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운 변호사 기자2017-02-01

2,000년도 초반, 중국동포 여성 한 분께 법률상담을 해 드리게 되었습니다. 고생 고생하여 모은 돈을 남한 친척이 빌려간 후에 나 몰라라 하니, 국가에서 그 돈을 돌려받도록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민법이 어떻고 형법을 적용하려면 저렇고, 나름 최선을 다해 설명을 했지만, 그 중국동포 분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아니, 내 돈인데, 친척이 돌려주지 않고 있으니, 그 돈 받아서 돌려주면 되는 것이지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말이 통하는 그 분과 법률상담을 하면서, 평소에 남한 고객들한테 한 것과 똑같은 설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상당히 자본주의화 되어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였고 공산당이 하는 일이 법률로 해결되는 것보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제야 그 분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천천히 설명을 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 이후에 만난 세계 각국의 동포들과도 좀 더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비록 동포이지만, '외국인'이고 나와는 다른 국가, 심지어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분들이니 그에 맞추어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법적인 처우와 무관하게,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북한동포도 외국인으로 생각하고 외국인처럼 대하면 오히려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남한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는 북한 혹은 북한동포를 대할 때, 민족 동질성만 강조한 나머지 '같지 않음'을 탓하고 심지어는 '같아야(만)한다'고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릅니다. 분명히 한민족, 같은 동포이지만 다릅니다. 미국, 호주, 유럽에 사는 동포들보다도 더 다릅니다. 해방 이후 긴 세월을 주체사상과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왔으니,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 아래 살아온 (거리상) 먼 나라 미국이나 유럽의 동포보다도 (심리적으로 체제적으로) 더 멀고 더 다릅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 한반도의 바로 윗부분에 38선이라는 살을 서로 맞대고 살고 있지만,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했습니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으로 나온 말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인간관계, 국제관계에도 통용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나와는 다른 상황과 조건에서 형성된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통일한국, 평화한국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통일된 평화한국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현재의 남한 체제만으로 충분한가요? 물론 현재 상태로 만족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남과 북이 하나 되어 평화통일을 이루었을 때에는 인류 역사에 남을 만한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분명히 북한이, 북한동포가 우리와‘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북한을, 북한동포를, 탈북이주민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미 다 알고 있나요? 그렇다는 대답을 쉽게 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름'을 인정하면 편합니다. 상대방이 내 기대나 예상과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다르니까 그러겠지" 마음이 편하고 보다 쉽게 이해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2017년은 '다름'을 인정한 연후에 '같음'을 추구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 서로 뭐가 같아야 하는지를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정기 목사 기자2017-02-28

3ㆍ1독립운동은 전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의지와 정신을 알리고, 상해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만약 3ㆍ1독립운동이 없었더라면, 2차 대전이 끝난 후 대한민국은 일본에 편입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기독교인은 한국 전체인구의 1%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3ㆍ1독립운동은 기독교 정신에 따라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기소된 기독교인이 25%, 전체 투옥된 사람의 40% 정도가 기독교인이었다.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었다. 3ㆍ1운동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다. 중국의 5ㆍ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화성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중에 가장 주목되는 사건은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화성은 어느 지역보다 강한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로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히 항쟁했다, 그때 3ㆍ1독립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에 아내와 함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의 탄압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그리고 1959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소외된 자들과 학생들을 위한 사회 봉사 활동에 헌신했다. 이후 1970년 4월 12일 소천하여 3ㆍ1운동의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4번 민족대표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아인슈타인은 한때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히틀러에 의해 독일이 변질되어 갈 무렵 독일 '고백교회' 지도자들의 기도와 신앙고백 그리고 그들의 외로운 항거를 지켜보던 그는 교회에 대한 평소의 선입견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다. 나는 교회를 사랑한다.' 