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위임목사 2021-04-04

1597년 9월 15일 진도 앞 바다인 울돌목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조선의 수군은 단 열두 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가진 일본군과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인해 조선 수군들은 불안하고 두려워했다. 이미 수군 장수 중 한 명은 전장의 불리함을 보고 도망가기까지 했다. 그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을 불러 오기병법의 경구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를 인용하며 엄하게 권고했다. 드디어 다음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수와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조선의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죽음을 각오한 전술과 기세로 인해 임전했다. 놀랍게도 전투는 조선군의 압도적인 대승이었다. 이 전투가 바로 열두 척의 배로 일본군의 수군장군 구루시마를 죽이고 적의 병선 31척이 격파하여 패퇴시킨 명량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의 피해는 두 명의 전사자와 세 명의 경상자에 불과했다. 이순신 장군이 이 전투를 앞두고 했던 ‘사즉생 생즉사’의 명령은 불가능한 전쟁이라고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다독이는 것이 아니다. 미리 질 것으로 생각하고 겁먹지 말라고 촉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말 그대로 이 전투에서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병사들이 모두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즉생의 ‘사’와 ‘생’의 주어가 다르고, 생즉사의 ‘생’과 ‘사’의 주어가 다르다. 그들이 죽어야 그들의 가족과 나라가 살고, 그들이 살면 그들의 가족과 나라가 죽는다는 의미다. 비록 이순신 장군이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지만, 위와 같은 의미에서 그의 명령은 복음의 진리에 닿아 있다. 예수님께서는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3)라고 말씀하셨다.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자는 자기의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자기 생명을 잃는 대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부활을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 바로 죽음이다. 십자가의 진리는 죽음과 부활이다. 죽도록 노력하는 것도, 죽을 각오로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살고자 더 치열하게 애쓰는 모습이다. 우리는 죽는 것을 죽을 만큼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결국 평생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살게 된다. 내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도, 내 물질을 포기하는 것도, 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물론 때때로 양보와 포기를 선택할 때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러한 행동의 동기에는 ‘하나님께서 더 크게 채워주시겠지’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죽는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더 잘 사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셨고, 가치 없는 우리의 생명을 얻기 위해 존귀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 예수님의 죽음을 따라서 스데반이 죽었다. 빌립·베드로·바울도 죽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했고, 예수님의 생명을 얻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죽음을 생각하자. 죽음을 실천하자. 말로만 하는 죽음이 아니라 진짜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자신의 땅을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했던 초대교회의 나눔이, 바울을 높여 주었던 바나바의 섬김이, 환난과 핍박에도 끝까지 사명을 감당한 바울의 결단을 실천해야 한다. 적당히,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남들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자. 우리가 살기를 포기하고 죽을 때, 신음하고 있는 한국 사회와 교계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정용구 선교사 2021-04-12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선교사들에게 온라인 회의와 강의들이 많아졌다. 긍정적인 것은 온라인이라는 도구로 인해 전 세계에 퍼진 선교사들을 자유롭게 만난다는 점이다. 반면 소수에 의해 주도되는 온라인 회의나 강의들은 일방적인 전달이 대다수로 충분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코로나 시대를 이기기 위한 선교적 방법으로 ‘온라인을 통한 선교사들의 독서 나눔 모임’(북 클럽, 북 스터디 모임 등)들이 진행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필자도 ‘독서 나눔 모임’을 경험해 보니 파송단체와 선교 사역지가 다르지만, 함께 책을 읽고 자신들의 삶의 이야기를 덧붙이는 나눔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는 깨달음과 선교지의 정보 들이 소소한 즐거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선교사들은 책에 대한 학구열이 상당히 높았다. 책에 대한 분석과 연구와 요약 노트들을 공유하는데 상당한 수준의 자료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특히 선교지에서는 책에 대한 아쉬움들이 많았기에 지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모임이쉽지 않다. 그만큼 연구·분석으로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됨이 모두에게 큰 유익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독서모임을 경험하면서 이 모임을 ‘한국교회에서 진행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특별히 나이 많은 성도들이나, 책과 거리를 두는 이들을 위해 선교 관련동영상’들을 찾아보고 이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물론 취지에 적합한 잘 준비된 모임 리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코로나로 인해 발생된 특별한 기회인 ‘온라인’으로 현지 선교사들의 참여가 가능하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의 선교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회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좀 더 넓게 적용하면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사의 기도편지나 현장 동영상을 선교 관심자들이 함께 읽고 나눔을 가져도 좋다. 어느 단체에서는 성경 전체를 성우들과 연기자들을 통해 낭독한 내용을 오디오와 영상 콘텐츠로 제작했다. 한국어로 완성된 뒤에는 주요 10개 언어로도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 영상 자료들은 어린이들이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줘 어린이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인공 지능 기술의 발달로 낭독자의 음성 데이터를 인식시키면 성경 전체를 인식된 낭독자의 목소리로 성경 전체를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램도 개발돼 실제로 성경통독 모임에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선교사의 기도편지를 입력하면 성우나 다양한 목소리의 버전으로 읽어주는 서비스가 제작돼 조금씩 사용하는 선교사들이 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선교현지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 기간에 선교사와 현지인들과의 만남을 연결해 주는 방식들이 개발·활용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꿔진 현재 ‘선교’에 대한 교육, 나눔 모임도 좀 더 지혜를 모아서 새롭게 발전하는 소식을 조금씩 듣고 있다. 특히 이러한 좋은 콘텐츠들을 제공하거나, 활용법과 아이디어 사례들을 공유해 주시는 귀한 분들의 섬김이 필요하다. 코로나로 잃은 것도 많지만, 새롭게 얻게 될 것들도 많기에 ‘코로나 이후의선교’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신동식 목사 2021-04-05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기준의 시대가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뉴노멀’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회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5명 이하로 사적 모임이 제한되는 것과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금지되는 상황입니다. 소상공업에 주어진 10시까지의 영업 제한입니다. 여기에 재난 지원금과 기본소득의 지급입니다. 교회 역시 온라인 예배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습니다. 코로나19로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기준의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머징 교회 운동이 항상 유행하였던 시기에 나왔던 말입니다. 한 출판사에 나온 책 제목이 ‘새로운 교회가 온다’입니다. 그리고 그 책은 더 이상 회자되지 않습니다. 잠깐 반짝였던 부산물이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망쳐 버린 결과를 가져온 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또 ‘새로운 교회’ 운운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회가 되려면 적어도 본래의 교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본래의 교회도 모르는데 어떻게 새로운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까? 본래의 교회를 알아야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새롭다는 것은 기준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어떤 기준에서 바꿔야 합니까? 우선 교회가 무엇인지 아는 일이 선행돼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진 이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 교회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하고 신앙고백이 있는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의 기준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정해주셨습니다. 모든 교회는 예수님의 정하신 기준에 따라 세워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하신 기준이 아니라면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세우신 기준에 따라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까? 새로운 교회라는 말은 새로운 기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새로운 교회는 본래의 기준을 회복한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도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교회를 세우라고 부름 받은 우리들이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물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가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던 교회의 평가가 수면 위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조성돈 교수는 어려운 시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를 찾는데 코로나19로 고통 받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의미 있는 진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새로운 교회가 필요한 근거가 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왜 교회를 떠날까요? 아마 저마다의 분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회가 본래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의 교회도 바르게 세우지 못했는데 새로운 교회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 말장난이고 유행에 영합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철새들은 해마다 자기가 지냈던 곳으로 옵니다. 그런데 해가 바뀌었는데 철새가 오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머물렀던 곳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모습이 사라지고 온갖 환경오염 물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철새들이 이 사실을 알자 다른 곳으로 옮긴 것입니다. 철새를 오게 하는 것은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면 자연스럽게 철새들을 찾아옵니다. 교회에 사람이 떠나고, 위기의 순간에도 사람들이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변했기 때문입니다. 오염물질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은 교회의 본래 성을 찾는 일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중세의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부정과 추함과 잔인함은 성경에서 멀어졌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적어도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반됐습니다. 하나님은 개혁자들을 통해 교회를 새롭게 했습니다. 이때 새롭게 한다는 것이 바로 ‘개혁’이었습니다. 개혁은 로마 가톨릭과 다른 교회가 아니라 본래의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세운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그래서 교회 개혁자들은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개혁교회는 세상이 변할수록 본래의 교회도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래 교회에서 이탈된 교회는 항상 타락하게 돼 있습니다.

