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규 교수ⓒ데일리굿뉴스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폐막식, 전 세계에 실황이 중계되는 상황에서 너무나 창피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기자가 발언하고자 손을 들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기자가 질문하는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긴 침묵 속에 오바마 대통령은 “통역을 써도 좋으니 질문하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민망한 상황이 돼버린 것이지요. 결국, 발언권은 중국 기자에게 돌아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문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떨까요? “믿어라, 믿어라, 믿어라” 하는 말에 너무 익숙해서 그런지, 질문하는 것을 신앙이 없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튀지 마라”, “침묵이 금이다”라는 속담을 철석같이 믿어서 그런지, 질문하면 오히려 무안을 당하기 일쑤지요.
 
물론 성경을 대하는 태도에서 '의심'과 '의문'은 구분해야 합니다. 필자가 말하는 의심이란 무조건 부정하려는 태도이고, 의문은 더 자세히 더 정확하게 알려고 던지는 질문입니다. 정말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혹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알아보려는 간절한 자세입니다. 의문은 성경적 자세입니다.
 
사도바울이 베뢰아에 갔을 때,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했습니다(사도행전 17장 11절).
 
의문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습니다. 의문이 강하면 날카로운 질문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원래 명마는 야생마가 길들어져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야생성이 없이는 깊이 있는 사유가 나올 수 없습니다. 또한, 혼자서만 성경을 읽고 건설적인 토론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성경 읽기는 주관성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토론은 사도바울이 추구한, 성경에서 말하는 교육방식입니다.
 
“바울은 늘 하던 대로 유다인들의 모임에 가서 세 주간에 걸쳐 안식일마다 성서를 놓고 토론하였다”(사도행전 17장 2절). 여기서 '토론하였다'는 헬라어로 디아렉타이, 즉 토론하다 혹은 사유하다의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기 위해 질문하고 토론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하고 있을 뿐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아는 것'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을 구별하는 능력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합니다. 질문과 토론은 메타인지를 키웁니다. 제대로 알게 하고 확실하게 알게 합니다.
 
성경에서도 '영생'을 위해서는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내용도 제대로 모르고 앵무새처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이해한 상태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기노스코진)이니이다"(요한복음 17장 3절).
 
신앙인들이 성경을 잘 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읽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요. 하지만 실제 이유는 성경이 “재미가 없어서”라고들 합니다. 저는 신앙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질문을 많이 던지고 토론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하고 토론하면 생각하는 즐거움이 나타나고 성경 곳곳에서 확인하거나 해법을 찾으려는 습관이 들고, 자기 생각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더욱 깊은 이해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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