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정신을 그린 예술가, 뒤러(Dürer)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 교회(Schloβkirche)의 정문에 격문을 붙인
▲안용준 목사ⓒ데일리굿뉴스
이후 역사는 급격하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한 젊은 수도사의 진리를 향한 열정이 쉬지 않고 한층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은 물론 온 유럽이 기독교 본래의 신앙을 흐리게 하는 요소를 잘 알고 개탄하고 있었기에 루터의 행위는 점점 더 이슈화되어 가고 있었다.

북유럽 최고의 예술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가 고국에서 들려오는 천지를 뒤덮을 것만 같은 소식을 들은 것은 당시 네덜란드 젤란트를 여행할 즈음이었다. 그는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순전히 다른 의도 없이 95개 조항으로 면죄부에 대한 신학적 토론을 제의한 루터의 용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의 신앙, 곧 이신칭의(Glaubensgerechtgesprochen)는 기독교 역사와 문화 예술을 새롭게 여는, 놀랍도록 종교개혁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이러한 발견은 뒤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중세 말기의 기독교가 타락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던 터였다. 1415년 유서 깊은 프라하의 광장 한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던 프라하대학의 총장, 얀 후스의 화형식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로마교회의 도덕적 부패와 면죄부의 판매는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맹렬히 비판되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던 성화상은 이제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어갔다.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뒤러로 하여금 깊은 정신적 충격을 받게 했으며 루터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뒤러가 네덜란드를 여행하고 있을 때는 루터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사태가 긴박했는데, 1521년 그가 귀국했을 때에는 종교개혁의 기운이 최고조로 달해 있었다. 이제 루터의 성경제일주의를 바탕으로 한 예술의 세계가 뒤러의 머리에 보다 상세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상반되는 요소인 독일적 혹은 북방 게르만적이라 할 수 있는 조형정신을 되살렸다.

결국 95개조 반박문에 연이어 계속되는 루터의 운동에 시각예술은 깊이 관여되기 시작했다. 특별히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에게 있어 루터의 종교개혁은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확신케 하는 감동의 사건이었다. 그는 평소 성경 예술 자체의 의미를 연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특별히 그의 ‘요한계시록’에 관한 14편의 목판화는 역사의 결말로 가는 하나님의 설계이며 종말의 의미를 제공하는 역사의 대략적인 설명으로 그동안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명작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뒤러의 그림은 세상의 가치로선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종말의 의미와 믿음을 전달하기 위해 생동감 있는 조형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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