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구 선교사 2020-09-23

유명 가수들이 자신들을 전혀 모르는 외국의 거리에 가서 오직 노래만으로 관객들을 만나는 <비긴 어게인(Begin Again)>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도 코로나19로 해외로 가지 못하고, 이번 시즌은 한국에서 진행했다. 9명의 유명 가수가 코로나로 지친 국민들을 위해 거리 공연을 펼쳤다. 그런데 총 10회였던 이번 프로그램의 후반부로 갈수록 공연 가수들이 우는 장면이 점점 많아졌다. 공인이자 유명가수들인 만큼 방송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방송 후 인터뷰에서 그들은 “음악을 사랑해서 늘 관객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공연이 취소되고, 모이지 못하게 되니 우리들의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현실에 마음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긴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과 불투명한 미래 전망 때문에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을지가 걱정됐던 것이다. 그들이 가장 많이 울었던 곡은 ‘길’이라는 노래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중략)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라는 가사였다. 이 곡을 듣자니 코로나 시대에 갑작스럽게 사역지에서 철수하거나, 선교지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선교사들이 떠올랐다. 선교사 버전으로 다시 이 곡을 고쳐봤다. “코로나로 선교의 길이 막혀 갑작스러운 철수와 한국생활, 선교지에 있지만 기약 없이 아무 일도 못하는 생활, 하지만 오늘도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그 길을 걷는다. 선교가 분명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길이라고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코로나 시대의 선교사의 삶에는 자신이 없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이 길을 제대로 걸어가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설 수 있을까?” 비긴 어게인에서 우는 가수를 위해 동료 가수들이 노래로 위로해 주었다. ‘촛불하나’라는 곡이다. “지치고 힘들 땐 내게 기대. 언제나 네 곁에 서 있을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내가 너의 손 잡아줄게”라는 가사다. 이 가사도 그 자체로 ‘하나님이 코로나 시대의 선교사들을 위로해 주는 노래’ 같았다. 지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후원교회와 성도들이 이렇게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면 얼마나 힘이 될까. 실제로 CCM 사역자들과 함께 지치고 힘든 선교사들을 위한 위로의 온라인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외로운 선교지에서 코로나19의 위기 속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불확실한 미래로 자신이 가고 있는 선교의 길이 흔들릴 때, 우리가 위로의 노래로 힘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랜선 콘서트를 기획한 것이다. 이번 코로나 기간에 많은 음악가들이 지치고 힘든 이웃들을 위해 공연으로 힘을 주는 사례들을접했다. 특히 교회에 가서 마음껏 찬양을 부르고 싶은 갈급함을 채우기 위한 CCM 사역자들의 온라인 찬양은 너무 큰 힘이 된다. 그 수고가 지쳐 있는 선교사들에게 전해진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힘이 될 것 같다.

