현상을 가리키는 ‘확장의 딜레마’를 들 수 있다. 곧 구성원 사이에서 목표와 규범에 대한 합의의 강도가 약화되는 것이다. 구성원 사이의 교섭이 어려워지고 다양성이 증가되면서 정책결정에 대한 공통이해에 도달하기 어려워진다. 다음으로 ‘복합동기의 딜레마’는 교회 규모가 커질수록 다양한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교회출석동기가 다양해지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구원을 받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위로나 도움을 받기 위해, 복을 받기 위해, 치유를 받기 위해, 사회에서 누리지 못하는 지위나 권력을 교회에서 대용으로 누려보기 위해, 사회운동의 기반을 구하기 위해, 정치나 사업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등 참으로 다양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는 관료주의화의 문제이다. 현대의 모든 조직은 상당한 정도로 관료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관료제는 조직 자체의 존속과 기득권 유지를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환경에 유연하게 변화하지 못하는 경향을 낳는다. 이러한 교회 제도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공동체성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종교학자인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는 미국 교계에 화제가 됐던 ?교회의 종말?에서 중앙 통제에 의해서 표준화되고 규칙화된 종교 형태의 기독교는 쇠퇴하는 반면, 훨씬 더 유연한 형태의 창의성과 인격성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공동체들이 출현하고 있다고 전망한다. 전통 교단들의 교세 약화 이면에는, 관습적 종교의 틀을 넘어서는 영성과 관계 중심의 신앙 재편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최근 미국에서 교단에 속하지 않은 독립교회들이 증가하고 있는 이유이다. 한국의 비제도권 교회들 필자는 교단에 속하지 않고 그들 나름의 교회관에 입각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비제도권 교회들을 조사연구 하였다. 25개 사례 중에 유형별로는 목회자 없이 평신도들로 구성되었거나 목회자가 있어도 목회자로서 특별한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평신도 교회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주일에 모이지 않고 평일에 모이는 주중 교회 형태가 3개 있었고 명시적으로 교회를 표방하지 않지만 사실상 교회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례가 2개 있었다. 한 가지 특징은 연구자가 연구를 수행하여 논문과 책으로 출판된 ‘가나안 성도’ 곧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표방하며 모이는 사례가 3개 있어서 최근 개신교계에서 가나안 성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비제도권 교회에 속한 교인들과 기존 교인들의 인식 차이를 파악하기 위해 설문 조사를 실시했는데 교회에 대한 만족도와 대부분의 평가 항목에서 비제도권 교회 교인들이 더 높은 만족도를 나타냈다. 특히 규모와 체계를 갖춘 교회에 유리한 항목을 제외하고 교회의 본래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측면에 대해서 비제도권 교회가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비제도권 교회들이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요구하는 신앙적 욕구에 더 부합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비제도권 교회 교인들은 신앙생활 이유에서도 보다 본질적인 차원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러한 차이가 비제도권 교회의 우월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소속 교단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교단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교단의 방침이나 이해관계를 넘어서 교인들의 종교적 필요에 민감하고 보다 교회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려는 경향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실제로 교인들 중에는 본인이 속한 교회가 교단이 있는지 없는지 또는 어떤 교단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다니는 경우들이 많다. 따라서 교단 소속 여부와 상관없이 교회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며 보다 공동체적인 교회를 이루려고 하는 교회라면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렇게 비제도권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 큰 도전을 던져준다. 교회 성장 이후기, 엄밀히 말하면 제도교회의 쇠퇴기에 새로운 유형의 교회가 등장하고 있고 이들이 새로운 신앙적 욕구를 채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제도권 교회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교회들과는 형식 구조 면에서 뚜렷한 차별성과 자생적 자유로움을 지니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새롭고 다양한 종교적인 욕구에 대해서 한국 교회, 특히 제도권 교회들이 어떻게 대응하고 스스로 갱신할 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대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여주봉 목사 2019-11-27

