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훈 소장 기자2017-05-08

가족은 영화와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코드이다. 굳이 가족이 중심 서사가 아니라도 영화 속에 가족은 늘 이야기의 중심이다. 액션영화(용의자)에서도, 재난영화(판도라)에서도, 코미디(아빠는 딸)에서도, 심지어 좀비영화(부산행) 속에서도 말이다. 진한 가족애를 다룬 영화는 이전부터 지금까지 흥행 영화들의 키워드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한국 영화는 이상한 가족의 풍경을 그린 영화들이 많이 개봉했다. 연애와 결혼이 분리된 새로운 풍속도를 그린 <결혼은 미친 짓이다>, 중산층 가족 관계의 붕괴를 드러낸 <바람난 가족>, 일부일처 제도의 파격적 해체를 상상한 <아내가 결혼했다>, 사회적 붕괴로 온 가족이 할머니에게 붙어사는 <고령화가족> 등이 그 예다. 이런 영화들이 그려낸 가족은 분명 근대화 이후 표준화된 소위 ‘핵가족’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심장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다. 가족은 역사 속에 늘 진화해온 것이었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의 제목이 말해 주듯 인류는 역사 속에 늘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탄생’시켜 왔다. 흔히 ‘가족 같은 공동체’란 말을 하곤 한다. 가족은 모든 공동체의 가장 이상적 모습을 반영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가족은 공동체의 이상적 모습으로 비유된다. 서로가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호칭은 그 대표적 일례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그 가족은 상당부분 붕괴되었다. 그러니 가족 같은 공동체가 가당키나 하겠나? 오히려 가족 구성원끼리도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을 것을 강요받는 지경이니 말이다. 각자도생 개인주의 속에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의 성과로 인정받는다. 이는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믿음의 가족은 근대가족 붕괴의 시대 속에 어떻게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어가야 할까? 새로운 가족 개념을 보여주는 한 영화를 소개하겠다. 작년에 개봉해 조용하게 화제가 된 영화 <캡틴 판타스틱>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여섯 자녀들에게 세상의 교육제도와 가치를 부정하고 자연 속에 산다. 여기에서 칼 한 자루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능력과 체력을 키우고,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독서와 (당혹스럽게도 세세한) 토론을 통해 또래보다 월등한 지식과 가치관을 심어준다. 이런 가족이 과연 현실 속에 가능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이 가족이 현실과 사회 속의 충돌과 갈등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은 이 아버지를 아동학대로 몰아가고, 이로 인해 끈끈했던 가족관계가 분열되는 위기도 겪는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 가족 구성원들이 지혜로운 고집과 타협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공동체 같은 가족’이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늘의 가족은 시대 풍조를 쫒으며 붕괴되고 있다. 자본은 사랑이나 가족의 개념마저 불손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을 드러낸다. 친구가 연인보다 더 나은 점은 무엇일까? 친구는 오래될수록 삶의 서사가 풍성해지고 관계가 더 깊어지지만, 연애는 시간이 지나며 권태에 빠지곤 한다. 친구관계가 갖는 위대한 힘은 같이 놀고, 같이 일하고,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삶의 서사를 공유하는 것에 있다. 새로운 가족은 공통된 가치와 삶의 서사를 나누는 우정과 동지의식을 통한 공동체 모델에서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캡틴 판타스틱>은 바로 그런 공동체적 가족의 모델의 영감을 선물한 인상 깊은 영화다. 김정운 교수는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 한다>에서 자신이 아내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한 비결이 바로 가족 ‘리츄얼’(Ritual)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리츄얼, 즉 종교적 의식은 단순히 전통적인 가족예배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김정운 교수에게 그것은 커피와 함께 듣는 베토벤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리츄얼을 구별한다. 그는 말한다. 그것이 가족을 지키는 힘이었다고. 오늘날 가족의 붕괴를 말하기 시작한 그 때에 우리네 가족은 바쁜 일상을 핑계로 리츄얼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비싼 선물과 회식이나 이벤트가 아니라, 같이 나눌 수 있는 공통의 삶의 서사와 구별된 가족 리츄얼 말이다.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 하니 한 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고마와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5월이 되면 많은 교회가 이 찬송을 부른다. 믿음의 가족은 그저 같은 종교를 가진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눌 믿음의 서사와 리츄얼이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가족의 달’이라고들 하는 5월에 의무감에 치르는 이벤트가 아니라 가족 ‘리츄얼’을 함께 만들어보면 어떨까?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같은 취미를 공유한 친구들과 같이 수다 떨며 그 일을 같이 행할 때였던 것 같다. 가족 간에도 이런 공통 관심과 취미가 있어야 한다. 같은 책을, 같은 영화를, 같은 음악을 나누고, 함께 봉사도 하고, 음식을 먹고, 더 나아가 그것에 대해 솔직하게 토론(?)하는 활동에서 우리 가족은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 내가 꿈꾸는 가족은 바로 그런 ‘공동체’다.

