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국 교수 기자2017-07-04

한참 분단고착의 강풍이 몰아치고 있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실망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분단고착의 강풍 속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의 씨앗을 심으려면 어떻게 할까? 분명 때가 되면 강풍이 줄어들고 햇볕이 비칠 텐데 그 때에 결실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정치외교학과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에게 다음과 같이 첫 인사를 보내고 있다. "여러분의 정치외교학과 입학을 축하한다. 여러분은 정답이 하나였던 세계에서 정답이 여러 개인 세계로 진입했다." 문득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의 고사가 떠오른다. 그가 아직 진왕(秦王) 정(政)이었을 때 그는 중국통일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한창 주변국인 조(趙), 위(魏), 한(韓)의 무력공략에 심취해 있을 때에 그의 승상인 이사(李斯)가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였다. 일종의 소프트파워 전략이었는데 흡수 대상국의 탐관오리들에게 금덩이를 안겨주어서 진나라의 통일정책에 협조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진왕 정이 소리쳤다. "내 금덩이를 왜 그런 자들에게 준단 말인가?" 이사가 대답하였다. "왕이여, 왕이 그들을 정벌하시면 어차피 그 금덩이는 다시 왕의 것이 됩니다." 진왕은 그대로 행했고 중국은 통일되었다. 통일 후 그는 지부(之?)에 올라 친히 공덕비를 세우고 거기에 다음과 같이 새겨 넣었다. "육국(六國)의 군주들이 사악하고 탐욕스러워 백성들을 학살하니 시황제께서 이를 불쌍히 여겨 그들을 주살하고 천하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한반도 평화통일이 선한 목표라 해도 진시황처럼 뇌물과 암살과 기만술을 동원할 수가 없다. 단지 진시황의 고사를 본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대표적으로 남북주민들의 인권보호는 강풍 아래에서도 실천 가능한 평화의 씨앗이다. 압제와 고문으로부터의 자유에서부터, 결핍과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사상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도 포함된다. 북쪽의 동포들이 이러한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남쪽의 동포들이 검소 절제하여 모은 돈을 쓴다면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금 모으기를 하는 것만큼이나 국내외적으로 칭송을 받을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몇몇 정신 나간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비판하거나 반대할 수 있지만 사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냉전이 열전으로 바뀐다 해도 실천 가능하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신앙적, 역사적, 지리적, 교육적 차원에서 다양한 씨앗심기가 가능하다. 늦가을에 보리를 파종하면 한 겨울, 강풍의 시절이 지나고 푸르고 푸른 싹들이 솟아나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찬바람을 무릅쓰고 눈물을 흘리며 평화통일의 씨를 뿌리면 때가 차매 마침내 평화통일의 열매를 맛보게 될 것이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안용준 목사(원천교회, 아트미션) 기자2017-07-17

확고한 성경적인 기초 위에서 루터가 구약의 우상숭배 금지를 이해하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루터의 언행은 이미지 문제에 있어서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모세의 율법에서 조차 우상숭배 금지는 우상으로 숭배되지 않는 그림이나 조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이나 혹은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를 앞의 계명, 즉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야말로 뒤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과 결부되는 중심사상이며, 기준이며, 목표로 해석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로부터 루터는 “그림이나 조각은 우상숭배 없이 만들어졌고 그러므로 그것들을 만드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으며, 중요하게 말씀하신 ‘너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명은 원래대로 보존된다”는 해석을 내린다. 십자가 형상은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금지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특별히 루터는 잘못 숭배되고 있는 성상은 폭동적인 무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서와 권위에 의해서 행해질 경우 교회에서 제거될 수 있다고 하였다. 1524~25년 ‘하늘의 예언자에게 거역하고, 이미지와 성찬식에 관하여’(Wider die himmlischen Propheten, von den Bildern und Sakrament)에서, 이미지에 관해 길게 다루면서 급진적인 성상파괴자들과 맞서기 위해 성상에 대해 상당히 수긍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며, 이미 1522년 “성만찬에서 두 가지(떡과 잔)를 받는 데 관하여”라는 제하의 설교에서 성상이 우상숭배로 기우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하되 성상을 두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여, 프로테스탄트 예술에 시각예술의 가능성의 길을 열어 놓았다. 