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목사 기자2017-06-08

요 며칠 경험하였던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의 중요성입니다. 똑같은 말을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 있고, 마음을 닫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감동을 주는 말이 있고, 냉랭하게 만드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고,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말은 말하기 전에 준비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뢰입니다. 말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려면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신뢰는 의심의 구름을 걷게 합니다. 그래서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신뢰가 있으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고, 기대감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눌한 말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렇기에 신뢰감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신뢰는 단숨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말한 대로 살아왔는가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신뢰를 주면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신뢰가 말을 들을 수 있는 준비라면 마음을 움직이는 말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에 일관성이 있을 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일관성이 무너지면 말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닫히게 됩니다. 일관성은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의 총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만큼 일관성은 비례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깊게 시간을 가지면 모든 것이 들통 납니다. 보통 보이스 피싱하는 사기꾼들에 당하는 이유는 그들의 말이 일관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은 매우 치밀하고 일관성이 있어 보여도 장시간 이야기하면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일관성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정확성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때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게 돼있습니다. 말의 정확성에 의심이 가는 순간 더 이상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정직함이 함께할 때 그 힘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정직함은 한 번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모습에서 정직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외적인 것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듣는 이가 이 사람의 말에 대한 정직함을 느끼게 될 때 마음은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 아니라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고 집중해서 전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은 말하는 이의 태도에서 나옵니다. 정말 하고자 하는 말이 당신에게 필요합니다. 간절함과 확신이 묻어 있을 때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게 됩니다. 열정이 없는 냉소주의적 태도는 결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은 큰 소리가 아닙니다. 냉철하고 진중하게 말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큰 소리와 작은 소리가 작용돼야 합니다. 대중 앞에서 작은 소리는 의미가 없습니다. 단 둘의 대화에서는 큰 소리가 관계를 방해합니다. 그래서 항상 열정적인 큰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냉철하고 진중한 태도가 듣는 이에게 신뢰를 주고 마음을 열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은 사랑을 담은 진심입니다. 사랑이 없는 말은 공허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 때 마음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말은 사무적 용어로서 말하는 순간 수명을 다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눈을 직시하고, 진지하게 열정을 다하여 전할 때 마음은 움직이게 됩니다. 요 며칠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같은 말이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깊이 가졌습니다. 지금 나의 말은 어떤지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영훈 목사 기자2017-06-07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고, 새로운 정부의 국정 운영이 시작됐다. 많은 국민들이 새로운 정부의 인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북한의 무력 위협과 같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미국과 중국, 일본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은 새롭게 출범한 정부가 추진할 개혁의 방향성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개혁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한국교회의 개혁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고민해보게 된다. 교회 안팎에서 교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현 시대에 한국교회의 개혁은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추구해야 할 개혁의 올바른 방향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의해보고자 한다. 첫째, 교회의 개혁은 차별 없는 개혁이 되어야 한다. 고대 사회부터 인류는 노동력, 군사력, 재력 등으로 계급을 나누고 차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직분에 따라, 세상에서의 직업이나 소유의 정도에 따라 차별해 대접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차별을 원하지 않으신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라는 말씀처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이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고 하나 돼야 할 것을 강조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는 성별, 나이, 인종, 재물의 소유, 직업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귀하게 대접받고, 서로 사랑하는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야 한다. 