이민규 교수 기자2017-05-17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폐막식, 전 세계에 실황이 중계되는 상황에서 너무나 창피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기자가 발언하고자 손을 들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기자가 질문하는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긴 침묵 속에 오바마 대통령은 “통역을 써도 좋으니 질문하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민망한 상황이 돼버린 것이지요. 결국, 발언권은 중국 기자에게 돌아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떨까요? “믿어라, 믿어라, 믿어라” 하는 말에 너무 익숙해서 그런지, 질문하는 것을 신앙이 없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튀지 마라”, “침묵이 금이다”라는 속담을 철석같이 믿어서 그런지, 질문하면 오히려 무안을 당하기 일쑤지요. 물론 성경을 대하는 태도에서 '의심'과 '의문'은 구분해야 합니다. 필자가 말하는 의심이란 무조건 부정하려는 태도이고, 의문은 더 자세히 더 정확하게 알려고 던지는 질문입니다. 정말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혹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알아보려는 간절한 자세입니다. 의문은 성경적 자세입니다. 사도바울이 베뢰아에 갔을 때,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했습니다(사도행전 17장 11절). 의문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습니다. 의문이 강하면 날카로운 질문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원래 명마는 야생마가 길들어져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야생성이 없이는 깊이 있는 사유가 나올 수 없습니다. 또한, 혼자서만 성경을 읽고 건설적인 토론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성경 읽기는 주관성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토론은 사도바울이 추구한, 성경에서 말하는 교육방식입니다. “바울은 늘 하던 대로 유다인들의 모임에 가서 세 주간에 걸쳐 안식일마다 성서를 놓고 토론하였다”(사도행전 17장 2절). 여기서 '토론하였다'는 헬라어로 디아렉타이, 즉 토론하다 혹은 사유하다의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기 위해 질문하고 토론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하고 있을 뿐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아는 것'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을 구별하는 능력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합니다. 질문과 토론은 메타인지를 키웁니다. 제대로 알게 하고 확실하게 알게 합니다. 성경에서도 '영생'을 위해서는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내용도 제대로 모르고 앵무새처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이해한 상태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기노스코진)이니이다"(요한복음 17장 3절). 신앙인들이 성경을 잘 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읽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요. 하지만 실제 이유는 성경이 “재미가 없어서”라고들 합니다. 저는 신앙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질문을 많이 던지고 토론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하고 토론하면 생각하는 즐거움이 나타나고 성경 곳곳에서 확인하거나 해법을 찾으려는 습관이 들고, 자기 생각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더욱 깊은 이해를 얻게 됩니다.

신정현 관장 기자2017-05-19

분단 이후 보수세력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상식적인 국가’라는 인식이었다. 그로 인해 대북정책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거나 북한의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압박 및 고립시키는 전략으로 대변되었다. 북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된 세력이 남북대화를 반대하는 논리는 북한은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 즉 비상식적인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진실일까? 맞지만 틀린 이야기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대화가 없는 상대는 비상식적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잠재적 적국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그래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내가 원하는 것을 알림으로 오해와 오판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는 외교의 상대를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나 지난 9년 동안 우리는 땅을 접하고 있는 상대국가와 극단적인 단절을 경험했다. 9년 내내 외쳐왔던 '전략적 인내', '원칙 있는 남북관계'는 결국 남북관계에 있어서 치명적인 오해와 오판을 불러일으켰다.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포격사건, 3차 핵실험, 미사일 발사실험 등 탈냉전 이후 가장 많은 군사적 도발이 일어났고 2010년 5.24조치 이후 지금까지 남북관계는 얼음장 같은 경색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소위 제3기민주정부를 맞이하였다. 앞선 제1기민주정부와 제2기민주정부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통해 전환기적 남북관계를 실현시켰다. 이는 지난 세월 반복되었던 남북관계에 대한 정치적 수사가 아닌, 실현가능한 것부터 실천하여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자는 실천적 통일방안으로써 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고립과 봉쇄, 압박과 제재는 상식적인 상대를 비상식적 상대로 바꿔버린다. 따라서 대화와 교류, 협력은 상호 간의 오해와 오판을 줄이고 비상식적인 상대를 상식적으로 만들 수 있다. 