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류문명은 기록문화를 통해 발전해왔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고대 기록물들은 점토나 거북 등껍질을 비롯해 파피루스와 같은 갈대 잎, 양의 가죽으로 된 양피지에 담겨졌다.
 
 ▲국내 최대인쇄기업이자 107년 인쇄한길의 보진재가 올해를 마지막으로 인쇄업을 접게 됐다. (출처=보진재 홈페이지)

이후 중국 후한 때인 서기 105년 채륜이 종이를 발명한 이후 보다 쉽게 문자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됐다. 처음 일일이 손으로 직접 글을 써야 했던 기록의 역사는 인쇄술이 도입되면서 목판인쇄로 도약했고,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활판인쇄시대를 맞게 됐다.

인류의 인쇄기술은 활판인쇄를 거쳐 레터프레스, 오프셋인쇄 등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했다.인류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인쇄술이 21세기 멀티미디어 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쇠락의 길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불과 30여년 전만해도 호황을 누렸던 인쇄업은 사양산업의 대표적인 업종이 됐다.

10년 연속 적자 누적 경영 악화

최근 우리나라 또 다른 대표적 인쇄기업이 올해를 끝으로 인쇄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1912년 창업된 현존 국내 인쇄기업 중 가장 오랜 역사의 보진재 (寶晉齋, 대표 김정선)가 인쇄역사에서 조만간 사라지게 된 것이다.

11월말부터 신규 수주를 중단하고 기존에 미처리된 물량만 마무리된다면 보진재의 인쇄기계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게 된다.

보진재가 107년 4대를 이어온 인쇄 한 길을 멈추고 쉼 없이 돌아가던 인쇄기계를 멈추게 하려는 배경에는 인쇄업의 오랜 불황에 따른 지속적인 적자 누적의 영향이 크다. 실제 보진재는 올해 상
반기 매출이 46억 원이지만 영업적자는 4억 원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는 82억 원의 매출에 영업 손실이 9억 원에 달했다. 거기에다 지난 2009년부터 10년 연속으로 누적되던 적자의 무게를 더 이상 감당하기에는 버겁다는 한계치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보진재는 일제에 의해 우리민족의 주권을 빼앗겼을 무렵인 1912년 8월 15일 서울 종로에서 처음 인쇄기를 돌리면서 우리 인쇄사에서 첫 선을 보였다. ‘보진재’라는 이름은 중국 북송의 서화가였
던 미불의 서재 이름에서 따왔다.

세계 성경의 30% 인쇄
 
창업주 김진환 선생은 현재 광화문 우체국 옆 골목에 ‘보진재 석판인쇄소’를 열었고 첫 인쇄물인 보성고보 졸업증서와 한글 연습용 ‘언문서첩’을 발행했다.

또 당시의 유명잡지인 <조광> <춘추> <문장> <삼천리> 등도 이곳에서 찍었다. 당시 단색 인쇄물의 돌출 활판인쇄와 달리 컬러 인쇄가 가능했던 유일한 석판인쇄소라는 점에서 물량이 몰리는 호황을 누렸다.

1924년에는 우리나라 민간기업 최초로 오프셋인쇄기기를 도입한 인쇄사라는 기록도 세웠다. 1933년에는 국내 최초 크리스마스 씰도 찍었다.

보진재는 또 1960~1970년대에 들어서는 철수와 영희, 바둑이로 기성세대의 어린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국민학교(초등학교) 교과서도 인쇄했다. 1970년대부터는 대학입학 예비교사 문제지도 인쇄할 만큼 인쇄영역을 넓혔다.

보진재의 인쇄영역에는 한국 기독교도 포함돼 있다. 박엽지(얇은 종이)인쇄 기술이 뛰어난 인쇄소의 장점 때문에 성경 인쇄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때 국내를 넘어 전 세계 성경의 30%에 이르는 인쇄물량을 소화할 정도로 명성을 날렸다.

국내 대표적 인쇄사로 이름을 알린 만큼 1996년 인쇄업계 최초로 코스닥시장에 상장하는 기록도 남겼다.

고질적 인쇄불황·출혈경쟁 심각

그럼에도 장기인쇄불황과 전자책과 페이퍼리스의 영향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종이책 수요는 국내 굴지의 인쇄기업도 버틸 수 없는 환경에 이르도록 했다.

거기에다 인쇄에 필요한 다른 제작비용은 매년 오르지만 제자리걸음에 머무르고 있는 인쇄단가, 중국 등 해외에서 저가로 대량인쇄물을 들여오는 제살 깎아 먹기의 인쇄업체들의 출혈경쟁도 우리 인쇄사의 산 증인을 결국 인쇄산업에서 몰아낸 결과를 낳고 말았다.

보진재의 폐업소식은 인쇄출판업계 관계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활판인쇄 전문 활판공방 박한수 대표는 “보진재의 성경인쇄 물량을 싼 값의 중국에 거의 빼앗겨버렸다”면서 정부의 인쇄정책 부재와 인쇄인들의 근시안적 안목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보진재의 폐업을 지켜보는 인쇄인들 역시 더 이상 위기의 국내 인쇄산업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면서 인쇄산업의 보호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대안마련이 절실하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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