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준 목사ⓒ데일리굿뉴스
루터, 성경 위에 예술을 꽃피운 신학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을까? 이름이 주는 뉘앙스처럼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지적하고 단순히 도덕적인 갱신을 시도하는 것인가? 중세 말기의 교황과 교회의 도덕적 타락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고려할 만한 질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기독교 본래의 신앙을 흐리게 하는 요소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신앙을 가지도록 신앙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 본래의 신앙을 가로막는 이미지들이 삶 가운데 상당히 침투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북유럽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 일들이 이제 교회와 사회 전반의 이슈가 될 만큼 커져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이끌어 가는 직접적인 계기는 면죄부의 판매와 이미지의 미신적인 숭배였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이러한 일은 있었다. 원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성화상(Icon)은 이제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으로 격상됐다. 성모 마리아가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하면서 성모상은 최상의 관심을 모으는 교회의 전시물이 됐다. 당시 지체 있는 관리들 사이에서는 성유물을 수집하는 관습이 성행했다. 루터를 바르트부르크성에 보호해 주어서 종교개혁을 완성시키는 데 일조한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조차 5005점의 성유물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종교개혁 이전의 시기에도, 이미지의 숭배는 가톨릭 신앙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이 사실은 이미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사의 노동에 관하여>라는 저술에서도 나타난다. 당시에 이미 여기저기에 순교자의 성유물이라 선전하며 관심을 모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열하고 몰염치한 시장을 열고 한판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들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현실에 깊이 탄식했다. 그 무렵부터 여러 곳에서 채집한 골을 성자의 유골이라고 부르면서 순진한 사람들을 믿게 하는 기만이 거듭되고 있었다.

레겐스부르그에서 성모마리아 상에 경배하는 순례자들

그런데 왜 루터에게서 이 문제가 크게 제기됐는가? 이것은 교회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 성경과 신앙에 근거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시대로 무르익어 갔다는 말이다. 사회의 실제적인 문제였고 모든 계층의 관심사가 될 정도였다. 면죄를 받기 위해서 치르는 대가 중의 하나가 성유물이란 이름의 이미지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성물을 기증하기도 했다. 이로써 비텐베르크 성과 대학 교회에는 많은 성유물이 기증되고 매년 공공에 전시됐다. 이때 특별한 사면이 이루어졌다.

당시 루터는 수도사로서 세상에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1507년 사제의 서품을 받고 1513년 비텐베르크대학 신학부에서 시편 강해를 시작으로 성경 강의를 시작한 젊은 학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1515년 시편 51편과 로마서 1장 17절의 강해를 통해 사람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성경적 통찰은 자신에게 뿐 아니라 그의 동료 수도사나 제자들에게 매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일은 루터에게 고행과 선행을 통해 죄사함과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가톨릭교회의 구원관이 주는 불확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미지의 올바른 사용과 ‘성경적 예술론’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 초석이 됐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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