신동식 목사 2021-03-17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께 부름 받아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존귀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설립하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어떤 지성인은 교회주의자라는 말로 교회의 가치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취급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사람들의 공동체로만 생각하면 교회주의가 맞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공동체로 생각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시대는 교회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왜곡돼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강조할 때 교회주의자로 비판하는 것은 교회가 보여준 모습 때문입니다. 교회주의자로 인식할 수 있게끔 살았습니다. 그래서 본질과 관계없이 교회주의자라는 조롱을 당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는 길은 이러한 조롱과 비판이 주어졌던 왜곡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이론이 문제가 아니라 삶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식적인 중세 교회를 개혁하면서 내세운 것이 언행일치의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교회의 본 모습입니다. 존 헤세링크는 그의 책 ‘개혁주의 전통’에서 개혁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강조점을 5가지로 제시합니다. ‘① 하나님 중심, ②성경중심, ③교회중심, ④교리와 삶의 일치, ⑤인생관과 세계관’(John Hesselink, 1983, 최덕성 역, 2003:140-167)이 그것입니다. 중세교회가 교리와 삶의 불일치를 가져왔습니다. 교회당 안은 화려하고 경건한데 교황을 비롯한 주교들의 타락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수도원도 처음과 다르게 변질됐습니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삶에서는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교리를 만들어왔지만, 그 교리가 현실에서 실천되지 않습니다. 결국 성경에서 점점 이탈했고 교회는 타락했으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개혁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에서 이러한 위기를 느낍니다. 화려한 교회당이 없는 지역이 없습니다. 어느 지역을 가도 엄청난 규모의 교회당이 있습니다. 그만큼 위세가 등등함을 보여줍니다. 교회당이 가진 영광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이 땅에 많은 봉사를 했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은 시대에 빛의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사회를 진전시키는 일에도 기여가 있었습니다. 교육과 산업과 정치와 인권에서 교회는 최선의 역할을 하였고 소기의 열매도 맺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소명을 감당하므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1,000만 기독교인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습니다. 사람들이 자녀들을 교회에 보내는 것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인구의 20%가 기독교인이고, ‘카페보다 많은 것이 교회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교회가 받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롱의 대상이 됐습니다. 교회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20%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80%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참으로 듣기 거북한 말들을 쏟아내었습니다. 하지만 대꾸는 할 수 없고 듣기만 했습니다. 소망과 사랑을 주었던 교회였습니다. 부모들은 가지 못해도 자녀들은 교회에 보내는 것에 열심을 냈습니다. 교회 가면 나쁜 것은 배우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렇게 살았기에 자연스럽게 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 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교회에 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회가 실제적으로 다음 세대를 향한 기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모이지 않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교회마다 주일학교의 씨가 말라지고 있습니다. 중고등부가 보이지 않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난리입니다. 이번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일학생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입니다. 앞으로 10년 뒤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국교회가 이러한 위기에 처한 것이 단순히 저출산과 코로나19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던 문제가 저출산과 코로나19로 인해 수면 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기후 변화가 진행됐던 것이 한계에 다다르자 폭발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북극의 빙하가 서서히 깨어지고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해수면은 올라가고 있고, 온도는 상승하고 산소는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진행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한국교회가 내일을 소망하려면 문제의 본질을 다시 살피고 본래의 교회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한국교회가 처해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조롱받는 근저에는 ‘탐욕’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영광을 가리게 했으며, 조롱받게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에 이르는’ 말씀이 지금 한국교회를 비추고 있습니다. 탐욕을 죽이는 일이 한국교회가 살길입니다. 한국교회가 갈 길은 탐욕과의 싸움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탐욕’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살아나는 일이 시작됩니다.