정재영 교수 2020-10-06

코로나 블루 코로나로 인해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사람들 사이에 극도의 우울감이 증대되고 있다. 이른바 ‘코로나 블루’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말은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한다. 최근 전국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코로나19와 사회적 건강'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코로나19 상황 이후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이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19 뉴스에서 어떤 감정을 가장 크게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47.5%는 '불안'이라고 답했고 분노(25.3%)와 공포(15.2%)가 뒤를 이었다. 특히 지난 8월 초 동일한 설문과 비교할 때 불안이라고 답한 비율은 15.2%포인트 줄었지만 분노는 2.2배, 공포는 2.81배 증가했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저소득층에서 평균보다 10% 포인트 정도 높은 65.6%가 우울감이 많아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소득이 낮을수록 재난으로 인한 우울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 블루를 경험했다’는 응답은 각각 54.7%, 69.2%, 71.6%로 조사 때마다 점점 늘고 있어서 이 현상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재난의 경험은 물리적·신체적 피해뿐만 아니라 집합적 형태의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을 일으킨다. 재난을 경험하거나 목격할 경우 불안, 우울 등 심리적인 충격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상황은 긴장, 두려움 등을 확산시켜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올해 들어 지난 6월까지 모두 6,278명(잠정치)이 극단적 선택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치로는 지난해 동기(6,431명)와 비슷한 수치이지만 수도권 ‘2030 여성’을 중심으로 한 자살 관련 데이터가 악화하고 있고, 소득분위 하위계층인 경제 취약층에서 자살을 시도해 응급실에 실려 온 사례가 지난해보다 늘었다는 보고가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한계 상황에 도달한 자살 위기 계층이 증가하고 있다는 염려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자살의 요인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단절된 사람들이 자살에 더 취약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존감이 높고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 사람은 자살의 위험이 낮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몇 년 전에 OECD에서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 대한 조사를 발표했다. 이 조사의 공동체성과 관련된 사회관계망의 질 부문에서 우리나라는 OECD 가입국가 중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른바 선진국가들 중에서 공동체성이 가장 약하다는 의미이다. 코로나로 인해서 극도로 우울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도움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코로나와 공동체 문제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대면 접촉보다는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서 만나거나 아예 만남 자체를 회피하게 되기 때문에 사회관계 자체가 약화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는 가능하면 대규모 모임을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접촉을 피할 수 있는 ‘언택트’ 방식의 삶으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비대면 상거래와 상품 주문, 온라인 회의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재택근무가 선호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코로나 이전부터 시작됐다. 한 트랜드 전문가는 코로나 이전에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을 분석하면서 2020년 트랜드의 핵심 키워드로 ‘외로움’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것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급속하게 더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대면 방식이 대면 방식을 완전히 대체하기도 어려우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단절되어 삶을 영위할 수도 없다. 사람은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를 필요로 하며 현대 사회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 고립된 삶을 살 수 있는 여건도 아니다. 특히 취약 계층의 사람들은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 이러한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공동체이다. 파괴된 사회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공동체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적 재난과 위기 상황에서 사회를 안전하게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이전에는 공식 모임과 대규모 집회가 중요했으나 정보화 사회가 진전되면서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한 소그룹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따라 전에는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스몰토크가 오늘날에는 자신의 사회 자본을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이렇게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가 형성되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강해지고 삶의 환경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함께 참여하기도 더 쉬워지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대규모 모임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소규모 커뮤니티 활동의 중요성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교회 공동체의 역할 이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스스로 공동체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빈번한 모임과 교제를 통해서 친숙성을 높임으로써 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높일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 공동체의 일원인 기독교인들은 서로에 대해 깊은 신뢰를 할 수 있고, 공동체 활동은 이런 식으로 기독교인들이 시민으로서 연대하며 참여할 수 있도록 북돋을 수 있다. 특히 자기희생의 규범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사회가 혼란하고 어려울수록 사회 곳곳에서 공적인 책임과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 모임의 대부분이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교회는 사람들을 교회당 안으로 불러 모아서 복음을 전하고 교육을 하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독려해왔다. 성도들을 양육해서 세상을 보내었지만 그것도 결국은 사람들을 전도해서 다시 교회당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은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예배당 모임이 큰 제약을 받으면서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왔던 ‘모이는 교회’보다 ‘흩어지는 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교회라는 건물과 제도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보다 교회 밖 ‘세상’으로 나가서 보냄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공동체 정신으로 자신들끼리만 결속할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품고 우리 사회를 보다 공동체적인 환경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를 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불확실성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지역 사람들에게 주체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줌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여러 주체들과 협력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면서도 그 변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 취약 계층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누구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이정기 목사 2020-10-25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많은 걱정과 근심속에 살아간다. 진짜 문제는 모든 어려움을 이길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꼭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약할 때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우리의 약함이야말로 가장 피조물다운 모습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와 똑같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확신하며 살았던 인물들이 있다. 시편 23: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의 고백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전혀 해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확신에 찬 고백을 하고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넉넉히 이길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고 외친다. 확신이 능력이다. 확신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실 때 이 확신을 심어 주셨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여호수아에게도 "내가 모세와 함께했던 것처럼 너와 함께할 것이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확신이 승리의 비결이다. 싸움에서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두려워하면 질 수 밖에 없다. 영적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할까? 왜 낙심하고 좌절할까? 확신이 없어서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확신이다. 히11:1절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보이지는 않지만 바라는 것들을 실상과 같이 보는 것이 믿음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아도 증거가 보이는 것처럼, 만져지는 것처럼, 들리는 것처럼 입의 말로 선포하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나는 죽어도 천국간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내편이시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확신이 능력이다. 믿음으로 선포하며 사시기를 축복한다. 요한1서 5: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가 이겨야 할 승리의 대상은 세상이다. 그러면 세상이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죄악된 것들을 말한다. 그래서 성경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다. 세상을 본 받지 말라고 했다. 약4:4절에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딤후4:10절에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다. 세상을 사랑하다 보면 예수님을 버릴수 밖에 없다. 그런데 누가 세상을 이긴다고 했는가? 요한1서 5:4절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세상을 이긴다고 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누구인가? 거듭난 자, 중생한 자이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날 수 있는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난자이다.<요한1서 5:1> 요한1서 5:4절에 "~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도들에게 무기이고, 힘이고, 능력이고, 자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베드로에게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하였다"고 하시며 돌이킨 후에 네 형제의 믿음을 굳게 세워주라고 당부하셨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자. 믿음을 굳게 하자. 승리한 자만이 기쁨을 맞볼 수 있다. 승리한 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승리한 자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자.

정용구 선교사 2020-10-19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결단이 필요하다. 가장 넘기 힘든 결단 중에 하나는 ‘그동안 한국에서 하던 일’을 모두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지로 가기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사역을 멈춰야 한다. 때로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직장이나 사업체를 정리하는 이들도, 후임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이 흐름이 크게 깨지게 됐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의 위기로 인해 말 그대로 어정쩡하게 됐다. 선교지로 가려고 해도 선교현지국가에서 비자업무를 보지 않는 경우가 생겼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것이 뒤바뀐 혼돈 상태의 선교현장은 선교사 후보생이 오래전부터 꿈꾸고 준비한 선교사역을 하기에는 너무나 달라졌다. 선례가 남아 있어 예측이 가능한 선교사역들이 사라지고, 코로나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맞춰서 새롭게 사역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별히 현장에 있던 많은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상황에서, 역방향으로 선교지를 신입선교사로 가야 한다는 부담이 크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선교지에 남아 있는 선교사’, ‘코로나로 어쩔 수 없이 한국에 귀국한 선교사’에 대한 관심은 가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선교지로 가려는 선교사 후보생’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이들은 아직 선교지를 가지 못했기에 ‘공식 선교사’라는 명칭도 애매하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선교지를 가지 못하는 상태가 장기화 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혼란이 있다. 다시 주저앉아 한국에서 뭔가를 해야 될 것 같은 현실이지만, 선교지를 가보지도 못한다는 것에 따른 주위의 시선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짧은 기간이라도 선교에 동참하려고 1년~2년을 준비했던 청년선교사들의 진로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선교에 꿈을 품고 자신의 젊음을 드려 어렵게 결단한 선교가 코로나로 인해 불가능해지자, 어려워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칫 선교 포기로 이어질지 모르는 변수를 경험하고 있다. 이는 선교사 후보생 모두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선교사 후보생’들은 너무나 귀한 선교 자원이다. 어렵게 결단해 준비한 이들이 코로나로 인해 주저앉지 않도록 이들을 격려하고 돌봐야 한다. 실제적으로 겪는 어려움을 같이 고민하고, 들어주는 일부터 시작해 그들의 마음속에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야 한다. 코로나 시대를 열어갈 신입 선교사로서, 코로나 시대에 새롭게 준비를 해야 할 부분을 잘 발견하고 위기의 시대에 선교를 더욱 잘 감당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이들을 위해 선교사 훈련을 담당하는 사역자들은 코로나로 인해 더욱 어려워진 선교현장에서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한 실제적인 선교훈련과, 다양한 영적인 준비와 지원이 원활하게 되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10월이면 많은 교회들이 정책당회를 하게 된다. 작은 부분이라도 ‘선교사 후보생’들을 위한 발굴과 지원과 배려를 위한 정책과 지원이 만들어진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김성윤 교수 2020-10-27