이 아인슈타인의 고백이 지금은 굉장히 무겁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자정하려고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세상의 소망이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아원, 양로원, 모자원, 장애인 단체 등 복지 시설 중에 80% 이상이 기독교에서 운영되고 있다. "교회가 타락하였다. 무용지물이다"라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지만 아직도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 단체나 기관의 대부분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아니다. 그래도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교회의 주인이 목사인 줄 안다. 아니다. 교회의 머리요,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소망이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에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소망이다. 그리스도가 소망이기에 교회도 세상의 소망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보다 하나님께 소중한 것은 없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예수님이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핏값을 지불하고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니 주님이 교회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겠는가? 물론 교회에도 허물이 있고 많은 문제가 있다. 그래도 주님은 절대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요한계시록 1장 20절을 보면 주님이 오른손으로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신다고 했다.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말하고,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들, 목회자들을 말한다. 그러기에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다. 예수님의 최고의 관심사는 언제나 교회였다. 지금도 교회를 통해 일하고 계신다. 영혼을 구원하시고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신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조직이나 제도도 아니다.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한다. '불러낸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 교회이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부름 받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바로 교회이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2장 9-10절에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세상과 달라야 한다. 그런데 어떠한가? 세상과 별 차이가 없다. 거룩한 공동체라고 하면서도 거룩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논리대로 살아간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지체라고 하면서도 하나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주님의 영광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그래도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다.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교회는 세상이 덮어 둔 죄의 문제를 다루는 곳이다. 죄가 무엇인지,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확인시켜 주는 곳이다. 때로 말씀 듣다 보면 죄가 건드려지고,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냥 집에 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래도 교회는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죄의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를 깨닫지 못하면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지 사역도 해야 하고 각종 구제사역도 해야 하고, 인권, 환경 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구원 얻을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의 공동체이기에 세상의 소망이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거룩은 교회의 본질이다. 주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신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순결인 것처럼, 교회의 생명은 거룩이다. 말씀을 지킬 때 거룩할 수 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구별되는 것이 영향력이다. 교회의 매력은 거룩이다.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그때부터 교회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세속화이다. 세속화란 세상과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추구하는 것의 차이가 없어졌고, 가치관의 차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교회가 앞으로 계속 붙잡아야 하는 것은 말씀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거룩한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다. 세속적인 것들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 속에 바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기에 세상의 소망이다. 교회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선한 일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우리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이 모든 것이 선한 일이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을 섬겨야 한다. 그런데 세상이 우리의 섬김을 알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심지어는 오해하고 조롱하고 핍박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낙심하지 않는다. 억울해 하지 않는다. 하늘나라의 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섬김으로 세상의 소망인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해본다.

정재영 교수 기자2017-02-02