김시우 2021-04-15

기독교인은 두 나라에 속한 사람이다. 예수님을 영접해 하나님 나라인 ‘천국’에 속한 자다. 이와 함께 예수 믿을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이 주어진 ‘조국 나라’에 속한 자이다. 기독교 신앙은 영과 육의 이 두 나라를 동시에 충성하고 애국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 말씀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 2:1-2)말씀한다. 우리나라의 초창기 신앙 선배들은 애국 애족에 힘썼다. 1919년 3월 1일 민족의 독립을 외친 민족 대표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전국 각지의 만세운동 중심지도 교회였다. 1950년 한국전쟁의 민족적 비극에서도 교회는 자유 수호를 위한 선봉에 섰다. 대한민국은 역사상 수많은 외침 속에서 수 많은 선조들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쳐 나라를 수호했다. 그 결과 오늘의 대한민국과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라고 한다. 일찍이 애국 선각자 도산 안창호는 이르기를 “그 민족 사회에 대하여 책임감이 있는 이는 주인이요 책임감이 없는 이는 객(客)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국가 수호에 대한 책임감과 애국심이 없으면 정치인도, 기업가도, 목회자도 되지 말아야 한다. 주인 된 국민의 일원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나라사랑을 위한 책임과 의무는 나라를 위한 희생과 기도 및 선조들의 희생에 대한 감사를 바탕으로, 건강한 시민상을 확립하는데 주력하는 것이다. 또한 국민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기꺼이 다함으로 후세에 자랑스러운 조국을 물려주도록 헌신해야 한다. 반면 위정자들은 국민들의 공복이라는 자세로 사리사욕을 버리고 바른 정치를 펼쳐야 한다. 여야를 비롯해 노사, 스승과 제자는 사랑으로 하나 되고 존경과 신뢰의 관계를 쌓아야 한다. 국가는 국민이 먼저이며 국민은 애국이 먼저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때에 국민들은 신앙심, 효심, 애국심을 굳건히 해야 할 때다

