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류문명은 기록문화를 통해 발전해왔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고대 기록물들은 점토나 거북 등껍질을 비롯해 파피루스와 같은 갈대 잎, 양의 가죽으로 된 양피지에 담겨졌다. 이후 중국 후한 때인 서기 105년 채륜이 종이를 발명한 이후 보다 쉽게 문자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됐다.

처음 일일이 손으로 직접 글을 써야 했던 기록의 역사는 인쇄술이 도입되면서 목판인쇄로 도약했고,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활판인쇄시대를 맞게 됐다. 이후 인류의 인쇄기술은 활판인쇄를 거쳐 레터프레스, 오프셋인쇄 등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유럽 역사를 바꾼 금속활자 인쇄술


  ▲종교개혁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구텐베르크 활판인쇄 시연모습(파주 출판도시의 활판공방 체험현장)ⓒ데일리굿뉴스

인쇄술의 발달은 인류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1436년~1446년에 걸쳐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는 1445년 금속활자로 42행 성경을 인쇄했다. 1517년 루터 종교개혁도 금속활자의 덕을 톡톡히 봤다. 금속활자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나 성경번역 활동이 제약과 함께 민초들이 그 정신을 받아들이는데 한계가 따랐을 것이다.

이처럼 서양사에서 구텐베르크 활자는 문예부흥의 완성과 루터의 종교개혁 성공, 정치적으로 프랑스혁명과 경제적으로 영국의 산업혁명을 완성시키는 큰 모티브로 작용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로 인해 상업적인 책들이 활발하게 제작됐으며 언론 출판의 자유가 생겼다. 이로 인해 오늘의 서양이 동양을 앞서게 됐으며 세계를 지배하는 동인이 됐다.

소수 엘리트 양산에 활용된 우리 활판인쇄

흔히 우리나라는 대외적으로 ‘인쇄종주국’임을 자부한다. 우리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 인쇄활자(1445)보다 먼저 발명되는 등 목판과 금속 활판에서 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377년 고려 공민왕 21년 백운화상이 편찬한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그런데 증도가자(證道歌字)가 직지보다 최소한 138년 이상 앞선 것으로 추가로 알려지면서 우리의 금속활판이 구텐베르크 활판보다 200여년 앞섰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서양의 구텐베르크 활자는 세상을 변혁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데 우리의 금속활자는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이에 대해 초조대장경을 비롯한 우리 고서들과 구텐베르크의 활판성경 등 다양한 고서들을 수집해 온 고서수집가 화봉책박물관 여승구 대표는 “구텐베르크보다 앞선 활판인쇄술을 보유했던 우리의 경우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로 인해 당시의 사상들을 온 백성들이 통용할 수 있는 계기가 형성됐으나, 실제로 이 활판과 한글이 민초들의 구석구석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지배계층에서 금속활자를 활용해 국민계몽을 주도하기보다 소수 엘리트를 양산하므로 왕정을 유지하는데 급급했다는 것이다. 즉 서양보다 몇 백 년 먼저 위대한 발명을 해놓고도 사회 전반에서 제대로 활용을 못했기에 오늘날 우리의 금속활자는 단지 ‘쇠도장’으로 저평가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뛰어난 인쇄술이 사회 밑바닥까지 영향을 미쳤다면 당시의 우리사회는 유럽의 종교개혁이나 르네상스와 같은 문화혁신이 일어났을 것이며, 오늘날 서양보다 더 뛰어난 문명을 자랑했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 전래도 훨씬 앞당겨져 구한말과 일제 시대 등 가슴 아픈 역사를 거치지 않았을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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