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내 잔이 넘치나이다'란 마지막 고백을 남기고 포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청년 맹의순. 최근 제자들이 기증한 육필일기가 책으로 출간되면서 맹의순의 삶이 다시금 주목 받고 있다. 죽기까지 복음전파와 이웃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맹의순의 삶을 되돌아보자.
 
 ▲최근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주인공 맹의순에 육필일기가 공개되면서 맹의순의 삶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죽기까지 복음전파에 힘썼던 그의 삶을 되돌아보자.ⓒ데일리굿뉴스
 
억울하게 갇혔지만 '복음전파 위해' 석방 거부
 
부유한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맹의순. 조선신학교를 다니며 남대문교회 중등부 교사로 섬기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겨우 피난길에 올랐지만, 그는 미군의 오해로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억류됐다.
 
억울할 법도 하지만 맹의순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곳 만큼 전도하기 좋은 곳은 없다'고 말하며 포로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용소 당국은 포로들에게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했고, 맹의순은 당국의 협조를 받아 포로들에게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이 바로 포로수용소의 '광야교회'가 세워지게 된 시초가 됐다.
 
맹의순은 늘 낮은 자세로 전도활동을 펼쳤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낮 예배와 성경공부 등을 실시하며 밤에는 투병 중인 중공군 포로들을 간호했다.
 
맹의순은 영어 통역이 가능해 미국인 의사들이 환자를 진찰할 때 그 옆에서 통역을 담당했다. 이를 기회로 삼아, 매일 새벽 1~2시가 되면 병동을 찾아 포로들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찬양을 불러주곤 했다.
 
이런 가운데 석방될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는 자신의 사명을 수용소에서 끝까지 감당하겠다며 석방마저 거부했다.
 
하지만 과로한 피로상태와 부족한 영양실조가 계속 그를 힘들게 했다. 밤낮없이 포로들의 곁을 지켰던 맹의순은 결국 석방을 나흘 앞둔 채 죽음을 맞이했다. 맹의순의 모습을 봐 온 중공군 포로들은 참된 천사를 보았다고 고백한다.
 
"선생은 하늘에서 보낸 천사였습니다. 마지막 환자를 다 씻기고 일어난 선생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편 23편을 우리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셨습니다. 다 봉독하신 뒤 높은 곳을 바라보시며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당시 중공군 포로 환자가 맹의순 죽음을 추모하며 쓴 글-

 
맹의순이 마지막으로 고백했던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결국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다.
 
남대문교회 손윤탁 목사는 그의 고백에, "병마와 싸우면서도 천국을 향한 맹의순의 열정, 그리고 죽기 전까지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삶과 신앙을 일치하고자 치열하게 노력했던 그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제자들의 도움으로 <십자가의 길> 출간
 
27살이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맹의순에 대한 자료는 많이
 ▲<십자가의 길>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맹의순과 함께 포로수용소에서 교회를 섬기던 이원식 목사(서울 국일교회 원로)가 남대문교회 역사위원회에 맹의순의 육필일기 원본을 기증하며 빛을 보게 됐다.
 
영어와 일본어, 한문이 섞인 원고를 남대문교회 손호인 목사가 한글로 번역하고 신재의 원로장로가 일기와 교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맹의순의 삶을 되살려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육필일기를 묶은 <십자가의 길>을 펴냈다.
 
맹의순의 삶은 비록 짧았지만, 그의 신앙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교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말씀과 삶의 일치를 중요시했던 루터의 종교개혁. 이 가치를 맹의순 선생은 죽기 직전까지 실천했던 인물입니다. 수용소에서 석방될 기회마저 버리고 전도에 힘썼던 그의 삶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제사장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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