정용구 선교사 2021-04-12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선교사들에게 온라인 회의와 강의들이 많아졌다. 긍정적인 것은 온라인이라는 도구로 인해 전 세계에 퍼진 선교사들을 자유롭게 만난다는 점이다. 반면 소수에 의해 주도되는 온라인 회의나 강의들은 일방적인 전달이 대다수로 충분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코로나 시대를 이기기 위한 선교적 방법으로 ‘온라인을 통한 선교사들의 독서 나눔 모임’(북 클럽, 북 스터디 모임 등)들이 진행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필자도 ‘독서 나눔 모임’을 경험해 보니 파송단체와 선교 사역지가 다르지만, 함께 책을 읽고 자신들의 삶의 이야기를 덧붙이는 나눔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는 깨달음과 선교지의 정보 들이 소소한 즐거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선교사들은 책에 대한 학구열이 상당히 높았다. 책에 대한 분석과 연구와 요약 노트들을 공유하는데 상당한 수준의 자료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특히 선교지에서는 책에 대한 아쉬움들이 많았기에 지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모임이쉽지 않다. 그만큼 연구·분석으로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됨이 모두에게 큰 유익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독서모임을 경험하면서 이 모임을 ‘한국교회에서 진행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특별히 나이 많은 성도들이나, 책과 거리를 두는 이들을 위해 선교 관련동영상’들을 찾아보고 이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물론 취지에 적합한 잘 준비된 모임 리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코로나로 인해 발생된 특별한 기회인 ‘온라인’으로 현지 선교사들의 참여가 가능하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의 선교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회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좀 더 넓게 적용하면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사의 기도편지나 현장 동영상을 선교 관심자들이 함께 읽고 나눔을 가져도 좋다. 어느 단체에서는 성경 전체를 성우들과 연기자들을 통해 낭독한 내용을 오디오와 영상 콘텐츠로 제작했다. 한국어로 완성된 뒤에는 주요 10개 언어로도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 영상 자료들은 어린이들이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줘 어린이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인공 지능 기술의 발달로 낭독자의 음성 데이터를 인식시키면 성경 전체를 인식된 낭독자의 목소리로 성경 전체를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램도 개발돼 실제로 성경통독 모임에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선교사의 기도편지를 입력하면 성우나 다양한 목소리의 버전으로 읽어주는 서비스가 제작돼 조금씩 사용하는 선교사들이 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선교현지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 기간에 선교사와 현지인들과의 만남을 연결해 주는 방식들이 개발·활용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꿔진 현재 ‘선교’에 대한 교육, 나눔 모임도 좀 더 지혜를 모아서 새롭게 발전하는 소식을 조금씩 듣고 있다. 특히 이러한 좋은 콘텐츠들을 제공하거나, 활용법과 아이디어 사례들을 공유해 주시는 귀한 분들의 섬김이 필요하다. 코로나로 잃은 것도 많지만, 새롭게 얻게 될 것들도 많기에 ‘코로나 이후의선교’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정재영 교수 2021-04-08

돈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 얼마 전에 있었던 기독청년 의식조사에서 ‘우리 사회는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사회’라는 데 92.3%가 동의해서 이슈가 됐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최근 공기업 직워들의 부동산 투기가 큰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나라의 토지와 주택을 관리하고 공급하는 공기업 직원들이 내부 정보를 이용해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부동산 투기를 한 것이다. 당사자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일반 월급쟁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이자를 몇 달씩 내면서 수십억 원을 대출 받아서 땅을 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정부에서는 법을 소급 적용해서라도 이에 해당하는 공기업 직원들을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이전에 다른 사례까지 연이어 드러나면서 그 규모가 어느 정도가 될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이 문제는 개인의 윤리에도 문제가 있지만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상황들이 이러한 투기를 부추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직장인들은 평생 동안 월급을 쓰지 않고 모아도 도시에 내 집 장만하기가 어렵다. 내 집이 없으면 전세로 살면서 2년마다 이사를 해야 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전세 보증금을 내야 한다. 지금은 4년 계약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집주인들은 온갖 꼼수를 동원해서 그 전에 세입자를 내보내고 더 많은 보증금을 받으려고 한다. 세입자들은 매월 대출 이자를 갚느라 허덕이고 있는데 내 집이 있다고 해서 형편이 별반 다르지는 않다. 대부분 2년마다 이사하기 힘들어서 거액을 대출 받아 집 장만을 했지만 대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서 하우스 푸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직하게 돈을 벌어서 안정된 삶을 기대하기는 요원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재산을 불리고 ‘재테크’라는 미명 아래 갖은 편법에다가 불법까지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판에 나만 정직하게 일한다고 해서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가족과 함께 단란한 삶을 보장 받기도 힘들 지경이다. 그래서 정직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어떻게 해서든지 재산을 불리면 능력 있고 수완 좋은 사람으로 통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몇 년 전에 있었던 한 설문 조사에서는 대학생 2명 중 1명이 돈을 10억 주면 감옥에도 갈 수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돈이 최고인 사회이다. 자본주의 정신의 왜곡 사람들은 흔히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인데 돈이 최고지.”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뭐가 나쁜가?”하고 말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말에서 ‘잘 사는 것’은 ‘돈이 많고 부자가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잘 산다는 것’이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기독교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장로님 댁 잘 살아”라는 말이 “그 장로님 댁이 성경 말씀대로 실천하며 믿음으로 잘 살아”라는 말이 아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고 했지만 성경 말씀대로 살아서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기독교는 친 자본주의 성격이 강하고 자본주의가 본래 기독교 정신에서 출발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맞지만 한편으로는 틀리다. 널리 알려졌듯이, 막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이론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당시 개신교도들이 성경의 원리에 따른 새로운 체제를 만들기 위해 자본주의를 고안해 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적인 소명에 따른 직업 활동에서 성공하는 것이 본인이 구원 받았음을 드러내는 일종의 외적 표시라고 믿었기 때문에 직업 활동에 충실히 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곧 낭비하거나 방탕하지 않고 매우 근면 성실하게 직업 활동을 해서 나온 일종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베버는 말한다. 더구나 당시 근대 자본주의의 성격은 오늘날과 같은 승자독식이나 각자도생 식의 자본주의가 아니며 단순한 이익 추구나 돈벌이를 최대한으로 해 보겠다는 충동이나 욕심과 무관한 것이었다. 오히려 무절제하고 비합리적인 충동을 눌러서 진정시키는 합리적인 절제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성격이었다. 요즘에도 널리 사용되는 복식 부기 방식도 당시 개신교도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정을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로 창안된 것이다. 이렇듯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철저하고 진지한 직업의식을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쾌락과 탐욕을 거부하여 계획성 있게 이윤을 추구하는 합리로운 삶의 형식을 자극하였고, 그러한 삶의 지향성은 근대적인 자본주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는 경제 윤리였던 것이다. 돈을 이기는 신앙의 힘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의 자본주의 모습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터한 자본주의의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서 매우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형태로 발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본래 정신이 사라지고 왜곡된 기형적인 결과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장점보다는 단점과 폐해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며,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돈 자체를 섬기는 물신주의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가치관에 매몰되어 따르기보다는 이것을 거스르고 이겨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전통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사사로운 성공에 눈이 어두운 개인 이기주의가 삶을 침몰시키고 있는 위험을 막기 위해 근대 자본주의 형성에 기초가 되었던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금욕주의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금욕주의란 육체적인 욕구에 좌우되지 않고 그것을 통제하여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의 삶과 행동을 규제하며 절도 있고 기강 있게 사는 것을 말한다. 일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도 없고 게을러서도 안 되며, 가능한 한 최대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일해야 하고 규모 있고 짜임새 있는 경제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도구로서의 구실을 감당해야 한다. 단순히 종교 의례가 아니라 실천적인 금욕의 행동 지향성이 표출되어 삶의 무대 위에서 나타나야 한다. 해마다 돌아오는 고난 주간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특별 기도회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에 그동안 간구하지 못했던 사회에서의 성공이나 가족의 안녕만을 구한다면, 스스로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고초를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한 줄기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의 삶과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어떠한 삶인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고대한다.

