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데일리굿뉴스
지상파 방송사의 시청률 최상위 프로그램은 단연 일일 드라마다. 20일 기준으로 보면 시청률 1위는 KBS 2 채널의 <빨강구두>, 2위는 KBS1의 <국가대표 와이프>이다. 통속적인 가정사를 다루는 드라마이지만 이야기 구조가 나름 재미를 갖춰 나이 지긋한 분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방송 시간은 각각 평일 저녁 7시 50분과 8시 30분. KBS2의 일일극 <빨강구두>는 다른 두 곳의 지상파 방송사 메인 뉴스와 비슷한 시간에 시작해 시청자들의 이탈을 막는다. 그 드라마가 끝나는 시간에는 KBS1의 일일 드라마 <국가대표 와이프>가 바통을 넘겨받는다. 9시에 시작하는 는 한 치의 오차 없이 곧이어 방송된다. 해서 평일 지상파 시청률 3위는 KBS 메인 뉴스의 몫이다. 잘 짜인 편성 전략이다.
 
국내에서 일일 드라마가 편성 전략의 핵심으로 등장한건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스 시청률 경쟁이 치열했던 시절의 산물이다. 시청률 경쟁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편성 전략을 어떻게 짜야 할지를 놓고 실무진부터 경영진까지 골머리를 앓던 시기였다. 고정 시청자를 어떻게 흡수할 수 있을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게 뉴스 직전 일일 연속극 편성이었다. 주부들을 고정 시청 층으로 확보한 미국의 연성 드라마(soap opera)가 수 십 년 지속된 인기 프로그램이란 점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예상대로 대성공이었다. 마침내 뉴스 시청률이 역전됐다.
 
드라마가 확실한 시청률 확보 카드로 확인되자, 방송사들은 드라마 제작에 총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메인 뉴스의 앞뒤 시간을 드라마로 편성하는 웃지 못 할 촌극까지 벌어졌다. 주말 드라마도 뉴스를 전후해 두 편 씩 편성됐다. ‘더 독하게, 더 저질로’, 무리수가 나왔다. 막장 드라마의 과도한 경쟁은 질 저하로 이어졌고 사회적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지상파 드라마 왕국의 시대는 갔다. 유선 방송과 종편 채널, OTT 등 다채널 다매체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넷플릭스처럼 인터넷을 통해서도 콘텐츠를 볼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방송 지형 변화의 서곡이었다.
 
지상파 방송사로 쏟아지던 광고가 줄었다. 방송사는 적자의 늪에 빠졌다. 흑자 전환을 위해 지출을 줄여야 했다. 대표적인 희생양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편수를 대폭 줄였다. 월화수목 이어지던 주중 드라마를 폐지했다. 아침 드라마는 저녁 시간 방송된 일일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걸로 대체했다.
 
작품성으로 인정받던 미니 시리즈도 자주 볼 수 없게 됐다. 미니 시리즈 한 편을 줄이면 줄잡아 100억이 절약됐다. 1회당 제작비 6-7억, 통상 20회 편성이었으니 그 보다 확실한 예산 절감은 없는 듯했다. 그게 나중에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적자를 청산하고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대가는 컸고 부작용이 속출했다, 드라마 PD들이 지상파를 등지고 제 갈 길을 찾아 나섰다. 유명 연출자와 작가, 스태프까지 새로 탄생한 유선 방송, 종편, 외주 제작사, OTT 서비스 등에 둥지를 틀었다. 코로나로 영화 시장이 위축되자 영화감독까지 이 대열에 합류했다. 풍족한 제작비와 후한 대우를 받으며 그들은 새롭게 도전했고 드라마 시장을 바꿔 놓았다. 넷플릭스도 그 중의 하나였다.
 
넷플릭스는 화제작 <오징어 게임>의 제작비로 1회 당 25억이 넘는 비용을 책정했다. 잘 만든 미니 시리즈 1회 당 제작비가 10억도 안 되는 국내 여건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탄탄한 해외 유통망도 갖추고 있었다. 국내 드라마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튼튼한 동아줄’을 잡은 것이다.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을 필두로 비영어권 콘텐츠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시점이었다. 영화 <기생충>, <미나리>가 아카데미상을 받은 것도 한국 콘텐츠에 대한 주목도를 끌어 올렸다.
 
<오징어 게임>은 대박을 터뜨렸다. 아니 넷플릭스에 엄청난 수익을 안겨줬다. 제작비 250억을 들여 만든 콘텐츠가 1조 원 가량의 수익을 올렸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제작비를 지원 받는 대가로 해외 시장 유통과 지적 재산권을 넘긴 우리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일 수도 있겠다. , <마이 네임>, <갯마을 차차차> 등 또 다른 한국산 넷플릭스 제작물도 해외 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니 속이 더 쓰릴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 콘텐츠의 한계이자 현 주소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11월 중순이 되면 콘텐츠의 강자 ‘디즈니 플러스’도 한국 시장에 진출한다. 디즈니 플러스는 이미 1,000억 대 제작비를 들여 한국 콘텐츠 제작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 콘텐츠에 대한 해외 자본의 본격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 박성중 의원은 “작품은 우리가 만드는데 큰돈은 넷플릭스가 싹 다 가져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 KBS는 <오징어 게임> 같은 프로그램을 생산하지 못하느냐”고 지적했다.
 
늦었지만 드라마 등 한국 콘텐츠 시장의 현실을 짚어보고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한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 넷플릭스에 쏠려 있는 제작사의 다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콘텐츠의 지적 재산권을 확보하면서 해외 유통망을 열어가는 방법은 없는지 찾아 봐야 한다. 콘텐츠 제작사나 방송사에만 맡겨두지 말고 정부도 나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불필요한 방송 규제를 풀어야 한다.
 
드라마의 제작 여건 개선을 위한 지상파 차원의 노력도 강화해야 한다. 지상파 3사가 함께 하고 있는 OTT 서비스 ‘웨이브’의 제작 지원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선택과 집중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좀 더 옮겨갈 필요가 있다.
 
더불어 국내 통신망에 큰 부담을 주면서도 ‘망 사용료’는 내지 않는 넷플릭스와 구글 등에 대해 미국, 프랑스 등 해외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비용을 지불할 것을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넷플릭스가 우리에게 던진 역설이다.
 

[송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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