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전 기자2018-05-11

4·27, 남북정상의 '판문점 선언'은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예고한다. '평화와 번영'의 미래다. 국제정치에서 한반도의 평화는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서는 순간 시작된다. 국경과 전선(戰線)이 바뀌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불가분 관계에 있는 중국, 러시아, 일본과는 새로운 호혜협력의 질서를 세워 가게 된다. 냉전의 유산인 이념적 진영 논리가 힘을 쓸 수 없다. 이 같은 질서는 국내 정치에도 큰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대결구도가 사라졌다고 완전한 무풍지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달라진 점은 남과 북이 운명공동체로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국경은 지도에 그려진 대로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바다를 맞대고 있는 일본이다. 이 틈새에서 어떻게 평화와 번영의 생존전략을 펼쳐야 할까? 번영은 경제와 직결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번영으로 가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4·27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달한 USB에 담아 준 ‘한반도 신경제지도’가 그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한반도에 3대 경제벨트를 설정하고 동서와 허리를 잇는 H자형 개발 구상이라고 한다. 동쪽은 금강산-원산·단천-청진·나선을 연결축으로 한다. 북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남한의 동해안과 연결된다. ‘동해권 에너지·자원벨트’다. 서쪽은 수도권-개성-평양·남포-신의주를 축으로 한다. 북으로는 중국과 연결되고 남쪽은 서울과 서해안을 연결한다. ‘서해안 산업·물류·교통벨트’다. 동서를 잇는 경제지도는 ‘DMZ(비무장지대) 환경·관광벨트’다. 기타 남북접경지역에 '통일경제특구'를 지정해 개발하는 등 로드맵이다. 북한 번영의 로드맵은 무엇일까? 북한은 1990년대 식량난으로 공산주의식 배급과 보급체제가 붕괴 되었다. 주민들은 생존을 위한수단으로 자력갱생(自力更生)의 장마당(시장)을 열었다. 자연발생적인 식량과 생필품 조달 통로다. 현재 북한에 500여 개의 장마당이 운영되고 있다. 가구 소득의 70% 이상이 장마당 시장경제에서 나온다. 장마당 경제는 중국 등 해외교역으로 확대되었다. 2013년의 북한 경제는 GDP의 약 46%를 대외교역에서 창출했다. 경제가 성장 기조로 돌아 선 2013년 '핵·경제 병진' 노선을 택했다. 경제력을 핵개발에 집중했다. 2016년 핵개발 완성단계에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수립한다. 그 해 GDP 3.9% 성장의 성과를 거두었다. 2017년에는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으로 강화했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 북한의 ‘경제건설총력집중’ 노선은 위기다. 핵개발에 따른 미국 등 세계 각국의 교역봉쇄로 경제가 붕괴 직전이다. 경제봉쇄가 풀리지 않는 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미 시장경제로 진입한 북한 주민의 삶을 과거의 배급체제로 되돌릴 수도 없다. 이 시점에서 핵을 포기하고 번영을 택한 김정은의 선택은 최상이다. 북미회담은 한반도의 새 시대를 여는 장이 될 것이다.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은 국경과 전선이 바뀌는 날이다. 전쟁과 분단 시대의 마감, 길은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 길은 ‘한반도 신경제지도’에 있다. 보다 상세한 발전 전략은 남북이 함께 그려가야 한다. 이 국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지렛대이다. 다행스럽게 미국이라는 레버리지를 가졌다.

이정기 목사 기자2018-04-27

하이포니카 농법을 아는가? 식물이 흙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한다. 그래서 흙이라는 장애를 제거해 주고 태양의 힘과 영양분을 가지고 있는 물로 자라게 하는 소위 수경재배법이다. 토마토는 보통 한 그루에 20-30개 정도의 열매가 열리는데 이 하이포니카 농법을 사용하면 1만 3천개의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바이오 기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냥 흙이라는 장애를 제거해 주고, 물속에 영양분을 넣어 주고, 태양과 공기를 제공한 것 뿐이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는데, 그 장애를 제거해 주면 백배 천배까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갤럽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일반인 4명 중 1명은 자신이 심각하게 우울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여성이 남성보다 2배가 더 많았다. 여성에게 우울증이 많은 이유는 생물학적 요소로, 남녀간의 뇌의 구조적 차이와 호르몬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미투 운동이 계속 확산되고 있다. 마치 오랫동안 눌려있던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연일 과거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과오의 민낯이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있지만, 트라우마의 고통을 극복하는데 있어 자신이 숨겨왔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은 필수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부당함을 밝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회적인 차원에서 격려와 공감과 위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성폭력을 비롯한 두렵고도 강렬한 경험은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위험을 감지하여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교감 신경의 스위치가 쉽게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 마치 난방기의 온도를 조절하는 조절계가 고장이라도 난 듯이, 늘 긴장되고 각성한 상태가 유지 된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다행히도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평생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도 있다. 미투 운동을 통해 그런 분들이 이젠 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셨으면 좋겠다. 정신적 장애를 제거하고 밝은 인생을 사셨으면 좋겠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왕에게도 정신적 장애가 있었다. 다윗이 등장하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때였다. 블레셋에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골리앗의 키는 3m 가까이 되었고, 갑옷의 무게만도 60kg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그 누구도 골리앗과 맞서 싸울 상대가 없었다.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어린 소년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왔다가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가 싸우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무찌른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춤추고 노래하며 환영하는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고 노래한다. 이 노래를 들은 사울이 불쾌해 하며 심히 노한다.<삼상18:8> 문제의 핵심은 비교 때문이었다. 사울은 상황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다윗이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주었는가? 다윗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정말 고마운 부하였다. 다윗을 잘만 활용하면 왕권을 더욱 든든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무섭게 시기한다. 그러면서 다윗을 사위로 삼는다. 다윗이 예뻐서가 아니고 다윗을 가까이 두었다가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만큼 사울의 정신적 장애는 심각했다. 사울은 마침내 다윗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창을 던진다. 결국 사울은 정신적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다. 그러나 요셉을 보라. 자기에게 닥친 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항상 긍정적으로 보았다. 형들에 의해 팔려가 종살이할 때도, 보디발의 아내로 인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이 형들앞에서 한 말을 들어 보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러니까 요셉은 팔려왔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요셉은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미움의 감정을 품고 복수의 칼날을 갈으며 정신적인 장애를 안고 살았다면 결코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장애에서 해방되었기에 백배 천배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매사를 삐뚤어지게 바라보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좋은 쪽 보다는 안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닥친 일도 아닌데 미리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바라보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허물을 찾아 헐뜯고 비방하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 병들어서 그런 것이다. 정신적인 장애에 갇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일어난 사건을 무조건 좋게 해석하라.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그러므로 안된다는 생각을 된다는 생각으로 바꾸자. 끝났다는 생각을 이제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바꾸자.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버림을 당한다.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이제 좋은 것만 보려고 애쓰자. 좋게 보려고 애쓰자. 정신적인 장애를 제거하고, 항상 믿음으로 긍정을 선택하고, 백배 천배의 능력을 발휘하며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자.