노무현 정부 5년의 기간 동안 단 한차례도 '대남군사도발'이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북미 간의 갈등에 의한 북한의 도발은 미국의 대북제제에 의한 것으로서 남북갈등에 의한 대남도발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북미 간 갈등의 상황에서 남한이 중재자로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지 일주일이 지났다. 제3기민주정부를 자청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요청한다. 김대중 정부로부터 이어져 온 '6.15공동선언'의 정신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 간의 화해와 협력은 통일의 당사자가 나누는 '대화와 협력'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만일 남북 간 공개적인 소통이 불편하다고 판단된다면 비공개 대화 창구를 복구하여 서로의 입장을 오판하지 않도록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지난 9년의 시간동안 이어져 왔던 남북관계의 갈등을 관리하고 이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2017년은 우리 국민들에게 특별한 해가 아닐 수 없다.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 적폐세력의 민낯을 드러내고 부패한 권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부패한 권력과 손을 잡았던 적폐세력은 한반도의 냉전체제에서 기득권을 유지해 왔기에 선거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재인 정부를 향해 빨갱이, 종북 세력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정부 1기와 2기에서 확인했듯이 경제적 협력과 문화적 공감의 확대는 남북 간의 정치적 오판을 줄이고 남남갈등을 줄여나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나는 올해가 가기 전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별개로 북한과의 대화를 열어가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남북 간의 신뢰가 회복되는 시점에 이르러 개성공단의 공장이 다시 가동되고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어 더 많은 국민들이 북한을 방문하게 되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화가 없는 상대는 비상식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는 남북대화의 채널을 총동원하여 보다 많은 대화와 협력을 이뤄냄으로써 제1기 민주정부부터 추구했던 ‘사실상의 통일’을 실현시켜 내기를 희망한다. *본 칼럼은 평통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통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안용준 목사 기자2017-05-08

루터의 종교개혁을 향한 진리의 횃불 1513년 이후 루터의 비텐베르크대학 신학부에서 행한 시편과 로마서의 강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을 뿐 아니라, 문화 예술에 관한 ‘성경적 비전’을 열어주었다. 이와 관련 루터의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의 판매는 성상숭배에 관한 이미지의 문 제와 시기적으로 중첩돼 혼란한 사회의 자화상을 연출하면서 보다 확대됐다. 급기야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Ⅱ, 1503~13)는 일을 내고야 만다. 로마에서 성 베드로 성당을 새로 짓는 데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완전 면죄부’를 공고했던 것이다. 그의 후계자인 교황 레오 10세는 이 일을 확대 계승했다. 이탈리아 메디치(Medici)가 출신인 레오 10세는 자신의 가문에서 익힌 상업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의 위세는 독일의 막데부르크(Magdeburg)와 마인츠(Mainz)에서도 이어졌다. 1515년 3월 31일 그는 지역의 대주교인 알브레히트에게 마인츠, 막데브르크, 란덴브르크에서 성 베드로 성당 신축을 위한 ‘완전 면죄부’를 8년간 판매할 수 있다고 허가했다. 실제로 ‘완전 면죄부’는 교황이 직접 제시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죄에 관계했다. 이 면죄부를 판매할 동안에는 다른 모든 면죄부는 폐지됐다. 이 면죄부에 대한 설교 때문에 다른 모든 설교는 중단되어야 했다. 이 면죄부에 대한 방해는 법으로 금지됐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 또 있었다. 도미니크 소속의 수도사, 테젤(Johann Tetzel, 대략 1465-1519)이다. 그는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교황의 면죄부를 선전하고 다니고 있는 터였다. 그의 설교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은 연보궤 앞으로 나아가 헌금을 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이때 받은 면죄부는 천국으로 가는 통행증이 되는 거다.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에 이러한 의식을 매우 고상하고 의미 있게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해갔다. 드디어 1517년 4월 테첼은 삭소니 선제국(Elektorat Saxony) 경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수많은 비텐베르크 시민들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그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 일은 루터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즉시 여러 주교들에게 이 일을 중지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면죄부를 향한 태도를 95개 조항으로 조목조목 정리했다. 원래 이 논제는 세상에 공포하려는 의도나 계획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먼저 지역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하려고 했다. 그래서 정리한 글을 브란덴부르그의 주교 제롬과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발송했다. 이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 교회(Schloβkirche)의 정문에 격문을 붙이게 되었다. 한 젊은 수도사의 진리를 향한 열정은 한층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행동의 결과에 놀란 이는 다름 아닌 루터 자신이었다. 이에 대한 반응이 의외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보름 만에 온 독일로 신속히 펴졌으며, 6주 후에는 온 유럽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면죄부의 부당성에 대하여 온 세상이 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루터의 외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됐다.

