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내 장터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우리나라 대표 여성운동가 유관순 열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된 백범 김구 선생. 점진학교를 설립하고 신민회를 조직한 도산 안창호 선생까지. 이들 모두 믿음의 선진들이자 학교 교과서를 통해 배운 역사적 인물로 우리는 기억한다.
 
8·15 광복절, 절대 잊지 못할 이들 외에도 잊혀져서는 안 될 많은 기독교 민족지도자들이 있다. 그 중 두 명의 애국자이자 신앙인을 소개한다. 
 
순국선열의 숭고한 정신 남긴 순교자, 구연영 전도사
 
 ▲구연영(具然英) 전도사(사진제공=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이 땅에 와서 너희가 이처럼 무도한 강도질을 하는데 하나님이 무심할 줄 아느냐, 동지들을 말한다면 일진회 놈들을 빼고는 모든 백성이 나의 동지들이다."
 
구연영(1864-1907)전도사는 애국심 짙은 의병장이자 복음전도자였다. 일본군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44세 나이에 악랄한 고문을 겪고 총살을 당한 순교자기도 하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전통 유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1899년 3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뒤늦게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훗날 덕평 교회로 이름을 바꾼 덕들교회가 그가 세례 받은 곳이었다.
 
1904년 전도사 자격을 받은 그는 1905년 이천중앙교회 담임전도사가 되었고,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구국회를 아들 구정서와 설립했다.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선교와 구국운동을 펼친 그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기독교구국회를 이끌고 군중집회를 열었다. 이천과 광주, 장호원, 여주 일대를 순회하며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했다.
 
일본군 수비대도 조국을 향한 그의 불타는 정의를 쉽게 막지 못했다. 일진회는 "경성 동편 10여군에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사라지고 배일자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일본경찰이 예의주시한 인물이었던 그는 일본군에 체포됐지만, 그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대항했다. 그러던 중 1907년 8월 24일 이천 장터 미루나무에서 아들과 함께 묶인 채 총살 당했다.
 
‘30분 늦은 시계’로 일제와 타협 안 한 박동완 목사
 
 ▲박동완(朴東完) 목사(사진제공=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박동완 목사는 ‘일본의 표준시간에 맞춰 살지 않겠다’는 의지로 자신의 시계바늘을 30분 늦게 맞춰놓고 다녔다. 일제에 항거한 그의 선구자적인 생각과 발자취가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이인수 학예연구실장(경기도 이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경기와 이천 지역 중심 3·1운동의 기독교 역사를 조명한 특별 기획전 ‘경기·이천 기독교 1919’를 위해 자료를 조사하던 중 박동완 목사만의 특별한 애국심에 감명 받았다고 전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박동완(1885-1941)목사는 언론과 교회를 통해 뜨거운 나라사랑을 실천한 민족주의자이자 기독언론인이었다.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해 영어를 전공했다가 1911년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입한 그는 이 때 세례를 받고 정동교회에 출석했다.
 
1915년 12월 창간된 ‘기독신보’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기독교계를 배경으로 사회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배포식에 참석하였다가 체포된 그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출옥 후에도 그는 <기독신보>와 기독교창문사 주간지인 <신생명> 등 기독교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언론계몽활동을 이어갔다. 서울 YMCA 소년부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청소년 운동도 전개했다.
 
1927년 민족단체들이 신간회를 창설했을 때 그 또한 기독교계 대표로 참여하고 실무를 수행했지만 일제의 탄압에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리고 1928년 하와이 오아후 섬 와히아와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1940년까지 12년 간 목회를 했다.
 
타지에서도 박 목사는 1934년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일제 강점기에 결성된 기독교 계열의 사회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와 비밀리에 연락하며 국내 민족운동을 후원했을 만큼 애국심이 컸다.
 
1941년 지병으로 이국 땅 하와이에서 순국한 박 목사는 자신의 시(時) ‘30분 늦은 시계’에서 일제에 항거한 불굴의 의지 속에서도 고독을 견디며 독립을 기다린 심정을 담았다. 그의 시는 ‘경기·이천 기독교 1919’ 기획전시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저작권자 © 데일리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