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5대 은행에서 14% 넘게 늘어난 전세자금 대출의 98%가 실제 전세 계약과 관련된 실수요 대출로 확인됐다. 최근 전셋값이 급등한 점이 전세대출 증가로 이어진 것이다. 금융당국이 전세대출 규제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하면서 전세대출마저 막힐 수 있다는 불안감에 은행권의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올해 들어 5대 은행에서 14% 넘게 늘어난 전세자금 대출의 98%가 실제 전세 계약과 관련된 실수요 대출로 확인됐다.(사진제공 = 연합뉴스)

전세대출 중 대출자가 직접받는 생활자금 1.94%…"빈대 잡으러 집 태우나"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5대 시중은행의 8월 말 기준 전세자금 대출 잔액은 모두 119조9천67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전세보증금을 담보로 이뤄진 생활안정자금 대출은 전체 전세자금대출의 1.94%에 불과한 2조3천235억원이었다.

시중은행은 주택금융공사, 서울보증보험 등의 보증을 바탕으로 전세자금을 빌려주는데, 대부분 전세보증금의 80%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신혼부부나 청년 등 특정 조건을 갖추면 90% 선까지 대출해주는 상품도 있다. 최대 대출 상한액은 주택금융공사 보증의 경우 2억2천200만원, 서울보증보험 보증의 경우 5억원이다.

전세보증금이 올랐거나 새로 전세를 얻을 때 이용하는 이런 전세자금 대출은 전세 계약이 이뤄지면 바로 집주인 계좌로 대출액이 입금되는 구조다. 전세자금 대출이 가장 명확한 실수요 자금 대출로 분류되는 이유다.

세입자는 전세보증금을 담보로 생활안정자금을 빌릴 수도 있다. 전세계약과 전입 가운데 이른 시점을 기준으로 3개월 안에만 대출이 가능한데, 대출기한은 전세 계약 기간에 맞춰지기 때문에 대부분 2년이다.

전세 계약을 위해 이곳저곳에서 돈을 끌어모은 세입자가 겪을 수 있는 당장의 생활고를 고려한 상품인데, 당국이 전세자금 대출이 투기나 불필요한 부분에 전용되는 것을 의심한다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대출자 계좌로 받는 이 생활안정자금 전세대출뿐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물론 생활안정자금에 꼬리표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 사용됐는지 구체적으로 은행이 파악할 수는 없다"면서도 "하지만 전산망을 통해 생활안정자금 전세대출자의 주택소유 여부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있고, 실제로 생활고 관련 자금 수요도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은행 자체 자금이 아니라 각종 외부 기금으로 운용되는 버팀목 전세자금 등은 더 조건이 까다로워 실수요 외 다른 목적으로 대출이 쓰일 가능성이 더욱 낮다"며 "이런 상황에서 만약 2%도 되지 않는 생활안정자금을 투기자금으로 의심해 전세대출 규제를 시작한다면 빈대 잡으려고 집을 태우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더구나 5대 은행의 전체 전세자금 대출은 올해 들어 14.02%(105조2천127억원→119조9천670억원) 늘었지만, 생활안정자금 전세대출은 오히려 7.99%(2조5천252억원→2조3천235억원) 줄었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도 "전세자금 대출이 많이 늘어난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전셋값이 많이 뛰었기 때문"이라며 "전셋값 상승으로 대출 수요가 늘어난 것을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어떤 부분을 더 막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KB리브부동산'의 통계를 보면, 아파트 전세가격지수는 전국과 서울을 기준으로 작년 말보다 각 8.6%(107.2→116.3), 8.7%(113.3→123.2) 올랐다.

고승범 "다시 한번 본다"…실수요자들 "전세계약 서두를까요", "한도 줄면 동네 옮겨야"

금융당국은 전세자금 대출 규제 가능성에 대해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면서도 '많이 늘었으니 들여다보겠다'는 식의 애매한 입장을 반복하면서 시장의 혼란을 키우고 있다.

고승범 금융위원장도 지난 10일 금융지주회장단과의 간담회 후 기자들에게 "전세대출은 실수요자가 많으니 여건 보면서 다시 한번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당장 한두 달 사이 전세를 구해야 하는 세입자들은 급한 마음에 은행 창구에 '전세대출이 가능한지, 한도가 줄어드는지' 등을 묻고 있다.

한 시중은행 서울 광진구 소재 지점 관계자는 "최근 전세자금 대출 관련 변동이 있는지 창구나 유선 문의가 크게 늘었다"며 "전세자금 대출을 미리 받기 위해 아예 전세 계약을 서둘렀다고 말하는 고객도 있었다"고 전했다.

서울 서초구 한 지점 관계자도 "서울보증보험 보증 전세대출 상품과 관련해 한도가 축소되는지 문의가 많았는데, 고객들은 대체로 서초구 내 전셋값이 많이 올라서 집주인한테 동의받기도 어려운데 대출 금액까지 줄어들면 아예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한다고 걱정했다"며 "아직 대출신청 가능 금액에 변동이 없다고 답변드리고 가능한 한 빨리 계약서를 쓰고 지점을 방문하라고 권했다"고 말했다.

서울시 송파구 소재 지점 관계자는 "다른 은행의 주택 관련 대출 중단과 전세대출 규제 소문에 평소와 달리 상담 과정에서 전세자금 대출 신청이 가능한지 묻는 고객이 늘었다"며 "불안 때문인지 실제 대출을 신청하지 않더라도 관련 문의가 부쩍 많아졌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일부 언론에서 중구난방으로 언급되는 규제의 진위를 확인하는 고객도 많았다.

서울시 구로구 한 지점 관계자는 "이미 전세자금 대출 상담 후 계약을 체결한 고객이 새로 '자금조달계획서'를 써야 하는지 다시 물어보는 경우가 있었다"며 "이와 관련해 공문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최초 상담에서 안내한 서류만 준비하면 된다고 말씀드렸다"고 밝혔다.

전세자금 대출뿐 아니라 당국이 최근 많이 늘어난 대출 항목으로 언급한 집단대출도 대표적 실수요 자금 수요다.

집단대출은 아파트 분양 등과 관련된 중도금, 잔금 대출을 말하는데, 대부분 대출금이 대출자가 아니라 시행사, 건설사 계좌로 바로 들어간다.

올해 들어 개인집단대출은 4.0%(2020년 12월말 148조5천317억원→2021년 8월말 152조9천344억원) 증가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집단대출에 불필요한 수요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집단대출이 늘었다면 원인은 아파트 분양 등 계약이 증가했거나 분양가 등 집값이 올랐거나 두 가지뿐"이라고 설명했다.

[하나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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