지난번에 나는 개인 뿐 아니라, 교회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특히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비전이라는 사실과 비전의 성격에 대해서 나누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비전과 관련하여 네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존 맥스웰 목사는 비전의 4단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참고로 존 맥스웰 목사는 비전의 성격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나나 조지 바나나 헨리 블랙가비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방랑자. 비전을 전혀 볼 줄 모른다. 졸병. 비전을 볼 줄 알지만, 자신의 것으로 추구하지 않는다. 성취자. 비전을 보고 그것을 추구한다. 리더. 비전을 보고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그 부분을 약간 변형하여 비전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전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해서, 그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랑자.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 겁쟁이.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만 대가 지불이 두려워서 가지 못하는 사람. 성취자.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온 삶으로 달려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룬 사람. 리더.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온 삶으로 달려가 하나님의 비전이 그를 통해 성취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그 자리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 방랑자. 방랑자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자기가 세운 비전이나 목표 혹은 꿈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심각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 방랑자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조지 바나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어른들, 십대들, 목회자들, 교회 스텝들, 정계와 재계 리더들, 비영리 단체와 선교단체의 장들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무려 20만 건의 넘는 인터뷰를 가진 후에 내린 몇 가지 결론을 그의 책 『The Power of Vision』에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몇 개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비록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고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대부분의 담임목사들은 그들이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에 대해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들의 회중들의 삶과 지역사회의 삶에 거의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비전의 개념에 대해서 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비전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역 교회에 내에서 당회나 청빙위원회가 담임목사를 청빙하면서 그를 검증하는 핵심적인 기준으로서 교회의 비전을 의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비슷하게 모든 개신교 교회 20개 중 한 교회보다 더 적은 수의 교회만이 그들의 평가 과정에 대한 열쇠로서 그들의 비전 진술서(vision statement)를 사용한다.” 이것을 보면, 오늘날 안 믿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방랑자인 것을 볼 수 있다.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다. 비전과 소명은 다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이유가 소명과 비전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건 단체건 그것은 소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전은 소명과 다르다. 비전은 소명 그 이상이다. 한 예를 들어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복음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 나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 삶을 드렸고, 그것을 위해 준비했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신학교에 다닐 때 나는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신학교 교수가 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신학교 교수가 될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목회자로서의 나의 소명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1991년 이전에는 방랑자였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전혀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모든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그리고 각 교회는 그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여러 목표를 가지고 그 일에 헌신하며 섬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아니다. 조지 바나도 그런 점에서 교회의 mission(소명)과 비전을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mission을 비전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소명은 각기 서로 다르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선, 우리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더 명확하게 해준다. 예를 들어서, 내가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나의 목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내가 목회 중에서도 어떤 종류의 목회를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해준다. 또한, 우리의 사역을 위한 비전이 하나님의 소명을 위한 일 중에서도 어떤 일에 우리의 시간과 정력과 물질을 투자해야 할지, 하나님을 위한 일들 중 어떤 일을 거절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등 우리의 사역을 위한 방향을 설정해 준다. 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행할 때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뒷받침을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뒷받침하신다. 이것은 개인과 단체 모두 마찬가지다.