정의의 문제 작년 우리 사회는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로 전국민이 심한 몸살을 앓았다. 이 사태는 결국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안을 국회에서 가결시키는 데까지 이르렀고 앞으로의 정치 일정도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역시도 큰 혼란을 경험했다. 위정자들의 권위에 복종할 것인지, 저항할 것인지, 87년 이후 가장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와중에 일부 기독교인들은 대통령지지 모임에 참여해 더 큰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과연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사회 문제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아직도 일치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나 참여의 문제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우리 사회에 대한 논의와 함께 고려돼야 한다. 국정 농단 사태 이전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원칙과 절차를 따르기보다 편법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갑질 논란’ 등 공정성과 관련된 사회 문제가 끊이지 않고 이슈가 되며 우리 사회에 과연 정의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돼 왔다. 이른바 절차상의 민주화를 이룬 이후에 실제적인 민주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표면으로는 법과 절차를 중시하는 듯하지만 우리 삶을 규정하고 움직여가는 데에서는 여전히 편법과 부정이 더 힘을 발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세월호 침몰 사건이었다. 잘 알려졌듯이 우리 사회는 서양에서 30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서서히 경험한 근대화의 변화를 불과 5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하면서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를 거쳐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 사회를 지배하며 사회 구성원들의 행위를 규정했던 규범도 크게 바뀌게 됐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혼란 가운데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는 변화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규범과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근대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 비합리적인 일들이 일어나서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아직도 전통적인 사고에 이끌리는 우리 사회에서는 불명확한 규정이나 절차의 허점을 노리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늘어나는 상황이다. 공공성을 좇는 시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까? 정의의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도 매우 오래된 주제이다. 신학에서 논의되어 온 정의의 문제는 주로 정의의 개념에 대한 차원이었다. 그러나 정의의 개념을 확립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의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롭지 못한 현상들이 빈발한 것은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가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이상일 뿐 현실 상황과 부합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성공에 이르는 길은 어느 정도의 부정이나 편법을 동원하지 않고는 어렵다는 생각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공성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것은 공공성이 무엇인지 몰라서라기보다는 모든 인간 행위자들 스스로가 예외 없이 강력한 이해관계의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성을 통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넘어서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규범과 제도적 틀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개인들 안에 내재하는 이기심을 억제하고 시민 도덕심으로 결속하도록 하는 규범 말이다. 도덕이 무너지게 되면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돼버릴 것이다. 그러나 도덕이 살아있는 사회에서는 소수에 대한 배려와 약자 보호를 기대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명예를 중시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시장 경제가 등장하고 이윤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행위 동기로서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게 됐다. 특히 경제 발전과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는 돈이 곧 미덕이 되어버렸고 모든 행위의 판단 기준으로 자리 잡았을 정도다. 이런 사회에서는 오로지 경쟁에서 이겨서 성공의 사다리에 높이 오르는 것만이 중요하며 성공에 이르는 과정은 모두 결과에 따라 정당화돼 버린다. 이렇게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과 달리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시민’이라고 부른다. 시민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이해돼 왔지만, 최근에 사용되는 시민이란 용어는 특정한 부류의 계층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특정한 가치와 행위를 뜻하는 말로 더 자주 사용된다. ‘시민다움’이란 말이 그러한 보기다. 이때 시민은 ‘시민다움’의 가치와 그 가치에 바탕을 둔 시민지향성의 행동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시민이란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시민성’”을 가진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시민의 모델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흔히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착하게 살라는 교훈으로 이야기 되지만, 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이 이야기는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만 이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는 것은 하등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당시 사회에서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이웃의 범위를 이방인으로까지 확대하셨다. 