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전쟁 전중후 좌우 이념 대립 극심
전쟁 2달內 전교인 생매장·수장당해
순교자들의 피…지역 복음화로 꽃피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민족상잔의 비극 속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건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전쟁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신앙을 키워온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에 소재한 야월교회는 한국전쟁이 있던 해 전교인 순교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게 된다. 세계 어느 곳을 찾아봐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전교인이 희생당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야월교회 기독교인순교기념관 한편에는 "용서하지만 그때 끔찍했던 사건은 잊지 말자"는 한 성도의 기도가 적혀 있다.(ⓒ데일리굿뉴스)

죽음 앞 순교자의 믿음은 소금처럼 반짝였다

7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반짝이는 염전이 펼쳐진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은 ‘소금밭 천지’라고 불린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70년 전한국전쟁 당시 염산면 지역 교인들의 피가 뿌려진 곳이다.

야월교회는 1908년 4월 유진벨 선교사와 염산면 야월리 지역 교인들로 인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갖은 핍박 속에서도 성도들은 신앙을 잘 지켜나갔다.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전쟁의 피바람이 영광을 덮쳤다.

북한 공산군의 일개 부대가 후방 교란작전을 펼쳤고 남로당 김삼룡의 부대는 지역 주민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영광군 지역은 이념 갈등이 가장 치열한 곳이었다. 군인뿐만 아니라 주민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심했다.

야월교회 성도들은 1950년 9월 말부터 11월초까지 약 두 달 동안 교인 모두가 순교하게 된다. 5명은 목에 돌을 멘 채로 수장을 당하고 나머지 60명은 생매장당했다. 1km 정도 떨어진 ‘큰북재’란 곳으로 끌려가 자신이 묻히게 될 땅을 파야만 했다. 끌려간 가족들은 굴비 엮듯이 엮여 생매장을 당했다. 살아 나오려는 사람들은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당시 9살 어린아이던 최종한 장로(80)는 끔찍했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최 장로는 “그때 우리 가정이 예수를 믿지 않고 유교 사상이 투철했기 때문에 우리 아버님이 인민군에 끌려가 인민재판 후 죽지 않고 살았다”며 “6.25 전쟁을 생각만 하면 아직도 끔직하다”고 회상했다.

예수 믿어 망한 동네…다시 신앙의 꽃 피우다

순교 이후 야월도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한명도 남지 않게 된다. 전 교인이 목숨을 잃게 되자 마을에는 ‘예수를 믿고 망한 동네’란 인식이퍼졌다. 교회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도 뚝 끊겼다. 살아남은 교인도 없었기 때문에 순교 당시의 흔적을 더듬어 가기도 어려웠다.

담당 교역자가 부재중인 가운데 인근 염산교회 청년들이 건너와 아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쉽지 않았다. 예수 믿다가 온 가족을 다죽일 셈이냐는 어른들의 구박에 아이들은 교회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1988년 배길양 목사가 부임하고 나서야 38년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쫓게 됐다. 배 목사는 순교자들의 명단을 확정하기 위해 면사무소를 찾아갔다가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된다. 순교자들이 40년이 다 돼가도 사망신고가 되지 않은 채 서류상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교회가 전소되고 일가족이 몰살당하다 보니까 누구 한 사람 사망신고를 해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야월교회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현재 야월도에는 280여 세대가 있는데 그 중 100여 세대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약 35%의 지역 복음화가 이뤄졌다. 순교한 야월교회 모든 성도들은 염산의 명물 소금처럼 이 지역에 녹아 들어 복음의 터를 닦았다.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독교인순교기념관에는 ‘맞잡은 손’이란 조형물이 있다. 순교의 아픈 상처를 담은 손과 하나님의 손이 만나 용서와 화해로 나아간단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야월교회 심재태 담임목사는 “순교자들이 보여줬던 순교신앙을 되새겨야 할 때”라며 “그때 당시순교자들의 신앙을 돌아봄으로써 우리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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