이효상 원장 2019-11-24

2016년에 약 15년 간 하던 사역을 그만뒀다. 3년 임기를 다섯 번 다 채운다는 것은 과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변명하자면 사실 머리에 새로운 것이 없었다. 그만두고 사무실을 연 것이 ‘근대문화진흥원’이다. 역사와 문화가 없는 교회처럼 이상한 것도 없다. ‘역사’와 ‘문화’가 없는 미래는 없다. 미래를 여는 빛이자 등불이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근대문화자료를 3,000여 점 정리하여 데이터화하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선 지난 4년간 발표한 100편의 칼럼과 논문, 신문, 방송, 포럼, 잡지의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하여 심포지엄을 통해 발표하기도 하였다. 근현대 역사에서 기독교 문화는 복음의 풍성함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일상과 시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이야기와 증언이 주는 감동이 문화를 통해 전해진다. 2017년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연 ‘별이 된 시인 동주’ 전시회와 시 낭송, 콘서트가 그렇다. 창조와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교회가 무슨 문화에 관심을 두느냐는 일부 목회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기도 했다. 교회는 신학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문화적 대변혁기를 맞고 있는 한국 사회의 크리스천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특별히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문화가 급속하게 밀려오고 있는 때에 한국교회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매년 10월 31일이 되면 유령이나 괴물 분장을 하고 집마다 다니며, 사탕과 초콜릿 등을 얻는 축제이지만 해마다 살인마 흉내를 내며 총기 난사로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핼러윈(Halloween)축제가 그렇다. ‘총격’으로 얼룩진 미국산 축제를 국내에 도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타락한 이 세상의 문화는 반신적(反神的)이고, 심지어 사탄적인 문화가 아닌가 할 정도로 막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흔히 문화와 문명 개념을 뛰어넘는 고도한 문화 이해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반문화적이라는 이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28절은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다. 이는 사람이 온 세상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잘 다스려서 그 피조세계에 그 뜻을 잘 드러내도록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문화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 형상됨을 실현하고, 인간의 인간됨을 실현해내는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이다. 얼마 전 가톨릭 신부님을 만났다. 그런데 명함을 받고 놀랐다. 가톨릭 본부에서 직접 가톨릭 영화제를 담당하고 매년 진행하고 있어서 의외로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 문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도록 하는 것과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인간의 생각과 힘을 다해서 그분의 의도에 부합하게 잘 개발하여 원하시는 문화(culture)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 ‘온전한 문화’라면, 인간 자신들의 의도에 따라서 피조계에 힘을 가해서 자신들의 뜻대로 변형시키는 것을 ‘잘못된 문화’라 말할 수 있다. 뉴에이지(New Age) 운동처럼, 종교성을 제거한다면서 인간성을 높인다는 미명하에 하나님을 무시하는 방식의 문화가 현저하게 나타남도 사실이다. 기존의 사회 ·문화 ·종교에서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여 영적 공허를 느낀 사람들이 신비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해 여러 종교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요소와 과학 ·심리 ·기술 ·정신분석 등을 혼합시킨 뉴에이지가 그렇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이 생성해내는 문화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구속함을 받은 크리스천의 사명은 문화 변혁이다. 기존의 잘못된 형태의 문화나 정치를 방치하고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변혁해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변혁사역을 해야 한다. 변혁사역은 결국 거듭남의 열매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적(神國的)이다. 거듭남이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리 순수해도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적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들의 단순한 흥미나 취미, 여흥을 위한 수단 정도라고 여긴다면 전혀 성격이 다르다. 그런 문화 사역은 하나님 나라적인 것이 없고, 따라서 오래 갈 수 없다. 이런 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과 더불어 받은 소명에 따라서 각 문화 영역에서 전문가들이 되어야 한다. 문화는 다양한 분야에서 진정한 전문가들이 있어야 참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작은 글 한편, 그림 한 장, 찬양 음반, 찬양팀의 집회, 기독 서적, 동영상, 문학의 밤, 기독교 유튜브, 기독영화 한편 등은 삶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더 깊은 신앙의 길로 이끌어준다. 교회는 이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활동을 넓게 지지해 나갈 수 있는 교두보가 되며, 지성인과 시민들에게까지 폭을 넓혀 나갈 수 있도록 층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지지기반이 없으면, 크리스천인 전문가가 아무리 능력을 지닌다 해도 한 사회 속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전문가를 폭넓게 지지하는 교회의 관심과 지지가 있을 때 진정한 문화 변혁이 이루어진다. 신실하게 이런 문화 변혁 활동을 하는 크리스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세력들도 크게 나타나 결국 세상은 끝까지 영적인 전쟁터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전쟁터에서 깨어 진정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일에 피 흘리며 묵묵히 감당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이 세상에서 무엇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문화 변혁 사역을 하기보다는,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기에 우리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이 일을 꾸준히 진행해 나가므로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주께서 ‘문화’의 주로 임하셔서 그런 노력을 의미 있게 보시며 인정하시고 위로하실 것이다. 우리의 본 무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문화 활동은 하나님의 손으로만 온전함을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그 사역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첨병들이다. 학문과 문학, 문화사역은 바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가 사역해야 할 장이며, 이는 우리의 삶이 주께 드려지는 합당한 산 제사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이효상 원장(근대문화진흥원 /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신동식 목사 2019-11-18