그것은 결국 세상 모든 사람이 내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가 내 이웃인가’ 생각하기 전에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내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 시민으로서의 책임 우리는 여기서 현대 사회에서 얘기하는 ‘시민’의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 시민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거나 자기 가족의 이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과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시민은 결코 약자나 사회 소수자를 무시하지 않고 그들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참 이웃, 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시민다움은 그저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죄를 가진 인간의 본성은 자기중심적이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역시 도덕성을 상실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하듯이 바른 ‘시민’의 덕성도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충분히 교육시킨 후에야 사회에 내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일면 타당한 점이 있으나 충분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수준을 정하기 어려울뿐더러, 평신도들은 일상의 삶의 자리가 교회가 아닌 교회 밖 사회이므로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성경의 원리에 따라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훈련돼야 한다. 모든 일에 대해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의 양심에 따라 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안내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각 영역에서 기독교인다운 삶을 살아야하고, 기독교 시민의식을 갖고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돼야 한다. 사회생활에서 양심 있는 시민이 되도록,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세우고 운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정치 문제들에 대해 잘 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지지하거나 반대하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공청회나 지역사회 회의나 의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시민으로서 그들이 관심 갖는 단체에 책임감을 갖고 참여하도록 권장돼야 한다. 극심한 격변기를 거치고 있는 이때에 세월호 참사 때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각각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시민 정신을 발휘하고 실천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정기 목사 기자2017-02-03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교회다운 교회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세상은 매우 이기적이어서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요구할 뿐이다. 가난한 이들을 돕고, 문화센터를 열고, 선행을 하고, 교회 주차장을 개방하고, 사회봉사를 하고, 세상이 원하는 대로 교회가 모두 한다고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쓴 약을 주어야 한다. 저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세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화된다는 것을 과거 2000년 인류의 역사가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말씀 중심으로 살고,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회개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안으로부터 개혁을 실천해 갈 때, 우리는 세상에 희망이 될 수 있고, 세상이 기대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위기는 기회의 다른 말이다. 아직 한국교회는 예수 안에 있는 한 희망이 있다.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하고 무시했었다. 그러나 내 조국이 어려워졌을 때 교회는 우리 유대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소망이었고 안식처였다. 내 나이 먹어 석양녘에 교회 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곳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와 교회로 돌아온다.’ 우리에게 교회는 어떤 곳인가? 성경을 보면 크게 두 종류의 교회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 칭찬받은 교회와 책망 받은 교회가 있다.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변질된 교회였고,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에 넘어가 사단이 판치는 교회였고,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병든 교회였다. 이처럼 하나님이 세우신 신적 기관인 교회도 다 거룩하고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한때 교회는 중세를 어둠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믿음의 역사로 소문난 교회였다. 서머나 교회는 환란과 궁핍 속에서도 실상은 부요한 교회였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 비교할 때 역사도 짧고 교인 수도 적았지만 본이 되는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는 무명의 성도들이 세웠지만,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회가 되었다. 안디옥교회는 우리가 꿈꾸는 교회이다. 다양한 좋은 일꾼들이 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흑인이나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는, 인종을 초월한 교회였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를 구별하지 않는, 빈부를 초월한 교회였다. 천한 사람이나 귀족을 구별하지 않는, 귀천을 초월한 교회였다(행 13:1). 이처럼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 지방색이 있으면 안 된다. 텃세가 있으면 안 된다. 있다면 예수 색깔만 있어야 한다. 섬김만 있어야 한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꿈꾸는 교회다. 예배가 살아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오직 주를 섬기는 교회였다(행 11:2). 섬긴다는 것은 예배를 말한다. 영어성경을 보면 'worshiping'이라고 번역했다. 예배를 드리며 금식할 때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성령께서 선교의 비전을 주셨다. 하나님은 예배를 기뻐하신다.