루터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미지를 느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실상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을 ‘자연적인 인간심리 과정의 부분’(natural part of psychological process of man)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종교 예술은 이러한 인간의 성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십자가와 성인들같이 기념 및 증거를 위한 형상들, … 여호수아의 돌(수 24:26) 및 사무엘의 돌(삼상 7:12)에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념과 증거를 위하여 그것들은 칭송할 만하고 귀중하다”고 본다. 또한 성경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그림은 성경의 글과 유사한 방법으로 교훈을 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기억을 돕고 증인의 역할을 하는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김영식 목사 기자2017-07-18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쉬운 것이 신뢰다. 지난 9년의 남한 보수 정권을 통해 우리는 남북관계 신뢰가 얼마나 금방 완전히 허물어질 수 있는지를 목격했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금강산, 개성 관광이 중단된 것을 시작으로 남북관계 위기는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거쳐 급기야 개성 공단 폐쇄로까지 이어지며 2000년부터 시작된 남북 신뢰 평화 관계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물론 여기에는 4차까지 이어지는 북한의 핵실험을 막아야 한다는 대북 제재와 압박이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보수 정권의 제재와 압박의 대북 관계는 역설적으로 북한의 핵기술 개발이 고도화, 경량화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고, 북한은 최근 미국 본토까지 도달하는 ICBM 개발까지 마쳤다고 보고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 문제는 비핵화가 아니라 동결의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로 한국과 미국의 보수정권이 펼쳐온 제재와 처벌의 대북관계는 북핵 실패로 입증되고 있다. 그나마 남북을 잇고 있었던 서해 군 통신선과 판문점 연락사무소 채널마저 작년 2월 끊어버렸기 때문에 긴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남한 정부가 휴대용 확성기를 이용해서 북쪽을 향해 소리쳐 통보한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남북관계의 파탄 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대북 전략적 인내라는 무정책에 일방 편승하며 외교의 주권을 포기했던 결과는 결국 스스로를 G2라는 이익모순의 한복판에 갖다 놓은 사드 배치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런 엄혹한 한반도 평화 현실의 시계 제로 속에서 신임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6일 소위 신 베를린 평화 선언을 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복원을 선언했다. 신 베를린 선언이라 함은 일찍이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베를린 선언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이루어냄으로 실제적인 평화정착의 단계를 마련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 선언의 핵심은 남북한이 합의했던 6.15와 10.4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지난 9년간 중단되었던 한반도 평화정착의 과정을 다시 시작하자는 매우 원론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북한은 한반도평화 관리의 남한 주도권을 인정한 한미정상 합의가 나온 다음날 보란 듯이 ICBM을 성공시킴으로 북한의 관심은 남북관계에 있지 않고 오로지 미국에 있음을 보여줬다. 이는 지난 9년간의 남북관계 단절 혹은 무효 경험이 남북 평화 관계의 복원을 주장한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을 믿지 못하겠다는 완곡함의 표현이다. 남한을 상대로 관계를 복원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5년 후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을 북한이 또 다시 시작하려면 보다 더 획기적이고 분명한 구체적인 제안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군사회담과 적십자 회담의 제안은 의미 있는 진전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북한의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오롯이 신뢰 회복에 대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펼쳐내는 수밖에 없다. 돌아선 북한의 마음을 되돌리며 무너진 신뢰를 복원하는 것은 더 많은 수고와 인내를 요구한다. 북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대화 시도와 노력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길 바란다. 필요하다면 대북 특사라도 보내야 한다. 집권하자마자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에 보냈던 특사를 가장 가까운 북한에 보내지 못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북한은 남한의 대화 제의에 마음을 열고 만남의 자리로 나오길 바란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남북한의 주도권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7월 27일 휴전협정 64주년에 서로에 대한 비방이 멈추고 군사분계선의 긴장 완화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험부터 시작하길 바란다. 통신선이라도 우선 복원하자. 남북한 신뢰 회복은 쉬운 것, 가능한 것부터 천천히 지속적으로 해나가자.