하나님은우리에게원하시는것이있습니다. 하나님은구체적으로우리에게있어야할것이무엇인지잘알고계십니다. 그래서필요한것가운데가장좋은것을주시기를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마음이가장잘표현된부분이있다면바로'제사장의축복'으로 알려진민수기말씀입니다. “여호와는네게복을주시고너를지키시기를원하며여호와는그얼굴로네게비추사은혜베푸시기를원하며여호와는그얼굴을네게로향하여드사평강주시기를원하노라할지니라하라[민6:24-26]” 하나님이우리에게주시기를원하는것은복을주시고지켜주시고, 은혜를베풀어 주시고, 평강주시는 것입니다. 이만큼큰선물이어디있습니까? 또한하나님은정직한자의후손들이잘되기를원하십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경외하며그계명을크게즐거워하는자는복이있도다그의후손이땅에서강성함이여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있으리로다(시 112:1-3)” 하나님은자녀들이슬픔과고통가운데있는것을원하지않습니다.그래서두려움가운데사는것을결코기뻐하지않습니다. 하나님은말씀을통하여여러곳에서그마음을나타내셨습니다. 또 이러한마음을악한자들에게까지알려주셨습니다. “주여호와의말씀에나의삶을두고맹세하노니나는악인의죽는것을기뻐하지아니하고악인이그길에서돌이켜떠나서사는것을기뻐하노라이스라엘족속아돌이키고돌이키라너희악한길에서떠나라어찌죽고자하느냐하셨다하라(겔 33:11)” 하나님이주의자녀들에게무엇을원하시는지아주분명하게보여주시는말씀입니다. 하나님은우리가하나님의크신사랑가운데참된평화를누리기를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하나님의나라가바로평화를누리는곳이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나라는먹는것과마시는것이아니요오직성령안에있는의와평강과희락이라(롬 14:17)” 하나님나라는의와평강과희락입니다. 그런데하나님나라가어디에있습니까? 바로믿음을고백하는우리들가운데있습니다. “또여기있다저기있다고도못하리니하나님의나라는너희안에있느니라(눅 17:21)” 하나님이우리들에게원하시는것은하나님나라가주는그영광과기쁨과평화를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바로신자가누리는복입니다. 이땅에서시작하여영원토록그기쁨과영광과평화를누리는일입니다. 물론이모든일은하나님의선물입니다. 그래서너무나감사한일입니다. 그런데이복을받으려면그릇이필요합니다. 바로믿음이라는그릇입니다. 그것은하나님께서복주시는분임을확신하는믿음입니다. 이믿음이없이는선물을받을수없습니다. 하나님의선물을받는유일한방법은바로믿음입니다. 믿음은하나님에대한확신입니다. 그리고하나님의말씀에대한순종입니다. 이순종이없이는믿음이라말할수없습니다. 그러므로말씀에대한순종은믿음을나타내는증거입니다. 믿음을가진이들에게나타나는증표는미움, 다툼, 시기, 질투와싸움이 아닙니다. 서로경쟁하거나비교하지않습니다. 믿음은자신을있는그대로보고남을항상존중합니다. 그리고말씀에순종합니다. 바로이러한모습을가지고있을때하나님의복은우리에게부어집니다. 우리가복을누리지못하고있다면우리의모습을돌이켜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은우리에게복을주시기를기뻐합니다. 그런데우리가복을받을수있는준비가되어있지않다면무슨소용이있겠습니까? 교회도동일합니다. 믿음의준비가되어있지않는데어떻게성령의역사를기대할수있습니까? 믿음이없이는성령의역사를기대할수없습니다. 하나님이주시는복을누릴수없습니다. 또한예배의모습도돌아보아야합니다. 예배에어떤자세로옵니까? 하나님이주시는말씀을기대하면서옵니까? 나를향한하나님의뜻을알고자하는간절한기대가있습니까? 그런것이없다면어찌하나님의축복을기대할수있겠습니까? 그런측면에서자문하여야합니다. 나는하나님께축복받을수있을까?

정용구 선교사 2019-11-11

선교사로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적어도 향후 10년 정도 함께 선교에 동역할 사람들이다. 신학생들, 단기선교(비전트립)팀, 선교훈련 수료자들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그룹들도 있다. 바로 해외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주재원들이다. 이들은 회사의 인사발령으로 해외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그 기한은 보통 3년-5년 미만이 많다. 가족이 함께 현지에서 낮선 문화와 현지인에 적응하게 된다. 물론 이들은 선교사와는 그 목적이 다르지만 많은 부분에서 동질감을 가진 그룹이다. 이들의 경우 회사 규모나 지원 정책에 따라 생활의 차이는 있지만, 낮선 해외에서의 이방인 나그네로서 겪는 어려움은 선교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해외 현장에서 같이 지내면서 지켜본 결과 이들에게서 선교의 많은 가능성을 보게 됐다. 일단 해외 주재원들은 언어에 대해서는 준비된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해외에서 살기 위한 준비와 문화적 충격에 대한 대비를 한 이들로 엘리트들이다. 그리고 현지인들을 고용하기에 어느 면에서는 공식적인 만남의 자리가 형성돼 있고, 회사를 통해 생활비 지원과 현지국가의 비자를 받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회사의 일을 하지 않고, 선교의 일만을 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훈련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지에서 좋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다. 그만큼 이들이 잘 준비가 된다면 너무나 좋은 열매를 맺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해외에서는 한인교회가 지역에서 교민사회의 중심점으로 많은 역할을 하고 있기에, 많은 해외 주재원들이 교회에 출석한다. 물론 때로는 지역 정보나, 정착정보를 위해서 출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가운데 점점 은혜의 자리를 경험하고, 특별히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 선교사의 사역과 삶을 공유하고 경험하게 된다. 필자가 섬겼던 델리한인장로교회에서도 많은 한인 주재원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자신의 재능을 사용해 우리와 협력하는 현지학교에서 미술이나, 음악교육을 하는 주재원 가정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현장 선교 사역지를 방문하면서 자신의 재능들이 선교현장에서 너무나도 귀중하게 사용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 어떤 지역에서의 해외 주재원 근무보다도, 선교를 경험한 선교지가 인생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다는 고백을 한 주재원 가정들이 기억난다. 한인교회는 해외 주재원들이 복음을 새롭게 접하는 장소만이 아니라, 선교현장에서 선교의 눈을 뜨게 하는 장소다. 따라서 그 역할이 너무 중요하다. 해외 주재원들은 보통 3-5년 정도의 해외 주재원 경험을 하고 한국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나, 또 다른 제3국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들이 경험한 선교적 경험이 다음세대 선교 동력을 위한 중요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이들이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된 뒤에 선교적 경험을 하기보다는, 한국에서 사전에 이들에게 ‘선교지의 특성’ ‘선교사는 누구인가?’, ‘한인교회는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지인들에게 어떠한 삶의 모범을 보일 것인가?’를 사전에 훈련하도록 해야 한다. 이들이 좋은 선교 동역자로서 해외 선교사역에 준비된 도구로 쓰이도록 지금부터라도 선교전략과 정책을 구체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신학교육 기관에서는 주말을 이용한 선교학 과정을 개설하거나, 온라인 수업 과정을 개설함으로 바쁜 직장생활 가운데서도 평신도 선교사로서 잘 준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해외에 주재하게 될 때 선교적 사역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다.

