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위임목사 2020-07-18

30여 년 전 우리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사람들은 명품이라고 불리는 고가 브랜드의 물건을 사기 시작했다. 명품의 수요가 점차 늘어나면서 일부 상인들이 가짜 명품을 만들어 유통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그런 가짜 명품들을 ‘짜가’라고 부르며 경계하고 또 한편으로는 경시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가짜가 줄어들기는커녕 훨씬 더 많아졌다. 이제는 대부분이 가짜이기 때문에 진짜를 ‘찐’이라고 힘주어 말해야만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과거에는 가짜 물건, 모조품인 것을 숨기고 팔았다. 또한 상품의 질도 진짜 상품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가짜를 만드는 사람들이 진짜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마음대로 가지고 와서 사용하기 때문에 가짜 상품의 질이 크게 올라갔다. 그래서 일부러 가짜 상품을 찾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비단 시장의 물건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언론, 정치, 관계, 학문,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진짜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진실과 거짓을 명확하게 분별해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하는 언론의 영역에 거짓된 정보가 가득하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거짓 기사와 악의적인 소문들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고 그중 일부는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의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거짓 믿음이 들어와 있다.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단, 사이비는 초기 기독교 시대 때부터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이단 사이비는 그 규모와 조직적인 정도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다. 그래서 이에 따른 피해도 매우 심각하다. 특히 이번 코로나19로 드러난 이단 집단의 폐해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다. 거짓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사람들은 인생이 나아갈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 거짓이 우리 사회에 득세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 크다. 교회가 진리 앞에 바르게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라고 말씀하셨다. 진리의 길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까지 교회가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않고,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진리를 모르고 거짓에 오염돼버렸다. 이제 교회의 사명은 자명하다. 교회는 높이 솟은 진리의 등대로서 거짓으로 뒤덮인 사회를 밝히 비춰야 한다. 죄를 죄라고 선포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알려야 한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반발과 비웃음 그리고 무관심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진리를 붙들고 그것을 전해야 한다. “진리는 고독해도 날로 담대하다.” 이 말은 맨발의 성자라고 알려진 故 최춘선 목사님이 생전에 남기신 고백이다.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평생 맨발로 다니며 복음과 애국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그분의 삶은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거짓의 시대에 진리의 길을 걷는 것은 가시밭길과 같다. 하지만 교회는 피를 흘리면서 그 길을 가야 할 사명이 있다. 아무리 강조해도 거짓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세상은 알아주지 않아도 교회가 흘린 피가 진리를 담대하게 증언할 것이다. 부디 한국교회가 세상의 명리에 흔들리지 말고 묵묵히 진리의 길을 걸어가 어두운 사회를 밝힐 희망의 빛이 되길 기대한다.

신동식 목사 2020-07-31

운동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입니다.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경기를 망치거나 몸을 다칩니다. 집중할 때 의미 있는 결과를 가지게 됩니다. 집중은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한 가지 일에 힘을 쏟아부음을 의미합니다. 집중은 단지 운동 경기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다 필요합니다. 부부가 서로에 집중하지 않으면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렸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집중할 때 가정은 행복하고 자녀들을 복을 누립니다. 아마 집중의 문제는 공부에도 적용됩니다. 공부는 집중이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산만한 태도는 결코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집중하는 한 시간이 산만한 10시간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공부의 결과는 집중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명왕이라 불리는 에디슨의 말처럼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뤄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둘 다 중요합니다. 1%의 영감이 없는 99%의 노력은 의미 없습니다. 또한, 99%의 노력 없이는 1%의 영감만으로도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동일한 원리가 작동합니다. 바로 집중입니다. 집중은 노력이 주는 열매를 얻게 합니다. 집중 없이는 노력은 허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영감도 집중할 때 떠오릅니다. 영감이 떠오르더라도 집중이 없으면 사라지고 맙니다. 이러한 집중은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에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예배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신령과 진리로 예배(요4:24)하라고 하였습니다. 대충 예배할 수 없습니다. 신령과 진리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예배에 집중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나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집중은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게 합니다. 집중이 없는 예배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모습을 마당만 밟는 신앙(사1;12)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배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왜 예배에 왔는지도 모르고, 예배 시간만 끝나기를 바란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 머물러도 마당만 밟고 가는 것입니다. 예배에 집중할 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자녀들에게 집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이 언약을 맺음에 있습니다. 언약을 지키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성취하심에 있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집중은 하나님의 열심입니다[사9:7,37:32].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기에 열심하셨습니다. 언약이 성취되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집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구원의 영광을 보게 하였습니다. 언약에 집중하심으로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집중은 그리스도인의 푯대입니다. 그러기에 집중은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들에게 본성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본향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갈 곳을 알지 못하지만 떠나라고 할 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왕궁의 보화를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본향에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핍박과 죽음이 있었음에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본향에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본향에 집중하지 않고서는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히11장]. 예수님은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는 길이 본향에 집중하는 것임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히12:2]. 그리스도인은 방향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구름 따라 흘러가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입니다. 본향에 집중하여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함임을 아는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 집중하여 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에 집중하여 삽니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본향에 집중합니다. 다시 본원적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에 집중하십니까? 삼위 하나님께 집중하십니까? 하나님의 창조 경륜에 집중하십니까? 하나님의 언약에 집중하십니까?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집중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 집중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에 집중하십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집중하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일에 집중하십니까? 예배에 집중하십니까? 기도에 얼마나 집중하십니까? 설교에 집중하십니까? 삶에서 그리스도임을 드러내는 일에 어떻게 집중하십니까? 빛과 소금의 삶을 살기 위하여 어떻게 집중하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의 삶에 집중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자 집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집중합니까? 성령의 내적인 음성에 집중합니까?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지체들에 집중하십니까? 가정에 집중하십니까? 아내를 향한 사랑과 남편을 향한 존중에 집중하십니까?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십니까? 교회를 사랑하고 기도하는 일에 집중하십니까? 무엇에 집중하십니까? 집중이 신앙을 나타냅니다.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로서 살기를 바랍니다.