문형욱 대표 기자2017-07-25

실패라는 단어는 우리가 듣고 싶지 않는 단어 중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성공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실패'라는 단어가반드시 따라다닌다. 오프라 윈프리는 “실패는 우리가 어떻게 실패에 대처하느냐에 따라 정의된다(Failure is defined by our reaction to it.)”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실패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패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일까? 내가 이 사람과 잘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왜 헤어지게 하셨을까?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않는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실패를 느낀 후의 반응인 것 같다. 건강하지 않은사람은 이성교제를 할 경우 실패하지 않으려고,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쉬울 때에도 자신을 포장하고, 거짓말로 상대방을 대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문자적인 해석으로 진실에 집착하기도 한다. “널 사랑해”라고 퉁명스럽게 이야기 해놓고선 “내가 널 사랑한다니까. 왜 안 믿는거야!”라고 소리 지르거나 상대방의 말실수 하나에 집착하여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싫어도 무조건 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그것이 힘들어 상대방이 헤어짐을 요구하면 자신을 학대하며 '난루저'라고 죄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는 건강한 이성교제를 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이성교제를 실패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나에게 이 친구와 해어지게 하신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마음 속 깊이 고민하고 찾아 보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도 연애의 실패를 다시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헤어질 수 있도록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루저이기 때문에 실패하도록 놔둔 것이 절대 아니라,더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한 준비의 과정이라는 것! 하나님은 연애 과정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지금도 우리를 위로하고 계심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실패하면 마음은 분명 아프다. 하지만 마음이 속상하고 아프다고 해서 루저일 수는 없다. 아픈 마음은 좋은 공동체에서 함께 기도하고위로하며 치유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헤어짐은 때로는 우리에게 더 큰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수 있다. 크리스천 청년들은 단 한 사람도 루저인 사람이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이기 때문이다.우리는 모두 내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확신을 가지고 연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축복한다.

허호익 교수 기자2017-07-25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1948.9.9)에는 "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의 자유를 가진다"(제2장 14조)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한의 김일성 역시 다른 공산국가처럼 집권 초기부터 '종교는 아편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 도구'라고 여겼다. 8.15 해방 전까지 북한에는 교회가 2600여 개나 있었고 명산마다 유명한 사찰(寺刹)이 많았다. 6.25전쟁 이후 북한은 20년간의 종교탄압과 종교말살의 정책을 시행하여 왔다. 교회당은 소멸하고 가정교회만이 존재해 왔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그 동안 유명무실하였던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중지도위원회 등의 활동이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1972년 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 헌법>에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가진다"(제4장 54조)라고 수정하였지만,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포함시킴으로써 종교 탄압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1980년대 초부터 북한의 개신교, 천주교, 불교 관계자들이 제3국을 통한 남북 종교인 교류를 이어 왔으며, 이런 배경에서 김일성의 종교관이 크게 달라져 1882년에는 공식적으로 "수령님께서는 종교를 악용하는 반동적 지배계급과 제국주의자들의 책동을 배격하시었지 종교와 종교 신자를 배척하신 일이 없습니다. 종교에는 나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있습니다. 종교에서는 사람들이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좋은 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1988년 11월에 평양에 처음으로 봉수교회가 세워졌고, 1988년 9월에는 장충성당이 세워지고, 1992년 12월에는 칠골교회가 준공되었다. 1992년 4월에 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회주의 헌법>에는 제5장 68조를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는 종교 건물을 짓거나 종교건물을 짖거나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질서를 헤치는 데 이용할 수 없다"라고 개정하였다. 이러한 종교 정체의 변화는 1981년 판 <조선말 사전>과 1992년 판 <현대조선말대사전>의 기독교 관련 용어들의 변화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종교는 인민대중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고 착취와 억압에 무조건 굴종하는, 무저항주의를 고취하는 아편"이라 정의한 것을 1992년에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 신앙 또는 믿음을 설교하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세계관"이라고 변경하였다. 