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기 목사ⓒ데일리굿뉴스
어느 시골에 사생아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의 아버지가 누구일까 하며 수군거렸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없었다. 그 소년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사생아라고 할까봐 숨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어깨를 잡으며 ‘넌 누구의 아들이지?’ 하는 소리가 있었다. 목사님의 소리였다. 처음 부임하신 목사님의 질문이기에 이제는 꼼짝없이 탄로 나게 되었구나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 그렇지, 하나님 아들이지, 하나님 아버지 많이 닮았네’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 말에 소년은 변화되었고, 그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 테네시 주에서 주지사를 두 번이나 했고, 사회와 교회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벤 후퍼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인생이 바뀌었다.
 
필자도 목회 초기에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사람의 소리를 듣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다. 저녁에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끙끙거리기도 했다. 이불 뒤집어 쓰고 펑펑 울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의 소리보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 때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 염려하지마.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지키신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 진다. 억울한 마음도 사라진다. 확신이 생긴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는 사람의 음성을 듣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음성이 성령님의 음성보다 더 크게 들리기 때문이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그럴 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바로 사단이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절대로 죽으시면 안된다고 만류한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말씀하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베드로의 인간적인 말 배후에 사단이 역사하고 있음을 아신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해 밭을 팔았다. 그런데 막상 그 돈을 교회에 헌금하려고 하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돈을 얼마 감추고 그것이 전부라고 거짓말 한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을 속인 죄로 죽는다. 그런데 왜 이들 부부가 하나님을 속이게 되었는가?  사단이 그들 마음속에 가득하여 거짓말 하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음성과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해야 한다. 사단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부정적인 말을 심는다. ‘이제는 어렵다. 이제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끝났다. 포기해라.’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두려워 말아라. 놀라지 말아라. 절대 포기하지 말아라.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버리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사탄의 말을 들으면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처한 환경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어느새 우리 안에는 평강이 임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물질주의, 쾌락주의, 이기주의를 그대로 반영한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우리의 귀를 막는다. 심지어는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렇게까지 예수 믿을 거 없어, 나도 당신처럼 뜨거울 때가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더라고. 유난 떨지 말고 대충 믿어.’ 세상 사람들이 그런 말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고,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부활과 최후승리를 모르고, 영생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심판을 믿고, 천국과 영생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 ‘대충 예수 믿어라, 사람들 눈치보며 믿으라.’는 말씀이 어디 있는가?  오히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나를 쫓으라.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라. 죽도록 충성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기를 힘써라.”말씀하셨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 때문에 붙잡혀 공회 앞에 서게 된다. 당시 공회는 로마 통치하에서 입법권과 사법권을 가지고 있던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며 말한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들의 위협은 단순히 겁을 주는 수준의 위협이 아니었다. 베드로와 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바로 이 공회에서 심판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졌으며, 총독 빌라도도 공회원들의 선동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던 것이다. 그런 공회의 위협이었다. 공회의 회원들 71명이 앉아서 아주 무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생명까지도 빼앗길 수 있었다. 그런데 공회원들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대답했는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대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다. 그 담대함과 용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왜 죄를 짓는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유혹할 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찌 죄를 지으리이까” 하고 뿌리쳤다. 이 뿌리칠 수 있었던 용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 승리를 선포하며 나아갈 수 있었던 용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소를 향해 갈 때의 일이다. 이 재판은 생사를 가늠하는 무서운 재판이라 루터의 친구들이 간곡하게 만류했다. 그 때 루터는 말했다. "재판정 기왓장만큼이나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재판정에 서리라." 그리고 재판정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이렇게 기도한다. “Oh, God. Here I stand.” 유명한 말이다.  "오, 하나님! 나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위협하는 무리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들을 좋게 하려고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정만 있으면 충분한 사람들이다. 세상이 몰라주고, 사람이 몰라줘도, 주님만 아시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제부터 정말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겠다. 사람의 말 듣고 넘어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듣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주님의 뜻 이 땅에 이루며 살아야겠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야겠다.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기쁨 되어 살기로 결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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