이만열 교수 기자2017-05-04

선거 때만 되면 ‘대북 퍼주기’ 거짓 선전은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이번 대선 때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는 대선후보 토론에서 두 차례나 걸고 넘어졌고, 새누리당의 조원진 후보도 극우 보수답게 이 문제로 악을 썼다. 아무리 북한이 없으면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보수라고 하지만, 선거 때만 되면 과장된 선동을 통해 민심을 고혹하는 것은 대선 후보로 나온 정치인이 할 짓거리는 아니다. ‘대북 퍼주기’의 골자는 과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에 현금 등을 퍼주었기 때문에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지금의 북핵 위기를 조성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북한의 김정일은 남한으로부터 받은 돈을 비축하여 핵무기를 개발했고, 2006년 10월 9일에 제 1차 핵실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북 퍼주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수정권(이명박ㆍ박근혜) 때에 네 번이나 핵실험을 하여 핵을 고도화 경량화 일상화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들은 첫 핵실험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비용에는 별로 문제를 삼지 않으려는 자세다. 때문에 북한이 핵 무기를 개발하게 된 것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 퍼주기를 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인지 그 여부를 따져 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 정확한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이 선동이 그럴 듯하게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김영삼 정부로부터 박근혜 정부 때까지 북한과의 거래비용이 얼마나 들었는가를 살펴보자. 2017년 통일부에서 발표한 ‘각 정부 별 대북 송금 및 현물 제공 내역’은 다음과 같다. 구 분 정부차원 민간차원 총계 현금 현물 현금 현물 김영삼 정부 - 26,172 93,619 2,236 122,027 김대중 정부 - 52,476 170,455 24,134 247,065 노무현 정부 40 171,621 220,898 43,073 435,632 이명박 정부 - 16,864 167,942 12,839 197,645 박근혜 정부 - 5,985 25,494 2,248 33,727 (단위: 만 달러) 이 표에 의하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 북한에 들어간 금액은 현금과 현물을 합쳐 682,697만 달러이고, 이명박ㆍ박근혜 정부 때에는 231,372만 달러다. 김?노 정부에 비해 이?박 정부의 지원액은 거의 5배가 넘는 것 같지만,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 이후 민간지원이 중단되었고 ‘개성공단 폐쇄’로 대북지원이 중지된 것을 감안하면 큰 차이라고 할 수 없다. 유의해 볼 것은 이 통계가 정부와 민간의 것, 또 현금과 현물이 합쳐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대 정권에서 정부가 직접 현금을 지불한 것은 노무현 정부 때의 40만 달러 밖에 없다. 그것도 이산가족 화상 상봉을 위해 그 센터를 건립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위의 통계에서 보았듯이 정부와 민간의 현금 및 현물 지원 중 정부의 현금 지원은 40만 달러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홍 후보는 4월 23일 토론에서 "DJ·노무현 정부 시절에 70억 달러를 북한에 돈을 줬기 때문에 그 돈이 핵이 돼서 돌아온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홍준표 후보가 4월 19일 토론 때에 노무현 정부에서 현금과 현물 합쳐서 도합 44억 달러 정도가 넘어갔다고 지적한 것은 틀린 것 같지는 않지만, 현금 70억 달러를 북한에 주었다는 발언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 동안 보수우익들이 'DJ 노무현 정권이 북한에 퍼주기 한 것이 핵이 되어 돌아왔다고 주장한 것은, 홍 후보에게서 보이는 바와 같은, 이런 잘못된 팩트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현금 지불과 관련,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금강산ㆍ개성 관광, 교역ㆍ위탁ㆍ가공, 개성공단 등으로 이는 정부가 전달한 것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일종의 '거래'였다.” 거래는 서로간의 소통과 이익을 전제로 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개성공단을 조성할 때 민간 차원에서 임금 및 통신비 등의 명목으로 4,131만 달러가 전달된 적이 있지만, “조업이 한창이던 이명박 정부 때는 이 금액이 2억 7,629억 달러로 늘어났다.” 선동가들이 김대중 노무현 때에 민간 차원에서 대북 거래액을 대북 퍼주기에 넣어서 계산했다면, 이는 전혀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최근 SBS 뉴스의 박세용 기자가 발표한 기사에 주목한다. 박 기자는 최근 (2017.04.25)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그는 2010년 10월 5일자 KBS와 조선일보 및 2013년 1월 7일자 서울신문에 보도되었으며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이 발표”한 <역대정권 대북 송금액>(자료: 통일부)을 소개했다. 그 통계는 노무현 정부 때의 '대북 송금액'보다 이명박 정부 때의 '대북 송금액'이 많았다고 적었다. 박 기자는 그 당시(2010, 2013)에는 그런 “데이터가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하면서, “이건 앞서 말씀 드린 현물과 현금의 총액이 아니라, 현금 즉 '대북 송금액'을 말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박 기자가 <2010년, 2013년 데이터로 제작된 그래프>에 제시한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역대 정권에서 북한을 지원한 것은 김영삼 정부 4조원(36억 달러), 김대중 정부 1조 5,500억 원(13억 4,500만 달러), 노무현 정부 1조 6,200억 원(14억 1,000만 달러) 그리고 이명박 정부 1조 9,200억 원(16억 8천 달라)이다. 