교회를 "반동통치계급이 정치적 비호 밑에 근로자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예수교의 교리와 사상을 선전하여 퍼뜨리는 거점"이라 규정한 것을 "기독교에서 여러 가지 종교적 의식을 하고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선전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1981년에는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이 예수교를 선전하며 보급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에 파견하는 종교의 탈을 쓴 침략의 앞잡이"를 선교사라고 정의한 것은 "기독교를 보급 선전할 사명을 띠고 다른 나라에 파견한 사람"으로 수정하였다. 북한의 경우 실제로는 종교의 자유가 완전 보장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 종교아편설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는 사실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남북대화와 통일을 향한 큰 장애가 제거된 큰 걸음의 전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종교를 아편이라 주장하는 북한'에 대적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반공정신으로 신앙을 무장해야 한다고 여전히 주장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송태근 목사 기자2017-07-14

미국의 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 기념식 이렇게 탄식하였다. “노르망디 상륙 50주년이 갖는 의미는 우리 장병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유를 지켜냈다는데 있지 않다. 이 상륙작전이 갖는 현대적 의의는 불필요한 희생을 치르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는데 그 의미를 두어야 한다.” 레이건의 지적처럼 한국전쟁도 우리 국가에 큰 아픔을 주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분열은 – 국경만이 아니라 이념까지도 – 지금까지 상처를 덧나게 하고 있다. 전쟁은 참혹한 '현실'이기에 우리의 질문은 매우 근본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참혹한 전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당시 한국전쟁을 지휘했던 맥아더 장군은 퇴역한 후 기자들의 “전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저는 전쟁은 신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 통찰력 있는 답변 안에는 전쟁이 정치나 경제의 논리보다 인간 본질에 관한 문제임이 담겨 있다. 교회에게 전쟁과 분열의 아픔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먼저 전쟁은 죄에 대한 심판이다. C.S.루이스는 “나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 더더군다나 나는 고통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이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오만했겠는가?”라고 말한다. 혹자는 무고한 인명피해를 언급하며 휴머니즘의 시각으로 이해하여 전쟁을 전적으로 부인하려 한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 가운데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단호하게 명시한다.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개인의 죄뿐 아니라 공동체의 죄에 대한 책임도 주어진다. 각 개인들로 구성된 인류는 전쟁을 통하여 죄로 인한 끔찍한 책무를 경험해 왔던 것이다. 그렇기에 전쟁은 인간에게 죄의 심각성을 경고한다. 1차 세계대전 이전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주장했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지식을 깨달음으로 진보할 수 있으며 종국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이 견해는 근래 소위 '평화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인간은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국가는 전면적으로 전쟁을 포기하는 구체적인 정책을 펼쳐야 하며, 개인의 양심을 강조하는 것이 본래적이란 주장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우리는 무슨 권리로 평화를 요구하는가?” 인간에게 평화를 지킬 능력이 존재하는가? 지난 세기 인류가 저지른 전쟁은 오히려 인간의 철저한 무능을 깨닫게 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을 기대하게 하는 역할을 분명히 해 왔다. 이제 우리의 처절한 현실은 스스로를 낮춰 하나님의 섭리에 소망을 두게 한다. 마지막으로 전쟁이 주는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경건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촉구이다. 시편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라고 외친다. 고난이 그를 정결하게 하며, 인류를 정화시켜 나가게 된다. 인간은 왜 전쟁을 멀리하고 평화를 원하는가? 사도행전 9장 31절은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구 평양신학교의 자리를 차지하며 여전히 꼿꼿이 서 있는 동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우리가 통일을 바라는 이유도 저 동방의 예루살렘이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소망에 있다고 할 것이다. 유대인 학살을 추모하기 위해서 건립한 야드바셈 박물관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망각은 망국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 전쟁의 상처는 치유되어 그 흔적은 희미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전쟁이 교회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또렷해야 한다. 