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SKY' 의대 출신의 세브란스 병원 전공의 및 전임의. 많은 사람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이다. 그러나 의사라는 타이틀과 안정된 삶을 내려놓고 아프리카 오지로 떠난 이가 있다.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그중에서도 세계 최빈국 마다가스카르를 '생명의 땅'으로 일구는 이재훈 의료선교사가 그 주인공이다. 길 위에서 보낸 지 어느덧 14년, 지난해에는 오지 이동 진료 100회를 맞기도 했다. 이제는 '부시맨 닥터', '길 위의 닥터'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재훈 선교사를 서울 강남 소망교회에서 만났다.

 
 ▲본지와 인터뷰 중인 이재훈 의료선교사 ⓒ데일리굿뉴스
하나님과의 약속에서 시작된 의료선교
 
이재훈 의료선교사(52)가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된 건 네 살 무렵이다. 동네 형을 따라 교회에 갔던 게 계기가 돼 집안에서 유일하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이 선교사였다.
 
하루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라는 말씀을 읽고 가족을 전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번째 전도 대상은 제일 만만한 남동생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동생이 '형 같은 사람이 교회 다니면 나는 평생 죽어도 안 다녀'라는 거예요.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과거 동생에게 상처 준 일들이 떠올랐어요. 무엇보다 이런 저로 인해 우리 집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제 믿음이 가짜였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이때부터였다. 믿음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다. 당시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새벽기도를 비롯해 산기도, 철야기도 등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일 성경을 읽고 십일조도 잊지 않았다. 심지어 부흥회를 다니며 안수기도를 받기도 했다.
 
절망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노력에도 아무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속에 여전히 자리 잡은 죄에 대한 갈등이 이 선교사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대로 가짜로 살 수는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최후의 방법밖에 없었다. 바로 하나님과의 일종의 '딜'이었다.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떠올랐어요. 당시만 해도 아프리카라고 하면 '식인종의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거든요. 어린 나이에 아프리카 선교사 정도는 돼야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인정받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그래서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기로 했어요."
 
잘하면 될 것 같다는 소망이 생겼다. 소망을 이루기 위해선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 했다. 학생 신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였고, 당시 성적이 우수하면 법대와 의대 진학이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렇게 이 선교사는 아프리카 의료선교사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 선교사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위장, 간, 대장 갑상선, 소아외과 등 여러 분야의 전임과정을 거쳤다. 앞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안정적인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선교사는 세상의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아프리카 오지로 향했다.
 
"좋은 환경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들어요. 그런데 사실 큰 희생을 한 것도, 큰 걸 포기한 것도 아니에요. 한국에서의 의사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리 편안한 삶은 아니 거든요. 더군다나 제가 아프리카에 가기로 한 건 제 구원에 대한 하나님과의 오랜 약속이었어요.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죠."
 
 ▲이재훈 의료선교사가 마다가스카르 북서부 베살람피시의 오지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사진제공=주마다가스카르 한국대사관)

절망에서 희망으로…한 사람이 바꾼 미래
 

아프리카 남동쪽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마다가스카르. 아프리카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영국에서 신학을 하던 이재훈·박재연 선교사 부부에게 마다가스카르를 향한 부르심은 강렬했다. 하나님의 여러 사인과 인도하심 속에 이 선교사 부부뿐 아니라 아이들까지 마다가스카르를 품게 됐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던 선교지에 왔는데 이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법적 라이센스가 없어 환자를 볼 수 없었고, 불어를 못 한다는 이유로 강의를 나가는 것조차 허락이 안 됐다. 
 
"라이센스를 받는 과정부터 외국인 의사가 진료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나갔어요.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법조문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계속 뒤집어지는 과정을 반복했죠. 덕분에 이제는 외국인 의사도 마다가스카르에서 임시면허증을 받아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도록 세팅이 돼 있어요."
 
시스템이 구축됐지만 문제는 첩첩산중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의료진과 병원, 열악한 의료 환경 등으로 수많은 말라가시(마다가스카르 원주민)가 평생 의사 한번 만나지 못하고 죽어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했다. 이 선교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168㎢에 의사 188명이 있는데 이 중 90%가 전문의일 가능성이 높다"며 "반면 마다가스카르는 168㎢에 의사 1명이 있는데, 그 의사도 의대를 막 졸업한 일반의일 가능성이 96%"라고 말했다. 
 
"오지를 다니며 환자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외과적 처치가 필요한 환자들이 너무 많이 쌓여있는 거예요. 의사를 만나기 위해 멀게는 수백 킬로를 걸어오는 환자들을 보며 이대론 안 되겠더라고요. 의사를 데리고 가서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는지 보여주고 이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만든 게 이동진료팀이에요."
 
그렇다 보니 유독 기억에 남는 환자가 많다. 이 선교사는 특히 최근 기억이 가장 선명하다며 수십 년 동안 방광이 점점 자라서 만삭의 배를 갖고 살아온 환자와 배 속에 있는 장기가 고환으로 다 빠져나와 무릎까지 커지면서 20년 넘게 허리를 못 편 환자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도구 하나 제대로 구비되지 못한 열악한 환경에서 시작한 오지 이동진료는 올해 10월까지 112회 진행됐고, 마다가스카르 19개 지역 중 16개 지역을 방문했다. 나머지 3개 지역도 한 곳은 굉장한 부촌으로 현대식 병원이 있었고, 2개 지역은 도로가 없어 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 선교사는 지난해 이동진료 100회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마다가스카르 정부로부터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이 선교사와 의료팀이 진행해 온 이동진료가 그동안 최소한의 의료혜택도 받지 못한 자국민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의료가 한 나라의 의료체계를 변화시킨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의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선교사는 "외과 수술 면에서 약 20가지 수술 기법을 배우고 진단명에서는 100~150가지만 잘 배워도 약 90%의 진료를 볼 수 있다"며 마다가스카르처럼 고통받는 많은 나라에 전할 수 있도록 오지통합의료전문의를 양성하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아프리카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니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하지만 여러 사람의 힘이 모이면 의외로 일이 빨리 끝날 수 있어요. 그리고 절망이 희망으로 변할 수 있어요. 혹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마다가스카르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기도해주시고,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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