그런데 그 뒤 2017년 자료에는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의 경우를 들어 2010년 자료와 2017년 자료에 나타난 송금액을 비교하여 이렇게 명시했다. * 2010년 통일부 자료 13억 4,500만 달러 [세부 항목: 금강산 관광 대금 4억 2천만 + 교역 대금 4억7,600만 + 현대의 사업 대가 4억 5천만 = 13억 4,500만 달러] * 2017년 통일부 자료 17억 달러 [세부 항목: 관광 4억 2천만 + 교역, 위탁가공 등 8억 3천만 + 기타(사업권, 이용료 등) 4억 5천만 = 17억 달러] 위의 자료는 2017년 집계가 2010년 때보다 4억 달라가 늘어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박 기자는 “작년까지만 해도 ‘이명박 정부의 대북 송금액이 김대중 정부 때보다 많았다’는 주장이 사실인 줄 알았는데, 올해는 갑자기 거짓이 되어 버린 겁니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통일부로부터는 그 액수가 왜 달라졌는가를 명확하게 설명 받지 못했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 때만 4억 달러가 늘어난 것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송금액도 2017년 통계는 2010년 통계보다 6억 달러 정도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명박 정부의 대북 송금액이 노무현 정부 때보다 많았다’고 주장하는 게 사실”이었고 그래서 후보 토론에서도 문재인 후보가 그런 점을 지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실과 다른 발언”을 한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뀌어진 것을 두고 박 기자는 “7년 만에 사실과 거짓이 바뀌었습니다”고 폭로했다. 2010년 통계에는 김영삼 정부 때 36억 달라가 지원되었다고 했는데 2017년도 자료에 9,300만 달러로 집계되었다는 것도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당시 제네바 협약에 의하여 함경남도 신포에 건설하던 경수로발전소 비용을 부담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통계에서 그걸 삭감하는 것은 속임수로 보인다. 정부의 통계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이 바뀌어지고 들축날축해지면 국가의 공신력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우리 정부는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김영삼 정부 때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대북 송금과 지원을 통일부 자료를 중심으로 살폈다. 이를 통해 보수우익들이 주장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 ‘대북 퍼주기’가 [현금으로] 70억 달러에 달했다”는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았다. 꼭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에 정부와 민간이 합하여 현금과 현물 68억 2,698만 달러를 북으로 보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김영삼 이명박 정부 때도 그 못지 않게 대북지원을 했다는 것을 밝혀야 할 것이다. 보수우익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그렇게 들어간 현금과 현물은 남북관계를 안정시켰고 평화통일의 가능성도 확인시켜 주었다. 북한에 들어간 만큼 우리도 이득을 보았다. 개성 공단을 통해 남북이 윈윈하는 시범을 보여주었고, 우리 중소기업에 큰 혜택을 주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정리하는 데에 동의한다면, 보수우익들이 주장하는 ’대북 퍼주기‘라는 말 자체가 허구이며, 나아가 그 지원이 핵 개발자금으로 전용되었다는 주장 또한 증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의문이 남는다. 그러면 북한은 무슨 돈으로 핵을 개발했을까. 필자는 최근에 북한이 무기수출을 통해 매년 10억 달러씩 벌어 쓰고 있다는 ‘2005년도 미국 의회조사국의 보고서’를 소개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글을 본 적이 있다. 2006년, 7월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10월에 핵실험을 한 북한을 상대로 미국은 북미간에 핵실험 중지 협상을 벌였다. 그 때 미사일을 쏘지 말라는 미국을 향해 북한은 “그걸로 장사한다”고 하면서 미사일 발사는 “미사일을 팔기 위한 일종의 ‘판촉활동’이라는 식으로” 설명했단다. 그 협상을 통해 미국은 미사일 발사 유예를 조건으로 3년간 10억 달러의 식량지원을 하겠다면서 2007년의 ‘2.13합의’를 끌어냈다. 이 때 미국은 북한의 군수공업위원회가 매년 10억 달러씩 벌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 비용과 관련, 정 전 장관은 북한의 군수공업위원회가 벌어들이는 바로 이런 돈에 주목했던 것이다. *본 칼럼은 평통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통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조종건 사무총장 기자2017-05-02

탄핵 후 60일 이내에 대통령후보를 국민이 검증하고 투표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기간이 19대보다 훨씬 길었지만 대통령 탄핵 후 그 결과를 보니 검증이란 참으로 힘겨운 과제다. 지난 4월 21일까지 적발된 가짜뉴스가 18대 선거기간 전체의 3배를 넘어설 정도니 더욱 혼란스럽다. 후보들의 정책 검증도 쉽지 않지만 믿을만한 인물인지를 검증하기는 더욱 어렵다. 당선 가능한 후보냐, 공감하는 정책 투표냐를 놓고 유권자들은 저울질을 하고 있다. 짧은 선거기간에 유권자들이 자신의 정치신념을 반영하려면 각 후보의 핵심공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공성에서의 거짓말 퇴출, 세금정책 혁신, 국민중심 현장정치를 각 후보의 공약에서 확인하고 투표해야 한다. 