권득칠 총장 데스크2020-07-19

세계 교회사를 돌아보면 기독교 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부흥과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성장 은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 온 교회의 내적인 영적 능력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내적인 영적 능력의 바탕에는 기도가 있었으며, 그리스도인은 기도함으로써 개인의 영적 성숙을 이뤄 교회와 기독교 전체의 발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해 영적인 삶이 성숙하고 교회는 바로 그 기도를 통해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육체가 호흡하지 않고 살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영의 호흡인 기도가 없이 살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더 나아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권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인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신앙성장의 가장 중요한 도구이며, 더 나아가 성도의 특권이요, 기쁨이요,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도는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 우리가 듣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서 일방적인 외침이나 독백(monologue)이 아니라 대화(dialogue)이며, 기도는 살아계시고 말씀하시고 들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이 나누는 대화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이 바로 기도이다. 성도들의 처지와 어려움과 고난과 감사와 찬양으로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은혜와 평강을 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신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지속적인 교제를 갖지 않고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제를 갖지 않고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성장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가능하지만, 그 요소요소마다 기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를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아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무기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성장의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실천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에게 호흡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직접적인 통로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바른 의미를 알고 그 능력을 얻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깨닫게 되고 그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단순히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에만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기도의 이러한 면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데 있다. 즉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게 해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능력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믿는 이에게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 성숙하고 건전한 분별력을 주시고 당신의 뜻을 책임 있게 수행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기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또한 기도할 때는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적당한 시간을 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하나님의 뜻으로(마 26:39), 감사한 마음으로(빌 4:6), 믿음으로 해야 한다(마 21:22). 그리고 성경에는 많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들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도 응답에 대한 이 약속들을 믿고 나아감으로써 코로나19로 힘든 이때 기도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정기 목사 2020-07-20

코로나 사태로 힘들어 하는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유명한 성서 신학자인 에밀 부르너는 이렇게 말했다.‘피를 통해 산소가 온 몸에 공급되는 것과 같이, 인간의 삶속에 희망이 공급되어야 새 힘을 얻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 희망이 있어야 현실을 이겨낼 수 있다. 희망이 있어야 미래를 바라보며 힘있게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무지개를 좋아한다. 빨주노초파남보, 어렸을 때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많이 그렸던 것이 무지개였던 것 같다. 내가 보았던 무지개 중에 가장 멋졌던 무지개는 20여년 전에 의정부에서 보았던 무지개이다. 운전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보았다. 햇볓이 쨍쨍한 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그런날을 호랑이 장가 가는 날, 여우 시집가는 날이라고 한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비가 크치더니 앞에 보이는 산자락에 무지개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주 선명한 일곱 색깔 무지개였다. 햇빛과 구름과 산과 무지개가 너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 멋졌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 두신 황홀경이다. 구름이 시련의 상징이라면 무지개는 희망의 상징 행복의 상징이다. 누구나 인생길을 걸으면서 무지개를 만나길 기대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무지개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실은 불행하게도 무지개가 자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자주 보인다. 그것도 비를 머금은 시커먼 먹구름이 보일 때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다 구름이 있다. 때로는 역경의 구름이, 슬픔의 구름이, 질병의 구름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이별의 구름이 우리를 덮을 때가 있다. 그러나 구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구름속에 있는 비와 폭풍을 바라본다. 어떤 사람은 구름속에 있는 무지개를 바라본다. 일어난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응이다. 반응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은 항상 좋게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고, 모든 것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도 고난은 있다. 욥은 하나님을 잘 믿었지만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 고난속에 갑절의 축복이 있었다.(욥42:1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재앙이 아니다. 평안이다. 미래와 희망이다.(렘29: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고난의 구름속에 축복의 무지개를 감춰두셨다. 고난의 구름속에 영광의 무지개를 감춰두셨다. 창세기 9장 13절에“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고 말씀하셨다. 무지개는 언약의 증거이다. 홍수 심판후 지면에 있는 모든 생물들이 다 죽은 것을 보며 노아의 가족들은 죄에 대한 두려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그런 노아의 가족에게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무지개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 보좌 뒤에 무지개가 있다. 요계4:3절에“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보좌에 무지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실 때마다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겠다는 것이다. 일어설 때도 보시고, 앉을 때도 보시면서 365일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것이다. 홍수 심판이 있기 전에 무지개는 자연 현상이었다. 그러나 홍수 심판 이후에는 언약의 상징이 되었다.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이다. 구약 시대의 언약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신약 시대의 언약을 새언약이라고 한다. 언약에는 편무 언약과 쌍무 언약이 있다. 편무 언약은 일방적인 은혜 언약이고, 쌍무 언약은 상호 의무가 있는 언약이다. 노아에게 주신 언약은 편무 언약이었다. 노아가 해야할 의무는 아무것도 없었다. 노아가 할 일은 그냥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면 되는 것이었다. 언약이란 문자 그대로 약속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라 식언치 않으시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구름 속에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두셨다. 그런데 무지개 언약보다 더 확실한 언약은 십자가 언약이다. 십자가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언약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셔서,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다. 그리고 부활하게 하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 무지개는 희미한 것이지만, 십자가는 너무나도 선명한 것이다. 무지개는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심령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을 의지하자.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신다. 고통을 피하지 말자. 직면해서 싸우자. 그러면서 믿음이 자라는 복을 받자. 고통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자.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자. 오늘의 구름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내일의 무지개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오늘을 이기며 살아가자.

