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나라를 잃은 민족의 울분을 피 토하는 심정으로 열강들을 향해 토로했던 애국지사의 심정을 보여주는 내용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 자료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우리에게 알려짐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그가 1919년 8월 6일 파리를 떠나며 한 고별 연설 내용이 담긴 프랑스 일간지 '라 랑테른'의 기사. 김규식의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 그의 고별 연설 내용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데일리굿뉴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대표를 지낸 김규식(1881∼1950)이 파리를 떠나기 직전 서구 열강의 한국 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비협조를 외국 지식인들에게 강력히 성토한 내용이 그것이다.

미국행을 앞둔 김규식의 격정적 토로는 1919년 8월 초 파리에서 열린 김규식 환송연에 참석한 프랑스 기자가 기사로 작성한 것이며, 재불 독립운동사학자가 이를 최근 프랑스국립도서관(BNF)에서 처음으로 찾아냈다.

이 자료는 임시정부가 파리에서 펼친 독립운동의 생생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는 희귀자료로 평가된다.

지난 12월 23일(현지시간) 재불 사학자 이장규 씨(파리 7대 박사과정)에 따르면, 프랑스 일간 ‘라 랑테른’(La Lanterne)은 1919년 8월 8일자 신문의 ‘뒤파얄에서의 한국 : 정말 아시아의 알자스-로렌이 존재하는가’라는 기사에서 김규식이 파리외신기자클럽 연회 겸 자신의 환송연에서 한 연설을 소개했다.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마치는 등 국제적 안목을 기른 김규식은 귀국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파리평화회의 한국대표로 발탁돼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해 활동을 개시했다.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임정 외무총장과 파리위원부 대표를 겸한 그는 5개월간 서구 열강 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이승만의 초청으로 미국 출국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사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 누가 옛날 선원들이 섬으로만 알았던 머나먼 한국을 걱정하겠습니까. 거의 없을 겁니다. 있다면 아마 한국의 매력적인 수도이고 세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서울에 직접 가볼 만큼의 호기심을 가졌던 루이 마랑 씨 밖에 없겠지요.”

‘외디프’(오이디푸스)라는 필명의 기자는 김규식의 연설을 이렇게 요약 소개한 뒤 “파리평화회의의 한국대표단장은 이런 무관심에 대해 성토했다”고 적었다.

또 “4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고 독립국가로 존재했다가 지금 일본의 속박 아래 꼼짝 못 하고 떨고 있는 2,000만 영혼의 간청에도 성의 있게 답하지 않는, 정의와 사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프랑스에 그는 경악했다”고 전했다.

김규식이 1차 대전의 승전국으로 식민지 해방문제에 적대적이었던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태도에 절망했다는 것이다.

기자는 나아가 그의 연설이 매우 격정적이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국은 영주국(프랑스)에도 부드럽지 않았다. 이 관리(김규식)로부터 나온 비난에는 일상적인 그런 외교적 태도는 전혀 없었다. (프랑스) 외무부의 강경파, 가령 아시아 담당 부국장 구(Gout) 씨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멱살이 잡혔을 것이다.”

김규식이 파리에서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지만 열강들의 비협조적 태도로 한국 문제를 파리평화회의에 상정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울분을 강하게 표출한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자는 “이 자리의 결론은 일본이 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큰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알자스-로렌을 힘겹게 떠안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기사를 끝맺는다.

알자스-로렌은 프랑스·독일 접경지대로, 19세기 후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보불전쟁) 때 독일에 병합됐다가 1차 대전에서 프랑스가 이긴 뒤 다시 되찾은 땅이다.

기자의 평가는 일본이 한국을 침탈한 것을 과거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강제 병합한 역사적 사실에 빗댄 것이다.

기사의 보도 시점은 1919년 8월 8일로, 김규식이 이승만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떠난 바로 당일이다.

이 연회에는 프랑스 국회의원 루이 마랑, 중국 베이징대 교수 이유잉, 전 러시아 국회의장 미노르,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한 미국인 기번 씨 등 60여 명의 인사가 참여했다고 적혀 있다.

이 중 루이 마랑은 2년 뒤 ‘한국친우회’를 만들어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인물이다. 언급된 다른 사람들도 현장에서 모두 김규식의 연설을 경청하며 한국을 지지하고 일본을 비판하는 발언을 돌아가면서 했다고 적혀 있다.

현재 사료로 남아있는 임시정부 ‘구주의 우리 사업’ 보고서에서도 이 연회에 대한 내용이 짤막하게 언급돼 있다.

‘파리만국기자구락부’에서 1919년 8월 6일 김규식의 환송연이 열려 칠십 여 명이 모인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의 축사가 낭독되고 김규식이 보고 연설을 한 뒤 내빈이 돌아가며 축사를 했고,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는 내용이다.

임시정부 부주석까지 지낸 김규식이 임시정부와 해외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 활약상에 비해 전해 내려오는 관련 자료가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라 랑테른’의 기사는 큰 희소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기사를 찾아낸 이장규 씨는 “김규식이 당시 프랑스와 서구 열강에 전한 내용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1차 대전 직후 열강들이 모인 파리평화의에서 냉대를 받았던 현실이 연설을 직접 들은 프랑스 기자의 글에 생생하게 담겼다”고 평가했다.

파리 7대 한국학과 마리오랑주 리베라산 교수(한국근현대사)는 오는 12월 27(목)일 서울 광복회관에서 열리는 심포지엄에서 ‘3·1운동과 프랑스 언론’을 발표하며 이 기사도 함께 소개할 예정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