신동식 목사 2021-04-05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기준의 시대가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뉴노멀’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회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5명 이하로 사적 모임이 제한되는 것과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금지되는 상황입니다. 소상공업에 주어진 10시까지의 영업 제한입니다. 여기에 재난 지원금과 기본소득의 지급입니다. 교회 역시 온라인 예배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습니다. 코로나19로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기준의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머징 교회 운동이 항상 유행하였던 시기에 나왔던 말입니다. 한 출판사에 나온 책 제목이 ‘새로운 교회가 온다’입니다. 그리고 그 책은 더 이상 회자되지 않습니다. 잠깐 반짝였던 부산물이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망쳐 버린 결과를 가져온 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또 ‘새로운 교회’ 운운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회가 되려면 적어도 본래의 교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본래의 교회도 모르는데 어떻게 새로운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까? 본래의 교회를 알아야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새롭다는 것은 기준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어떤 기준에서 바꿔야 합니까? 우선 교회가 무엇인지 아는 일이 선행돼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진 이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 교회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하고 신앙고백이 있는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의 기준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정해주셨습니다. 모든 교회는 예수님의 정하신 기준에 따라 세워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하신 기준이 아니라면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세우신 기준에 따라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까? 새로운 교회라는 말은 새로운 기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새로운 교회는 본래의 기준을 회복한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도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교회를 세우라고 부름 받은 우리들이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물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가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던 교회의 평가가 수면 위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조성돈 교수는 어려운 시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를 찾는데 코로나19로 고통 받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의미 있는 진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새로운 교회가 필요한 근거가 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왜 교회를 떠날까요? 아마 저마다의 분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회가 본래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의 교회도 바르게 세우지 못했는데 새로운 교회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 말장난이고 유행에 영합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철새들은 해마다 자기가 지냈던 곳으로 옵니다. 그런데 해가 바뀌었는데 철새가 오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머물렀던 곳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모습이 사라지고 온갖 환경오염 물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철새들이 이 사실을 알자 다른 곳으로 옮긴 것입니다. 철새를 오게 하는 것은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면 자연스럽게 철새들을 찾아옵니다. 교회에 사람이 떠나고, 위기의 순간에도 사람들이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변했기 때문입니다. 오염물질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은 교회의 본래 성을 찾는 일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중세의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부정과 추함과 잔인함은 성경에서 멀어졌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적어도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반됐습니다. 하나님은 개혁자들을 통해 교회를 새롭게 했습니다. 이때 새롭게 한다는 것이 바로 ‘개혁’이었습니다. 개혁은 로마 가톨릭과 다른 교회가 아니라 본래의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세운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그래서 교회 개혁자들은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개혁교회는 세상이 변할수록 본래의 교회도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래 교회에서 이탈된 교회는 항상 타락하게 돼 있습니다.