정재영 교수 2020-08-12

공동체의 중요성 반년 넘어 진행 중인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는 더욱 파편화되고 많은 사회관계가 파괴될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직장 환경이나 생활환경을 안전하게 바꿀 수 없는 취약 계층의 사람들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도움을 줘야 한다.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이웃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움이 일회성이거나 이벤트식으로 이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시혜성의 지원보다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렇게 해야 또 다른 위기가 닥쳤을 때 이에 대한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공동체이다. 사회가 아무리 복잡하고 다양해진다고 해도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리고 사회가 단절되고 파편화될수록 공동체에 대한 욕구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파괴된 사회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공동체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적 재난과 위기 상황에서 사회를 안전하게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제공에서는 무엇보다도 종교의 역할이 크다. 종교 밖에서 종교의 고유한 특징을 관찰한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종교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그는 종교는 인간의 고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연계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한두 가지 편견을 녹여 없애려는 종교의 노력을 존중한다고 말한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매우 유용한 방법은 소규모 모임을 활용하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소그룹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러한 소그룹은 탈현대 사회의 특징인 유동성과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많은 개인 구성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집단 구성원들의 대면 교섭을 통해서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해 사회 자본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확실하고 위험한 시대일수록 신뢰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복잡한 사회 변화로 인해 파편화되고 불확실성이 증가된 사회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의 형성을 필요로 하는데, 대규모 집단보다는 소그룹 안에서의 친밀한 교섭을 통해 이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가 형성되면 불확실성이 감소함으로써 공공 활동에 함께 참여하기도 더 쉬워지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소그룹이 실제로 많은 점에서 전통적인 시민 결사체로서 기능한다고 보고되고 있다. 이렇게 소그룹을 통해서 지원을 받고 힘을 얻은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지원하고 돕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마을공동체의 회복 이러한 공동체 환경을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공간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이웃들의 도움이 훨씬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시민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시민공동체는 가족이나 혈연, 민족 등 타고난 지위에 기초한 전통 공동체와 달리, 시민의 덕성에 초점을 둔 현대사회의 새로운 공동체를 뜻한다. 시민공동체는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공동체이지만, 이 시민공동체를 다시 지역 차원의 실천 영역에서 구체화 할 필요가 있다. 시민사회가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한 작동원리이고, 그것이 구현되는 것이 시민공동체라면 이것을 지역사회라는 구체적인 영역에서 실현해야 일상의 공간에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공동체는 과거에 자연발생으로 형성된 촌락공동체와 같은 자연적 공동체일 수는 없다. 우리 사회는 급격한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촌락공동체를 뒷받침하는 물리적 정신적 근간이 완전히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구해야 할 지역공동체는 의도적으로 새로운 맥락에서 공동의 목적과 이념,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이것이 시민공동체가 지역 안에서 형성돼야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점에서 지역공동체는 일정한 지리적 영역 안에 거주하는 지역의 구성원들이 목적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을 구축해 나가는 일련의 조직화된 활동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일들은 마을 단위로 쉽게 시도될 수 있다.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마을 만들기 운동은 일종의 주민자치운동으로 여기서 ‘마을’이란 시민 전체가 공유하는 것임을 자각할 수 있고 공동으로 이용하며 활용할 수 있는 장을 총칭한다. 그리고 ‘마을 만들기’란 그 공동의 장을 시민이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마을 만들기 운동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시민의식은 기독교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며,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을 형성하는데 기독교의 가치를 지향할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교계에서 ‘마을 목회’와 ‘마을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이러한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위험 사회를 극복하려면 얼마 전까지 지역 개발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지만, 이것은 지역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목적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지역사회의 어느 한 측면에만 몰두하는 일면적 지역사회개발은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지역사회 개발의 과정에서 공동체가 무너진 것은 통합적인 접근법을 채택하지 않고 단선적 사고를 함으로써 얻은 결과다. 이러한 점에서 요즘에는 지속 가능한 개발이 주목을 받고 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은 무분별한 개발로 심각해진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목받고 있다. 코로나 사태도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 파괴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야생이 파괴된 지역에서 인수공통 전염병 동물이 급증했다는 보고도 있다. 근대 서구학문의 발달과정에서 인간과 환경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돼 왔다. 환경을 주체인 인간의 인식과 활동을 규정하는 외적 조건이며 이러한 활동의 대상이 되는 객체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진행된 근대화의 결과 인류는 엄청난 환경 재앙을 맞을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됨으로써 사고방식의 전환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는 경제활동과 생활 자체가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는 자원순환형 사회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 생태 공원, 생태도시, 생태마을 등 자연친화적인 마을 만들기에 노력해야 한다. 도시나 마을 전체를 자연친화적으로 만드는 것은 주민의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나, 주민이 주도하는 다양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운동’에 관심을 갖고 지역공동체 운동에 참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각 교회들이 터하고 있는 지역사회에 대하여 책임 의식을 실천해야 한다. 마을 공동체 활동을 통해서 교회와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돕고 위험 요소를 줄이는 것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신앙의 전통과 그 정수를 지키면서도 이 시대와 사회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국교회 안에 있는 신앙 공동체들은 깊이 고민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염려에 낙심하고 있는 이 시기에 신뢰와 연대를 통해서 난국을 이겨낼 수 있도록 모든 신앙공동체가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여주봉 목사 2020-08-05