단, 차별 없는 개혁을 진행하되 동성결혼의 합법화, 이단 및 이슬람의 수용 등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들은 철저하게 배격해야 할 것이다. 둘째, 섬김과 나눔을 동반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교회 전체의 개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위에서부터의 개혁이 먼저 돼야 한다. 교회 내 부유하고 강한 이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눠야 한다. 또한 교역자와 제직이 앞장서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해야 한다. 초대교회 부흥의 이면에는 이러한 섬김과 나눔이 있었다.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자신의 소유를 통용했고, 과부들의 공정한 구제를 위해 집사들을 세워 봉사하게 했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우리를 위해 종의 형체로 이 땅 위에 오셨고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정신을 본받아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섬김과 나눔을 실천할 때 한국교회에 진정한 개혁이 일어날 수 있다. 셋째, 교회의 모든 개혁은 영성의 회복에 밑바탕을 두어야 한다. 교회의 제도와 프로그램을 변화시킨다고 해서 교회 안에 온전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본질적인 것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영성이다. 초대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제자들이 성령충만 받고 담대히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부흥 역시 강력한 성령의 임재 아래 회개 운동, 방언 운동, 전도 운동, 신유 운동 등의 성령충만의 역사가 일어났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개혁을 통해 과거와 같은 성령충만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성령충만의 영성을 회복해 교회의 변화를 일으키고, 더 나아가 사회 개혁을 이끌어나가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새로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세상도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교회가 제자리에 정체되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일들로 외부의 비판을 받기 전에 교회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변화하고 자정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리할 때 교회 내외부적으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수 있고 예전과 같이 사회 전반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다시 한번 바로 서고, 초대교회와 같이 사회의 칭송을 받으며, 더 나아가 사회의 개혁을 이끌어나가는 주역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김용복 박사 기자2017-05-29

강대제국들의 지정학적, 정치적 패권 각축장이 되어버린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는 신앙공동체에게 예수님이 몸소 실천하시고 약속하신 평화의 비밀을 구현하라는 <평화사역의 소명>에 대하여 새롭고 예민한 성찰을 요청한다. 우리는 이 평화소명을 위하여 영적 해석학(Spiritual Hermeneutics)을 도입하고 싶다. 영성을 토대로 하는 시운의 분별력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인류역사는 패권제국들이 평화를 만드는 세력이라는 신화를 옛날이나 이제나 믿어왔다. 이것이 문명사의 핵심적 논리였다. 그리고 세계의 종교들은 이 제국세력을 신격화하는 “영적” 역할을 하여 왔다. 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신성로마제국이 그런 것이었고 이 역사적 족적은 오늘도 세계사 속에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평화는 이런 제국의 평화(Pax Imperium)와는 다르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이것이 시운을 분별하는 평화를 위한 영적 해석학의 기본일 것이다. 평화란 지구적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무한 폭력의 군사체제에 의하여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분별이다. 동북아에서도 이런 역사는 있었다. 중국의 진시황제도, 일본의 천황제 식민패권도, 러시아의 제국도 그리고 지난 세기 이래 미국도 제국적 지배행태를 사이비 종교적 권위를 동원하여 패권주의적 정치/군사권력을 신격화하고 절대화하여 왔다. 지난 세기 이래 이러한 경향은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띤 사이비 '종교성'이 제국적 세력을 절대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래서 '적'을 악마라고 호칭하였다. 이런 소용돌이가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아니 전 세계를 뒤덮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대 세계전쟁들, 냉전체제 대결전쟁들이 연속 되었던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평화의 도>가 아니다. 지극히 불행하게도 한반도의 우리민족과 제국체제하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전쟁과 학살과 전멸적 파괴의 경험을 하여 왔다. 이런 거대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민족은 비극적 희생을 경험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영적으로 성찰하여야 하는 것은 제국의 권력이나 국가 군사체제는 평화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영적 해석학을 동원하지 않아도 본래 권력이라는 것, 특히 제국이나 국가권력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평화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민족은 지난 세기 이래 제국적 패권강국의 각축 사이에서 그리고 분단체제에서 살아오면서 뿌리 깊은 상처를 받고 희생하여 온 민족이다. 현금도 우리는 이념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그리고 외형적으로, 내면적으로 <분단적 존재>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관찰이다. 우리는 이 현실을 영적으로 각성하고 영적으로 치유하며 깊고 강렬한 영적 행동을 통하여 정의에 기초한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동산으로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 신앙공동체에게 주어진 사명, 즉 <분단적 존재>를 극복하는 사명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내적으로 교파와 신학적 차이, 종단적 경계, 인종적 민족적 차별과 적대관계를, 심지어는 이념적 적대관계를 극복하는 평화의 심오한 영적 사역이다. 이것이 모든 적대적 관계를 극복하는 신비로운 영적 비밀이다. 이는 심오하고, 이는 초월적이며, 이는 모든 생명체에게 새로운 생명의 향연에 이르게 하는 비밀일 것이다. 이것이 시운을 분별하는 <영적 해석학>에의 조촐한 초대이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안용준 목사 기자2017-06-16

