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현상’의 사회학

 
 ▲정재영 교수 ⓒ데일리굿뉴스
30대의 이준석 후보가 제1야당의 당대표로 선출돼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데이비드 캐머런이 38세의 나이로 영국 보수당 당수로 선출됐을 때만 해도 외국이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치부했다. 그 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30대 총리나 대통령이 나왔을 때도 우리나라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났다. 장유유서와 연공서열이 아직도 엄존하는 현실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2030의 반란’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대선을 앞둔 특별한 시점과 보수의 ‘전략적 감각’이 특별하게 되살아났다는 점이고 따라서 일반적인 현상으로 볼 수 없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 일 후에 국민의힘에는 2030 세대의 입당 행렬이 줄을 이었고, 여당은 한순간에 ‘꼰대 정당’의 이미지를 뒤집어쓰며 수세에 몰려 당황하고 있다. 급기야 대통령은 1996년생 ‘여대생’(비하의 뜻이 아님)을 청년비서관으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공정성 시비를 불러일으키며 일부 청년들의 불만을 사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야말로 상상하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고 온 사회가 이른바 ‘이준석 현상’에 화들짝 놀라며 대책을 마련하기에 부심하고 있다.
 
사실 되돌아보면 이러한 징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그 단초가 드러났었다. 선거 초반만 해도 여당 후보와 야당 후보가 대등했었고 미세하게나마 여당이 유리한 부분도 있었지만, LH 투기 사건과 관련해서 민심이 변하더니 오세훈 후보의 압승으로 선거가 끝났다.
 
당시에 2030세대 대부분이 ‘보수’ 정당 후보에 표를 던졌다. 60대가 보수에 투표한 것보다 많은 비율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젊은 층은 진보정권을 지지한다는 하는 생각을 단순한 선입견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보수화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오염수 방류 결정을 내린 일본에 대해 분노하고,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는 램지어에 대해 항의한다.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는 미얀마 군부독재를 반대하고, 홍콩에 대한 중국의 폭력에 대해 숨막혀 한다.
 
이렇게 세계시민으로서의 의식을 나타낸 이들이 ‘보수’에 투표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기성세대의 진영 논리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상황과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삶을 존중해달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이다.
 
초고령화 되는 교회
 
그런데 교회는 점점 더 고령화되고 있다. 전체 인구 중에서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7%면 고령화 사회, 14%는 고령 사회, 20%%는 초고령 사회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 전체 인구로는 고령 인구가 15.7%로 고령사회 단계이다.
 
개신교 신자 수 기준으로는 전체 인구와 큰 차이가 없지만 교회 출석 신자를 기준으로 하면 고령화가 더 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젊은 층에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 성도다 더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 개신교인이 아닌 교회 출석하는 교인들을 기준으로 삼으면 개교회 안에서는 고령 인구가 20%에 육박하거나 초과할 수도 있다.
 
교회를 떠난 청년은 이미 너무나 많다. 2018년 ‘학원복음화협의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개신교 대학생 10명 중 3명은 교회를 떠났다. 교회는 자신들의 문제나 어려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고 헌신하기만을 요구한다. 취업이나 생계 문제는 알아서 잘 해결하고 교회에 와서는 신앙 얘기만 하라고 한다.
 
올해 발표한 ‘기독청년 의식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열심히 다녀도 자신들의 삶이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도 갖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교회는 더욱 보수화되고 배타성이 강해져서 교회 안에 있는 것을 답답하게 여긴다. 젊은이들 사이에 더 이상 교회에 다니기 어렵다는 생각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이다.
 
교회에서 젊은이들은 너무 어린 존재들이다. 주요 의사 결정을 하는 장로와 중직자들은 예순을 훌쩍 넘은 어르신들이다. 고령사회이니 고령 인구가 많은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젊은이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관점에서 교회와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들이 젊었던 30~40년 전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젊은이들을 판단한다.
 
교회에서 다음 세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전이지만 다음 세대는 언제는 다음 순위일 뿐이다.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면 청년과 청소년들이 소중하지만, 이들은 나이가 어릴 뿐만 아니라 헌금도 잘 내지 않고 성경도 열심히 읽지 않고 예배와 집회에도 잘 참석하지 않아서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돼 있고 발언권도 갖지 못한다.
 
설령 발언권을 준다 해도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자리에 끼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욱 큰 문제는 이미 많은 교회에서 청년부를 운영하기 어려울 정도로 청년들의 수가 줄어들었고 이대로 가면 20~30년 안에 한국교회의 교세는 거의 절반 수준으로 약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온전한 공동체가 되려면
 
청년들이 줄어들면 교회의 미래는 더욱 어둡다. 가족종교화 현상이 가속화돼 기독교 가정의 청년들이 교회 청년들의 다수를 차지하고 교회 밖의 청년들을 전도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기성세대가 물러난 이후에는 교회를 이끌어갈 주역들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연령층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약자라고 해서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해서 소홀히 여겨지면 안 된다. 교회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없이 하나 되는 공동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청년들의 눈높이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기성세대의 관점과 경험을 가지고 독단적으로 이야기하거나 윽박지르지 말고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들이 가진 생각이 무엇인지 이들의 고통과 어려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들의 절실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설령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더라도 이것을 이들 개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말고 기성세대의 공동 책임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켜켜이 쌓인 잘못된 관행과 부정의한 것들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함께 고쳐나갈 수 있도록 생각과 힘을 모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 운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청년들을 교회 사역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 단순히 교회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주체가 되도록 하고 청년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제도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의사 결정 과정에도 참여 기회를 줘야 한다. 신앙의 본질을 고수하면서도 지금 이 시대에 요즘 세대들에게 적실성 있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하고 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은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대해서 교회가 적절하게 대응하며 보다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방법일 것이다.
 

[정재영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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