비전의 참된 출처는 하나님의 계시다. 그래서 진정한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알리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며, 그 통로 중 하나는 영적 랜드마크다. 영적 랜드마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목적과 길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획기적인 사건들을 가리키는데, 하나님은 그 랜드마크들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보이시고 길을 지도하신다. 영적 랜드마크에 대한 좋은 예가 아브라함의 경우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에 대한 사건들은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특별하고 기념비적인 일이었고, 그 하나하나가 영적 랜드마크다. 하나님은 이런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셨다. 그리고 그 목적과 계획은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고, 사건이 거듭될수록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더 상세하고 명확해졌다. 그래서 이 사건들을 쭉 연결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의 전체적인 그림, 즉 그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보인다. 우선 창세기 12장 1-3절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리셨다. 하지만 이 사건만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시려는지 잘 알 수 없다.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 앞으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 그를 창대하게 할 것,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해 복을 얻게 될 것 등 정도다. 또 하나의 영적 랜드마크는 창세기 12장 7절에 나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영적 랜드마크를 통해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은, 이전 영적 랜드마크를 통해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과 정확하게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또한 이전에 보이신 하나님의 뜻보다 더 보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영적 랜드마크가 창세기 15장 4-7절에 나온다. 이 특별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고, 그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이전에 말씀하신 것에 덧붙여서 어떤 부분은 더 보완하셨고, 어떤 부분은 다시 확인해 주셨다. 그리고 창세기 15장 12-18절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400년 동안 이방 나라를 섬기겠고, 그 후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정착하게 될 것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고, 애굽 강에서 유브라데까지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전에 하셨던 말씀을 더 구체화하신 것이다. 또한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동안 말씀하셨던 내용을 종합적으로 확인시켜 주셨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비전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실 계획을 실행하고 계신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시고, 그 일로 그를 초청하고 계신다. 앞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그들을 통해서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가장 주된 통로는 영적 랜드마크다. 당신의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적 랜드마크들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그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이셨던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요약해서 적어보라. 이 영적 랜드마크들을 통해서 당신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항상 일직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비전을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다른 인도하심들과 대조해 봄으로써, 그 다른 인도하심들의 진정한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다른 인도하심들이 영적 랜드마크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이신 것과 전혀 다른 것이라면, 아마 그 다른 인도하심들은 필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닐 것이다.

정용구 선교사 2020-08-04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이라면, 이맘때 많은 교회들이 단기선교(비전트립)를 준비한다. 코로나19가 바꿔 놓은 세상은 앞으로의 단기선교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될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지금의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준비’를 하는 시간으로 지난 사역들을 점검하고, 코로나19 이후의 단기선교 사역 준비를 위한 시간으로 사용됐으면 한다. 단기선교의 가장 취약한 점은 참가자들의 현지 언어 사용의 어려움이다. 그러다보니 짧은 시간 접촉점을 위해 공연이나 행사 위주의 사역들이 많았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 시대에 아주 중요한 역할이 생겨났다. 코로나19 이후의 여러 석학들의 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디지털 시대의 가속화’야말로 이 시대를 이겨나가는 비결이라는 시각이다. 한마디로 코로나19 이후에 많은 선교사들이 ‘화상회의’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선교사와 선교본부와의 소통을 위해 사용됐지만, 코로나19로 한국에 귀국한 선교사들이 현지인들과 화상회의로 현장과의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더불어 선교사들도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방송을 촬영하고 유튜브 같은 인터넷 플랫폼으로 자신의 사역을 알리거나, 선교사역을 이어가는 선교사들이 늘어가고 있다. 실제로 선교사들로부터 화상회의 시스템 사용법이나, 방송 제작과 편집, 유튜브와 같은 SNS에 영상을 올리는 법, 기본적인 장비 구입 등에 대한 강의나 실습을 해 달라는 요청이 이전보다 부쩍 많아졌다. 이러한 요청을 보면서 한국의 단기선교가 ‘스마트 단기선교’, ‘디지털 단기선교’라는 방향성 아래 선교사와 선교지에 이러한 기술력을 향상시키는 단기선교가 준비되면 좋을 것이라는 바람을 갖게 된다. 단기선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20-30대는 소위 이러한 디지털 기술을 굳이 배우지 않아도 생활 속에서 삶의 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들에게 익숙한 전문성을 선교지를 위해서 재능 기부를 해 주면 좋을 것 같다. 디지털 단기선교팀이 구성돼 선교사들을 위해서 필요한 디지털 기술을 5-10회 정도 인터넷 강좌로 개설하든지, 이미 있는 많은 강의들을 연결시켜 주고 화상회의를 통해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실습하도록 지도하거나, 개인적인 질문들을 받아 주면서 기술력을 키워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많은 선교사들이 강의를 듣고, 곧바로 실행하기에는 한계가 있기에 디지털 개인 튜터로 섬겨 주면 선교사들에게 많은 힘이 된다. 특히 방송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해서 선교지의 귀한 영상 자료를 보기 좋게 편집을 해 주기도 하고, 영상편집 기술과 인터넷에 올리고 활용하는 방법들이 필요하다.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선교현지의 디지털화를 연결하는 거점이 된다면 이전보다 더 많은 사역들이 열리게 될 것이다. 특히 SNS를 활용하는 방법도 덧붙여서 선교사들과 현지인들과의 소통의 길을 열어 가는 것도 이 시대의 새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창의적 접근이 코로나 19의 위기를 이겨나가는 큰 힘이 될 것으로 본다. ‘단기선교팀을 통한 선교지 디지털화의 가속화’, 이것이 코로나 19를 이기는 하나님의 귀한 선교적 도구가 되길 기대한다.