정재영 교수 기자2018-05-09

지난 4월 27일 역사적인 남북한 정상 회담이 이루어지면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통일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10년 가까이 남북한 대치 상황이 지속되고 최근에는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조치로 경제 재제까지 이루어지면서 통일이나 평화 정책은 먼 얘기처럼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작년에 실시된 통일에 대한 국민의식조사에서 ‘남북한 통일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7.8%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는데 이것은 2016년 대비 4.3%, 2014년 대비 11.5% 하락한 수치이다. 그런데 북한 정상이 최초로 남한 땅을 밟고 들어와서 남한의 대통령과 평화 정착에 대한 진일보한 구상들을 밝힌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면서 오히려 한반도 통일이 성큼 다가온 느낌마저 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통일을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통일 이후 과정에 대한 대비이다. 통일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나 이제까지 통일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정권이 하나됨을 의미하는 정치 차원의 통합, 화폐 및 산업 구조가 단일화되는 경제 차원의 통합에 집중되어 왔다. 정치나 경제 차원에서의 통합도 중요하지만, 통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포함한 사회 차원의 통합을 궁극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단순히 외형상으로 하나의 체제를 갖는다고 해서 두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통의 이념을 가진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통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 통합 또는 사회 통합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통일 ‘이후’가 중요한 것은 통일의 ‘과정’이 통일 ‘이후’의 문제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통일 후에 일어날 사회 통합의 차원을 고려하지 않고는 통일을 추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통일 후 사회 통합의 문제를 고려하여 ‘선 통일, 후 통합’이 아니라 ‘선 통합 후 통일’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사회 통합이라고 하는 것이 5년 또는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통일 후 사회 통합의 문제에 대해서는 장기간의 안목으로 대비해야 한다. 특히 독일의 경우,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사회 통합의 측면을 염두에 두고 통일을 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사회 통합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은 것을 보았을 때 사회 통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회통합 관점에서 보는 통일 통일은 두 체제의 통합이지만 사회 구성원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사회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동일한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두 체제가 통합된 사회에 살게 될 때에는 이전에 삶을 지탱해 주던 규범들이 지속적으로 역할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찍이 사회학자인 뒤르케임이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목격했던 서구 사회의 아노미(무규범) 상태와 같은 것이다. 뒤르케임이 사회 구조가 변한 현대의 상황을, 옛 가치와 규범과 제도가 내몰린 그 자리에 아직 새 가치와 규범과 제도를 채 들여다 놓지 못한 도덕적 진공 상태가 가지는 도덕적 문제로 본 것 같이, 통일된 이후의 사회는 새로운 가치와 규범과 제도가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심각한 도덕적 위기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 환경에서는 새로운 사회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규범이나 가치 체계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독일처럼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사회 통합은 우리들에게 해결해야 할 커다란 과제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통일 후’ 전개돼야 할 재사회화를 통한 사회통합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환경으로서의 ‘통일 후’의 시기에 이루어질 각 개인들의 재사회화가 완성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사회화의 과정에서 가장 효과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공동체라고 하는 준거집단의 제공인데, 그것은 공동체의 형성이 사회 구성원간의 관계와 상호작용 그리고 소통이라고 하는 재사회화의 장으로서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 공동체 중의 하나인 교회가 가지는 사회통합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의 통일 이후에 사회 통합을 위해 교회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이런 것이다. 교회와 남북한 사회의 통합에 대한 연구들은 흔히 남북한 기독교 사이의 교류에 주목하면서 기독교간 교류가 증대되면 자연히 이질화가 약화되어 남북 기독교간에 통합을 이루게 되고 이를 계기로 하여 사회통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이런 주장에서는 대부분 ‘사회’를 정치와 경제, 또는 (좁은 의미의 문화 예술의 차원에 국한되는) 문화와 구분되는 일반인 또는 서민의 영역이라는 매우 좁은 의미의 개념으로 이해하며 사회 영역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사회통합은 보다 근본을 이루는 뜻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의 규범 및 가치와 관련된 의미 체계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통일 후 교회의 역할 이질적인 두 집단 사이의 사회 통합을 위해서는 시민단체들의 역할, 그 중에서도 종교 단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사회 통합의 정치 제도나 경제 체제와 같은 체계상의 통합이 아니라 생활 세계 또는 시민 사회 영역에서의 통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보편적 가치를 창출하는 종교의 역할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통일 이전에는 동독 정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동독과 서독 지역의 교회들이 통일 이후에는 그러한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통일이 되자 동독 지역의 교회들이 더 이상 서독 지역 교회들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해 서독 지역 교회들과의 관계를 끊었고, 정부 차원의 정책들이 시행되면서 교회의 역할이 줄어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회 통합을 위한 교회의 역할이 단순히 분단된 지역에 있는 교회들 사이의 교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 통합은 단순히 동질성을 회복하거나 기존 체제에 적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에 대한 이질성을 인정하고 각각의 사회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이러한 가치에 의한 재사회화를 하는 것이 통일 후 사회 통합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독일 통일과 통일 이후 과정에 대해 연구하기 위하여 독일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몰트만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교회가 일자리 없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는 시장경제가 줄 수 있는 것과 다른 것을 주는 곳이지요. 공산주의 국가들은 평등은 있지만 자유가 없고 서구에서는 자유는 있지만 평등은 없는 상황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연결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가 담당해야 할 역할은 그 영향력이 단순히 종교단체의 하나로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 영역 전반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가진 보편주의 사상과 관행을 더욱 계발시키고 그것을 통일 한국의 사회 구성 원리로 제시해 그에 근거한 사회 통합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현존의 가치를 초월해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본래의 기독교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 및 규범이 통일된 국가의 가치 체계로 자리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면서도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의 가치, 신학이나 신앙의 표현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성서의 원리로 한민족 전체를 묶어 줄 수 있는 공통의 가치 의식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두 사회의 구성원들의 감성을 담아 표현하는 데 걸림이 없는 새로운 언어가 창조돼야 한다. 이럴 때라야 한국의 기독교는 진정으로 한국인들의 심성과 습속 깊이 자리 잡아 결속시키는 하나의 ‘시민 종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재영 교수 기자2018-04-18

‘가짜 뉴스’ 실태 우리 사회가 이른바 ‘가짜 뉴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실을 가장한 거짓된 정보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반기문 전 유엔총장이 대선 예비후보로 나섰다가 사퇴한 이유 중의 하나로 가짜뉴스를 꼽았을 정도로 가짜 뉴스로 큰 홍역을 치렀다. 최근에는 개헌과 관련하여, 문재인 대통령이 정부 형태를 바꾸어서 연임을 하려고 한다든지, 지방분권제는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제라든지, 토지공개념은 소유권을 박탈하는 공산주의 체제라든지 전혀 사실과 다른 가짜 뉴스들이 횡행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가짜 뉴스의 위협을 받고 있다. 정치 이슈를 타고 확산력을 높이는 가짜뉴스 특성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앙선관위는 가짜 뉴스 등 비방 흑산 선전관 관련해 신고 전용 사이트를 운영하는 가운데, 위법성·고의성·목적성을 따져 삭제요청·권고·경고·고발·수사의뢰 등의 조치를 밟을 예정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가짜뉴스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선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뉜다. 언론사의 오보에서부터 인터넷 루머까지, 가짜 뉴스는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짜뉴스의 기준을 정하고 범위를 좁히지 않으면 비생산적인 논란만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작년에 한국언론학회와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로 열린 가짜 뉴스 관련 세미나에서는 가짜 뉴스를 ‘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언론보도의 형식을 하고 유포된 거짓 정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가짜 뉴스란 잘못되거나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뉴스의 형식으로 사실인 양 보도하는 루머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디지털 뉴스 환경에서는 잘못된 정보가 더 쉽게 떠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양극단의 주장이 곧잘 힘을 얻는다. 인터넷과 SNS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일단 한번 루머가 만들어지면 순식간에 많은 사람에게 확산되고, 루머가 틀린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해도 이미 사람들 뇌리에 박힌 루머의 이미지를 바로잡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그 파괴력은 실로 엄청나다. 특히 최근에는 사진이나 동영상 등의 편집 툴 기능이 빠르게 발달하며 가짜뉴스를 더 쉽게, 더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되고 있어 더 문제가 되고 있다. 가짜 뉴스는 매체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하기가 매우 어렵고 아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의 문제점 이러한 가짜 뉴스의 문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허문다는 점에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항간에 떠도는 루머나 괴담 수준이 아니라 정식으로 발행되는 신문 기사나 동영상으로 보도되는 뉴스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것이 사실과 다르거나 심지어는 조작된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넘쳐나는 정보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검증하듯이 살펴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도 한 국회의원이 미투 관련 가짜뉴스를 사실로 잘못 알고 장관을 공격했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주변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 판단하고 그것을 근거로 의미 있는 행위를 하며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인데 이러한 과정 자체가 거짓과 허위로 왜곡되어 버린다면 인간의 삶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짜 뉴스를 진실로 믿은 사람들이 인터넷과 SNS에서 퍼 나르면서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어렵게 하고 갈등을 유발함으로써 엄청난 사회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가짜 뉴스는 우리 사회의 주요 가치 중의 하나인 민주주의를 근본으로부터 뒤흔들어 버릴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건전한 사고와 올바른 판단에 기초해 다수의 의사를 따르는 방식을 표방하는데 대중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면 대의 민주주의는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짜 뉴스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끝내 소통할 수 없게 되면 갈등을 해결할 수 없게 되고 헌법과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까지 난무하게 되면 우리 사회는 매우 무질서해지고 끝없는 갈등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교회도 가짜 뉴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한 유명 대형 교회 목회자가 가짜 뉴스로 곤욕을 치른 일이 있거니와 교계 안에서도 이런저런 괴담들이 SNS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서로의 삶을 나누고 교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SNS를 많이 활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짜 뉴스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아침마다 보내져 오는 묵상 내용과 함께 현 시국에 대한 내용들이 기도제목이라는 신앙적 명분으로 포장되어 오기 때문에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 장로님이, ‘영적 지도자’인 목사님이 보내오는 내용이기에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교회 안의 다양한 모임들이 SNS 그룹으로 짜여 있다 보니 확산도 더 빠르다. ‘긴급 속보’, ‘널리 퍼뜨려 주십시오’라고 시작하는 글들이 찌라시 형태로 무분별하게 퍼지거나 뉴스 형태로 전달된다. 성도들의 ‘단톡방’에 가짜 뉴스들이 흘러넘쳐 올바른 판단을 도리어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안의 가짜 뉴스를 막으려면 최근 교계에서 이러한 가짜 뉴스가 생성되고 유포되는 것은 일부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세계관 때문이다. 이들은 이 세상을 기독교 왕국으로 만들려는 기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세력화에 반하는 모든 것들을 적대시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세력을 만들어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선교 역사에서 기독교가 비난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기독교가 제국주의 방식으로 타 문화권을 접근했기 때문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과 같은 다종교, 다문화 사회에서 각각의 종교인들의 자기 종교의 이익만을 위해서 경쟁한다면 우리는 종교 전쟁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성장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 성장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성장주의를 표방하게 되면 성장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걸림돌로 여기거나 심지어 적대시하게 된다. 교회 성장에는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고는 도움이 되지 않고 교회 성도들이 한 마음이 돼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인정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복잡한 사회 현상을 그 자체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피아를 구분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적대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시일에 해결하기 어려우나 우리 신앙을 스스로 성찰하며 여러 가지 사회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풍토가 마련돼야 한다. 또한 교회의 이익이나 세력화의 관점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공교회로서의 입장을 확립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한국 교회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 단체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공신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또한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정보에 대해 이것이 우리 공동체가 바로 서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깊이 사고하고 판단해야 한다. 신앙적인 내용으로 포장되었다고 해서 주위 기독교인들에게 무분별하게 퍼 나르는 일도 삼가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문화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에 감각 없는 자와 같이 되지 않고, 오히려 감각의 날을 세워 이 시대의 지성인이자 예언자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정기 목사 기자2018-05-16

