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째 국내외를 넘나들며 오직 시각장애인 선교에 헌신해 온 부부가 있다. 한국맹인교회에서 최초로 파송한 ‘해외장애인 선교사’ 1호 이태길·노화진 선교사가 그 주인공. 지난해 여름, 불의의 사고로 말 한마디 내뱉기 힘든 상태가 된 이태길 선교사와 묵묵히 남편을 돌보며 사역을 이어가고 있는 노화진 선교사를 만났다.
 
 ▲병실에서 기도하고 있는 노화진 선교사와 이태길 선교사.ⓒ데일리굿뉴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찬양…"변함없이 선하고 신실하신 분"
 
필리핀 선교 29년째인 노화진 선교사는 지난해 여름부터 매달 한국과 필리핀을 수없이 오가고 있다. 지난달 말 만난 노 선교사는 뇌출혈로 쓰러진 이태길 선교사의 병간호를 도맡아 하고, 필리핀 시각장애인들을 섬기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지친 기색보단 평안과 감사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30여 년 전 남편과 결혼할 때 저희 부부는 아이를 낳지 않고 시각장애인 사역에 전념하기로 결심했어요. 하나님께 육체의 자녀를 포기하겠으니 영적인 자녀를 얻도록 해달라고 서원을 한 거죠. 그 결정을 후회하진 않지만 남편 곁을 한시도 떠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두고 온 선교지도 돌봐야 하니, 요즘에는 ‘자식을 낳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이태길 선교사가 재활치료를 받는 동안 잠시 짬을 낸 노화진 선교사와 병원 근처에서 만났다. ‘하루종일 병원에 계시는 거냐’는 질문에 노 선교사는 이 같이 말하며 웃음을 보였다.
 
노 선교사에게는 약 8개월 전,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년 내내 습하고 더운 필리핀 날씨가 극에 달하는 시기인 지난해 여름, 이태길 선교사는 교회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다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과로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선교 보고차 한국에 와있던 노 선교사는 소식을 듣고 급히 출국했다. 필리핀에 도착하자마자 병원 중환자실로 항했다. 수술실에서 나온 의사는 노 선교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생명만 살리자’고 했다.
 
노 선교사는 “건장한 체격에 항상 든든히 곁에 있던 남편이 쓰러지다니,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며 “두렵고 위축된 마음으로 병원에 도착했는데, 신기하게도 제 입술에선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이 흘러나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사람이 살고 죽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홀로 영광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상황에 상관없이 크고 위대하시며 언제나 선하신 분입니다.”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져 있는 남편과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병원비, 그리고 필리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면 당장 눈앞이 막막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노 선교사는 “다른 이들이 가지 않는 외로운 장애 선교의 길을 오랫동안 걸어왔고, 고난 가운데 처한 사람들과 늘상 살아왔다”며 “그 과정에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훈련이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이태길 선교사는 비행기로 한국에 긴급수송됐다. 다행히 뇌 수술은 잘 이뤄졌지만 워낙 출혈이 심하고 손상 부위가 큰 탓에 몸 오른쪽이 마비됐다. 인지능력도 크게 떨어져 때로는 본인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노 선교사는 전했다.
 
재활치료를 마치고 병실에 올라온 이태길 선교사도 이날 함께 만났다. 노화진 선교사는 “남편이 아멘과 하나님, 할렐루야와 같은 단어는 잊지 않고 잘 말한다”며 “남편의 뇌 손상이 너무 심하다고 해서 평생 식물인간으로 살아야 되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호전되는 모습에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고백했다.
 
 ▲필리핀 교회 성도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이태길·노화진 선교사.(사진제공=노화진 선교사)
 
"마지막 순간까지 필리핀 시각장애인과 함께"
 
노화진 선교사는 1977년부터 국립서울맹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다 1980년에 한국맹인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이태길 선교사와는 바로 이 한국맹인교회에서 만났다. 이 선교사에게는 형이 세 명이 있는데 모두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한국맹인교회를 찾아왔던 것.
 
시각장애인을 향한 비전을 품은 부부는 지난 1990년 ‘해외장애인 선교사 1호’로 필리핀에 파송됐다. 당시는 해외장애인 선교에 대한 인식조차 미비하던 때였다. 노 선교사 부부는 그렇게 언어도, 문화도, 환경도 전혀 다른 타지에서 지난 30여 년을 장애인 선교에 헌신했다.
 
필리핀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경우보다 중도 실명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노 선교사는 설명했다. 이는 극심한 가난 때문이다. 대부분 시각장애인들은 영양실조로 시력을 잃거나, 백내장을 앓아도 수술비가 없어서 결국 실명에 이른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벗어날 수 없는 가난 속에서 수 차례 자살을 시도하는 시각장애인들은 눈만 어두울 뿐 아니라 마음도 깊은 절망 가운데 잠긴 상태였다. 노 선교사는 “장애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있다”며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전하려고 하면 ‘당신이 나처럼 눈이 멀어봤다면 그런 말을 하겠냐’며 돌아서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이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건 ‘내 가족 중에도 시각장애인이 있다’는 말이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노 선교사 부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시각장애인들은 의료와 교육 등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선교사 부부는 시각장애인 집단 거주지역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교도소에 시각장애인 수감자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형무소 내에도 교회를 세웠다. 그렇게 29년 동안 마닐라 맹인교회, 빠딜랴 교회, 문띤루파 교도소 교회 등 8개 교회가 세워졌다.
 
노 선교사는 이태길 선교사의 상태 호전과 어려움들을 가감없이 필리핀 성도들과 나누고 있다. 그녀는 “필리핀 성도들이 그 전에는 선교사가 자신들보다 훨씬 부자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선교사도 마찬가지로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고난을 통과하는 법을 알려줘서 감사하다'고 고백하더라”며 “같이 기도하고 같이 울면서 더욱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 이것 해주세요’가 아니라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마땅히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기도를 해요. 제가 원하는 것은 당연히 남편이 치유되고 이전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지만, 세상에는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그들이 ‘하나님이 왜 좋으신 분이냐’고 우리에게 이유를 물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우리 부부를 통해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돌보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기를 바라시는 거라면 마땅히 순종할 따름입니다.”
 
이태길 선교사는 오는 9월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혹여 상태가 더 호전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노화진 선교사는 “뇌출혈은 치료 기간 1년이 지나면 병원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한다”며 “그 때까지 완벽하게 재활이 되지 않을지라도, 사랑하는 필리핀 성도들 곁으로 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남편 역시 같다”고 전했다.
 
필리핀 선교에 대한 기대 역시 버리지 않고 있다. 노 선교사는 “시각장애인들이 신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신학교가 거의 없어서 이들을 위한 성경학교를 최근 시작했다”며 “시각장애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 설립과, 구제사역, 기초생활 훈련 등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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