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10월 31일은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건 날이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로마 성베드로대성당 신축자금 마련을 위해 일반 신자들로부터 죄를 사해준다는 ‘면죄부’를 파는 행위와 같이 교회의 잘못된 부조리와 죄악들에 대한 토론을 요청했던 루터의 당초 의도는 종교개혁의 큰 횃불로 불타올랐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거창하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작은 하나의 불씨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역사의 흐름을 바꿨을 정도로 위대했다.
 
그리고 500년이 흘렀다. 한국교회는 지난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행사는 행사로 그쳤을 뿐, 그 후 1년이 흐른 한국교회는 여전히 개혁의 대상으로 손색(?)이 없다.
 
지난해 종교개혁 500주년의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모 대형교회의 세습은 한국교회는 물론 비기독교인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정작 해당 교회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해당 교회와 관련해 드러나는 각종 추한 모습들을 부끄러워하기보다 교회를 흔들려는 ‘마귀’의 세력들에 의한 공격으로 치부했다. 자신들을 향해 자성을 촉구하는 쓴소리를 한 뜻있는 교계 인사들과 목회자들의 목소리는 물론 수많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을 ‘사탄의 종’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분명 의미가 남다르다. 그래서 그 참 의미를 되돌아보고 진리 사수를 위한 새로운 다짐과 새 출발의 계기로 삼아야 하지만,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에 외형적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일까? 다양한 행사와 퍼포먼스에만 치중해왔다는 느낌이 든다.
 
수많은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기념예배를 드리고 학술대회를 하는 등 종교개혁의 의미부여에 치중했지만, 정작 기념예배에서의 환상의 화음을 자랑하는 찬양과 회개의 부르짖음을 보여주는 울부짖는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듣기 싫어하는 ‘소음’이 된 것만 같다(사 1:11).
 
지난 2007년의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행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초의 좋은 목적과 취지는 하나의 ‘보여주기식’ 퍼포먼스로 막을 내렸을 뿐 이후 한국교회의 변화된 모습은 없었다. 지난 2014년 원로목회자들이 주축이 돼 보여줬던 ‘한국교회와 목회자 갱신을 위한 회초리기도대성회’는 한국교회 개혁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퍼포먼스의 결정판(?)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원로목회자들은 한국교회의 분열과 타락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회개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잘못된 현상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회초리를 들고 스스로 자신의 종아리를 쳤다.
 
그러나 기자의 눈에는 그저 하나의 ‘코미디’ 같았다. 한국교회를 깨치는 데 일조했다기보다 한국교회를 ‘희화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후에도 한국교회의 모습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고, 한국교회의 신뢰성은 지속적으로 땅에 떨어졌다. 진정한 각성과 회개가 없는 가운데 억지로(?)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몸부림을 보여주려는 퍼포먼스의 결과론인 것만 같아 씁쓸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거대한 퍼포먼스 이후 1년이 지났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한국교회가 완전히 망하는 것이 그나마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의 섭리는 무엇일까.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낮은 곳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음에도 묵묵히 복음사역을 감당하는,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의 남겨진 선지자들’과 같은 헌신자들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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