특히 허리가 끊어진 분단국가 속의 교회는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평화의 근원이 되시는 아버지 앞에 겸손히 인간의 무능을 고백하며 아버지만이 주시며 유지하실 수 있는 평화를 갈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김성윤 교수(단국대, 객원 논설위원) 기자2017-07-11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에게 족적을 남긴 창조적 천재들은 그림을 듣고 음악을 보았다고 한다. 세계적인 성악가인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피아노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음악을 상상하고 그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한다. 레 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산이나 강, 바위를 보며 전투장면을 상상 했는가하면 다양한 형태를 연상하면서 무한히 많은 형상을 머리에 그리고 마음속에 새겼다고 한다.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관찰을 더 많이 하고 머릿속으로 형상을 그린 다음 모형을 만드는 등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세상을 보았다. 제4차 산업혁명에 속도가 붙으면서 인문학적 상상력이 보다 중요시 되고 있다.“영철이 에게 전화 좀 걸어줘” 바로 전화가 걸린다. “오늘 찍은 사진 좀 보여줘” 오를 총 사진을 4장 찍었습니다. 라면서 사진이 뜬다. 런던의 오늘 날씨 좀 알려줘, 바로 섭씨 몇 도고 약간 바람이 불고 흐린 날씨라고 알려 준다. 이것은 가상현실이 아니라 지금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실이다. 갤럭시 8 정도만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 보다 빨리 안전하게 적응하면서 앞서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야한다.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창의적인 인재는 점점 부족한 할뿐 만아니라 단순 반복형 인재의 활동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식이 보편화 되면서 지금까지처럼 창조인 사고는 소수 영재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교육을 통하여 누구나 창의적 대가로 발 돋음 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는 남의 것을 베끼는 것으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3D프린트로 누구나 복제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부품이나 사물을 쉽게 만들 수 있다. 자동차는 2만 여개의 부품이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인간을 위한 최고의 걸 작품이다. 그 자동차마저 나만의 디자인과 나만의 특징을 살린 세상에 하나뿐인 마이카로 제작이 가능해 졌다. 이런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창조성과 혁신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근한 예로 인류 문화가 시작된 시점에서 2003년 까지 만들어낸 정보의 양 만큼이 2일이면 만 만들어 지고 있다. 이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이런 정보를 누가 빨리 종합하고 융합하느냐가 생존의 열쇠가 되었다. 어쩜 우리들은 데이터와 정보의 풍요 속에서 인간보다 기계에 점점 더 의존해간다. 그 결과 많은 편익도 생기지만 적응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만 바꾸면 새로이 펼쳐지는 세계에서 많은 성공의 기회를 포착할 수도 있다. 잘 적응하고 남보다 앞서 갈수 있는 성공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반복해왔던 일상적인 사고방식부터 바꾸어야한다. 2016년 1월 20일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 World Economic Forum)의 핵심 주제는 제4차 산업혁명의 이해(Mastering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었다. 이 회의에서 인공지능, 로봇기술, 빅데이터, 생명 과학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 조만간 도래 할 것이며 2015년부터 2020년 까지 새로운 일자리는 200만개정도 생겨날 것이나 사라질 일자리는 750만개나 된다고 하였다. 사람보다 훨씬 안전하고 숙련된 무인 자동차, 인공지능 왓슨 의사, 인공 조리사, 페퍼란 로봇 종업원 등등 공상과학에서나 등장했던 상상 속의 일들이 지금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일어나면서 우리 일상생활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기술적 혁신에 따른 사회적 변화는 생활의 편의성, 생산성 향상 및 새로운 일자리 창출 등의 긍정적인 변화에 기반 하여 발전하였다. 그러나 제4차 산업혁명은 생산성 향상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에 일자리 감소라는 부정적 측면이 있는 양날의 칼이 되었다. 따라서 제4차 산업혁명에 편승하지 못하거나 뒤쳐진다면 그야말로 나락의 늪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제4차 산업혁명의 저자 클라우스 슈밥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 사이에 점차적으로 양극화가 심화 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생존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 되었다. 성경의 잠언 4장5절에서6절에는 지혜를 얻고 예지를 얻으라. 지혜를 저버리지 말고 지혜를 사랑 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 라고 쓰여 있다. 지혜를 얻지 못하고 예지를 얻지 못한 국가일수록 1,2,3차 산업혁명 당시 잘 적응하지 못하였었다. 제4차 산업혁명을 목전에 둔 현대국가는 이를 잘만 이용하면 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인적, 물적 자원의 규모가 작은 우리나라는 제4차 산업혁명을 잘 활용하면 부유한 선진국으로 도약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반대로 제4차 산업혁명에 동참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참담 할 것이다. 구한 말 세계정세에 둔감한 나머지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라는 굴욕의 역사를 간직하고 살아야했으며 그 잔재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태풍의 눈이 되어야한다.