공공성에서의 거짓말 퇴출 412쪽으로 된 박근혜를 위한 새누리당 정책공약집 <세상을 바꾸는 약속 책임 있는 변화>을 보면, 다음과 같은 공약들이 나온다. “우리 청소년 모두가 소중한 주인공입니다.” “꿈과 열정을 지닌 청년들이 마음껏 활약합니다.” “소상공인이 활짝 웃을 수 있도록 골목상권이 살아납니다.” “집주인도 세입자도 집 걱정, 대출상환 걱정 없는 세상이 옵니다.” “단 한 사람의 국민도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공정하고 엄격한 법 집행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고등학교 “2014년부터 매년 25%씩 확대하여 2017년에 전면 무상교육 실시.” 그러나 그녀는 이런 공약을 몇 퍼센트나 실천했을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거짓의 탈이다. 검찰과 법원의 판검사가 이권을 위해 양심을 파는 행위보다 더한 것은 거짓이다. 이권으로 인한 언론사의 무책임성보다 더 심한 것 역시 거짓이다. 법정에서조차 위증과 증거인멸죄로 1심에 접수된 사건이 2001년 836건에서 2010년 1,625건이다. 2003년 한국의 위증은 일본의 16배, 무고는 39배, 사기는 26배나 많다. 경찰서를 방문해 보라. 억울한 서민이 고발해도 사기 성립이 거의 불가능함을! 이런 상황이니 거짓말이 한국을 사기사회로 만든다. 최소한 특검이나 청문회와 같은 공공영역에서 거짓말이 불가능하도록 처벌을 강화할 수 있는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 세금정책 혁신 세금 종류는 20개가 넘는다. 국민은 피눈물 섞인 월급의 일부를 세금으로 낸다. 물건 구매의 10%를 세금으로 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다수 서민에 대한 차별과 노예의 삶 아닌가. 고속 열차를 만들어도 서민은 주요 고객일 수 없고, 지역상권 주변 도로를 세금으로 개선하거나 편도 1차선에서 2, 3, 4차선으로 확장해도 건물소유주나 토지소유자의 부를 더할 뿐이다. 정부는 재벌에게 연구개발비 명목으로 국민의 세금을 나누어 주고 재벌은 수백조 원이나 사내유보금으로 싸놓고 있는데도 중소기업, 지역상권, 재래시장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상위 10% 사람들이 부동산 84%를 가지고 있는 나라, 50% 이상의 국민은 한 평의 땅도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 아닌가. 다수 서민에게 값싼 중고교복과 체육복을 위한 교복은행의 필요성은 넘치건만 교복은행 임대료는 자원봉사자의 몫인 세상이 대한민국이다. 국민중심 현장정치 다수의 국민이 지옥의 삶을 살고 있다. 직장인 열 명 중 네 명의 월급이 200만 원이 채 안 되는데, 월세가 50만 원이라면 자녀 양육비, 재수생비용, 대학등록금, 의료비, 생활비에 노후 대비가 가능하겠는가. 2016년 월세로 사는 이들이 10명 중 6명 정도다. 또 자영업자들은 상가 임대료에 질식한다. 연 9% 이상 올릴 수 없는 것이 상가임대차보호법 아닌가. 그러나 1년 만에 임대료의 45%가 오른 상가도 있다. 2016년 5월 25%, 2017년 4월 20%나 올랐다. 상가임대차보호법 때문에 임대 3, 4년차에 임차인은 임대료 폭탄을 맞는다. 임대인과의 갈등은 6년차 임대 갱신 불가와 투자 시설비는 고사하고 원상 복구해야 하는 경제부담도 크다. 임차인은 갑인 임대인의 노예다. 임대료 연 9% 이상 인상분은 임대기간 후 임차인에게 반환되는 법이 있다면 이런 파렴치는 사라질 것이다. 또 유럽 대다수 국가들의 대학 등록금은 무료 또는 한국대학의 10% 이내 수준 아닌가. 주거, 의료, 교육은 국가의 몫이 되어야 국민중심 현장정치가 된다. 새로운 정치의 전환점에 서 있다. 공공 영역에서 거짓말 퇴출, 세금정책의 부조리, 주거와 의료와 교육에서 국민중심 현장정치는 대통령후보 선정 기준의 핵심 아닐까. 특검이나 청문회와 같은 공공 영역에서 거짓말이 불가능하도록 법을 강화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어쩌면 정치의 근간 아닐까. 세금정책을 혁신하고 의료, 교육뿐 아니라 주택 제도를 바꿀 후보를 찾을 때다. 지옥이라고 절규하는 국민의 현장으로 들어가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대통령은 누굴까. 푸른 5월에 이 세 가지 과제를 갖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과거의 적폐를 해결하고자 하는 역사의 통찰력을 가진 후보를 선별하는 작업은 유권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홍성현 목사 기자2017-04-30

서기 1949년 중국에서의 모택동의 공산주의 혁명 이후에도 기독교는 증국 안에서 계속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기 635년에 기독교의 한 종파였던 경교의 선교사 알로펜이 성경을 들고 중국 땅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하기 시작한 이후 거의 1300여 년을 지나가고 있을 때에,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앞세운 모택동에 의하여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로 바뀌었는데 그때 중국의 기독교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 혹시라도 중국의 기독교가 모택동의 공산주의를 만남에서 우리나라 북반도의 교회에서처럼 목사들과 성도들이 순교당하고 교회들이 거의 다 문을 닫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중국의 기독교는 공산주의 정권 아래에서 계속 살아남았다.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고, 매 주일 자기들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반도에서는 해방 직후에 평양에 입성한 공산주의 정권의 극심한 교회 핍박으로 인하여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남으로 피난하였다. 그때 북의 고향을 떠난 많은 실향민들이 속히 북의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교회당을 다시 회복하고 싶어서 날마다 기도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필자는 중국에서는 어떻게 교회가 살아남았는가를 알기 위하여 중국의 삼자교회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교회가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많은 목회자들이 양산되고, 많은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그들의 조국 중국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도 살아남아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중국 교회를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우리 북반도의 공산주의 정권과의 평화적인 만남의 길을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린 북에서 온 목회자들과 성도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지난날의 억울함을 뒤로하고, 미래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북의 공산주의자들을 만나야 하기에 중국교회 목사들과 성도들이 모택동의 공산주의자들을 만나서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5년에 외세에 의하여 38도 선이 한반도 한 가운데에 그어지고, 한반도가 반쪽으로 쪼개져서, 남 반도는 미국의 자본주의 정책을 받아드려서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기독교의 성장을 이룩하였지만, 북 반도는 사회주의 정권이 지배하면서 기존의 북의 교회들이 거의 박멸되었다. 