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신약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유업들에 대해 나누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유업들을 한국교회에 제시하고(offer) 확신한다. 그 유업들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에 주어진 유업들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신약교회는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신약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삶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는 삶, 그것이 다른 말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문제는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려면, 우리가 육체를 신뢰하는 것을 철저하게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초대교회 할례의 문제를 가지고 이 부분을 살펴보았다.

 ▲여주봉 목사ⓒ데일리굿뉴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다 할례를 더한 것이 거짓 복음이라고 말하면, 어떤 성도들은 오늘날 우리는 할례를 받지 않는데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은 초대교회의 문제이지, 오늘날 우리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빌립보서 3장을 읽으면서도, 오늘날 우리 가운데 너무나 팽배한, 육신을 의지하는 거짓 복음의 영향력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육체를 의지하는 것은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4부터 그의 그 화려한 종교적인 배경과 경력을 나열한다.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그것들은 그 당시 종교사회에서 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당시 웬만한 배경과 경력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바울의 그것들을 제시하면 그들은 곧 바로 고개를 떨굴 정도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그 화려한 배경과 경력을 나열하면서, 그것들을 육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빌 3:4). 이처럼 육체를 의지하는 것은 단순히 할례의 문제만이 아니다. 육체가 될 수 있는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다양하다. 심지어 우리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들도 육체가 될 수 있습니다(골 2:16-17).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육체를 신뢰하면, 다시 말해서 육체로 인하여 자부심을 가지면, 그것이 거짓 복음입니다. 거짓 복음, 율법주의 신앙을 간단히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육체=거짓 복음, 율법주의.

예수님을 의지하려면 육체를 신뢰하는 것을 철저하게 버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의 배경과 경력을 나열하고 난 다음, 다음과 같이 말한다.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그렇다. 우리가 육신을 의지하는 것이 배설물이 되어질 때에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는 한 부정적인 예가 예레미야 시대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잘 이해하고 이제 고린도전서 1:30로 다시 돌아가 보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예레미야 9:24이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시대 유다 백성들은 시바에서 나는 특별한 향품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만큼 그들의 희생은 뛰어났다(렘 6:20). 또한 그들은 입만 벌리면 하나님 이야기를 할 만큼 그들의 입술에는 항상 하나님이 있었다. 예레미야 12:2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를 영어 NIV 성경은 “You are always on their lips(당신이 항상 저들의 입술에 있습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자랑하라”고 외쳤다. 그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들은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다고 자부했을 것이다. (참고로 고린도전서 1:31과 예레미야 9:24을 보아도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아무리 그들에게 외쳐봐야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효력도 없었다.

문제는 바로 그 앞 절에 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 9:23). 지혜로운 자가 그 지혜로 인한 자부심이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배설물이 될 때에야 비로소 그에게는 하나님이 자랑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자가 부로 인한 자부심이 배설물이 될 때에도 비로소 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만약 예레미야 시대 유다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올바로 신뢰했더라면, 그들을 그 당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타락한 육신을 신뢰하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자랑하라고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도,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전혀 돌이키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과 교회의 삶 가운데 육체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그 결과 교회 안에 십자가 복음의 내용과 교리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능력은 철저하게 소멸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백성들처럼 자신들이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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