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우러러보는 대학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가진 돈 전부를 노숙인 급식에 쏟아 부은 목사가 있다. 말끔했던 손과 외모가 거칠어지고 투박해졌다. 일주일 중 6일을 매번 시장을 보고 식재료를 다듬고 밥을 짓는 데 쏟는 탓이다. 17년째 영등포 롯데백화점 앞에서 노숙인 저녁 무료급식사역을 진행하고 있는 밥사랑열린공동체 박희돈 목사를 만나봤다. 
 
▲설을 앞두고 지난 23일 영등포 롯데백화점앞에서 밥퍼 사역을 하고 있는 박희돈 목사를 만났다. ⓒ데일리굿뉴스


영등포 롯데백화점 앞에서 무료급식 17년째

왜 영등포 백화점 앞일까. 노숙인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이고,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먹일 수 있는 광장이기 때문이다. 유리 방랑하는 노숙인들이 몰려 있으면 냄새나고 위협스럽다며 곧바로 민원이 제기되기 때문에 백화점 문이 닫히는 저녁 8시~8시 30분에 배식을 한다.

기자가 박 목사를 만난 날은 설 대목을 맞아 백화점이 연장영업을 하는 바람에 강추위 속에서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광장에 플라스틱 의자가 놓이고, 밥주걱 놀리는 손이 바빠진다. 목동의 한 교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나와 한 쪽에서는 찬양으로 마음을 녹이고 한쪽에서는 삼계탕으로 몸을 녹여 준다. 설 선물로 준비한 양말, 떡 꾸러미도 하나씩 배분된다.

박희돈 목사는 왼쪽 귀가 잘 안 들린다. 청각 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청각을 잃지 않으려고 스테로이드를 먹다보니 몸까지 영향을 미쳐 움직임이 둔하다. 그래도 광장 중앙에 서 있는 박 목사에게 끊임없이 누군가 찾아와 가까이 데고 인사를 건넨다. 모두 노숙자들이다.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꾀는 듯한 대화는 오랜 기간 쌓인 신뢰의 깊이를 가늠케 해준다.

"이 사람들은 노숙자 중에서도 진짜 노숙자들이에요. 대포통장, 위장결혼 등의 덫에 걸려 아예 주민등록증이 말소되거나 행불자 신세인 사람들도 있어요. 진짜 낭떠러지에 있는 사람들이죠. 예수님이 공생애에 돌본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창녀의 손도 잡아주시지 않았습니까. 교회가 사명감을 갖고 대해야 합니다."

그의 인생에 이처럼 노숙인이 1순위로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뭘까. 가족까지도 등진 채 말이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사회복지학 교수, 원자력병원 원목실장, 어린이집 원장이 그가 잘나가던 때 갖고 있는 직함이었다. 수입도 대기업 임원 부럽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1년 지방 강의를 하고 새벽녘에 내린 영등포역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추위를 가릴 수 없을 만큼 얇은 옷을 입고 쓰레기통을 뒤져 다 식은 컵라면 국물을 찾아내 먹는 한 여성 노숙인을 본 것이다.

"‘왜 이 시간에 이런 걸 먹느냐’고 물으니 ‘낮에 남자 노숙자들과 함께 구걸해서 먹으면 그 대가로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을 할 수도 있어서 이렇게 밤늦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때 깨달았죠. 목사이자 사회복지사인 내가 엉뚱한 데서 헤매고 있었던 거구나. 아마 하나님께서 이걸 알게 하려고 그 여성 노숙인을 만나게 해준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수 그만두고 밥퍼주는 사람으로

아내는 잘 나가던 그가 갑자기 노숙인들에게 모든 걸 쏟아 붓자, 남편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만 둘 수 없었고, 아내는 이혼장을 내밀었다. 아내와 자녀가 그렇게 곁을 떠났다. 그 충격으로 박 목사는 한쪽 귀, 한쪽 눈의 기능을 거의 잃었다.

"다 그만두고 목사로 돌아와 노숙인 밥 주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친구들도 다 '미쳤다'고 했어요. 그래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주님의 뜻이란 생각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끌어 들인 것이죠. 이제는 사역을 이해해주는 여자를 만나 재혼했고, 아기도 입양해 키우고 있습니다. 토요일을 빼고 주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저녁밥을 직접 해서 나눠주고 있어요."

그는 "재정은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섬기고 있다"면서 "교회가 돈을 주면 그 돈에 맞게 음식을 직접 해서 준다. 오늘 섬기는 교회는 좀 넉넉하게 보내줘 삼계탕을 만들었다"고 활짝 웃었다.

백화점이 불을 꺼야 시작할 수 있는 일, 추운 겨울도 밖에서 먹여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는 노숙인들을 위한 실내 식당, 목욕실, 세탁실을 갖춘 시설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고 밝혔다.

"추위에 떨지 않고 먹게 하고, ‘냄새 난다’는 면박을 받지 않게 하고 싶어요. 교회가 말로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칠게 아니라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 도움이 필요해요."

가족과 사회에 버림받고 절벽 같은 곳에서 몸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에게 베푸는 호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다시 버림받을까봐, 그리고 이용당할까봐 자꾸만 행패부리며 상대를 시험한다. 17년 세월을 변함없이 견뎌 주고 있는 박 목사에게 그들이 형님으로 불리는 이유다.

밥차에 붙어 있는 '당신을 사랑합니다(I LOVE YOU)'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얼굴 나오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이들이지만 방송국 카메라 빛을 뚫고 또다른 누군가 쭈뼛쭈뼛하며 박 목사에게 걸어가 인사한다. '사랑'은 결국 통하는 법이다.

▲이날은 제자교회에서 지원 및 봉사를 맡았다. ⓒ데일리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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