오 헨리의 단편소설 ‘경찰관과 찬송가’이야기다. 뉴욕의 부랑자 소피는 추운 겨울은 노숙을 하며 보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가벼운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돼 석 달의 겨울을 따뜻한 블랙웰 섬의 교도소에서 보내려는 시도를 한다. 교도소는 하루 세끼 뜨끈한 식사와 매일 따뜻한 잠자리가 보장된다. 하지만 소피는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로 가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먼저 뉴욕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멋진 식사와 포도주를 마신 후 돈이 없다고 하면 경찰이 잡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레스토랑 문 앞에서 남루한 옷차림 때문에 내동댕이쳐진다. 교도소에 가려는 1차 범죄는 실패다. 그는 교도소행을 위한 두 번째 시도로 6번가 모퉁이 가게의 유리창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깼다. 하지만 경찰은 유리창을 깬 진짜 용의자라면 도망치지 그 자리에 있을 리 없다며 체포를 거부한다. 두 번째 범죄도 실패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식당에서 커다란 스테이크, 팬케이크, 도넛과 파이 한 조각을 주문해 먹었다. 그리고는 가진 돈이 없으니 “경찰을 부르라”고 했다. 하지만 경찰을 부르는 대신 두 명의 웨이터가 그를 문밖으로 끌어낸 다음 길바닥에 내팽개쳤다. 세 번째 범죄도 실패다. 이에 굴하지 않고 소피는 네 번째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도전한다. 일부러 어여쁜 여자를 성희롱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여자가 “술을 사 달라”며 소피에게 매달린다. 네 번째 범죄도 실패다. 그는 다섯 번째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도전한다. 이번에는 대로에서 술주정뱅이처럼 미친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지나가는 행인들의 보행을 방해했다. 하지만 경찰은 “미식축구에서 이긴 예일대 학생일 것”이라면서 관대하게 대한다. 다섯 번째 범죄 시도도 실패다. 그는 교도소로 가기 위해 여섯 번째 범죄를 시도한다. 이번에는 한 신사의 우산을 훔친다. 신사는 “실은 나도 어느 식당에서 그냥 가져온 것”이라며 되레 소피에서 용서를 구한다. 이번에도 실패다. 6번이나 실패한 소피는 우울한 마음으로 노숙을 하던 공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때 오래된 교회에서 어린 시절 들었던 찬송가가 흘러나온다. 소피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비해 타락해 버린 자신을 깨닫는다. 그리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는 회개하고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그때 경찰관이 나타나 그를 부랑자라고 체포한다. 재판에 넘겨진 소피는 다음날 치안판사로부터 그가 그토록 원했던 블랙웰섬에 있는 감옥에서 3개월을 살 것을 명한다. 소피의 일은 소설 속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아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코로나로 자영업자나 소상공인들이 하루가 다르게 길바닥으로 내몰리고 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못 구해 아우성이다. 겉으로 나타난 국민소득 3만 불은 빛 좋은 개살구다. 우리 주위에 소피 같은 사람이 없는지 되돌아보고 그들이 일상에서 일할수 있는 기회를 우리 모두가 함께 모색해 봐야 한다.

이정기 목사 2020-10-25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많은 걱정과 근심속에 살아간다. 진짜 문제는 모든 어려움을 이길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꼭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약할 때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우리의 약함이야말로 가장 피조물다운 모습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와 똑같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확신하며 살았던 인물들이 있다. 시편 23: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의 고백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전혀 해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확신에 찬 고백을 하고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넉넉히 이길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고 외친다. 확신이 능력이다. 확신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실 때 이 확신을 심어 주셨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여호수아에게도 "내가 모세와 함께했던 것처럼 너와 함께할 것이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확신이 승리의 비결이다. 싸움에서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두려워하면 질 수 밖에 없다. 영적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할까? 왜 낙심하고 좌절할까? 확신이 없어서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확신이다. 히11:1절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보이지는 않지만 바라는 것들을 실상과 같이 보는 것이 믿음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아도 증거가 보이는 것처럼, 만져지는 것처럼, 들리는 것처럼 입의 말로 선포하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나는 죽어도 천국간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내편이시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확신이 능력이다. 믿음으로 선포하며 사시기를 축복한다. 요한1서 5: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가 이겨야 할 승리의 대상은 세상이다. 그러면 세상이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죄악된 것들을 말한다. 그래서 성경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다. 세상을 본 받지 말라고 했다. 약4:4절에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딤후4:10절에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다. 세상을 사랑하다 보면 예수님을 버릴수 밖에 없다. 그런데 누가 세상을 이긴다고 했는가? 요한1서 5:4절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세상을 이긴다고 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누구인가? 거듭난 자, 중생한 자이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날 수 있는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난자이다.<요한1서 5:1> 요한1서 5:4절에 "~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도들에게 무기이고, 힘이고, 능력이고, 자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베드로에게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하였다"고 하시며 돌이킨 후에 네 형제의 믿음을 굳게 세워주라고 당부하셨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자. 믿음을 굳게 하자. 승리한 자만이 기쁨을 맞볼 수 있다. 승리한 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승리한 자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자.

