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의 대부 문동환 목사가 향년 98세로 지난 9일 별세했다.(사진출처 연합뉴스)

“고통 받는 민중의 삶으로 내려가는 것이야말로 구원이다.”

한평생 민초들의 곁을 지키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문동환 목사가 별세했다. 향년 98세. 故 문익환 목사의 동생이기도 한 그는 사회운동과 신학교육을 병행하며 시대를 깨우고자 했던 ‘어른’이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교수로서 민주화를 위해 저항하시다 투옥, 해직, 복직을 거듭하신 굴곡의 삶, 그러나 부드럽고 따뜻하셨던 인품”을 가졌던 사람으로 고인을 회고했다. 문 목사는 생전에 ‘살아있는 근현대 박물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해찬 대표(더불어민주당)는 “문동환 목사의 삶에는 우리 민족 100년의 역사가 담겨 있다"며 "민초들과 함께해 온 삶"이었다고 말했다. 한신대 명예교수 김경재 목사는 “성경 전체를 넓게 보면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문 목사는 그렇게 새벽을 여는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문 목사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약연 목사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목사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돕기 위해 권총 사격을 연습할 장소를 제공한 인물이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김재준 목사 설립)에 다녔던 그는 오랜 시간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놓고 고뇌에 빠졌다. 그리고 그가 얻은 결론은 ‘고통 받는 민중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확신이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문 목사는 1975년 동료 해직 교수인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등과 함께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를 마련했다. 1976년 3월 1일엔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22개월간 복역했다.

1979년 유신정권이 끝나고 한신대 교수로 복직했으나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 1985년 다시 복직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년퇴임을 한 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권유로 평화민주당에 입당해 수석부총재를 지냈고, 평화민주통일연구회 이사장으로도 활동했다. 1990년 이후부터는 주로 미국에서 성서연구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12일 한신대학교에서 진행된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은 작은 화초를 선물로 받았다. 평소 생명 사랑의 정신으로 화초 가꾸기를 즐겼던 문 목사의 뜻을 나누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가 줄기차게 주창했던 ‘생명문화공동체’는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는, 생명의 문화를 지향하는 공동체였다. 물질과 돈에 지배되는 오늘날 교회와 사회에, 그가 심어주고자 했던 ‘생명’의 가치가 샘물처럼 솟아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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