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우리 주변의 선한 이웃과 가슴 따뜻한 삶의 현장을 소개하는 <굿-뉴스>를 연재한다. 이 땅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선한 행적을 통해 아름다운 사회가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한국 사회가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정신보건 자문관 수잔 오코너 박사는 몇 해 전 "한국 사회엔 높은 수준의 정신적 고통을 시사하는 지표가 많다"며 "(이런 지표는)정신과 진찰이나 치료를 받지 못하는 정신적 고통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정신과 병원에 대한 터부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오랜 편견으로부터 정신건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흰 가운을 벗어던지고 거리에 나선 의사가 있다. 단 한 명의 내담자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늘도 흰색 트럭을 몰고 거리로 나선 '정신 나간 정신과 의사'. 정신건강의학과 임재영 전문의를 직접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신건강의학 임재영 전문의 ⓒ데일리굿뉴스
마음의 묵은 때 밀어드립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중략)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아는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에서
 
보통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병원을 찾는 게 의례다. 심지어 사소한 증상에도 바로 병원을 찾는 건강염려증 환자가 있을 정도다. 그런데 마음이 아플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선뜻 병원을 찾기 어렵다는 게 공통된 목소리다. 정신병자라는 꼬리표 때문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임재영 전문의가 만난 환자들도 그랬다. 마음이 아팠지만 선뜻 병원을 찾지 못했다. 환자 대부분이 곪디 곪은 상처가 터진 후에야 그를 마주했다. 임 전문의는 그런 환자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그저 두고 볼 수만 없었다.
 
2016년 3월,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호기롭게 의사 가운을 벗어 던졌다. 사재를 털어 흰색 트럭을 장만했다. 트럭 외부와 내부도 아기자기 편안한 느낌으로 꾸몄다. 이름하여 '찾아가는 고민상담소', 이동식 무료 상담 트럭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뜻은 좋았으니 알아줄 사람이 분명 있을 거다"라는 기대는 빗나갔다. 일주일에 며칠이고 트럭을 끌고 거리에 나섰지만 허탕 친 날이 더 많았다. 다들 관심은 보였지만, 트럭 문턱을 넘진 않았다. 트럭을 다시 팔아야 하나 고민할 때쯤 의왕시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담자들이 트럭을 찾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임 전문의에게 마음의 위로를 받은 내담자는 600여 명이 넘는다. 사소한 고민부터 당장 입원 치료가 시급하거나 자살위험이 높은 내담자까지, 찾는 이도 다양했다. 그러나 1시간의 상담 후, 모두 반응은 같았다. "끝까지 들어줘서 고맙다" 심지어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꺼낸 건 처음"이라는 내담자도 있었다. 
 
"가족, 친구, 동료 다 있는데 결국에는 말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우리 엄마는 내가 이런 이야기 하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잘 거야. 반대로 엄마한테 이야기해봤자 잔소리하고 야단만 칠 거야. 친구한테 하려니 쟤도 힘들어 보이는데. 내가 더 힘들게 하면 미안해서 안 된다는 마음이 큰 거예요."
 
 ▲임재영 전문의는 매주 목요일마다 무료 상담 트럭을 통해 내담자들을 만나고 있다. 사진은 '찾아가는 마음충전소' 상담 트럭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임 전문의 모습 ⓒ데일리굿뉴스

마음의 병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임 전문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에게도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지난해 1월 둘째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동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힘들었다. 경제적인 상황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아이를 돌봐야 했다. 때마침 근무하던 병원에서 연락이 와 복직을 하게 됐다. 병원장의 배려로 상담 트럭도 매주 목요일마다 나갈 수 있었다.
 
임 전문의는 현재 병원과 상담 트럭 외에도 청소년상담복지센터 자문의, 경찰서 청소년선도심사위원회 및 청소년선도프로그램 담당의, 교육청 특수교육운영위원회 등 사회적인 공헌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지난해에는 저서 <인생이 적성에 안 맞는걸요>를 출간하기도 했다. 인세는 아들과 같은 병을 가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전액 기부할 예정이다.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을 위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임 전문의. 그는 지금도 어디선가 홀로 마음 아파할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넸다.
 
"세상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가족 중에 친구 중에 동료 중에 없더라도 당신의 마음 알아주고 당신의 마음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아직 얼굴 한번 마주하지 않은 사람 중에 당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도움을 청하고 손을 내미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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