정용구 선교사 2020-10-19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결단이 필요하다. 가장 넘기 힘든 결단 중에 하나는 ‘그동안 한국에서 하던 일’을 모두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지로 가기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사역을 멈춰야 한다. 때로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직장이나 사업체를 정리하는 이들도, 후임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이 흐름이 크게 깨지게 됐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의 위기로 인해 말 그대로 어정쩡하게 됐다. 선교지로 가려고 해도 선교현지국가에서 비자업무를 보지 않는 경우가 생겼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것이 뒤바뀐 혼돈 상태의 선교현장은 선교사 후보생이 오래전부터 꿈꾸고 준비한 선교사역을 하기에는 너무나 달라졌다. 선례가 남아 있어 예측이 가능한 선교사역들이 사라지고, 코로나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맞춰서 새롭게 사역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별히 현장에 있던 많은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상황에서, 역방향으로 선교지를 신입선교사로 가야 한다는 부담이 크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선교지에 남아 있는 선교사’, ‘코로나로 어쩔 수 없이 한국에 귀국한 선교사’에 대한 관심은 가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선교지로 가려는 선교사 후보생’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이들은 아직 선교지를 가지 못했기에 ‘공식 선교사’라는 명칭도 애매하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선교지를 가지 못하는 상태가 장기화 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혼란이 있다. 다시 주저앉아 한국에서 뭔가를 해야 될 것 같은 현실이지만, 선교지를 가보지도 못한다는 것에 따른 주위의 시선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짧은 기간이라도 선교에 동참하려고 1년~2년을 준비했던 청년선교사들의 진로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선교에 꿈을 품고 자신의 젊음을 드려 어렵게 결단한 선교가 코로나로 인해 불가능해지자, 어려워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칫 선교 포기로 이어질지 모르는 변수를 경험하고 있다. 이는 선교사 후보생 모두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선교사 후보생’들은 너무나 귀한 선교 자원이다. 어렵게 결단해 준비한 이들이 코로나로 인해 주저앉지 않도록 이들을 격려하고 돌봐야 한다. 실제적으로 겪는 어려움을 같이 고민하고, 들어주는 일부터 시작해 그들의 마음속에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야 한다. 코로나 시대를 열어갈 신입 선교사로서, 코로나 시대에 새롭게 준비를 해야 할 부분을 잘 발견하고 위기의 시대에 선교를 더욱 잘 감당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이들을 위해 선교사 훈련을 담당하는 사역자들은 코로나로 인해 더욱 어려워진 선교현장에서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한 실제적인 선교훈련과, 다양한 영적인 준비와 지원이 원활하게 되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10월이면 많은 교회들이 정책당회를 하게 된다. 작은 부분이라도 ‘선교사 후보생’들을 위한 발굴과 지원과 배려를 위한 정책과 지원이 만들어진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여주봉 목사 2020-10-08