종교개혁의 정신을 그린 예술가, 뒤러(Dürer)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 교회(Schloβkirche)의 정문에 격문을 붙인 이후 역사는 급격하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한 젊은 수도사의 진리를 향한 열정이 쉬지 않고 한층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은 물론 온 유럽이 기독교 본래의 신앙을 흐리게 하는 요소를 잘 알고 개탄하고 있었기에 루터의 행위는 점점 더 이슈화되어 가고 있었다. 북유럽 최고의 예술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가 고국에서 들려오는 천지를 뒤덮을 것만 같은 소식을 들은 것은 당시 네덜란드 젤란트를 여행할 즈음이었다. 그는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순전히 다른 의도 없이 95개 조항으로 면죄부에 대한 신학적 토론을 제의한 루터의 용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의 신앙, 곧 이신칭의(Glaubensgerechtgesprochen)는 기독교 역사와 문화 예술을 새롭게 여는, 놀랍도록 종교개혁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이러한 발견은 뒤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중세 말기의 기독교가 타락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던 터였다. 1415년 유서 깊은 프라하의 광장 한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던 프라하대학의 총장, 얀 후스의 화형식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로마교회의 도덕적 부패와 면죄부의 판매는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맹렬히 비판되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던 성화상은 이제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어갔다.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뒤러로 하여금 깊은 정신적 충격을 받게 했으며 루터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뒤러가 네덜란드를 여행하고 있을 때는 루터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사태가 긴박했는데, 1521년 그가 귀국했을 때에는 종교개혁의 기운이 최고조로 달해 있었다. 이제 루터의 성경제일주의를 바탕으로 한 예술의 세계가 뒤러의 머리에 보다 상세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상반되는 요소인 독일적 혹은 북방 게르만적이라 할 수 있는 조형정신을 되살렸다. 결국 95개조 반박문에 연이어 계속되는 루터의 운동에 시각예술은 깊이 관여되기 시작했다. 특별히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에게 있어 루터의 종교개혁은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확신케 하는 감동의 사건이었다. 그는 평소 성경 예술 자체의 의미를 연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특별히 그의 ‘요한계시록’에 관한 14편의 목판화는 역사의 결말로 가는 하나님의 설계이며 종말의 의미를 제공하는 역사의 대략적인 설명으로 그동안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명작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뒤러의 그림은 세상의 가치로선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종말의 의미와 믿음을 전달하기 위해 생동감 있는 조형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김성윤 교수 기자2017-06-21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지은 <개미>란 소설의 제2부 <개미의 날>이라는 책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나온다. “당신들은 하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을 측정하고, 틀 안에 넣고, 분류하고 점점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눈다. 당신들은 모든 것을 잘게 자르면 자를수록 더욱 진리에 다가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과학적 분석이고, 입증 가능한 방법만이 진리로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매미를 잘게 자른다고 매미가 왜 노래하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난초 꽃잎의 세포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한다고 해서 난초꽃이 왜 그토록 아름다운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요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처지가 되어보아야 하고 그것들과 한마음이 되어보아야 한다.” 그렇다. 정서적으로 상대의 역할과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있어야 진정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매일매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지도급에 속한 사람들도 말로는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하지만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리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정으로 상대를 역지사지 입장에서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한층 더 평화로워지고 살기가 좋아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으로 다가가지 못한 것은 사고와 행동의 불일치, 믿음과 행동의 불일치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맹자는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의 첫 번째로 '측은지심'을 들었다. 측은지심이란 남의 불행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타고난 마음이다. 다시 말해 나보다 못나고 가진 것이 부족한 타인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이 인간됨의 시작이라고 했다. 이 말은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아야 되는데 그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상대가 주장하는 이유나 생각 등은 듣지도 않고 자기주장만 되풀이 한다면 그것은 대화나 소통이 아니라 아귀다툼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는 궁극적인 원인 중 하나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 사회를 바꾸는 데 도움을 주는 불씨가 될 수 없다. 요즘 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일명 '내로남불'은 전형적인 이중 잣대다. 출근 시간을 어기는 것을 비난한다면 마땅히 퇴근 시간을 지키게 해야 바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출근 시간을 어기는 것도 비난하고, 퇴근 시간을 지키는 것도 똑같이 비난한다. 