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일 서울 곳곳에서 펄럭이던 수많은 태극기들이 언제 있었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당일에는 대대적인 행사들이 열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한풀 꺾인 모양새다. 이에 본지는 3·1운동 기념이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는 취지에서 수도권과 주요 지방의 3·1운동 유적지를 소개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겨본다.<편집자 주>

“이런 데가 있었어?” 서울 종로구 종로1각 네거리 보신각. 한 해의 마지막을 알리는 제야의 종을 울리는 장소로만 여겼지만 눈을 조금만 돌리면 숨은 의미가 보인다. ‘3·1독립운동기념터’임을 알리는 종루 앞 작은 표지석은 이곳이 3·1운동의 역사적 장소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듯 100년이 흐른 지금 서울 도심 곳곳에선 그날의 함성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현장들이 많이 있다. 100년 전 독립 열기의 함성을 느끼며 당시 흔적을 따라 걸어봤다.  
 
 ▲3·1운동 책원지였던 옛 중앙고보 숙직실터. 숙직실은 현재 ‘3·1운동기념관’으로 복원된 상태다.ⓒ데일리굿뉴스

북촌·인사동 일대, 3·1운동의 중심지

어느 때보다 맑고 따뜻했던 날씨가 한 몫을 했을 까. 100년 전 그날 가장 치열했을 장소는 너무나 평온하고 조용했다. 북촌과 인사동 일대는 그야말로 3·1운동의 중심지였다.

높은 빌딩 숲 사잇길과 북촌의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자연스레 그날의 행적을 쫓게 된다. 3·1운동을 기획했던 주요거점에서부터 3·1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하고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구간 모두 이 일대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의 의지가 담긴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같은 날 오후 탑골공원에서도 독립을 염원하는 수많은 이들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하루 전날 천도교 중앙대교당에 숨겨뒀던 2만1,000여 장의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는 시민들의 손에서 손으로 펴져나갔다.

이 같은 거사를 논의했던 주요 모의처는 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3·1운동 계획을 논의했던 천도교 중앙총부가 꼽힌다. 고요한 경복궁 돌담을 지나 골목길에 위치한 ‘덕성여자중학교’는 본래 ‘천도교 중앙총부’가 있던 자리였다. 지금은 그 때의 흔적은 없고 ‘각계의 3·1운동 통합 논의에서 중심이 됐던 장소’라 적힌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3·1운동 책원지였던 옛 중앙고보 숙직실터는 그나마 흔적이 남아있었다. 숙직실은 현재 ‘3·1운동기념관’으로 복원된 상태였다. 다만 계동길 끄트머리 언덕 위에서도 중앙고등학교 한 켠에 자리하고 있어 찾기까지 주변을 한참 헤매야 했다.
 
 ▲승동교회 전경. 교회 1층 기도실에서 학생단이 모임을 가졌다.ⓒ데일리굿뉴스

만세운동 여정 길, 보성사-승동교회-탑골공원  
 

본격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던 여정은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우뚝 선 회화나무 앞에서 시작한다. 이는 1919년 2월 27일 조판을 끝낸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한 ‘보성사’가 있던 자리다. 2층짜리 근대식 벽돌건물로 지은 보성사는 3·1운동 당시 일제가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 지금은 보성사 바로 옆에 있던 회화나무 한 그루만이 살아 있는 표식이 돼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15분쯤 걸어 인사동 거리로 접어드는 초입에는 학생단 독립운동의 거점이던 승동교회가 있다. 당시 학생 모임을 주도한 것은 승동교회에 다니던 김원벽이었다. 승동교회 조성민 부목사는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도 학생들은 1층에 있는 기도실에 모여 3·1운동의 구체적 실천계획을 논의했다”며 “당시 차상진 목사를 비롯 교인들은 열린 마음으로 이들을 적극 후원하면서 마음을 함께 모았다.3·1운동의 뒤에는 이처럼 나라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섬긴 교회들의 헌신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전했다.

학생들은 승동교회에서 만세시위에 앞서 조직체계를 정비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의 역할을 분담했다. 이렇게 해서 전개된 3·1만세운동은 승동교회 근처인 탑골공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탑골공원에서 보신각 광장과 덕수궁 대한문까지 시가행진을 펼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3·1만세운동의 출발지답게 탑골공원 중심에는 3·1운동 부조물과 3·1독립선언기념탑,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과 한용운 기념비가 놓여있었다. 역사를 상징하는 구조물들 앞에 몇몇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응시하기도 했다. 김 모(72)씨는 “잊고 살았는데…이렇게 보니 선조들의 애국정신이 전해진다”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서울에만 151곳에 달하는 독립운동 사적지가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표석만 있을 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인사동거리를 중심으로 3·1운동 주요거점을 돌아보는 데 넉넉히 반나절이 걸렸다. 100년 전 그날의 흔적을 쫓아 걷다 보면,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작은 경종을 울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태화관 터(왼쪽 사진)와 보성사 터(오른쪽 사진).ⓒ데일리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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