이영훈 위임목사 2021-04-04

1597년 9월 15일 진도 앞 바다인 울돌목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조선의 수군은 단 열두 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가진 일본군과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인해 조선 수군들은 불안하고 두려워했다. 이미 수군 장수 중 한 명은 전장의 불리함을 보고 도망가기까지 했다. 그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을 불러 오기병법의 경구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를 인용하며 엄하게 권고했다. 드디어 다음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수와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조선의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죽음을 각오한 전술과 기세로 인해 임전했다. 놀랍게도 전투는 조선군의 압도적인 대승이었다. 이 전투가 바로 열두 척의 배로 일본군의 수군장군 구루시마를 죽이고 적의 병선 31척이 격파하여 패퇴시킨 명량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의 피해는 두 명의 전사자와 세 명의 경상자에 불과했다. 이순신 장군이 이 전투를 앞두고 했던 ‘사즉생 생즉사’의 명령은 불가능한 전쟁이라고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다독이는 것이 아니다. 미리 질 것으로 생각하고 겁먹지 말라고 촉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말 그대로 이 전투에서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병사들이 모두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즉생의 ‘사’와 ‘생’의 주어가 다르고, 생즉사의 ‘생’과 ‘사’의 주어가 다르다. 그들이 죽어야 그들의 가족과 나라가 살고, 그들이 살면 그들의 가족과 나라가 죽는다는 의미다. 비록 이순신 장군이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지만, 위와 같은 의미에서 그의 명령은 복음의 진리에 닿아 있다. 예수님께서는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3)라고 말씀하셨다.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자는 자기의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자기 생명을 잃는 대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부활을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 바로 죽음이다. 십자가의 진리는 죽음과 부활이다. 죽도록 노력하는 것도, 죽을 각오로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살고자 더 치열하게 애쓰는 모습이다. 우리는 죽는 것을 죽을 만큼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결국 평생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살게 된다. 내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도, 내 물질을 포기하는 것도, 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물론 때때로 양보와 포기를 선택할 때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러한 행동의 동기에는 ‘하나님께서 더 크게 채워주시겠지’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죽는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더 잘 사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셨고, 가치 없는 우리의 생명을 얻기 위해 존귀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 예수님의 죽음을 따라서 스데반이 죽었다. 빌립·베드로·바울도 죽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했고, 예수님의 생명을 얻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죽음을 생각하자. 죽음을 실천하자. 말로만 하는 죽음이 아니라 진짜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자신의 땅을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했던 초대교회의 나눔이, 바울을 높여 주었던 바나바의 섬김이, 환난과 핍박에도 끝까지 사명을 감당한 바울의 결단을 실천해야 한다. 적당히,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남들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자. 우리가 살기를 포기하고 죽을 때, 신음하고 있는 한국 사회와 교계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여주봉 목사 2021-04-02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예배 회복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예배 회복이 다른 모든 회복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교회의 기능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눈다. 위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예배, 아래로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육과 양육, 수평적으로 성도들에 대해서는 사랑의 교제, 그리고 안 믿는 세상을 향해서는 전도다. 그 중에서도 예배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동의한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뤄지고, 이를 통해 영적인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야 교회의 다른 기능들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모든 것의 원동력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영적으로 심각하게 침체된 성도와 교회가 회복되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예배가 회복돼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의 신앙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예배도 올바르게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즉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을 통해 개인적으로 알고 경험하는 삶이다. 이를 위해 우리의 목적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단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신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고, 하나님 그분 자신과 목적과 길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삶,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필수다. 이렇게 신앙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갈 때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는 분명히 회복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예배이기 때문이다(시 24:3-6). 하지만 만약 우리의 신앙을 몇 가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면, 우리의 예배도 정해진 순서와 절차를 행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쓸모 없는 타락한 예배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 회복을 위해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구호에 불과할 것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예배 회복이 있을 수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시작한 후 성도들의 영적 침체는 매우 빨라졌다. 사실 오늘날 성도들의 영적 침체는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침체되고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신앙을 몇 가지 규칙과 의식을 지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이코로나 상황이 확대되면서 교회에 모이지도 못하고 그동안 해 오던 몇 가지의 의식조차 할 수 없게 되면서, 성도들의 영적 침체가 더욱 가속화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 2020년 3월 포도나무교회는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오전 10시에 '매일의 예배와 배움'의 시간을 시작했다.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모여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함께 간절히 기도하고, 각자가 성경과 여러 책들을 통해 하나님의 길을 배워가는 시간이다. 올해 1월 1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주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평균 400여 명의 성도들이 매일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런데 이 '매일의 예배의 배움'의 시간을 통해 성도들 삶에 놀라운 회복의 은혜가 부어지고 있다. 최근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가 실로 놀랍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 보여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갈망이 차오르는 등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계속 자라나고 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에 가족들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아픈 육체가 치유되고, 직장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게 되고, 전도의 길이 열리고, 경제적으로도 회복되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넘치는 등 하나님의 생명의 실제가 성도들의 삶에 나타나고 있다. 영적 침체가 가속화되고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흐름을 거슬러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 나아가는 성도들 삶의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회복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회복의 시작은, 예배의 회복에 있다. 이처럼 참된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더욱 깊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있어야 진정한 사역도, 순종도, 믿음도, 기도도, 섬김도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영적 분별력이 열리고, 영적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죄와 세상을 이겨내는 등 우리 삶에 하나님의 생명이 회복된다. 이렇듯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증진시켜 주며 모든 회복의 원동력이 된다.