누가 보아도 바르고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여당과 야당이 뒤바뀌어 각료 지명절차 청문회 과정에서 '내로남불'이란 묵은 유행어가 재조명되는 것도 입장이나 처지에 따라 주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은 우리 모두를 서글프게 만든다. 예의범절, 법질서, 제도 같은 것도 어려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서로를 위한 배려에서 출발한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을, 불교는 자비를, 유교는 어짐을 강조했다. 제각각 다른 표현으로 인간의 도리를 강조했지만, 이를 한마디로 종합해보면 공통된 원칙은 '배려'에 있다. 그렇다면 왜(why) 배려해야 하는가? 무엇을(what) 배려해야 하는가? 어떻게(how) 배려해야 하는가? 그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배려는 선택이 아니라 공존의 원칙이다. 다음으로 배려는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려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현장인 사회와 직장, 가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관심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고 백남기씨 사인이 '병사'에서 '외인사'로 수정된 사례에서 보듯, 이런 현실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였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만일 역지사지 정신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진실과 사실이 달라졌겠는가? 달라질 수도 없고 달라져서도 안 된다. 어느 쪽에서 보든 원칙이 통하고 진실이 통해야 된다. 이제 우리의 일상적인 이중 잣대부터 바꾸어야 한다.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된 습성과 사고방식, 구조의 허물을 뱀이 허물을 벗듯 벗어 던져야 한다. 그것이 소통을 강조하고 배려를 강조하고 적폐를 청산하자는 오늘의 시대정신이다. 김성윤 정책과학연구소 소장은 단국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同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를, 독일 자유베를린대에서 박사를 받았으며, 한국정책과학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단국대학교 법정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사단법인 충남포럼이사장, 통일신문 논설위원, 단국대학교 정책과학연구소 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며, 관심 분야는 미래연구론, 남북관계론, 정책학 이며, 저서로는 〈정책학 개론〉 〈현대 사회의 이해〉 〈한반도 분단극복을 위한 정치리더십〉 등이 있다.

문형욱 대표 기자2017-06-18

어떤 한 청년은 오랜 시간동안 교제를 한 경험이 있다. 이 청년은 오랜 연애 끝에 헤어짐을 선택하였고 그 헤어진 이후에 누군가를 또 만나고 교제를 하지만 얼마 있으면 전에 교제하던 이성이 생각나고 자꾸 신경이 쓰여서 결국은 다시 헤어짐을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건강한 만남을 통해 축복된 사랑을 누리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건강한 만남을 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고 행복한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만남이 때로는 결과적으로 아픔이 있을 때도 분명히 있다. 이 이별의 아픔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느끼고 이해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많은 청년들은 만남을 시작 할 때 이별이 두려워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경우를 종종본다. 특히 결혼 적령기에 있는 청년들은 이제 나이도 들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서 신앙이 있고 큰 하자가 없으면 그냥 힘들고 지친 마음보다는 빨리 결혼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헤어짐이 싫고 상대방에게 버려지는 것 같은 마음이 싫다 보니 연애 초기에 성적인 유혹으로 과도한 스킨십을 한다거나 과도한 선물 공세를 통해 헤어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결국 헤어짐을 겪게 되면 상실감에 대한 어떤 치유도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에게 치유를 받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또 이성교제를 한다. 정작 지금 교제 하고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 보다 계속 전 이성과의 만남을 무의식적으로 비교하거나 상대방의 작은 실수가 있을 때 과도하게 비난을 하게 된다. 우리는 만남을 원하고 그 만남을 통해 축복의 통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귀한 만남에는 아름다운 헤어짐이 있기에 만남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성교제를 통해 교제를 하다가 헤어질 수 있음을 충분히 전제하고 이성교제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대부분 청년들은 '이제 더 이상 헤어지는 것은 힘들어'라는 마음으로 교제를 하다보니 교제 속에서 하지 말아야 말들 그리고 행동들이 나타나게 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서로 인격을 무시하며 비난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상대방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 추후에 다시 이성교제를 하더라도 상실감에 대한 마음의 치유함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고 교제하고 있지만 외로움을 많이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의 교제는 따뜻하고 의미 있는 사랑의 교제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교제를 통해 얻게 되는 상실감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상대방과의 교제를 슬퍼하고 떠나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은 어떠한 이는 1년이 될 수도 있고 어떤이는 더 빠르게 어떤 이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몇 년을 떠나 보내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 이 아니라 충분히 상대방을 축복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이후에 또 다른 사람과 교제를 할 경우 전 이성과의 관계로 신경쓰이는 것이 아닌 지금 현재 만남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과의 관계가 더욱 발전적이며 즐거운 교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별은 아프고 힘들다. 하지만 아프고 힘든 만큼 그 이후의 만남은 행복하고 축복될 것이다. 이별의 아픔을 두려워 상대방을 자신의 힘으로 조정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방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행복한 데이트를 할 수 있기를 간곡히 기도한다.