지금까지 하나님의 비전의 중요성, 영적 리더십과 비전의 관계, 하나님의 비전이 주어지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하나님은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교회를 향한 비전을 나에게 보이시고 인도하시면서 참으로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다. 그 상세한 내용은 내가 쓴 책 <포도나무교회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참조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이신 비전 중 한 핵심은 다음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사역이었다. 최근 다음 세대들의 영적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 일례로 2020년 8월, 학원복음화협의회에서 실시한 대학생 설문조사에 의하면 기독 대학생 중 약 20%가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고, 60%가 성경을 읽지 않고, 40%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독 대학생 중 대다수가 십자가 복음으로 전혀 무장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그 뿐 아니라 오늘날 젊은 대학생들의 사조가 얼마나 세속적이고 심지어 반기독교적인지도 분명하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교회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다. 심각한 것은 기독 젊은이들도 그와 비슷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서 비성경적인 비판에 대하여 올바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중고등, 초등학교로 내려갈수록 더 심각해진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의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 비전을 알리셨고 새물결선교회와 포도나무교회를 통해서 이 일을 놀랍게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 중 세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청년선교] 사단법인 청년선교(Y Mission)는 지역교회를 중심으로 군선교와 캠퍼스선교를 서로 연결하고 그것을 다시 직장선교와 해외선교로 연결하여 우리나라 청년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그들을 열방으로 보내는 일들을 감당하고 있다. 육, 해, 공군을 대표하는 핵심적인 교회들(지상작전사령부, 문무대, 상무대, 3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공군교육사령부, 부사관학교 등)을 예배, 집체교육, 찬양학교, 자매결연, 학군단신우회 등으로 섬기고 있다. 그리고 군과 연결되는 캠퍼스 사역을 위해 청년선교 내 YMC(Y Misson Campus)라는 조직을 세웠다. 2019년 12월 말 기준, 전국 409개 캠퍼스 중 188개의 캠퍼스에 205명의 YMC 간사가 활동하고 있으며, 군에서 제대한 청년들을 캠퍼스에서 돌보고 지역교회에 연결시키고 있다. 이렇게 세워진 청년들이 직장과 해외로 나아가며 열방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2+2 인턴선교사 플랫폼인데, 두 명을 한 조로 1년씩, 6개월 간격으로 지속적으로 파송함으로써 한 곳에서 4명이 한 팀을 이루어 섬기며 온전한 선교사로서 모든 영역에서 훈련받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꾼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체계다. 청년선교는 매년 1,000명의 청년 인턴선교사를 모든 열방에 빠짐없이 파송하려는 목표를 가지는데, 이를 위해 매달 1만 원씩 후원하는 회원 15만 명을 모집하고 있다. [새물결기독학교] 다음 세대들을 어려서부터 신앙의 본질 가운데서 양육하는 일을 위해, 2015년 3월에 새물결기독학교가 개교하였으며 2020년 현재,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개 학년, 100여 명의 학생들이 함께 하고 있다. 새물결기독학교는 ‘십자가 복음의 삶을 사는, 인성과 창의융합적인 사고를 겸비한 미래 인재 양성’이라는 교육 비전을 가진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물결 가운데서 십자가 복음을 통한 영성과 성품 훈련을 기본으로 하여, 시대의 변화에 발맞춘 STEM교육(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 및 예술과 인문학을 통한 창의 융합 교육, 글로벌 리더십 교육, 각자의 은사에 따라 배우는 학생 주도적인 교육 등으로 지속적인 교육 혁신을 이루어가고 있다. 이런 교육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비전을 찾으며, 그에 따라 학업에 대한 열정이 생겨나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세워질 새물결국제기독학교와 새물결대학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양성되고, 사회 각 분야에서 하나님의 창조명령과 문화명령을 감당해 나갈 것이다. [다음 세대들의 문화선교사역] 아동 사역에 대해서는 K Mission(Mission for Kids), 그리고 10대 청소년 사역에 대해서는 T Mission(Mission for Teens)이 세워져서 오는 세대들의 삶과 학교들을 기반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고 있다. 특히 10대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문화적 접근 방식’을 취했고, 십자가 복음의 핵심을 10대들의 문화 코드로 다양하게 변주해내어 10대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한다. 학생들로 구성된 전문 워십팀(New Wineskin, 새부대)을 양성하고, 문화선교아카데미가 세워져서 워십댄스, 드라마, 뮤지컬, 찬양, 사진 인문학 등의 과정들이 개설될 예정이다. 또한 국내적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문화사역팀들과 연결하여 문화예술공연, 디지털컨텐츠 제작 등을 준비하고 있으며, 다음 세대들의 교육과 사역을 위한 공간인 미래관이 건축되고 있다.

신동식 목사 2020-10-07

북한이 우리 국민을 화장시켰다는 사실로 인해 나라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참으로 끔찍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군인도 아닌 민간인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육지가 아닌 바다 한가운데서 죽였습니다.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죽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입니다. 북한은 코로나19로 인해 자국의 경계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사살하라고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사살이라는 것이 참으로 끔찍하고 비인간적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면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만큼 사악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그 피를 찾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죽이는 일은 결코 용서 받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는 잠시 도피할 수 있으나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그 피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런 끔찍한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페르시아 시대의 학살, 로마시대의 학살,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 정권의 학살, 프랑스 바돌로매의 학살, 히틀러의 학살, 스탈린의 학살, 일본의 관동과 난징 학살,아르메니아 학살. 르완다 학살, 캄보디아 학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한 일들이 역사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여기에는 모두 자국 이기주의와 권력의 욕망이 중심입니다. 학살의 현장에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끔찍한 저주와 복수만 존재합니다. 이것은 나라 간의 관계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세계에도 존재합니다. 지금도 수없이 낙태 당하고 있는 태아들이 있습니다. 낙태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편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용인될 수 없습니다. 생명의 문제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의한다면 이것은 학살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펼쳐지는 문제는 잔인하고 끔찍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없는 곳에는 강자의 이기주의만 작동합니다. 권력자의 합리화만 존재합니다. 큰 것을 얻고자 작은 것을 가볍게 여기는 논리만이 살아 있습니다. 개인의 편리와 쾌락의 욕망만이 작동합니다. 한 생명의 소중함은 안중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힘을 가진 자의 편리뿐입니다. 이 참혹함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정치적으로 해결될까요? 교육이 답일까요? 인류 역사는 답이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부패한 인간은 기회만 주어지면 죄의식 없이 학살을 행합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의 평범성이 우리 안에 다 존재합니다. 죄가 죄인 줄 인식하지 못합니다. 악을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지만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탐욕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러니 그 무엇으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죄로 인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치유 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부패한 인류는 결코 하나님의 개입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없는 자유와 평등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는 반복되는 학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세상의 치료제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죽음이 세상의 참혹함을 치유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으면 어디에서도 학살이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온전한 공의와 사랑의 현장입니다. 교회는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형제에게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다면 서로 죽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마지막 판결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재심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판결의 날까지 우리는 인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존귀함을 알리고 살아내는 일입니다. 인간의 고귀함은 십자가의 은혜를 가지고 전하는 일입니다.