정재영 교수 기자2017-07-03

목회자 노후 준비 미흡 우리 사회가 고령 사회(인구의 14%가 65세 이상 고령 인구인 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노인의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기대 수명이 80세를 넘어 섰고, 이제 100세 시대라는 말도 희망 사항만은 아니게 됐다. 여전히 지구의 다른 편에서는 60세 이상 살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면 장수한다는 것은 분명 복으로 여겨질 만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장수를 한다고 해도 형편이 궁핍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살아야 한다면 그러한 삶은 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노후 생활에 필요한 자금은 얼마나 될까? 국민연금공단 조사에 의하면, 50대 이상자가 노후에 필요로 하는 생활비 수준은 최소 노후생활비가 부부 기준으로 월 174만원, 개인 기준으로는 월 104만 원이었다. 또한 적절 노후생활비는 부부 기준으로 월 237만원, 개인 기준 145만 원으로 나왔다. 최소생활비는 특별한 질병 등이 없는 건강한 노년을 가정했을 때,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저 비용을 말하며, 적정생활비는 평범한 생활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정도의 비용을 의미한다. 목회자의 노후 준비는 어떠할까? 역시 국민연금공단의 <성직자 노후보장 실태와 국민연금 가입 제고 방안>에 따르면, 개신교 목회자의 월평균 소득은 202만 원으로 천주교와 불교 성직자들보다 약 2배 정도 높고, 4명 중 1명은 마땅한 노후준비 수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평균 생활비 지출은 개신교 131.69만원, 천주교 69.95만원, 불교 79.38만원이었다. 천주교나 불교와 달리 개신교 목회자들은 가정을 꾸리고 있기 때문에 단순 비교를 하기는 어렵다. 4인 가족 기준으로 월 소득이 200만원 수준이라면 정부로부터 복지 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적은 액수다. 더 심각한 것은,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의 31.3%가 마땅한 노후준비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개신교의 경우 그 비율은 26.3%로 전체 평균보다 더 낮았다. 목회자 4명 중 1명은 노후가 불안한 상황이다. 실제로 목회자의 34%는 ‘노후에 대해 매우 걱정한다’고 답했고, 은퇴 후 가족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무려 목회자의 88.9%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개신교 성직자들 중 노후를 준비하는 방법으로 가장 많은 49.6%가 '종교단체(교단) 제공 연금제도'를 선택하고 있었고, 이어 34.7%가 '공적연금제도'에 의존하고 있었다. 연구원은 2015년 12월 기준 일반인의 18~59세 총인구 대비 공적연금 가입률이 69.3%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성직자의 공적연금제도 가입률은 상당히 낮은 편이라며 의료·의식주·여가 등과 관련된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성직자들의 노후에 대한 준비 수준이 상당히 열악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또한 종교단체에서 제공하는 자체적인 노후보장제도 역시 급여수준이나 적용범위 측면에서 상당히 열악하고, 개인연금이나 가족으로부터의 지원 역시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은 이번 연구에 포함되지 않은 소규모 교단(종단) 소속 성직자들에게는 훨씬 더 심각한 양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고도 덧붙였다. 노후 문제를 공론화 해야 개신교 200여 개 교단 중 연금 제도를 운영하는 곳은 합동, 통합 등 주요 교단 8곳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나마 연금 제도를 운영하는 교단 소속 목회자들의 연금 가입률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소득이 워낙 낮아 생계유지만으로도 벅차다 보니 연금을 납부하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 교단들의 연금이나 은급제도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투자 실패 등 연금의 부실 운영과 고령화 가속 등으로 인한 기금고갈을 우려하고 있다. 머지않은 시기 연금이 고갈될 수 있다는 우려에 평생을 목회사역에 전념하다 연금만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교회나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의 염려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목회자들의 노후 대비는 의도치 않게 교회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평생 존경받던 목회자가 은퇴 과정에서 지나친 은퇴 자금을 요구하다 성도들과 갈등을 빚고 하루아침에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다. 또한 평생 자신이나 가족도 돌보지 못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한 목회자들이 노후에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돈 문제를 드러내놓고 얘기하기를 꺼려하는 우리 풍토에서 목회자가 나서서 은퇴 이후 예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쉽지 않고 교인들도 뚜렷한 계획 없이 어떻게 되겠거니 하고 미루다가 결국 은퇴 시점에 이르러 서로의 견해 차이로 갈등이 불거지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들의 은퇴 자금에 대해 합리적인 기준을 마련해 놓고 미리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목회자들의 은퇴 자금으로 얼마가 합리적인지에 대해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목회자의 사례비에 대한 합리적인 기준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천차만별인 사례비에 대하여 적정 기준을 정하는 데 합의를 이루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전체 한국 교회에 대한 은퇴 자금이나 예우에 대해서는 더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겠으나 현재의 사례비 수준에 따라 적절한 은퇴 예우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것이 당장의 현실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시급한 것은 형편이 어려운 작은 교회들이다. 작은 교회들의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생계유지도 어려운 상황에 노후나 은퇴 이후를 준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더라도 노후를 준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최소한의 사례비에 대하여 성도들과 논의하듯이, 은퇴 이후에 대해서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교회에서 공론화하여 준비해야 한다. 사례비의 일정 비율을 은퇴비로 적립을 하거나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연금제도에 가입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교단 차원의 지원도 필요하다. 