신동식 목사 2020-07-31

운동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입니다.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경기를 망치거나 몸을 다칩니다. 집중할 때 의미 있는 결과를 가지게 됩니다. 집중은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한 가지 일에 힘을 쏟아부음을 의미합니다. 집중은 단지 운동 경기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다 필요합니다. 부부가 서로에 집중하지 않으면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렸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집중할 때 가정은 행복하고 자녀들을 복을 누립니다. 아마 집중의 문제는 공부에도 적용됩니다. 공부는 집중이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산만한 태도는 결코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집중하는 한 시간이 산만한 10시간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공부의 결과는 집중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명왕이라 불리는 에디슨의 말처럼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뤄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둘 다 중요합니다. 1%의 영감이 없는 99%의 노력은 의미 없습니다. 또한, 99%의 노력 없이는 1%의 영감만으로도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동일한 원리가 작동합니다. 바로 집중입니다. 집중은 노력이 주는 열매를 얻게 합니다. 집중 없이는 노력은 허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영감도 집중할 때 떠오릅니다. 영감이 떠오르더라도 집중이 없으면 사라지고 맙니다. 이러한 집중은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에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예배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신령과 진리로 예배(요4:24)하라고 하였습니다. 대충 예배할 수 없습니다. 신령과 진리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예배에 집중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나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집중은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게 합니다. 집중이 없는 예배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모습을 마당만 밟는 신앙(사1;12)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배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왜 예배에 왔는지도 모르고, 예배 시간만 끝나기를 바란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 머물러도 마당만 밟고 가는 것입니다. 예배에 집중할 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자녀들에게 집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이 언약을 맺음에 있습니다. 언약을 지키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성취하심에 있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집중은 하나님의 열심입니다[사9:7,37:32].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기에 열심하셨습니다. 언약이 성취되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집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구원의 영광을 보게 하였습니다. 언약에 집중하심으로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집중은 그리스도인의 푯대입니다. 그러기에 집중은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들에게 본성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본향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갈 곳을 알지 못하지만 떠나라고 할 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왕궁의 보화를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본향에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핍박과 죽음이 있었음에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본향에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본향에 집중하지 않고서는 나그네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히11장]. 예수님은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는 길이 본향에 집중하는 것임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히12:2]. 그리스도인은 방향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구름 따라 흘러가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입니다. 본향에 집중하여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함임을 아는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 집중하여 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에 집중하여 삽니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본향에 집중합니다. 다시 본원적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에 집중하십니까? 삼위 하나님께 집중하십니까? 하나님의 창조 경륜에 집중하십니까? 하나님의 언약에 집중하십니까?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집중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 집중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에 집중하십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집중하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일에 집중하십니까? 예배에 집중하십니까? 기도에 얼마나 집중하십니까? 설교에 집중하십니까? 삶에서 그리스도임을 드러내는 일에 어떻게 집중하십니까? 빛과 소금의 삶을 살기 위하여 어떻게 집중하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의 삶에 집중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자 집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집중합니까? 성령의 내적인 음성에 집중합니까?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지체들에 집중하십니까? 가정에 집중하십니까? 아내를 향한 사랑과 남편을 향한 존중에 집중하십니까?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십니까? 교회를 사랑하고 기도하는 일에 집중하십니까? 무엇에 집중하십니까? 집중이 신앙을 나타냅니다.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로서 살기를 바랍니다.

김명전 GOODTV·데일리굿뉴스 대표이사 2020-07-30

미국 대통령 선거가 10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현재 낮은 지지율로 고심하고 있다. 이 시점에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불거졌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미국방부가 3월 주한미군 감축 옵션을 백악관에 보고했다”고 보도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직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인상하기 위한 압박용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트럼프는 미국의 어느 대통령보다 한반도 문제를 중요 정치 의제로 다뤄왔다.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로 끝난 배경도 트럼프의 국내 정치용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낙관할 수 없다. 한반도는 동북아 안보의 린치핀(linchpin)이다.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철수가 현실화 되면 한반도라는 린치핀으로 고정된 국제정치 질서는 대격변이다. 남과 북은 중대한 택과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트럼프 집권 4년, 한반도 정세는 몇 차례 변곡점을 거쳤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첫 번째다. 북한의 핵실험장 폐쇄가 두 번째다. 세 번째는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과 판문점 정상회담이다. 세 번째 이후 협상의 시계는 멈춰섰다. 김정은은 하노이까지 4,000km 60시간을 열차로 달려왔지만 빈손으로 돌아갔다. 소득은커녕 수모를 당한 모양새였다. 정상회담에서는 보기 드문 결말이다. 협상의 상대를 믿지 못하는 신뢰의 위기에 빠졌다. 트럼프의 탄핵 이슈를 덮기 위해 하노이 정상회담을 결렬시켰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모든 핵 협상이 원점에서 맴돌고 있다. 그 이후 북미 판문점 정상회담으로 불씨를 살려보려 했지만 진전이 없다. 주한미군 감축되면 국제질서 대격변 네 번째 변곡점이 주한미군 감축이다. 실행에 옮겨질 경우 한반도의 정세는 요동을 칠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입장에서 ‘양날의 검’에 해당하는 이 문제를 꺼내든다면 그 배경은 무엇일까? 먼저 한국을 겨냥해서는 주한미군 방위비 협상에서 트럼프의 요구를 관철시킬 압박용일 수 있다. 한국의 분담금 협상안이 백악관에 전달된 것은 지난 3월이다. 미 국방부의 주한미군 감축 옵션이 보고된 시점과 일치한다. 주한미군 감축안을 ‘대선용 타깃’으로 설정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트럼프가 이 문제를 실행에 옮길 가능성도 낮지 않다. 재선에 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을 감축한다면, 일차로 순환배치하는 미군의 한국배치부터 축소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순환배치 미군은 본토와 한국 간에 9개월 주기로 교체 운용하고 있다. 병력은 1개 기갑여단 5,000여 명 규모다. 한반도 안보지형에는 중대한 변화의 신호다. 한국에 고정 배치된 미군까지 축소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개연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 군사안보 전략의 대전환이다.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의 군사전략을 미일 중심으로 재편하는 구도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는 것으로읽힐 수 있다. 미국 이 세계의 패권적 지위를 포기하는 시그널이다. 주한미군 감축을 가장 반길 나라는 북한과 중국이다. 북한은 미군으로 인해 당면한 위험이 줄어든다. 향후 한국과의 모든 협상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핵협상을 통해 경제제재로부터 빠져나올 출구도 열리게 된다. 트럼프는 불리한 대선 국면을 반전시킬 카드 중의 하나다. 북미정상회담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중국은 한국과 북한에 대해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다. 일본에 대해서도 한반도를 거점으로 포위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기대를 갖기에 충분하다. 주한미군 감축설과 관련해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21일(현지시간) “나는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장에 주한미군을 감축 또는 철수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미 국방예산의 편성 기준이 되는 국방수권법(NDAA)은 주한미군을 2만 8,500명 이하로 줄일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정부가 주한미군의 잠정적 감축에 대해 전략적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매우 어려운 선택과 도전이다. 한미 간의 철저한 신뢰의 기반 없이는 불가능하다. 국가안보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 기본이다. 김정은 협상 테이블 끌어들일 카드 될 수도 주한미군 감축 문제는 린치핀 한반도의 모험이다. 반면 김정은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들일 수 있는 카드다. 그에게는 크나큰 명분이다. 한반도는 또 한 번 대전환의 기회다. 625전쟁 70주년, 한반도의 불안정한 분단 상황은 이제 마감해야 한다. 그 원칙은 항구적인 평화정착이다. 그 진행은 국민적 공감을 얻는 것이 절대 중요하다. 한국정부가 대북 대미 정책라인을 새롭게 교체했다. 박지원 국정원장, 이인영 통일부 장관, 서훈 안보실장 체제다. 남·북·미 간에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고심이 담긴 조합이다. 북한은 핵개발에 따른 경제봉쇄, 코로나19 확산 등으로 매우 어렵다. 이미 한계점을 넘었는지도 모른다. 북한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진정성도 그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짧은 것도 아니다. 남북이 한반도의 불안정을 극복할 기회가 되고 트럼프는 정치적 이익을 얻는다. 북한이 기회를 잘 살렸으면 좋겠다.

