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 빛을 되찾은 지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해마다 8월, 광복절이 다가오면 '독립'이라는 단어가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그러나 7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면서 광복의 기쁨도, 독립운동가의 헌신과 업적도 점차 잊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내년이면 임시정부수립과 3.1운동이 100주년을 맞는다. 지금이야말로 광복절의 의미를 짚으며 민족정신을 되새겨봐야 할 시점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일궜다.

36년 핍박의 역사…"모든 것을 빼앗긴 삶이었다"
 
일제에 항거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열사를 기리는 광복절이 올해도 어김없이 다가왔다. 광복(光復)이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한다.
 
1945년 일본의 지배를 벗어났을 때, 국민들 모두는 태극기를 흔들며 광복의 기쁨을 맞았다. 이 같은 기쁨을 맞기까지는 많은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895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끈질긴 간섭을 받던 우리나라는 1910년 국권을 상실하면서 붕괴됐다.   
 
그 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 36년의 긴 세월은 사람으로서 기본권을 박탈당한 가혹하고도 치욕스런 나날들이었다. 강제노동과 강제징병, 징용 등에 시달려야 했고 우리 고유의 역사, 언어 심지어 이름과 성까지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됐다.
 
종교 탄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기독교 말살정책을 펼치며 탄압을 일삼았고, 전황의 이데올로기나 신사참배 강요는 물론 성경읽기 등 종교행위를 금했다.      
 
이러한 온갖 탄압 속에서도 많은 독립투사들은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맹렬히 벌였다. 또 해외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등 항일 투쟁 운동 역시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그 결과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마침내 독립을 일궜다. 그로부터 3년 뒤엔 대한민국 민주정부를 수립했고, 이듬해 이를 기념하기 위해 8월 15일을 국경일 '광복절'로 제정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3.1운동을 이끌었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는 기독교인들이 16명에 달한다.

"일제 탄압 속에서도…독립운동 주도한 한국교회"
 
일제의 시린 핍박이 종결되기까지 한국교회도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그 중에서 3.1운동은 기독교가 민족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커진 계기가 됐다.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3.1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도맡으며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그만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대상이 되곤 했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당시 제암리교회는 독립운동가 홍원식이 권사로 있으면서 비밀조직을 결성해 항일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경은 약 30여 명의 성도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한 뒤, 출입문과 창문을 폐쇄하고 불을 지르면서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것으로 부족해서 일제는 인근 교회건물과 민가 등 제암리 일대에 불을 질러 수많은 살상자를 냈다. 이 같은 만행은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면서,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 박사에 의해 실상이 알려지며 미국에서 여론화되기도 했다.
 
이밖에 3.1운동 관련 검거자 가운데 기독교인이 3426명으로 전체의 17.6%나 차지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제의 모진 탄압, 그 이면에는 오직 신앙으로 뭉쳐 나라를 일군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다. 광복절을 맞은 지금, 그들을 기억하며 현재의 광복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전과 남다른 광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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