연금제도가 없는 교단들은 하루속히 연금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고, 또한 연금이 부실하게 운영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교단 안의 비전문가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로 투명하고 공정하게 기금을 운용해야 할 것이다. 개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듯이 전체 한국 교회의 공동체성 곧 공교회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교단 차원에서 힘을 모아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복지의 강화를 위해 증세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듯이 한국 교회의 상생을 위해 각 교회마다 공적 자금을 마련하여 목회자의 노후를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재정적 여유가 있는 교회들이 형편이 어려운 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해 더 많은 재정적 부담을 감당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무조건 청빈한 삶을 살기를 요구하거나 기대할 것이 아니라 노후에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제 목회자들의 노후에 대해서도 공교회성 차원에서의 논의를 확대해야 할 때다.

이정기 목사 기자2017-06-27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코드정치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그때부터 친노, 친박, 친문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고, 노사모, 박사모, 문사모 모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을 가까이 한 사람들이 실세가 되었다. 사람이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는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1세기는 노하우(Know how) 보다 노후(Know Who), 누구를 아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정부 인선에 대해 "개혁적 인사들이 일거에 내각과 청와대의 대세를 장악해야 한다"고 밝힌 것처럼 강경화 외교부장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임명을 야권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강행 처리하였다. 국방부 장관 후보자 외에는 모두 관료출신이 아닌 외부인인 것을 볼 때 일각에선 개혁 성향의 전문가들을 앞세워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반대로 대통령이 탄핵되니 그 실세들은 어떻게 되었나? '권력무상', '권불십년'이란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도 권력은 요술방망이와 같다. 높은 직위도 주고, 부귀영화도 준다.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고 또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이 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양심이다. 그러기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의 시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심을 챙겨야 한다. 권력은 남을 위한 봉사용일 뿐 특권을 누리고 거드름을 피우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권력이 양심을 잃을 때 권력은 그 권력을 가진 주인에게 복수를 하고 징벌을 내린다.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이다. 아삽은 다윗 왕 때에 여호와의 전에서 봉사하는 성가대 지휘자였다. 성전 예배용 찬송시를 여러 편 작사 작곡한 인물이다. 그의 노래 12편이 시편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런 저런 세상 경험과 인생 경험을 하고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편 28절)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며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며 살겠다고 선포한다. 이 한 구절 속에서 아삽이 생각하고 있는 행복의 가치기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땅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멀리 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의 결국은 어떠한지 시73편 27절은 이렇게 말한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하나님을 멀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성도들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힘쓴다. 멀어지면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 멀어지면 안 된다. 시험이 들어도 하나님과 멀어지면 안 된다. 아픔과 슬픔이 있어도 하나님과 멀어지면 안 된다. 탕자는 아버지와 멀어지자 양식이 떨어지고, 신발도 떨어지고, 위신도 떨어지고, 돼지보다 못한 인생으로 전락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도망하여 욥바로 내려가고, 배 밑층으로 내려가고, 결국 물고기 뱃속까지 내려간다. 나오미의 가정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먹고 살겠다고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모압 땅에 내려가 하나님과 멀어지자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는 비극이 생긴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과 멀어지자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형통했다.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여 승천했고, 노아는 120년을 말씀대로 준행하여 방주 짓고 구원받았고,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삭은 순종하여 블레셋 땅에서 100배의 수확을 거두어 거부가 되었고,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이 되었고,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진정한 복은 세상의 번영이나 형통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쁠 때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슬플 때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이 사실을 깨달은 아삽은 이렇게 고백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73:25~26) 대통령을 가까이 해도 때가 되니 높아지는데,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친박, 친노, 친문이 아니라, 친하가 되어야 한다. 친하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이다. 노사모, 박사모, 문사모 회원이 아니라 주사모 회원이 되어야 한다. 주사모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아삽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선포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전파하며 살자.