여주봉 목사 기자2017-06-13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보이신다. 3.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그 일에 동참한다. 4.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성취하신다. 5.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한다. 지난번에 그 중 1번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오늘부터 2번에 대해서 나누고자 한다.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알리신다. 예수님도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셔서 아들에게 아버지의 행하시는 것을 다 보이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뿐 아니라, 신구약에 걸쳐 하나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을 보이셨다. 사실 이 부분이 우리의 사역을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다. 먼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요 신비이다. 예를 들어, 사울의 구원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다 하셨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직면하셨고, 그를 향한 그분의 계획을 그에게 알리셨고, 나중에 아나니아가 그를 위해 기도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치유하시고, 그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 하시면 되는데 뭣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나니아를 찾아가셔서 그에게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시고, 그로 하여금 사울에게 가서 기도해주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가정이긴 합니다만, 만약 아나니아가 그 당시 예수님의 인도에 순종해서 사울에게 가서 기도해 주지 않았더라면 사울은 최소한 그 시점에서는 치유 받지 못했을 것이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즉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신비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신비한 사랑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우리에게는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샘솟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중심적인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관건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으면 하나님 중심적인 사역은 불가능하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았을 때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려면 믿음이 필수적인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지 않으면 믿음이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지 않으면 하나님 중심적인 사역은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좋은 예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성경적인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경이 말하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어떠한 인격적인 관계도 없었다. 즉 그들은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고, 한 번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요 5:37). 그 결과 그들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전혀 알지 못했다(마 16:3).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교리적인 지식에 의한 삶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삶은 성경적인 지식을 토대로 한 그들의 신앙적인 의식(意識)에 의한 삶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삶은 장로들의 전통에 의한 삶이었다(갈 1:14).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확신과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여러 가지 사역들을 담당했지만,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이었다.

