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하면 조선말 파송돼 들어온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반면 1965년 비즈니스선교 형식으로 한국에 들어와 양질의 기독 원서들을 캠퍼스 학생 및 교수들에게 전달하며 지식인들의 성경적 세계관 형성에 크게 기여해온 웨슬리 웬트워스의 존재는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손봉호, 김민철, 박상진, 방선기, 양승훈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크리스천 대표 지성인들도 젊은 시절 웨슬리가 들이민 책자를 읽으며 가랑비에 옷 젖듯 신앙을 기경했다. 그의 문서선교 삶이 곧 한국 기독인들의 현대사란 생각으로 만남을 요청했다.
 
▲비즈니스선교 형식으로 한국에 들어와 50여년 문서선교 사역을 펼친 웨슬리 웬트워스의 삶을 기록하고자 26일 그의 40년 지기 한국 친구가 운영하는 아바서원에 방문해 인터뷰했다. ⓒ데일리굿뉴스

크리스천 지성인들에게 시작한 문서선교 사역
 

웨슬리 웬트워스를 처음 만나면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먼저 배낭 속에 여러 권의 책이 쏟아져 나오고 그 책에 대해 상대가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그 후 폐부 깊숙이 심호흡하고 번민의 시간을 보내야만 나올 수 있는 심오한 질문을 던져 상대의 허를 찌른다.
 
"너는 왜 그 일을 하니, 하나님과 연관 짓고 있는 게 맞니?".
 
결국 이 해답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재창조)의 성경적 섭리로 가야만 찾을 수 있고 그래야 비로소 마무리 된다. 기자는 훌륭한 통역자(홍병룡 아바서원 대표)가 있었음에도 그가 던지는 어떤 질문에도 변변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손봉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양승훈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 송인규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 최태연 백석대학교 교수, 신국원 총신대학교 교수, 장수영 포항공과대학교 교수 등 내로라하는 기독 지성인들이 모두 그의 독특한 문서선교에 영향 받은 제자와 친구들이다.  
 
학문과 영어 소통면에서 최고의 지성을 갖춘 사람들이지만 벽안의 선교사가 던지는 돌직구 질문엔 여지없이 당황했던 기억이 많았다고 전한다. 다짜고짜 직업과 전공 분야를 물어보고는 "당신의 일과 하나님의 부르심이 잘 연결되어 있는냐"는 질문을 던지는 통에 진땀을 뺐다는 것이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양승훈 원장은 "끊임없이 서구 학자들의 글을 읽어 보라고 권하실 때 내가 화를 낸 적 있다"면서 "그런데 선교사님은 별로 서운해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한동안 쉰 후에 다시 문서 전달사역을 재개하셨다. 그분은 지식인들을 설득시키는 겸손과 인내가 있는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홍병룡 아바서원 대표는 "처음 만난 때는 1978년 내가 대학 3학년 때였다. 캠퍼스와 지성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문서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차에 웨슬리를 만났기 때문에 서로 쉽게 대화가 통했고 그와의 만남이 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제자들이 한국선교 40주년을 기념하며 바친 헌정글 모음집 <사랑해요 웨슬리 선교사님>(예영, 2004년)과 50주년을 기념하며 바친 <문서선교사 웨슬리 웬트워스>(IVP, 2015년)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위트와 함께 녹아져 있다. 제자와 친구들은 이 책에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땅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지내며 우리의 친구요 멘토가 되었던 웨슬리 웬트워스 선교사님께 바친다"고 기록했다.
 
1965년 한국에 들어와 53년간 헌신한 벽안의 선교사
 
웨슬리 웬트워스는 1935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났으며 버지니아공대 시절 복음주의 선교단체 IVF를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했다. IVF에서 소그룹리더, 문서 담당자, 선교 담당자로 섬기며 문서 사역과 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원 졸업 후 미국 현지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서울시 하수처리시설 건설에 자원해 1965년 한국에 왔고 IVP 고문, 기독교학문연구회,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 설립, 광주기독병원 건축 등을 도왔다. 전형적인 비즈니스 선교(BAM)에 해당한다.
 