정재영 교수 2020-07-28

작은 교회의 위기 코로나 대유행의 여파로 한국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작은 교회들이다. 코로나가 확산되던 초창기에는 상대적으로 불확실성이 더 큰 대형 집회가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에 대형교회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예상들이 있었다. 작은 교회들은 인원이 적기 때문에 방역만 잘 하면 바이러스 위험도 크지 않고 오히려 친밀한 공동체적 분위기가 교회를 더욱 탄탄하게 유지할 수 있어서 환경 변화에도 충격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로나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이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큰 교회들은 예배당이 넓기 때문에 2미터 이상의 거리두기를 철저히 하고 실내 소독 등 방역을 철저히 하면서 마스크를 끼고 예배를 드려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반면에 작은 교회들은 공간이 넓지 않아서 거리두기를 철저히 하지 못하고 비용 문제로 소독을 제대로 하기도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친숙한 소수의 사람들이 모이면 안정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마스크 착용도 허술해진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한두 사람이 쓰지 않기는 어렵지만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이면 이런 생각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큰 교회들은 온라인 중계 시설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예배당에 나오지 않더라도 온라인을 통해서 예배를 드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작은 교회는 이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급하게 온라인 중계를 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장비를 갖춘다고 해도 화질이나 음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교인들은 자기 교회의 예배 중계를 보다가 고해상도 화질에 소리고 선명하게 잘 들리는 대형 교회 온라인 예배로 채널을 돌리듯이 갈아타기도 한다. 헌금 문제도 작지 않다. 초창기에 현장 예배를 고수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헌금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었는데 ‘한목협’의 설문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7.5%가 헌금 문제로 현장 예배를 고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여러 교회들이 헌금이 줄어들고 있는데 재정의 여유가 없는 작은 교회들이 더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특히 재정 자립이 되지 않는 교회들의 경우에는 다른 교회들의 지원도 줄어들어서 교회당 임대료를 감당하기도 어렵고 목회자 사례비를 지급하기도 어려운 형편에 놓인 곳이 한둘이 아니다. 코로나 이후의 전망 코로나 이후의 상황은 더 어둡다. 예장 통합 교단의 조사에 의하면, 실제로 교회들 가운데 3분의 2 가량이 헌금이 줄었다고 응답했으며 금액은 28.7% 감소했다. 일부 성도들은 코로나 이후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헌금을 교회에 나와서 드릴 수도 있겠지만, 코로나로 인해 전체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실업과 파산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긍정적으로 전망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되면 중대형 교회들이 하던 미자립 교회 지원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고 어렵게 자립을 유지하던 작은 교회들은 미자립 상태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작은 교회들의 사역도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 이후에는 대면 접촉을 꺼리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4차 산업 혁명이 가속화할 것이고 교회에서도 미디어나 온라인을 활용한 사역의 비중이 더 커질 것이다. 이렇게 친밀한 대면 관계에서 이뤄지는 양육이 중시되던 시대에서 비대면 온라인 관계나 미디어를 활용한 사역이 중시되는 시대로 바뀌게 되면 소형 교회들은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미 찬양 예배가 교계를 휩쓸었을 때 경험했듯이, 작은 교회가 큰 교회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물론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예배의 변화를 준비해야겠지만 큰 교회들 수준의 음향 장비나 시스템을 갖추기는 어렵다. 따라서 작은 교회의 특색을 살려서 잘 준비하지 않으면 예배의 성격 자체가 불분명하며 어정쩡한 형태가 될 수 있고 청년과 일부 교인들은 제대로 갖춘 대형 교회에 눈을 돌리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코로나 이후에도 작은 교회들은 어느 정도의 비대면 방식의 사역을 준비해야겠지만 무리하게 재정을 투입하기보다는 작은 교회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온·오프라인 혼합 방식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교회 생태계를 위해 코로나 이후에도 한국 교회가 건강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개체들이 공존하면서 협력하고 연대해야 한다. 도시 교회와 농촌 교회,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지역 교회와 파라처치 등 다양한 교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특색에 맞는 사역을 하면서 협력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교회들이 지속 가능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공교회적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상대적으로 여력이 있는 대형교회는 소형 교회들에게 온라인 사역이나 미디어 사역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해 주고 소형 교회들이 하기 어려운 미디어 콘텐츠를 개발하여 제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소형 교회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친밀한 공동체적 관계에 기초한 소규모 교회의 특징을 살릴 필요가 있다. 외국에 비해서 대형교회가 더 많은 한국 교회 현실에서 작은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은 작은 교회만의 가치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의 필요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코로나가 종식되지 상황에서는 작은 교회들도 방역을 철저히 해야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작은 교회는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특히 재정상 어려움에 대비하여 최근에 계속 논의되고 있는 목회 이중직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이미 많은 소형 교회 목회자들은 교단의 입장과 상관없이 이중직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목회자가 품위를 잃지 않고 목회적 차원 또는 선교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직업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목회에 대한 준비와 사역을 다양화 하는 것도 필요하다. 현재 온라인 예배가 확대되면서 온라인 교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한목협’ 조사에 의하면 가나안 성도들이 여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서 새로운 사역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또한 오래 전부터 간헐적으로 시도되었던 작은 교회들 사이의 공동 목회와 같은 일종의 컨소시엄도 새롭게 시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교회주의의 한계를 넘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이 밖에 기존 목회 방식이 아니라 지역 사회와 다양한 시민 사회 영역에서 선교 사역을 하는 파라처치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는 과반수가 비종교인이고 개신교 신자 중에서도 200만 명이 넘는 가나안 성도가 있는 상황이므로 기존의 목회 방식을 넘어서는 다양한 사역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다양한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교회들이 연대하고 협력한다면 코로나의 위기 속에서도 한국 교회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김근수 총장 2020-07-25