김시우 2021-03-24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을 사랑해야 한다. 과거에 나라를 잃었을 때 독립을 위해, 나라가 침략을 받았을 때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리의 어버이와 선조들이 순국·순교하며 고귀한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신앙을 잘 지켜 길이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각자는 나라를 사랑하며 충성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물과 인간을 지으실 때, 각 나라의 위치를 정하시고 사람이 살 땅도 정해 주셨다(행 17:26). 기독교는 국경이 없으나, 기독교인에게는 국경이 있다. 나라가 먼저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다. 자유대한민국이 있어야 자유도 신앙도 누린다. 예수님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셨다. 우리도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세상보다 하나님 먼저, 나보다 나라 먼저, 그리고 자신이다(최성규 목사 ‘어록집’).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며 우셨다(눅 19:41).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은 슬피 울며 따르던 여자들을 보시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말씀하셨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자기 민족이 당한 어려움 앞에 무관심할 수도 있었지만,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사각오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의 옛말에 ‘효문(孝門)에서 충신(忠臣)이 나온다’고 했다. 효가 살면 나라가 산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극도의 이기주의에 빠져서 ’애국’을 잊어버린 것은 효가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국가를 사랑해야 한다. 따라서 나라 사랑은 국호인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국기인 태극기와,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 각종 절기행사에서 애국가는 가급적 4절까지 불러야 한다. 물론 국가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은 국가에 대한 5대 의무(교육·납세·근로·국방·환경보전)를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위정자들은 더 명심해야 한다.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는 국가안보, 국민안전, 민생경제, 국민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나라사랑·국민사랑이다. 나라사랑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성경적 효의 실천이다

김양규 2021-03-18

부모의 사이가 화목하지 못하면 자녀들이 불안해진다. 사람은 불안해지면 우울증이 생기고 강박증이 생긴다. 우울증과 강박증의 가장 큰 요인은 부모의 불화이다. 자녀의 제1의 환경이 되는 부모가 자녀의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모가 싸우면 옆에 있는 자녀들은 자신들의 바로 옆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것 같은 자극을 느낀다고 한다. 부모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서 싸우는 것이지만 멀쩡한 자식들, 죄 없는 자식들이 옆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당하는 고통은 바로 그 자체가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싸우면 자녀의 정신에 분열이 일어난다. 수류탄이 터지듯 자녀의 정신세계가 찢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모가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가 돼 부모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실수가 많고 미숙함이 많다. 실수와 미숙함은 자기에게만 아픔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자녀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부모가 된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른다. 모르기에 자꾸만 되풀이하고 더 자주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많이 하고 자주 하고 자꾸 하면 잘하게 된다. 부부싸움도 마찬가지이다. 부부간의 불화도 마찬가지이다. 자꾸만 되풀이하면 늘게 되고 더 잘 하게 되는 것은 숙련의 원리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신앙생활 잘한다는 사람, 열심히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고집이 너무 강하고 어떨 땐 열심마저 너무 강하다 보니 그러지 못한 상대를 용납하지 못해 불화하는 경우가 참 많다. 특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의 영적인 신념, 철학, 믿음이 고집처럼 때로는 병적으로 굳어지는 일들이 많다. 제3자가 볼 때 분명 건강하지 못한 믿음이고 잘못된 믿음인데 검증도 없이 잘못된 자기신념이 신앙이 돼 고집을 부리고 패악을 부리는 경우들이 참 많다. 그러고는 주님 앞에 나아와 자기는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입으로 죄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정작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의 죄를 깨닫는 사람은 그 죄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는데, 멀쩡한 죄를 자꾸 반복하면서 입으로는 죄인이라고 자기고백을 하는 것은 매너리즘에 빠진 형식적인 믿음임을 반증하는 것일 뿐이다. 옆에서 애매한 자녀들이 죽어가는 것을 모르고 부모는 자기의 감정에 충실해서 일을 그르치곤 한다. 부모가 불화하면 자녀가 병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녀를 위해서도 부모는 불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부모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거부하는 자녀들은 부모와 만나기를 꺼리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는다. 평생 부모가 원수나, 증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부모와 잠깐이라도 같이 있었다면 하루에 목욕을 열 번이라도 해서 부모의 잔흔을 털어버리려고 한다. 강박증은 이렇게 생긴다. 죄도 유전이 된다. 부모가 지은 죄, 선조들이 지은 죄의 얼이 자식과 후손들에게 그대로 미친다. 성경은 이와 관련해 자손 3-4대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끊어야 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끊어내는 피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치료는 반드시 필요하다. 한 사람의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온 가족이 치료해야 하는 것은 육적·정신적인 질병뿐 아니라 영적인 질병까지도 포함된다. 한 집안에 한 명의 불신자가 있으면 온 가족이 회개하고 통회하며 말씀으로 나아가야 그 불신자가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치료는 꼭 필요한 일이다. 한의학에서는 우리의 몸이 기와 혈로 돼 있다고 본다. 한 가족 안에 흐르는 기와 혈은 가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같은 분위기에 살고 같은 음식을 먹기 때문에 같은 기병과, 같은 혈병에 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 중 한 명의 질병을 고치려면 온 가족이 함께 음식이나 생활습관을 바꾸고, 생활환경을 고치는 가족치료를 해야 한다. 그래야 가족 전체의 기운과 혈이 깨끗하고 맑게 바뀔 수 있다. 근본적인 가족치료를 하면 약을 쓰지 않아도 자연히 낫게 되는 병들이 너무 많다. 그만큼 가족치료는 중요한데 그 중에서도 부모의 치료가 더 중요하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부모가 죄악으로 병든 모습이라면 가족들의 믿음이 어찌 될 것인가. 그래서 자녀에게 무조건 교회에 나가라고 강요하기보다 부모 된 이들부터 건강한 신앙을 갖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몸은 영과 육이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묘하게 연결돼 있다. 육체가 튼튼해야 영혼도 건강해서 건전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 가족 중 한 사람의 병을 치료하려면 가족 전체가 치료받아야 한다는 전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절대 지나치지 않다.