이영훈 위임목사 2019-11-10

개인의 기호와 판단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회색지대가 사라지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빈부 격차의 심화로 인한 중산층의 축소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행정,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양극단의 입장에 힘이 쏠리고 있다. 회색지대가 사라지면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분명하게 드러나리라 기대한 사람들도 일부 있었지만, 드러난 현실의 모습은 정반대의 모습이다. 극심한 분쟁으로 인해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사회 전체가 정체되었고, 일부 영역에서 심지어 퇴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양 극단의 세력들이 승자독식의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한다. 그야말로 사활을 건 전쟁인 것이다. 이제 교회도 더는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아무런 편도 정하지 못하고 가운데 서서 우왕좌왕하고 있으면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도태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교회는 하루빨리 분명한 편을 정하고 전력으로 그 방향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선택해야 할 편은 어느 쪽인가? 사실 이러한 질문은 우문(愚問)이다. 교회는 태생적으로 편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편이란 ‘좌냐 우냐’, ‘부냐 빈이냐’ 하는 식의 세상의 편 가르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어둠에 있던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빛으로 옮겨진 자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당연히 빛의 편에 서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빛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가장 우선하여 ‘빛이냐 아니면 어둠이냐’라는 질문부터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보다 앞서 ‘이익이야 손해냐’라는 질문부터 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빛의 편에 선다는 것은 세상의 이권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마땅히 빛의 편에 서서 설령 손해를 보고 세간의 평판이 나빠지더라도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초대 기독교 시대에 바울은 세상으로부터, 심지어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들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따라갔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선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고난받음을 자랑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고 권면한다. 이 권면은 디모데에게 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회색지대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교회는 빛으로 완전히 돌아서야 한다. 그 과정에 고난의 시간을 겪을 수도 있다. 아니 분명히 거센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고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빛의 자리에 거해야 한다. 세상의 극렬한 대립의 물결 속에서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교회는 조타수가 없는 배처럼 세속의 물결을 따라 흔들리다게 된다. 그리고 그 결국 욕심의 바다 속에 좌초되어 버릴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마틴 루터와 같은 단호한 심정으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붙잡고 나아가길 기대한다.