요즘 갑질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럽다. 그리고 미투 운동으로 바람 잘 날 없다. 이전에는 없다가 갑자기 문제가 많이 생긴 건가? 아니다. 이전에는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계속 갑에게 억압되어 있었다. ‘너 하나 입다물면 모두가 편안해’ 집단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음지에 있던 분들이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언제나 “갑”과 “을”이 있다. 그러나 갑은 언제나 갑이 아니다. 갑 위에 또 갑이 있어 갑과 을의 위치는 늘 바뀐다. 대통령이 그 나라에서는 갑인 것 같지만, 국민 앞에서는 을이다. 경찰이 죄인 앞에서는 갑이지만, 국민 앞에서는 을이다. 그러고 보면 국민이라는 이름은 민주사회에서는 영원한 갑인 것 같은데, 가난한 사람은 돈 있는 사람 앞에서 을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갑이고 누구나 을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에서는 상점에서 고객이 소리를 높이면 그때부터 상대를 안 한다. 계속 방해하면 경찰을 부른다. 경찰이나 공무원을 상대로 업무를 방해하는 행동은 생각할 수도 없다.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로 인식한다. 일본은 가난해도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천대하지 않는다. 미국은 돈이 많아도 안 되는 일이 많다. 그런데 한국은 부자들에게 가장 편한 국가이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그들만의 세상에서 특권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힘으로, 돈으로, 혹은 권력으로 군림하고 갑질하는 사회는 후진사회이다. 이러한 후진성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가치관, 사회적 지위가 곧 그 사람의 품격이 되는 저질 자본주의와 관료주의가 불러온 병폐이다. 성경에도 갑질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갑질을 했다. 요셉을 노예로 판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도 요셉에게 갑질을 했다. 유혹해도 넘어오지 않자 성폭행 미수범으로 몰아 감옥에 갇히게 한다. 사울왕도 다윗에게 갑질을 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백성들의 환호에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창을 던지기도 한다. 그런데 다윗도 왕이 되어 갑질을 했다. 밧세바가 우리야의 아내인 것을 알면서도 범한다. 아이가 생기자 은폐하려고 시도하고 급기야는 우리야를 이길 수 없는 전쟁터에 보내 죽게 한다. 라반도 야곱에게 갑질을 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라반에게 7년을 섬긴다. 첫날밤을 치른 야곱은 아침이 되어서야 자기 곁에 있는 여인이 레아임을 알았다.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더 봉사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라반은 야곱을 20년 동안 일 시키면서 품삯을 열 번이나 자기 마음대로 변경했다. <창31:7> 노동력 착취였다. 인간의 숨길 수 없는 '갑질 본능'이 라반에게도 있었다. 라반이 처음부터 야곱을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카를 수단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라반은 먼데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라반인지도 모른다. 갑의 권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위, 아래가 있다. 위계 질서가 있다. 그 위계 질서가 무너지면 안 된다. 성경에도 분명히 사람간에 계층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신 28:13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머리가 있고 꼬리가 있으며, 위가 있고 아래가 있다. 그러므로 갑질과 갑의 권리를 혼동하면 안 된다. 제품에 하자가 있어 컴플레인을 거는 것이 갑질인가? 그것은 갑의 권리이다. 마25장을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온다. 주인은 이윤을 남긴 두 달란트 받은 종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한다. 그런데 땅에 감추었다가 가지고 온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며 있는 것 까지 빼앗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고 한다. 이것은 갑질이 아니라 주인의 권리이다. 식당을 하시는 분은 갑인 고객의 불만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발전할 수 있다. 야곱이 성공한 것은 라반의 갑질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요셉이 성공 것도 형들과 주인의 아내의 갑질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았기에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자녀 교육이 중요하다.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결정한다. 부모는 자녀의 최고의 선생님이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부모를 통해 배운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을 분노로 들썩이게 만들고 있는 세 모녀의 갑질을 보면서 '그 어미에 그 자식이다'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소리지르는 것, 욕하는 것 똑같았다. 갑질의 대물림이었다.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고 칭찬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배려가 몸에 밴 국민성 때문이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당시에 최고 갑질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변한다. 토색한 것 4배로 갚아주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갑질하던 사람이 배려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 후 삭개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다. 배운 사람, 가진 사람, 있는 사람이 더 겸손한 인격을 가져야 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공식이 깨져야 갑질도 멈출 것 같다. 갑질이 아닌 배려가 가득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신동식 목사 기자2018-05-10