우리는 다양한 지식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지식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은 물론이며, 보이지 않는 것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소화하기 힘든 방대한 정보와 지식을 소유한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자기 정체성의 빈곤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불안은 신분 의식과 사역 의식의 빈곤으로 나타납니다. 바울 사도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는 고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였습니다. 과거 그리스도를 비방한 비방자였으며, 교회를 박해하였던 박해자로, 성도를 폭행한 폭행자로 죄책감을 가졌습니다(딤전 1:13).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는 말씀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또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고백하며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인간의 실상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대신 “나는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에게...(엡 3:8)”라는 ‘소자 의식’을 가지고 생활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은 참된 자기이해 덕분에 바울 사도는 남을 비하시키는 철저한 율법주의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남을 정죄하던 바리새인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기 이해는 세월의 흐름에도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에서 자신을 가리켜 ‘사도 중 작은 자(고전 15:9)’라고 고백한 바울은 그 이후 62년에 로마 감옥에 1차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자신을 ‘성도 중 작은 자(엡 3:8)’로, 그리고 다메섹 경험으로부터 30여년이 지나 로마 감옥에 2차 투옥이 되었을 때에 ‘죄인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비하시키고, 낮추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자기 정체성조차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복음에 빚진 자(롬 1:14), 성령에 빚진 자(롬 8:12), 사랑에 빚진 자(롬 13:8)라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감옥에서도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라고 말하며 자신을 사용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심령에 임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더 낮아지고 자신의 가치없음, 무익함, 무식함, 어리석음, 연약함을 스스로가 인식하는 겸비한 신분 의식과 이에 따른 사명 의식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정기 목사 2020-07-20

코로나 사태로 힘들어 하는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유명한 성서 신학자인 에밀 부르너는 이렇게 말했다.‘피를 통해 산소가 온 몸에 공급되는 것과 같이, 인간의 삶속에 희망이 공급되어야 새 힘을 얻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 희망이 있어야 현실을 이겨낼 수 있다. 희망이 있어야 미래를 바라보며 힘있게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무지개를 좋아한다. 빨주노초파남보, 어렸을 때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많이 그렸던 것이 무지개였던 것 같다. 내가 보았던 무지개 중에 가장 멋졌던 무지개는 20여년 전에 의정부에서 보았던 무지개이다. 운전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보았다. 햇볓이 쨍쨍한 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그런날을 호랑이 장가 가는 날, 여우 시집가는 날이라고 한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비가 크치더니 앞에 보이는 산자락에 무지개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주 선명한 일곱 색깔 무지개였다. 햇빛과 구름과 산과 무지개가 너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 멋졌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 두신 황홀경이다. 구름이 시련의 상징이라면 무지개는 희망의 상징 행복의 상징이다. 누구나 인생길을 걸으면서 무지개를 만나길 기대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무지개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실은 불행하게도 무지개가 자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자주 보인다. 그것도 비를 머금은 시커먼 먹구름이 보일 때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다 구름이 있다. 때로는 역경의 구름이, 슬픔의 구름이, 질병의 구름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이별의 구름이 우리를 덮을 때가 있다. 그러나 구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구름속에 있는 비와 폭풍을 바라본다. 어떤 사람은 구름속에 있는 무지개를 바라본다. 일어난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응이다. 반응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은 항상 좋게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고, 모든 것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도 고난은 있다. 욥은 하나님을 잘 믿었지만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그 고난속에 갑절의 축복이 있었다.(욥42:1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재앙이 아니다. 평안이다. 미래와 희망이다.(렘29: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고난의 구름속에 축복의 무지개를 감춰두셨다. 고난의 구름속에 영광의 무지개를 감춰두셨다. 창세기 9장 13절에“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고 말씀하셨다. 무지개는 언약의 증거이다. 홍수 심판후 지면에 있는 모든 생물들이 다 죽은 것을 보며 노아의 가족들은 죄에 대한 두려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그런 노아의 가족에게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무지개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 보좌 뒤에 무지개가 있다. 요계4:3절에“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보좌에 무지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실 때마다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겠다는 것이다. 일어설 때도 보시고, 앉을 때도 보시면서 365일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것이다. 홍수 심판이 있기 전에 무지개는 자연 현상이었다. 그러나 홍수 심판 이후에는 언약의 상징이 되었다.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이다. 구약 시대의 언약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신약 시대의 언약을 새언약이라고 한다. 언약에는 편무 언약과 쌍무 언약이 있다. 편무 언약은 일방적인 은혜 언약이고, 쌍무 언약은 상호 의무가 있는 언약이다. 노아에게 주신 언약은 편무 언약이었다. 노아가 해야할 의무는 아무것도 없었다. 노아가 할 일은 그냥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면 되는 것이었다. 언약이란 문자 그대로 약속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라 식언치 않으시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구름 속에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두셨다. 그런데 무지개 언약보다 더 확실한 언약은 십자가 언약이다. 십자가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언약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셔서,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다. 그리고 부활하게 하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 무지개는 희미한 것이지만, 십자가는 너무나도 선명한 것이다. 무지개는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심령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을 의지하자.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신다. 고통을 피하지 말자. 직면해서 싸우자. 그러면서 믿음이 자라는 복을 받자. 고통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자.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자. 오늘의 구름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내일의 무지개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오늘을 이기며 살아가자.