김시우 2021-03-18

성경의 효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말씀인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경말씀을 순종하고 성경적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효 실천을 위해 성경 말씀에서 강조하는 일곱 가지 실천 항목(성경7효)으로 정리했다.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효(1효)에 관한 말씀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때 나머지 여섯 효도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인생이 복 받은 인생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23:25∼26). 부모?어른?스승을 공경하는 효(2효)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12) 어린이·청소년·제자 사랑의 효(3효)도 적혀 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8) 가족사랑(4효)에 대해서는 디모데전서에 나와 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나라사랑?국민사랑(5효)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행 17:26)라고 언급돼 있다. 자연사랑?환경보호(6효)에 대한 구절도 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마지막으로 이웃사랑·인류봉사(7효)에 관한 말씀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요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19). 성경7효 실천은 7공동체인 가정·학교·사회·경제·나라·교회·인류공동체를 행복하게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더욱 성경7효를 실천해야 한다.

신동식 목사 2021-03-17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께 부름 받아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존귀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설립하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어떤 지성인은 교회주의자라는 말로 교회의 가치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취급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사람들의 공동체로만 생각하면 교회주의가 맞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공동체로 생각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시대는 교회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왜곡돼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강조할 때 교회주의자로 비판하는 것은 교회가 보여준 모습 때문입니다. 교회주의자로 인식할 수 있게끔 살았습니다. 그래서 본질과 관계없이 교회주의자라는 조롱을 당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는 길은 이러한 조롱과 비판이 주어졌던 왜곡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이론이 문제가 아니라 삶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식적인 중세 교회를 개혁하면서 내세운 것이 언행일치의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교회의 본 모습입니다. 존 헤세링크는 그의 책 ‘개혁주의 전통’에서 개혁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강조점을 5가지로 제시합니다. ‘① 하나님 중심, ②성경중심, ③교회중심, ④교리와 삶의 일치, ⑤인생관과 세계관’(John Hesselink, 1983, 최덕성 역, 2003:140-167)이 그것입니다. 중세교회가 교리와 삶의 불일치를 가져왔습니다. 교회당 안은 화려하고 경건한데 교황을 비롯한 주교들의 타락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수도원도 처음과 다르게 변질됐습니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삶에서는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교리를 만들어왔지만, 그 교리가 현실에서 실천되지 않습니다. 결국 성경에서 점점 이탈했고 교회는 타락했으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개혁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에서 이러한 위기를 느낍니다. 화려한 교회당이 없는 지역이 없습니다. 어느 지역을 가도 엄청난 규모의 교회당이 있습니다. 그만큼 위세가 등등함을 보여줍니다. 교회당이 가진 영광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이 땅에 많은 봉사를 했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은 시대에 빛의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사회를 진전시키는 일에도 기여가 있었습니다. 교육과 산업과 정치와 인권에서 교회는 최선의 역할을 하였고 소기의 열매도 맺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소명을 감당하므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1,000만 기독교인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습니다. 사람들이 자녀들을 교회에 보내는 것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인구의 20%가 기독교인이고, ‘카페보다 많은 것이 교회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교회가 받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롱의 대상이 됐습니다. 교회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20%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80%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참으로 듣기 거북한 말들을 쏟아내었습니다. 하지만 대꾸는 할 수 없고 듣기만 했습니다. 소망과 사랑을 주었던 교회였습니다. 부모들은 가지 못해도 자녀들은 교회에 보내는 것에 열심을 냈습니다. 교회 가면 나쁜 것은 배우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렇게 살았기에 자연스럽게 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 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교회에 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회가 실제적으로 다음 세대를 향한 기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모이지 않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교회마다 주일학교의 씨가 말라지고 있습니다. 중고등부가 보이지 않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난리입니다. 이번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일학생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입니다. 앞으로 10년 뒤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국교회가 이러한 위기에 처한 것이 단순히 저출산과 코로나19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던 문제가 저출산과 코로나19로 인해 수면 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기후 변화가 진행됐던 것이 한계에 다다르자 폭발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북극의 빙하가 서서히 깨어지고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해수면은 올라가고 있고, 온도는 상승하고 산소는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진행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한국교회가 내일을 소망하려면 문제의 본질을 다시 살피고 본래의 교회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한국교회가 처해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조롱받는 근저에는 ‘탐욕’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영광을 가리게 했으며, 조롱받게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에 이르는’ 말씀이 지금 한국교회를 비추고 있습니다. 탐욕을 죽이는 일이 한국교회가 살길입니다. 한국교회가 갈 길은 탐욕과의 싸움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탐욕’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살아나는 일이 시작됩니다.

prev1 | 2 | 3 | 4 | 5 | 6 | 7 | 8 | 9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