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서대문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중범죄자들을 수감하는 미결감 독방은 3·1운동 민족대표들로 가득 찼다.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중국 상해로 나간 기독교계 대표 김병조를 제외한 민족대표 32인은 모두 이곳에 수감됐다. 
 
 ▲100년 전 당대 사람들은 3·1운동을 기점으로 각자 선택한 길을 걸어갔다.

"씨 뿌리면 수년 뒤에 반드시 독립될 것"

일제는 3·1운동을 '피고인 손병희 외 361인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이라고 불렀다. 본래 총독부는 예심에서 피고인들에게 사형 선고가 가능한 내란죄를 적용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제2의 3·1운동이 발발될 것을 우려해 출판법 및 보안법만 적용했다.
 
민족대표들은 일제에 체포된 뒤 예상대로 고초를 겪었다. 대다수는 징역 2~3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 말기에 친일파로 변절한 정춘수, 최린, 박희도 등 3인을 제외한 나머지 30인은 끝까지 독립을 향한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수감생활을 마친 뒤 목회자들은 교회로 돌아가 사역을 계속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독립선언서에 맨 마지막으로 서명한 감리교 신석구 목사(수표교교회)는 1930년대 신사참배와 황국신민 서사, 창시개명을 완강히 거부하다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신 목사는 평안도 용강경찰서에서 광복을 맞고 해방 뒤 북한에서 공산정권에 맞서다 총살을 당했다.

천도교 도사 권동진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씨를 뿌려 두면 수년 뒤에는 반드시 그 결과로서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답했다.
 
천도교 산하 보성사 사장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이종일은 2년6개월 옥고를 치른 뒤 고문 후유증으로 1925년 사망했다. 손병희는 1921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이듬해 봄 숨졌으며, 양한묵은 투옥된 지 2개월여 만에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했다.

3·1운동 참가 안 한 이유 묻자…"성취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기독교 16명과 천도교 15명 그리고 불교 2명으로 구성됐다. 조선 500년 역사를 이끌어온 유학자들은 단 한 명도 없다. 민족대표들은 정부 대신 등 당시 명망 높았던 원로들을 영입하려고 접촉을 시도했지만, 유림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박영효, 윤치호 등은 때가 좋지 않다거나 병을 핑계로 3·1운동 참여를 거부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예심판사 나가시마 유조가 3·1운동 참가를 권유 받았지만 거절한 유력 인사들에게 '누가, 언제, 어떻게 권유를 했으며 왜 거절했는지'를 신문한 기록이 남아있다.
 
철종의 사위로 개화파였다가 친일파 거두가 된 박영효는 3·1운동 직전인 2월 참가 권유를 받았다. 일제 신문조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그는 다음과 같이 거절의 이유를 밝혔다. "나는 신용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여 조선에는 인물도 없고 백성들의 지혜도 진보하지 못하므로 그런 일은 성취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고, 참가하지 않겠다는 의미의 대답을 했었다"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 회장을 지낸 개화·자강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윤치호도 3·1운동 참가를 거절했다. 그는 일제 판사에게 3·1운동 참여를 권유하러 온 학생에게 '너도 참가하지 말라'고 만류했다고 진술했다. "한 의학전문학교 학생이 독립운동 가담 여부를 물으러 온 일이 있다. 그 때 나는 결코 가입하지 말라고 설유했었는데 3월 1일의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전국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운동'에는 당시 전체 인구의 10%인 약 200만 명이 참여했다. 이 중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고 스러져간 민초 독립운동가들도 다수 있었다.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과 서서히 변절한 사람들. 각자가 내린 선택은 역사의 큰 물줄기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00년 전의 오래된 역사책을 다시 들춰보는 까닭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무엇인지를 되새겨보기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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