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칼럼] 자본주의인가, 물신주의인가?

정재영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종교사회학)

등록일:2021-04-08 08:5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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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

 
 ▲정재영 교수ⓒ데일리굿뉴스
얼마 전에 있었던 기독청년 의식조사에서 ‘우리 사회는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사회’라는 데 92.3%가 동의해서 이슈가 됐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최근 공기업 직워들의 부동산 투기가 큰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나라의 토지와 주택을 관리하고 공급하는 공기업 직원들이 내부 정보를 이용해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부동산 투기를 한 것이다. 당사자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일반 월급쟁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이자를 몇 달씩 내면서 수십억 원을 대출 받아서 땅을 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정부에서는 법을 소급 적용해서라도 이에 해당하는 공기업 직원들을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이전에 다른 사례까지 연이어 드러나면서 그 규모가 어느 정도가 될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이 문제는 개인의 윤리에도 문제가 있지만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상황들이 이러한 투기를 부추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직장인들은 평생 동안 월급을 쓰지 않고 모아도 도시에 내 집 장만하기가 어렵다.
 
내 집이 없으면 전세로 살면서 2년마다 이사를 해야 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전세 보증금을 내야 한다. 지금은 4년 계약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집주인들은 온갖 꼼수를 동원해서 그 전에 세입자를 내보내고 더 많은 보증금을 받으려고 한다.
 
세입자들은 매월 대출 이자를 갚느라 허덕이고 있는데 내 집이 있다고 해서 형편이 별반 다르지는 않다. 대부분 2년마다 이사하기 힘들어서 거액을 대출 받아 집 장만을 했지만 대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서 하우스 푸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직하게 돈을 벌어서 안정된 삶을 기대하기는 요원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재산을 불리고 ‘재테크’라는 미명 아래 갖은 편법에다가 불법까지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판에 나만 정직하게 일한다고 해서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가족과 함께 단란한 삶을 보장 받기도 힘들 지경이다.
 
그래서 정직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어떻게 해서든지 재산을 불리면 능력 있고 수완 좋은 사람으로 통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몇 년 전에 있었던 한 설문 조사에서는 대학생 2명 중 1명이 돈을 10억 주면 감옥에도 갈 수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돈이 최고인 사회이다.
 
자본주의 정신의 왜곡
 
사람들은 흔히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인데 돈이 최고지.”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뭐가 나쁜가?”하고 말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말에서 ‘잘 사는 것’은 ‘돈이 많고 부자가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잘 산다는 것’이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기독교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장로님 댁 잘 살아”라는 말이 “그 장로님 댁이 성경 말씀대로 실천하며 믿음으로 잘 살아”라는 말이 아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고 했지만 성경 말씀대로 살아서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기독교는 친 자본주의 성격이 강하고 자본주의가 본래 기독교 정신에서 출발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맞지만 한편으로는 틀리다. 널리 알려졌듯이, 막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이론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당시 개신교도들이 성경의 원리에 따른 새로운 체제를 만들기 위해 자본주의를 고안해 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적인 소명에 따른 직업 활동에서 성공하는 것이 본인이 구원 받았음을 드러내는 일종의 외적 표시라고 믿었기 때문에 직업 활동에 충실히 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곧 낭비하거나 방탕하지 않고 매우 근면 성실하게 직업 활동을 해서 나온 일종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베버는 말한다.
 
더구나 당시 근대 자본주의의 성격은 오늘날과 같은 승자독식이나 각자도생 식의 자본주의가 아니며 단순한 이익 추구나 돈벌이를 최대한으로 해 보겠다는 충동이나 욕심과 무관한 것이었다.
 
오히려 무절제하고 비합리적인 충동을 눌러서 진정시키는 합리적인 절제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성격이었다. 요즘에도 널리 사용되는 복식 부기 방식도 당시 개신교도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정을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로 창안된 것이다.
 
이렇듯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철저하고 진지한 직업의식을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쾌락과 탐욕을 거부하여 계획성 있게 이윤을 추구하는 합리로운 삶의 형식을 자극하였고, 그러한 삶의 지향성은 근대적인 자본주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는 경제 윤리였던 것이다.
 
돈을 이기는 신앙의 힘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의 자본주의 모습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터한 자본주의의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서 매우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형태로 발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본래 정신이 사라지고 왜곡된 기형적인 결과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장점보다는 단점과 폐해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며,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돈 자체를 섬기는 물신주의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가치관에 매몰되어 따르기보다는 이것을 거스르고 이겨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전통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사사로운 성공에 눈이 어두운 개인 이기주의가 삶을 침몰시키고 있는 위험을 막기 위해 근대 자본주의 형성에 기초가 되었던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금욕주의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금욕주의란 육체적인 욕구에 좌우되지 않고 그것을 통제하여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의 삶과 행동을 규제하며 절도 있고 기강 있게 사는 것을 말한다. 일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도 없고 게을러서도 안 되며, 가능한 한 최대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일해야 하고 규모 있고 짜임새 있는 경제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도구로서의 구실을 감당해야 한다. 단순히 종교 의례가 아니라 실천적인 금욕의 행동 지향성이 표출되어 삶의 무대 위에서 나타나야 한다. 해마다 돌아오는 고난 주간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특별 기도회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에 그동안 간구하지 못했던 사회에서의 성공이나 가족의 안녕만을 구한다면, 스스로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고초를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한 줄기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의 삶과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어떠한 삶인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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