정재영 교수 2020-10-06

코로나 블루 코로나로 인해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사람들 사이에 극도의 우울감이 증대되고 있다. 이른바 ‘코로나 블루’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말은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한다. 최근 전국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코로나19와 사회적 건강'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코로나19 상황 이후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이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19 뉴스에서 어떤 감정을 가장 크게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47.5%는 '불안'이라고 답했고 분노(25.3%)와 공포(15.2%)가 뒤를 이었다. 특히 지난 8월 초 동일한 설문과 비교할 때 불안이라고 답한 비율은 15.2%포인트 줄었지만 분노는 2.2배, 공포는 2.81배 증가했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저소득층에서 평균보다 10% 포인트 정도 높은 65.6%가 우울감이 많아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소득이 낮을수록 재난으로 인한 우울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 블루를 경험했다’는 응답은 각각 54.7%, 69.2%, 71.6%로 조사 때마다 점점 늘고 있어서 이 현상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재난의 경험은 물리적·신체적 피해뿐만 아니라 집합적 형태의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을 일으킨다. 재난을 경험하거나 목격할 경우 불안, 우울 등 심리적인 충격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상황은 긴장, 두려움 등을 확산시켜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올해 들어 지난 6월까지 모두 6,278명(잠정치)이 극단적 선택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치로는 지난해 동기(6,431명)와 비슷한 수치이지만 수도권 ‘2030 여성’을 중심으로 한 자살 관련 데이터가 악화하고 있고, 소득분위 하위계층인 경제 취약층에서 자살을 시도해 응급실에 실려 온 사례가 지난해보다 늘었다는 보고가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한계 상황에 도달한 자살 위기 계층이 증가하고 있다는 염려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자살의 요인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단절된 사람들이 자살에 더 취약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존감이 높고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 사람은 자살의 위험이 낮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몇 년 전에 OECD에서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 대한 조사를 발표했다. 이 조사의 공동체성과 관련된 사회관계망의 질 부문에서 우리나라는 OECD 가입국가 중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른바 선진국가들 중에서 공동체성이 가장 약하다는 의미이다. 코로나로 인해서 극도로 우울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도움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코로나와 공동체 문제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대면 접촉보다는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서 만나거나 아예 만남 자체를 회피하게 되기 때문에 사회관계 자체가 약화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는 가능하면 대규모 모임을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접촉을 피할 수 있는 ‘언택트’ 방식의 삶으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비대면 상거래와 상품 주문, 온라인 회의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재택근무가 선호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코로나 이전부터 시작됐다. 한 트랜드 전문가는 코로나 이전에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을 분석하면서 2020년 트랜드의 핵심 키워드로 ‘외로움’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것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급속하게 더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대면 방식이 대면 방식을 완전히 대체하기도 어려우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단절되어 삶을 영위할 수도 없다. 사람은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를 필요로 하며 현대 사회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 고립된 삶을 살 수 있는 여건도 아니다. 특히 취약 계층의 사람들은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 이러한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공동체이다. 파괴된 사회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공동체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적 재난과 위기 상황에서 사회를 안전하게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이다. 이전에는 공식 모임과 대규모 집회가 중요했으나 정보화 사회가 진전되면서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한 소그룹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따라 전에는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스몰토크가 오늘날에는 자신의 사회 자본을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이렇게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가 형성되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강해지고 삶의 환경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함께 참여하기도 더 쉬워지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대규모 모임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소규모 커뮤니티 활동의 중요성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교회 공동체의 역할 이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스스로 공동체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빈번한 모임과 교제를 통해서 친숙성을 높임으로써 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높일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 공동체의 일원인 기독교인들은 서로에 대해 깊은 신뢰를 할 수 있고, 공동체 활동은 이런 식으로 기독교인들이 시민으로서 연대하며 참여할 수 있도록 북돋을 수 있다. 특히 자기희생의 규범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사회가 혼란하고 어려울수록 사회 곳곳에서 공적인 책임과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 모임의 대부분이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교회는 사람들을 교회당 안으로 불러 모아서 복음을 전하고 교육을 하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독려해왔다. 성도들을 양육해서 세상을 보내었지만 그것도 결국은 사람들을 전도해서 다시 교회당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은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예배당 모임이 큰 제약을 받으면서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왔던 ‘모이는 교회’보다 ‘흩어지는 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교회라는 건물과 제도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보다 교회 밖 ‘세상’으로 나가서 보냄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공동체 정신으로 자신들끼리만 결속할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품고 우리 사회를 보다 공동체적인 환경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를 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불확실성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지역 사람들에게 주체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줌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여러 주체들과 협력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면서도 그 변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 취약 계층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누구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김성윤 교수 2020-09-25

