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현(GOODTV 문화예술전문위원)ⓒ데일리굿뉴스

필자는 최악의 장애를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베토벤을 생각할 때면 경이롭다는 단어 외에 떠오르는 말이 달리 없다. 피아니스트인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음악을 연주하고 작곡함에 있어서 청력의 의존도는 가히 절대적이다.

베토벤은 한창 잘 나가던 20대에 청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자신의 믿을만한 강력한 무기가 사라진다면, 누가 맨 정신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 청력이 점점 나빠지자 베토벤은 음악가의 인생은 끝이라는 생각에 죽음을 결심하고 유서를 쓴다.

그러나 그는 유서를 써 내려가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알게 된다. 그는 음악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더라도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청력 상실이 진행될수록 그는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교 대신 독서와 사색을 즐겼으며, 특히 셰익스피어나 칸트, 괴테, 쉴러 등 인문학과 철학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내면에 집중할수록 그의 음악도 더욱 진지하고 깊어져 갔다. 그는 더 이상 웃고 떠드는 유흥의 음악이 아닌 삶을 돌아보고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큰 울림을 주는 음악을 창작하기에 주력했다. 베토벤은 비로소 음악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청력 상실로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점차 범위를 넓혀갔다. 자연을 소리로 표현했으며, 풍경을 묘사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음악에 담아내었다. 그의 음악을 듣노라면 사람들은 대자연의 위대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음악은 마치 우리의 이야기 인양 우리의 희로애락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경이로움 까지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청력 상실 후 그가 만든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으며, 교향곡 9번 ‘합창’은 인간이 가진 희로애락을 넘어 신에 대한 성스러움과 환희를 보여주고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관객뿐 아니라 같은 음악을 하는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작곡가들은 눈이 호강하고 귀가 호강하는 음악보다는 마음이 동요되고 가슴이 움직이는 곡을 쓰기 시작했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의 작품은 돈벌이가 괜찮은 그저 가벼운 음악이 대부분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청력상실은 베토벤 인생에 있어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청력상실 덕분에 그에게서 위대한 음악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서인지 필자는 그의 청력상실이 한편으로는 고맙고 소중하다. 물론 그가 죽음을 택하지 않고 이를 잘 극복했기에 우리모두 대단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지만 말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위기가 찾아온다. 그 위기가 지나가는 바람일 수도 있고, 우리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혹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이 들면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참고 기다린다. 하지만 혹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불행도 내가 가진 불행에 비하지 못할 만큼 하찮은 존재가 되면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존재로 전락한다.
 
필자의 생각은 그렇다. 바람인지 혹인지 중요 하지 않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나에게 보물이 될 수도 혹은 폭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행만을 주시지 않는다고 믿는다. 불행과 행복은 동시에 찾아오는 법이다. 위기 속에 분명 해답이 있는 법이고 그 해답을 얻는 순간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고 믿는다.
  
베토벤은 난청을 자신에게 최악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난청을 통해 자신의 음악을 더욱 성장시켰다.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 음악을 제일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한 베토벤이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이래서 우리는 “베토벤, 베토벤”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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