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기호와 판단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회색지대가 사라지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빈부 격차의 심화로 인한 중산층의 축소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행정,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양극단의 입장에 힘이 쏠리고 있다.
 
 ▲이영훈 목사 ⓒ데일리굿뉴스

회색지대가 사라지면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분명하게 드러나리라 기대한 사람들도 일부 있었지만, 드러난 현실의 모습은 정반대의 모습이다. 극심한 분쟁으로 인해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사회 전체가 정체되었고, 일부 영역에서 심지어 퇴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양 극단의 세력들이 승자독식의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한다. 그야말로 사활을 건 전쟁인 것이다.

이제 교회도 더는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아무런 편도 정하지 못하고 가운데 서서 우왕좌왕하고 있으면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도태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교회는 하루빨리 분명한 편을 정하고 전력으로 그 방향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선택해야 할 편은 어느 쪽인가? 사실 이러한 질문은 우문(愚問)이다. 교회는 태생적으로 편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편이란 ‘좌냐 우냐’, ‘부냐 빈이냐’ 하는 식의 세상의 편 가르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어둠에 있던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빛으로 옮겨진 자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당연히 빛의 편에 서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빛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가장 우선하여 ‘빛이냐 아니면 어둠이냐’라는 질문부터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보다 앞서 ‘이익이야 손해냐’라는 질문부터 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빛의 편에 선다는 것은 세상의 이권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마땅히 빛의 편에 서서 설령 손해를 보고 세간의 평판이 나빠지더라도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초대 기독교 시대에 바울은 세상으로부터, 심지어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들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따라갔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선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고난받음을 자랑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고 권면한다. 이 권면은 디모데에게 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회색지대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교회는 빛으로 완전히 돌아서야 한다. 그 과정에 고난의 시간을 겪을 수도 있다. 아니 분명히 거센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고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빛의 자리에 거해야 한다. 세상의 극렬한 대립의 물결 속에서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교회는 조타수가 없는 배처럼 세속의 물결을 따라 흔들리다게 된다. 그리고 그 결국 욕심의 바다 속에 좌초되어 버릴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마틴 루터와 같은 단호한 심정으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붙잡고 나아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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