지난한포럼에서있었던일입니다.강의가끝난후에질문시간이있었습니다.한청년이 심각한표정으로도피성도가가운데직분자들의자녀들이많은데이들이왜이렇게됐는지그리고어떻게대처해야하는지에대해질문했습니다.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의외로많은수의직분자의자녀들이교회로부터도피한 상태로살고있어교회의 시험거리가 되기때문입니다.언젠가는돌아오겠지하는심정으로기다리는부모들의마음이타들어가는것과별개로믿음이연약한이들이받는시험은만만치않기때문입니다. 이러한현실을어떻게이해해야합니까?신앙은개인적인것으로무시해야합니까?아니면 그 자녀들을 하나님이크게 사용하시려고시련을주시는것일까요?아마도이렇게생각하고싶을것입니다.그러나그렇게여유있게생각할것은아니라고생각합니다. 한예로불신가정에서태어나 예수님을 믿은성도들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늦게예수님을알았기때문에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가정을세우고싶을텐데직분자의자녀들의모습을 볼때그실망은적지않을 것입니다.그렇다면모든직분자의자녀들은다건강한신앙을가져야합니까?꼭그렇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비록 경건한가정에서도예수님의원수가나올수있기때문입니다.그래서 늦게믿은 분들이나,혹은홀로믿음을가진학생이나,청년들이큰시험에들필요는없습니다.그러면자녀에대해부모는손을놓고하나님에게만맡겨야하는것입니까? 그것은성경이가르치는것이아닙니다.왜냐하면성경은자녀에대한부모의책임을엄중하게말하고 있습니다. 아예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말씀을가르치라고했습니다.주의교훈과훈계로 양육하라고했습니다.그러므로자녀에대한부모의책임을피할수없습니다. 그렇다면직분자의자녀들의도피성도의삶을사는이유는무엇일까요그원인을살펴보는 것이필요합니다.우선전제하는것은도피성도로살고있는이들의가정상황을모릅니다. 그러나그결과를통해유추해생각하고자합니다.복된가정에서태어나교회를세우는 영광스러운삶을사는부모밑에서도피성도가나온다는것은너무나슬픈일입니다.그러나현실에는 이런도피성도들이많이있습니다.왜이들은도피성도가됐을까요?혹은 교회에있으나믿음이없는명목상그리스도인으로살까요?그이유를하나씩생각하려고 합니다. 첫째부모가명목상그리스도인일가능성이있습니다. 직분자라고해서다거듭난그리스도인이라말할수가없습니다.누구든지사람을얼마든지 속일수가있기 때문입니다.하지만속이지못하는사람들이있습니다.바로자신과가족입니다,특별히자녀들은부모의신앙을잘알고있습니다.진심으로예수님을믿고있는지압니다.그래서판단하는것입니다. 한예로시험때는예배보다는공부하고,교회보다는학원가라고 권유하는 부모를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부모도믿지않는예수님을자녀들이믿으려고 하겠습니까?물론 그런부모밑에서회심한자녀가나올수있습니다.그것은참으로놀라운하나님의은혜입니다. 그러나일반적으로도피성도들이즐비할것입니다. 둘째부모가이원론적신앙을가지고있을수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제일가슴아픈것은 크리스천 부모의세속화된신앙입니다.신앙의목적이철저하게세속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과평일이다른삶을살아갑니다.교회와가정의모습이다릅니다.경건의모습도환경에따라바뀝니다. 특히 자녀들의 눈에 비치는 직장에서의모습과가정에서의모습과교회에서의모습이다다른카멜레온신앙입니다.그러다보니신앙은자신의세속적성공이나혹은삶의스트레스를 해소하기위한도구가될때가있습니다.자녀들은그러한부모의모습을잘알고있습니다.그리고발언할나이가되면부모의이원론에반기를듭니다,도피성도의삶이싹트는 것입니다. 셋째부모가영적인권위를가지지못했기때문일수있습니다. 특히 성도들의 자녀들에게있어서부모는 단지밥해주고용돈을주는존재가되어서안됩니다.그렇게해도 관계는아름답습니다.인간이가지고있는기본적인효심이작동하기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도환경적조건이주어졌을 때만유효합니다.이것이타락한인간의한계입니다.더구나신앙의가정에서자라난자녀들은철저하게부모의신앙과삶을통해자신의 신앙과 정체성을형성합니다. 그런데부모가영적인권위가없다면어떻게되겠습니까?특히 크리스천 부모들에게 요구되는것은경건의 능력입니다.이것이영적인권위를갖게합니다.부모가 자신의 믿음 안에서 말하고, 자신이 믿는 대로살려고몸부림치는정직한모습이자녀에게는영적인권위를갖게합니다.그런데 기본적으로부모가말씀을읽지않고,기도하지않는데 자녀가 말씀안에서자라기를바라는것은부끄러움입니다. 넷째부모가예수님의사랑을나누지못했기때문일수있습니다. 자녀는부모의사랑을먹고자랍니다.그래서사랑을많이받은사람이건강합니다.반면에 사랑이궁핍하면성격에 모가나고삶이건강하지못합니다.그래서자녀는부모로부터충만한사랑을받아야합니다. 그런데부모가예수님께로부터받은사랑을자녀에게충만하게 나눠주지못하면자녀는예수님의사랑을힘들게알아갑니다.예수님께받은사랑이적으면 자녀들은더큰사랑을찾아떠나갑니다,그것이세상이주는즐거움에빠져 들어가는시작이됩니다.부모는자신이 삼위하나님께받은사랑을아낌없이주어야합니다.그러면자녀들이하나님을아낌없이 사랑합니다. 다섯째부모가가정과자녀에대한책임을감당하지못했기때문일수있습니다. 영적인부모가영적인역할에있어서최선을다하는것은너무나당연한일입니다.또한 일반적인 삶에대한책임도최선을다해감당해야합니다. 자신은감당하지못하면서 단지부모라는이유로자녀들의공경을요구하는것은창피한일입니다.믿는부모는더열심히자신의삶을가꿔야합니다,그래서배나땀을흘리는일이 필요합니다.부모는부지런하면서지혜롭고규모가있어야합니다,특별히부부로서의정절과예의가있어야합니다.남편이가진책임과아내가가진책임을잘감당하는것이얼마나중요한지모릅니다. 이것은자녀들의삶에잘반사됩니다. 여섯째부모가자녀들의정직한질문에정직한답변을주는것을무시했을수있기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 이것은정말중요하지만가장많이간과되고있는부분입니다.자녀들은부모의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에모든것을집중합니다.자녀가질문한다는것은 영적인권위를 인정하는것입니다. 이때 정직한답변을주려는열심히있어야합니다.그런데힘들고피곤하고잘모르겠다는이유로회피해버린다든지혹은화를낸다면그것은아이를지옥에던지는것과같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무분별한질문을잘요리할수있어야하지만정직한질문을기쁘게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힘을다해답을주려고한다면자녀는건강한신앙인으로자랄수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믿음의가정에서태어난자녀들이도피성도나명목상그리스도인으로살아가는것에는일차적으로부모들이감당해야할책임을방기했기때문입니다.특별히이모든 원인의시작이되는가정예배를포기했기때문입니다. 가정예배는그리스도의자녀로 자라나게하는일에있어서가장기초적인일입니다.더구나 부모가마땅히해야할책무입니다.가정예배를포기하는것은어쩌면부모되기를포기하는것과같습니다. 아마도 성도의 부모가자녀들의공부에대해갖는관심에10분의 1만 가정예배에대해가지면 그결과는 참으로놀라울것입니다.자녀들의세상성공에대해목말라 하면서자녀들의영적인회심과성숙에관심이없다면믿음이없기때문입니다. 자녀를맡은청지기로서의부모가최상의할일은바로가정예배를시작하는것입니다.일주일에한 번이라도해야합니다.가정예배없이자녀를위한기도는대부분건강과세상 성공일것입니다.그러나가정예배를드리면자녀를위한바른기도를할수있습니다.바로자녀의회심과영적인성숙입니다.우선순위가바뀌게되고진정으로사랑하게됩니다. 하나님앞에부끄럽지않으려면가정예배를드려야합니다.자녀들이미래의도피성도가 되는것을예방하려면가정예배를드려야합니다.결코포기해서는안됩니다.가정예배를 멈췄다면 다시시작하시기바랍니다.일주일에한번이라도해야합니다.특별히자녀가어리다면그 무엇과도바꿀없는것이바로가정예배입니다.가정예배가복의근원이며,통로입니다.

