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 목사ⓒ데일리굿뉴스
진 밖에 세워진 회막
 
출애굽기 33장 7~11절에 보면, 시내산에 올라 목숨을 걸고 다시 중보의 기도를 드렸던 모세가 진 밖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을 회막이라 부릅니다. 회막은 어떤 곳입니까? 회막은 만남의 장소라는 뜻으로 광야에서 정식으로 성막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던 장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회막이 어디에 세워졌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이 세워졌습니다.
 
원래대로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중앙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회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 임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려면 철저하게 죄를 청산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죄를 미워하며 죄와 투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회막으로 나아가는 자들
 
이렇게 모세가 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회막을 쳤을 때에 그 회막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갔고,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이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회막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지도자인 모세와 여호와를 앙모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앙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여호와를 간절히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도 공동체의 죄를 깊이 깨닫고 여호와를 간절히 찾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자들
 
이렇게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이 회막을 향해 나아갔지만 절대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장막에 머무르며 바라만 봤습니다. 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회막으로 나아가지 않고 장막 안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그것은 장막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떻게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관망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들은 자기들의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았습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예배를 드리든지 기도를 드리든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은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막문에 구름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장막 문에 서서 예배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여호와를 앙모하여 회막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있고 멀리 서서 바라만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아가는 자들이 많을까요? 아니면 바라만 보는 자들이 많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나아가는 자들보다 멀리서 바라만보는 구경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기회주의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대세를 따르고 사회적 분위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진리를 따르고 창조의 질서를 따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회막에 임한 구름기둥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구름기둥이 회막 문에 내려섰습니다. 시내산 정상을 덮고 있던 구름이 모세가 설치한 회막 위로 이동해 구름기둥으로 회막 문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름기둥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구름기둥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 지금 이곳에 임재해 계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막에 구름기둥이 서 있었다는 것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회막은 볼품도 없고 아름답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볼품도 없고 초라하게 보이는 그 회막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웅장하고 화려한 곳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볼품이 없고 초라해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곳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하신 그곳이 가장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으로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친구처럼 대면하여 말씀하심
 
출애굽기 33장 11절을 보면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회막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대면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만나면 서로 마주보고 앉아 마음을 툭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와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모세와 친구처럼 서로 대면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친구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이런 종교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신이 연약한 피조물을 향해 “너는 나의 친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너는 나의 친구” 라고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오늘 하나님의 친구로서 모세처럼 하나님과 친밀함의 축복을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 하듯 하나님과 마음을 툭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는
 
그러면 왜 예배도 드리고 사역도 하고 제자훈련도 받고 있고 순장과 목자로도 섬기고 있는데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 없을까요? 아니 사역은 있는데 왜 친밀함이 없을까요? 모든 관계에서 친밀함은 함께하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관계만으로 친밀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회막으로 항상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정상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속에 있었습니다. 시내산 아래 광야에 있을 때에도 항상 하나님이 임재하신 회막에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갔듯이 모세 역시 거룩한 습관을 따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항상 그 회막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온전한 시간이 있었기에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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