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배 를 통해 우리를 축복하신다. 우리를 치료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소망을 주신다. 그러므로 예배가 축복이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다 안디옥 교회의 가장 큰 원동력은 금식과 기도였다(행 11:2-3).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금식하고 기도했다. 교회는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서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성령께서 시키시는 일을 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크게 부흥했지만 순종하지 않았다. 흩어지지 않았다.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핍박을 통해 하나님께서 강제로 흩어지게 하신다.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여 안디옥에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달랐다.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성령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시자,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했고 선교사로 파송한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것이다. 선교하는 교회였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 사역이었고, 13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 사역이었다. 다시 말해 1장부터 12장까지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에 일어난 역사라면, 13장부터는 사도 바울의 네 차례 걸친 전도 여행으로, 기독교가 세계화가 되는 사역이다. 그 중심에 안디옥 교회가 있었다.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음성을 듣자마자 순종했다.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여 보낸다. 이처럼 보내는 것도 선교이고 가는 것도 선교이다.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최고의 명령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한가지를 선택하라. 가든지! 보내든지! 안디옥 교회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되면 세상이 기대하는 교회가 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자.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향해 ‘그래도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조용훈 교수 기자2017-02-21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국가안보와 일자리를 강조하는 반이민 정책과 보호무역주의를 밀어붙이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강대국들은 '자국 우선주의'를 주창한다. 중국과 일본이 동시에 아시아의 맹주로 나서면서 한반도는 어느 때보다도 군사적 갈등과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남북이 통일되지 않고서는 우리의 경제도 안보도 확보하기 어려운 위기상황이 틀림없다. 시인 고은이 언젠가 문학 행사에 초청받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갔나보다. '리스본 이후'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 먼 낯선 곳에서조차 군사적 불안을 걱정해야만 하는 슬픈 분단국 국민의 운명을 한탄했다. "파두의 밤길이었습니다/ 돌아온 호텔 객실 TV/ CNN도 BBC도/ 온통 북한 핵문제였습니다/ 여기까지/ 여기 이베리아 반도까지/ 십년 뒤에도 물고 늘어질/ 나의 운명 한반도의 난제가 와 있습니다/ 끌끌 혀를 찬다고 될 노릇이 아니었습니다/ 아, 언제나 비정치적일 수 있을까/ 언제나 음식타령이나 하고 날씨타령이나 하고 축구타령이나 하고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의 통일은 평화로운 방법이어야 하며, 평화를 위한 통일이어야 한다. 평화 없는 통일이라면 비록 통일국가를 이루었더라도 다시 갈등과 분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통일은 평화로워야 하며, 통일을 통해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통일운동은 평화운동이어야 한다. 한국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다양한 통일기도회는 곧 평화기도회여야 한다. 우리사회는 지금 폭력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 구조적 폭력과 다양한 형태의 갑질을 경험하고 있다. 경쟁이 일상화되면서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고, 언어는 거칠고 행동은 파괴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주차시비나 아파트 층간 소음 갈등은 끔찍한 살인으로 비화되곤 한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화내는 것조차 살인이라 하셨고, 정당한 복수조차 포기하라고 요구하셨다. 분노는 내면의 평화를 깨뜨릴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파괴한다. 예수님은 분노만 아니라 멸시와 경멸, 혐오의 언어도 비판하셨다. 괴뢰, 종북좌빨, 수구골통, 전부 다 경멸과 혐오의 언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가는 곳마다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셨다. 바울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만나든 그들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교회 뿐 아니라 가정과 일터,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면서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힘써야 한다. 평화운동은 일상생활에서 평화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노력이다.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작은 실천이고, 요란한 구호가 아니라 조용한 행동이다. 평화를 힘쓰는 사람은 우선 마음의 평정을 힘써야 한다.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은 공격행동으로 표출된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남한이 사드를 배치하려는 것도 다 내면의 불안 때문이다. 평화를 힘쓰는 사람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참 평화란 정의로움이 맺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불의에 기초한 평화는 강요된 질서, 곧 거짓평화다. 불의한 사회구조는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가져다 주고, 그 절망감은 평화를 해치는 분노와 폭력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통일을 기도하는 교회는 평화를 구하는 교회이며, 평화의 교회는 각 개인의 내면의 평화로움을 가져다 주며, 사회정의를 위해 분투하는 교회다.