정용구 선교사 2019-11-07

얼마 전 TV에서 유명 연예인들이 ‘요즘 사람들이 옛날같이 TV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다’라며 고민하는 내용이 방영됐다. 요즘은 유튜브(YouTube)나 넷플릭스(Netflix)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자신들이 흥미를 느끼는 부분을 더 선호하는 추세다. 실제로 한 초등학교에서의 실험결과 유명 연예인과 유튜브 크리에이터(YouTube Creator) 사이의 인기투표에서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1위가 된 바가 있다. 연예인들이 위기의식을 가질만한 시점이다. 최근 통계 자료에 의하면 중국에서 만들어진 ‘틱톡(TikTok)’이라는 15초짜리 동영상 플랫폼이 유튜브의 콘텐츠를 위협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며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늘어가는 추세라고 한다. 이는 최근 동영상 콘텐츠들의 흐름이 ‘짧은 내용’을 선호하는 시청자들의 기호를 반영한 것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선교사로서 약간의 긍정적인 기대감이 있다. 일단 동영상들은 새로운 내용이나, 장면이 많은 내용들일 경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만큼 시청 조회 수가 높다 보니 이를 남용해 위험하거나, 선을 넘는 자극적인 영상이 제작·유포되는 사례들이 많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보유한 영상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갈 수 없는 지역과,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귀한 영상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영상들이 성도들에게 잘 공유돼 알려진다면 ‘긍정적인 호기심을 기반으로 한 선한 영향력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쉬운 것은 많은 선교사들이 현장의 귀한 자료들을 영상 촬영에는 익숙하지만, 대다수는 이를 편집하는 과정들이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또 이러한 편집 작업에 투자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현실도 아쉬운 대목이다. 얼마 전 한 교회에서 ‘미래선교 방향’에 대한 강의 시간에 “성도들 가운데 최근 동영상 트렌드를 잘 알고, 동영상 편집을 잘하는 감각 있는 분들이 많다. 이분들이 선교사들의 귀중한 영상을 보기 좋게 편집하고, 가능하면 영어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자막처리까지 해 준다면 많은 이들이 선교영상을 보면서 기도와 후원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필자의 견해에 긍정적인 호응은 물론 실제로 강의 후 젊은 부부 5가정이 남아서 이 일에 구 체적인 참여를 희망했다. 최근 ‘선교관련 동영상’을 접하고 분석을 해 본 결과 그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교사에 대한 영상은 주로 ‘NGO 활동을 하는 선교사의 모습’, ‘비전트립(단기선교)팀의 활동 영상’, ‘선교보고 영상’들이 대부분이었다. 선교현장과 구체적인 선교사역을 소개하거나, 선교사 가족들의 이야기 등과 같은 다양한 동영상 방송 콘텐츠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물론 비공개국가나 신분상의 이유로 어려움이 있겠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극복하고, 여러 선교현장의 이야기들이 동영상으로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찬양에 대한 갈급함으로 많은 찬양집회의 동영상이 제작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동영상들은 수십 만 명의 조회 수를 기록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선교현장에서 수고하는 우리 선교사들의 귀한 동영상도 많이 알려지고, 더 많은 이들이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선교 유튜브 크리에이터, 선교넷플렉스, 선교 틱톡 등이 개발돼 이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선교가 알려지기를 소원한다. 이를 위해 방송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 부분의 활성화에 헌신하기를 기도한다. 이 또한 선교사역의 하나다.

이정기 목사 2019-10-27

요즘 이단들이 극성이다. 이단은 처음은 같으나 끝이 다르다.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는 구약의 모든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는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단들은 성경을 자기들 교리에 맞게 해석한다. 생명의 말씀에 독을 넣는 자들이다. 디도서 3:9-10절에 이단과 변론하고 다투는 것은 무익하고, 헛된 것이기에 다툼을 피하고 멀리하라고 교훈한다. 골2:16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바울은 율법주의를 경계한다. 율법주의는 예수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율법을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당시 먹고 마시는 문제로, 절기나, 안식일을 이유로 율법주의자들이 성도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율법에 금한 부정한 것을 먹는다고 비판했고,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고,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구약시대에는 부정하고 정한 것의 규례들이 있었다. 죽은 시체나 무덤이 부정하고, 월경하는 여인이 부정하고, 출산한 산모가 부정하고, 되새김질 하지않고 굽이 없는 짐승은 부정하고, 비늘이 없는 물고기도 부정하였다. 그래서 부정한 것은 먹거나 만질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런 구별이 없어진다.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환상을 보는데 하늘에서 한 그릇이 내려왔다. 그 안에는 각종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새들이 있었다. 소리가 들렸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그때 베드로가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못한 것을 내가 먹을 수 없습니다.’ 그때 두 번째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말라’ 하나님이 속된 것도 다 깨끗하게 하셨다. 음식에 대한 구별이 없어졌다. 또한, 구약 시대에는 거룩한 날과 보통 날을 구별했다. 절기, 월삭, 안식일에 대한 구별이 철저했다. 안식일을 범하게 되면 돌로 쳐죽이라는 엄격한 법도 있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이러한 구별이 없어졌다. 그래서 바울은 먹는 것,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 문제로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무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다. 법에는 자연법과 실정법이 있다. 자연법은 영원한 법이다. 근본 정신이다. 그러나 실정법은 만인에게 해당되는 법이 아니고, 어느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회에만 해당되는 법이다. 그래서 그 법의 적용을 받을 사람이나 사회가 소멸되면 그 법도 폐기처분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먹고 마시는 의식, 제사의식, 절기의식, 정결의식 등은 이미 폐해졌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실정법에서 해방되고 자유하게 된것이지,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기 때문이다.<마5:17> 이단들의 단골 메뉴가 안식일이다. ‘성경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는데 왜 주일을 지키느냐?’ 이단들이 공격하는 내용이다. 본래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안식일 교회 뿐만 아니라 신천지, 안상홍증인회, 대부분의 이단들이 안식일을 토요일에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며 강조한다. 물론 안식일의 교훈과 정신은 지금도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율법적인 의식으로서 안식일은 이제 없어졌다. 신약 성경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한 구절은 한 곳도 없다. 지켰다는 기록도 없다. 구약에서는 엄청 많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강조하였는데, 갑자기 신약에 와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전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안식일이 폐해졌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구약에 할례가 강조되다가 신약에 전혀 없는 것은 할례 제도가 폐해졌기 때문인 것처럼 안식일도 폐해진 것이다. 물론 신약 성경에 주일을 지키라는 명령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사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간 것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행13:14~41,18:4> 그 당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사도들의 관례였다. 행20:7절에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이전 개역 성경에는‘안식 후 첫날에~’로 번역되어 있다. 안식후 첫날 주일에 떡을 떼려고 성찬을 하려고 성도들이 모였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한동안 할례와 세례가 동시에 행해졌고, 안식일과 주일도 동시에 지켜졌지만, 점차 안식 후 첫 날, 주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초대교회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막2:28절에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했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골2:16-17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고 했다.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초하루, 안식일은 장래일의 그림자이고,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므로 몸인 실체가 오셨는데 더 이상 그림자를 쫓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셔서 생명주시고, 참된 안식을 주신 주일을 지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아파트 분양을 받을 때 모델 하우스를 보고 선택하고 계약을 한다. 아파트 분양이 끝나면 모델 하우스는 없어진다. 안식일 역시 같은 원리에서 폐해졌다. 안식일은 참 안식의 그림자일 뿐이다. 실체인 예수님이 오시자 폐해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를 붙들고 살아야 한다. 실체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안에 참된 안식이 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로 쉬게 하리라”<마11:28> 주일 잘 지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으며,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복한다.