북에서는 지금도 기독교가 자유롭게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북에 교회와 예배처가 몇 곳 있다고는 하지만, 지난날의 그 번창하던 평양이나 신의주의 교회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나 초라하기 그지없다. 속한 시일 안에 남북이 하나 되어 북에도 자유로운 복음 전파가 가능해져서 기독인들이 자유롭게 예배하고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날이 속히 오게 하기 위하여 중국 삼자애국교회의 역사를 꼭 배워야 한다. 북의 교회를 되살려내기 위해서 우선은 북의 사회주의 체제에 적응하여 살던 북의 교우들을 이해하고 감싸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반도의 통일을 위하여 사회주의에 오랫동안 물든 북의 동족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에 사는 동족들의 생각과 마음을 올바로 읽어내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오랫동안 사회주의 정권 안에서 살고 있는 북의 동포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모택동 정권을 받아드린 중국의 삼자교회 기독인들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모택동 사회주의 혁명 당시에 중국의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팅주교와 오요종 같은 목회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택동의 사회주의에 기초한 정책들을 환영하고 받아드렸다. 가난하고 멸시 받던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던 모택동의 사회 정책을 적극적으로 환영하였다. 과거 외국의 헌금이나 부자들의 재물에 의존하던 교회의 모습을 탈피하여 가난한 농민들을 우선시 하는 모택동 정권에 적극 협력함에서 중국의 삼자애국교회는 중국의 민중을 위한 교회로 거듭났던 것이다. 오요종 목사는 초월에 편향된 서구신학에서 기독교의 비극을 보고 “영혼의 구원”이라는 초월성에만 집착할 때 사회와 정치에서 초월되고 그리고 반동적 정치에 이용당한다고 설교했다. 교회가 사회와 정치에 참여할 때 기독교의 참 신앙이 구체적으로 민중의 삶과 연결되고 그때 예수의 십자가가 확실하게 사회 속에 재생되어진다고 오요종은 설교했다. 이제 우리 남한의 기독교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중국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배워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운동에 앞장 설 수 있기를 바란다. *본 칼럼은 평통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통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이효상 원장 기자2017-04-25

문화재청은 지난 20일 존 번연의 천로역정(합질) 게일 선교사 번역 초판본 2종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천로역정(天路歷程,ThePilgrim's Progress)>은 영국의 청교도 작가 존 번연(1628∼1688)의 소설로 1678년 초판이 나왔다. 꿈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를 풀어낸 책으로, ‘기독도’라는 남자가 ‘장차 멸망할 도시(장망성)’를 떠나 ‘천성’을 향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크리스천이 인생의 여정에서 욕망과 싸우며 사탄의 도전 앞에서 거룩함을 이뤄간다는 이야기로, 구원과 성화의 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 존 번연(John Bunyan) 저자 존 번연 (John Bunyan)은 1628년 11월 영국 베드포드의 엘스토에서 태어났다. 번연의 아버지는 떠돌이 땜장이로 가난하게 살았고 자식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시키지 못했다. 번연은 겨우 쓰고 읽는 정도를 배웠을 뿐이다. 그러나 독서를 좋아하여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책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특히 성경을 탐독하였고 존 폭스의 <순교자>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번연은 감수성이 강하고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1644년 번연이 16세일 때 6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7월에 동생 마거릿이 죽었다. 8월에는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데려왔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번연은 난폭하고 사나운 동네의 골목대장이 되었다. 1644년부터 1647년까지는 찰스1세 왕당군에 대항하는 크롬웰의 의회군에 징집되어 3년간의 군대생활을 하였다. 크롬웰의 철기병대는 전장에서나 막사에서나 고도로 엄격한 훈련을 받았으며 노름도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촌락에 접근해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군 생활에서 청교도 교리를 접할 수 있었고 크롬웰군이 가진 경건한 신앙생활에 큰 감명을 받았다. 제대 후 1649년 마리아라고 하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책 2권을 결혼선물로 가지고 왔다.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길>과 <경건의 훈련>이다. 