한정국 선교사 기자2018-05-09

필자는 한국 본부 사역자로 선교지를 방문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교단선교부 총무시절 교단 선교사 한 분이 러시아 이르쿠츠크시의 한 개신교회 목사와 동역하고 있어,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하루는 어느 곳을 가다가 차 운전을 하는 목사님께 “어떻게 목사가 되셨는가?”라고 물었더니, 자신은 정교회 신도였는데 젊은 시절 개신교로 개종하고 런던에 신학 유학해 개신교 목사가 됐다라고 했다. 나는 “나중에 우리가 천국가면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을 좀 만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더니, 그 분은 씩 웃으면서 “아마 많은 정교회 신자들을 만나 보게 될 겁니다”라고 하여 놀랍기도 하고, 그 이유를 묻자 “예수 고백에 관한 교리가 우선 같고, 구원의 확신이 정교회 성도에겐 좀 부족하지만, 주 예수를 믿는 그들은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라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 저의 은사 전호진 박사가 정교회 교리를 연구한 뒤, “개신교와 정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 훨씬 가까운 편이다”라고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러시아선교의 허와 실 1980년대 말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러시아가 선교에 개방됐을 때 한인선교사들은 모스크바에 물밀 듯이 입성했다. 심지어 한국의 인기 강사 조용기 목사를 초청, 붉은 광장에서 대형 전도 집회를 거행했다. 단상에 선 조용기 목사는 십자가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좋았는데 그만 실언하고 말았다. 러시아 정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한 것이 러시아 기독 사회에 큰 반발을 초래했다. 아마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한 오순절 선교사의 그릇된 정보 또는 편견에 찬 오만한 정보가 그의 판단을 흐리게 했을 것이다. 1995년 모스크바에만 한국인 선교사가 설립 운영하는 신학교가 5개였고, 5년 후 2000년에는 10개가 됐다고 두 차례 방문한 전호진 목사가 한탄한 바 있다. “한 목사, 그래도 내가 신학교에 전문가인데, 한인선교사들이 신학교 운영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애. 아니 중복 투자도 심각할 걸. 한 교단에서 나온 두 선교사가 따로 신학교를 설립 운영하니 나 원 참”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2010년 쯤 러시아를 방문한 바 있다. 그 10개 신학교의 대부분이 문을 닫고 오직 2개만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그 2개마저 잘 운영되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씁쓸해진다. 신학을 하는 이들의 속 좁은 마음과 독선이 무섭다. 2년 전 연해주 수도인 하바롭스크를 방문해 선교사 전체를 초청, 저녁을 함께 한 바 있다. 4개 신학교가 있었던 곳 이었다. 15년 된 한 선교사가 나에게 “그 4개 신학교가 다 사라졌어요. 한인선교사가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전혀 없다”면서 혀를 찼다. 무슨 확신이 그들에게 신학교를 세우도록 했고, 무슨 일로 쉽게 이를 포기했는가? 예수교회 또는 우리교단교회? 선교지마다 한인선교사들은 많은 장학금 또는 용돈까지 주면서 현지인들을 키우고 있다. 그들이 삯꾼이 되기를 바라는 선교사는 한 명도 없으리라. 그러나 그 운영 방식을 보면 이 가운데 많은 삯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선교역사적인 면에서 즉 comity(예의와 양보 정신)제도로 인해, 지역 분할로 인해 감리교단은 선교사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전담지역에 집중 선교해 그 지역에는 감리교단 교회가 열심히 사역한 결과 지금은 큰 교회가 많다. 말레이시아가 그런 경우로 그곳엔 큰 김리교회가 많다. 화융 목사는 세계가 인정하는 감리교 목회자이다. 그러나 후에 들어간 한인선교사들은 역사의 이런 아름다운 예의와 양보에 따라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버리고 그들의 신학교를 세우고, 신학생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며, 그들이 졸업해 그들의 교단 교회를 세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예수의 교회를 심는 예수 선교사라기보다 교단선교사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나 속 좁게 살아왔다. 아니 갈기갈기 나눠져서 신학교에서 교수들에게 그렇게 배워왔다. 무엇이 같은지를 깊이 연구 않고, 조그만 교리라도 다르니 서로 교류를 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100여 개 넘고 있는데서 나온 한 장로교 목사선교사로서 내가 속한 교단의 파란만장한 이합 집단을 보면서 나는 선교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해본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고, 역사적으로 생성된 수많은 기독교 형식을 참조하되, 그들 현지 기독교인에 적합한 기독교를 만들도록 해아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찰스 크레프트는 이것을 ‘적합한 기독교’라고 명명한바 있다. 우리는 한 그리스도, 한 믿음, 한 세례, 한 성령을 믿는다. 다만 다양한 문화의 옷을 입은 여러 기독교의 모습을 갖고 한 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계7:9-10의 그림이 이런 우리 기독교회의 참모습일 것이다. “이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여주봉 목사 기자2018-05-04

나는이사야하반부에나오는신약의교회에주신하나님의놀라운유업들에대해나누고있다. 나는하나님께서오늘날이유업들을한국교회에제시하고(offer) 확신한다. 그유업들은철저하게십자가의복음에주어진유업들이다. 그리고하나님께서의도하신신약교회는철저하게십자가의복음위에세워진교회이다. 신약교회의기초가예수그리스도라는말속에는예수님이우리의지혜와의로움과거룩함과구원함이되시는삶이포함되어있다. 예수님이우리의의로움이되시는삶, 그것이다른말로믿음으로말미암는의이다. 문제는예수님이우리의의로움이되시려면, 우리가육체를신뢰하는것을철저하게버려야한다. 우리는앞에서초대교회할례의문제를가지고이부분을살펴보았다. 예수님을믿는믿음에다할례를더한것이거짓복음이라고말하면, 어떤성도들은오늘날우리는할례를받지않는데그것이우리와무슨상관이냐라고반문한다. 그리고그들은그것은초대교회의문제이지, 오늘날우리들과는아무런상관도없는일이라고생각한다. 그렇기때문에그들은빌립보서3장을읽으면서도, 오늘날우리가운데너무나팽배한, 육신을의지하는거짓복음의영향력을전혀인식하지못한다. 육체를의지하는것은다양한형태를띨수있다. 사도바울은빌립보서3:4부터그의그화려한종교적인배경과경력을나열한다. “5나는팔일만에할례를받고이스라엘족속이요베냐민지파요히브리인중의히브리인이요율법으로는바리새인이요6열심으로는교회를박해하고율법의의로는흠이없는자라”(빌3:5-6). 그것들은그당시종교사회에서참으로인정받을수있는것들이었다. 그당시웬만한배경과경력을자랑하는자들에게바울의그것들을제시하면그들은곧바로고개를떨굴정도였다. 그런데사도바울은그의그화려한배경과경력을나열하면서, 그것들을육체라고부르고있다. “그러나나도육체를신뢰할만하며만일누구든지다른이가육체를신뢰할것이있는줄로생각하면나는더욱그러하리니”(빌3:4). 이처럼육체를의지하는것은단순히할례의문제만이아니다. 육체가될수있는것들은우리의삶에서참으로다양하다. 심지어우리신앙생활에서중요한요소들도육체가될수있습니다(골2:16-17). 그래서그것이무엇이든지우리가육체를신뢰하면, 다시말해서육체로인하여자부심을가지면, 그것이거짓복음입니다. 거짓복음, 율법주의신앙을간단히표현하면다음과같습니다. 예수그리스도+육체=거짓복음, 율법주의. 예수님을의지하려면육체를신뢰하는것을철저하게버려야한다. 사도바울은그것을배설물로여겼다고표현하고있다. 그는그의배경과경력을나열하고난다음, 다음과같이말한다. “7그러나무엇이든지내게유익하던것을내가그리스도를위하여다해로여길뿐더러8또한모든것을해로여김은내주그리스도예수를아는지식이가장고상하기때문이라내가그를위하여모든것을잃어버리고배설물로여김은그리스도를얻고9그안에서발견되려함이니내가가진의는율법에서난것이아니요오직그리스도를믿음으로말미암은것이니곧믿음으로하나님께로부터난의라”(빌3:7-9). 그렇다. 우리가육신을의지하는것이배설물이되어질때에비로소예수님이우리의의가되시는것이다. 다시말해서, 진정한의미에서우리가예수님을의지하는것이다. 이부분을잘볼수있는한부정적인예가예레미야시대이다. 지금까지살펴본것을잘이해하고이제고린도전서1:30로다시돌아가보자. 사도바울은예수님이우리에게지혜와의로움과거룩함과구원함이되셨다고말하면서, 그것이(구약)성경에예언된대로그렇게되었다고말한다. “30너희는하나님으로부터나서그리스도예수안에있고예수는하나님으로부터나와서우리에게지혜와의로움과거룩함과구원함이되셨으니31기록된바자랑하는자는주안에서자랑하라함과같게하려함이라”(고전1:30-31). 사도바울이인용하고있는성경구절은예레미야9:24이다. “자랑하는자는이것으로자랑할지니곧명철하여나를아는것과나여호와는사랑과정의와공의를땅에행하는자인줄깨닫는것이라나는이일을기뻐하노라여호와의말씀이니라.” 예레미야시대유다백성들은시바에서나는특별한향품을가져다가하나님께번제를드릴만큼그들의희생은뛰어났다(렘6:20). 또한그들은입만벌리면하나님이야기를할만큼그들의입술에는항상하나님이있었다. 예레미야12:2의“그들의입은주께가까우나”를영어NIV 성경은“You are always on their lips(당신이항상저들의입술에있습니다)”로번역하고있다. 그러한그들에게예레미야는“하나님을자랑하라”고외쳤다. 그예레미야의메시지를들은그당시유다백성들은자신들에대해서어떻게생각했을까? 당연히그들은자신들이야말로누구보다더하나님을자랑하고있다고자부했을것이다. (참고로고린도전서1:31과예레미야9:24을보아도하나님을자랑하는것과하나님을신뢰하는것은같은의미이다.) 그래서하나님께서예레미야를통해서아무리그들에게외쳐봐야그것이그들에게아무런효력도없었다. 문제는바로그앞절에있다. “여호와께서이와같이말씀하시되지혜로운자는그의지혜를자랑하지말라용사는그의용맹을자랑하지말라부자는그의부함을자랑하지말라.”(렘9:23). 지혜로운자가그지혜로인한자부심이사도바울의경우처럼배설물이될때에야비로소그에게는하나님이자랑이되는것이다. 다시말해서, 그는진정한의미에서하나님을신뢰하는것이다. 마찬가지로부자가부로인한자부심이배설물이될때에도비로소그는하나님을진정으로신뢰하는것이다. 만약예레미야시대유다백성들이그렇게하나님을올바로신뢰했더라면, 그들을그당시하나님의심판을받아나라가망하지않았을것이다. 그들은당연히하나님안에서복된삶을살았을것이다. 그러나그들은하나님앞에서철저하게타락한육신을신뢰하는삶을살고있으면서, 하나님께서예레미야를통해서그들에게하나님을자랑하라고목이터지라고외치는소리를듣고도, 그말의진정한의미를전혀몰랐기때문에전혀돌이키지않았다. 오늘날우리는모두믿음으로말미암는의를말한다. 그러나오늘날성도들과교회의삶가운데육체로자부심이하늘을찌른다. 그결과교회안에십자가복음의내용과교리는있을지모르지만, 그능력은철저하게소멸되어있다. 그러면서도대부분의성도들은예레미야시대의유다백성들처럼자신들이잘못되어있다는사실도전혀깨닫지못하고있다. 그말의진정한의미를모르기때문이다.