복지국가들의 과보호로 세상 살 의욕을 잃은 식물인간을 '폼프리포사'라고 부른다. 폼프리포사 현상은 1985년 전후에 노르웨이를 비롯한 스웨덴 등지의 복지국가에서 번졌던 사회 현상이다. 이 폼프리포사란 말의 어원은 스웨덴의 여류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랜(1907-2002)이 스웨덴 정부의 높은 세율을 풍자하는 동화인 '폼프리포사 인 모니스마니엔'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이 동화가 그 당시 유럽에서 베스트셀러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가 그토록 닮아가고 싶어 했던 북유럽의 스웨덴에서는 오히려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개혁논의에 불씨를 지폈다. 소설 속 폼프리포사는 원래 동화를 쓰는 작가였다. 하지만 국가가 베푸는 복지 서비스의 보호아래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살아간다. 그런데 복지혜택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문제는 넓어져가는 만큼 자신의 수입에 대한 세금도 무거워져 가면서 그에 비례해 수입이 줄게 됐다. 여기에 누진세까지 부과돼 세금이 더욱 늘어났다. 그러자 더 이상 동화쓰기를 포기하고 국가의 보호대상자가 되고 만다. 아무리 복지국가라 해도 세금을 많이 부과하면 일할 의욕을 잃게 된다. 일하기보다 파산으로 생활 보호를 받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업가는 기업운영을 포기하게 되고 학자는 학문 연구를 접게 된다. 예술가는 예술 활동을 포기 하게 되고 종교지도자는 선교를 포기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같이 세금 때문에 살 수가 없다는 말을 한다. 복지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면 그 만큼 소비의 여력이 줄어든다. 소비가 둔화되면 그 첫 번째 피해자는 서민이다.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많은 나라에서 재원 조달을 위하여 증세를 추진한다. 여기서부터 빈곤의 악순환의 고리가 생긴다. 가난한 대중을 위한 세금이 부과되면 될수록 경제는 활력이 떨어진다. 활력이 떨어지면 떨어진 만큼 부양해야 될 국민의 수가 늘어난다. 그 국민의 복지수요를 위해 온갖 항목의 세원을 발굴한다. 더 많은 세원이 발굴되면 될수록 경제가 활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빈곤의 악순환 고리다. 국가의 과보호정책으로 개인이 세상 살 의욕을 잃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식물인간을 일러 폼프리포사라고 한다면 우리나라도 그런 사회현상의 늪으로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심히 걱정스럽다. 아무리 복지혜택이 자신에게 돌아온다 해도 수입의 3분의 1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면 일할 의욕이 감퇴하기 시작하고, 절반의 한계를 넘어서면 그 일에서 손을 떼게 된다는 것이 복지 심리학의 상식이요, 정설이다. 우리나라도 기업의 사업장이 수백 군데나 문을 닫고 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기업을 운영하면서 무거운 세금을 무느니 오히려 파산해서 생활 보호를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종교지도자는 종교에 헌신해야 한다. 기업가는 기업 운영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학자는 학문연구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예술가는 예술 창작에 푹 빠질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의욕을 잃고 자신들이 하던 일을 버리게 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제는 과보호로 비싼 대가를 치르는 정부를 지양(止揚)하고 근로 의욕을 돋아 주는 저렴한 정부(cheap government)를 지향(指向)해야 할 것이다.

정용구 선교사 2020-09-23

유명 가수들이 자신들을 전혀 모르는 외국의 거리에 가서 오직 노래만으로 관객들을 만나는 <비긴 어게인(Begin Again)>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도 코로나19로 해외로 가지 못하고, 이번 시즌은 한국에서 진행했다. 9명의 유명 가수가 코로나로 지친 국민들을 위해 거리 공연을 펼쳤다. 그런데 총 10회였던 이번 프로그램의 후반부로 갈수록 공연 가수들이 우는 장면이 점점 많아졌다. 공인이자 유명가수들인 만큼 방송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방송 후 인터뷰에서 그들은 “음악을 사랑해서 늘 관객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공연이 취소되고, 모이지 못하게 되니 우리들의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현실에 마음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긴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과 불투명한 미래 전망 때문에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을지가 걱정됐던 것이다. 그들이 가장 많이 울었던 곡은 ‘길’이라는 노래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중략)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라는 가사였다. 이 곡을 듣자니 코로나 시대에 갑작스럽게 사역지에서 철수하거나, 선교지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선교사들이 떠올랐다. 선교사 버전으로 다시 이 곡을 고쳐봤다. “코로나로 선교의 길이 막혀 갑작스러운 철수와 한국생활, 선교지에 있지만 기약 없이 아무 일도 못하는 생활, 하지만 오늘도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그 길을 걷는다. 선교가 분명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길이라고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코로나 시대의 선교사의 삶에는 자신이 없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이 길을 제대로 걸어가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설 수 있을까?” 비긴 어게인에서 우는 가수를 위해 동료 가수들이 노래로 위로해 주었다. ‘촛불하나’라는 곡이다. “지치고 힘들 땐 내게 기대. 언제나 네 곁에 서 있을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내가 너의 손 잡아줄게”라는 가사다. 이 가사도 그 자체로 ‘하나님이 코로나 시대의 선교사들을 위로해 주는 노래’ 같았다. 지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후원교회와 성도들이 이렇게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면 얼마나 힘이 될까. 실제로 CCM 사역자들과 함께 지치고 힘든 선교사들을 위한 위로의 온라인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외로운 선교지에서 코로나19의 위기 속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불확실한 미래로 자신이 가고 있는 선교의 길이 흔들릴 때, 우리가 위로의 노래로 힘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랜선 콘서트를 기획한 것이다. 이번 코로나 기간에 많은 음악가들이 지치고 힘든 이웃들을 위해 공연으로 힘을 주는 사례들을접했다. 특히 교회에 가서 마음껏 찬양을 부르고 싶은 갈급함을 채우기 위한 CCM 사역자들의 온라인 찬양은 너무 큰 힘이 된다. 그 수고가 지쳐 있는 선교사들에게 전해진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힘이 될 것 같다.