이 책을 통해서 번연은 쉽고 친숙한 격언을 가지고서도 통렬한 표현을 할 수 있으며 대화체 형식의 글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리아는 거친 번연을 인내와 섬김으로 받들었고 약점을 공격하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충고해서 스스로 깨닫게 도왔다. 1650~55년까지는 번연의 신앙이 점진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번연의 일생에 중요한 영적 선생인 존 기포드 목사도 이때 알게 되었다. 1653년 번연은 성요한 교회의 정규회원이 되어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하였다. 그 해 아내인 마리아가 사망하였다. 1659년 번연은 둘째 아내로 엘리자벳을 맞이하였다. 기포드 목사가 죽은 후 번연은 설교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1660년 찰스2세의 왕정복고로 청교도 전성시대가 끝나고 성공회를 영국의 유일한 국교로 복귀시켰으며 비국교도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축출하였다. 번연은 비국교도로 성직을 받지 못하였으나 설교를 계속하였으므로 설교금지령을 위반하여 12년 (1660~72)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1672년 찰스2세가 비국교도들에 대한 종교관용을 선포하여 번연은 5월 석방되었다. 출감 즉시 번연은 베드포드의 비국교도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1675년 다시 박해가 시작되어 6개월간 투옥을 당했는데 이때 <천로역정> 제1부를 집필한 것으로 전해진다. 1678년 천로역정(제1부)이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 때문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어 제임스2세가 번연을 국교도로 모시기 위해 여러 가지 유혹을 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1684년 천로역정 제2부를 출간하여 천로역정을 완성하였다. 1688년 번연은 런던에서 비를 맞고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책 출간과 게일 선교사 천로역정 제1부는 1677년 12월 22일 인쇄가 끝나고 1678년 2월 18일 출판면허를 얻는다. 1677~78년 런던의 폴트리에 있는 피콕 서점의 사장 나타니엘 폰더에 의해 발행되었다. 초판에 이어 같은 해 재판이 간행되었고 생전 11판을 내는 동안 상당한 내용증보가 이루어졌다. 천로역정이 서양에서 최초로 번역된 것은 1682년, 네덜란드이다. 그 이후 1685년에는 프랑스, 1703년에는 독일에서 네덜란드판의 중역으로 간행되었다. 동양에서도 네덜란드판의 중역으로 간행되었다. 동양에서는 1853년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영국선교사 번스(W.C.Burns)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역본이 나왔고 이때 서명을 천로역정(天路歷程)으로 지었다. 이후 일본과 한국에서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국내에는 1895년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과 부인 깁슨이 공동 번역해 소개했다. 당시 한글로 번역된 <텬로력뎡>은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가 읽고 감명을 받음으로써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 성결교의 이성봉 목사도 전국을 다니며 천로역정 부흥회를 개최할 정도로 이 책을 높게 평가했다. 이 목사는 ‘멸망의 도시’를 장차 망할 성이란 의미의 ‘장망성’으로 표현했다. 텬로력뎡은 개화기 번역문학의 효시로 국문학사적으로도 당시 한글보급과 한글문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자다. 최초로 번역된 텬로력뎡 초판본은 현대식 인쇄출판을 통해 초기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신앙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5년 초판에 이어 1910년에 나온 재판은 연활자로 인쇄되었는데 기일 목사 역 이창직 교열로 바뀌었으며 장로교서회가 발행했다. 3판은 한국종교서적소책자학회의 발행으로 1919년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었다. 재판과 3판의 삽화는 초판을 축소하여 동판으로 인쇄했으리라고 추정된다. 1920년에 나온 텬료력정 3판 끝에는 ‘본셔의 뎨이편 텬셩려행기가 츌판되었는데 그 내용은 긔독도의 쳐자가 그 남편을 따라 멸망의 셩에서 행한 것이라. 특별히 녀자와 아해의게 자미가 잇슬것이니 한번보시기를 바라옵’이라는 광고가 나와 있다. 텬료력졍 뎨이권은 ‘긔독도 부인 려행록’이라고 부제를 붙여서 1920년 8월 10일 신문관 인쇄 조선 야소교서회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언더우드부인이 번역한 이 책에는 제1부와 화풍이 다른 삽화 10장이 게재되어 있다. 게일과 언더우드 목사 부인의 번역본에 이어 1936년 조선기독교서회에서 오천영의 번역으로 제 1부가 번역되었다. 이 책에는 삽화 10장이 수록되어 있다. 해방 이후 1949년부터 조선기독교서회의 오천영 번역의 재판에 이어 많은 번역본이 현재까지 나오고 있다. <천로역정> 재조명 시급 게일 부부에 의해서 번역된 텬료력뎡 초판본은 한국 기독교 복음전파와 책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희귀본이며, 철저한 연구와 고증이 필요한 책이다. 기독교신앙이 한국에 상륙한 19세기 한국은 열강의 간섭에 국기가 흔들리고 부패와 혼란이 극도에 달하여 민중의 생활이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한 시대에 오늘의 고통과 유혹을 이겨내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 내세의 행복을 접하게 되는 천로역정의 이야기가 이 땅에 소개되었다. 천로역정이 소개되고 130여 년이 넘은 오늘 한국교회는 천성을 향해 건강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기복주의와 개인주의 신앙이 열병처럼 번지고 극심한 자본주의의 유혹 앞에 오염되고 있지는 않은지 묻게 된다. 세계문학사의 불후의 명작으로, 또한 한국기독교 신앙 초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존 번연의 사상과 천로역정에 대한 재조명 작업과 더불어 최초로 번역, 소개한 게일 선교사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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