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1980년 암울한 시대에 좌절하고 고뇌하던 수많은 청춘을 위로한 노래 '청춘'의 가사 일부다. 40여 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었지만, 2018년의 청춘은 여전히 '청춘'을 노래한다. 그렇다면 청춘의 아픔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초상'일까? <위클리굿뉴스>는 창간 1주년을 맞아 주변의 크리스천 청년들이 처한 실제적인 고민을 요청해, 청년 멘토들과 함께 이에 대해 짚어보고 해답을 모색하는 특집 기획을 연재한다. 이번호에서는 청년사역과 목회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를 만났다.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위클리굿뉴스
 
Q. 살다보면 소위 잘 나간다는 비기독교인의 삶을 보며 비교의식을 가질 때가 많다. 특히 고난 가운데 주님 안에서 감사와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크리스천 청년도 많은데.
 
송태근 목사(이하 송): 현실의 문제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재확립해서 이겨내는 것이 믿음의 선진들이 취했던 태도이다. 바울은 현실적 불행에 대해서 현실에서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분명히 한다(빌 3:8). 베드로도 스스로를 '나그네'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분명한 '소망'을 성도들에게 설명한다(벧1:1).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느끼는 절망감에 대해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거나 현실적인 행복의 조건을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만일 누군가 신앙을 그렇게 설정하고 유혹한다면 잘못된 가르침이다. 성경은 바른 '소망'을 바라볼 것을 말하고 있다. 분명한 소망을 붙잡을 때 현실을 이길 수 있다.
 
아래의 그림은 영국의 헨리 8세(왼편)와 <대사들>(오른편)이라는 작품이다. 헨리 8세는 1534년 수장령을 선포했다. 영국 국왕이 영국 교회의 머리라고 선언한 것이다. 교황에게 대적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헨리 8세로 인해 영국과 로마 교황청의 관계가 나빠졌고, 프랑스에서는 이 둘을 중재하기 위해 두 명의 대사들을 보냈다. 두 명의 대사를 표현한 그림이 오른편의 <대사들>이다. 그림 속 두 사람 사이에 많은 물건이 나온다. 이 그림을 그린 한스 홀바인은 정치적 분열과 혼란한 시대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중재를 도모하는 의미를 표현하는 많은 물건을 대사들 사이에 배치했다. 두 사람 가운데 길게 늘어진 그림은 해골이며,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한다. 왼편 상단에는 녹색 커튼 뒤로 마치 숨은 그림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그려 넣었다. 즉 홀바인은 세상은 잘나가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역사는 커튼 뒤에서 예수님이 지켜보며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현실을 살면서 잘나가는 사람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보며 불행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스 홀바인의 조언처럼, 역사를 움직이는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한다면 현실의 절망감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위클리굿뉴스

Q. 주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다. 믿음과 구원의 확신, 어떻게 가질 수 있나.
 
송: 처녀가 스스로 잉태하는 것이 가능한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이해되는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면 어떤 상태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 상상이 가는가? 크리스천은 이처럼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믿음은 우리의 행위나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믿음의 확신은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다. 하지만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 얻은 것이어야 한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없는 고통과 풍랑 속에서 살아간다. 그럴 때도 흔들리지 않고 확신 있게 나아갈 수 있는 것 역시 '성경을 통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아래 그림은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가 젊은 시절에 그린 작품이다. 신앙을 가진 청년이었지만, 그 역시 결혼, 성공, 행복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렘브란트는 배의 풍경을 빛과 어둠으로 나눈다. 왼편의 빛에 노출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이다. 풍랑을 만나면 '보편적으로' 누구든지 이런 모습으로 몸부림친다는 것을 표현한다. 반대로 오른편의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 앞에서 풍랑이 일어난 것에 대해 원망하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모신 배는 항상 고요한 바다를 항해하지 않는다. 풍랑을 만나고 폭우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모신 배는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든지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비단길, 꽃길을 간다고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붙잡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렘브란트의 <갈릴리 바다의 풍랑 속 예수> ⓒ위클리굿뉴스
 
Q. 늘 상황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 여기고 실행해왔다. 설령 스스로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내 의지에 따른 결정일까봐 망설이게 된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궁금하다.
 
송: 하나님의 시선이 있음을 믿고 걸어가야 한다. 어떤 길은 우리의 시선에 완벽한 길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망의 길이다(잠 14:27). 반면 때론 이해되지 않는 일을 만나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이 인도하셨던 과정임을 고백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그럼 어떻게 앞길을 계획하고 걸어가야 할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믿는 것, 비록 내일이 보이지 않아도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내어드리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비전을 쫓는 삶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때로는 자유의지를 통해서 결정되는 실수마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신다. 그것을 믿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필요하다.
 
아래 그림은 독실한 신앙을 가진 아담 엘스하이머라는 화가의 작품 <이집트로의 도피>다. 당나귀에 탄 요셉과 마리아는 이집트로 피난 중이다. 이들 뒤에는 온통 먹구름뿐이고, 요셉은 등불 하나만을 의지한 채 어둠을 헤쳐나가고 있다.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할까? 그러나 그것은 요셉의 시선이다. 하나님의 시선은 어떨까? 요셉이 지나온 과거(오른편)에는 밝은 달이 떠 있다. 그들이 만날 미래(왼편)에는 먹구름이 더 크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할 목자들이 있고, 하늘에는 별이 있어서 그들을 인도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이며, 그분의 방식이다. 때때로 우리는 먹구름 속을 걷는 것처럼 어둡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시선으로 보고 계신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비전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아담 엘스하이머의 <이집트로의 도피> ⓒ위클리굿뉴스
 
Q.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갈수록 더해지는 태도에 마음이 괴롭다.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참고 이해해야 하나.
 
송: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갈등과 미움 없이 순적하게 지낼 수 없다. 신앙의 양심으로 살아가면서 관계에 어려움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두려워해서 피한다면 바울은 '세상 밖으로 나가라'고 말한다(고전 5:10). 바울의 표현대로 우리는 어차피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또한 말씀을 실천해서 빛과 소금이 돼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세상에서 타협하고 침묵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랑과 용서를 해야 할 영역이 있지만, 불의와 모순까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은 용서하고 감싸줘야 한다. 그러나 도를 넘은 것이라든지, 불의의 영역이라면 과감히 끊어야 한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이중계약, 뇌물, 성희롱, 성차별, 부당함 등까지 참고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역이 모호해지면서 크리스천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지금 괴로워하는 부분이 개인적인 부분인지, 아니면 과감히 끊어야 하는 부분인지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크리스천이 가져야 하는 시선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어두운 곳까지 미쳐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다.
 
16세기 네덜란드 종교개혁 화가였던 피테르 브뢰헬의 <거지들>이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당시 사회를 풍자한다. 농부, 관리, 군인, 상인들이 목발을 짚고 있는데, 네덜란드 속담을 반영하고 있다. '거짓은 목발을 짚는다'라는 속담이다. 사회의 모든 영역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브뢰헬은 이 그림의 핵심을 오른편 뒤에 검은 옷을 입고 지나가는 종교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사회는 불의와 위선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종교인들이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있음을 풍자하고 있다. 혹시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속에서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피테르 브뢰헬 <거지들> ⓒ위클리굿뉴스
(위클리굿뉴스 11월 11일, 47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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