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봉 목사(포도나무교회)
우리 신앙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을,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의 대표적인 본보기로 우리는 지난번에 다윗의 삶을 살펴보았다. 성경에 보면 모세와 다윗 뿐 아니라, 신약의 바울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이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오늘은 바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에 대해서 상고해 보고자 한다.

1. 예수님을 아는 것이 바울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우선 이 구절에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 단어가 헬라어로 남성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 모든 영어성경은 다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너희 중에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었을 때를 말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 당시는 전 세계가 사도 바울 앞에 열려져 가고 있었고, 그를 통해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들이 나타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이 구절에 보면 그 상황에서도 사도 바울의 유일한 삶의 목표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아는 것음을 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목표가 사역이 되어질 때 하나님 중심적인 사역이 가능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어질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가능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만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중심적인 사역이 가능하다.

2. 예수님을 아는 것이 바울의 평생에 유일한 목표였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의 후기에 쓰여진 옥중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7-12). 이것을 보면 그의 평생 동안 그의 유일한 삶의 목표와 목적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한다. “우리는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뛰어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거리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통제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그를 위해서 일하고 있어요.’ 그런 다음에 우리는 그를 떠나 버리고 계속 우리 자신의 작은 일들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임재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것, 그것이 참된 기독교입니다. 부흥시에 언제나 하나님께 사용되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추구했습니다.”(『부흥』, 119쪽)

3. 하나님을 얼굴을 구하는 것의 한 부분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승리를 삶에서 실제적으로 알기를 구하는 것이다.

위 빌립보서 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알기를 구했던 한 가지는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능력)이었다. 이 말은 그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이론적으로 알기를 구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은 그 능력의 실제를 삶에서 실제적으로 경험적으로 알기를 구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갈라디아서 2:20을 잘 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의 한 부분은 실제적으로 그 삶을 살기를, 그래서 삶을 통해서 그 삶의 실제적인 승리와 능력을 알기를 구하는 것이다.

4.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만큼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부터 예수님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전 1:17, 23, 2:1). 그런고로 그는 고린도전서 2:2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전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했어야 앞뒤가 딱 맞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앞뒤가 안 맞는 것은 이 말이 정말 중요한 말이다. 우선 이 구절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만큼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는 핵심적인 진리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2:2만 하더라도 우리가 실제로 그 삶을 삶으로 그 삶을 위한 길과 그 능력과 승리를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그 승리의 자리로 인도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교리적인 몇 가지 지식을 전할 것이고, 그것은 실제로 상대방에게 어떠한 실질적인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리더들일수록 고린도전서 2:2에 나오는 바울의 자세는 정말 중요하다.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침체되고, 교회 안에 이론만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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