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한국 본부 사역자로 선교지를 방문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교단선교부 총무시절 교단 선교사 한 분이 러시아 이르쿠츠크시의 한 개신교회 목사와 동역하고 있어,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정국 선교사ⓒ데일리굿뉴스

하루는 어느 곳을 가다가 차 운전을 하는 목사님께 “어떻게 목사가 되셨는가?”라고 물었더니, 자신은 정교회 신도였는데 젊은 시절 개신교로 개종하고 런던에 신학 유학해 개신교 목사가 됐다라고 했다.
 
나는 “나중에 우리가 천국가면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을 좀 만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더니, 그 분은 씩 웃으면서 “아마 많은 정교회 신자들을 만나 보게 될 겁니다”라고 하여 놀랍기도 하고, 그 이유를 묻자 “예수 고백에 관한 교리가 우선 같고, 구원의 확신이 정교회 성도에겐 좀 부족하지만, 주 예수를 믿는 그들은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라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 저의 은사 전호진 박사가 정교회 교리를 연구한 뒤, “개신교와 정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 훨씬 가까운 편이다”라고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러시아선교의 허와 실
 
1980년대 말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러시아가 선교에 개방됐을 때 한인선교사들은 모스크바에 물밀 듯이 입성했다. 심지어 한국의 인기 강사 조용기 목사를 초청, 붉은 광장에서 대형 전도 집회를 거행했다. 단상에 선 조용기 목사는 십자가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좋았는데 그만 실언하고 말았다.
 
러시아 정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한 것이 러시아 기독 사회에 큰 반발을 초래했다. 아마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한 오순절 선교사의 그릇된 정보 또는 편견에 찬 오만한 정보가 그의 판단을 흐리게 했을 것이다.
 
1995년 모스크바에만 한국인 선교사가 설립 운영하는 신학교가 5개였고, 5년 후 2000년에는 10개가 됐다고 두 차례 방문한 전호진 목사가 한탄한 바 있다. “한 목사, 그래도 내가 신학교에 전문가인데, 한인선교사들이 신학교 운영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애. 아니 중복 투자도 심각할 걸. 한 교단에서 나온 두 선교사가 따로 신학교를 설립 운영하니 나 원 참”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2010년 쯤 러시아를 방문한 바 있다. 그 10개 신학교의 대부분이 문을 닫고 오직 2개만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그 2개마저 잘 운영되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씁쓸해진다. 신학을 하는 이들의 속 좁은 마음과 독선이 무섭다.
 
2년 전 연해주 수도인 하바롭스크를 방문해 선교사 전체를 초청, 저녁을 함께 한 바 있다. 4개 신학교가 있었던 곳 이었다. 15년 된 한 선교사가 나에게 “그 4개 신학교가 다 사라졌어요. 한인선교사가 지나간 자리에 흔적이 전혀 없다”면서 혀를 찼다. 무슨 확신이 그들에게 신학교를 세우도록 했고, 무슨 일로 쉽게 이를 포기했는가?
 
예수교회 또는 우리교단교회?
 
선교지마다 한인선교사들은 많은 장학금 또는 용돈까지 주면서 현지인들을 키우고 있다. 그들이 삯꾼이 되기를 바라는 선교사는 한 명도 없으리라. 그러나 그 운영 방식을 보면 이 가운데 많은 삯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선교역사적인 면에서 즉 comity(예의와 양보 정신)제도로 인해, 지역 분할로 인해 감리교단은 선교사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전담지역에 집중 선교해 그 지역에는 감리교단 교회가 열심히 사역한 결과 지금은 큰 교회가 많다. 말레이시아가 그런 경우로 그곳엔 큰 김리교회가 많다.
 
화융 목사는 세계가 인정하는 감리교 목회자이다. 그러나 후에 들어간 한인선교사들은 역사의 이런 아름다운 예의와 양보에 따라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버리고 그들의 신학교를 세우고, 신학생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며, 그들이 졸업해 그들의 교단 교회를 세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예수의 교회를 심는 예수 선교사라기보다 교단선교사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나 속 좁게 살아왔다. 아니 갈기갈기 나눠져서 신학교에서 교수들에게 그렇게 배워왔다. 무엇이 같은지를 깊이 연구 않고, 조그만 교리라도 다르니 서로 교류를 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100여 개 넘고 있는데서 나온 한 장로교 목사선교사로서 내가 속한 교단의 파란만장한 이합 집단을 보면서 나는 선교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해본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고, 역사적으로 생성된 수많은 기독교 형식을 참조하되, 그들 현지 기독교인에 적합한 기독교를 만들도록 해아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찰스 크레프트는 이것을 ‘적합한 기독교’라고 명명한바 있다.
 
우리는 한 그리스도, 한 믿음, 한 세례, 한 성령을 믿는다. 다만 다양한 문화의 옷을 입은 여러 기독교의 모습을 갖고 한 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계7:9-10의 그림이 이런 우리 기독교회의 참모습일 것이다.
 
“이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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