강성열 교수 기자2017-02-15

작년 12월 9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이제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이 권력을 등에 업은 비선실세들의 국정 농단에 휘둘려 왔고, 그 결과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자행되어 왔음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하여 대한민국이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끊고서 정의롭고 건강한 국가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갈망하고 있다.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이번 사태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우리나라가 분단 상황을 극복하고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로 바로 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되새겨보는 일은 자못 의미심장한 일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으며,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어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평한 사랑과 약자 보호의 정신을 핵심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 단적인 증거로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의 한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2을 낭독하시면서, 자신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고 세상에 오셨음을 분명하게 밝히셨다(눅 4:17-19). 그가 공생애 기간 동안 내내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가진 하나님 나라 복음이었다. 그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눅 7:22)이나,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마 25:40)은 그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어떠한 성격을 갖는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고 병든 자, 갇힌 자 등과 동일시하셨으며(마 25:31-46),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항상 세리들과 죄인들, 창기들, 차별당하는 여성들과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온갖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치료해주셨다. 참으로 그에게는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차별 또는 남녀 성별에 의한 차별, 장애의 유무에 따른 차별 등이 전혀 없었다. 그의 이러한 사랑과 정의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대속의 능력이면서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현장에서 죄악과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뜻하기도 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완성되었다. 그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구속 사역은 모든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소중한 것임을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통일한국의 미래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인간에게 있는 보편적인 소유욕을 포기하고서 자신이 가진 것을 많이 가지지 못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섬김의 정신을 실천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서로 돕고 의지하는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기심과 탐심을 물리치고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세계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과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앙적인 삶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정의로운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이처럼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질 때 비로소 온갖 갈등과 분열이 치유되고 한반도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가 되는 큰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영훈 목사 기자2017-02-01

2017년 우리나라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탄핵정국이라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이 시기를 틈타 보수와 진보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권을 취하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나라를 하나로 아울러야 할 정부는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어 연합을 위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난국에서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그동안 각 교단 사이의 갈등으로 분열의 시대를 겪었던 한국교회가 연합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17년 1월 9일,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가칭)의 출범으로 한국교회가 전 교단의 연합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는 한국선교 132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서 교계가 앞장서서 축하하고 지지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기쁜 소식을 아직까지 접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한교총의 출범과 한국교회의 연합이 무엇을 의미하며, 왜 이루어져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한교총의 출범은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주의 자녀들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시며,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결코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의 각 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 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주 안에서 하나 되어 자라나기를 원하신다(골 2:19). 그러나 한국선교가 시작된 지 13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해 한마음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제는 한교총의 출범을 계기로 삼아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 이 땅에 심겨진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고, 복음 전파에 더욱 힘써야 한다. 한국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나아갈 때, 이 땅에 제2의 부흥, 제3의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둘째, 한국교회가 연합하면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현재 한국교회는 동성애, 이슬람, 이단과 같은 문제들에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다. ‘모든 것에 대한 다양성과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논리 아래 동성애와 이슬람, 이단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제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정치 지도자들의 공약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고 있다. 