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99주년을 맞아, 애국지사들의 피와 절규가 서린 일본 제국주의 억압의 상징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소개한다. 다가오는 삼일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아 이 땅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서대문형무소역사박물관 입구의 모습 ⓒ데일리굿뉴스


 
그 시절, 온 나라가 '감옥'이었다
 
서대문형무소가 있는 서대문구 현저동은 조선시대 중국(명, 청)의 사신을 맞았던 영은문이 있던 자리였다. 중국은 의주와 한양을 잇는 교통요지였던 이곳에 사신을 맞는 영은문을 세움으로써 조선이 섬겨야 하는 나라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이곳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기에 한양의 모든 백성들은 '누가 진짜 이 나라의 주인'인지를 지켜봐야 했다. 조선은 정성을 다해 '사대의 예'를 갖춰야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개화기 조선은 이러한 사대를 극복하고 자주독립과 자강의 의지를 담아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을 세운 이들은 '이제' 진짜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주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는 곧 일본의 침략 야욕 앞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영은문이 있던 서대문 현저동 자리에 조선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건물을 하나 세웠다. 그것은 바로 '감옥'이었다.
 

 ▲일제는 이곳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전국에 크고 작은 감옥을 세워 한국을 폭력과 억압으로 통치할 것임을 드러냈다.ⓒ데일리굿뉴스


일제는 처음부터 폭력과 억압으로 한국을 통치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에 1908년, 전국의 8개 주요 도시에 감옥을 설치했다. 이들 감옥은 철도와 도로망을 따라 주요 도시에 설치되었고, 이를 통해 일제는 한반도 전역을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어 폭압적인 식민 지배를 자행했다.
 
서대문형무소는 이렇게 설치된 감옥 가운데 가장 대규모의 인력이 배치되어 운영됐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수감된 곳이었다.
 
지금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꾸며져 일제의 조선 침략에 항거한 의병장들과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지사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 열사와 기독교 학생지도자 김원벽 선생을 비롯해 김구, 안창호, 한용운, 여운형 등 우리가 잘 아는 독립운동가들 대부분 이곳에 수용되어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 열사는 삼일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이곳에 갇힌 뒤에도 1920년 삼일운동 1주년을 기해 옥중에서 만세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모진 고문을 겪었다.
 
유관순은 영친왕 이은과 마사코의 결혼으로 인한 사면 대상에 포함되어 9월 30일에 출감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형 만료 이틀을 남기고 고문 후유증으로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
 
서대문형무소의 참혹함은 비단 모진 고문 때문 만은 아니었다. 수감자들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열악한 위생과 계절마다 찾아오는 더위와 추위였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쓴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올리는 글’에는 당시의 열악함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머니,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 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는 이처럼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고문에 시달렸을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담긴 전시관이 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이 공간은 다른 어떤 공간보다도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벽면을 가득 메운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데일리굿뉴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올해로 99년,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지난날의 기록들이었다. 여전히 차가운 콘크리트에서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이곳은 오늘의 자유가 당연한 것이 아님을 처절하게 증명한다.
 
이곳의 붉은 담장을 등지고 돌아가는 길, 이 땅을 둘러 안은 산과 나무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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