허성욱 이학박사 2019-10-22

‘정보 선점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 어떤 일과 현상에 대한 견해가 두 가지 이상일 때 먼저 받아들인 정보가 그 사람의 견해가 된다는 것이다. 우주 만물과 생명의 출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바로 창조론과 진화론이 그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생명현상을 화학적 진화라는 자연과정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의 과학자들은 모든 생명체를 특수 창조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진화론은 자연적 무신론적 견해다. 반면 창조론은 초자연적, 유신론적 견해다. 진화론은 물질원소들이 원시 지구 위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우연히 결합해 단세포 생명이 되고, 이것이 차츰 진화를 거쳐 사람이 나왔다는 학설이다. 반면에 창조론은 창조주가 계셔서 그 분의 지혜와 설계에 따라서 처음부터 각기 그 종류대로 생명이 창조됐다고 하는 견해이다. 진화론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창조론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완전히 상반된 견해이다. 진화냐 창조냐 하는 것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성경은 인류의 모든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성경은 구속의 원리를 정확히 알리기 위해 주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은혜의 말씀이다. 우리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사의 여정은 ‘창조-타락-구원’의 순서로 이어진다. 여기서 ‘구원’이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 즉 창조 당시의 그 의롭고 영생하는 온전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만약 ‘창조’가 사실이 아니라면 ‘구원’은 의미가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창조’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이다. 만약 ‘창조’가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뿌리째 흔들리게 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론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는 창조신앙에 있는 것이다. 기초가 허술한 신앙을 성경은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비유한다. 창조신앙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므로 그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고 만다. 기초가 튼튼한 신앙, 그것은 창조신앙이 확고한 신앙일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신앙이 확실해지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신앙도 확실해진다. 그 누구도 아닌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를 모든 불의와 죄에서 건지셔서 온전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신앙이 확실한 사람이라야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 그 고백 위에 세워진 믿음이라야 세상에 편만한 각종 이단 사설, 이교의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마귀가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진화 사상을 퍼뜨린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창조신앙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기초를 허물어 버리기 위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이비과학 진화론을 등장시킨 것이다. 창조신앙이 구원에 드는 신앙이다.