웨슬리는 "버지니아 공대 시절 IVF 수련회에서 내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아래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됐다. 이후 수련회에서 주로 책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북테이블을 담당하며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학생 시절 <열매 맺는 성경공부>가 제시한 필독도서 100권을 읽으며 복음주의적 지식과 학문에 본격적으로 흥미를 가졌다. 관련 강의도 열심히 들었다. 이런 지적 탐구는 후에 한국 캠퍼스와 단체를 돌며 각 개인에게 맞는 신앙 서적과 논문 자료들을 전달하는 데 든든한 배경지식이 됐다.
 
웨슬리는 “대학생 시절부터 책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기독교 변증학과 신학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면서 “내 스스로 문서 사역에 소명을 느끼진 않았지만 주변으로부터 내가 문서사역에 특별한 소망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전했다.
 
본인 스스로 자신을 '책장사'로 소개했지만, 그를 거쳐간 많은 한국인들은 '공짜가 더 많은 손해보는 장사'였다고 기억한다.
 
▲웬트워스를 대학시절 만나 지금껏 친구이자 통역자로 함께하고 있는 아바서원 홍병룡 대표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김정효 교수는 "나는 이분이 우리가 아는 근대 선교사 스크랜턴과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한 '나는 책장사입니다'라고 하셨지만 아무도 그것을 곧이듣진 않았다. 웨슬리 웬트워스는 21세기 초에 아직도 한국에 남아 있는 미국인 선교사였다"고 평가했다.
 
지금은 기술 발달로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인터넷으로 바로 주문할 정도로 편리해졌지만, 당시엔 필사를 하거나 타자를 치는 일이 많았다.
 
웨슬리는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총신대학교 간하배(Harvie M. Conn) 선교사, 부산 고신대학교 하도례(Theodore Hard)선교사의 문서 사역을 도왔다. IVP 사무실에도 여러 다양한 주제의 영어책들을 사서 모아두고 신학생들에게 책을 소개하며 보급했다. 엔지니어로 일하며 받는 급여가 넉넉했던 내가 책의 구매 대금을 미리 지불하여 주문하면, 선교사가 학생들에게 책을 팔고 돈을 돌려줬다”고 말했다.
 
21세기 미국 선교사..."한국에서 묻힐 겁니다"

촉망 받는 엔지니어로 한국에 들어온 30세 청년은 어느새 한국 생활 53년의 83세 할아버지가 됐다. 오랜 세월 그의 헌신이 더 가슴 먹먹하게 다가 오는 것은 가정을 꾸리지 않은 채 독신으로 그 시간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은 묻지 않았지만, 자기 명의의 집하나 제대로 갖지 않고 꽤 오랫동안 IVP 사무실 옆에 야전 침대를 놓고 살아온 그의 삶에서 많은 사람들은 문서선교에 아낌없이 쏟아 부은 선교사적 헌신을 고스란히 목도 했을 것이다.
 
인터뷰 날인 26일 웨슬리가 입고 온 체크무늬 반팔 셔츠와 검은색 바지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3년 전 출간한 <문서선교사 웨슬리 웬트워스>의 표지 의상과 같았다. 옷은 힘을 잃고 색도 바랬지만 한마디 한마디 결코 가볍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변증법적 신학 사고를 전하는 주인의 강인함에 곧 묻혔다. 83세. 이제 죽음도 생각해야할 나이가 된 웨슬리는 한국에 묻히겠다고 조용히 말했다. 지방의 한 기독병원 묘원에 자리까지 마련했다며 웃는 그에게 그저 감사와 존경을 표할 수 밖에 없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한국에 있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회사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곧장 미국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돌아보면 나는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사람과 미국사람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러는 동안 많은 한국 친구들을 만났고 교회를 알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살면서 문화 충격을 경험 하는데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 소위 말하는 고난받는 선교사는 아니었다.<문서선교사 웨슬리 웬트워스>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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