이정기 목사 2020-09-27

한국 교회가 사회로 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한국 교회가 비난을 받는 것은 너무 기독교적이어서가 아니다. 너무 종교적이어서가 아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않고, 기독교가 기독교답지 않아서 비난을 받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가 받고 있는 비난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하는 비난인지, 그리고 무엇을 겨냥한 비난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비난을 받는 것인가? 아니다. 그 분의 인격을 표방하면서 전혀 그리스도의 인격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 비난을 받는 것인가? 아니다. 사랑을 외면한 종교인들의 위선과 교만과 형식주의가 비난을 받는 것이다. 만고의 진리인 성경의 내용이 비난을 받는 것인가? 아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교회의 잘못된 전통, 제도 및 교권이 비난을 받는 것이다. 현재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기독교가 비난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첫재. 진실성 결여 때문이다. 일부 확진 판정을 받은 목사와 신도들이 도주하거나 거짓말을 했다. 동선을 숨겼다가 집단 감염 사태들이 벌어졌다. 동선을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했다면 추가적인 감염을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 하는 것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다. 우리는 사소한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정부가 더 이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조치를 취하여, 국민 모두가 경제적인 피해를 무릎쓰고 참여했다. 그런데 일부 교회가 대면 예배를 강행하는 모습들을 보며 교회가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근본 정신이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 정신을 교회가 거스르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비난하는 것이다. 물론 정부의 조치가 맘에 들지 않는다. 방역에 힘써 달라고 협조를 당부해야 하는데 방역을 위한다는 이유로 비대면 예배를 교회들에게 강제하고 있다. 대통령은 일부 교회 문제를 두고 '방역조치를 방해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과격한 표현을 하고, 국무총리는 '구상권을 행사한다.'고 하고, 법무부 장관은 '법이 허용하는 모든 수단을 통해 엄정하게 조치한다.'고 하고, 여당 대표는 '방역을 회피하면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며, 마치 한국교회를 범죄 집단처럼 취급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강력히 대처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교회는 적극 참여해야 한다. 예수님은 마5:13,14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밖의 소금이 아니다. 세상 밖의 빛이 아니다. 빛과 소금이 필요한 곳은 바로 세상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무대이다. 세상과 떨어져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생각할 수 없다. 마5: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세상속에 살면서 빛을 비추어야 한다. 착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22:39절에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 눅10장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다.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리고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한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다.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한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는다. 율법 교사가 대답한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때 예수님께서'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강도 만난자의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셋째.교회의 세속화 때문이다. 거룩은 교회의 본질이다. 주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롬12:1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교회의 매력은 거룩이다. 세상과 달라야 한다. 구별되는 것이 영향력이다.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그때부터 교회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세속화이다. 세속화란 세상과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추구하는 것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가치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교회는 말씀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거룩한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 세속적인 것들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속에 바른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신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순결인 것처럼, 교회의 생명은 거룩이다. 기독교는 행함의 종교이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야고보 사도는 강조했다.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면서 강조한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였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익도 없고, 구원도 없다.<약2:14>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2:17> 갈6: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다. '내가 선한 것을 생각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고, 선한 것을 지지하므로 나는 선한 사람이다.'그렇지 않다. 그 정도로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바리새인들도 선한 것을 생각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고, 선한 것을 지지했다. 그런데 주님께 책망만 들었다. 행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선을 이루기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다. 선을 행하되 포기하지 말자.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심는것도 내가 하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지만, 거두게 하시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선을 행하면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의 신뢰, 잃어버린 교회의 신뢰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권득칠 총장 2020-09-16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볼 때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와 신학이 각 시대마다 지녔던 사조나 사상으로부터 어려운 도전을 받아 왔다는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에는 오늘날대로 교회와 신학이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특히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달로 인해 도래된 오늘날의 ‘과학기술시대’는 우리 인간의 삶의 조건과 형태를 급속도로 변화시켜가고 있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은 절정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과학기술의 진보가 초래한 결과는 어떤가? 오늘날 인류가 처해있는 현실은 바로 과학기술의 바탕 위에 세워진 현대문명의 자체붕괴를 가져올 만한 대재난이 예상되기조차 하는 절박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지난 9월 1일 천주교 프란체스코 교황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을 서둘러야한다고 촉구했다. 교황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메시지를 통해 기후 변화가 가져온 위기를 교정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 능력이 닿는 한 모든 것을 할 것을 호소했다. 최근 생태계와 환경 파괴에 관한 전문가들의 경고는 걱정을 넘어 가히 공포로 다가온다. 그야말로 ‘단 하나 뿐인 지구가 얼마나 버틸까’하는 종말론적 상상력까지 자극하는 그러한 공포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성장’이라는 사회 경제적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줄곧 자연을 파괴하는데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최근에는 유전공학분야의 기술개발로 인해 생명체 안에 있는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함은 물론 심지어는 인간의 기술로 단백질 합성을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생명형성과정에 있어서 인위적인 간섭을 가능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피조물인 인간 스스로 어지럽히고 있는 실정에까지 이르렀다. 더욱이 핵물리학 분야의 기술개발은 곧바로 무기제조기술로 이어졌다. 원자탄, 수소폭탄, 중성자탄 등 순식간에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생명체를 몰살시킬 수 있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갖는 대량 살상용 무기를 등장시켰다. 이와 같은 엄청난 생태학적 재난이 예고되는 오늘날의 현실 상황은 지난날의 과학기술에 대한 소박한 낙관적 시각이나 맹신적 시각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함께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 수정을 요청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한계와 책임’의 문제가 지구적 차원의 문제로서 윤리적 관점에서 신학과 과학을 비롯한 광범위한 제 학문 영역들로 하여금 학문 간의 대화를 불러내고 있다. 더욱이 과학기술의 진보가 수반하는 생명 파괴적 또는 반생명적 현실은,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생명의 거대한 연관성’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청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전환할 것과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의 모습 자체를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우리 기독교 신앙은 과학기술의 힘과 책임에 대하여 진지하게 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신앙현실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책임성은 물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책임성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 차원에서 진지하게 다뤄질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적 생태적 위기상황은 기독교인 모두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물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더 이상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묻는 물음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향해 바로 지금, ‘우리 인간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 물음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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