권득칠 총장 데스크2020-07-19

세계 교회사를 돌아보면 기독교 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부흥과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성장 은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 온 교회의 내적인 영적 능력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내적인 영적 능력의 바탕에는 기도가 있었으며, 그리스도인은 기도함으로써 개인의 영적 성숙을 이뤄 교회와 기독교 전체의 발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해 영적인 삶이 성숙하고 교회는 바로 그 기도를 통해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육체가 호흡하지 않고 살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영의 호흡인 기도가 없이 살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더 나아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권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인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신앙성장의 가장 중요한 도구이며, 더 나아가 성도의 특권이요, 기쁨이요,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도는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 우리가 듣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서 일방적인 외침이나 독백(monologue)이 아니라 대화(dialogue)이며, 기도는 살아계시고 말씀하시고 들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이 나누는 대화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이 바로 기도이다. 성도들의 처지와 어려움과 고난과 감사와 찬양으로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은혜와 평강을 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신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지속적인 교제를 갖지 않고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제를 갖지 않고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성장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가능하지만, 그 요소요소마다 기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를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아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무기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성장의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실천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기도는 우리 믿는 사람에게 호흡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직접적인 통로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바른 의미를 알고 그 능력을 얻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깨닫게 되고 그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단순히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에만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기도의 이러한 면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데 있다. 즉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게 해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능력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믿는 이에게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 성숙하고 건전한 분별력을 주시고 당신의 뜻을 책임 있게 수행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기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또한 기도할 때는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적당한 시간을 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하나님의 뜻으로(마 26:39), 감사한 마음으로(빌 4:6), 믿음으로 해야 한다(마 21:22). 그리고 성경에는 많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들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도 응답에 대한 이 약속들을 믿고 나아감으로써 코로나19로 힘든 이때 기도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영훈 위임목사 2020-07-18

30여 년 전 우리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사람들은 명품이라고 불리는 고가 브랜드의 물건을 사기 시작했다. 명품의 수요가 점차 늘어나면서 일부 상인들이 가짜 명품을 만들어 유통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그런 가짜 명품들을 ‘짜가’라고 부르며 경계하고 또 한편으로는 경시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가짜가 줄어들기는커녕 훨씬 더 많아졌다. 이제는 대부분이 가짜이기 때문에 진짜를 ‘찐’이라고 힘주어 말해야만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과거에는 가짜 물건, 모조품인 것을 숨기고 팔았다. 또한 상품의 질도 진짜 상품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가짜를 만드는 사람들이 진짜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마음대로 가지고 와서 사용하기 때문에 가짜 상품의 질이 크게 올라갔다. 그래서 일부러 가짜 상품을 찾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비단 시장의 물건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언론, 정치, 관계, 학문,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진짜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진실과 거짓을 명확하게 분별해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하는 언론의 영역에 거짓된 정보가 가득하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거짓 기사와 악의적인 소문들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고 그중 일부는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의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거짓 믿음이 들어와 있다.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단, 사이비는 초기 기독교 시대 때부터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이단 사이비는 그 규모와 조직적인 정도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다. 그래서 이에 따른 피해도 매우 심각하다. 특히 이번 코로나19로 드러난 이단 집단의 폐해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다. 거짓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사람들은 인생이 나아갈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 거짓이 우리 사회에 득세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 크다. 교회가 진리 앞에 바르게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라고 말씀하셨다. 진리의 길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까지 교회가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않고,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진리를 모르고 거짓에 오염돼버렸다. 이제 교회의 사명은 자명하다. 교회는 높이 솟은 진리의 등대로서 거짓으로 뒤덮인 사회를 밝히 비춰야 한다. 죄를 죄라고 선포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알려야 한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반발과 비웃음 그리고 무관심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진리를 붙들고 그것을 전해야 한다. “진리는 고독해도 날로 담대하다.” 이 말은 맨발의 성자라고 알려진 故 최춘선 목사님이 생전에 남기신 고백이다.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평생 맨발로 다니며 복음과 애국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그분의 삶은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거짓의 시대에 진리의 길을 걷는 것은 가시밭길과 같다. 하지만 교회는 피를 흘리면서 그 길을 가야 할 사명이 있다. 아무리 강조해도 거짓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세상은 알아주지 않아도 교회가 흘린 피가 진리를 담대하게 증언할 것이다. 부디 한국교회가 세상의 명리에 흔들리지 말고 묵묵히 진리의 길을 걸어가 어두운 사회를 밝힐 희망의 빛이 되길 기대한다.

prev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goodtvICGICGCCMLOVE굿피플KCMUSA기독뉴스GoodPeople아멘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