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번삼 박사 ⓒ데일리굿뉴스
영국에서는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다음 해 ‘옥스퍼드 진화 논쟁’(1860)이 벌어졌다. 생명을 포함한 만물이 저절로 발생해 진화를 거듭했다는 ‘다윈의 주장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져보자는 것이었다.

기독교계는 그만큼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논쟁에는 많은 사람이 연사로 나섰지만, 가장 관심을 끈 사람은 창조론을 대변한 윌버포스와 진화론을 옹호한 헉슬리였다. 당시의 논쟁내용이 후일 진화론자들에 의해 교묘히 각색·확산이된 바람에 진화론 측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 논쟁을 주도한 영국과학진흥협회(BAAS)의 부회장인 오언은 ‘지질학의 아버지’라는 라이엘의 소개로 다윈과 친밀한 교우 관계를 유지했다. 런던 자연사박물관 관장이자 고생물학자였던 오언은진화 사상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종의 기원’에 대해서도 한 과학잡지에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이에 대해 헉슬리는 즉시 반박하며 다윈을 옹호했다. 헉슬리는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설’은 옹호했으나, 점진 진화설에는 반대 입장이었다.

‘종의 기원’이 발표되자 기독교계는 크게 반발했으나, 1860년 2월, 포웰을 비롯한 7인의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진화론을 수용하는 글을 발표해 진화론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1860년 6월 30일 옥스퍼드대학 도서관에서는 영국과학진흥협회 주최로 1,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창조 대 진화’의 역사적인 대논쟁이 벌어졌다. 이날 관심 대상은 ‘다윈 진화론과 관련한 유럽 지성의 발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할 뉴욕대학의 드래퍼 교수의 연설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표는 장황하고 고루해 청중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 뒤를 이어 영국왕립협회 회장인 브로디와 윌버포스 및 헉슬리가 차례로 등단했으며, 다윈은 병환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윌버포스는 다윈의 진화설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할 뿐 아니라, 자연현상에 의해 지지를 받지 못하고, 주요한 과학이론들과도 대치된다고 비판했다.

그의 연설은 ‘종의 기원’이 과학적 사실로서 왜곡돼 있음을 잘 증명했다. 윌버포스는 이를 밝히려고 효과적으로 설명했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C. Gauld, 2008). 그는 본 주제를 예단치 않았으며 청중에게 이해를 강요하지 않았고, 시종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J. R. Lucas, 1979).

윌버포스의 뒤를 이어 등단한 젊은 헉슬리(당시 35세)는 다윈의 진화설을 적극 변호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청중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헉슬리의 뒤를 이어 연사로 나선, 25년 전 비글호의 선장 피츠로이는 다윈의 주장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윌버포스를 옹호했
다. 반면 식물학자인 후커는 윌버포스를 비판하고 다윈을 적극 옹호해 대조를 이뤘다.

토론회가 마무리된 후 쌍방은 서로 승리를 확신했다. 윌버포스는 자신을 방문한 헨슬로에게 “내가 철저히 헉슬리를 물리쳤다고 생각한다”고했다. 반면 헉슬리는 “옥스퍼드 논쟁에서 내가 시종 가장 인기가 있었던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긴 시각으로 볼 때 이 토론회는 다윈 진영의 승리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임번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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