우리는 죄악 된 세상의 소리에 대해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이를 대처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 바른 소리를 내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1,000만여 성도가 한 목소리로 올바른 의견을 제시하면 정치 지도자들도 교회의 의견을 도외시하지 못할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치 지도자가 선출되어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 위에 세워질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 기도해야 한다. 셋째, 한국교회의 연합은 복음적 평화통일과 민족 복음화를 위한 선결 과제이다. 21세기 한국교회는 민족 통일과 민족 복음화라는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 교회의 힘으로 이루기에는 너무나 큰 사명이며, 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먼저 하나 되어 힘을 합쳐야 한다. 북한은 현재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으며, 머지않아 복음적 평화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앞두고 한국교회가 분열하여 우왕좌왕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민족 통일과 민족 복음화에 대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해나가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를 속히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분열과 갈등으로 서로 다툴 때가 아니다. 현재와 같은 혼란스러운 정국일수록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이 나라의 빛과 희망이 돼야 한다.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경험을 통해 이 나라에 연합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가 성령으로 하나 될 때 이 나라와 이 민족이 하나 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 된 한반도 위에 실현될 것이다. 한교총의 출범을 발판 삼아 한국교회가 한마음, 한 뜻으로 힘을 합하여 연합의 시대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윤영훈 소장 기자2017-01-31

조종건 사무총장 기자2017-01-24

문맥의 이해가 없는 문구 해석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democracy)를 일컬어 “이따금 시도된 모든 다른 형태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부(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라고 말했다. 처칠이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부라고 비판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처칠의 주장은 '다른 모든 형태의 정부는 민주주의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탁월성을 주장한 내용이다. 요즘 문맥에 대한 고려 없이 해석한 성경 구절이 로마서 13장 1절~2절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사악한 정부일지라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극우 기독교인의 시각이다. 이러한 근거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대통령인데 어떻게 탄핵으로 하나님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느냐고 일부 극우 성향의 목회자들은 순진한 교인들을 설득한다. 이에 동조하는 극우 기독교인들은 광화문 태극기집회에 참여하면서 태극기를 흔든다. 보수 성향의 목회자들도 이에 가세하거나 동조한다. 심지어 무거운 십자가를 들고 행진을 주도하는 이들도 있다.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권세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바울이 로마서를 작성할 당시의 맥락이 중요하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내용은 로마제국의 권력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의 선교여행을 방해하고 공격했던 사람들은 동족인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지 로마의 지도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위기에서 구한 것은 로마법의 도움이었고 로마정부였다. F. F. 브루스도 ‘바울 자신이 로마법을 체험한 좋은 경험’ 즉 합리성 있는 로마법을 언급한다. 또 로마서는 기독교 핍박 이전에 기록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박해하는 유대지도자보다 로마의 합리성이 더 낫다는 바울의 정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4절에는 통치자인 “그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라는 언급이 있다. 극우 기독교 리더들의 말처럼 사악한 왕이나 공포를 조장하는 정부책임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면, 세 가지 면을 우선 해결해야 할 것이다. 첫째, 마가복음 12장 17절에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한 예수의 말씀이다. 여기서 ‘가이사의 것’이란 세금에 관한 것이지 하나님의 정의를 짓밟는 통치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사도행전 5장 29절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증언이다. 위임된 통치자 위에 진정한 통치자인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의 가치에 맞춘 통치에 사도들은 협력하겠다는 의미이다. 셋째, 성서본문을 각 시대 상황에서 해석하고 실천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뇌에 찬 사례들이다. 일제시대에 3.1운동을 이끈 양대 세력이 천도교와 기독교다. 만약 사악한 왕에게 복종을 거부한 것이 하나님의 명을 거스른 것이라면, 당시 일본 천황 참배에 대해 복종을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일까? 유신시대에 하나님의 정의의 이름으로 저항한 크리스천들은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할 수 있나? 저항권은 교회의 유익한 가치였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1483-1546)는 루터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라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명령에 단호히 거부했다. 최초로 신구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윌리엄 틴들(1494-1536)은 의미심장하게 왕이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어길 것을 명령하면 순교를 달게 받을 각오로 불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 존 낙스(1514-1572)는 “정부의 권세에 복종해야 하지만 통치자가 불법을 행한다면 무장 반란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1572년 8월 24일 프랑스 장로교도 위그노에 대한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 이후 칼빈의 후계자 테오도르 베자(1519-1605)는 “모든 폭정에 백성들은 저항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1776년 영국왕 조지 3세에게 저항했던 영국식민지 미국의 선조들, 특히 청교도들의 반란으로 미국독립이 이루어졌는데 이런 행위도 잘못된 믿음인가? 정당한 투표로 당선된 히틀러의 나치 체제에 저항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1906-1945)는 하나님을 모독한 행위자인가? 독일 나치 위기의 시기에 미국 동료들이 본회퍼에게 영주권을 마련해 주려고 했지만 이를 기꺼이 포기하고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처형당한 것이 개죽음이라면 본회퍼에 대한 모멸이요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흑인 인권운동의 중심에 섰던 마틴 루터 킹 목사(1929-1968)는 정부에 맞서 비폭력 시위를 했다. 흑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얻은 인권운동의 결실을 미국의 한인 교포들도 누리고 있다. 실낙원의 저자이며 세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칼빈주의자 존 밀턴(1608-1674)의 고뇌에 찬 통찰력을 한국교회 미래세대를 위해서라도 한 번쯤 되새겨보자. “나는 나의 양심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시저에게 양도할 수 없다.” 진영논리에 앞서 신구약성서가 가르치는 사회정의의 보편가치를 위해서라면 저항권은 교회의 소중한 유산일 것이다. 한국교회에 사회정의를 위한 저항권이 자리 잡을 때, 제2의 종교개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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