이인현(GOODTV 문화예술전문위원)기자 기자2018-04-20

필자는 최악의 장애를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베토벤을 생각할 때면 경이롭다는 단어 외에 떠오르는 말이 달리 없다. 피아니스트인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음악을 연주하고 작곡함에 있어서 청력의 의존도는 가히 절대적이다. 베토벤은 한창 잘 나가던 20대에 청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자신의 믿을만한 강력한 무기가 사라진다면, 누가 맨 정신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 청력이 점점 나빠지자 베토벤은 음악가의 인생은 끝이라는 생각에 죽음을 결심하고 유서를 쓴다. 그러나 그는 유서를 써 내려가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알게 된다. 그는 음악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더라도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청력 상실이 진행될수록 그는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교 대신 독서와 사색을 즐겼으며, 특히 셰익스피어나 칸트, 괴테, 쉴러 등 인문학과 철학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내면에 집중할수록 그의 음악도 더욱 진지하고 깊어져 갔다. 그는 더 이상 웃고 떠드는 유흥의 음악이 아닌 삶을 돌아보고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큰 울림을 주는 음악을 창작하기에 주력했다. 베토벤은 비로소 음악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청력 상실로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점차 범위를 넓혀갔다. 자연을 소리로 표현했으며, 풍경을 묘사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음악에 담아내었다. 그의 음악을 듣노라면 사람들은 대자연의 위대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음악은 마치 우리의 이야기 인양 우리의 희로애락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경이로움 까지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청력 상실 후 그가 만든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으며, 교향곡 9번 ‘합창’은 인간이 가진 희로애락을 넘어 신에 대한 성스러움과 환희를 보여주고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관객뿐 아니라 같은 음악을 하는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작곡가들은 눈이 호강하고 귀가 호강하는 음악보다는 마음이 동요되고 가슴이 움직이는 곡을 쓰기 시작했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의 작품은 돈벌이가 괜찮은 그저 가벼운 음악이 대부분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청력상실은 베토벤 인생에 있어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청력상실 덕분에 그에게서 위대한 음악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서인지 필자는 그의 청력상실이 한편으로는 고맙고 소중하다. 물론 그가 죽음을 택하지 않고 이를 잘 극복했기에 우리모두 대단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지만 말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위기가 찾아온다. 그 위기가 지나가는 바람일 수도 있고, 우리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혹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이 들면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참고 기다린다. 하지만 혹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불행도 내가 가진 불행에 비하지 못할 만큼 하찮은 존재가 되면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존재로 전락한다. 필자의 생각은 그렇다. 바람인지 혹인지 중요 하지 않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나에게 보물이 될 수도 혹은 폭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행만을 주시지 않는다고 믿는다. 불행과 행복은 동시에 찾아오는 법이다. 위기 속에 분명 해답이 있는 법이고 그 해답을 얻는 순간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고 믿는다. 베토벤은 난청을 자신에게 최악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난청을 통해 자신의 음악을 더욱 성장시켰다.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 음악을 제일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한 베토벤이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이래서 우리는 “베토벤, 베토벤” 하나보다.

한정국 선교사 기자2018-04-19

1453년 5월 29일 이날은 정교회의 중심지였으며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군대(오스만터키)에 점령당한 날이다. 최근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의 새 이름)을 다시 방문한 필자는 거리에서 터키 식 커피를 한 통 구입했는데 브랜드가 ‘1453’이었다. 나는 오랜 터키 커피의 역사를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집에 와 뜯어보니 이슬람군대가 기독교 최후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것을 기념해 만든 커피라니 커피 맛이 나에겐 더욱 쓰디 쓴 맛일 수밖에 없었다. 오래 전 소아시아 7개 교회 유적지를 두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유적지 돌무더기 위를 걸으면서 나는 깊은 심정으로 오열을 하고 말았다. “오 하나님, 이건 아닙니다.” 그렇게 멋진 소아시아 교회들, 비록 초기 기독교 형태이지만 그들은 기독 교회사에 새벽별 같은 존재였는데 지금은 황폐한 땅이 되었으니 “아, 이 빼앗긴 들에도 복음의 봄이 다시 오려나?” 터키를 방문할 때 마다 이 땅이 복음에 심히 저항하는 땅으로, 영적으로 견고한 진임을 느낀다. 작년 앙카라에서 만난 인터서브 선교사는 터키의 개신교도가 5,000명인데, 선교사가 5,000명이란 말을 듣고 나의 귀를 의심했다. “어디 이럴 수가?” 올해 다시 찾은 이스탄불에서 20년 가까이 선교한 선교사로부터 터키 기독신도 수가 5,000명 보다 많은 8,000명쯤이란 말을 들었고, 선교사는 5,000명 미만이란 말을 들었건만 도저히 위로가 안 되었다. 추운 겨울을 지나 새로운 봄을 기대하기 오스만 터키 이전 셀주크 터키는 이슬람을 그들의 종교로 집단적으로 받아 들였고, 이것은 제국 확장의 도구로 사용했다. 오스만 터키 지배 시 소아시아의 수많은 기독인이 그리스 등지로 이동해 복음의 땅이 황무지화 하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이스탄불의 역사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으니, 교회의 단합과 일치 정신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동서로마의 정치적 분열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 왔고, 나아가서 아리우스 논쟁으로 불리는 예수님에 대한 양성론 대 단성론 시비로 소아시아 및 앗시리아 그리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교회를 단성론으로 정죄했으니 이들의 심적 타격은 오스만터키 군대가 이집트를 침공할 때 일부 신자는 환영하기까지 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끼리의 정죄와 증오감이 직접 분열현상을 가져온 것이다. 더구나 동로마제국이 셀주크와 오스만 터키 군대의 예루살렘 지배에 대해 서방교회(당시 로마교회)에 구원 요청 시 십자군의 원정으로 인한 얼룩진 역사가 또 있었다. 이들의 무자비한 무슬림 학살도 교회사에 나온다. 물론 이슬람 군대도 옛 기독교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기독역사가들은 십자군의 과잉 액션을 질타한 바 있다. 이 전쟁의 후유증이 오늘날 이슬람권 선교지로 가는 선교사들에게는 목에 메고 가는 연자 맷돌이 되고 있다고 허버트 케인은 그의 간추린 교회사에서 역설한 바 있다. 그런데 더 심한 행위는 이 서방 십자군들이 정교회의 성물을 무단 탈취하고 그들의 서방교회 지부(동방교회라 칭함)를 설립하는 등 그들의 그릇된 행동은 동방정교회들에게 너무도 힘든 시련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오스만 군대의 세금 과다 징수(중세과세)와 회유로 인해 많은 정교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무슬림화 되는 과정을 겪는다. 콥틱교도들의 눈물 나는 신앙 지키기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이집트는 동방기독교의 한 축이었고, 당시 최대 도서관과 기독교 연구가 한 시대를 밝히 증거하고 있다. 이들은 오스만터키 군대가 침략할 때 무력하게 그들을 맞았는데(일부는 환영까지 했으니, 얼마나 서방교회의 단죄에 실망했으면 그렇겠는가?) 세월이 갈수록 이슬람의 회유와 협박은 갈수록 지능화했다. 그러나 자신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후손이 이런 협박에 넘어가지 않도록 피터지게 신앙을 이어갔고, 이들이 지금은 이집트 전역에서 콥틱 기독교로 그 땅을 지키고 있으니 자그마치 976만 명이나 되고 있다.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그들의 손목 뒤에 십자가 문신을 여러 명 보았는데 절대 개종하지 않겠다는 집안 전통의 무서운 의지를 읽고 나는 너무 감동하고 말았다. 이 콥틱 기독교의 영향을 직접 받은 데가 에티오피아 정교회인데, 에티오피아를 비롯해 그 이남에 있는 케냐, 탄자니아 등지가 이슬람화 되는 것을 막는데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도들의 눈물 나는 저항정신이 공헌한바 많다. 이 역사의 현장을 확인한 필자는 현지에서 얼만큼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날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를 찾는 개신교 선교사가 이들의 피눈물 나는 신앙 지키기 정신을 잘 이해하지 않고, 개신교로 개종시키기에 열심이라면 우리는 이런 선교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사실 그들의 단성론도 역사 속에 정죄된 것 보다 양성론에 가까운 주장임을 알 수 있었고, 당시 교단 정치의 희생물이었음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빼앗긴 들에 다시 봄이 오기를 바라는 21세기 현지 선교사들과 그들을 보낸 한국교회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난 2000년간 우리 믿음의 형제 안에서 ‘무엇이 다른가?’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쉽게 이단으로 정죄해 우리의 아름다운 땅을 적들에게 너무 쉽게 내주었다. 그래서 이제라도 ‘무엇이 같은가?’ ‘우리 모두가 믿는 분은 예수 아닌가?’ 그분 안에서 4개의 복음서 시각이 있었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조금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너무 같은 것이 많은데 기독교는 너무 많은 실수를 즉 서로 다른 조그만 것에 집착하여 대마를 잃곤 했다. 빼앗긴 들에 다시 한 번 방문하면서 그 땅에서 새벽마다 울며 씨를 뿌리는 5,000명의 선교사를 격려하고 싶다.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게 하고 싶다. 다시 그 땅에 봄이 올 것을 선포하자. 실망 말고 씨를 뿌린 후 물을 주며 저녁때 기쁨의 단을 들고 오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당대의 추수가 어려울 수 있다. 다음 아니고 그 다음세대면 어떻겠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이 다시 오는 소망의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 오늘 뿌리는 복음의 씨는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여주봉 목사 기자2018-04-09