정재영 교수 기자2017-06-05

종교개혁과 직업 소명 올해는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는 해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써붙힌 95개 조항에도 많은 내용이 있지만, 그 핵심 내용 중의 하나는 성직주의의 극복이다. 루터는 만인제사장 개념을 통해서 사제와 평신도 간에는 어떠한 존재적 차이도 없음을 천명했다. 여기서 만인제사장은 단순히 오늘날 교회 안의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말하기보다 영적 직분과 세속직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목회를 성직이라고 표현하듯이 성도들의 직업 활동 역시 똑같이 거룩한 직분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모든 신도들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생계 활동을 하기 위해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직업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종교개혁 이래 개신교의 전통은 교회 안에서의 삶에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엄격한 윤리 기준을 개신교인들의 모든 생활에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의 의례로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천 윤리의 행동 지향성이 각자의 삶의 무대 위에서 표출되어 나타나야 한다.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주장과 달리, 현실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그 안에서 초월의 기준에 따라 삶을 영위하며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개신교의 전통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소명 의식이다. 목회에 대한 소명으로 목회자를 부르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직업 활동에 대한 소명으로 평신도를 부르셨고 그 일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길 원하신다는 소명 의식이 바로 정립되어 있어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 소명 의식 이와 관련하여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는 평신도들의 직업 소명 의식에 대하여 설문조사했는데 필자가 조사의 책임을 맡아 진행했다. 아직 발표되지 않은 조사 결과(6월 8일 발표 예정) 중 일부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이번 조사에서는 현재 직업을 갖고 있는 자영업자, 블루칼라, 화이트칼라, 농임어업에 종사하는 응답자 654명을 대상으로 현 직업을 선택하시기 전에 소명을 고려하였는지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 결과 ‘고려했다’ 36.1%, ‘고려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52.0%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응답이 더 많았다. 직업별로 소명 고려 여부를 살펴보면, 자영업자, 블루칼라, 화이트칼라 등 세 직업 중에서 블루칼라에서 29.6%로 가장 낮게 나타났다. 또한 고용형태별로는 임시직이 21.0%로 가장 낮았으며, 다음으로 비정규직이 28.3%, 그리고 정규직이 39.8%로 가장 높게 나왔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어느 정도 안정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일수록 직업 소명을 고려한 경우가 많았다고 응답하여 직업 소명이 직업의 내용이나 귀천과 상관없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직업을 갖고 있는 응답자(654명)를 대상으로 현 직업을 최종적으로 선택할 때 ‘소명’과 ‘연봉, 적성, 이동거리 등 현실적 상황’ 중 어느 것을 기준으로 선택했는지에 대해 ‘소명’ 23.3%, ‘현실적인 상황’ 69.1% 로 나타나 소명을 기준으로 선택한 경우는 4명 중 1명에 불과했다. 또한 이들에게 “현재 종사하는 일이 소명에 맞는지”를 질문했는데, ‘그렇다’ 67.0%, ‘그렇지 않다’ 31.3%로 3명 중 2명가량은 현재 직업이 자신의 소명에 맞는 일이라고 응답했다. 앞의 조사 결과와 비교해서 보면, 직업을 선택할 때에는 소명과 관련하여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택한 이후에 소명에 맞는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신정론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그에게 신정론은 종교적 믿음은 지금의 계층체계를 신의 뜻에 의해 확립된 것으로 인가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베버에 따르면, 특권계급의 경우 자신들이 희소가치를 소유한 것을 신이 부여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행운의 신정론’을 발전시키고, 비특권 계급에서는 현존하는 불평등 구조를 부정적으로 보며 내세에서의 보상을 기대하는 ‘보상의 신정론’을 발전시키게 된다. 이 이론에 따라 해석한다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소명과 맞다고 해석하고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 직업에 대한 만족이나 소명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직업 소명 교육을 확대해야 이와 같이 소명 의식이 바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직업 소명과 관련된 교육을 받은 경험이 3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소명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면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은 자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소명 교육을 받은 사람들 대다수는 실제 상황에 적용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응답했고, 다수는 어떤 직업이든지 소명감을 갖고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응답해 소명 교육이 효과를 보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고용형태별로는 정규직에서 소명 교육이 도움이 되었다는 응답이 가장 높았고, 다음이 비정규직이었고 임시직에서는 가장 낮게 나타나 정규직이 아닌 다른 고용형태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소명 교육의 개발이 필요한 실정이다. 또한 4분의 1은 소명 교육을 통해 직업 선택의 방법이나 소명 있는 직업을 알게 됐다고 응답해 소명 교육이 바람직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직업 소명에 대해 루터는 모든 직업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calling)임을 강조했고, 칼빈 역시 그 어떤 직업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봉사의 현장임을 역설했다. 