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큰 별 '조용기 목사'…희망으로 기적 일구다

최상경 기자(cs_kyoung@goodtv.co.kr)

등록일:2021-09-14 8: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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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교회에서 세계 최대 교회 성장
제3세계 선교도 박차…지구 120바퀴 비행
취약계층 복지사업 및 평양 심장병원 등 다양한 헌신

 
 ▲경남 울산 울주군에서 태어난 조용기 목사 가족사진.(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긍정의 믿음을 갖고 긍정의 말을 하며 행동으로 옮길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뤄주실 것입니다.”

1960년대 ‘희망’을 전한 조용기 목사의 설교에 교회에는 구름 인파가 몰렸고, 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국 사회와 함께 성장했다. 조 목사는 한국교회의 부흥과 세계교회의 성장을 이끌었던 주인공이다.

1936년 경남 울산 울주군에서 태어난 조 목사는 한학과 전통적인 종교문화에 익숙한 가정에서 자랐다. 가난한 사춘기를 보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며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그의 인생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폐결핵 3기로 사망선고를 받으면서 바뀌었다. 병상에서 누나 친구가 전해준 성경책은 절망 속에 예수님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 뒤 부산에서 우연히 천막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캔 타이스 선교사를 만난 조 목사는 폐결핵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면서 신학교 입학을 결심했다.

조 목사는 1956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장모이자 목회 동역자인 최자실 목사를 만나 195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서 목회에 바로 뛰어들었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 천막교회 모습.(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교회 성장 배경…희망의 신학·강한 리더십
 
첫 목회지는 서울 은평구 대조동. 1959년 5월 18일 당시 최자실 전도사의 집 거실에서 가정예배 형태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서 목회를 시작했다. 성도라고는 밭일을 하다 비를 피해 들어온 할머니가 전부였다. 집 앞 마당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바닥에 깐 강대상을 놓은 채 예배를 드렸다. 천막교회의 시작이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목회 초반부터 부흥을 거듭했다. 1970~80년대 소외된 이들을 보듬는 조 목사의 ‘희망적 설교’에 많은 이들이 응답한 것.

교회는 창립 3년 만에 서대문로터리에서 부홍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이전했다. 1973년엔 국회의사당과 시범아파트 외 허허벌판이던 여의도에 교회를 신축해 옮겼다. 당시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교통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바탕으로 여의도에 건물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강하게 추진했다.

1973년 8월 19일 현재의 여의도에서 최초의 예배가 드려졌다. 그 뒤로 성장세가 가팔라지며 1979년 성도 수 10만 명, 1981년 20만 명을 넘어섰다. 1993년에는 성도 수 70만 명이 넘는 세계 최대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교회 측은 이런 성장 배경으로 조 목사의 강한 리더십을 꼽았다. '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으로 영적 도전을 거듭한 조 목사의 목회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 모델은 성도 수 증가의 비결로 거론된다. 서울 지역을 20개 구역으로 분할한 후 평신도 여성들을 구역장으로 임명해 구역 모임을 이끌게 한 것이 출발이었다. 외국에서 온 목회자들이 현지 목회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구역조직을 접목시켜 엄청난 부흥을 이루기도 했다.

미국 풀러신학교 피터 와그너 박사는 "한국의 조용기 목사는 20세기 후반 들어 가장 강력하게 세계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 지도자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했다. 
 
 ▲잠실올림픽주경기장 기념성회 개최.(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세계 교회 성장에 영향

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위상은 국내를 넘어 세계에 알려졌다. 1973년 9월 제10차 세계 오순절 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아시아 국가가 주최한 첫 오순절 세계 대회였다.

1976년에는 세계교회성장기구를 설립해 세계교회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조 목사는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를 역임하면서 제3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등 기업인들이 세계 시장을 누빌 때 조 목사는 지구 120바퀴를 날아 세계 선교에 나섰다.

조 목사는 1975년부터 2019년까지 71개국에서 최소 370차례 부흥회를 인도했다. 구소련 붕괴 후인 1992년 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성회를 가졌고, 1997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진 성회에서는 150만 명이 운집, 두 나라에서 모두 기독교 사상 최대 집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국내에서 민족복음화운동에도 헌신하며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을 다니며 성회를 인도했다.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세계 선교를 꿈꿨던 조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장 앞서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당시 세계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의 대부분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 리젠트신학대학원장 빈슨 사이난 박사는 일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세계교회에 미친 영향’이라는 세미나 발제문에서 “기독교 성장의 중심과 영향력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되고 있으며 한국이 주도할 것”이라며 “이는 조용기 목사가 시무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향에 의해 나타날 것”이라고 피력했다.
 
 ▲평양서 열린 '조용기 심장전문병원' 착공예배.(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어린이 심장병 수술 등 헌신
 

조 목사는 취약계층을 돕는 다양한 사업과 함께 남북관계 개선에도 크게 기여했다.

비정부기구(NGO)인 사단법인 ‘선한사람들’(현 굿피플)을 세워 인권, 환경, 아동복지 증진 등에 힘썼다. 그 공로로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적십자헌혈유공자 금장’, 1996년에는 심장병어린이 무료시술 지원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헌신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핵심 대북사업 중 평양에 추진해 온 ‘조용기 심장전문병원’은 2007년 착공해 골조공사가 마무리됐으나, 2010년 정부의 ‘5·24조치’로 인해 내부공사와 병원 기자재 설치 작업이 중단되며 미완공 상태에 있다.

조 목사는 사역 50년을 맞은 2008년 이영훈 목사를 담임목사로 임명하고 원로목사로 물러나는 세대교체를 이뤘다. 3차례 투표를 거친 교회 리더십의 민주적 이양이었다.

자신의 목회 인생을 한마디로 ‘기적’이라고 정의했던 조 목사는 생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도 ‘기적’을 거듭 강조했다.

“인생의 목표를 분명히 가지고 그 꿈을 마음에 그린 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믿으면서 입술로 ‘할 수 있다’고 시인하십시오. 꿈을 가지고 믿음으로 전진하면 기적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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