서광선 교수 기자2017-06-25

광화문 광장의 촛불은 반(反)통일, 반(反)민주, 어둠의 세력을 물리쳤다. 민주주의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대다수 유권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을 뽑았다. 대한민국의 주인들은 촛불을 높이 들고 민주주의와 통일을 염원했다. 지금 막 새 대통령을 뽑은 것뿐인데, 새 내각도 구성하지 못했는데도, 아직 미국 대통령과 만나기도 전인데도, 국민들은 평화 통일이 바로 문 앞에 온 것처럼 가슴이 부풀어 있다. 90이 내일 모래인데 지난번 금강산 관광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제 죽기 전에 우리 집 할머니 손잡고 금강산에 등산은 못하더라도 금강산을 가까이에서만 보고와도 좋고, 금강산 냄새라도 맡아보고 싶다. 가 보고 싶어졌다. 새 대통령이 됐으니 갈 수 있을 것 같다. 10년 전에는 교회 친구들과 함께 중고 대우 자동차를 싣고 개성까지 가서 북한 친구들에게 선물로 전달했다. 평양의 옥류관 식당에서 준비해 왔다고 하는 점심 대접을 거하게 받았다. 12시간 안에 개성공단 문을 닫을 수 있었다면, 이제 새 대통령 말이 떨어지자마자 휴전선이 열리고 무료하게 놀고 있던 사장님들과 직원들이 달려가게 될 것이다. 2017년 올해 안에 이 두 가지 정도는 이루어 질 것 같은 느낌이다. 헛된 희망사항이 아닐 것 같다.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나라다운 나라”, “민주주의”, “박근혜는 물러가라”를 외칠 때는 평화를 원했고, 민주주의를 갈망했고, 나라다운 나라, 통일되는 나라를 원했기 때문이다. 우리 새 대통령은 트럼프 미국대통령을 만나서 이렇게 결정하기를 바란다. 1. 1953년 7월에 중국과 미국과 북한이 체결한 휴전협정을 미국과 대한민국이 앞장서서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협상을 개시하자. 1. 평화협정에는 한반도 비핵화를 명기한다. 1. 평화협정에는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모든 외국군대와 무기의 철수와 함께 그 시기와 절차를 명기한다. 1. 평화협정은 남과 북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 개통을 가능하게 한다. 1. 평화협정은 남과 북의 주민들의 여행과 각종 문화 체육 학술 종교 등 행사를 허용하도록 한다. 위와 같은 제안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1988년 2월 29일, 이날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기립박수까지 쳐가면서 눈물로 채택한 통일 선교 선언문에 담았던 것이다. 2018년, 내년이면 이 “88 선언” 40주년이 된다.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이 기차 타고 휴전선 넘어 평양에 가서 봉수교회, 칠골교회, 천주교회, 지하 가정교회 교인들과 함께 손에 손을 마주잡고 촛불을 높이 들고 통일을 목이 터지도록 노래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본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발송하는 평화칼럼으로 평화통일연대 홈페이지(http://www.cnpu.kr/44)에서 열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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