이사야 하반부만 하더라도 신약의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유업을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유업은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질 때 주어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신약의 교회는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교회의 기초가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말 속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삶,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포함되어 있다. 교회는 철저하게 믿음으로 맘미암는 의를 의지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려면, 우리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 당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다 추가로 할례를 받아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된다는 유대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율법주의적인 거짓 복음과 대조해서 참다운 복음의 혹은 참다운 성도의 특징을 세 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 나열한 참다운 성도의 세 가지 특징은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것” 그리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먼저 이 구절은 복음과 관련해서 참다운 성도의 특징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봉사하며” 혹은 “성령으로 예배하며”라는 말은 여기에 나올 필요가 없는 말이다. 개역개정 한글성경에 “봉사하며”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라트류온테스’라는 단어로써 유대인들의 공적인 예배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 단어이다. 그래서 NIV, ESV 등 많은 영어 성경들이 이 구절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며”라고 번역하고 있고, 오늘까지도 많은 경우에 공적인 예배를 영어로 “service(섬김)”라고 부른다. 참된 복음에 대해서 말하는 이 구절에서 전혀 나올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며”라는 말이 참다운 성도의 특징 중 하나로 언급될 뿐 아니라, 그것도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드리는 참다운 예배가 참다운 복음을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잘 볼 수 있다. 사실, 참다운 신앙과 참다운 예배 혹은 참다운 복음과 참다운 예배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도록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참다운 예배가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 반대로 성령으로 예배하는 참다운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서도 참다운 복음이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이 둘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나머지 두 가지 특징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난 의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적인 것들이다. 우선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여기서 ‘자랑하다’는 말과 ‘신뢰하다’는 말을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을 믿는 것 혹은 신뢰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말 대신에 같은 의미로 예수님을 자랑한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참다운 성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 “그리스도 예수를 신뢰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자랑하지 않는 것.” “그리스도 예수를 신뢰하고 육체를 자랑하지 않는 것.”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려면 혹은 의지하려면 반드시 육체를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말로 해서 육체를 자랑하지 않아야 한다. 이 부분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혹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육체를 신뢰하면 혹은 육체를 자랑하면 그것은 전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그 당시의 “손할례당”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자들을 사도 바울을 “개들”,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강력하게 정죄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어떤가? 우리는 말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외치지만 성도들이 자랑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온갖 세상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것들이다.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이 교회 안에서 사라진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 부분은 다음에 이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이인현 (GOODTV 문화예술전문위원) 기자2018-03-30

필자는 아이들이 커나가는데 부모님의 교육방식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가정교육은 아이들이 평생을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잘 아는 클래식 작곡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모차르트와 베토벤이라 말한다. 음악 전공자든 비전공자든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다 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두 작곡가가 받았던 교육방식은 전혀 달랐다. 한 쪽은 칭찬일색이었으며 다른 한쪽은 학대와 처벌이 난무했다. 우리는 모차르트를 천재라 부른다. 그는 곡을 한번 들으면 망설임 없이 연주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작곡가의 연주를 듣거나 보면, 단번에 습득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일화들을 볼 때 그가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런 재능이 있었다고 한 평생을 천재로서 살았다고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전 세계 멘사 회원(아이큐가 148이상인 사람들의 모임)은 전부 천재라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모차르트 아버지는 남다른 아들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그는 아들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고민했다. 과감히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아들의 매니저를 자처했다. 약 10년 동안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유명한 연주자에게 수업을 받을 수 있게 기회를 마련하였고, 연주여행에 항상 함께 하였다. 쉽지않은 일이지만 자식이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면 부모로서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본다. 필자가 대단하다고 여긴 교육법은 이게 아니다. 모차르트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연주와 작곡에 꾸지람을 하거나 비난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는 아들을 참 소중히 여겼다. 모차르트가 만든 음악에 그는 주로 칭찬을 하였고 아들이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까 싶어 옥이야 금이야 애지중지 다뤘다. 어린 나이에 받은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 덕분에 그의 음악은 슬픈 음악이라도 밝고 참 따뜻하다. 타고난 재능에 칭찬과 격려의 아버지 교육법이 모차르트의 음악을 최고로 여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필자는 감히 말해본다. 우리는 베토벤을 악성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그를 악성이라는 부르는 건 청각장애를 이겨내고 완성도 높은 음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청각장애의 극복이 워낙 큰 이슈여서 정상적인 청각을 가진 베토벤의 어린 시절은 언급되지 않는 듯하다. 대대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집안의 분위기에 따라 음악을 접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음악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고 이를 알아본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가로서 성공하길 원했다. 베토벤보다 14살 많은 모차르트 연주를 본 베토벤 아버지는 자신의 욕심을 숨길 수 없었다. 사람들이 베토벤을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천재라 생각하길 원했다. 그래서 베토벤의 첫 데뷔 연주회에서 요즘 연예인들이 나이를 속이듯 두 살 어리게 자신의 아들을 소개하였다. 어리면 어릴수록 더 천재라고 느끼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아 보인다. 하지만 베토벤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첫 데뷔 무대를 보기 좋게 망친다. 베토벤의 아버지가 아들이 천재라고 뽐내고 싶었던 그 음악회에서 긴장한 나머지 베토벤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모차르트 아버지였다면 괜찮다고 위로하거나 격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베토벤 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그에게 아들을 사랑하는 방식은 학대와 체벌이었다. 아마 아버지는 강하게 화를 낼수록 아들이 각성하여 더 잘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학대와 매질 속에서 그는 점점 더 주눅이 들었고 공포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꾸중과 학대가 그의 인생 전체를 지배했다. 밝고 활기찬 음악이라 할지라도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 공존했다. 또한 이런 아버지의 교육방식에 익숙해져서 인지 그가 청력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절망했다. 만약 칭찬과 위로, 격려의 교육법을 받은 베토벤이었다면 삶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버텨내기 위해 그는 더 열심히, 더 지독하게 살았다. 따뜻한 사랑을 아버지를 통해 받아본 적 없었던 그는 까다로웠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외로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필자가 보기엔 둘 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 정반대의 교육법을 통해 서로 다른 음악과 성격을 보여준다. 칭찬과 격려로 키워진 모차르트는 긍정적이고 자신감에 차있는 밝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지 그는 범접할 수 없는 일인자였을 수도 있다. 학대와 체벌로 어두운 초년을 보낸 베토벤은 암울하고 고뇌에 가득 찬 음악을 구사하는 그의 성장과정에 대한 언급보다는 장애를 극복한 악성이라 평가받고 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살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강하게 키우겠다며 화를 내기보다는 자녀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칭찬과 격려를 한다면 우리의 자녀가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 확률이 높아진다고 필자는 믿는다. 처음은 누구나 어렵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하였다. 오늘은 자녀에게 공부하느라 고생했다는 말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김명전(GOODTV 데일리굿뉴스 대표이사, 성균관대 초빙교수) 기자2018-03-29

