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교수 ⓒ데일리굿뉴스
저명한 수의학자이며 기독교 선교사였던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는 대한민국과 한국국민을 끝없이 사랑한 외국인이었다.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한 그는 1959년 5월 초 캐나다에서 가재를 정리하고 9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잠들어 있다. 그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발이 불편해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 때 전쟁에 참가하지 못했다. 마음에 빚을 지고 살아오던 중,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인 올리버 R. 에이비슨(영어: Oliver R. Avison, 어비신)의 초청으로 1916년 부인과 함께 우리나라에 왔다.

그는 먼 이국 땅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의 부름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응했다. 주위 사람들의 온갖 만류도 그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렇게 캐나다에서의 안정적인 삶마저 포기한 채 서울에서 제2의 삶을 살았다. 그는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의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이름에까지 새기고 불어 넣었다.

당시 미국으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윌슨의‘민족자결주의’는 동양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에 고무된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1919년 2월 8일 한국독립선언을 선포했다. 이 무렵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 옹의 부탁으로 스코필드 박사도 독립운동 준비에 동참하게 된다.

그가 맡은 일은 국제사정을 알려주는 일이었다.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민중들의 모습을 비롯한 시위자에 대한 일본 경찰의 폭력적인 만행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그는 한국인 이상으로 한국인을 사랑했으며 한국독립운동에 크나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3·1만세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영어의 몸으로 있는 유관순을 찾아가서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싸우고 또 싸웠다. 3·1독립선언서의 33인외에 또 다른 사람을 넣어야 한다면 단연 스코필드박사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3·1독립선언서는 스코필드 박사와 함께 34인이라는 말을 한사람도 있다.

1958년 한국은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경제는 피폐했으며 거리는 전쟁고아와 상이군인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부패를 척결해 민생을 안정시킬 것을 주문했다.

나아가 독재를 중지하고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건의했다. 이에 대한 이승만과 이기붕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해 10월 경향신문에 한국 국민의 환대에 감사하는 편지를 싣는다. 이 편지는 정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라는 내용이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민주당정권이 들어서자 그해 4월 28일자 Korean Republic에 3·1독립운동의 영웅적 정신을 계승한 학생들에 의해 부패하고 잔인한 전제정치가 종식됨을 환영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이 글에서 “새 정부는 정의를 구현하라. 정치적인 이익에 앞서 전체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하라. 건전하고 유능한 정부가 들어 설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한다. 구 정부에 마지못해 동조했던 사람들에 대해 복수는 절대해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했다.

다음 글은 스코필드의 아버지 프란스 스코필드가 그의 아이들에게 가훈에 가까운 교훈으로 심어 주었던 말이다. 이 말은 장성한 후 스코필드 박사의 인생관으로 자리 잡는다.

“인생에는 두 길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배려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기도의 길이다. 배려의 생활은 환경의 압박에서 자라나고, 상식을 그 인도자로 삼는다. 어떤 길을 가든 예측불허의 험난함을 각오해야하며, 항시 염려를 동반자로 삼아야한다. 기도의 생활은 사랑을 힘으로, 하나님을 인도자로, 진리를 가는 길로, 하나님의 평화를 무적의 수호로 삼는다.”

그는 임종을 며칠 앞두고 병상에서 “ 한국인이여, 부정부패와 용감하게 싸우는 한국인이 되어 다오”란 말을 한국인에게 남겼다. 이 말은 그가 조국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한국인에게 보내는 그의 간절한 기도요,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는 “내가 죽거든 한국 땅 햇볕 따사로운 터에 묻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81세를 일기로 우리 대한의 땅에서 영면했다. 그의 소원대로 그의 제2고향이자 조국인 한국 땅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묻혔다.

이제 우리는 그가 살아생전 부르짖었던 “부정부패는 한국의 공적이요, 우리 사회의 병이다”란 말을 다시 새겨 볼 때이다. 그는 풍요로운 사회보다도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더 역설했다. 부정부패와 용감하게 싸우는 국민이 되라는 스코필드박사의 말이 더욱 새롭게 다가온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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