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러시아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는 공산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개방의 물결을 타고 이 도시는 옛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이는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이다. 1993년, 최영모 선교사는 공산주의가 시작됐던 이 도시로 향했고 냉전의 사슬에 묶여 있던 러시아인들을 주님의 품으로 돌려세우고 있다.
 
 ▲ 최영모 선교사는 공산주의가 시작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舊 레닌그라드)'에 40여 개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 전파에 힘쓰고 있다. ⓒ데일리굿뉴스
 
"왜 이제서야 왔습니까?"
 
러시아에서 복음을 전한 지 24년이 흐른 지금, 최 선교사는 150명의 성도가 모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장로교회를 시무하고 있다. 40여 개 교회도 개척해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도록 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정교를 믿는 러시아인이 73%에 이르지만, 이들 중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0.1%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최 선교사는 이 곳에 복음 전도가 시급함을 느끼고 있고, 그럴수록 사역에 더욱 매달리고 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대학의 총장도 맡으며 기독교 이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목회학 석사(M.Div)와 교역학 석사 과정을 갖춘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대학의 총장을 맡으며 기독교 이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최 선교사는 어느 날 한 시골 교회에 갔다가 사역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된 일이 있었다. 그가 설교를 마치자마자 노파 한 분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어떻게 이런 시골까지 오게 됐냐"고 물었다. 최 선교사가 러시아에 온 계기를 설명하니, 노파는 그제서야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외쳤다고 한다. 그가 의아해 하니까 그 할머니는 "내가 이제 생애 마지막을 볼 때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한 게 이렇게 좋을 수 없다. 왜 이제서야 왔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최 선교사는 이 일을 계기로 러시아 선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됐다.
 
▲ 현재 최영모 선교사가 시무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장로교회에는 150여 명의 러시아인과 고려인, 한국인 교인이 출석하고 있다. ⓒ데일리굿뉴스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 체험해

 
2~3년 전, 최영모 선교사는 사역을 멈출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 당시 러시아 정부가 외국인 사립학교나 자선재단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는데, 이로 인해 선교사들의 건물이 하나둘 정부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최 선교사의 건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러시아 정부는 그의 선교센터를 고발했고 재판으로 이어졌다. 최 선교사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해 흔들렸던 그는 기도를 하던 중 아내에게 "선교센터가 넘어가면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의 답변은 최 선교사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아내는 안 돌아가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교인들이 하루 아침에 예배당을 빼앗기고 목사까지 잃어버리면 어떻겠냐는 거였죠. 어떤 일이 발생하든 저들과 함께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냐고 반문했어요."
 
최 선교사는 이게 하나님이 주시는 신호임을 깨닫고, 결과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기로 결심했다.
 
이 후론 기적의 연속이었다. 어떤 이들은 뇌물을 주면 쉽게 해결된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달은 최 선교사는 뇌물을 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비리 경찰관의 뇌물 스캔들이 터지면서 뇌물을 주고받은 이들이 대거 검거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물론 최 선교사는 무사했다.
 
다음으론 선교센터 자체가 회복된 일이다. 원래 최 선교사와 같은 경우는 재단의 명의를 변경하면 재산상의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변경 기간이 워낙 길다 보니 재판 판결이 나기 전까지 바꾸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이 재판을 맡은 판사가 이상하리만치 재판을 길게 끌었다. 판사는 서류에서 단어 하나가 잘못돼도, 혹은 마침표가 하나 안 찍혀도 서류를 되돌리며 한 달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렇게 귀찮고 지루한 일을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1년이 지났고, 최 선교사는 지칠 대로 지쳤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덕분에 충분한 시간을 벌어 재단 명칭을 변경할 수 있었다.
 
이 일을 두고 최 선교사는 '기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밝혔다. 재판 과정에서 여러 고비를 넘기고 선교센터가 무사할 수 있었고, 20여 년을 바쳐온 선교를 계속 이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최근 최 선교사는 신학대학 기숙사와 게스트룸 신축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 대학에서 120km나 떨어진 볼호프라는 도시에서 온 13명의 신학생이 입학했기 때문이다. 우선 학교 측이 이들에게 교통비의 절반을 장학금 명목으로 주고 있지만,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이다 보니 미리 대비는 해놓고 있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공산주의 혁명가의 도시에서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 베드로의 도시로 이름을 되찾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침묵의 시간만큼 갈급했을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온 한 선교사의 열심과 섬김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같이 시원하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풍성히 나누는 그의 사역에 동참하는 손길이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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