따라서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모든 직업에 대해 소명 의식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나 일부 직업 소명 교육 중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안정된 직업을 선택하도록 안내하거나 그런 직업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직업이라는 식으로 오히려 그릇된 직업관을 심어주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 결과에서도 4분의 1 가량이 그러한 직업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에서 소명 교육에 대한 만족이 낮은 이유가 될 것이다. 현재 일에 대해 소명으로 인식한다는 응답은 가정주부, 학생, 무직자를 제외하면 매우 낮게 나와 현실의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은 매우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평신도들이 직업 소명 교육을 받을 기회를 보다 확대할 필요가 있다. 평신도들은 이미 세상에 보내진 자들이다.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과 같은 일반 사회 안에서 보내는 평신도들은, 전문 목회자들과 같이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몰두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삶의 자리는 ‘교회’가 아니라 ‘사회’인 것이다. 이미 보내진 사회 각각의 영역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철저하게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사회생활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때 평신도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주체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올바른 신앙인으로서만 아니라 기독 시민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기독교는 우리 사회의 공공 영역에서도 의미 있는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신정현 관장 기자2017-05-19

분단 이후 보수세력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상식적인 국가’라는 인식이었다. 그로 인해 대북정책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거나 북한의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압박 및 고립시키는 전략으로 대변되었다. 북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된 세력이 남북대화를 반대하는 논리는 북한은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 즉 비상식적인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진실일까? 맞지만 틀린 이야기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대화가 없는 상대는 비상식적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잠재적 적국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그래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내가 원하는 것을 알림으로 오해와 오판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는 외교의 상대를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나 지난 9년 동안 우리는 땅을 접하고 있는 상대국가와 극단적인 단절을 경험했다. 9년 내내 외쳐왔던 '전략적 인내', '원칙 있는 남북관계'는 결국 남북관계에 있어서 치명적인 오해와 오판을 불러일으켰다.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포격사건, 3차 핵실험, 미사일 발사실험 등 탈냉전 이후 가장 많은 군사적 도발이 일어났고 2010년 5.24조치 이후 지금까지 남북관계는 얼음장 같은 경색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소위 제3기민주정부를 맞이하였다. 앞선 제1기민주정부와 제2기민주정부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통해 전환기적 남북관계를 실현시켰다. 이는 지난 세월 반복되었던 남북관계에 대한 정치적 수사가 아닌, 실현가능한 것부터 실천하여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자는 실천적 통일방안으로써 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고립과 봉쇄, 압박과 제재는 상식적인 상대를 비상식적 상대로 바꿔버린다. 따라서 대화와 교류, 협력은 상호 간의 오해와 오판을 줄이고 비상식적인 상대를 상식적으로 만들 수 있다. 노무현 정부 5년의 기간 동안 단 한차례도 '대남군사도발'이 없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북미 간의 갈등에 의한 북한의 도발은 미국의 대북제제에 의한 것으로서 남북갈등에 의한 대남도발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북미 간 갈등의 상황에서 남한이 중재자로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지 일주일이 지났다. 제3기민주정부를 자청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요청한다. 김대중 정부로부터 이어져 온 '6.15공동선언'의 정신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 간의 화해와 협력은 통일의 당사자가 나누는 '대화와 협력'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만일 남북 간 공개적인 소통이 불편하다고 판단된다면 비공개 대화 창구를 복구하여 서로의 입장을 오판하지 않도록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지난 9년의 시간동안 이어져 왔던 남북관계의 갈등을 관리하고 이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2017년은 우리 국민들에게 특별한 해가 아닐 수 없다.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 적폐세력의 민낯을 드러내고 부패한 권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부패한 권력과 손을 잡았던 적폐세력은 한반도의 냉전체제에서 기득권을 유지해 왔기에 선거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재인 정부를 향해 빨갱이, 종북 세력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정부 1기와 2기에서 확인했듯이 경제적 협력과 문화적 공감의 확대는 남북 간의 정치적 오판을 줄이고 남남갈등을 줄여나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나는 올해가 가기 전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별개로 북한과의 대화를 열어가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남북 간의 신뢰가 회복되는 시점에 이르러 개성공단의 공장이 다시 가동되고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어 더 많은 국민들이 북한을 방문하게 되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화가 없는 상대는 비상식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는 남북대화의 채널을 총동원하여 보다 많은 대화와 협력을 이뤄냄으로써 제1기 민주정부부터 추구했던 ‘사실상의 통일’을 실현시켜 내기를 희망한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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