여주봉 목사 2019-10-20

개인 뿐 아니라 교회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특히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비전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의 사역에 방향을 제시해 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비전이 있어야 교회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비전은 우리에게 사역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준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뒷받침이 거기에 함께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심각하게 침체되어 있는데, 이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리더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비전을 쫓아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산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노아를 보라. 아브라함을 보라. 모세를 보라. 여호수아를 보라. 다윗을 보라. 느헤미야를 보라. 바울을 보라. 누구보다 예수님을 보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의 삶에서 비전이 매우 중요한데 문제는 비전에 대한 이해이다. 오늘날 비전에 대한 인본적인 그릇된 이해가 매우 팽배하다. 오늘날 매우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혹은 자신을 위해서 세운 큰 목표와 꿈을 우리의 비전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소위 자신의 목회의 비전을 이야기할 때 그런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를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로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제시한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그들은 그들이 원대한 꿈과 소위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한 잠언 29:18을 자주 인용하면서 '그러한 꿈과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꿈과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참고로 King James 성경은 그 구절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비전과 계획이 모두 자신 혹은 자신들이 세운 것이라는 점이다. 언급한 대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귀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산 사람들이었는데, 그들 중 자기들이 세운 큰 꿈이나 소위 비전을 가지고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비전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세운 큰 꿈이나 목표가 전혀 아니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예를 들어 노아는 전혀 방주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비전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매우 팽배하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 가운데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이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의 묵시 혹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시작한다. 비전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잠언 29:18도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구절에서 영어 King James 성경이 비전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개역개정성경이 잘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묵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 그래서 영어 새로 번역한 New King James 성경에서는 그 구절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Where there is no revelation, the people cast off restraint;......."). 따라서 헨리 블랙가비 목사도 그의 책 『영적 리더십』(생명의 말씀사)에서 참다운 비전의 출처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옳게 말하고 있다. 참고로 미국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y)에서 나온 핸드북 시리즈는 그 구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문맥에서 비전은 사건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 혹은 미래를 내다보거나 기대할 수 있는 능력을 언급한다. TEV와 CEV는 그 단어가 하나님의 인도(God’s guidance)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설명은 비전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바라보고 달려가야 할 비전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혹은 자신을 위해서 세운 원대한 꿈과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에 기초한 하나님의 비전이다. 조지 바나는 그의 책 『The Power of Vision』(Regal)에서 비전을 이렇게 잘 정의하고 있다. 우선 조지 바나는 비전을 바울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 등과 같이 000의 사역을 위한 비전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그는 비전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역을 위한 비전은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선택한 종들에게 주어진 선호되는 미래에 대한 선명한 정신적인 이미지이고,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과 환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The Power of Vision』, 26-27쪽).

허성욱 이학박사 2019-10-18

태초에 있었던 일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반경 100억 광년이나 되는 이 대우주를 창조하셨다. 1광년은 약 10조 Km 거리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1,000억 조 Km나 되는 반지름을 가진 큰 세계이다. 이 큰 공간 속에 크고 작은 별들을 또 천 억 조 개나 만들어 배치해 놓으셨다. 이 천체들 가운데 태양계를 구성하는 별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놓으신 보데의 법칙과 케플러 법칙에 따라 제각기 자기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에 따라 운행하고 있다. 보데는 태양과 행성 사이의 거리에 일정한 규칙이 있음을 발견했다. n번째 행성의 평균거리는 0.4+0.3× 2의 n승에 해당한다는 것이 보데의 법칙이다. 이 때 거리 단위를 1 AU(=1억 4,960만 km)로 나타낸다. 케플러는 그의 스승인 티코 브라헤가 남긴 자료를 통해 규칙을 발견했다. 행성의 궤도가 타원 궤도이고,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같으며,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 케플러의 법칙이다. 여기서 우리가 믿는 것은 규칙성이 창조주의 설계의 결과라는 것이다.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만드신 그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감당하면서 천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태양계는 또 직경 10만 광년인 은하계의 중심을 중심으로 초속 240㎞ 속도로 2억년에 1회전하는 회전운동을 하고 있다. 이 은하계는 또 우주의 가운데를 어느 방향을 향해 대장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 어마어마하게 큰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다. 크신 하나님을 우리는 가끔 우리의 조그마한 감정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나 신경 쓰시게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신앙이란 이름으로 말씀을 필요 적절하게 인용해 가면서 말이다. 우리가 늘 염두에 둘 것은 하나님께선 창조만 하고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창조 이후 오늘도 친히 보존하시며 감찰,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란 말을 곧잘 사용한다. 과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언어, 행동은 어떠해 야 할까 생각해 본다. 대우주의 창조주시요, 인생의 창조주이시며 우리 삶의 주인이시기에 오늘도 친히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계산 안 될 그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은 이 모든 만물을 천 조 분의 1m나 작은 것들의 조합으로 아주 정교하게 세밀하게 창조하신 분이시다. 세밀하셔서 우리의 은밀한 것(롬 2:16)까지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다 계산 될 그 날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일이다. 로마서 2장을 묵상하면서 필자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늘 흥분을 가라앉히고 힘든 도전들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겸손한 마음이 더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타인의 흠보다 자신의 흠이 자신에겐 더 무거운 것이란 각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양성자 중성자 전자들 사이의 ‘전자기력과 핵력, 만유인력 등의 역학 관계’로 서로 붙들고 있도록 하셨다. 혹 서로 어떤 일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해도 만물이 서로 붙들고 있도록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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