북한경제가 매우 어렵다. 제한적이지만 각종 정보기관과 연구기관의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드러난다. 북한은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시장(장마당) 경제에 의해 움직인다. 2011년 김정은 정권 출범 당시 200여 곳에 불과하던 장마당이 현재 400여 곳으로 늘었다. 식량배급체계가 붕괴되면서 주민 자립갱생(自立更生)이 보편화 되었다. 사실상 준자본주의체제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북한 경제의 대외무역의존도는 현재 50% 수준이다. 전 세계 평 균 60%에는 못 미치지만 곧 평균 수준에 근접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 50% 대외무역도 중국에 90% 이상을 의존하고 있다. 북한 경제는 중국에 종속화되었다. 경제의 중국 종속화는 MB정부 당시 5.24대북(對北)경제 제재 조치 이후 빠르게 심화되었다. 북한의 경제가 존립위기로 까지 진행된 것은 미국이 중심이 된 유엔제재의 영향이다. 2016년 3월, 유엔결의 2270호가 발효되면서 민생목적 외에 석탄, 철, 철광석의 수출이 전면금지 되었다. 이어서 유엔결의 2321호, 2371호 등이 발효되면서 석탄 등 자하자원, 수산물의 수출봉쇄와 대북 석유수출까지 막았다. 여기에 북한 해외노동자를 24개월 이내 송환(2379호)하도록 하는 등 경제봉쇄 수준의 조치들이 이어졌다. 미국 트럼프정부 출범 후 중국이 UN안보리의 결의를 따르면서 북한경제는 시한부 상황에 몰리고 있다. 지난해 북한의 중국 수출은 37%나 감소했다. 전방위적 제재가 진행 중인 올해는 90% 이상 대중국 수출이 줄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중국의 유류공급이 줄고 다른 나라들과의 유류교역이 중단되었다. 이로써 북한의 재래식 무기체계도 무력화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 같은 전방위적인 압박은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미국 본토까지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까지 개발하면서부터다. 미국은 자국의 안보차원에서 북한을 제재할 명분을 갖게 되었다. 반면에 중국과 러시아는 더 이상 북한을 지원할 수 없는 처지다. 북한 핵 보유를 용인할 경우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북한 핵 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바로 턱밑에 있는 미국과 동맹관계인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이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끌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준시장경제화 된 북한의 2천5백만 주민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다. 김정은 체제를 유지할 재정 기반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북한의 선택은 핵을 포기하고 체제유지를 보장받으면서 완만한 개혁 개방의 길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쿠바, 베트남의 모델이 최선이다. 북한 핵이 해결되고 북미수교와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북한경제는 대전환을 맞게 된다. 우선 북한은 일본으로부터 국토 침탈로 인한 피해를 보상(대일청구권자금)받을 수 있다. 경제개발의 종자돈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핵을 포기한 보상차원에서 한국과 미국, 유엔 등 국제기구로부터 받을 수 있는 다양한 경제 지원으로 대도약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현재 북한 경제는 중국의 자본에 의한 자원의 식민지화 체제로 전락하였다. 한국과 미국, 일본이 참여하는 북한경제 협력구도는 동북아에 새로운 경제 생태계를 탄생시킬 것이다. 자원과 노동을 수탈 당하는 구조에서 선진화된 글로벌 분업체제의 생태계로 북한 제조업이 편입되게 된다. 선진국 자유시장경제가 주는 다양하고 새로운 첨단산업과 기술을 이전 받을 수 있다. 짧은 기간에 가난의 굴레를 벗는 장미빛 미래가 확실하다. 북한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정기 목사 기자2018-03-15

지금 대한민국은 미투운동으로 시끌시끌하다. 거기다가 미투운동을 지지하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한 정치인이 성폭행의 가해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을 멘붕에 빠뜨렸다. 그는 성폭행이 폭로되기 11시간 전, 도청 직원들 500명을 대상으로 30분 동안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리고 박수 갈채를 받았다. 어쩌면 이렇게 이중적일 수 있을까? 그래서 '이중 인격의 끝판왕'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우리는 진짜와 가짜, 진품과 짝퉁의 구분이 어려운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서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가장 구별하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그 속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생겨났을까. 진심인지 아닌지, 사람 마음의 진위를 가늠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프랑스 속담에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표현이 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 언덕 너머에서 달려오고 있는 물체가 내가 기르던 개인지 아니면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별이 안되는 상황을 빗대는 속담이다. 진짜와 가짜가 뒤엉켜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지금의 대한민국을 묘사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과연 누가 개이고 누가 늑대일까?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일까? 출가(出家)와 가출(家出)은 한문으로 보면 글자 순서만 바뀌었지 둘 다 똑같이 집을 나간다는 뜻이다. 비슷한 것 같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왜 출가는 복되게 보이고, 가출은 어리석게 보일까? 그것은‘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집을 떠나면 출가가 되고, 목적도 없이 현실을 피하려고 집을 나가면 가출이 된다. 세상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것이 참으로 많다. 다이아몬드와 큐빅은 비슷하게 생겨서 얼른 보기에는 구별이 잘 안된다. 그러나 가격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곡식과 가라지도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알곡은 곳간에 들어가지만 가라지는 불에 태워진다. 양과 염소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심판 때가 되면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 편에 서게 된다. 겉으로는 비슷하나 본질은 완전히 다른 가짜를 사이비라고 한다. 좋은 것일수록 가짜가 많다. 그래서 사이비 의사가 있고, 사이비 종교가 있다. 그런데 때로는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기도 해서 구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이비의 생명은 짧다. 유통기한이 그리 길지 않다. 언젠가는 그 실체가 탄로 나고 만다. 어떤 사람이 위폐 감별사에게 물었다. ‘요즘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위폐가 많다고 하던데 어떻게 구별하나요.’감별사가 대답했다. "진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가짜를 걸러내려면 진짜를 잘 알아야 합니다. 너무 화려하면 일단 수상한 지폐로 분류합니다. 위폐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꾸민 흔적이 역력하지요.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필요 이상으로 화려합니다. 진짜는 안 그래요. 진짜 지폐는 자연스러워요.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으니까요."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모든 종교가 거기서 거기요 큰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종교는 다 같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남의 종교를 깎아 내리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의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요14: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4:12> 로마 가톨릭과 우리 개신교회는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무슬림들이 말하는 알라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만 받으셨다. 죽음도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과 그리스도 없이 죽은 사람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시편 116장 15절에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했다. 부활도 그렇다. 예수 믿고 죽은 사람들만 부활하는 것 아니다. 누구나 부활한다. 요한복음 5장 29절의 말씀처럼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영생도 그렇다.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만 부활하여 영생하는 것 아니다. 악인이나 의인이나 모두 영원히 사는 것은 같다. 그러나 영원한 형벌, 영원한 심판을 어떻게 영생이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마25:46절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지만, 악인들은 영벌에 들어가리라고 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예수 믿은 사람들은 천국에서 영원이 살지만,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에서 영원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개와 늑대의 시간’속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구별할 줄 아는 지혜이다. 속지 말자. 하나님 앞에서 살자. 하나님 의식하고 눈치 보며 살자. 결국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하는 것이다. <시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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